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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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출발 10분 전.

남자는 서류가방과 정장 차림으로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른 새벽이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하품이 절로 나왔다. 하필이면 이런 시간대에 이 여객기가 출항할 것은 또 뭔가.

남자는 K30 자리에 앉아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이 업무는 오늘 처음이었다. 원래는 격리실에 죽치고 앉아 동료와 말 놀음이나 하고 있던 그였다. 갑작스러운 업무 변경은 당혹스러울 따름이었다. 특히나 비행기 멀미를 하는 그에게는.

뇌수종 이 작자를 그냥.

부장에 대한 원망은 다시금 옮겨갔다. 도대체 왜 하필이면 SCP-713-KO는 배가 아니고 비행기를 선택한 것인가? 배라도 세계 방방곡곡은 다닐 수 있을 것인데 말이다. 비행기 중에서도 이렇게 뚱뚱한 걸 타서, 하필이면 몇 시간마다 바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 봐야 한다니. 그러면 차라리 비즈니스석으로 끊어주기라도 하던가, 이코노미석이 무슨 말인가.

남자는 한숨을 쉬며 품속에서 부딪히는 요원증을 꺼내 문질렀다. 오민철이라는 이름이, 상대적으로 멀끔해 보이던 신입 시절의 그가 웃고 있는 사진 위에 박혀서 빛났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피로와 졸음 덕에, 민철은 뒤에서 피곤해 보이는 남자와 초록 머리 여자가 탑승하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게 문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디라고 했죠?"

"A44, B44. 창가 쪽이외다."

류원시는 먼저 자리에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반면에 김철현은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 승객이 다 들어오지 않은 이때, 조왕신과 성주신을 더 쉬이 찾을 수 있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원시는 마음 편하게 입을 열었다.

"그만 찾고 좀 쉬쇼. 아무렴 가택신들이 나 여기 있네하고 앉아 있겠어요?"

"찾아봐야 하지 않겠소. 혹시 모르는 일인데. 게다가 찾기라도 한다면, 굳이 시간을 버릴 필요도 없을 테고 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바로 내리면 되니."

"그럴 필요 없이 그냥 런던으로 가면 되지."

원시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런던에서 도서관으로 간 다음에, 거기서 제주도로 가면 빠르다니까요… 참나, 내 그리도 설명해줬건만."

철현은 대답 없이 텅 빈 좌석들을 지나쳐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승객들은 차차 착석을 완료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정장을 입고 서류가방을 품에 안은 남자를 지나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사람은 꽤 적었고, 때문에 철현은 빠르게 원시에게로 다가올 수 있었다.

"각시손님 때문에 그럽니까?"

원시는 자리에 앉아 한쪽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웅얼거렸다. 철현은 그의 옆자리에 앉아, 탑승하는 승객들의 얼굴을 확인했다.

"저번에 보았을 때도 식겁할 수준이긴 했다만."

철현은 고개를 돌려 원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발작 증세의 강도와 빈도 모두 심해지셨습니다. 그저 내버려두면 무슨 일을 벌이실지 모르고. 내가… 옆에 있어야지."

"지겹겠네요."

철현이 한쪽 눈을 치켜떴다.

"게 무슨 말이오."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경고가 깃들어 있었다.

"흠." 원시는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었다. "아무리 효심이 깊은 작자도 자기 부모가 치매에 걸려 고생하는 지경에 있다면 어느 순간은 고됨을 느끼기 마련이죠."

철현은 날카롭게 그를 바라보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옮겼다. 한참 있다가 철현이 말했다.

"'그리하여 육의 고(苦), 행(行), 명(明), 퇴(退)가 다르지 않느니, 고로 말미암아 행이 촉발되고, 행으로 말미암아 명이 나타나며, 명으로 말미암아 퇴가 등장한다. 다시 퇴로 말미암아 고가 탄생한다. 우자(愚者)는 이를 두고 연속되었다 칭하나, 목자(牧者)는 이를 두고 한 가지라 말한다.'"

"그거 사르킥 경전이에요?" 원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맞다고 할 수는 있겠는데." 철현이 살짝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정확히는 세을가 경전이외다."

"어…" 원시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서로 적대하는 거 아녔어요? 당신네들은 세을가 무리한테 쳐발, 아, 아니… 공격받았잖아요."

"그거야 천 년 전 일이고, 그 일은 다시 사백 년 전에 풀었으니 되었소."

철현은 마지막으로 남은 갈앉을꽃 알약 세 알을 삼켰다. 찌르르하고 갈비뼈가 아파왔다. 치료는 이제 완전히 마무리된 듯했다.

"나는 지금 행하고 있소. 명과 퇴와 고가 이와 함께하고 있지. 굴레처럼 말이오. 지겨우냐고? 물론이오."

철현은 고개를 돌려 졸려 보이지만 그래도 시선을 자신에게로 고정하고 있는 원시를 마주 보았다.

"헌데 나는 이 굴레를 벗을 수가 없습니다."

철현은 침을 삼켰다.

"왜냐하면 그분도 그 굴레에 시달리시고 계시니까. 나보다 더 심한 굴레에 갇혀 계시지. 해서… 나는 그분이 굴레에서 벗어나실 때까지 같이 그 업을 지려 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민철은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지러웠다. 그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해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업무에 대한 불안 때문인지 단순히 비행기 멀미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놓인 이 상황이 꽤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따지자면, SCP-713-KO 담당 격리는 사실 굉장히 쉬운 축에 속했다. 무속학부 관할 중에서 놀고먹는다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이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비행기를 세 시간 정도만 타면 등장하는 두 명의 늙은이. 세간은 분명히 그 두 노인을 신경 쓰지 않았고 앞으로도 신경 쓰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지신밟기니 뭐니를 준비한 등신들을 도리어 밟은 산신이나 갑자기 살아나서는 이순신과 대판 몸싸움을 벌인 세종대왕 동상보다야 훨씬 얌전한 존재들인 셈이다.

그러니까… 아마 그 때문일 수도 있었다. 민철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너무나 적은 자극, 분수에 맞지 않는 듯한 편안함이 그를 괴롭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일상적 행위들이 늘 혼재되어 있었던 생활에서 처음 벗어나는 날이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반응이리라.

민철은 그렇게 결론짓고 목을 스트레칭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전임자의 말에 따르면 두 노인네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바에서 불쑥 나타난다고 했었다. 마치 거기 원래 앉아있었다는 듯한 모양새로. 남들은 이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다. 이 SCP를 처음 격리한 인원들이 얼마나 능력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민철은 자신의 시계를 흔들어 보였다. 탑승 전에 장착한 소형 항뒤르켐적 보호 장구는 아주 자연스럽게 시계의 부속품처럼 녹아들어 있었다. 이제는 그도 SCP-713-KO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말고는 다른 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격리만을 위한 모습으로 온 것이다.

사실 요원 생활 중 이렇게 간소한 장비만을 착용하고 격리 업무에 뛰어드는 것도 처음이다.

"그래서 가택신은, 찾았습니까?"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민철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을 받는 것과 동시에 방금 그 말을 한 여자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근육이 굳는 느낌이 들면서 동시에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 비행기의 누군가가 SCP-713-KO에 대해 알고 있다.


"그래서 가택신은, 찾았습니까?"

철현은 원시가 던진 질문에 고개를 저음으로써 답했다. 출발하고 난 뒤에도 한두 번 화장실에 간다는 명목으로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들은 없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자기 장딴지를 두들기며 이를 악물었다.

만약 김서방네 노인이 틀렸다면?

철현은 한숨을 내뱉고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노인이 틀렸다면, 이란 의심은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만일 그렇다면 헛걸음을 한 셈이다. 설사 원시의 말대로 런던에서 한국으로 바로 돌아올 수 있대도 이 불필요한 비행시간은 어찌할 것인가. 그는 등받이에 털썩 기대고 지나치는 승무원들과 승객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택신들은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설마 기장실에 있는 거 아녜요?"

원시는 조금 기운을 차린 모습이었다.

"기장실이라면 조종사들이 눈치를 챌 거요. 그분들이 아무리 환술에 능하다 한들 매번 그럴 수야 있겠소? 더구나…"

철현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조심스럽게 움츠리고 말했다.

"더구나 사람들을 좋아하는 성주신과 조왕신의 성격상, 이 많은 사람을 두고 몇 시간 동안이나 그 안에 갇혀 있을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아마 승객 사이에 끼어 있을 거다?"

"그럴 가능성이 높소."

원시는 크게 하품을 하더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툭 내뱉었다.

"그… 사람, 아니, 신들이랑 아는 사이에요?"

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연이 조금 닿았소. 조선 팔도를 돌아다니면서 늘상 만났던 분들이라, 내게는 내 주인들하고 같은 수준으로 얼굴이 눈에 익습니다."

"어떤 관계였는데요?"

철현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원시를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아, 갑자기 왜 쑥쓰럼을 타고 그러쇼. 타려면 처음 만났을 때나 타던가. 그때는 앞에 누가 있건 말건 약에 취해서는 헛소리나 늘어놓고."

"그, 그건… 미안하게 되었소." 철현은 귓불이 붉어진 채로 겸연쩍게 볼을 긁적였다. "헌데 이건… 꽤 그런 일이라."

"설마 치정?"

"그런 것은 아니고."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간혹 특정인의 집에만 두창을 들끓게 한 적이 있었소. 그럴 적에… 그분들이 나타나 우릴 막았지. 그런 연유로, 사실 인연이라고는 하지만 악연입니다."

원시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처용한테도 처맞더니 가택신들한테도…"

"계속 그리 처맞는다, 패했다 하는데 처맞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항변하려던 철현은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둡시다."

"거 봐, 반박 못 하지."

"작금엔 하릴없는 이야기요."

"어련하시겠어."

철현은 원시에게 눈가를 찌푸려 보였고, 원시는 이에 대답하듯 입가를 늘렸다. 철현은 어이가 없어 옅은 미소를 띠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다 찾아본 거 맞아요?"

"이 공간은 전부 둘러보았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들의 옷자락마저 보이지 않더이다."

"2층 안 가봤잖아요."

정적이 흘렀다.

"…비행기에 2층이 있소?"

"돌겠네."


비행기가 순항했다.

민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아까 들은 가택신에 대한 말은 환청인 것처럼 흐릿했다. 아마 이 비행기 내부에 한국 무속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이 탔나보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 경우도 허다했으니까. 한번은 그가 아디다스 매장에서 뒤로 텀블링을 하며 펩시 콜라를 흩뿌렸을 때—

휴대폰에서 알람이 울렸고, 민철은 허겁지겁 이를 끄고서는 자리에서 벗어났다.

그는 슬그머니 뒷켠 화장실로 향했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변기 위에 앉았다. 민철은 이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열었다. 곧장 SCiPNET 전용 위성단말기가 연결되었다.

"좋아…"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직원용 인트라넷을 열었다.

…please wait…

foundation Database number 737C
personnel "Oh MinCheol" : confirmed
encrypted record : yes
encrypted transmission : yes
command find and locate Mail log : 2019-10-12 3762

…please wait…

순식간에 화면이 암전했다가 다시 밝아졌다.

민철은 뻑뻑한 눈을 비비고 탑승 전 날아온 메일을 열람했다. 메일은 SCP-713-KO 담당 인원이면 모두 알고 있을 내용을 담고 있었다. SCP-713-KO-1과 SCP-713-KO-2, 둘의 행동. 한국인에게만 접근하여 던지는 제안. 제안에 대한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이후 행동. 그리고 대화 내용. 민철도 이 내용을 알았다. SCP-713-KO 격리 담당으로 차출되면서 귀에 못이 박이도록 교육받은 탓이었다. 눈 감고도 외울 수 있었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한 문장이 보고서에 추가되어 있었다.

SCP-713-KO에 특기할 만한 변이가 생길 때, 혹은 격리 파기 시도가 발생할 때 해당 메일에 답장하는 방식으로 알릴 것.

그러니까 그냥 비행기만 줄창 타라는 이야기군. 민철은 스크롤을 더 내려보다가 전원을 끄고 그렇게 생각했다. 재단은 그에게 정말로 휴식을 준 것일지도 몰랐다. 필경 안온한 휴식을 즐기고 있을 두 가택신이 일순간 무지막지한 괴물로 변할 리도 없었고, 두 노인네를 데려가겠다고 나설 단체도 없을 테였다.

"이건 너무 쉽구만…"

너무 쉬워서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민철은 한숨을 쉬며 변기에서 일어섰다.

그는 화장실 문을 열고 걸어나왔다. 순항이 지속되는지 화장실로 향하는 승객들이 꽤 있었다. 민철은 뭇 사람들을 지나쳐 가며 자리로 돌아갔다.

한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아니 진짜로, 복층 여객기 처음 타 봐요?"

어딘가 이국적인 억양이 섞인 한국어. 아까 가택신을 언급한 그 목소리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민철은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2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행기를 탈 일이 있었어야 말입니다."

"너무 밖이랑 단절되어서 사신 거지. 히키코모리란 말 알아요?"

민철이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고 있는 어떤 남자와 그 뒤를 따르는 초록 머리 여자를 보았을 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여자가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히키코모리는 또 무슨 말이오?"

"따악, 당신 같은 사람들을 이르는 말인데."

"…류 양이 날 놀리는 데에 맛이 들렸나 보오."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민철은 조심스럽게 둘의 뒤를 따라붙었다. 2층에는 바가 있다. 만일 이들이 SCP-713-KO의 존재를 안다면… 너무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상황인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가 총기를 소지하지 않은 것을 깨닫고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무기로 사용할 것이 없다는 사실은, 민철에게는 충분히 불안한 기분이 일게끔 하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그는 무속학부 소속이면서도 다른 요원들과 다르게 소위 ‘영능력’도 없는 마당이다. 무얼 하겠는가.

민철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꺼내서 다시 인트라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다시금 둘의 뒤를 쫓았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소."

원시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곤거리는 철현을 바라보았다.

"아니 누가 쫓—"

"쉿."

철현은 잽싸게 원시의 입을 막아버리고 이전보다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흰색 정장에 포마드 머리. 사업가나 직장인인 척하고 있으나 실상은 아닐 거요. 아까 1층에서 계단으로 올라갔을 때부터 우리를 미행하고 있었소."

철현은 잘 알았다. 이런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었다. 무의식적으로 목덜미에 힘이 들어가며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소진해버린 갈앉을꽃을 대신해서 이를 악물었다. 추적당하는 기분, 사냥감이 되어버린 기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 그 기분이 되살아났다. 마치 1930년대의 어느 날들에 느꼈던 감정처럼 홀연히.

철현은 뒤를 정면으로 돌아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주위를 살폈다. 지금까지 좌석에 앉은 승객 가운데 조왕신과 성주신은 없었다. 그저 런던으로 향하는 여행객들과 사업가들뿐. 신들은 없는데, 그들을 추적하는 누군가만 존재했다.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이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생각은 뇌 끝에서 끝으로 옮겨가며 스스로 재정립하고 재설립되었으며 재조립했다. 일종의 덫, 덫의 구조를 모사한 그림이, 뇌리에서 번뜩 떠올랐다. 여기 철창 안에 먹이가 있다. 탐스럽고 군침이 도는 먹이다. 생물은 그 먹이를 보고 혹해서, 철창 안으로 뛰어든다. 뛰어드는 즉시 철창문은 닫히고, 놀란 생물은 나가려고 발버둥치지만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이는 그의 처지를 메타포한 것인가? 설마 이 비행기 자체가 일련의 덫이었을까? 그렇다면 대체 누구에서부터 그는 속아왔던 걸까. 누가 그를 여기로 이끈 것인가?

원시가 철현의 손을 물었다.

"엣퉤. 에이씨 진짜. 아니 내가 놀렸다고 이러깁니까?"

철현은 아픔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알았어요. 보니까 저 뒤에서 아닌 척하고 슬슬 따라오더라고요. 젠장, 분명히 옥리나 분서꾼 중 하나일 텐데."

"옥리…와 분서꾼은 뭐요?"

"옥리는 SCP 재단이라고, 초상 존재를 잡아다가 지들 맘대로 가두고 '격리'하는 등신 집단이에요. 따지자면… 당신도 '격리'가 가능할 걸요." 원시가 소곤거리며 말을 이었다. "분서꾼은 GOC, 세계 오컬트 연합이라고 유엔 산하의 집단인데, 개중엔 초상 존재를 이용하거나 격리하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 파괴하는 개종자 새끼들입니다. 아오, 진짜 그 새끼들 때문에 사료 검증이 몇 번이나 물 건너갔는지…"

"아는 무리들이었구료."

"안다고요?" 원시가 휘둥그레한 눈으로 속삭이는 것도 잊고 물었다. "어떻게 아는데요?"

"어… 그럴 일이 좀 있었소."

"뭐 이리 비밀이 많아."

"60년대에 일본에 갈 일이 좀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거요. 이제 만족하시오?"

"별론데. 그건 차차 듣도록 하고요." 원시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서, 우린 어디로 갑니까? 여기서 저자를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철현은 입을 달싹였으나, 마땅한 대답을 떠올릴 수가 없어서 그냥 걸었다. 기억이 요동치면서 옛 도피 생활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때 어떻게 처신했던가. 그때 무얼 떠올렸는지 기억하고 싶었다. 그는 간절했다. 생각보다 간절했고 집요했다. 이에 부응한 탓인지 아니면 그저 그리될 일이었는지 기억의 문은 열렸다. 또 다른 기억이었다. 조금 더 전의 일이었다. 조금 까무잡잡한 얼굴이 그를 향해 웃고 있었다.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향해 그가 뭐라고 하고 있었다. 그 말이… 그 말이 기억이 안 났다. 철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훨씬 더 예전의 기억. 그 기억의 누군가가… 그가 찾고 있던 말을 하고 있었다.

호반손님.

그 한 단어가 떠오르자 밀물처럼 기억은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호반손님이, 아슐링이… 고려의 밤 아래에서 그와 함께 거닐고 있다.

"길을 잃으면 어찌 해야 합니까?"

"길을 잃는 게 무서우냐?"

"…네."

"어찌 무서우냐?"

"출발한 자리로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까닭이 첫째요, 어드메로 가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음이 그 둘째요,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그 셋째입니다."

"우리는 천성이 나그네다. 나그네가 길을 잘못 들었다 하여 지레 겁을 먹으면 어찌 세상을 돌아다니겠느냐. 마음을 단정히 가꾸어라.

예 네가 간과한 것이 있다. 출발한 자리로 돌아올 필요가 없음이 그 첫째다. 옛 자리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계속 거닐어 나아가라. 만일 출발한 자리가 여정 중 나타난다면, 그곳은 더는 네가 출발한 자리가 아니라 네가 지나가야 할 자리에 불과함을 모르느냐.

네가 진실로 목표한 곳, 그곳을 향하겠다는 굳은 다짐이 있다면 어느 길을 갈지라도 종내 그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란 사실이 그 둘째이니, 네 말은 헛된 걱정이다. 지금은 모를 수 있다. 허나 곧, 네 온 삶을 두고 걸어갈 목표가 생긴다면 너는 내 말을 알리라. 지금 네가 길을 잃어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너는 그곳에 다다를 것이다.

셋째가 제일 크나큰 실수다. 네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면 잠시 멈추어 서면 될 일이 아니냐. 그리고는 네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라. 그리고 네가 앞으로 갈 길을 보아라. 작금이라 함은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 사이의 존재이니, 결국엔 그 두 존재가 네 지금을 정의할 것이다."

"하오나…"

"그리하여도 무서우냐?"

"네에…"

"한 가지 방책이 있다."

"게 무엇입니까?"

"앞으로만 가라. 무조건 직진이다."

"앞으로만 갑시다."

철현은 원시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무조건 직진이오."


민철은 둘이 점점 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그들이 SCP-713-KO와 접촉하기 위해 왔다는 추측은 어느새 힘을 얻고 있었다. 온갖 불안한 상상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하필이면 내가 처음 업무를 맡은 날, 오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은 뭔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금은 저들이 바에서 무슨 짓을 할 지가 가장 중요하다.

아직 시간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기록상으로 SCP-713-KO가 나타난 최단 시각은 약 3시간 3분이었다. 지금 그들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적어도 민철이 그동안 읽고 외워온 보고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대상은 이륙 3~4시간 후 기내 바에서 나타나며…'라고.

그러나 만약에 SCP-713-KO가 이례적으로 빨리 나타난다면?

민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는 보고해야 했다. 재빨리 보고해야 했다.

그리고 저 앞의 둘을 구금해서 심문해야 하리라.

둘은 어느새 바로 들어서고 있었다. 민철은 그 뒤를 따라 조금은 빠른 속도로 바 입구에 도달해 서성거리다가, 여자가 앉은 자리 바로 2칸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정도면 대상에게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이야기를 엿듣기 딱 좋은 자리의 마지노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설마 바도 처음이란 건 아니죠?"

"서천에도 바는 있소."

서천. 민철은 슬그머니 휴대폰을 켜서 메모 앱과 녹음기 앱을 열었다. 잘만 하면 대화 속에서 그들의 소속과 의도를 다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그는 방금 포착한 두 음절을 메모 앱에 적어 넣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돌아다녀요?"

"뭔가가… 느껴지고 있소. 굉장히 친숙한 기운이고 동시에 상당히 미약해진… 기운. 하지만 어떻게…? 기작을 짐작할 수가 없군."

"그게 성주신과 조왕신의 기운입니까?"

나왔다, 성주신과 조왕신. 민철은 등줄기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들은 정말로 SCP-713-KO를 알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정상 세계의 민속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들은 안다.

항뒤르켐적 보호장구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철은 의아한 눈으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가, 무의식적으로 옆을 보고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의 바로 옆에 웬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인 옆에는 또 다른 노인이 앉아 있었고, 마티니를 막 주문하고 있었다. 민철은 입을 벌린 채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가, 똑같이 벙찐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초록 머리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시선을 돌렸다.

"이, 이봐요. 나타났어요."

여자의 부르는 소리에 남자가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반가움, 그리고 민철이 짐작할 수 없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노인들에게로 걸어오더니, 입을 열었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노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분명 SCP-713-KO-2일 노인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손님…?"

"네, 접니다. 김철현이오! 제가—"

꽝, 하는 소리가 났다.

민철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인지했다.

인지하는데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렸다. 남자는 머리를 움켜쥐고 있었고, SCP-713-KO-1는 노발대발해서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SCP-713-KO-1이 들고 있었던 놋그릇은, 놀랍게도 조금 찌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방금 내려친 거야?"


철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 이야기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성주신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눔의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이 상노무 시끼가 그때의 분이 안 풀려서 기어들어왔느냐? 오냐! 한 판 붙자! 내가 다 늙었다지만 네 한 놈은 이길 수가 있다!"

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못했다고 수식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놋그릇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직후라 골이 울려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운 마당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원시가 웃음을 애써 참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컥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는 기를 쓰고 예의를 갖추기로 했다.

"…작은 손님 김가 철현, 성주신과 조왕신을 뵙습니다."

"아유, 고만 좀 하소. 야도 보니 무슨 원(怨)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조왕신이 말리는 소리가 웅웅대며 귓가를 간지럽혔다. 철현은 비틀거리다가 애써 자세를 잡고 두 노인 앞에 정자세로 기립했다. 둘은 똑같이 의심이 물든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조왕신 쪽은 의심의 농도가 옅은 반면에 당혹과 연민이 가득했고, 성주신 쪽은 의심의 농도뿐만 아니라 분노와 투지 역시 높았다. 조왕신이 말리느라 그나마 표정은 조금이나마 유해진 상태였다.

"네 여긴 어인 일이냐?"

조왕신의 물음에 철현은 또박또박 말하려고 애썼다. 아직도 골은 울리고 있었지만 정도가 덜했다.

"두 분을 뫼시러 왔습니다."

"뫼시다니?"

"이 각박한 공간이 아닌, 두 분을 위한 공간으로요."

"허어…"

성주신이 쏘아붙였다.

"댁은 속지 좀 마시오. 이 노마가 무이 좋다고 우릴 뫼셔!"

"당신은 손님네들이 여직 그리 밉소?"

"흥."

성주신은 아직도 꽁한 모습이었다. 원시가 자리에서 일어나 철현 쪽으로 걸어왔다.

"뭘 했길래 이 정도에요?"

"악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끔찍한 악연이었나 본데."

"일이야 많았소. 한 가족부터 시작하여 한 동리, 어느 시기에는 이 땅 전체— 맞소. 우리가 계속 나누던 그 이야기에 관한 말이오."

원시가 철현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저분들이… 당신한테 화가 나 있을 수밖에 없군요. 당신은 저들이 사랑하는 존재를 죽인, 그것도 대량으로 죽인 자들의 일원이니까."

"…그것도 그렇소."

원시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가 더 있어요?"

철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 한 존재를 발견한 까닭이다.

그의 시선은 가택신들도, 원시도 아닌 바로 앞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그 끝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철현이 익히 아는 남자였다. 다시금 그 느낌이 들었다. 목덜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기시감이 일었다.

남자는 여태까지 그들을 따라온 그자였다. 왜 지금 알았는지,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자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자기 휴대폰에 코를 박을 듯이 뚫어져라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철현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턱 붙잡았다.

남자가 고개를 돌리고, 그 찰나의 순간에 철현의 시선은 조금 아래를 향했다. 남자의 휴대폰 화면은 아직도 켜져 있었다. 그는 누군가와 교신 중이었다. 글자들이 시야에 와서 박혔다.

'SCP-713-KO 이례적으로 이른 출몰 발생. 사유는 불명확하나 신원 미상의 여성 하나, 남성 하나로 이루어진 2인조의 접근으로 추측됨. 도착지에 기특대 파견 요청함…'

남자가 황급히 전원을 끄려고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나 철현이 더 빨랐다. 그의 손짓으로 휴대폰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남자가 바닥으로 손을 뻗었지만, 철현이 즉시 그의 어깨를 휘감는 바람에 둘 다 반대편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남자가 가볍게 몸을 돌려 일어났다. 철현은 주위의 의자를 붙잡고 일어나면서, 남자의 주머니에 삐죽이 나와 있는 신분증을 보았다.

"오민철?"

남자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날 어떻게 알지?"

철현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정체가 뭐요."

"그건 당신이 답해야 할 문제인 것 같은데." 민철은 자세를 잡은 뒤 씨근댔다. "어떻게 여길 안 거지? 당신 연합에서 왔나? 아니면 혼돈의 반란? 아니면… 뱀의 손?"

철현은 대답 대신에 손가락을 스트레칭했다. 그리고는 진언을 낮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당신… 뭐야?"

잠시 망설이던 민철은 돌진하며 주먹을 날렸다. 철현은 진언을 멈추지 않은 채 뒤로 물러서며 이를 피했고, 다시 달려드는 민철의 어깨를 잡아 옆으로 내던졌다. 민철이 바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히며 숨을 토해내었다.

"이… 자식이!"

진언은 아직 다 마무리되지 못했다.

민철이 다시 몸을 일으키며, 시계에 결합한 보호장구를 풀어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시계를 너클처럼 말아쥐고는, 달려들었다.

철현은 피하려고 했지만,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순간적으로 호흡 곤란이 치밀어 올랐다. 벗어나려고 했지만 민철의 손이 그의 목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시계가 사정없이 철현의 옆구리를 후리고 지나갔다. 주위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시가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러나 철현은 이를 식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철현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여태껏 날아오는 주먹을 막고 있던 팔을 쭉 뻗어 민철의 입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부터 열기가 치어 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공명했다. 철현의 입에서 기합이 새어나왔다.

민철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였지만 말은 손과 열기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민철의 주먹이 점차 느려지다가 축 늘어졌다. 이내 그의 다리마저 꺾였다. 두술에 정통으로 당한 피해자들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행동이었다. 철현이 손을 풀어버리자 민철은 마치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힘을 잃고 바닥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철현은 욱신거리다 못해 지끈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겨 휴대폰이 날아간 쪽으로 갔다. 다행히 화면은 켜져 있었고, 그는 이를 소중히 주워들고는 원시 쪽으로 걸었다.

"…뭐하는 거요?"

"어… 옥리에게 격리의 아픔을 알려주고 있는데요."

원시는 어디선가 가져온 밧줄로, 경련하고 있는 민철의 몸뚱아리를 칭칭 묶고 있었다. 철현은 대답할 말을 고르다가 포기하고는 비틀거리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원시는 소풍 온 유치원생처럼 해맑게 웃으면서 그의 손을 뒤로 꺾었으며 민철은 두통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신음을 내뱉었다.

"두술이 효과가 너무 좋은 거 아녜요? 어떻게 몇 시간 만에 이런 차이가 나지."

"아마…" 철현은 원시에게 휴대폰을 내밀면서 대답했다. "굳은 기계에 기름칠을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오. 굳어버린 기계의 관절에 기름칠을 하고는 꾸준히 움직여 주어야 회복되듯이, 금연이라는 기름칠과 꾸준한 두술의 행사가 반복되어 이런 결과를 낳지 않았겠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철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원시가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원시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철현을 올려다보았다. 크게 뜬 두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미치겠네. 이 새끼 지원 요청했어요. 곧 런던 히스로 공항에 옥리 자식들이 싹 퍼질 겁니다. 그러면… 진짜 돌이킬 수 없는데. 탈출은 고사하고 싸움을 벌인다 쳐도 우리 둘로는 택도 없어요."

원시는 주물대던 밧줄을 홱 던지고는 불안한 듯 서성였다. 그리고는 이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아… 어떡하지."

"그리 걱정이 됩니까?"

"걱정이요? 네. 네. 당연하죠." 원시의 시선은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옥리… 이 새끼들은 집요해요. 거머리 같아서 한 번 문 먹이는 절대 아가리에서 빼는 일이 없다고요. 그런데 이 자식이 방금 그 아가리에 우리 대가리를 처박은 거에요. 하…"

"일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소?"

"네."

원시는 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나는 사학자이지 다른 일원들처럼 나가서 싸우는 부류가 아니라고요. 나, 난… 지금까지 옥리들과 한 번도 부딪히지 않았다는 건 아닙니다. 말했죠, 사료를 수집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긴다고. 이따금 우리는 서로를 발견했고, 가끔은 물리친 적도 있었지만, 그땐 탈출로가 있었어요. 여차하면 도망가면 되었다고요. 하지만 지금은… 우린 이 좆같은 하늘에 갇혔어요."

철현으로써는 처음 보는 일이었다. 작년의 만남부터 이 순간까지의 원시는 늘상 여유롭고 능글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전날 조직원들에게 붙들렸을 때조차 그는 감정의 요동을 겉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그런 원시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철현에게도 걱정의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신은 되려 또렷해지고 맑아졌다. 제비 다방에서의 새벽을 맞을 때처럼.

철현은 원시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두 손을 올려놓았다.

"류 양, 지금 시간이 없소. 느긋하게 있을 수도, 위험에 대한 걱정으로 고민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오."

"하지만 지금 방법이—"

"나도 압니다. 영락없이 이 항공기는 우리를 태우고 사지로 갈 거요. 도움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소. 우릴 공격한 이 작자가 마음을 고쳐먹겠소? 그건 아닐 테요. 여기 계신 두 가택신이? 그것도 아니오. 근본적으로 저분들이 사람에게 해를 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럼 뭔데요!"

원시가 소리 질렀다. 날카로운 말투 속에서, 철현은 어딘지 모르게 드러나는 공포와 다급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하나라 유민 사학자의 두려움은 비대했다. 그 비대함의 근거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럼 뭔데. 대체 내가 뭘 해야 하는데!"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뭐?"

원시의 눈썹이 찡그려지는 동시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눈가에서부터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비행기를 돌리면 된단 말이오."

"아니 그게… 무슨…"

"비행기를 탈취합시다."

원시의 경악이 어린 눈동자에 철현의 모습이 비쳤다. 철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유례없이 크게 미소 짓고 있었다.

"회항하는 거요,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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