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귀향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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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날과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총탄과 비늘이었을까. 전투의 소음은 아주 먼 곳에서, 혹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초록 몸이 허공을 가르고 나아갔다. 회색 전투복을 찢고 살을 찌르는 초록 칼날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손안에서 바람처럼 돌다가 갑자기 살갗을 쑤시는 단검은 초록 몸에 달린 부속물처럼 자연스럽게 방향을 잡았다.

재단 특무부대원들이 사방에서 총을 쏘아댔다. 총알이 초록 몸에 자꾸만 맞았다. 그러나 꿰뚫을 수는 없다. 비늘에 맞아 으스러질 뿐이다. 물론 얼굴과 복부에 가해지는 타격은 아팠지만, 견딜 수 있을 정도였다.

류원시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적들은 그곳에 있었다.


김철현은 원시가 한 사람을 쓰러트리고 또 한 사람에게로 달려드는 것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전혀 싸울 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단검을 상당히 잘 다루고 있었다. 원시의 솜씨는 아름다웠다. 달려들어 적의 육체를 불능 상태로 만들고 공세를 가다듬는 그의 전투는 능숙했고 젊은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초록빛 돌풍 사이에서, 원시의 몸은 춤을 추듯 여유롭게 공간을 누비고 다녔다.

철현은 조금 안심하며 벽에 머리를 기댔다. 여전히 가택신들의 느낌은 남아 있었다. 몸에 흐르는 기이한 감각이 그를 증명해줬다. 철현은 입엣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쉬며 전투가 벌어지는 장면을 응시했다.

"…얼마나…"

철현은 원통을 붙들고 일어났다.

"…얼마나 오랜 시간 그곳에서 계셨던 겁니까."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와 이런 말이 무용함을 압니다만… 덧없지 않습니까, 인세(人世)란 것이."

바람이 미지근하게 불어왔다. 지금 이 순간만은 그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 드넓은 벌판과 고즈넉한 가옥에 동시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두 분께서 제 말을 부디 누엽게 여기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부디…" 철현은 입을 앙다물었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두 분을 여기 매여 있게 한 건지,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전투는 이어졌다. 원시는 이전보다 속도를 높여 빠르게 적들의 진영을 헤집었다. 피격당함을 대비할 필요가 없으니 더욱 적극적인 공격이 가능했다. 그리고 원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원시는 짐짓 여유롭게 칼을 공중으로 던져올리고는, 접근하는 대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적이 비틀거림과 동시에, 눈 깜짝할 새 공중에서 바람 으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원시의 칼이 적의 복부를 쑤시고 나왔다. 뒤이어 내지른 주먹에 적은 바닥으로 떨구어지고 말았다. 원시는 희열에 찬 얼굴로 철현 쪽을 되돌아보았다. 철현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노련하지 못한 쪽은 싸움보단 평정심인 듯했다.

이제 적은 네 사람이 남았다. 철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원시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그가 작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람이 밀려들어 와 흉터 난 발목을 드러나게 했다.

"두 분이 여기 남아있었던 것은…희망, 그 희망이란 것이… 아닙니까?"

감정이 책장 넘어가듯 빠르게 전환되었다. 공허였다. 숨길 수 없는 공허함이 피부를 타고 퍼졌다. 그의 감정이 아닌 다른 자의 감정이었다. 누구인지 알았다. 그 감정의 뿌리가 너무나 깊었다.

"두 분을 알아보고 집으로, 고향으로 데려갈 자가 나타나리라는 희망. 이전처럼, 모든 게 망가지기 전으로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까."

금속의 빗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아."

철현은 숨을 들이켰다.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나 두려운 생각이 뇌리를 스친 까닭이었다. 너무나 두렵고 안쓰러워 몰아내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사실의 과녁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는 한 화살이기도 했다. 감정의 지평을 넘은 어떤 깨달음이 피부를 가르듯 아프게 전해져 왔다.

"…두 분이 스스로 매어 놓으신 게로군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누군가 그곳에서 강제로 끌어내려고 할 제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도록…"

바람이 서늘하게 흘러들었다. 약한 바람이었지만 그는 아프다고 느꼈다. 통증이 일었다. 피부 아래서 끓어오르는 어떤 울분 같은 통증이었다. 심상이 떠올랐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끝까지 조타를 멈추지 않는 선장. 선장의 얼굴은 창백하고, 담대하고, 굳세고, 두려워 보인다. 고귀한 일이지만 그는 죽을 것이다. 끝까지 외롭게, 배와 함께.

"파운데이션이 얌전히 놓아둘 리가 없었겠지요… 분명 이 비행기 안에서 두 분을 빼내려고, 마치 종기처럼 적출해서 제 표본에 넣어두려고 그리도 안간힘을 썼을 텐데…"

그러나 그들은 실패했을 것이다. 요원의 문서는 모든 것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 행간 사이에 더 큰 진실이 숨어 있었다. 여백 사이에 제 몸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아무도 제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길 염원하는 간악하고 나약한 진실. 그들이 행한 시도와 실패를 그들은 쓰지 않았다. 아주 간결하게 쓰인 보고서… 그러나 실상은, 모든 일이 벌어진 그 비행기 위의 고난은 간결치 않았을 것이다.

불현듯 조사국 시절의 이미지가 떠올라 철현은 머리를 흔들었다.

적의 탄창이 비어가고 있었다.

점차 부대원들 사이서 원시를 향해 사격하는 것을 중단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에게 총알이 먹히지 않음은 이미 자명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계속 사격할 수밖에 없었던 건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원시의 공격을 막기 위함 때문이었다. 철현은 점점 더 걸음을 옮기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사인탄만 없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그때였다.

처음으로 철현과 교전했던 여자가 총을 옆으로 던지고 코트 자락을 열었다. 여자의 허리에는 검이 매여 있었다. 손잡이에서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특무부대원들도 이내 그의 행동을 따라 했다.

철현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살기가 그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이 일을 끝내겠다는 비장한 다짐과 동시에 상대를 죽이고 말겠다는 살의가 뒤섞인 기운이었다.

"천도-09."

여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발도!"


철현은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사태를 관망했다. 검을 뽑아든 부대는 총으로만 공격하던 이전의 모습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까지 싸웠던 존재가 갑자기 다른 것으로 화(化)한 듯하였다.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전술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철현의 시야에 그간 싸워온 모든 싸움의 잔상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총과 검, 그리고 이를 사용하고 있는 자들의 기세.

그들은 갑작스레 위험해졌다. 단순히 검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부대의 인상은 목측으로 가늠할 수 없는 머나먼 곳에서 기어오는 사나운 적의로 덧칠되었다. 피로 얼룩진 검신(劍身)이 눈을 어지럽혔다. 총은 대수가 아니었다. 총은, 그들에게 단지 도구였다. 허나 칼은 달랐다. 칼은 그들에게 진정으로 살(殺)할 수 있는 기물이었다. 그들은 칼을 듦으로써 진정한 적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본 것을 원시는 보지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시는 기세를 거두지 않고 바로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철현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덜컥 내려앉았다.

"잠깐, 류 양!"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여자의 검집에서 검이 빠른 속도로 튀어나와 원시의 복부를 강타했다. 그는 마른 숨을 뱉어내며 쓰러졌고, 이내 여자의 검이 다시 한 번 원시의 머리를 때렸다. 원시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안 돼."

폐에서 공기가 빠져나갔다. 같은 부위를 다친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원시의 축 늘어진 모습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했다. 제아무리 하의 후손이라지만 내상을 입으면서까지 오래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총탄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조금씩 원시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여자의 공격이 치명타를 날린 것이었다. 아주 정확하고 깔끔한 공격이었다.

철현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차가운 바람이 일렁였다.

"이제 혼자죠?"

여자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의 적의는 지우지 않은 상태였다. 미소와 적의가 섞인 표정은 시체의 얼굴에 피어난 웃음처럼 섬뜩하고 이질적이었다.

"참 별일도 다 있죠. 세 사람이서 하이재킹을…"

"그리하여 우리를 다 살(殺)하려 하는건가." 철현이 말을 끊었다. "물러가라. 감히 네놈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미안하지만 상관할 바가 맞아요. 이게 우리 업무라서." 여자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너흰 늘 그런 식이지, 파운데이션. 너희가 원하면 나서고, 아니면 손을 쓰지 않는다. 내 동료들을 잡아갔을 때에도, 내 족속이 조사국에 고통받았을 제에도 너흰 이득을 볼 때만 손을 쓰더구나. 한때는 그를 반겼으나… 지금은 아니다. 저분들을 모셔갈 것이다. 비켜라."

"역시 미안하지만, 그것도 안 될 것 같아요." 여자가 칼을 꼬나 들었다. "이미 너무 늦었어."

그리고 적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빼든 검은 사인검이었다. 철현은 몸을 젖히면서 검날에 새겨진 일곱 별을 알아보았다. 검은 바탕에 빛나는 일곱 점. 사인의 철로 총탄까지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을 바로 그 검이 갈랐다. 한 번만 실수해도 바로 베일 것만 같은 위력이었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오래 끈다고 될 일도 아니거니와 파운데이션에서 원군을 보낼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전술 없는 돌격은 자살 행위였다. 이제 요행을 바랄 계제는 아니었다.

철현은 달려드는 대원들을 피해 날렵하게 몸을 피했다. 이따금 근접한 칼날은 채찍을 거둔 원통으로 받아냈다. 원통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갈라지지 않았다. 다시금 원시의 가방에 무슨 물건들이 들어있는 건지 의문이 드는 동시에, 적이 돌진해 왔다. 이리저리 산개하다가 결집하는 적들의 전법은 혼란했으나 날카로웠다. 철현은 그들의 복심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대원들의 칼날이 공중에서 사납게 춤을 추었다.

그는 점점 더 뒤로 몸을 뺐다. 대원 하나가 그를 바짝 추격했다. 철현은 그자가 달려드는 양을 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정수리를 내리찍으려는 검을 바로 응시했다. 순식간에 모든 광경에 시야로 들어왔다. 칼날의 번뜩임. 바람의 나부낌. 창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의 안온함. 정신이 한데 모이는 느낌이 들었고, 그리고 그 즉시 그의 팔이 교차해 쭉 뻗어졌다. 동시에 칼을 내리치던 부대원의 손목은 두 팔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부대원의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철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수십 년간 계속 단련한 동작을 잊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재빨리 오른쪽 팔꿈치로 부대원의 턱을 강타하고, 왼손 주먹으로 옆구리를 후렸다.

왼쪽에서 칼을 꼬나 들고 다른 자가 달려오자, 철현은 싸우던 적의 목을 움켜쥐곤 오른손으로 채찍을 휘둘렀다. 붉은 밧줄이 이내 그의 다리를 휘감아 쓰러트렸다. 쿵, 하는 큰 소리와 더불어 켁켁대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목 졸린 소리를 내는 부대원의 얼굴이 새파래지고 있었다.

그리고 철현은 왼손의 힘을 잃었다.

무엇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채 철현은 본능에 따라 몸을 피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팔에 격통이 일면서 모든 것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베였던 것이다. 철현은 상처를 움켜쥐었다. 방금까지 붙들려 목 졸리는 소리를 내었던 특무대원을 부축하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분명 그의 피일 것이었다.

상처는 깊지 않다. 그러나 힘은 속수무책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철현은 이를 악물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영주가 이야기한 탈력감이 진정으로 이해되었다. 힘이 사라져가면서 정신을 맑게 해주었던 기운과 기이한 광경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두술도 더는 쓸 수 없었다. 간신히 서 있기만 할 수 있을 뿐.

그는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다잡았다. 쓰러진 원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뒤에는 영주가 있다. 제힘을 잃어버린 채로. 그마저도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싸워야 했다.

여자가 부축하고 있는 대원의 목에 돋아났던 수포가 점점 흐릿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두술의 여파가 사라지면서 금세 회복하고 있었다. 채찍에 넘어진 적도 천천히 일어나는 중이었다.

"사인검의 효력이 꽤 강한 편이죠?"

대장 격으로 보이는 여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의 검은 다시 검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질병을 다루는 신이라… 이렇게 진짜 사람 같은 류는 처음인데."

"…사람 맞다."

철현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취했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헛웃음이 지어졌다.

"그대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인가."

"알아보네요."

여자의 곁에 있던 대원이 작게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많은 것을 말한다고 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기밀도 아니고. 좋아요, 우리 질문 하나씩 할까요? 어디서 왔어요? 정체가 뭐죠?"

여자가 궁금한 듯 물었다. 너무나 활달한 말투였다. 마치 조깅하다 만난 옆집 사람에게 가족의 안부를 물어보듯이.

"…내 정체라."

정체, 아아 정체. 그 말만 벌써 몇 번째인지. 철현은 입을 꾹 닫은 채 여자를 노려보았다. 그때, 절간 앞에서 죽어간 이후로 세상은 그에게 그 물음을 물었다. 모두가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 그래서 그 질문에 답하려고 참 많이도 애를 쓴 것 같다. 김철원, 김철영, 이진현, 석이현, 박현 — 수많은 이름. 신라인이었고 고려인이었으며 조선인이었던 수많은 이름들. 그러나 진정으로 그의 것은 아니었던 이름들. 일본은 또 어떤가. 호소 한냐, 니카호 한냐, 그리고 한냐라는 이름이 악귀의 손에 넘어가면서 바꾼, 니카호 한노. 수집원 소속이었고 이자메아 소속이었던… 그런 이름들. 사방에서 날아오는 질문에 대꾸하려고 참 많은 가죽을 뒤집어썼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그 절간에서 두창으로 죽으면서 남길 가죽 하나 없어 끝없이 남의 가죽을, 그리고 존재한 적도 없던 가죽을 끝없이 뒤집어쓴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뒤집어쓸 가죽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은 연희가 죽으면서 이미 다 태워지고 말았다. 전쟁의 업화 속에서 태워졌다. 그는 여자의 질문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이미 대답이 너무나 자명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최초이자 마지막 이름, 진실된 이름.

철현은 천천히, 명확하게 대답했다. 사라진 고향을 대답했다. 호명하듯이 대답했다.

"김가 철현. 금성 사람 김철현."

그리고 그의 몸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도리채는 쓰러지지 않는 남자의 형상을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이렇게 징글맞은 상대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리게 쓰러지지도 않는 저 작자. 그자의 눈은 악다구니를 지르고 있었다. 거센 비명이었다.

덩달아 도리채의 피 역시 끓어올랐다.

부대원 셋이 동시에 협공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전보다는 확연히 느려진 속도로 날아드는 칼날을 피했다. 부대장은 물러나 그들이 싸우는 양상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아주 좋은 자료였다. 머릿속에서 그들의 행동, 속도, 전술이 빠르게 기록되고 있었다.

남자는 어느 편 반신을 더 많이 사용하는지 가늠하기 힘든 싸움꾼이었다. 리채의 시야에 아주 느린 속도로 남자의 움직임이 인식되었다. 그가 내지르는 모든 팔의 폭은 넓었다. 그러나 이내 왼팔에 담긴 수세가 방금 전 공격의 빈틈을 보충했다. 맨손 격투에 능한 편까지는 아니었지만 재능이 있는 자였다. 그게 아니라면 지독하게 훈련받은 전적이 있거나. 금세 대원의 칼이 좌편 상방에서 내리꽂혔다. 남자는 채찍 줄을 거둬들인 원통으로 이를 막고, 동시에 정면에서 달려드는 대원의 복부를 걷어찼다. 숨이 막히는 소리가 울리며 뒤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완력 역시 나쁘지 않았다. 거물에서 보낸 작자란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남자는 그러나 수세에 몰려있었다. 사인검에 베여 위축된 신통력과 그 때문에 확연히 약해진 신체. 검을 든 세 대원과 맞붙기엔 어려운 상태였다. 더구나 그에게는 이제 이렇다 할 무기마저 없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듯했던 채찍은 신통력이 막히면서 그저 단순하게만 작동하는 줄이 되었을 뿐이었다.

좌측에서 돌진한 부대원의 칼날이 바람처럼 산뜻하게 내려오는가 싶더니 형세를 바꾸어 다시금 남자의 팔을 찔렀다. 인상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리는 품새가 제법 깊게 찔린 듯했다. 남자는 자세를 바꾸어 몸을 피했다. 대치 중이던 오른편 대원의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얼굴 옆을 스쳤다. 남자의 자리는 뒤로 점차 물러나고 있었다. 공세는 쉽사리 전환되지 않았다.

남자의 손에서 순간 원통이 회전하는 듯싶더니 거세게 밀고 들어오던 오른편 대원의 몸통을 후리고 지나갔다. 뒤이어 날아든 재빠른 레프트-라이트-레프트 조합에 대원은 주춤거리며 후퇴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퇴로를 확보한 남자는 자세를 고쳐잡고 제 적들을 응시했다. 도리채는 퍽 재미스러운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다. 제 능력만 믿고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자가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싸우는 법을 배운 자였다. 그 내력을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싸움이 더 구미가 당기는 이유가 되었다.

세를 회복한 부대원들이 칼날을 겨누고 남자에게 접근했다. 퍽 기이한 일이었다. 칼 든 자들이 뿜어내는 적의와 그에 맞서는 무기 하나 없이 부상당한 상태로 서 있는 남자가 뿜어내는 적의는 비슷한 정도로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정적과 비명 지르는 긴장감이 공기에 눅진하게 눌어붙었다. 멀찍이서 봐도 두 진영 사이의 날카로운 탐색은 물질과 물질이 부딪히듯 실체 사이의 충돌처럼 느껴졌다. 누구 하나 쉽사리 공격에 나서지 못한다. 거대한 장벽이 서로를 갈라놓는 것처럼.

그리고 대원 하나가 장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는 즉시 공격적으로 덤벼들었다. 남자의 조치가 취해지기도 전에 그의 칼은 그가 나아갈 곳을 예비하고 있었다. 섬광. 반쯤 베일 뻔한 남자의 얼굴이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거세게 고함을 질렀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드는 검의 행방을 쫓으며 동시에 상처 입은 팔로 막아내는 공격, 일련의 과정은 물리적 시간으로 규정할 수 없는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베르그송이 말했듯 지속을 자각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시간의 흐름이 어떠하든 그러한 것은 생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는 곧 거부되었다. 한 싸움에 소속된 이들의 시간은 공유된다. 지금, 그 장소,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그 자체로 실존적인 측면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서로의 운동을 실시간으로 경험하는 자들의 동질감일 테다. 아픔과 고통을 주고 또 그것을 받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얻어지는 현상일 것이다.

남자는 전적으로 받는 쪽에 속했다. 합세한 다른 두 대원의 칼날이 허공을 스치다가 어느 순간 허벅지를 베었다. 남자는 고통스럽게 신음을 흘리고 반쯤 엎어지듯이 자세를 낮추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그는 그마저도 치유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이미 너무나 지친 상태라 약간의 상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이거나.

도리채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점점 더 가까이 거닌다. 싸움의 형국은 이제 너무나 완연했다. 남자는 잘도 막아내고 있었지만 이제 그럴 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싸움을 바라본다. 단지 사인탄의 낭비였던 것일까. 처음부터 사인검으로 처리하면 되는 상대였다면, 그것은 참으로 시시한 일이다. 방법론적인 문제는 수정하면 된다. 그러나 강력한 상대는 쉽사리 만나지기 어렵다. 섣부른 기대는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의 팔과 허벅지는 피로 흥건했다. 조문객처럼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데도 그러한 붉은 기운이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점점 밀리면서 자세를 낮췄다. 짧은 원통으로 긴 검을 막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정신 차리지 못하면 금방 목숨줄을 끊어놓을 시퍼런 금속의 기운이 자꾸만 목을 향해 날아왔다. 남자의 자세는 자꾸만 흐트러지고 무너져내렸다.

얼마 못 가 결착이 나겠군. 도리채는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섰다. 괜한 기대였다. 괜한 기대였고 괜한 두근거림이었다. 결국 남자도 같은 부류였다. 조금 더 강할 뿐이었다.


그리고 큰 소리가 들리자 여자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대원 하나가 나동그라져 있고, 철현은 서 있었다. 그는 전신에서 느껴지는 강한 통증을 감내하고 서서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는 여자를 쏘아보았다. 어떠한 무언가를 담은 눈길이 아니요, 단지 완연한 혐오의 표출이었다.

호반손님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은 많았다. 그러한 것 중에는 완벽한 열세일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사용할 일도 없었고 스스로 갈고 닦은 지도 오래되어 그저 까먹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러한 상황에 맞닥뜨리니 몸이 알아서 움직여 주었다. 마치 한 판 업어치기를 무의식적으로 해낸 듯이.

철현은 거의 춤을 추다시피 역동적으로 움직인 몸을 털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전환된 형세에 살짝 당황하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이제부터 조금 달라질 거요."

잠시 주춤하던 대원 하나가 덤벼들었다. 처음으로 대치했던 적이었다.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알고 있었다. 상방 좌편. 철현은 팔을 뻗어 칼 손잡이를 막고는, 안으로 파고들어 명치에 팔꿈치를 날렸다. 그리곤 앞으로 메쳤다. 대원이 지르는 고함이 느린 속도로 들려오다가, 땅바닥에 떨구자, 신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

대원의 손아귀에 힘이 없어지면서 칼이 육중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철현은 대원이 그걸 줍기 전에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방심할 틈은 없었다. 금세 후방에서 달려드는 적을 피하기 위해, 철현은 앞으로 굴렀다. 칼을 잃은 적은 전투복에 부착된 단검을 빼내 다시 덤벼들었다. 이제 대원들의 공격은 점차 조급해지고 있었다. 칼날이 요란하게 부딪히며 심지어는 저들끼리도 충돌했다.

기회였다.

철현은 살짝 채찍을 풀어 줄을 올가미처럼 묶었다. 사정없이 허공을 찌르는 칼날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다시 형세를 바라보며 거리를 두었다. 기다려야 한다. 때는 오고 있었다.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능하다면 이 싸움의 판도를 전환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그의 머릿속을 크게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쪽에서 올라오는 두 개의 칼날이 보였다. 철현은 그 즉시 도약해 뒤로 물러나며, 공중에서 몸을 틀어 저 멀리 날아간 사인검을 바라보았다. 손에 들린 원통에서 붉은 밧줄이 흘러나왔고, 아주 느린 속도로 허공을 꿰뚫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사인검의 손잡이에 가 닿을 때까지. 손잡이를 휘감아, 단단히 동여맬 때까지.

그 부대원은 칼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무언가가 자신의 관자놀이에 직격하기 직전이라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몸을 피했지만, 뺨에 느껴지는 통증은 피부를 베였음을 알려주었다. 대원은 뺨을 감싸 쥐고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방금 전까지 무기 없이 버티던 남자의 손에 사인검이 묶인 채찍이 들려있음을.

공기가 일변 변화했다.

철현은 조심스럽게 채찍에서 검을 끌렀다. 검은 날카로웠고 잘 관리된 상태였으며, 솜씨 좋은 장인이 벼려낸 물건이었다. 햇빛이 날아와 으깨지는 칼날의 모습은 찌르고 베는 전(戰)의 심상과 다투어 바로잡는 정(訂)의 심상이 포개져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아주 고가에 거래되었을 칼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고 부드럽게 자세를 잡아보았다. 먼 옛날 검술을 처음 배웠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도 지금처럼 새롭고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손목을 꺾으면서 한 바퀴 돌려보았다. 검은 무거웠지만 지나치지 않았고 힘을 싣기에 충분했다. 검의 끄트머리를 노려볼 때, 그곳에서 세상은 점멸하고 오로지 정(正)한 기운만이 검광으로 피어올랐다. 사인검을 찬 이금위 무관들과 전투했던 생각이 났다. 그때 싸움은 길고 지독했다. 적의 적의는 인간이 품는 흔한 적의라기보다 다른 종류의 무언가였고 그렇기에 부수기 어려웠다. 그는 농번기의 농부처럼 노동하듯이 힘겹게 적을 베어나갔다. 그래야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대원들이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었다.

철현은 우측에서 허공을 날아드는 칼날을 피했다. 대원의 칼날이 그가 있었던 허공을 갈랐다. 철현은 몸을 이리저리 피하며 소용돌이처럼 밀고 들어오는 공세를 가늠했다. 이따금 공중에서 맞부딪히는 칼과 칼의 소음은 익숙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옛 시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적의 검이 허공에서 목을 노리고 날았다. 철현은 칼끝을 낮추었다가 순식간에 뒤로 물러나며 후방의 칼날을 밀쳐냈다. 공세와 수세가 빠른 속도로 전환되며 공기를 어지럽혔다. 철현은 손목을 비틀며 양쪽에서 접근하는 대원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세(勢)를 가다듬었다. 살기로 가득한 단단함이 저릿하게 팔을 진동했다.

철현은 멈추지 않았다. 적의 공세는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바심이 검의 길에 그대로 전해져, 어느새 속도가 힘을 추월했다. 검을 빼앗긴 자의 공격이 가장 그러했다. 짧은 칼날이 회오리처럼 눈앞을 어지럽혔다. 원시가 보여주었던 공격과는 다른, 단단하면서도 확실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적은 실상 유효한 타격을 전혀 입히질 못했다. 점차 적의 힘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가장 적격인 때였다.

철현은 일순간 몸을 틀어 뒤로 달려나갔다. 적 역시 따라붙었다. 갑작스럽게 후퇴하는 철현의 행동을,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둘은 잠시 달렸다. 마침내 새하얀 벽면이 나타날 때까지.

철현은 그 벽면을 밟고, 도약해서 대원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검이 공중에서 용솟음치다가, 이내 그 대원의 다리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피가 튀기면서 곡성이 울렸다. 근육의 꿈틀거리는 파동이 고스란히 손목에 전해져왔다. 철현은 고통스러워하는 대원의 둔부를 칼 손잡이로 후려치고는, 천천히 무너지는 적의 몸을 다른 부대원들에게 밀어버렸다.

이제 적은 두 사람.

쓰러지는 동료를 보고 당황한 듯, 두 대원의 칼놀림은 점점 번잡해지고 무뎌졌다. 철현은 재빠르게 치고 나가 강하게 밀어붙였다. 그의 몸짓은 이전과는 다른 결을 취하고 있었다. 허공에서 번뜩이던 칼날이 춤을 추더니 우측의 적에게 날아갔다. 적의 칼은 공세를 수세로 전환하지 못했다. 전환하지 못함은 곧 허(虛)를 드러냄이나 다름없었다.

적의 검은 날아드는 공(攻)을 이겨내지 못했다.

검이 적의 어깨를 갈라 내렸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는 적을, 그는 곧이어 자빠뜨리고는 오른팔을 붙잡았다. 뒤이어 무릎을 받침 삼아.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음산한 파음(破音)이 울려 퍼지는 동시에 악을 쓰는 적의 비명이 다시금 간극을 메웠다.

뒤에서 달려드는 마지막 적을 피하기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는 느렸다. 엔도르핀이 머릿속을 채우면서 몸이 저절로 있어야 할 곳으로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철현은 뒤로 굴러 사정거리를 확보하고, 적이 몸을 뒤틀기도 전에 등을 베었다.

꽃잎 같은 핏방울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오선보 위에 그려진 음표처럼. 그 음악의 표출은 대원의 짧은 비명이었다.


철현은 엎어진 두 대원의 몸뚱어리를 건넜다. 칼에 찔린 허벅지에서 심각한 통증이 일었지만, 뇌하수체에서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엔도르핀이 금세 고통을 덮었다. 다친 왼팔은 오른손으로 부여잡고 지혈했다. 피가 흐르면서 정신이 이따금 아찔해졌지만 강렬한 투지가 그를 부여잡았다.

리채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철현은 그 시선을 되받아 응시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무미건조한 두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침묵은 귀청이 떨어지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제 그대도 혼자군."

철현이 무미건조하게 농담을 던졌다. 리채는 단지 차가운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말 없이 검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군더더기 없이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철현은 검신(劍身)에서 피를 닦아냈다. 피가 걷히면서 바람 무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이 전투로 인한 피로와 다가올 싸움에 대한 긴장으로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전투의 사이에 일어나는 일종의 현상이었다. 죽음과 패배, 삶과 승리와 전혀 무관한 그저 전투의 과정 중 하나였다. 철현은 검을 치켜들고 자세를 잡았다. 싸움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단 공업의 측면에서 이해해야 옳다고, 그는 배웠다. 공(工)과 농(農)의 기계적 움직임에서 인(仁)과 예(禮)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유가의 검보다 도가의 검이 더욱 강하다. 싸움의 결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철현의 검은 도가 풍의 은일을 취하지 못했다.

은일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처럼 몸과 마음은 평온하지 못했다. 핏줄이 전부 타는 것처럼 아파져 오다가 어느 순간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다. 피로가 극에 달하면 익숙해진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찔린 팔이 미끈거렸다. 아픔, 피로, 고통 — 어쩌면 스탠더드한 상태가 되었을지 모르는 그러한 성질들. "지나친 피로, 지나친 시련,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1

진정으로 성내야 할 것은 그 앞에 자리한 어떤 부조리함이었다. 그리고 그 부조리함은 안개 낀 바닷가처럼 목측으로 가늠하기 힘든 것이었다. 철현은 지혈을 멈추고 팔을 늘어뜨렸다. 피는 조금이나마 멈췄다. 허벅지의 피는 멈추지 않았지만 질척거리는 느낌은 사라졌다. 그러나 적은 올 것이었다. 적은 그의 나약함 위에 서서 그의 나약함으로 그를 공격할 것이었다.

철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 출신이에요? 보아 하니까, 동네 검도장에서 배운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리채가 자세를 잡으며 크게 물었다. 그는 아직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아니, 여유를 잃는다는 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았다. 눈앞에서 모든 게 무너져도 다시 재건할 수 있다는 자신감, 리채에게는 그러한 것이 있었다.

철현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철현이 대답하지 않자, 리채는 피식 웃으면서 점잖게 걸어왔다.

"뭐, 좋아요. 어차피 알게 될 거니까." 그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궁금하네."

리채가 무감정하게 철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가택신들에게 집착하는 겁니까?"

"왜 그럴 것 같은가?"

리채의 얼굴에 다시금 비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되묻는 거에요?"

"아까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질문 하나씩, 교환하자고. 이제 내 차례인 것 같은데."

갈라진 목소리는 생각보다 이 모든 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흘러나오는 듯했다. 리채의 눈빛이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두 사람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둘 중 하나라도 살의를 드러낸다면, 싸움은 곧바로 시작될 터였다. 싸움은 유예되고 있었다.

"진짜 스무고개를 하려고 드네."

리채는 미소를 거두고 차갑게 읊조렸다.

"글쎄… 가택신과 역병신, 복수밖에는 안 떠오르는걸. 그렇게 할 심산이라면 우리로서는 더더욱 당신을 막을 수밖에 없어요."

철현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리 단순한 관계였다면 차라리 나았겠지."

"관계가 어떻든 당신이 지금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지는 알겠어. 옛날 일에 집착하고 있잖아. 멍청하게."

"잘 아는구나."

"아무렴."

리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당신 같은 것들 많이 봤거든. 그거 알아? 상태가 안 좋을수록 과거에 집착하는 정도가 커지더라고. 정신이 조각났든, 형상을 부지하지 못했든, 신앙을 잃어버렸든. 그런 존재들일수록 옛 영광과 관계에 집착하면서 현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해악을 끼친단 말야…"

리채는 먼 옛날에 벌어진 일을 전해주듯 부드레하게 중얼거렸다.

"복수? 구조? 당신이 온 이유가 뭐든 신경 안 써. 당신은 제 갈 길 갔어야지. 뭐가 당신을 추동했든 관심 끄고 당신 앞가림이나 잘했어야지."

리채는 천천히 마지막 문장을 끝마쳤다.

"그랬으면 당신 동료들은 적어도 이 꼴은 안 당했겠지."

원시가 신음하며 몸을 뒤챘다. 부축 없이 일어나긴 힘들 것이다. 몇 번이고 일어서려다 힘없이 엎어지는 일련의 동작은 가여웠다. 혼절과 의식 사이의 경계를 헤메이고 있는 영주의 기운도 느껴졌다. 철현은 리채의 말이 옮음을 느꼈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상해는 입을 필요도 없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철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게 아직도 일말의 하지만이 남아있단 말인가. 부끄러움을 떨쳐내겠다고, 이 한을 풀겠다고 벌인 모든 일로 수많은 동지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주제에 아직도 하지만이 남아있단 말인가. 철현은 멍해졌다. 하지만, 하지만, 그놈의 하지만. 하지만은 일종의 본성인 듯싶었다. 이제 남아있는 것에 눈을 돌리며 살아가겠다는 다짐은 번번히 좌절되었다. 바로 그 한 단어 때문에.

오래 묵은 고름이라고, 철현은 생각했다.

"그래, 이들은 평안하였겠지. 헌데 저분들은 평안하였겠느냐."

철현이 비틀거리면서 칼을 휘둘러 공중을 썰었다. 남아있는 핏방울을 훑어내기 위한 동작이었다.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아느냐. 저들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시하지 말라 배웠다. 그 가르침을 잊고 살다가 수천 배로 돌려받았기에…" 그는 팔에서 치닫는 고통에 잠시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러니 이제 다신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게 해다오."

"그러니까 대의명분이 있으시다 이거군." 리채가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주변 사람들 힘들게 할 성격이네요, 당신."

"안다."

"그런데 이거 어째. 이제 주변인 소모하면서 그놈의 대의 이루겠다고 나서는 꼴은 더 못 보겠거든."

도리채의 얼굴에 살의가 스쳤다. 지독히도 날카로운 살의였다. 철현은 긴장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리채는 더이상 영양가 없는 말을 주고받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의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금속성의 섬뜩한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철현도 자신의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목덜미의 털이 주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전의 싸움이 경황 없이 흘러갔다면, 지금은 몸이 저절로 집중하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싸움이 벌어졌다.

첫 합은 차마 의식도 못한 채 베이고 말았다. 찰나의 파열음, 그리고 대치는 종료되었다. 리채는 미끄러지듯이 간극을 잡았다. 노련한 동작이었다. 철현은 신음을 흘리며 자세를 정비했다. 도리채의 전법은 다른 대원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처음부터 거리를 좁히며 사납게 공세를 산개하는 그의 검은 막아내기도 흘려내기도 어려웠다. 공격은 사치였다. 철현은 왼쪽 어깨를 움켜쥐며 뜨거운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총상에, 베이고 얻어맞고.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이놈의 왼쪽 어깨는 영영 못 쓰고 말 터였다. 하지만 그건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을 테니.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세를 정비한 리채의 칼은 허를 내주지 않고 계속 몰아쳤다. 검과 검이 부딪히며 파음이 울렸다. 철현은 다친 어깻죽지의 버거움을 완연히 느끼며 칼을 휘둘렀다. 검은 육중하게 허공을 갈랐고 그 사이의 허를 리채의 검이 찔렀다. 피가 흘러 팔이 축축했다.

화려한 검광이 눈을 찔렀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는 그때, 살기는 때를 놓치지 않고 다가왔다. 걸음 하나, 동작 하나에 공세가 일일히 살아있는 도리채의 검은 항상 적의를 후광으로 두고 돌진해왔다. 헤아릴 수 없는 칼날의 군집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철현은 손목을 비틀어 이리저리 쳐내고는 간신히 뒤로 물러섰다. 바로 직전에 싸운 대원들과의 싸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어렵고, 힘겨웠다. 몸조차 아군이 아닌 상황에서, 철현은 눈앞에 절벽이 자리하는 듯한 절박을 느꼈다. 도리채는 강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가 바로 인지해야 할 성질의 정보였다.


— 저보다 강한 적을 만나면 어찌해야 합니까?

아슐링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다.

— 이제껏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 걸 네 자랑으로 삼지 않았더냐.

— 스승님께서 잘 지도하여 주셨으니…

철현은 머쓱해진다.

— 하오나 그러한 적이 영영 없으리란 보장 역시 없잖습니까.

— 그렇지.

— 허면 어찌합니까?

— 넌 어찌하겠느냐?

철현은 생각에 잠긴다. 시체 썩는 고린내가 자욱하다. 타는 내 역시 자욱하다. 막부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들은 고다이고 천황에 마지막으로 맞섰던 최후의 막부군 시신 사이를 거니는 중이다. 철현의 손에는 자루가 들려 있다. 자루엔 한 남자의 시신이 있다. 사망자 중 끼어있던 불운한 니카호 가 사람. 시신은 바스러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허나 꼭 돌려보내야 한다. 가족들이 기다릴 것이므로.

—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진다면?

— 승복해야지요.

철현은 퍽 자신 있는 투다.

— 네가 승복하지 못한다면?

— 승복하지 못한다니요?

— 뭐든지, 사람에겐 그 뜻을 저해하는 연유가 있기 마련이니라.

아슐링이 철현을 바라본다. 어딘가 슬픈 기색이 섞인 눈빛이다.

— 언젠가 내 말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가 뭐든 간에 그러한 상황이 꼭 한 번은 도래할 것이니.

철현은 자못 심각해진다.

— 허면, 지더라도 그를 부정한 채 계속 싸우란 말씀이십니까. 싸우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요?

— 복잡하게 잴 것 없다. 네가 더 강해지면 되느니라.

— 예?

철현의 얼굴에 순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아슐링은 빙그레 웃는다.

— 강함은 하루아침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허나 갈고 닦는 자는 곧 그러한 시련도 발판삼아 도약할 수 있음이니… 어찌 싸우면서 동시에 성장할 수 없겠느냐.

— 그런 말은 저도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지금 이 대화가 기억난 것인지, 철현 자신도 명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다. 내가 더 강해지면 된다, 를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철현의 입장은 확고했다. 너무나 편의주의적인 말이라고. 너무나 비실용적인… 충고라고. 그는 숨을 정돈했다. 정녕 방도가 없는 걸까. 저자를, 저 적을 물리칠 방도가 없는 것일까.

철현은 검 끝을 낮추며 세를 가다듬었다. 다시 시작된 리채의 공격은 이전보다 더한 살기로 가득했다. 철현은 위에서 날아드는 검을 쳐내고 몸을 회전시켜 그의 왼쪽 어깨를 갈라내리려고 했다. 그러나 도리채의 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던 도리채의 검이 다시금 날아들며 철현의 검을 퉁겨냈다. 철현의 공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서로에게 달려들었다가 흩어지면서 각자의 적의로 각자의 적의를 가르고 베었다. 둘 사이의 간극은 오로지 천둥 같은 칼 부딪히는 소리로 메워지고 있었다. 철현은 쉴 새 없이 공격을 걷어냈다. 끝이 없는 공격의 연속 안에서 그는 기진맥진했다.

전방의 공격을 막아내고 회전하며 기본 동작을 취하던 철현의 검이, 어느 순간 전환된 세로 빠르게 찔렀다. 이전까지 상대해오던 검법과 다른 방식으로 맞부딪혀 오는 그에, 리채는 조금 당황한 듯 바삐 몸을 돌려 세를 전환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역전하였다. 리채는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내면서 뒤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한 번의 유려한 동작으로 철현의 공세는 조각나고 말았다. 도리채의 검이 바닥을 쳤고, 그곳에서 다시금 하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경우라면 적에게 허를 보이는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를 살려냄은 예사로운 실력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에게 감탄도 허락하지 않았다. 리채는 위에서 내리치던 철현의 검을 밀어내곤, 그의 복부를 강하게 걷어찼다. 저만치 뒤로 나가떨어진 철현은 아파하기도 전에 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야만 했다. 방금 전까지 그의 가슴팍이 누워 있던 곳에 칼이 날아들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곤, 한쪽 다리를 굽힌 채로 리채의 칼을 막아냈다. 이를 악문 리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리채의 완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둘은 억겁의 시간인지 찰나의 시간인지 모를 시간 동안 그렇게 악에 받쳐 힘을 겨루었다. 둘은 잠시간, 아주 비슷한, 살의를 띈 얼굴을 하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철현은 단전에서부터 신음인지 기합인지 모를 것을 끌어올려 외치면서 칼을 밀쳐냈다. 리채의 힘과 생명과 적의가 가득 담긴 검은 힘겨웠다. 둘은 서로에게서 물러 나왔다. 잠시, 그곳엔 숨을 헐떡이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철현은 검으로 반쯤 쓰러져 가는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와 검은 눈동자가 마주쳐 칠흑 같은 스파크를 튀겼다. 둘은 말이 없었다.

"너무 걱정은 안 하는 게 좋아요, 김철현 씨."

리채가, 살짝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죽이진 않을 거거든."

철현은 그를 쏘아보았다.

"우리가 당신한테 얻을 정보가 상당히 많을 것 같아서."

"어디 제 버릇 못 주는구나."

"아무렴."

철현은 한숨을 내쉬며 비틀거리는 몸을 마음속 깊이 채근했다. 몸은 너무나 뜨거웠다. 몸이 하나의 항성이 된 것만 같았다. 이상한 열기와 사방에서 울리는 통각 경보의 집합은 정신을 어지러이 만들었다. 눈꺼풀이 지독하게 무거웠다.

약을 한꺼번에 끊은 이후로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순간이었다.

"…과거라고 했나."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리채가 숨을 고르다가 웃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철현의 몸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느낌이 일었다.

"과거…"

"그래, 과거요."

철현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무게는 무거웠다. 그의 의식 속에서 광활한 지평이 펼쳐졌다. 그 지평 위에서, 그는 한숨과 피로와 통증의 이름으로 싸움을 수행하고 있었다. 철현은 바닥에 칼을 다시 찍으며 무너지려는 몸을 곧추세웠다.

"그대가 맞는 것 같구나."

리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히고 의문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대 말이 맞아." 철현이 속삭임처럼 대답했다. "난 과거에 매몰되어 있었다. 아니, 지금도."

"마지막으로 고해성사라도 하는 거에요?"

"그럴지도.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둘은 다시, 잠시간 말이 없었다.

"허나 여기까지 오면서, 이 지긋지긋한…"

철현은 숨을 들이켰다.

"이 지긋지긋한 기나긴 귀향길에서… 나는 느꼈다. 세상은 다른 곳이 되었다고. 세상이… 자신을 아주 죽여서 새로 태어났다고…"

그는 비틀거리다가 중심을 잡았다.

"그래, 너무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내가 보지 못한… 아직도 공유되는 부조리가 저 안에 도사릴지도 모르지. 내가 알지 못하는 적들이 저 안에, 아직도,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피가 흐르던 오른 다리가 꺾여졌다. 철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검을 다잡았다.

"허나 세상은 변했다. 그것 하나만은 옳더구나. 더이상 내가 손댈 수 없는… 아니, 손대지지 않고 손대어질 수도 없는… 상호 무관한 무언가."

점점 그의 말은 작아지고 흐릿해져, 종국에는 그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으로 바뀌고 말았다. 도리채는 그런 철현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나는 서천을 감옥이라 생각했다. (그는 실소한다) 감옥… 감옥이라. 그러하게 호화로운 감옥이… 아이야, 나는 그럼에도 그곳을… 감옥이라… 매일매일… 스승님을 모시고, 스승님을 막고, 스승님을 재우고, 그렇지 않으면 홀로 상처를 쓰다듬으며 구슬프게 우는 들개같이… (그는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날 수 없으므로, 나는 무력하고 답답했다. 부인을… 나스챠를 찾아야…"

그의 몸은 잠시 엎어지다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멈추어섰다. 바닥에 가 닿은 손에 피가 떨어졌다. 피는 흥건했다. 철현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그는 자신의 칼을 놓지 않았다.

"허나 이제 알겠구나. 이제야… 감옥은 서천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낸 자들만이 공유하는 안광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기이하게 명멸하는 그의 눈빛은 찌르는 듯이 아팠다.

"그것은… 나였다. 나는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삼십 년을 살아온 게다. 내가… 나에게 삼십 년간 고문당하고, 내가 나에게 삼십 년간 심문당하고, 그 삼십 년의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지은 죄를 스스로 재판하고 스스로 형벌을 구형하고 스스로 노역했다. 내가, 내가 너무도 많아서, 도망치려고 한 모든 약—나는 어쩌면 그게 고문당하며 얻은 몸의 상처를 치료한다기보다 정신의 탈출구를 만들어준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는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수 있었다. 박차지 않으면 아예 일어설 수도 없을 것 같아 그리했으나, 다리에서 전달되는 아우성 탓에 금방 후회하고 말았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제어하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칼을 들어 올렸다. 퀭한 그의 눈에서 안광이 발했다.

"아이야, 나나 저분들이나…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벗어날 수 없어서… 서로의 탈출구를 타고 달아난 자들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미래로 넘어가겠다고, 다음으로 이동하자고 하는 것이…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느냐. 그 등신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리도 합당하지 않더냐!"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그 외침을 내지르는 것만으로도 기력이 쇠한 듯 다시 비틀거렸다. 그러나 쓰러지진 않았다. 무형의 버팀목이 그를 받치고 있는 것처럼.

"허면, 막아 보거라. 어디 한 번 나를 막아보아라. 나는 다음으로 넘어가야겠다. 기억하되, 더는 그것에 갇혀 살지 않겠다. 저분들도 그리할 것이다."

다시금 검은 불꽃이 허공에 튀었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에게 돌진했다. 철현은 칼자루를 역으로 쥔 상태로 거세게 공세를 펼쳤다. 그가 손목을 돌리며 리채의 칼을 걷어나갈 제, 그의 발은 나아갈 동작을 예비하고 있었다. 확연하게 달라진 기세에 도리채는 이를 악물고 덤벼들었다. 내려친 리채의 검이 좌측 하단에서 치솟던 철현의 검과 격돌했다. 검광과 검광이 서로에게 충돌해 바스러졌다. 연달아 두 번 날아드는 칼날을 막아내며 뒤로 물러나던 철현은, 재빨리 하단을 베며 공세를 도모했다. 이번에는 리채가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 칼날이 허공을 가르면 연이어 다른 칼날이 허공을 베었다.

리채가 몸을 피한 자리에 철현의 검이 내려앉았다. 그의 검은 마치 리채가 그렇게 했듯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돌진했다. 거대한 범선처럼 검이 날아들었다. 신속한 공격이 이어졌다. 철현은 이전처럼 날아드는 칼을 막기보단, 더욱 빠르게 적의 허를 찌르는 전법을 택했다. 빨라야 했다. 속도가 느리면 그대로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바닥을 짚어가며 공중에서 몸을 돌려 허공을 쓸었다. 도리채가 내리친 공격을 한 쪽으로 피하면서, 철현은 팔꿈치로 그의 명치를 강타했다. 동시에 그의 손아귀에서 검이 회전했다. 섬광이 일었다.

바람 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도리채는 아무말 없이 자신의 오른쪽 턱을 닦아냈다. 살갗이 베여,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리채의 입에서 실소가 배어 나왔다. 철현은 백미터 달리기를 마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한 차례의 충돌이 있던 직후, 둘은 서로의 검이 닿지 못할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도리채의 눈에 불꽃이 타올랐다.

도리채는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왼발을 앞으로 빼면서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왼손은 검집을 강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것만 같은 자세였다. 철현은 잠시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가, 곧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고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자세였다. 익숙하고, 또 질리게 당했던 검법. 노바 이현제와 싸웠을 때 처음으로 본, 그 검법. 검을 빠르게 뽑으면서 그 속도로 신속한 결착을 짓는 것을 장점으로 두는 기술이었다. 도리채의 입가에 창백한 그러나 굳은 미소가 걸렸다.

철현은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자세를 굽히며 리채 쪽으로 칼을 겨누었다. 칼날을 위로, 칼등을 아래쪽으로 가게 잡은 자세였다. 왼손이 손등을 칼 쪽으로 두며 균형을 맞추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것이 마지막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피부로 전달되었다. 온몸의 신경이 칼날처럼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철현은 눈을 감았다. 그는 빌었다. 그저 빌었다. 대상 없는, 온몸으로 드리는 기원이었다. 이제 마무리 짓게 하소서. 혹여 나를 패배케 할 요량이시라면, 그조차 감내하겠나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 걸음을 내디뎠는지조차 가늠하지 못한 상태로, 리채의 검이 검집에서 튀어나옴과 동시에, 철현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주 느린 속도로, 동시에 너무나 빠른 속도로 두 검이 맞붙었다. 공세와 수세가 소용돌이치며 변화했다. 철현은 도리채가 휘두른 칼날을 밀치면서 안으로 파고들어 칼등으로 복부를 퉁겨냈다. 리채가 마른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세를 회복하고 다시금 덤벼와 좌우를 쓸어내렸다. 칼날과 칼등이 맞부딪히면서 굉음이 일었다. 서로의 적의가 충돌할 때마다 젊은 혈기가 팔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다. 적의를 적의로 받아치는 팔꿈치가 아팠다. 리채만큼이나 철현도 무너질 마음이 없었다. 철현은 아래로 내려찍는 리채의 칼을 흘려버리고 빠르게 돌았다. 빠르게 돌면서, 그는 손목을 비틀며 검을 내리쳤다. 리채의 장딴지에 그의 검이 날아들었다. 도리채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오면서 앞으로 엎어졌다.

칼등으로 강타했기에 자상(刺傷)은 남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멀쩡히 일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철현은 검을 내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도리채가 검을 버팀목 삼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철현은 도리채의 얼굴에서 여유의 잔해가 사그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엔 이제 단지 당혹과 분노, 적의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적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 적의는 둘 중 하나가 쓰러져야만 사라질 것이었다.

그래야 한다면, 철현은 그렇게 해 줄 마음 역시 있었다.

리채가 간신히 세를 정돈하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의 칼은 전처럼 세밀하고 날카롭지 않았다. 단조롭게 상하를 쓸어내리는 검은 공격적이지 않았다. 힘에 부친 칼날이 날아들자 철현은 좌우를 후려치며 뒤로 물러났다. 도리채는 더 다가왔다. 수평을 가르는 검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사라졌다. 철현은 공세를 숨기며 칼을 밀쳐내곤, 도리채가 눈먼 공세를 펼치기까지 기다렸다. 여유를 잃은 칼이 허공을 찔러댔다.

때였다.

허공으로 뻗어 나가던 리채의 팔에 회초리처럼 칼이 날아들고는, 연달아 복부를 강타했다. 도리채는 사그라드는 숨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거친 숨이 대리석 바닥 위를 기어갔다.

철현은 공격하지 않았다.

잠시 뒤, 도리채는 칼자루 끝을 바닥에 찍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리가 굽혀지고 몸을 지탱했다. 도리채의 얼굴은 악에 받쳐 있었다. 순전한 적의로만 움직이는 듯한 그의 상처 입은 몸은 두려울 정도로 무너지지 않았다. 철현은 그런 리채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자세를 낮추었다.

리채가 이를 악물며 돌진해 왔다.

그 순간 철현은 숨을 들이켰다. 칼날이 날아들고 있었다. '칼로 적을 겨눌 때,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눈다. 칼은 겨누지 않은 곳을 겨누고, 겨누는 곳을 겨누지 않는다. 칼로 찰나를 겨눌 때, 칼은 칼날에 닿지 않고, 닥쳐온 모든 찰나들을 겨눈다.'2 철현은 보았다. 철현은 그 칼날에 깊숙이 숨은 나약함을 보았다. 기계처럼 달려들던 적의 적의 사이에 숨은 피로와 한숨과 통증을 보았다. 그리고 그를 깨달은 순간, 그제야 마음은 평안해졌다. 그제야 은일은 검에 깃들었다. 마땅히 겨누어야 할 과녁을 인식했으므로.

철현은 칼등으로 도리채를 밀어내고 내려오는 칼날을 받아냈다. 동시에 그의 발목은 돌아가며 또 한 번의 세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사납게 날아드는 칼과 칼 사이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철현은 칼을 크게 휘둘러 검을 밀치고는, 발이 이끄는 대로 몸을 회전시켜 리채의 왼편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오른손에서 검이 날아올랐고,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그 검은 하늘로 승천하는 선인(仙人)처럼 기이하게 번뜩였다.

그리고 왼손이 그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검은 팔이 예비하던 최후의 동작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칼등과 칼날이 다시금 제자리를 잡아간 검은 베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철현의 몸은 어느새 도리채의 등뒤를 향하고 있었다.

한 번의 유려한 동작으로, 철현의 검이 도리채의 등을 갈라 내렸다.

검의 피고랑을 따라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도리채는 아주 잠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찰나의 시간 동안 그의 뒷모습은 이전과 다름없는 적의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도리채의 팔이 축 처지면서 검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도리채의 몸 역시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휘청였다. 몸은 지탱할 수 없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가,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철현은 숨을 몰아쉬며 잔뜩 긴장된 육체가 서서히 이완되고 있음을 느꼈다. 엔도르핀에 절여진 뇌는 상쾌했고, 동시에 몽롱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싸움이 끝이 났다.

철현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그리고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누운 채 가냘프게 숨쉬고 있던 원시를 들어 올렸다. 아슐링과의 대화가 기억났다. 그러니까, 이를 말함이었군요. 그는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이러한 것을 말하심이었군요. 그리움과 슬픔으로 눈가가 뜨거워졌다. 보고 싶다는 감정은 계통 없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멍하니 원시를 안고 있던 철현은 무심결에 뒤로 몸을 돌렸다. 두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 둘이, 외벽 파편과 총, 검, 널브러진 사람들 사이를 거닐어 오고 있었다.

"난장이구나." 성주신이 입을 열었다.

"…그리 되었습니다."

"아이고, 이애 좀 봐라. 크게 다친 모양이로구나.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다 무어니. SCP 재단이란 것들을 이리 만들면 필시 네게도 좋지 않을 터인데…"

조왕신이 걱정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그렇다고 그저 지나칠 수가 있겠습니까, 어디. 비겁자로 살지 않겠다 마음 먹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철현은 피곤한 얼굴로 대꾸했다. 무슨 일인지 원시가 한결 고른 숨소리를 내었다. 가택신들의 권능 탓일까. 철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래 되뇌던 말을 꺼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가택신들은 답이 없었다. 그들은 한일자로 꾹 다문 입매를 드러내 보이며 철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성주신이 대뜸 물었다.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는 이제 어찌할 생각이냐?"

"…두 분을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필히."

성주신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왕신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참 네 녀석도 네 녀석이다. 늙은이 두 명 끌고 가려고 이 사달을 내니…"

"송구스럽습니다."

철현은 비틀거리면서 그들에게로 나아갔다. 어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머리를 강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게… 그러니까, 제가 못 미더우신 건 압니다. 허나—"

"쓰잘데기 없는 소리. 군말 그만두어라. 나을 것이 무에 있다고." 조왕신이 엄한 말투로 대꾸했다. "내 자식아. 우리가 예까지 온 연유가 무엇이겠느냐?"

철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몇 초간 흐리멍텅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노망이고 주책없다만, 우린 널 따라갈 거다."

성주신이 툴툴대며 말을 이었다.

"넌… 그래, 넌 바뀌었더구나. 츰엔 네가 거짓을 꾸며 말한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빼앗는 것들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런 것은 아니더구나. 네가 진정으로 하는 말임을 이제 안다. 그러니…"

성주신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삿대질했다.

"그러니 얼빠진 얼굴 그만두고 안내나 하거라, 인석아."

철현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원시가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몸을 조금 뒤챘다. 살아있음의 온기, 회복의 전조 같은 움직임이었다. 철현은 원시를 내려다보다가 두 가택신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아주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웃었다.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웃는 것이 아니라, 기분을 나아지게 하려고 웃는 것이 아니라, 그저 순전한 기쁨의 표상, 유쾌함의 표지. 오랜 시간 사용되지 않았던 근육이 가동을 알렸다. 웃음이 진정으로 웃어진 것은 오랜만이었다. 철현은 오랫동안 웃지 않은 사람처럼 웃고, 많이 웃어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웃었다. 어디선가 활기가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네, 그럽시다. 인도하겠습니다."

철현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가택신들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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