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과 비행기 납치 준비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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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이 순간을 돌아볼 때 한여름날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마시거나 휴일의 한적한 공원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느끼던 행복하고 안온한 순간으로 기억하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승무원 김윤진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하고 있었다.

세 명의 사람: 두 남녀, 그리고 바닥에 꿇어앉은 한 남자. 피곤해 보이는 코트 입은 남자가 인질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밀고 있다. 초록색 머리를 한 여자가 의기양양하게 윤진을 쏘아보고 있다. 마치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듯이.

몸이 떨려왔다. 그럴 수 있으리라 들어왔고, 교육받아왔고, 대처 방법도 숙지 받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에 부닥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윤진은 덜덜 떨며 점점 다가오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 거라 믿습니다. 당장 조종실로 안내하세요. 안 그러면…"

여자는 인질 쪽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단순한 행동의 함의는 너무나 확연했다. 윤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침을 삼켰다. 정신 차리자. 정신을 차려야 한다. 비행기에서 일어난 옛 사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손이 차가워지며 온몸에 진동이 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진동이 멎었다.

처음에, 윤진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어딘가 몽롱한 느낌만이 들었을 뿐. 너무나 놀라서 그런 감각이 느껴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뇌리를 잠식하는 졸음은 정말… 이상했다. 윤진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무언가가 의식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멍한 기운. 그는 잠에서 깨어나려는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 밀려오는 것과 동시에 하늘 위로 날아가는 것만 같은 기분. 따뜻한 방구들에 몸을 누이는 듯한 기분. 윤진은 정신을 차리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절 따라오세요."


오전 6시.

짧은 비행 후 제13K기지에 도착해서 짐을 푼 이구천은 여독이 쌓인 몸을 이끌고 상황실 책상에 주저앉았다. 새벽부터 제21K기지에서 출발해서 지금에서야 업무를 할당받은 것이었다. 구천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하다가 졸지나 않으면 다행일 수준이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제주도로 온 거지.

구천은 준비해 둔 코코아를 뜨거운 물에 섞으며 생각했다. 그가 아닌 밤중에 갑자기 제주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상사인 뇌수종 교수가 그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어떤 기지에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인간이긴 했지만, 한 번도 제13K기지로 불쑥 부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하나, 지금까지 하나도 언질이 없군.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르리라. 구천은 그렇게 생각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뇌수종은 정말 그럴 가능성도 있는 인간이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그가 맡은 업무는 쉽다고 소문난, "SCP-713-KO 격리절차 보조 업무"였다. 그나마 천지신명이 베풀어 준 잠깐의 휴식이리라. 구천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의 목 받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모니터 화면에서 알림이 울리자 그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한참 뒤에 신음을 흘리며 일어난 구천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하…"

그리고 그는 튕겨 나가듯 문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몇 분 뒤.

구천은 뇌수종 교수의 집무실에 서 있었다. 뛰어오느라 상기된 구천의 얼굴과 반대로, 뇌 교수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럼 구천, 자네 말은…"

"준 격리 파기 사태입니다, 교수님." 구천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오 요원이 지원을 요청했어요."

"…회의실로 모이라고 해." 뇌수종이 말했다. "지금 당장."


기장실로 가는 길은 너무나 조용했다.

김철현은 걸음을 옮기며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도 않고 미동도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는 승객들의 낯빛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그저 몽롱한 표정, 어딘가 평화로운 듯한 얼굴로 앉아만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작은 아기조차도 울지 않았다. 단체로 최면 상태에 빠진 듯이.

그들은 복도를 거닐며 제자리에 멈춰 선 승무원과 승객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저 존재만 하고 있는 듯한 그들의 눈빛은 어딘가 섬뜩한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죽은 자의 눈동자처럼. 언젠가 보았던 시체들이 기억났다. 창백한 얼굴로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이 기억났다. 수의(囚衣)를 입고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거나 맞아 죽은 시체들.

철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속에서 울렁거리는 느낌이 심해졌다.

"혹시 나한테 안 알려준 비술 같은 게 있습니까?"

이 모든 상황에 의문을 지니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철현은 류원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황한 탓인지 원시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글쎄, 나는 총을 좀 쏘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 저 사람 하는 것 좀 봐요. 아무 짓도 안 했건만 갑자기 약이라도 한 것마냥 몽롱한 얼굴로 우릴 안내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지금 승객들도 여간 이상한 게 아니고. 당신이 손을 쓴 게 아닌가 해서."

"그건 아니오." 철현은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두술에 환각의 권능은 없소. 애시당초 두술을 쓰지도 않았을뿐더러. 내 생각엔 아마… 두 분께서 한 일인 것 같소. 성주신과 조왕신."

철현의 머릿속에 불현듯 방금 전의 대화가 떠올랐다. 회항하자고, 비행기를 하이재킹하자고 한 직후.

"네놈들… 무슨 짓을 할 심산이냐."

"염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성주신의 당황 섞인 말에 철현이 차분하게 대꾸한다. "단지, 목전에 닥친 해악을 막기 위함입니다."

"해악이라니?" 조왕신이 묻는다. "영문을 모르겠구나."

"파운데이션이라는 자들이 우릴 쫓고 있습니다. 만일 이대로 런던으로 향하게 된다면 호구에 제 머리를 집어넣는 것과 한가지일 뿐입니다. 어찌 대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네 녀석 말은 비행기를 빼앗겠다 이 말이 아니냐."

성주신이 조금은 누그러든 목소리로, 하지만 여전히 불신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한다.

"네." 철현은 고개를 끄덕인다. 달리 할 말이 없다. "송구합니다. 허나 범절을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할 터이니…"

철현은 그렇게 말하고 떠나왔었다.

"아무래도 이야기는 들어주실 모양인가 보구료."

"그나마 다행이네요." 원시가 전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해 가니, 이제 우리 목숨 살릴 일이나 완수해 봅시다."

기장실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들을 안내한 승무원은 기장실에 다다르자마자 몸을 부르르 떨더니 한쪽 벽에 기대어 섰다. 그리고는 안내를 종료한 내비게이션처럼 미동도 없이 눈을 감았다. 원시는 불안한 눈빛으로 철현을 바라보았다.

"설마 조종사들도 저러고 있지는 않겠죠?"

철현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엔 아닙니다. 이 자들은 눈에 띄게 무력하고 생기가 없소. 항공기를 모는 자들을 저 상태에 놓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사망을 방조하는 행위요."

원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철현은 대답 대신 권총을 들어 보였다.

"음, 그건 알겠는데… 몇 발 남았어요?"

"두 발."

"그걸로 그 사람들 위협하기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들어봐요. 모든 하이재킹 사례의 공통점은 납치범이 조종사와 승무원들에게 '항로 변경을 강제할 수 있을 정도의 공포심'을 줬다는 거에요." 원시가 천천히 설명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조성했다고요."

"헌데, 그것이 왜 권총을 사용하지 말라는 결론에 도달한 게요? 이미 이로써 충분히 달성할 수 있지 않소?"

"인간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죠." 원시가 참을성 있게 대꾸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내 생각엔 우리 둘 다 그런 미지성을 충분히 가진 것 같은데."

철현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영 이해가 가질 않는 소리였다.

"총의 사용은 회항한 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미뤄둡시다. 총보다 더 리스크가 없는 방도가 있어요. 그러니 어서 총은 넣어두고, 인질이나 잘 간수하쇼. 깨어나서 난동이나 부림 큰일이니."

"대체 뭘 하려고 그러는 겁니까?"

원시가 철현을 돌아보았다.

"이 세상에 뱀 무서워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답니다."


오전 6시 30분.

구천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집합 시간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벌써 내려가 회의실 한 구석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있을 수 있었음에도, 소식을 듣지 못했을 사람들까지 언질을 주고 오느라 이렇게 늦은 것이었다. 무속학부 자체의 특성 탓인지, 아니면 그저 인터넷이란 것이 익숙지 않아서인지, 꼭 전체 호출을 못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기성진 박사가 그런 류였다. 구천은 걸음을 옮기며 옆에서 미끄러지듯이 달려가는 기 박사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애썼다. 박사의 말은 걸음만큼이나 빠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네? 죄송합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상하지 않느냐고. 이 연구원, 이상하지 않나?"

"죄송합니다만…" 구천이 모퉁이를 돌며 목소리를 죽였다.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자네 지금까지 SCP-713-KO에 얽힌 '끔찍한 사건' 들어봤나? 감히 말하건대 전혀 없을걸. SCP란 것들이라야 사실 괴물들이자 끔찍한 사건들일진대, 우리 두 가택신께서는 난동을 부리고 고깝게 나오는 일들 자체가 없었단 말일세. 가장 다루기 쉽고, 가장 격리하기 용이한 두 개체지. 단지 비행기 위에서 나온단 점이 우리 재정을 심각하게 위협하긴 했네만."

"그렇지요. 하지만 여전히 무엇이 이상한지에 대해서는 아직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다."

기성진이 걸음을 멈췄다. "그냥 이 상황 자체가 이상하단 말이야. 우리 두 늙은이에게 무언가의 초점 렌즈가 비추어진 듯한 이 상황 자체가…"

제13K기지 본관단지 본부동 회의실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있었다. 기지 내에서 주둔하던 모든 무속학부 인원들이 모인 모습이었다. 타 부서의 인원들은 여간 잘 모이지 않았던 무속학부 사람들이 대경해서 집합한 꼴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며 지나갔다. 보안 인가가 충족된 실무진들이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오전 6시 01분 A380 항공기에 탑승한 오민철 요원에게서 교신이 왔습니다. '신원 미상의 2인조 접근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SCP-713-KO의 이른 발현이 관측되었다.' 이와 함께, 목적지인 런던 히스로 공항에 기동특무부대 파견도 요청했죠."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뒤로 한 채, 진기명 요원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교신이 왔습니다. '잘못 보았다. 이른 발현은 옳으나, 2인조는 해당 상황에 연관이 없는 비변칙적 인간들이다.'라고요."

"아, 그러면… 상황이 종결된 것 아닌가요?"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그건 아닙니다." 구천이 끼어들었다. "단지 그 발언으로 결론짓기는 어렵습니다."

"연구원님 말씀이 맞습니다. 더군다나, 확실히 그 교신은 이상한 구석이 많았거든요." 진 요원이 말을 받았다. "저절로 말소 처리가 되는 보안 어구도, 평소 오 요원이 사용한 암호 코드도 작성하지 않았죠."

"게다가 교신 자체에 대한 보안 처리까지 미흡." 자문을 위해 동석한 특무이사관보 슬링어 소령이 뒤를 이었다. "하나부터 끝까지 제대로 되어 있는 게 없었다. 아무리 초보인 요원이라 할지언정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지. 그 교신은 오 요원이 보낸 게 아니야."

"그럼…"

"누군가 오 요원의 교신기를 탈취했다." 슬링어 소령이 말했다.

회의실 내에 얼음 같은 침묵이 스며들었다.

"…인근 기지에 협조 공문을 보내게."

뇌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표정은 방금 적들의 공격을 보고받은 사령관처럼 사납게 굳어 있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숨길 수 없는 불쾌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기동특무부대 천도-9를 대기시켜. 어떤 놈들인지 몰라도 함부로 건드릴 사안이 아니란 걸 보여주도록 하지."


원시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조종실 문은 깊게 닫혀 있었다. 마치 죄인의 시야로 보는 천국의 대문처럼.

주위에는 오로지 그 혼자였다. 철현이 정신을 잃은 옥리를 좌석 근처에 묶어두려고 간 까닭이었다. 때문에 일을 진행하는 것은 원시 본인이 장담한 대로 홀로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원시는 옆구리에 낀 카우치백을 열었다. 갖가지 잡동사니가 안에서 요동치고 있는 그 가방은 클럽에 향하기 전부터 쭉 들고 다니던 물건이었다. 원시는 안을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그곳에서 도망 나올 때 뒤집힌 것이 확실했다. 애써 정리해둔 자료들과 물건들이 아수라장 속에 흩어진 것을 보자 마음이 아팠지만, 별 수 없었다. 그는 그 안을 헤치고 작은 다마고치처럼 생긴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내가 진짜 이건 안 쓰려고 했는데…"

단말기 화면에 원시 자신의 얼굴이 비추어졌다. 초록색 머리칼에 검은 눈. 약간 위로 째진 동공. 전체적인 얼굴형은 어머니를 닮았다.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그의 반이라도 닮길 바랐던 적이 있었다. 쓸어내리는 듯하면서도 상대를 빨아들이는 듯한 시선을 갖길 원했던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원시에겐 다른 사람이 아니요, 어머니만이 그의 우상이었으니.

얼굴은 원시가 화형(化形)을 받지 않고 자라났을 때의 모습을 추정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원시는 10살에 화형을 받았다. 이따금 그도 자신이 뱀인간으로 변하지 않고 자라났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상상이라고, 스스로 결론 내리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은 오히려 뱀인간임에 감사하고 있다.

이제 시작해야 한다.

원시는 단말기 버튼을 눌렀다. 곧장 피부에 찌르르한 기분이 감돌더니, 차츰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손발에 한기가 돌며 소름이 돋았다. 머리에 옅은 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피부가 천천히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변화는 복부에서부터 일어났다. 크롭티를 입어 노출된 살갗의 연주홍빛 빛깔이 점점 초록색을 띠기 시작했다. 매끈한 피부의 질감이 점점 우둘투둘해지고 있었다. 마치 뱀의 살갗처럼. 원시는 몸을 구부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인태(人態)가 풀리면서 시야에 느껴지는 충격이 완연함을 이미 알았다. 와중에도 그의 몸은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모든 부분을 바꾸어 놓겠다는 듯이. 모든 인간스러운 부분을 없애겠다는 듯이. 자신의 모든 나약함을 버려버리겠다는 듯이.

그리고 잠시 뒤, 몸을 폈다.

단말기의 화면에 얼굴이 비추어졌다. 그러나 인간의 얼굴은 아니다. 그리워하던 어머니의 얼굴을 닮은 흔적은 사라졌다. 본모습일 뿐이다. 겉치레와 살가죽으로 덮인 모습은 갔다. 진정한 그의 모습ー 뱀이다.

원시는 조종실의 문을 더듬었다. 비행 역사에 기록된 일련의 사건들 덕에 조종실의 문은 안에서 잠그고 열게끔 되어 있었다. 그러니 평범한 방식으로는 밖에서 열 수 없으리라. 원시는 가방 안에서 연녹색의 점액질 물체를 꺼냈다. 그리고는 문에다가 문지르기 시작했다.

곧장 점액질은 문틈과 구멍 사이사이로 흘러들어 갔다. 지난 그리스 답사 때 얻은 물건이었다. 사학자가 비밀 요원은 아니지만 그래도 퍽 쓸만한 데가 많았다. 유물을 상하게 하지 않고 문을 열고 싶을 때 등등.

원시 본인도 이걸 이렇게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그는 한숨을 쉬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잠금 해제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곧ー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전혀 상상하지 못한 것이 튀어나왔다.

퍽.

원시는 중심를 잃고 뒤로 넘어졌다. 얻어맞은 가슴팍이 아파왔다. 몸을 일으킨 그의 시야에 한 인영이 비쳤다. 연갈색 코트를 입고 머리를 짧게 묶은 여자. 얼굴에는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색 캐리어가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누구인가 했더니," 여자가 입을 열었다. "고작 조그마한 새끼 뱀이었구나."

"…당신 누구야?"

"네년이 알 게 있나?"

여자는 원시의 얼굴을 보고도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대꾸했다. 둘 중 하나였다. 하나라 유민을 알 거나, 원시의 정체가 뭐든 상관하지 않거나. 후자가 더 위험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 정도로 강하다는 걸 방증하는 셈이니까.

"알면 좋지." 원시가 숨을 몰아쉬며 받아쳤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고, 난 그에 맞춰 사는 사람이라."

그리고 원시는 다리의 반동으로 일어나, 덤벼들었다.


두세 번을 더 묶은 뒤에야 철현은 오민철에게서 시선을 떼어낼 수 있었다. 민철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철현은 그가 죽거나 장애를 입을 정도로 앓지 않게끔 조절하고 있었다. 그저 깨어나서 번거롭게 굴지만 않도록.

이제 꽁꽁 싸매두었으니 더 대비할 일은 없으리라. 그는 그렇게 생각하곤 인사불성이 된 민철을 좌석 한 군데에 버려둔 후 조종실로 향했다. 원시 혼자서 그곳에 있을 것이다. 여전히 뚜렷한 계획을 듣지는 않았지만, 철현은 이제서야 그 계획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인태를 풀고 본모습으로 나아가 조종사들을 공포에 빠뜨리게 할 작정일 터였다. 여태 원시의 본모습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그 형상이 얼마나 기이한지 알 방도는 없었지만, 자신하는 투를 보면 범인(凡人)들을 겁주기엔 충분할 것이리라.

철현은 그 확신이 부디 옳기를 바랐다.

그리고 조종실 인근에서 큰 소리가 들려오자, 그의 가슴은 덜컹 내려앉았다. 철현은 자세를 낮추고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슬쩍 내다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여자가 뱀 머리의 인물과 대치 중이었다. 분명히 원시일 뱀 머리는 허리를 숙인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지친 것 같았다. 연갈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게 다야?"

"하, 이런 젠ー"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원시가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바람이었다. 거대한 바람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먼지 한 톨도 없이 깨끗했고, 그 마지막에 원시가 비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었다. 강한 일격에도 일어서는 원시를 보며, 철현은 내심 감탄했다. 종말을 위해 스스로를 개조했다는 하 유민들의 이야기는 허풍이 아니었다.

원시는 다시 중심을 잡으며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여자에게 향했다.

"난 저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댁이 어디 살며 뭘 하는 누구인진 모르겠다만, 오늘은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적어도 지금은!"

"기내 안전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범죄자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우습네."

여자가 돌진했다. 눈 깜짝할 새 원시의 앞으로 향한 그는, 원시가 무언가를 휘두르려 하자 순간 연기처럼 증발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찰나의 순간, 다시 뒤에서 나타났다.

"뭐—"

뒷말은 등에 날아든 발길질에 잦아들고 말았다. 원시가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튕겨 나온 물건이 철현의 발치로 굴러갔다. 작은 원통 같은 물체였다. 버튼을 누르니 붉은 밧줄이 쑥 튀어나왔다. 누르고 있으면 흘러나오고, 누르지 않으면 다시 들어가 버리는 구조의 물건이었다. 버튼 아래에 검은 글씨로, 다자구야 들자구야가 쓰여 있었다. 원시가 여자에게 휘두르려 했던 그 무언가인 듯싶었다.

원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막힌 듯 용을 써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주위의 공기가 그의 몸 위에 모여들어 짓누르고 있듯이.

"이게…대체… 무슨…."

"아가, 네 몸뚱이만 믿고 덤비면 이리되는 거란다." 여자가 원시에게 다가가며 웃음을 흘렸다. "자, 이제 코해야지."

여자의 손끝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점점 퍼져나가 원시의 코와 입으로 흘러갔다. 원시가 몸부림을 쳤지만, 기운은 전혀 희석되지 않았다. 되려 더 짙어질 뿐.

원시의 몸부림이 차츰 얌전해지고 호흡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여자의 몸이 밧줄에 묶이기 전까지는.

여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붉은 밧줄이 그의 몸을 저절로 친친 감기 시작했다. 손목이 수갑처럼 묶였다. 어깨와 팔, 다리 역시 행동을 제한당했다. 밧줄은 살아 있는 붉은 뱀처럼 움직였다. 거기다가 온몸을 엄습하는 오한, 추위. 여자는 자세를 바로 하려고 노력했지만 몸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밧줄에게 모든 힘을 빼앗기는 듯한… 느낌.

원시가 풀려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중압감이 사라지자마자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여자를 마주 보고 섰다. 연갈색 코트의 여자는 비틀거리며 좌석에 몸을 기대에 서 있었다. 쓰러지진 않았다. 그는 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같잖은 이물(異物)을 쓰는구나…" 여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동료가 있었다?"

그리고 돌풍이 일었다.

철현은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푸드 카트를 발견하고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원통의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고 말았다. 순식간에 붉은 밧줄은 원통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차.

철현이 다시금 고개를 돌리자, 여자는 벌써 온데간데 없었다.

아니, 그의 앞에 나타났다. 철현은 황급히 피하려고 했지만, 여자의 손동작에 그만 몇 미터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등이 좌석에 부딪히면서 끔찍한 고통을 유발했다. 그는 인상을 쓰며, 충격에도 무표정한 승객의 몸을 짚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재빨리 버튼을 누르고 밧줄을 풀어, 내리쳤다. 빨간 줄이 허공을 가르며 쉬익거렸다.

그러나 여자의 몸은 마치 공기로만 이루어진 듯 밧줄을 투과해버리고 말았다.

"잔재주는 소용없다."

여자는 손바닥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그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분노로 얼룩진 얼굴은 이제 아무것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 묻어나오는 뿌리 깊은 짜증이 폭풍처럼 흩날렸다.

"단지 잠재워 인간들이 처리하게끔 할 생각이었으나, 좋아, 네놈들 싹 다 비행기 밖으로 내던져주마. 더는 봐주지 않겠다."

"…하, 기내 안전 좋아하고 있네."

어디선가 원시의 목소리가 들렸고, 철현은 조금 안도했다. 농담을 할 정도면 그렇게 심하게 부상을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여자의 손에서 공기의 소용돌이가 뿜어져 나왔다.

몇 초의 시간 동안 동시다발적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다. 첫째, 돌풍으로 인하여 기내에 보관된 모든 캐리어들이 날아올라 철현을 향해 돌진했다. 둘째, 원통이 진동하면서 밧줄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셋째, 철현이 몸을 뒤로 빼면서 밧줄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춤을 추듯 일렁이던 붉은 선은 이내 가장 가까이 날아온 캐리어의 손잡이에 휘감겼고, 재빠르게 다른 캐리어에 부딪혔다. 몇 개의 캐리어가 연쇄적으로 부딪혀 제각기 다른 쪽으로 날아갔다.

철현이 몸을 날렸다. 미처 막지 못한 캐리어들이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곳에 굉음을 내며 부딪혔다. 캐리어의 내용물이 파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쥐새끼 같은 놈…"

여자의 화를 더 돋운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가까이에 쓰러져 있던 푸드 카트를 끌어왔다. 그리고는 바람에 실어 보냈다. 수십 개의 과자와 음료수병, 종이컵이 날아들었다.

"하…"

철현은 인상을 찌푸리고 밧줄을 휘둘렀다. 8자를 그리며 허공에 붉은 자국을 남기던 선은 날아오는 물건들에 채찍질을 하며 경로를 변환시켰다. 물건은 너무나 많았다. 거대한 폭풍의 중심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의 손짓이 격해지더니, 이내 승객들의 소지품마저 바람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텀블러와 종이 책자와 스마트폰이 날아들었다.

"…승객 안전을 챙기기는 하는 건지…"

철현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다급히 채찍을 휘둘렀다. 왼편에서 날아오던 하늘색 텀블러가 붉은 올가미에 걸려들었고, 그는 카우보이라도 된 것처럼 이를 머리 위로 돌렸다. 그리고는 앞을 향해 거대한 원을 그렸다. 빨간 동그라미가 네온사인처럼 허공을 갈랐다. 물건들이 부딪혀 나는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부딪힐 때마다 느껴지는 진동이 손목으로 전달되었다. 철현은 용을 쓰며 원통을 붙들었다.

그리고 잠시 폭풍이 잦아들었다.

철현은 옆 좌석으로 몸을 숨겼다. 몸속을 돌고 도는 엔도르핀의 존재 덕에 피로는 덜었지만, 몸이 힘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호흡을 고르려고 애썼다. 여자는 곧 다시 공격할 것이었다. 대처해야 했다.

"이봐요."

철현은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비늘이 가득한 뱀의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대한 뱀, 그러나 인간의 육체에 기반한 그 생명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류원시였다. 이리저리 흉이 진 옷차림으로 그가 꽤 버겁게 여자와 대치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류 양?"

"네. 나예요. 채찍 잘 쓰네요." 원시가 살짝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아무리 해도 잘 못 다루겠던데."

"이 상황을 타개할 계획도 있소?"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우리 둘 다 큰일 난 건 확실하군."

원시가 주저하면서 입을 열었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전설 알아요?"

"그 산신을 만난 적은 있소."

"하."

철현은 원시를 바라보았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아무튼, 그 채찍은 그 어구, '다자구야 들자구야'와 완벽히 맞물리는 기물(奇物)이에요. 능력을 극대화하고 싶다면 그 어구를 외쳐야 해요. 다자구야, 들자구야. 알아들어요?"

철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시의 표정은 절박해 보였다. 맞다, 지금 이 일은 목숨이 걸린 일이다. 그만큼 그의 말이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저 여자를 이길 수 있는 방도는 이것뿐이리라.

철현은 손을 뻗어 원시의 어깨를 두들겼다. 원시의 표정이 일순간 묘해졌지만, 다르게 표현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괜찮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에는 단지 사치였다.

공기의 흐름이 다시금 느껴졌다.

여자가 다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철현은 본능적으로 옆 좌석의 팔걸이를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는 돌진했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작은 이 시간을 놓쳐버린다면 의미 없는 싸움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틈을 내줘서는 안 된다.

몸이 바람과도 같이 질주했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원통을 꽉 쥐었다. 철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그는 위치가 파악되었다. 이 좁은 공간에서 은신은 불가능하다. 그가 여자를 발견하면 여자가 그를 발견했고 그 순간부터 전투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마치 어떤 해전의 기억처럼, 상황은 너무나 조밀했고 깊었다.

여자가 그를 노려보며 다른 동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좌석을 밟고, 그다음 좌석을 밟았다. 여자에게로 나아갔다. 발이 후들거리고 다른 곳을 헛밟을 때도 몇 번 있었지만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계속 나아갔다. 마침내 그의 옆에 도달할 때까지. 여자의 연갈색 코트가 일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의 주변에 강한 바람이 불어올 찰나였다.

철현의 팔이 움직였다. 그의 손에 쥐어진 원통이 진동하면서 줄을 뱉어냈다. 진동이 그의 팔에 전달되었다. 붉은 선이 허공을 가르며 목표한 지점으로 나아갔다. 마치 뱀처럼. 거대한 붉은 뱀처럼.

붉은 선이 안개처럼 여자의 몸을 갈랐지만, 그는 이제 개의치 않는다.

그가 속삭인다.

"다자구야."

줄이 진동한다. 밧줄이 붉게 진동한다. 피같이, 동백꽃같이 붉게 타오른다.

그의 팔이 다시 긴장한다. 다른 곳으로 향하던 밧줄의 끝이 반대편으로 가게끔 강제당한다. 원통에서부터 전달된 파동의 형태가 줄을 타고 끝으로 향한다. 이때 밧줄은 불꽃이다. 바람이다. 흙이다. 육(肉)이다. 오래 앓던 기억이다. 핏줄기 흐르던 하이얀 복색이다. 시기 잃은 나약한 힘이다.

"….들자구야!"

여자의 목에 밧줄이 걸린다. 사납게 휘감는다. 그는 도망칠 수 없다. 기화(氣化)할 수 없음을 그 자신도 깨닫는다. 이미 덫에 걸린 바 된 작은 산짐승의 심정으로. 여자의 코트가 구겨지며 그 위를 붉은 선이 점거한다. 아예 번데기가 되려는 듯이. 아까 전과 같은 곳을 금지당한다. 동작도, 힘도 그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붉은 밧줄은 여자의 힘을 앗아간다. 온통 앗아간다.

철현은 지친 몸을 이끌고 포박당한 여자에게로 걸어갔다. 붉은 밧줄은 원통에서도 풀려나와 오로지 목표를 꽁꽁 싸매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팔이 뒤로 꺾여진 채로 동작을 구속당한 여자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만 반항하시오. 그대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너, 감히 이러고도—"

그리고 둘은 말을 멈추었다.

긴 정적이 흘렀다.

좌석 한쪽에서 욱신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걸어 나온 원시는 둘의 얼굴에 똑같이 서린 당혹과 놀라움을 보았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마치 서로 오랜 시간 아는 사람들처럼…

원시는 인상을 찌푸렸다. "잠깐만…"

"…영등?" 철현이 입을 열었다. 전혀 믿기지 않는 듯한 목소리였다.

"…작은 손님?" 똑같은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둘이 지금 지인이라고? 둘이?"

"그… 류 양, 내 말 좀—"

"당신은 입 꼭 다물고 있어요. 아주 끝에 등장해서 멋진 부분은 자기가 홀랑 다 가져갔지?"

철현은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원시의 눈초리가 그 어떤 총알보다 더 아팠다.

그들은 승객 없는 좌석 근처에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이를 악물고 싸워댄 세 사람은 서로 섞이지 못하는 물과 기름처럼 데면데면한 상황에 있었다. 철현은 어떤 의무감을 느끼고,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류 양, 이쪽은 고영주요. 영등신이지. 제주 바람의…신. 나와는 서천에서 친분을 쌓게 된 사이요."

"아, 바람." 원시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어쩐지."

"믿을 수가 없군. 그쪽이 여긴 왜 있는 거야? 아니, 어떻게?" 영주가 물었다.

"사연이 깁니다." 철현이 대답했다. "서천의 심부름이오. 이 항공기에 타고 계신 성주신과 조왕신을 모셔오라는 부탁이었지."

"성주 아저씨랑 조왕 아주머니가?" 영주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동안 오래 못 뵈었는데…"

"헌데 지금은 일이 그리 쉬이 풀리고 있지 않소. 영등, 파운데이션이라는 자들을 아시오?"

"아, 알지. SCP재단." 영주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설마… 조종실로 가려던 이유가 그들과 관련 있던 거야?"

"빨리도 알아줘서 망극하네요." 원시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네, 맞아요. 옥리, 그러니까 재단의 인간들이 우리를 쫓고 있습니다. 이 비행기가 그대로 런던으로 가버리면, 우린 그대로 죽은 목숨인 셈이라고요. 빨리 회항시켜야 하는데…"

"영등, 우릴 도와주겠소? 그대가 돕는다면, 우리가 성공할 가능성이 대폭 늘어날 거요. 해풍을 등에 업은 돛단배와 같이."

"그 해풍 굉장히 아프던데…"

원시의 투덜거림 섞인 말을 무시하고, 철현은 간절한 눈빛으로 영주를 바라보았다. 영주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에 점점 확신이 깃듦을 알 수 있었다.

"뭐… 좋아." 영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흘렀다. "…어차피 난 휴가니까."

"다행이오."

"아, 내가 여기 참여했다는 거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 회사 매출 떨어져."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소." 철현이 둘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정말로 탈취란 것을 할 차례가 온 것 같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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