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서울, 포테리 클럽


아침 10시.

포테리 클럽 내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 나동그라진 탁자와, 부서진 의자와, 초주검이 된 채 바닥에 쓰러진 조직원들이 즐비했다. 클럽의 새로운 인테리어는 폭력의 강한 자극을 적나라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조직원들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꿈틀거리며 신음했다.

이들은 모두 기계 부분이 적출되어 있었다.

매끄럽게 윤기가 나던 금속성의 부품들이 도려진 채 신음하는 조직원 무리의 모습은 지옥도를 연상시켰다. 피와 살이 바닥 위에서 흩어졌다. 그들은 그들에게 허락된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고 있었다. 개조된 신체—선택된 자의 증표, 힘, 권력. 그 모든 것을 앗기는 형벌. 세라믹파 조직원이라면 응당 두려워 마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 일이 지금 이들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신음이 공기를 지배하는 그곳에서는 다치지 않은 사람들조차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누구도 감히 제대로 숨을 쉬지 못했다. 자신의 필수 장기까지 교체해버린 조직원들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 구석에 마구잡이로 눕혀져 있었다.

이 피의 국면을 주도한 이들은 무감정한 얼굴로 클럽 정중앙에 기계 부품들을 던지고 있었다. 푸른 빛이 명멸하는 금속의 빛깔 위에 검붉은 것들이 들러붙은 모습은 인신공양의 그것과 닮아있었다. 광란에 휩싸여 이름 모를 신에게 신앙— 피와 살을 바치는 그러한 제전. 학살자들은 근면하게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이 쌓은 부품의 산은 높았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이 드는 두엄이었다. 마치 임란 때의 코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생각에 의식이 미치자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쓸 곳 없는 감상이었다.

남자는 그 두엄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사십 대 후반 정도에 숱이 많은 수염을 깔끔하게 손질한 자였다. 그는 학살의 주모자보다도 19세기 유럽의 상류층에 더 어울리는 용모의 소유자였다. 남자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권위를 자유자재로 이용할 줄 아는 인간의 품위가 그에게는 있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자였다. 그가 수염을 어루어만지자 아르마니 양복의 소매가 살짝 걷히면서 파텍 필립 시계가 드러났다. 남자는 이 모든 폭력의 현장 안에서도 전혀 흥분하고 경도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무미건조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일은 예사라는 듯이.

그의 앞엔 잘 손질된 머리에 먼지가 내려앉은 채로 클럽의 주인이 꿇어앉아 있었다. 그는 흐트러진 차림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이들이 방금 그의 부하들을 학살한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인도해주기라도 한 모양으로. 그의 얼굴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어딘가 불편한 듯 간헐적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 학살자가 입을 열었다.

"…동현아."

주인은 고개를 들었다.

"네, 이사님."

이사라고 불린 남자는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고개를 까닥이며 자신의 수하 하나를 가까이 오게 했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이사에게 건네고는 공손히 불을 붙였다. 담배 내음이 허공에 산개했다.

"내가 저번에, 야로 선생 건으로 몇 마디 했지."

이사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숨 막히는 긴장이 일순간 클럽 내부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절 이 자리로 보내셨죠. 저도 잘 기억합니다."

클럽의 주인은 연이어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밝고, 크나큰 미소였다. 너무나 밝아 기괴할 지경인 그런 미소. 이사는 그 미소를 무시했다.

"…이 부장, 그걸 알면서도 이 사달을 내는 건가?"

이사가 준비된 의자에 앉으면서 이 부장의 얼굴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 부장아, 내가… 내가 저번에 분명히 했을 텐데. 다시는 남들 눈에 띄게 행동하지 말라고. 이건 사업 존망이 걸린 문제라고. 내 말하지 않았나?"

이 부장의 미소가 더욱 커졌다.

"최 이사님. 이사님, 쥐새끼 한 놈만 잡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 새끼 하나만 잡으면—"

"동현아, 넌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다 태우고 싶으냐?"

최 이사의 차가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이 부장 주위를 거닐었다. 경멸과 실망이 어린 눈빛이 유성처럼 날아들었다.

"이사님—"

"이번 일로, 비단 평범한 인간들에게 네 모습이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재단이 이곳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 부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뿐이냐? 연합 극동 부문 역시 차차 우리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지. 네가 가진 그놈의 '연줄'이 도움이 될 것 같으냐? 쇠락한 일본군 잔당과 식인에 맛 들린 동호회가?"

이 부장은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걷히지 않았다.

"이자메아는 우리와 밀접한 존재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놈들이 우릴 끝까지 지켜주었나?"

최 이사가 팔걸이에 기댄 손으로 관자놀이를 두들겼다.

"놈들은 우릴 그저 버리는 패로 썼을 뿐이다. 그때의 영광이니 뭐니에 맛이 들려 그놈의 '의리'를 지키려는 새끼들 본받지 말라고 했지. 넌 그게 옳은 것 같으냐? 시대가 변해도 그놈의 사대주의는 버릴 생각도 못하는 것들이."

최 이사는 이내 차가운 얼굴로 수하들에게 손짓했다. 이윽고 조직원 두 명이 쓰러진 인간들 사이에서 끌려나왔다. 하나는 꽁지머리였고, 하나는 까까머리였다. 둘은 얼굴에 온갖 멍이 든 채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들이 바닥에 널브러진 자들과 다른 점은 오직 온몸을 뒤덮은 발진과 수포였다. 극한의 공포가 그들의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꽁지머리의 절박한 시선이 이 부장에게 향했다.

"…혀, 형님…"

이 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님… 사, 살려주십쇼."

이 부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혀, 형님 제발…"

최 이사의 수하들이 두 조직원의 뒤에 가서 섰다. 최 이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친구들, 천연두에 걸렸더군. 분명 네가 말하는 그 쥐새끼가 벌인 짓이겠지. 가엽게도…"

최 이사가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는 두 조직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다시 한 발짝. 구두 소리가 장송곡을 알리는 신호음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공포에 질린 조직원들의 입에서 괴성이 발했다.

"형님! 혀, 형님 살려주십쇼! 형님! 혀—"

마지막 말은 끊어지고 말았다. 최 이사의 손에서 붉은빛이 발하면서 곧장 꽁지머리의 목을 뜯어냈기 때문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죽은 머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 부장의 무릎께까지 굴러 왔다. 이 부장은 꽁지머리의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죽은 자의 얼굴은 죽는 순간의 공포를 아직도 머금고 있었다.

이 부장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남은 건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라."

최 이사는 남은 조직원을 붙든 수하들에게 손짓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악을 쓰며 질질 끌려가는 남자의 소리가 길게 이어지다가, 잠시 후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뚝 끊기고 말았다. 이사는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넌 이 사업장을 맡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 부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충격이 그의 얼굴에 머물렀다.

"이 클럽은 잠시 폐쇄한 뒤에 장 부장이 맡게 될 거다. 정리까지 한 달 주마. 다 정리해서 무진으로 가라. 네게 독자 세력을 쥐여준 내 실수지."

"이사님." 이 부장이 눈을 부릅떴다.

"이제 더는 네 편에 서 줄 수 없다. 그리고 그럴 의향도 없다."

"이사님!"

"네게 실망했다!"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눈동자가 불꽃을 품고 맞부딪혔다.

"이제 정신 좀 차릴 줄 알았다. 그런데 한다는 게 기껏 네 말대로 쥐새끼 하나 처리하지도 못하고 네 실체를 다 드러내 버려?"

"…아버지!"

순식간이었다. 최 이사는 이 부장의 어깨에 부착된 밸브와 실린더를 뜯어내 버렸다. 그리고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무너진 이 부장의 멱살을 붙잡았다. 이 부장은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고작, 그 밖에, 되지 않으면서, 날 아비라 부르지 마라."

남자는 이 부장의 부품을 피의 두엄 위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수하들을 대동하고는 밖으로 걸어나갔다. 육중한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두엄 위에서 피 묻은 피스톤이 천천히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이 부장은 재킷을 벗어 던지고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담배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낭패감 같은 짙은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의 앞에는 살아남은 조직원들이 무릎을 꿇고 도열해 있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무거운 침묵만이 좌중을 뒤덮고 있었다. 깊은 패배감과 장수를 잃은 군졸들만이 공유하는 방향성 없는 절박감만이 그들이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가장 가까이에 꿇어앉은 조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이 부장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 조직원의 아가리를 후려갈겼다.

이내 그는 옆으로 쓰러져 신음하는 남자의 멱살을 움켜쥐어 원형 테이블로 끌고 갔다. 이 부장은 그의 목덜미를 붙잡아 탁자에 찍고, 찍고, 또 찍어 내렸다. 남자의 목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오고는, 곧 그의 빛이 사라졌다. 조직원들은 나직하게 엎드리고 있었다.

한참 뒤에 이 부장이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의 얼굴은 기이할 정도로 유쾌해 보였고, 동시에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서천 그 새끼, 무슨 일이 있어도 붙들어 와. 병신 만들어도 되고 반 죽여놔도 되니까, 내 앞에 끌고 와라."

이 부장의 눈에 푸른 빛이 돌았다. 푸른 광기가 그의 얼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또렷하게 다음 문장을 내뱉었다.

"내가 직접 그 새끼 아가리를 찢어내서 씹어먹을 테니까."


서울, 제21K기지


삐걱거리며 문이 열렸다. 뇌수종 교수는 지친 얼굴로 자신의 집무실로 걸어들어왔다. 허친거리는 발걸음은 그가 얼마나 피로를 느끼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잠시 벽면에 몸을 기댔다. 쏟아지는 졸음과 척추를 잠식한 피로는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뇌수종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너무나 혹독하게 굴러간 하루였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집무실 책상과 벽면은 온통 먼지와 비품 상자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교, 교수님! 아직…!"

문이 또다시 벌컥 하고 열리며 젊은 여자가 불쑥 뛰어들어왔다. 거의 굴러 오다시피 한 그는 언짢은 표정의 뇌 교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덕희야…"

"교, 교수님…"

"느이 너무한 거 아니냐. 1년에 한 번 쓸까 말까 한 곳이다만은 총책임자 집무실을 창고로 쓰고…"

윤덕희 요원은 대꾸하지 못하고 뻘쭘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대뜸 내뱉었다.

"이, 이유가 있습니다!"

"뭔데."

뇌 교수는 들어나 보자, 라는 표정으로 덕희를 시큰둥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자리가 푸, 풍수지리 상 창고에 매우 어울린다고 해요!"

정적이 흘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뇌 교수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덕희야…"

덕희가 코를 훌쩍였다.

"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지?"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영양가 없는 이야기 그만둬라. 창고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닐진대 이게 다 무슨 꼴이냐."

뇌수종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는 책상으로 걸어가 박스 몇 개를 옆에다 내려다 놓고는 앉았다.

"검사 결과는 어떻게 되었고?"

SCP-713-KO 격리 파기 사태의 전말은 참혹했다. 담당 요원이 무력화되었고 A380 항공기는 하이잭당했다. 그리고 제주국제공항으로 파견된 천도-09는 대패했다. 물론 그것이 그들의 최대 전력이 아닌 것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대에서 일부만 차출된 상태였다 한들 이 정도로 심각하게 패배한 것은 분명 드문 일이었다. 대원 대부분이 중경상을 입었다. 부대 파견을 지시했던 뇌 교수의 처지에서는 퍽 곤란하고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당혹스러운 것은 어느 정도 회복된 인원들을 심문해 보아도 자신들이 정확히 '누구'와 싸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견 인원 전원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모두 의식 되찾았어요. 특히 천도-09 부대원들 신체 회복 상태가 유달리 빨라서, 무슨 변칙 현상이 개입된 건지 조사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래. 생각보다 일찍 면담하게 되어서 놀랐지. 정확히 어떤 상태인 거야?"

"아시다시피 출혈도 금세 멎었고, 자상 등의 큰 상처도 쉽게 아물었다더라고요. 지금은 다들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정도래요. 리채 언니는 벌써 훈련 들어갔고요. 아시죠? 그 언니 독기 품으면 진짜 무서운 거. 지금 딱 그 상황이라니까요. 내 참, 부르는데 한마디 대꾸도 없이 그렇게 빡세게 체력 단련만 하고 있으니… 말리는 의료진보다 제가 더 피 말렸다니까요. 치료팀은 아예 의료부 소관으로 넘겨서 조사해야 하는거 아닌가 걱정하던데요."

"설사 신격이 벌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긴 힘들군. 이번 일에서 우린 철저한 악역이었으니. 비행기 폐쇄회로 카메라는?"

"그것도 불통이에요. 가택신들이 스스로 풀려나면서 항공기 시스템을 조작한 모양이더라고요. 지금 사람들 몇이 상쇠 계수기로 검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래, 구천이 고생 좀 하겠네."

뇌수종은 제13K기지에 버리고 온 이구천 연구원에 약간 미안함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이번 사태의 주동자나 관련자에 대해서 명확하게 판가름난 건 없다고?"

"정보부랑 연계하면서 구석구석 조사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자세한 건 없는 것 같아요. 아, 한 가지는 가닥이 잡히는 모양이더라구요. 그때 전투기 대대가 항공기에 접근하려다 전부 실패한 상황 기억나세요?"

뇌 교수는 생각에 잠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마 너희도 내 추측과 같은 곳에 귀결한 듯한데."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영등신이 꽤 먼 곳까지 행차하시고 말이야."

"SCP-901-KO와 개별적인 면담이 불가능해서 사실 확인은 어렵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대요. 그런 바람이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고…"

"지금까지 적대적인 행보 하나 없던 녀석인데. 무슨 일이 있던 건지… 하여간 이번 사태가 빅 딜이긴 했나 보군." 뇌수종은 이마를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이거 큰일인데. 피해자는 수두룩한데 용의자 전체는커녕 한 사람만 특정할 수 있다니 말야. 그마저도 체포는 불가능하고."

"아 맞다, 한 가지 더요."

뇌 교수는 덕희를 바라보았다.

"파견 인원들 치료하는 과정 중에서 정체불명의 병원균이 검출되면서 일시적으로 격리했거든요. 오늘 오전에 생물학부에서 검사가 끝났어요. 현주 언니가, 아차, 김 박사님이 보고서를 한 부 주셨는데—"

"그래서 요점이 뭔데?"

뇌수종이 덕희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 병원균, 천연두균의 변종이래요."

뇌 교수가 눈을 부릅떴다.

"신기하죠? 조사해보니 기내에 천연두 감염자는 당연히 없었고, 따로 감염될 경로도 발견되지 않아서 아마 사태 때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대요! 설마, 무슨 역병신 같은 걸까요? 지금까지 천연두 역병신이 포착된 사례는 엄청 드물었잖아요!"

덕희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랬지."

뇌 교수가 멍하니 대꾸했다.

"알았다, 윤 요원. 나가보도록."

"라져."

덕희가 씩 웃으면서 밖으로 걸어나갔다.

어두운 불빛이 집무실 안에 내려앉았다. 뇌 교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고개가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흩어지고 으깨지면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있었다. 방금 거대한 충격을 맛본 까닭이었다. 그의 얼굴에 차차 멍한 미소가 일었다. 미소는 다시금 허탈한 웃음으로, 허탈한 웃음은 다시금 크나큰 너털웃음으로 바뀌었다. 웃음소리는 먼지와 박스 사이를 지나면서 집무실 전체를 공명했다.

웃음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라앉았다.

"…하."

뇌수종이 한숨 같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살아있었군, 반야 선생."


제주, 서천컨트리클럽


바는 늦게까지 영업하고 있었다.

감미로운 불빛을 밖으로 뿌리고 있는 창가를 지나, 김세경은 바의 정문으로 거닐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부드러운 질감의 현대적인 문은 이질적이라기보단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세경은 그 문을 밀고 들어가며 안을 살폈다. 미리 자리를 맡아놓고 있던 반가운 얼굴이 그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설문희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김 교수!"

"무슨 일이시래, 설 이사관님."

세경은 문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문희가 앉아있는 고풍스러운 테이블 위엔 술잔 하나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먼저 마시고 있지도 않은 모습에 세경은 조금 의외감을 느꼈다.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이야기가 오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긴. 그냥 우리 동생 보고 싶어서 불렀지."

"정말 그것뿐이야?" 세경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물론 보고 싶은 우리 동생을 위해 준비한 이야기도 몇 개 있고."

술이 전달되자 세경은 막걸리로 입을 헹구고는 물었다.

"자, 그래서 그 이야기는 뭔데?"

"네가 더 잘 알 수도 있어. 김철현 씨 말이야."

"세경의 얼굴에 뭔가 떠오르는 듯한 빛이 일었다.

"이번 일 이야기하는 거야? 가택신 데리고 온."

"빙고." 문희는 씨익 웃으며 스카치를 들이켰다. "오늘 그 일로 얼마나 바빴는지 알아? 기억 지우랴, 기록 어지럽히랴, 혼선 주랴—"

"어째 가서 이사관 일이 아니라 산업 스파이 일만 하고 오는 것 같다?" 세경이 킬킬댔다. "오케이, 바빴다는 건 알겠어. 무슨 일 있었는데?"

문희는 뜸을 들였다. "철현 씨한테는 어떻게 들었어?"

"듣기는. 한 마디도 못 들었구만." 세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피투성이가 되어서 들어오더니만 잠깐 정신 차리나 싶더니 그대로 쓰러졌단 말이야. 성주신과 조왕신을 모시고는 왔다만…"

"그 사람은 삼십 년 전이랑 변한 게 없네." 문희가 피식 웃었다. "철현 씨 재단이랑 전투했어."

세경이 막걸리를 가득 들이켜다 말고 울컥 뱉어냈다. 기침이 잦아든 후에야 세경은 문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문희가 의외라는 듯 세경을 바라보았다.

"난 기껏해야 놋그릇으로 얻어맞기나 할 줄 알았지."

"뇌수종 교수가 강경책을 썼더라고. 천도-09, 기억나지? 재단에서 이쪽 들쑤시려고 창설한 부대. 철현 씨가 고생 좀 했더라고."

세경의 눈썹이 일 밀리미터가량 올라갔다.

"아 참, 김철현 씨, 도 부대장이랑 통성명까지 했다대."

"내가 못 산다."

문희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나 하나 물어볼 거 있다."

세경이 문희를 바라보았다.

"철현 씨 두술, 그거 네가 쓸 수 있게 해준 거지?"

문희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었다. 묘한 힐난기를 느낀 세경이 시선을 피했다.

"…어떻게 알았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 몸에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약, 아니지, 마약 중독에 이제야 그걸 차차 끊기 시작한 인간이야. 그거 두어 달 끊었다고 퍽이나 효과 보겠다."

세경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일종의 특전(特典)이었지, 그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김철현 절대 그 상태로는 성공 못 할 것 같았어. 명확히 재단과 싸울 줄은 몰랐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길 방어해야 할 때가 오겠구나, 싶기도 했고. 그러니까…"

세경은 술잔을 비웠다.

"나도 나름의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야."

"그래도 철현 씨한테는 미리 언질했었어야지. 그렇게 알게 되면 심란한 게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그 사람도 알아." 세경이 덤덤히 대꾸했다.

"진짜?"

"쓰러지기 직전에 물어보더라. 이거, 당신이 뚫어준 기맥(氣脈)이 맞느냐고."

세경이 특유의 말투를 억양 없이 읊었다.

"나도 그걸 걱정했었어. 그게 잔인한 짓인지 아니까."

세경은 술병을 기울여 잔을 다시 채웠다. 술 따르는 소리가 바에 잔잔히 흐르는 음악 소리와 손님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에 섞여 흩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을 홀짝인 뒤에야 말을 다시 이었다.

"성경의 모세는 말야, 그 광활한 사막에서 자신이 절대 들어가지 못할 약속의 땅을 보았어. 만약에…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어떨까. 그 땅에 들어갈 정당한 자격을 부여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면…" 세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그는 곧 쫓겨나고 말았을 거야. 그가 성취한 그 자격이 사실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게 밝혀질 테니까. 그는 다시 차가운 사막으로 내몰리겠지. 어쩌면… 그래, 언니 말대로 처음부터 사막에만 있게 하는 것이 그에겐 더 자비로운 일이었을지도."

문희는 말없이 스카치를 들이켰다.

"다행히 철현 씨가 전처럼 두술, 그로 표상되는 옛 나날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 같진 않더라. 철현 씨는 내가 한 일에 대해 허탈해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거든. 단지… 고맙다고 했지.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라."

"뭐, 덕분에 내 일은 더 늘어났지만." 문희가 음울하게 대꾸했다. "재단뿐만 아니라 세라믹파랑도 한 푸닥거리하신 상태더라구. 천연두 걸린 인간 둘 내버리고."

세경의 눈썹이 다시 일 밀리미터 정도 올라갔다.

"얼씨구."

"가뜩이나 양지로 안 나오는 것들인데 이거 일 잘못 돌아가면 서울에 때아닌 천연두 돌게 생겼다."

문희는 스카치를 마저 비우고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 아 참, 영주 씨는 좀 어때? 영주 씨는… 어, 말하자면 내 특전이었는데."

"입원 병동에 누워서 회복 중. " 세경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사인지기(四寅之器)에 당한 게 처음이라더니, 몸이 놀란 거겠지. 그래도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가택신 두 분은 천상관에 방을 내드렸어. 지금은 쉬고 계시고. 참, 매화가 두 분하고 앞으로 숙박 일정이랑 여러 가지에 관해서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이분들 비행기에는 계속 나가실 것 같아."

문희가 눈을 찌푸렸다. "정말이야?"

"성수기에만." 세경이 빙긋 웃었다.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으시겠대. 물론 거기서 계속 머무르는 건 무리하는 거라고 인정하시기는 했지. 그래서 성수기에만 간다는 거 아니겠어."

"못 말린다."

문희가 씨익 웃었다.

"하여간 김철현 씨랑 영주 씨, 그리고 그… 류원시 씨라고 했나, 그 사람까지 함께 병동에서 치료 중. 류원시 씨는 인연관에 임시로 숙소를 마련했어."

"다들 참… 고생 많았네. 김철현 씨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한, 네 말이 진짜 맞았어."

"내가 워낙 선견지명이 있잖아." 세경은 도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 자아도취도 능력이라니까, 이거. 맞아. 철현 씨가 잘해줬지. 길도 잘 찾—"

세경이 눈을 찌푸렸다.

"—진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적격이라고 말했잖아."

바의 불빛이 은은하게 감돌았다. 술병은 비어 있었다. 빈 술잔에 내려앉은 불빛은 어딘지 모르게 처연하고 풍요로운 느낌을 주었다. 세경은 술을 다시 주문하고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턱을 괴고 허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생각으로 흐릿해져 있었지만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일자로 꾹 다물어진 세경의 입술이 이따금 미소로 움찔거렸다. 무언가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런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문희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있잖아, 내가 또 생각하는 게 있는데…"


제주, 서천 병동


병실 창문으로 햇살이 비추었다.

남자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눈을 뜬 아침이었다. 잠은 길었고, 깊었고, 포근했다. 꿈 하나 꾸지 않은 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정도로 긴 숙면이었다. 이토록 편안한 아침을 맞이한 적이 얼마나 오래전이었는지. 남자는 옅게 미소 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분명 가늠조차 되지 않는 오랜 과거였을 것이다.

그는 조심스레 침대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칼에 베인 허벅지가 쓰라렸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남자는 침대 아래 놓인 슬리퍼를 끌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실은 4인실 정도의 크기에 청결했다. 벽면에는 큰 시계가 걸려 있었고, 남자는 그것을 본 다음에야 자신이 24시간 가까이 잠을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머쓱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오른쪽에 두 개의 다른 병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병상은 비어있었다. 병상의 주인들은 이제 다 회복한 모양이었다. 그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병상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다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다쳤다는 그 짧고 날카로운 생각은 아직도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쉬이 떨쳐내기도 어려울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그가 그래왔 듯.

자연스러운 경로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병실을 나섰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길은 잠시 눈에 익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늘상 거닐던 통로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길을 따라, 매일 걷던 일이 생각났다. 그 일은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처럼 흐릿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그 일이 매일의 루틴이 되어 스스로 빛이 바래버린 까닭일지도 몰랐다. 일상이 되어버린 간호. 일상이 되어버린 무기력. 일상이 되어버린, 절망. 남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부터 모든 걸 포기해버린 건지.

병실은 멀지 않았다.

그는 일말의 기대와 일말의 염려를 가슴 속에 품고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심상은 전혀 긍정적이지 못했다. 피와 죽음의 형상. 자신을 자각지도 못하고 그저 본능에 따라 행해지는 살육. 오랜 악몽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과연 그들이 제대로 처치했을까. 과연 그들이… 그분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었을까…

병실 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남자는 처음으로 등교한 소학생처럼 주눅이 든 모습으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 안의 공기는 낯선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놀라며 그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건성으로 화답하며 찾고자 하는 이를 눈으로 바삐 쫓았다. 어디 계신 걸까. 설마, 더 악화되신 건 아니겠지—

그리고 그의 고개가 한 방향에 멈췄다. 맞은편에 놓인 병상 위에서 누군가가 뒤채는 것을 본 까닭이었다. 남자는 그곳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그가 찾고 있던 이가 그곳에 누워 있었다.

야카르엔은 그곳에 있었다.

뒤척거리던 가모장이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깨어난 야카르엔은 잠시 멍하니 남자와 마주 보았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 사이에서 헤메던 눈동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또렷해졌다.

"바누야트냐?"

남자는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가모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야카르엔의 얼굴은 멀쩡해 보였다. 이전과 다른 것이 없었다. 이전의 총기, 이전의 명확함, 이전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이. 숨이 떨려 나왔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다시는 회복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고려의 정세는 어떠하더냐?"

남자는 멍하니 야카르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일에 네가 포우루샤스파와 함께 내려가지 않았더냐. 작금에 그곳은 어떠한지 직접 살피고 오겠다고. 빨리 돌아와 의아하기는 하였는데, 현마 다 가지도 못하고 돌아온 게냐?"

그제야 알았다. 남자는 허탈한 표정을 애써 감췄다. 실망은 놀라움만큼이나 빠르게 찾아왔다. 야카르엔은 회복된 것이 아니었다. 늘 그렇듯 오래 전 기억의 소용돌이 사이를 표류하고 있었을 뿐. 그는 침대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오, 잘 돌아왔습니다. 하오나 국경 지역이 험준하고 일기가 좋지 않아, 긴 여정은 곤고(困苦)하라고 판단하였습니다. 해서 그만 북계 지역까지만 다녀왔습니다. 그곳의 민심은 여전히 사납더이다."

그는 다에바어로 대답했다. 수백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발음이 이와 천장에 부딪히고 밖으로 튕겨 나가 사라졌다.

"네 보기에, 다시 한 번 역병이 돌아야 합당하겠더냐?" 야카르엔이 서늘하게 물었다. "굳어진 것은 언제나 깨어지기 마련이다. 네 보기에, 작금의 고려는 부서질 만큼 충분히 두껍게 침전한 듯싶으냐?"

남자는 아무도 모르게 작게 한숨 섞인 미소를 지었다. 수백, 수천도 더 들은 질문이었다. 이 질문이 던져질 때마다 남자는 천길 낭떠러지 밖으로 추락하는 감각을 느꼈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 수많은 생명이 달려 있었기에. 생명의 무게는 무거웠고 감당하기 힘든 성질을 그것은 가지고 있었다. 매일 밤 심장이 뛰는 시간 속에서 그는 그 순간에도 고통에 시달리다 못해 죽기만을 바라고 있는 수많은 병자의 심박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소멸치 않는 죄책감과 자조의 전율로 자주 몸을 떨었다.

"아니올시다. 새로운 물결이 도래함은 필연이나 아직 옛 파도가 다 물러가지 않았고 이제 차거운 절기가 도래한즉… 강인한 이들조차 나약해지고 말 것입니다."

"강인함이 나약함으로 변질되는 것은 논할 바가 되지 아니한다. 쉬이 제 성질을 잃는 것이 정녕 강인한 것이겠느냐?" 야카르엔의 어조는 엄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풀면서 고개를 돌렸다. "허나… 이번엔 네 뜻을 따르겠다. 그래, 이제 그 땅의 사람들이 곤궁한 시절이 오니…"

남자는 병실을 나와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고 있었다. 문득 가모장을 간호하던 간호사들이 해준 말이 떠올랐다. 난동을 피운 적은 있었지만 강도가 심하지는 않았어요. 빈도수 역시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가모장의 상태는 그가 염려한 만큼 나빠지지 않은 것이다. 그 사실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남자는 가슴 속 한쪽에 쌓아둔 짐이 슬그머니 벗겨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감각은 실로 상쾌했다.

의식 없이 거닌 걸음의 끝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나무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일출관 1281호. 남자는 자신이 숙소로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귀소 본능이라도 있는 것인지. 그는 홀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피식 웃음지었다.

문제는 열쇠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갖다 댔다가 코트에 열쇠를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코트는 병실 안에 있었다. 이제 다시 돌아가기에는 퍽 번거로운 거리였다.

그때였다.

"열쇠 필요하세요?"

남자는 옆을 내려다보았다. 동자 아이 하나가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아이는 영태였다.

"영태야."

"반야 아저씨 어제 오신 것은 입때껏 알고 있었지만, 어디 들여보내 줘야 말이죠." 영태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참, 아저씨 열쇠는 여기요. 동자들 전용 곁쇠니까 돌려주셔야 하구요."

남자는 아이에게서 열쇠를 받아들었다.

1281호에는 햇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환한 정경이 눈을 찔렀다. 남자는 이 방에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 호텔처럼 정리된 가구. 남자는 그 모든 배치를 바라보며 삼엄함을 느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 자신이 만들어낸 삼엄함이었다. 스스로 만들어 낸 감옥이었다.

"옷부터 갈아입으셔야지요?"

뒤에서 영태가 말을 걸어왔다. 남자는 그제야 자신이 여태 환자복을 입고 돌아다녔음을 자각했다. 이상한 해방감은 그러한 이유에서 왔던 것인가. 그는 턱을 긁적이며 생각에 빠졌다. 언제나 갑갑하고 갇혀 있던 것만 같던 삶이 사실은 언제나 목을 조일 정도로 단단히 갖춰 입은 의복 탓이었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일까. 남자는 그것이 어느 정도는 자신이 경험하고 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영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래야지. 허나 제일 멀쩡한 옷이 그 꼴이 되었으니…"

남자는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어떤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영태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뒤를 따랐지만, 닫힌 방문에 그만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몇 분 후 남자가 방에서 걸어나왔다.

"못 보던 옷이네요?"

남자의 입가엔 멋쩍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검은 도포 위에 검은 쾌자를 걸친 상태였다. 흰 세조대가 쾌자 위에 정갈하게 묶여 있었다. 남자는 어색한 듯 상투를 틀지 않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전에 소을촌에서 수학하였을 제 그곳을 방문하였던 어떤 이에게 선물로 받은 옷이다. 오래되어 그저 보관만 해두고 있었으나… 이제 달리 방도가 없으니."

낡은 쾌자 위에 남자의 손길이 가 닿았다. 오랜 세월을 다시 느끼게끔 하는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전달되었다.

남자는 발코니로 나아갔다. 해가 하늘 중앙으로 떠오르면서 온 세상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의 시선은 머나먼 지평선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먼 옛날 나아갔던 세상,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세상이 시원(始源)의 해면 위에서 서로 얼싸안고 울고불고 온몸으로 요동쳤다. 파도 소리는 춤추면서 기나긴 서사시를 노래하고 있었다.

"내게 아직도 나아갈 길이 있구나."

나직한 중얼거림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진실로 그 말이 옳음을, 김철현은 가슴 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게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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