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다니는 역병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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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올랐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사나운 불길이 승천하는 이무기처럼 끊임없이 솟구친다. 불길은 뇌에 와 치닫고 그때마다 비명은 터져 나온다. 차라리 죽기를 바랐다. 죽음에 평온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온 몸을 휘감은 불길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 종류의 존재인 듯하다. 뇌가 녹는 듯한 고통과 함께 지독한 경련이 일어난다. 손이 마구 떨린다. 관절이 끊어지는 고통이 잇따른다. 삶은 그곳에 있었고 죽음은 멀지 않았다.

죽음보다 삶이 더 고통스럽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다.

시야에 지진 같은 진동이 일어난다. 머리가 드디어 깨지려나, 싶은 어떤 안도감마저 든다. 불길은 이제 머리에 자리를 잡고 광인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고개가 마구 흔들린다. 지금 이 땅 위에 누운 몸이 어찌나 버거운지. 몸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분연히 인다.

그러나 아직 죽음은 자리에서 일어날 마음이 없다.

나뒹굴던 몸이 무슨 조화인지 어떤 인영 둘에 시선이 가 닿는다. 친숙한 둘이다. 너무나도 반가운 얼굴들. 그러나 고통 때문일까, 그 감정에 원망과 증오가 한데 섞여드는 것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다. 고통은 가라앉질 않고 되려 더 심해진다. 이젠 등판의 모든 뼈가 분쇄되는 느낌이 든다. 시선은 여전히 둘에게 고정되어 있다. 그들의 이름이 띄엄띄엄 기억난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 혹은 아버지 어머니.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온다. 죽여달라고, 제발 이 고통을 끝내달라고 누군가가 부르짖고 있다.

그것이 자신임을 모르지 않는다.


김철현은 오천 미터 상공에서 깨어났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에,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처럼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몸은 생(生)을 쫓는 듯, 팔걸이를 가득 움켜쥔 손아귀에는 평소보다 더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꿈이 요란하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에게 그다지 위안이 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가치 판단이 개입될 만한 부류의 사실도 아니었다. 이는 단지 하나의 징조일 뿐이었다. 정신이 깨어나고 옛 기억이 계통 없이 되살아날 징조. 철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그간 보냈던 모든 착란의 시간을 톺아볼 때, 첫 조우의 기억이 언제나 트라우마 재발의 단초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이 그렇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어떤 영화의 티저라도 되는 양. 하나뿐인 관객인 그가 그걸 보고 싶지 않다고, 상영을 중단하라고 수없이 외쳐댔지만 거대 영화사는 고객의 말을 듣지 않았다. 기억은 성가신 스팸 광고 같았다. 지금도 그렇게 그에게 돌아온 것이다.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 않는 첫사랑과 같이.

철현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비행한 지는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다. 창 밖으로 깨알 같은 건물들과 산, 강이 보였다. 어디라고 특정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목적한 곳에는 아직 도달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철현은 고개를 돌렸다. 주위는 비행기 승객이 으레 그러한 수준으로 소란스러웠다. 그는 다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철현의 좌석은 창문 바로 옆이었고, 때문에 상대적으로는 소음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서천의 손길이 닿은 건지) 승객도 적은바, 신경 쓸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는 내심 안도하며 앞으로 가야 할 곳을—

"어떤 걸로 드릴까요?"

철현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옆을 바라보았다. 승무원 하나가 웃는 얼굴로 카트를 밀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무얼… 말요?"

"음료를 선택하실 수가 있으세요."

승무원은 그렇게 말하며 카트 위에 담긴 액체들을 가리켰다. 철현은 미지의 것에서 오는 기시감을 생생히 느끼며 몸을 조금 피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비행기를 타는데, 음료 선택은 도대체 무슨 의도가 담긴 행사인가. 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승무원을 올려다보았다. 승무원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표정 가장자리에는 당혹감이 젖어들고 있음을 철현도 알았다. 더 지체하다가는 불미스러운 일이 터질 게 뻔하다. 그는 반쯤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 어… 오렌지 주스면 될 것 같소."

그나마 서천에서 제일 많이 받아든 음료가 오렌지 주스였다. 철현은 음료가 담긴 컵을 얼떨떨한 얼굴로 받아들고는 홀짝였다. 바깥출입이 너무 적어서 이렇게 된 걸까, 벌써 피로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여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철현은 멍하니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댔다. 시야에 와 닿는 모든 것이 새롭고 진기할 따름이었다. 좌석, 창문, 사람들과 기계들, 심지어는 귀가 먹먹한 이 기분조차도. ‘비행기’에 대해서는 들어봤고, 또 본 적도 있었으나 타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제주에서 한성, 그러니까 서울까지를 이런 철 덩이를 타고 날아갈 줄은 상상도 못했단 사실이 떠오르자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옛 시대에도 이런 게 있었더라면.

그 생각과 동시에 하늘을 날아다니며 두창을 옮기고 다니는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는 피식 웃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철현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은 자욱하게 떠다니고 있었으며 햇살은 따갑지 않고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구름 아래의 사람들은 참 더러운 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마치 그때처럼, 역병에 걸려서는 하늘을 원망하던 사람들처럼. 수천, 수만의 이미지가 불현듯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곡차곡 누적되어서 이제 철현 자신에게 이자를 요구하고 있는 얼굴들이었다. 절대 갚을 수 없는 이자임을 알았다. 갚기에는 너무 많은 목숨을 빚지고 있었다. 목구멍이 뒤틀리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갚을 수 없는 부채의 힘을 그는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철현은 무의식적으로 안주머니에 손을 가져다 댔다가 맥없이 떨궜다. 두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첫째, 비행기 내에서 흡연할 수는 없다.

둘째, 수라꽃 궐련을 한 개비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의식 저 너머로 도피할 도구는 이제 없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는 팔로 눈두덩이를 덮었다. 거칠거칠한 코트의 질감이 눈꺼풀 너머로 느껴졌다. 죽은 이의 얼굴 위로 덮이는 천 같아서, 철현은 팔을 내렸다. 우울은 급속하게 퍼지고 있었다.

철현은 궐련 대신에 안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서 들여다보았다. 금속질의 케이스는 어딘가 껄끄러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전원 버튼을 누르고 화면이 떠오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화면을 스와이프하자 배경화면이 떠올랐다. 비행기 사진과 표를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철현은 서천에서 들은 전화를 '비행기 모드'로 해놓으라는 조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 그게 정확히 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따라서 잘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만, 그래도 그는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모든 일을 빨리 끝마치고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야 가모장의 안위를 더 걱정할 일이 없었다. 서천의 의료진은… 유식했으나 보호 면에서는 믿을 수 없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가모장임을 감안하면 말이다.

그의 손이 슬쩍 전화번호부를 누르고 지나가자 앱이 실행되었다. 철현은 조금 놀란 눈으로 화면을 지켜보았다가 떠오른 전화번호를 내려다보았다. 전화번호는 세 개밖에 없었다.

서천 CC 프론트 데스크, 김세경 교수, 김세경 교수가 소개해준 길잡이.

철현은 전원을 끄고는 턱을 괴었다. 김 교수가 부탁한 일을 하느라 기약 없이 서울 시내를 뒤져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쩌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을 다 돌아야 할 수도 있겠지. 불안은 점점 커져갔다. 모든 가능한 미래는 그 안에 가장 끔찍한 면모를 포함하고 있었고 이를 타파할 방도는 쉽사리 보이지 않았다. 하기사, 가택신을 찾을 일이 쉽지는 않을 터였다.

대체 어디로 가야 할까.

그 자문은 어젯밤 수도 없이 되뇌었던 질문과 겹쳤다가, 기억의 지층을 뚫고 한없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문한 순간들의 모든 화상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애써 잊었던 것들이 무덤을 부수고 날아올랐다.

철현은 멀미를 하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모든 게 괜찮아졌다고 느껴질 때까지.


비행기는 조용히 내려앉았다. 철현은 승객들 사이에서 홀로 캐리어를 끌고 내렸다. 바삐 오가는 사람들은 나름의 해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철현은 뭐 하나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그 해류에 올라탔다. 그나마 위안이 될 일은 이 물길 끝에 안내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적어도 그곳에서 미아가 될 일은 없지 않은가. 철현은 뒷목을 감싸 쥐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서울이 도대체 어떻게 변했을지도 모르는 지금, 자신의 감에 모든 걸 걸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게다가 철현은 자신의 감이 대체로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띠링, 하며 알림음이 울렸다.

철현은 주머니에서 진동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세경으로부터 날아온 문자였다.

'지금 연락받았습니다. 안내해주겠다는 친구가 갑자기 큰 볼일이 생겼다고 못 나오겠다는데, 아무래도 혼자 돌아보셔야 할 것 같네요…'

철현은 망연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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