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으려는 자들과 지키려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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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제주국제공항은 유달리 한산한 아침을 맞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북적북적한 인파로 가득 차야 맞을 대기열은 무슨 일인지 몇 명의 사람들만 오갈 뿐 승객들은 없었다. 마치 오늘은 비행기를 타면 안 된다는 무언의 지령을 받은 듯.

한 젊은이가 공항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아디다스 점퍼를 입은 그는 캐리어를 다리 옆에 두고는 아침의 서늘함에 떨며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8시에 출발한다고 한 김포행 비행기는 어찌 된 일인지 10시로 지연되었고, 그 덕에 그는 배고픔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가뜩이나 심한 멀미에 아침마저 먹을 수 없는 상황인지라 불편함이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너무나 더디게 흘렀다.

얼마쯤 지났을까, 젊은이는 휴대폰에 코를 박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아까 전부터 약간씩 말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대화는 대체로 당혹과 의문, 그리고 강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공항 관계저로 보이는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여행객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절도 있는 동작과 필요 이상으로 무뚝뚝한 말씨가 위장한 요원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젊은이는 흥미를 느끼고 몰래 앞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의 대화를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였다.

여행객의 우두머리가 말하고 있었다.

"국내선 도착 구역을 폐쇄하고, 오가는 승객들을 꼼꼼하게 조사해야 비행기 납치범들을 잡을 수 있으니…"

"저흰 아무런 연락도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공항 관계자가 쩔쩔매며 대꾸했다. "어디 소속인지도 밝히지 않은 채 이러시면…"

"누가 방재원 사람들한테 콜 한 통 넣어라."

여행객 무리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작은 웃음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그러나 우두머리가 뒤를 돌아보며 혀를 차자 금방 수그러들었다.

"곧 공문이 전달될 겁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의심할 일이 아니니까… 지금은 우리 측 요구에 좀 따라달라는 겁니다."

"대리님! 연락이…!"

대화 도중 다른 편에서 공항관계자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와 끼어들었다. 그에게서 전화기를 받은 관계자는, 말을 조금 하더니 금방 새파래진 얼굴로 부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는 문제의 여행객들에게 손짓하더니 다른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뭐지…?"

젊은이는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비행기 납치? 공문? 무슨 일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걸 보면 정말 큰일이긴 하리라. 그는 휴대폰을 점퍼에 찔러넣고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떤 구역에서 멈추고 짐을 끄르기 시작했다. 젊은이는 벽면에 몸을 숨기고 여행객들을 관찰했다. 공항 관계자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자리를 피하자, 그들은 거리낌 없이 옷을 갈아입고 도구를 꺼냈다. 그들이 환복한 복장은 영락없는 전투복이었다. 그는 손에 땀을 쥐고 구경하고 있었다. 민간인에게 비밀로까지 하는 전투 임무다! 아마 북한과 관련 있으리라는 추측이 그의 머릿속에서 퍼져 나갔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들의 도구였다. 전쟁 영화에서 볼 법한 총기도 분명 있었지만 이목을 사로잡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부적, 조선 시대 유물 느낌의 환도, 포승줄 같은 붉은 밧줄이었다. 도대체 그런 무기를 어디에 쓴단 말인가? 전투용이 아니라 감상용으로 박물관에다가 전시하면 딱 좋을 양이었다.

젊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치며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더 말려들어 갔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 까닭이었다. 그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게 살금살금 물러 나왔다가, 이제 충분히 멀어졌다 싶자 우당탕 도망을 쳤다. 누군지는 몰라도 그들을 대적할 이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겠다는 예감을 느끼면서.


류원시는 재빨리 계단을 내려갔다. 그 뒤를 김철현이 따랐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저 큰일, 이라는 말은 사태를 파악하기는커녕 더 우려하게끔 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그 답은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곧장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멍한 상태, 마치 천치 같은 상태였던 승무원들이 어느샌가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승객들을 체크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승객들 역시 일전의 상황이 아니라 활발하게 옆 사람과 담소를 나누거나 비치된 잡지를 들여다보는 등 옛 모습을 되찾았다. 철현은 망연히 이 정경을 바라보았다. 어떤 조화가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갑자기 암시가 풀린 거요?"

원시는 대답 대신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한 승무원 쪽으로 고갯짓했다. 그들을 향해 당황한 표정을 하고 걸어오는 그는, 놀랍게도 조금 전 기장실로 그들을 안내했던 바로 그 승무원이었다. 철현은 황급히 옷깃으로 얼굴을 숨겼다.

"승객분, 곧 있으면 착륙하오니 어서 착석해 주세요."

영 딴소리가 들려오자 철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쳤다. 팔짱을 낀 원시가 한숨 섞인 투로 입을 열었다.

"제주공항에 착륙하는 게 가까워지니 갑자기 다들 암시가 풀려서는 준비하더라고요. 아주 해결된 건 아닐 겁니다. 원래부터 히스로 공항이 아니라 제주공항이 목적지인 것마냥 굴고, 우리를 기억도 못 하니까."

"조종사들도 마찬가지야." 어느샌가 그들에게 합류한 고영주가 뒤이어 말했다. "협박당하고 있던 것조차 기억을 못 해. 밖에서 멍하니 있다가 정신 차리고 교대하러 들어온 세 번째 조종사한테 들킬 뻔했지 뭐야. 두 분은 좀 어때?"

자리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셋은 빈 좌석에 몰래 걸터앉았다. 철현은 둘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서천에 대한 그들의 생각, 염려, 그리고 그들을 옥죄고 있던 구속구까지.

"…누가 그런 거야?"

"그걸 물어보는 찰나에 류 양이 왔소. 그리고 지금은 이 상황이 된 게요."

"일단 비행기가 완전히 착륙하면 그때 다시 접근해서 이야기하도록 해요. 지금은 어렵고—"

"불가능할 수도 있어."

원시와 철현은 영주를 바라보았다.

"아까 전투기 여러 대가 따라붙었어. 이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는지, 아니면 이 비행기를 중간에 착륙시키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저 따라다니고만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선의에서 시작된 거 아닌 건 알겠더라고."

"어찌 되었소?"

영주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바람으로 휙."

"어디서 보낸 건지는 알겠소?"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영주는 볼을 긁적였다. "내가 봤을 때는 SCP 재단, 그쪽이야."

"내 생각도." 원시가 끼어들었다. "가택신들을 탈출시킨다고 생각해서 옥리들이 대응 부대를 파견한 거겠죠."

"영등 그대가 물리쳐 주었다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제주에도 사람을 보냈을 것 같구료."

영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앉아 있어. 착륙하고 때를 보자고."

A380 항공기가 제주국제공항에 내린 것은 오전 8시 15분의 일이었다. 완전히 착륙하자 승객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셋은 재빨리 승객들이 걸음을 옮기는 곳과는 반대 방향으로 거닐었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도 승객들은 가득했다. 철현이 선두에 서서 2층으로 올라가는 몇 사람들과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때였다.

영주의 귀에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미약한 소리였고, 조금이라도 집중하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말 크기였다. 그러나 영주는 귀 기울였다. 다음 순간 그의 정신은 비행기가 아니요, 비행기와 제주 공항 전체를 내려다보는 창공에 있었다. 영주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부유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디작았던 그 소음은 어느샌가 점점 그 크기를 불리더니, 그가 공항 쪽으로 하강한 그 순간 비행기 소음이나 다름없는 크기로 전달됐다. 영주의 정신은 어떤 구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심안으로 그 공간을 바라보았고, 그제야 소리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완전히 무장한 채. 언뜻 보면 공항 경비대 같았지만, 그들이 들고 있는 소총이나 칼 따위의 물건들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었다. SCP 재단이 여기에 왔다.

영주는 눈을 떴다. 영주의 정신은 다시 비행기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앞서 나가고 있는 철현의 어깨를 다급히 잡아끌었다.

철현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왜, 왜 그래?"

"초, 총상…입은 자리요. 무슨 일입니까?"

"그분들, 만나러 가면 안 돼."

"어찌하여?"

"그들이 왔어. 재단이 왔다고." 영주가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 남아 있다가는 다 붙잡힐 게 뻔해."

철현의 얼굴이 굳었다. "설득이 끝나지 않았소."

"할 말이고 설득이고 문제가 아냐. 저분들이야 이 일을 어떻게 모면할 수는 있겠지. 그런데 당신들은? 당신들이 잡히면 다 허사야. 말짱 헛일이라고."

"나도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것보다 후퇴가 안전함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을 그렇게 가만 내버려둘 수는 없소."

영주가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부탁받아서 온 거라며.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다음번을 노리자고 하면 될 거 아냐? 설마 마고께서 그 정도로 각박하게 굴겠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럴 것이오. 허나 지금 내가 이리 집착함은 그저 부탁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오."

"그럼?"

"우선… 이번 일을 끝낸다면 적어도 숙박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확언을 받았거든."

영주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저 두 분을 이런 곳에 내버려 두고 돌아갈 수도 없고."

"이런… 곳?"

철현은 영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파운데이션의 일원을 붙잡았을 제, 그자의 휴대폰을 보았소. 거기엔 가택신 두 분에 대해 파운데이션이 적어놓은 것이 있더군. 그간 이 두 분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소.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소."

철현은 둘에게 천천히 그가 본 것을 설명했다.

"그런 와중에 이국의 땅덩이를 밟지 못하게끔 한 주술마저 그분들을 옭아매고 있는 거요."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고향 사람들에게 질시를 받고 거부당하는 심정을 안다오. 내가 스승님들을 만난 이래로 줄곧 그리하였소. 손님네, 마마의 신. 두창을 퍼트리는 역병신. 우리를 진심으로 반기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고 오직 두려움만이 가득했소. 해를 끼칠까 봐."

그는 여러 가지 심경이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하는 바요. 내가 그들의 처지였대도 그리하였을 것이오.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어찌 마음을 열고 존객으로 받아들일 수가 있으리오. 허나 그 두 분, 두 가택신께서는 나와 전혀 다릅니다. 그분들은 사람들을 수호하고 복을 내리며 길흉화복을 함께하던 분들이었소. 작금의 상황은 그분들께 가혹하다 못해 잔인하오."

"옥리들이 철수할 때까지만 기다려요." 원시가 대답했다. "우리가 이 상황을 초래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 요원만 빼고는." 그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 인질이 어찌 되었는지 압니까? 일전에 좌석 근처에 버려두고 난 뒤로는 행방을 모르는데."

"아까 찾으러 갔는데, 내 얼굴도 기억을 못 하더라고요. 다 똑같은 상태에요."

철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둘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감히 도박을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맞선다면 이런 비행기보다야 공항이 더 나을 것이었다. 보는 눈이 더 많았으므로. 더구나 그곳은 퇴로까지 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꼭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출구는 캐리어와 발걸음, 그리고 탑승객들의 말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렌트카 대여소나 시내로 향하려는 사람들의 물결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각기 다른 피로를 얼굴에 답고 행진하는 여행객들 하나하나의 얼굴은 색다른 점 없이 평범했다.

물론 그들이 신라인과 신, 그리고 하나라의 후손으로 이루어진 비행기 탈취범 일당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등산복을 입은 중년의 남녀 무리 뒤쪽으로, 연갈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얼굴을 숙인 채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크롭티 위에 점퍼를 입은 채 모자를 푹 눌러 쓴 또 다른 여자가 걷고 있었다. 살짝 묶은 초록색 머리칼이 삐져나와 있었다. 가장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는 가족 여행을 떠나는 듯한 대가족 뒤로 천천히 걷고 있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 핏자국 같은 얼룩이 배인 코트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먼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의 코트처럼.

셋은 아주 자연스럽게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바깥으로 나가는 출입구 부분에서, 누군가가 철현의 팔을 턱 붙잡기 전까지는. 그는 순간적으로 놀란 빛을 얼굴에 띄웠다가 잽싸게 지웠다. 캐리어 없이 코트 안에 회색 스웨터를 받쳐 입은 여자가 그를 멈춰 세운 것이었다. 행색이나 표정, 손에 들린 핸드폰까지 영락없는 여행객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미안해요. 제가 제주공항은 처음이라서요. 혹시 여기서 렌트카 셔틀버스 어디서 타는지 아세요?"

철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나도 이곳은 초행이라."

"아…" 여자는 아쉬운 듯했다. "저도 초행이라 잘 파악이 안 되네요. 렌트카 타실 생각이세요?"

"…지인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본능 어딘가에서 기시감을 알리는 경보가 울려댔다. 여자는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접촉해 오고 있었다. 그러질 않기 바랐지만, 그 의도가 너무나도 극명하게 읽혔다. 이렇게 드러내 놓고 다가오는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멍청하거나, 이렇게 허술하게 접근해도 충분히 제 의도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하거나. 철현은 미간에 주름을 잡은 채 어떻게 몸을 빼어 물러설 도리가 없나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너무 확연한 사실이라 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스스로 궁금할 지경이었다. 세 명 모두— 그, 류원시, 고영주 모두가 그 자리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질문하는 자가 달라붙어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철현은 영주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그 역시 여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절벽 위에서 그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감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죠."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비행기 안에서 제 지인 본 적 있으세요?"

철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남자인데, 이름은 오민철이고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SCP 재단 요원이에요."

그의 손에는 글록 17 권총이 들려있었다.

철현은 본능에 따라 옆으로 몸을 날렸다. 허공을 꿰뚫은 총알이 큰 소리를 내며 창문을 박살 냈다. 본모습을 드러낸 여자는 코트를 벗고 스웨터 안에 받쳐입은 전투복을 드러냈다. 한참 생글거리던 얼굴은 공항 바닥의 감촉만큼이나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의 총구가 다시 불을 뿜자, 철현은 몸을 날려 가까이에 있는 기둥 뒤에 몸을 은신했다. 완전히 당하고 말았다. 그들이 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감쪽같이 매복하고 있다가 덮쳐올 줄은 몰랐다. 철현은 기둥 파편이 튀는 소리에 긴장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당하고 말았다.

두 동료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그는 품 안에서 다자구야 들자구야 원통을 꺼내 드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총은 영주에게 주어버린 판국이다. 권총을 대처할 방도는 결국 채찍 말고는 없었다.

그는 원통에서 붉은 선이 튀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작게 주문을 외웠다. 불이 진동하면서 빠르게 길이를 늘이기 시작했다. 그와 거의 비슷한 시각으로 사격이 중지되었다. 총알이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철현은 때를 놓치지 않고 기둥 뒤에서 튀어나와 오라를 휘둘렀다.

여자는 가공할 속도로 몸을 뒤로 날려 굴렀다. 붉은 밧줄은 허공을 갈랐다. 철현은 줄을 갈무리한 뒤 앞으로 돌진하며 채찍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시각, 영주와 원시는 다가오는 적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영주의 순간적인 판단으로 둘에게 붙어 있던 자들은 바람에 밀려 나가떨어진 후였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어디선가 그들의 동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총으로 무장한 작자들이었다. 햇살에 번들거리는 소총의 외피는 음산해 보였다.

영주는 허공에서 활을 잡아채었다. 간신히 서 있을 뿐, 패닉 상태에 빠진 원시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작게 말을 걸었다.

"뱀."

원시는 숨소리만 거칠어질 뿐 대답하지 않았다. 적들이 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못 싸울 것 같은데, 맞지?"

"…아냐." 원시가 고개를 돌리고 그의 옆에 가서 섰다. "도울게."

"돕기는 무슨." 영주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상태로는 안 돼."

"…돕고 싶어."

"뒤에 서 있어. 앉아 있던지." 영주가 걸음을 내딛으며 큰 소리로 대꾸했다. "거기서 언니 하는 거나 잘 보라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영주의 활시위가 당겨졌다. 그리고는 무형의 화살이 발사되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소용돌이가 적들의 흉갑을 강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대원 여러 명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등으로 착지한 그들의 얼굴에는 생생한 고통이 어려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산개하여 접근하기 시작했다. 방금 나가떨어진 자들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랜 동작이었다. 영주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좌측에서 돌진하는 자의 미간을 노리고 활을 쏘았다. 활시위가 겨누어진 것을 발견한 남자가 몸을 틀었으나, 화살은 이변 없이 그의 머리를 맞추었다. 남자가 뒤로 쓰러지며 쿵 소리를 냈다.

그러나 나머지 대원들은 영주가 피하기도 전에 사정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영주는 황급히 활을 떨구고는 손들을 그들 쪽으로 한 뒤 주먹을 말아쥐었다. 거의 동시에 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한바탕 사격이 끝나자 대원들은 총구를 내리고 정면을 주시했다.

총알이 하나도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영주의 손 근처에서 강하게 일렁이는 기운이 산개하여, 어느새 그의 정면을 감싸는 거대한 방패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공중에서 총알은 으스러져 떨어졌다.

영주는 차츰 물러서면서 뒤에서 자신의 배낭을 미친 듯이 뒤지고 있는 원시의 뒷덜미를 붙잡아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대원들 역시 날아올 화살에 대비해 몸을 숨긴 상태였다. 영주는 원시를 바라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좀 어때, 도라에몽?"

"긴장한 거지 공황 상태에 빠진 건 아냐." 원시가 배낭에서 쓰레기를 꺼내 던지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다자구야 들자구야만큼 좋은 게 없네… 김철현이 잘 쓰고는 있지만."

영주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옆에서 싸우고 있는 철현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을 붙잡고 있었던 여자와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붉은 밧줄이 쉬익거리며 허공을 휩쓸고 지나가는 장면이 보였다.

"그러게, 잘은 쓰고 있는 것 같다."

"…이게 있어."

영주는 고개를 돌렸다. 원시는 초록빛 단검 두 자루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먼지가 조금 묻은 상태였지만, 칼날은 날카롭게 번뜩였고 균형은 잘 잡혀 있었다. 좋은 무기였다.

"하나라 기술로 만든 거야. 당신, 이거 쓸 수 있겠어?"

"활 있는데 뭐."

영주가 다시 활시위를 매기면서 대꾸했다. 재장전을 마친 대원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영주의 활이 다시 음을 연주하자 공항 안내판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굉음과 비명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부상을 입은 것 같았다.

"네가 쓰지그래."

"…난—"

"학자라면서. 그래, 도령이 이야기해줬어. 역사학자라고." 영주가 끼어들었다. "그렇다고 못 싸우는 건 아냐. 이 단검 다루는 법 배운 적은 없어?"

"…있어." 원시가 작게 말했다. "아버지한테."

"그럼 되겠네."

영주가 뭐가 문제냐는 투로 대꾸했다. 그의 활이 다시 한 번 음을 연주했고, 누군가의 신음이 들렸다.

"……자신이 없어."

영주는 활시위를 메기다 말고 돌아보았다. 원시가 조금은 부끄럽고 조금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과는 달리 쏘아붙이지 않는 말투가 생경할 따름이었다. 영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슨 대꾸를 해야 할 지 골랐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원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나 김철현처럼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지금은 그래야 하는데, 내가 발목만 잡을 것 같아 두려워.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게 두려워."

영주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다가 한 곳으로 멀리 화살을 쏘아 보냈다. 이내 돌풍이 불면서 한쪽 통로의 물건들이 전부 허공으로 날아갔다.

"서천 생활 수십 년 하면서 느낀 게 있어."

원시가 고개를 들고 영주를 쳐다보았다.

"인생은 타이밍."

"무슨 개소리야?"

"살 만해 졌구만?"

"헛소리 말고."

"인생의 모든 건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하더라고. 사업도, 생활도, 이사도 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지금도 같아. 너무 늦어져도 안 되지만 섣불러도 안 돼. 자금이 얼마나 급박해 보이든 간에 네 타이밍을 찾아. 네가 뛰어들 가장 최적의 시간대를 찾으라고."

영주는 몸을 완전히 틀어 원시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시는 얼떨떨하게 그 손을 부여잡고 일어났다. 영주는 웃고 있었다.

철현은 여전히 그 여자와 전투하고 있었다. 적은 이리저리 유연하게 피해 다녔다. 만만찮은 상대였다. 철현은 이를 악물었다. 고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정거리를 확보한 여자가 그에게 사격했다. 아주 느린 화면으로 총알이 날아오고 있었다. 조금 전 가택신들의 실상을 보고 난 뒤여서 그런 건지, 심장마저 느리게 뛰는 것 같았다. 총알이 오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채찍을 휘둘러 그 총알을 걷어냈다.

그리고 놀랐다. 그리고 상대방 역시 같은 수준으로 놀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자가 인상을 찌푸린 채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철현은 다른 총알 하나를 더 튕겨내고는 미처 막지 못한 다른 총탄들을 피해 몸을 숙였다. 확실히 어딘가 이상했다. 몸의 반응 속도가 상당히 빨라지고 있었다. 정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에는 뇌의 생각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유지했다. 갈라진 의식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잠들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상쾌하고, 또 잠잠했다. 그리고 빨랐다. 마치 약에 빠져들기 전 같았다.

그러나 철현은 알았다. 이런 상태는 약을 다시 한 경우뿐이라는 걸.

약을 한 적도 없을뿐더러 그런 기미도 있지 않았으니 진정으로 그런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몸 상태가 도래한 것은 그 비슷한 징후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현은 무심결에 옛일을 더듬었다. 언젠가 스리포틀랜즈에 갔을 때, 그때 구했던 약물이 있었다. 일종의 각성제라고 했었다. 그 약물을 하고는 며칠은 기이한 것들을 보았다. 몸의 힘 역시 몇 배는 강해진 듯했다. 약물을 하고 난 뒤에는 다시 며칠은 앓아누워야 한다는 점만 없었다면, 그는 그 약물을 자신의 독으로 선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어딘가 조금 전의 경험과 닮아 있었다. 색으로 나뉜 세상, 놀랍도록 향상된 몸,

그리고 다음 순간 철현은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가택신들이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어느샌가 저편에서 몇 명의 적이 더 나타나 총을 난사했다. 철현은 몸을 날려서 기둥 뒤로 피했다. 시멘트와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적은 총 10명이었다. 원시와 영주에게 6명, 이쪽에 4명.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어느 쪽에 화력이 집중되는지 쉽사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중앙으로 접근해오던 적 하나가 추락하는 안내판에 맞아 쓰러졌다.

아까 영주가 활로 또 한 명으로 쓰러트렸으므로 열 명에서 두 명이 제하게 되는 것이다. 철현은 붉은 줄을 거두고 원통을 옆에다 두었다. 싸우는 것이야 물론 중요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두 분, 제 말이 들립니까?"

공중에다 대고 말을 건다는 게 상당히 멍청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알았지만, 창피함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뜻을 전달해야 했다. 이게 마지막 방법이었다.

"제 말이 들립니까?"

어디선가 부드러운, 그러나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영주의 바람과는 다른 것이었다. 철현은 직감적으로 가택신들이 그에게 대답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듣고 있다고.

"파운데이션이 찾아왔습니다. 두 분을 데려가려는 우리를 이들로 하여금 살(殺)하려고 하나 봅니다."

바람이 일렁였다.

"…그러나 저는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총탄이 튀었다. 철현은 황급히 원통을 주워들고 바닥에 굴렀다. 다섯 명이 그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오랏줄 하나로는 버거운 싸움이었다. 단숨에, 여럿을 처치할 수 있는 전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철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두술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도 쓰질 않았으니 쉬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철현이 다급히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누군가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쓰러져 있는 광경이 있었다. 연갈색 코트에 피가 튀어, 기묘한 그라데이션을 만들어냈다. 그의 얼굴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 고통이 어리어 있었다. 영주였다. 그가 총에 맞았다.

그는 기둥 밖으로 튀어 나가면서 채찍을 휘둘렀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는 진언이 염해지고 있었다. 허공으로 흘러나가는 붉은 밧줄이 진언에 감화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뱀의 머리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가장 가까이에서 접근하던 남자의 목을 옥죄었다. 그의 목에서 미약한 숨이 컥, 하고 튀어나왔다.

그의 목과 얼굴에 수포가 돋아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기어들어가는 비명이 들렸고, 그의 손은 반사적으로 밧줄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타개책이 아니었다. 불처럼 뜨거운 열기가 줄에 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울렸다. 이제 남자는 온몸을 태우는 듯한 열과 밧줄에서 전달되어 오는 열, 목을 감싸고 있는 올가미의 공격을 버텨내야 했다.

철현은 채찍을 뒤로 빼면서 끌려오는 남자의 얼굴을 어깨로 가격했다. 남자는 그제야 비명을 멈추고 얼굴을 바닥으로 하여 쓰러졌다. 철현은 멈추지 않고 달려오고 있는 다른 특무부대원의 입 부위를 잡고 던져버렸다. 쓰러진 부대원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붉은 밧줄이 그의 발목을 휘감았다. 밧줄이 닿은 부분부터 수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부대원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철현이 원통을 끌어당기면서 얼굴이 근처의 기둥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철현은 몸을 날려 둘이 있는 쪽으로 슬라이딩했다. 원시는 영주를 안고 상처를 지혈하고 있었다. 새파래진 원시의 얼굴은 절박해 보였다.

"상태가 안 좋아. 중요 부위는 빗겨갔는데 그것보다도, 갑자기 기력을 잃었어."

철현은 주위를 살피며 영주에게 고개를 숙였다.

"좀 어떻소?"

"…갑자기 몸에 모든 힘이 빠졌어. 체력도 그렇고 신통력도 다 사라진 것 같아. 바람 하나 일으킬 엄두가 안 나."

철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총에 맞는다고 신은 힘을 잃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또 개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아무리 심한 상처를 입는다 한들 신통력까지 잃는 경우는 없었다.

"…설마." 철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느낌이 사인검에 베인 듯하지 않소?"

"난 안 베여봐서 모르겠는데." 영주가 힘겹게 대꾸했다. "그거 벽사진경의 검이잖아. …난 삿된 취급받아본 적이 없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있는 편이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감각 역시 기억하고 있지. 우선은…"

철현은 적들 쪽을 바라보고는, 방금 때려눕힌 자의 육체를 발견했다.

"…별로 쓰고 싶지는 않은 술법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의 손이 수인을 취했다. 그리고는 빠르게 손바닥을 남자 쪽으로 향하고는, 손목을 비틀며 원을 그렸다. 이내 남자의 몸이 벌떡 일어섰다. 아니, 일으켜졌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정신은 깨어나지 않은 채, 몸만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있었다. 기괴하게 늘어진 팔다리와 묘하게 힘이 없는 얼굴이 퍽 기이해 보였다. 철현이 손짓하자, 남자의 몸은 마구잡이로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뒤이어 고함과 총소리가 났다.

철현은 그쪽에는 더 신경 쓰지 않고 영주를 모로 눕혔다. 그리고 안아 들었다. 2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영주의 숨소리는 점차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는 원시에게 고갯짓하며 2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달려갔다.


2층은 텅 비어있었다. 불이 꺼진 채 찬바람이 부는 복도는 망한 세상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처럼 섬뜩했다. 방금 그들이 내린 게이트 역시 사람이라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무언가 수를 써둔 것이 틀림없었다. 철현은 영주를 벤치에 앉히고 원시가 건넨 붕대로 상처를 묶었다.

"이제 좀 어떻습니까."

"…좀 나아졌어. 그래서, 아까 그 사인검 이야기는 뭐야?"

철현은 에스컬레이터 쪽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그 한 주는 내게 퍽 힘든 나날이었소. 두술의 운용도 전처럼 폭넓게 구사하는 것이 불가능했지. 내가 보기에, 영등 그대의 상황도 이와 같은 듯하오."

"난 총에 맞은 거야… 칼이 아니라." 영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예 다르잖아."

"…사인검은 인년 인월 인일 인시에 주조된 철로 만드는 검이오."

철현은 낮게 속삭였다. 방금 떠오른 아주 섬뜩한 생각을 되짚으면서.

"…사인(四寅)의 철로 총탄을 주조하였다면?"

"…말도 안 돼." 원시가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다시 총성이 들렸다.

"…일단 여기서 몸을 추스르고 있으시오. 어떻게든 저들을 막아 볼 터이니…"

철현이 말했다. 영주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느끼는 듯했다. 철현은 원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류 양은 좀 어떠시오."

"…난…"

철현은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원시를 응시했다. 전쟁에서도 그런 자들이 있었다. 평범히 농사를 짓던 인간이든 고위 계급의 자식이든 상관 없이 싸움이라는 것 자체에 어떤 공포를 느끼는 부류. 그런 이들은 위험했다. 준비되지 못하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었다.

"류 양."

원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긴장과 분노, 그리고 공포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할 수 있겠소?"

"못 하면 어쩌려고요. 하, 그냥 가택신 만나러 간다길래 따라왔지 누가 옥리들이랑 싸우게 될 줄 알았냐고…"

철현은 피식 웃었다.

"…자연재해는 의지의 부재 하에 더 잔혹하고 안타까워진다고 하였지요."

원시는 고개를 들었다. 1년 전에 했던 이야기였다. 그럼으로써 철현을 학살자라고 불렀다. 자의로 사람을 죽여왔다고.

"지금 이 상황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엎친 데 덮친 격의 일들이 너무 많이 따라오니…"

원시는 실소를 흘렸다. 웃으니 긴장은 조금 나아진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저 밖에 적들은 있었다. 웃는다고 적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생각에 이르니 다시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진정으로 사람이 강해질 때에는 그런 무의지에 대항할 때입니다. 인간의 발전은 곧 그런 무의지에 대항하며 일궈진 것이 아닙니까?"

철현은 원시를 바라보며 원통에서 밧줄을 풀렀다. 부대원들은 빈틈없이 준비하는 듯했다.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자세히는 들리지 않았다. 원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작게 대꾸했다.

"…그거 당신이 생각해낸 문구 아니죠."

"…어떻게 알았소?"

"수신도 경전에 있길래."

철현은 멋쩍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따라오시오. 지금이 그 무의지에 대항할 때인 것 같으니…"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수가 줄어든 적들은 조심스럽게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뒤면 혼잡한 지형 속에서 그들과 대치해야 할 상황이었다.

원시는 단검을 주워들고 일어섰다. 오랜만에 양손에 자리한 두 단검은 어딘지 모르게 생경하면서도 불안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자신을 해칠 것만 같은 공포가 일어났다.

그러나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공포를 제외하고도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이 있었다. 원시는 어깨너머로 상처를 움켜쥔 채 앉아 있는 영주를 바라보았다. 그저 불편하고 짜증스러운 상태였지만 저렇게 다치는 꼴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제 옥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더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철현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고 그 자신을 다치게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될 일이 아니었다. 영주가 한 말이 기억났다. 싸우려면 지금이 때였다. 지금이 타이밍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몸은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원시는 이를 악물었다. 몸은 언제나 자신의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도 남아 있는 공포의 존재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덤벼들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몸을 내던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저 남자처럼.

철현은 원시를 뒤로하고 앞으로 계속 걸음을 내디뎠다. 주위의 사물들로 엄폐해놓은 뒤가 잘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선은 오로지 그에게 집중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현은 원통을 꼬나들고 왼발을 앞으로 디뎠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현은 왼손으로 수인을 취하며 자세를 낮췄다. 침 하나 제대로 삼킬 수가 없었다.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압력감이 정신을 괴롭혔다.

이윽고 무언가가 날아왔고, 철현은 서둘러 그것을 쳐냈다. 에스컬레이터 하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하니 연막탄인 것 같았다. 동시에 적들이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철현은 날아들 총알을 예상하고 옆으로 몸을 날렸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완연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발포 소리만 들려오고 무언가가 박히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철현은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자신의 앞에 누가 서 있는지 깨달았다. 전혀 예상치 못하던 모습이었다. 푸른색 비늘이 보였다. 쇠처럼 서늘한 느낌의 비늘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원시가 총에 맞았다.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류 양!!"

그는 소리를 질렀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고통이 목소리에 실렸다. 이는 절벽 위에 서 있는 듯한 절박함과도 같았다. 너무나 익숙한, 그러나 오래 겪지 않아 무뎌져 버린 감각이었다. 뼈아픈 상실감과 무력감이 심장을 강하게 때렸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원시는 쓰러지지 않았다.

원시는 고개를 돌려 철현을 바라보았다.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제야 철현은 그가 하나라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아까 보았던 초록색 비늘의 용도를 깨달았다.

원시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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