숲에 발을 들이다 2편

내 삶의 첫 번째 전환점이 기억난다. 엄마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생각이 멈춰버린 그때. 지금 내 삶의 세 번째 전환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김정윤, 그리고 나머지 셋 모두가 나를 쳐다본다.
제일 먼저 말을 여는 건 의외로 정윤이다. "야, 부영이? 뜬금없이 그런 소리가 왜 나와? 네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면 뭔데?"
정윤이… 정윤이라면 내 비밀을 믿고 맡길 수 있겠지. "김정윤. 알잖아, 나 쓸데 없는 구라 안 까는 거. 10년 동안이나 숨겨와서 미안한데, 그래도 너면 믿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아니, 진짜, 진짜… 한 번도 그런 티 낸 적 없잖아. 그럼 너한테 대체 뭐가 있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뭐 마법 같은 걸 써왔나? 아니면 사실 동물하고 대화할 수 있는 건가?"
그래. 제비꽃인지 뭔지 얘기를 좀 더 들으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

"정윤아. 어릴 때 나 처음 봤을 때 어떤 느낌 들었어?"
"조용하고, 거리감 있다?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럼, 넌 어쩌다가 나한테 다가왔어?"
정윤이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대답한다. "…뭐, 별 생각 없었을 걸- 아니, 그보다 얘는 왜 갑자기 이런 딴소리나 하고 앉아 있어?"
"네가 내 첫 번째 친구인 거, 그거 있지, 그래서 그랬던 거야. 진짜 일관적으로 별다른 생각 없이 나랑 친해지고 싶다고만 생각한 그거."
정윤이가 애매한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말을 잇는다.
"정윤이 너랑 별 일 다 겪으면서 배운 게 있어. 사람 마음이 나쁜 마음을 품는다고 꼭 그 사람이 나쁘진 않단 거."
정윤이는 이후로 이어지는 자기와의 경험담을 듣더니 내 얘기의 본뜻을 깨달은 듯, 잡념을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며 말한다. "…그래? 대충 알 거는 같으니까, 계속 말해 봐."
"정윤이 네가 중1 때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 잔 거… 시험 조지고 부모님이랑 싸워서 그랬단 거 알고는 있었어. 미안. 마음을 알아도 대놓고 아는 척 하면 어떻게 봐도 수상하니까… 오히려 더 모르는 척 하게 되나 봐."
"됐어. 힘들 때 편하게 옆에 있어주는 걸로도 충분히 위로 되는데 뭘." 이건 정윤이가 직접 말하는 건지, 그냥 속으로 말해주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정윤이 네가 영일이 몇 년째 좋아하는 것도 알고."
정윤이 얼굴이 티나게 붉어진다. "으아! 아니, 그거까지? 진짜 다 아는 거야? 어디부터?"

"그건 나중에 천천히 말하고, 이젠 대충 내가 뭐- 어떤 건지는 알겠지? 그니까, 점심시간에 이유봉 너 본 거는 진짜 우연이긴 해. 수상하게 여기고 쫓아온 건 내 이… 이거 때문이었고."
"재수 한 번 뒤지게 없네… 그래서, 너 우리한테서 뭘 들었길래 갑자기 이렇게 철저히 숨겨 오던 걸 갑자기 밝혀? 듣고 대답해줄 테니까 말해 봐. 그리고 시발, 나 이제 좀 놓아 주고. 어차피 우리 속마음 다 들었을 거 아니야, 도망가도 의미 없어. 편하게 좀 말하자!"
아, 대화에 정신이 팔려서 아직도 이유봉을 붙잡고 있단 사실을 까맣게 잊었네. 그럼 얠 풀어준 다음에 제비꽃인지가 뭔지 물어볼까.


"…제비꽃이라고? 아, 그 망할 것들. 좀 설명하기 긴데, 아니, 그보다도 너 지금 대충 떠오르는 것도 다 읽고 있는 거 아니야?"
"나도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좀 그러긴 한데, 내가 원한다고 너희 마음 다 읽고 그러진 못해서.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정윤이도 들어야지. 그나저나, 제비꽃이 뭐 우리가 아는 그 식물 얘기는 아닌 거지?"
"당연하지, 어떤… 무리? 대충 그런 것들 얘기야. 계속 지리산 얘기 해온 건 잘 기억하고 있지? 거기서 좀 이어져."

"어, 음, 모두를 가두던 거기가 사라지고 나서- 음, 당연히 거기가 생겼을 때랑은 다른 방향으로 혼란이 있었다지. 거기서 힘을 빨아제끼던 애들은 너무 빠르게 힘을 잃고는 픽 죽어버리고… 어떤 애들은 다시 평범한 벌레로 돌아가기 싫다면서 죽어버리고… 그런 때 제비꽃이 여기 지리산 쪽에 처음 나타났대. 그래서 제비꽃이 뭐냐? 지리산 애들 대부분이랑 비슷하게 벌레야. 벌레인데- 아 그게 어… 여기 출신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그래. 너희 평행세계 이론 같은 거 들어는 봤잖아? 뭐, 입 터는 '까치'에 '파리'도 보고 있는데, 이런 것도 없을 건 없지 않겠냐?"
정윤이와 나 둘 다 놀란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야기가, 어우 시발, 너무 커지는데?"
이유봉이 고개를 까딱이며 말을 잇는다. "막 평행세계 간 전쟁 이 지랄까진 아니니까 됐지. 대신 평행세계 침략이지만. 그것들은 우리하고는 다르게 처음부터 혼자 힘을 갖고 태어났댄다. 그리고는 지들이 제비꽃이라고 불렀던 어떤 차원에 모여서 살아갔고. 그런데, 대체 뭔 지랄을 하며 산 건지는 몰라도 거기가 황폐화돼서 버리고 떠났대. 그렇게 여기 차원으로 오게 된 거고."
"그래서 제비꽃이 지리산에서 구체적으로 뭘 하는 건데?"
"아 시발 좀, 그냥 조용히 들으면 안 되냐? 말하다 보면 자연스레 나올 테니까 좀."
딱 한 번 말했다고? 평소에 말을 안 해서 몰랐는데, 거 참.

"제비꽃이 그렇게 우리 차원으로 온 건 우리 동물 기준으로 꽤-나? 옛날부터. 그래. 우리 차원에서 좀 오래 산 놈들은 나이가 수만 년 단위였다던가. 그러니까 지리산에 제비꽃이 오기 시작한지는 얼마 안 된 편인 거지. 하긴야, 특별한 힘 그런 거 제쳐 두고 벌레가 살기에 최적화된 환경도 아니니까. 제비꽃 그것들이 원래 살던 곳에는 이렇게 혹독한 추위는 없었댄다. 지리산은 워낙 사람 왕래도 많았고. 그 놈들, 원래는 사람을 무서워했거든."
"원래는?"
"뭐 머리가 좋고, 막 마법을 쓰고 그래 봐야 대부분 몸은 그냥 벌레일 뿐이고, 지리산은 은둔생활하는 도사도 많거든. 거기다 오히려 머리가 좋은 것 때문에 자기들 목숨을 굉장히 소중히 여기고. 지리산은 그 힘 모였던 데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것들한테는 아무 이점이 없는 땅이었어."

"그리고 지리산 힘이 사라지고 나서… 그때부터 제비꽃이 여기에 몰려오기 시작했지. 그때 지리산 토박이들이 잘 적응해 있었으면 그냥 쫓아냈을 수도 있겠는데… 방금 말했다시피 그럴 여건은 전혀 못 됐지. 그래서 제비꽃이 지리산 환경에 자연스레 끼어들 수 있게 됐다네. 그래도 당분간은 멀쩡했어. 당연한 게, 지리산에서 적어도 수천 년은 살아온 애들도 힘이 왜 그렇게 됐는지, 옛날 그 시절로 되돌릴 수 있는지 갈피도 못 잡는데 떠돌이가 뭘 할 수 있겠냐. 내가 듣기론 다른 지역 제비꽃들은 뭐 지들 방식으로 사람하고 공생하든가, 아니면 여타 그, 너희가 해충으로 부르는 곤충보다 좀 심하게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이득을 얻는다거나 그런다는데, 적어도 이때는 여기 제비꽃도 그랬지. 그러다가 한… 300년 전쯤이었나. 그때부터 제비꽃들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 너희, 뭐 그때쯤 하면 생각나는 이야기 같은 거 없어?"
"그냥 막연히 300년 전쯤 하면 잘 모르지. 정윤이 넌 뭐 생각나는 거 있어?"
정윤이가 턱에 손을 괴고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마를 손으로 탁 친다. "아, 그치, 그거! 그거네. 그거."
"뭐야, 뭐 생각난 거야? 난 그거라고 말해도 못 알아들어."
"야, 있잖아. 우리 맨날 다른 애들 놀릴 때 쓰던 그거. 이야기 배경이 딱 그때쯤 아니야?"
그래,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제비꽃이랑 뭔 상관이 있다는 거지?

"표정을 보면 둘 다 알긴 아나 보네. 그럼 얘기 들어간다. 그 사람이 대충 지리산에 잠재된 힘을 노렸다… 이런 이야기 들은 적 있지?"
"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아, 뭐였더라, 그 뭐 자기 따르는 마을 애들을 이끌고 지리산 괴물이랑 합체를 해가지고 자기 동생이랑 몇날며칠 싸우다 죽었댔나?"
"뭔 개소리야? 아이- 이거. 이야기가 오랫동안 입으로만 내려오면 좀 바뀐다곤 해도 이건 너무한데. 하- 이것까지 설명을 해야 하냐. 똑바로 앉아서 들어."
이야기가 내 생각보다 좀 많이 길어지게 됐지만, 나도 기억이 안 나는 것도 있고, 어차피 자세한 내용을 아는 게 내 입장에서도 좋으니 들어나 볼까.

"…그 놈하고 제비꽃들이 교류를 시작하면서 문제가 생겼어. 뭐랄까, 사람이 어찌 됐든 기본적으로 그, 벌레보다야 피지컬이란 게 압도적이잖아. 그거, 그런 사람의 신체능력을 이용해서 지리산에 담긴 힘을 활용하고, 아예 추출하기까지 하는 법을 알았나 봐. 어떤- 식으로 지리산 힘을 완전히 빼낼 거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사람만의 강점을 이용해서 제비꽃, 그리고 제비꽃에 동조하는 놈들이랑 손을 잡고."
"그런데 우린 방금 말한 것처럼 결국 막내동생한테 죽은 거로 알고 있는데. 설마 지리산 힘으로 아직까지 살아있다거나-"
"다행히 그건 아니고. 확실하게 죽었어. 시체도 아직 여기 지리산에 남아 있고 말이야. 근데… 사람이 죽는다고 그 사람이 한 게 없어지는 건 아니지. 그 사람이 아직도 이름이 남아 있는 건 자신한테 지리산 힘을 끌어낼 능력이 있어서는 아니니까. 지리산 힘을 끌어낼 방법을 알아냈고, 그걸 전수해 줘서 그런 거지."

정윤이가 뭔가 생각하고 있었는지 고개를 홱 들며 입을 연다. "너희는 제비꽃이 싫어? 그런 투로 말하는데, 너희도 지리산 힘 받아서 이렇게 된 거잖아. 냅두면 혹시 지리산 힘이 너희같은 애들끼리만 살던 때보다 전처럼 쑥 들어갈지도 모르는데, 그러느니 아예 풀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
"우린- 있어, 그런 게. 거시기 뭐, 우리는 원래 평범한 생물로 돌아가게 된다 쳐도 차라리 그런 게 더 나아. 그리고, 들어보면 너희 사람으로서도 지금 상태가 더 낫다고 생각하게 될 걸."
"너희 그 놈이 혼자 행동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잖아? 좀 이상하게 알고 있긴 한데, 어쨌든, 그 놈은 자기를 따르던 마을 사람들을- 그래, 꼭 도구처럼 생각했나 봐. 뭔가 실험할 게 있으면 직접 안 나서고 마을 사람들을 이용한다든지 하면서. 한영 본인은 이런 걸 제대로 안 거야 아닐 테지만, 그 녀석이 없었으면 영연이랑 막내동생이 그 놈이 뭘 하는지도 몰랐을 테고, 그렇다면 마을 전체가 실험장이 됐겠지."
이유봉이 여기까지 말을 하고는 안도하는 듯 작은 신음소리를 낸다. "그렇게 됐으면 그 놈도 안 죽게 되고, 지리산 힘이 진작에 풀려서… 다행이지."
"아, 얘기가 살짝 샜네. 어, 그, 그 놈이 그렇게 연구를 거듭하다 뭔가 알게 됐나 봐. 사람이 지리산 힘에 묶이게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람을 묶은 지리산 힘을 휘어잡는 것. 이렇게 하면 좀 여러 의미로- 그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게 된다나 봐. 너희는 뭔가 이상하게 알고 있긴 한데, 그 마을이 망한 날. 그 놈이 자기를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마을 양민들을 마구 죽였던 그때. 관아에서 무기를 들고 사람들이 잔뜩 몰려온 데다, 막내동생도 잠적한 동안 익힌 술법으로 마구 공격을 하는데도 몇 놈들은 도망치기는 커녕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죽을 때까지 맞섰었다네. 꼭 나머지가 도망치는 동안 그것들을 못 쫓도록 발목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게, 뭐 그, 아마 힘에 완전히 묶인 상태였겠지. 막내동생은 구체적인 정황은 몰라도? 그걸 짐작했으니 그 놈을 찾는 데 한평생을 쓴 거고."

"그런데- 그 사람이 죽은 뒤로도 그 사람한테 이런 것들을 전수받은 것들이 아직도 지리산 힘을 노리고 있다?"
"그거지. 막말로, 사람을 조종하는 방법을 알고, 지리산 힘으로 사람보다 어, 지네들 기준으로는 우월해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여파는 생각하지 않고 지들 좆대로 하겠단 거지."
이 말을 듣고 정윤이를 쳐다보니, 정윤이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제비꽃이 멀쩡한 사람을 조종해서 지리산 힘 푸는 걸 협력하게 한다고?"
평행세계 운운보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 앞에 이렇게 지리산 힘을 받고는 사회에 숨어 사는 존재가 있는 것처럼 우리 근처에도 제비꽃과, 제비꽃에 세뇌된 사람들이 숨어 있다는 뜻일까? 나라면야 그런 불순한 의도는 바로 읽어낼 수 있으니 당연히 괜찮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막 상황이 아주 나쁘게 돌아가는 건 아니야. 우선, 우리도 거의 볼 기회는 없지만 막내동생의 유지를 이어 지리산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제비꽃을 처단하는 도사들이 좀 있거든. 그리고 방금 말했다시피 제비꽃은 힘 다루는 기술이 상당히 떨어져서, 그냥 평범한 사람을 지리산 힘으로 묶는 것도 못 해."
그러다 이유봉을 비롯한 셋이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아… 그런데 태어날 때부터 지리산 힘에 영향을 받았으면 얘기가 다르지. 굳이 지리산에 잠재돼 있던 힘을 끌어내 이용할 필요도 없이, 바로 그 스스로가 가진 힘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방금 저 그, 뭐냐- 어 그래. 까치 녀석이 지리산 힘에 영향받은 사람이 뭔가 사람같은 느낌이 안 든다고 했지? 너희한테는 좀 안타깝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이미 제비꽃이 알아채고 왔다 간 거지. 너는 아마 힘이 잘 안 느껴져서든가, 아니면 어릴 때부터 정말 꼭꼭 숨겨 왔든가- 거 참, 재수 옴 붙은 날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일지도 모르겠네. 너한테든, 우리한테든."

다행이라. 나한테야 정말 그렇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좀 특이하게 태어났을 뿐인데, 웬 평행세계 벌레가 찾아와 세뇌해서는 당사자에게 별 이득도 있는지도 모를, 자기들만을 위한 일에 동원시킨다. 이게 정말 내가 아니니 다행이라고만 생각하고 무시해도 되는 걸까? 이렇게 자기 의사 따윈 묵살되고 해를 입을 사람이 있는데? "…아아, 모르겠다. 머리 깨질 것 같아."
"잉? 가만히 뭘 생각하나 싶더니만, 뜬금없이 뭐래?"
"있어. 그래. 거기 너희 셋, 오늘은 시간이 너무 지나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거든? 그래서 다음에 여기서 또 볼 수 있을까? 와도 정윤이하고만 올게."
그러자 그 셋이 의외로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그래, 이렇게까지 된 거 뭐, 쟤 그동안 어떻게 꽁꽁 숨기고 왔는지도 궁금하고, 우리도 알려줄 거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고- 아 뭐지뭐지, 그래. 얘 지금 이거도 들리나?"
"잘 들려. 그럼 다음에 또 보는 거다. 내일은 내가 아빠 일을 좀 도와줘야 해서, 이번주 토요일 아침에 만나면 좋겠는데. 주말이니까 하루종일 있어도 상관 없고." "그래. 너, 꼭 몸조심하고, 진짜 남한테 우리 본 말하지 말고, 그리고 또 뭐시다냐, 그래, 일단은 다음에 보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윤이가 말을 건다. "부영아."
"이제 둘만 있을 때는 그냥 내가 들은 거 막 대답해도 괜찮지?"
정윤이가 능청스레 대답한다. "그래, 다 듣고 있었겠지. 아- 진작에 알았으면 그동안 더 편하게 얘기하고 그럴 수 있었던 거 아니야? 평소에 가끔 이상하게 딴소리 하나 싶더니만, 귀 어두운 게 아니라 정반대였네." 그동안 내가 이런 걸 숨겼단 거에 화가 난 눈치는 아니구나.
그러고는 정윤이가 내 볼을 잡아당기면서 장난스럽게 말한다. "으이- 얌마, 그렇게 내가 못미더웠냐?"
나도 전까지는 정윤이 말대로이리라 생각했었다. 그저 가족 말고는 아무도 믿지 못해서라고, 정윤이도 가족이 아닐 뿐이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게 아니지 않을까? 내 가족을 뺀 사람들 중, 내가 가장 오래 봐온 사람은 내 앞에 선 이 아이다. 정윤이가 믿음직하다는 건, 정윤이의 속마음까지를 거진 열 해를 들어온 내가 가장 잘 알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뭐가 걱정돼서 정윤이에게 내가 이상하다는 일말의 단서조차 주지 않은 거지?
이렇게 생각은 해도, 아직 내가 정확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나한테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 "전까지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정윤이 너는 믿을 수 있어.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들리잖아." 고개를 젓는 내 입에서 정윤이를 향한 확신이 나온다.

"그래? 역시 그렇지! 나처럼 믿음직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나저나, 얘 내 마음 들린다 하니까 너무 신경 쓰이는데- 악, 얘 나 영일이 좋아하는 것도 알고, 또… 그럼 내가 얘 간식 몇 번 훔쳐먹은 것도- 아이, 몰라! 신경 쓰면 더 생각나네. 으… 그래. 부영이, 나중에 게네들 더 만난댔는데, 뭔 얘기 할 생각인 거지?"
"일단 게네들한테 내가 어떻게 숨겨왔는지 알려주려고. 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누가 그거로 나처럼 평범하게 살 수도 있을 거 아냐. 그거 아니어도 어느 정도 주고받는 게 있어야 계속 얘기할 수 있을 테고. 그리고 제비꽃이랑 세뇌됐다는 사람들, 그거 이야기도 좀 더 들어야겠어."
"어- 들어서 뭐하게? 뭐 설마, 네가 직접 세뇌 풀어준다거나 그런 건 아닐 테고…" 말을 마친 정윤이가 내 얼굴을 보고는 정색한다.
"진짜 그럴 생각인가 보구나."
"아니, 아니. 아직 확실하게 할 생각은 아니고, 듣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 싶으면 하겠다고…"
"어쨌든 한다는 거잖아."
"어- 그래. 할 거야. 난 운이 좋아서 이렇게 평범하게 살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리산 힘을 좀 받았다고 이용만 당하는 신세라잖아. 불쌍해서는 아니고, 이대로 냅두면 안 될 것 같다고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평소엔 만사에 디게 시큰둥해하던 애가…" 정윤이가 피식 미소를 짓는다. "그래, 그래도 그게 정부영이지. 이번 토요일에 나도 같이 갈게. 준비 제대로 해놓고 있어야 한다?"
역시 이게 김정윤이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정윤이라면 이럴 거라고 믿고 있었다. 어… 얘기하다 보니 벌써 집이네. 그럼 슬슬 정윤이하고는 작별하고 집으로 들어갈까.


씻고 나니 이게 정말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간다. 나 말고 다른 게 있을 거라고는 상상이야 했지만, 내 생각보다 뭐랄까, 규모가 너무 크다. 여기서 더 파고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이미 안 건 어쩔 수 없겠지. 내 스스로 제비꽃인지 뭔지에 세뇌된 사람들을 돕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영일이는 자기 방에서 게임하는 것 같고, 부모님은 벌써 주무시는 것 같다. 말해야 할까? 아니- 역시 지금 당장 말할 수는 없겠다. 내가 아직 한창 어린 나이인 것도 있고,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하면 분명 나를 말리는 부모님 논리에 설득될 것이다. 제대로 준비가 되면 그래, 그때 말하는 거야. 확실하게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는 그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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