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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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일 먼저 들린 건 빗소리였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이 번쩍 뜨였지만, 눈을 감았을 때와 별 차이는 없었다. 어둠 저편에서 빗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자는 중간에 깨어나다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내 생활 리듬은 완벽하게 맞춰져 있었다. 지난 수십 년간 말이다.
부스스한 기분을 빗소리가 씻어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꽤 맑은 정신으로 깨어났지만, 왜 깨어났는지에 대해선 의문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빗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에? 의문이 피어올랐지만 난 그냥 불씨를 밟아 지워버렸다. 가끔은 그냥 일어나는 일도 있는 법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리고 지금 나는 목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고, 방광도 위험 신호를 보낸다. 이런 의문에 숙고할 여유가 없었다.
난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났다. 눈이 기계적으로 시계를 향했지만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실 보지 않아도 시간은 그 어둠이 알려주었다. 나는 새벽 어딘가에 서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사실이었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문고리로 향했다. 문득 빗소리가 마치 발소리처럼 들려왔다. 흠뻑 젖은 누군가의 바쁜 발소리. 한 명 같기도, 어쩌면 수십 명 같기도 했다. 만약 방문객이라면 분명 불청객이리라. 잔뜩 젖어선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와서, 집 바닥에 비를 뿌려 더럽히는 불청객.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거실의 풍경을 예상하며. 그리고 봐버렸다.

등.

등이다.

거실은 그곳에 있었지만, 그 풍경에 심각하게 이질적인 무언가가 껴있었다. 먼저 내 눈엔 거실 너머의 화장실 문이 보였다. 그러나 시야의 구석에 무언가 있어선 안 될 것이 보였다. 사람의 등이다. 거대한 등짝이 거실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천장이 낮아 잔뜩 웅크린 채로, 척추뼈가 소름 끼치게 튀어나온 등을 내민 채로 앉아있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피가 차갑게 식고 발등에 말뚝이 박힌 듯 멈춰 섰다. 그러나 손이 아직 문고리에 걸쳐있었고, 나는 가능한 최대한 빠르게,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닫히기 직전에 경첩이 짧은 비명을 질렀고, 그것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2.

문은 닫혔다. 다시 어둠이다. 손이 문고리에 걸쳐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문 앞에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을 것이다. 열린 문 사이로 그것의 등만 쳐다보면서.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나를 눈치챘을까? 그 커다란 등 뒤로 나를 돌아봤을까? 그랬다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그 육중한 몸을 비틀어가며 나를 노려봤을까? 그리고 천장에 머리를 박아가며 내게 기어왔을까?

빗소리는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방 안을 빗소리로 가득 채웠다. 내 몸은 미친 듯이 떨린다. 방 안엔 물 한 방울 없는데도 문득, 나는 내가 빗속에 서 있다고 느낀다. 춥다.

3.

몸에 감각이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여전히 피는 차갑고 숨은 가늘게 떨리지만 다리는 간신히 움직인다. 적어도 서서 죽은 시체 꼴은 면했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문에서 멀어졌다. 다리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난 그것과 충분히 떨어졌다고 느낄 만큼 후퇴한 뒤에, 구겨진 이불 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넋이 나간 눈으로 문을 쳐다봤다.
문은 그곳에 있었겠지만, 내 눈에 문은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엔 어둠이 보였다. 문과 나 사이를 가로막은 어둠이 보였다. 그 어둠이 알려주었다. 너와 그것 사이를 채운 건 어둠 한 겹 뿐이라고.
그 너머에 괴물이 있다고.

4.

감각 다음엔 이성이 돌아오는 걸 느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구조였다. 112, 119, 뭐든 간에.
이성의 궤도를 한참 벗어난 상황에서 생각을 해내기란 고통스러운 일이다. 마치 빗속을 헤쳐나가는 느낌이다. 비가 퍼붓듯이 쏟아져 거의 물속에 있다고 느껴질 때, 흙길을 내달리는 것 같다. 나는 떨리는 몸을 붙들며 고통스럽게 생각을 더듬었다. 빗줄기를 헤쳐나갔다.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가까스로 더듬어낸 이성의 조각은 내게 핸드폰을 쓰라고 속삭였다. 그렇지, 핸드폰! 인간의 동반자! 나의 오랜 친구를 잊고 있었다. 이제야 생각해낸 게 놀라울 정도였다.
생각은 속도를 붙였고 내 눈은 어둠을 더듬으며 핸드폰을 던져둔 곳을 찾으려 했다. 분명 이 방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곧 찾아낼 터였다. 그러면 112든 119든 엄마한테든, 전화를 걸 것이다. 그러면 이 미쳐 돌아가는 상황을 끝내줄 뭔가가 도착하겠지.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결말이 지어지겠지.
몸을 일으켰다. 재활하는 환자처럼 힘겹게 움직이지만 어떻게든 움직인다. 나는 내 책상을 더듬었다.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쌓아둔 소설책들을 들춰본 뒤 구석으로 치워두었다. 그리고 책상 위를 빗자루 쓸 듯 훑어보다가, 그만 팔꿈치에 유리컵이 튕겨 나갔다. 유리컵이 공중에서 곡예를 하는 동안, 나는 절박하게 몸을 날려 유리컵을 붙잡았다. 바닥에 부딪혀 깨지진 않겠지만 부딪힐 때의 소음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저 다 벗은 괴물의 주의를 끌 만한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유리컵을 잡은 그대로 굳어있다가 조용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시 숨을 들이마신다. 책상 위는 끝났고, 나는 책상 아래로 몸을 집어넣어 사방을 뒤적거렸다. 이곳은 더 어둡다. 훨씬 순도 높은 어둠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그때 내 동공이 어둠을 들이키고, 어둠은 생각을 자극했다. 순간 섬뜩한 기억이 머리를 가로질렀다.
나는 급하게 빠져나오려다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유리컵이 떨어지는 소리보단 훨씬 큰 소리가 났다. 난 빠져나오며 뒤로 쓰러졌다. 기억이 머릿속에서 맞춰진다. 흙길은 여전히 질척했지만, 그 길의 끝에서도 뭔갈 찾아낼 수 있었다. 잠이 들기 직전의 기억이었다. 핸드폰은 소파에 던져져 있었다. 내가 던져두었다. 그것이 웅크리고 있는 그곳에.

나는 고립된 것이다.

그리고 궤도를 이탈해간다.

5.

좋든 싫든 낮은 너무 짧고, 밤은 영원해 보일 만큼 길다.

말했듯이, 나는 생활리듬이 투철한 편이었다. 제시간에 자며 제시간에 일어났고, 깨어있는 시간 동안 최선을 다 했다. 원래라면 지금은 깨어있을 시간이 아니지만, 나는 깨어있다. 저 바깥의 등과 함께. 밤이 이렇게 긴 시간인 줄 몰랐다.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것이 웅크려있는 방향에서 눈이 떼지질 않는다. 그 등짝은 물론 방의 벽조차 어둠에 막혀 보이질 않지만, 나는 잔뜩 웅크린 채로 끊임없이 그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자세가 그것과 똑 닮았다. 그것은 자는지 깨어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내 머리 속 공장은 바쁘게 돌아가서, 한 가지 희망적인 제안을 내놓았다. 내가 그 등을 본 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하고, 그 찰나마저도 짙은 어둠에 싸여있었으니, 내가 본 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제안이었다.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는 제안이었다. 그 제안은 내가 문을 살짝 열어보기만 해도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속삭였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둠 저편에서 빠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렸고, 모든 의문이 간단히 해결되었으니까. 그것은 잠들지 않았고, 물론 실재하고 있었다.

밤이 너무 길다.

6.

어둠이 무덤처럼 나를 에워싸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진짜로 여기가 내 무덤이 될 가능성도 있겠다. 물론 좋지 않은 생각이다. 하지만 끊어낼 수가 없다. 이런 어둠 속에선 보이는 것도, 달리 할 것도 없고, 말했듯이 어둠은 생각을 자극하니까. 내가 지금까지 냈던 소음들과 그것이 낸 정체 모를 소리가 함께 들린다. 내 뇌가 만들어낸 소음이지만, 확실하게 들린다. 빗소리가 옅어질 만큼 확실하게 들린다.
그것이 들었을까? 오래된 경첩의 비명과 요란하게 튕겨 오르던 책상 모두? 공포에 질려 비척대던 내 몸짓 전부? 전부 들으면서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던 건가? 극단적인 생각들이 넘쳐흐른다.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뱉어내고, 그것들은 착실하게 나를 끌어내린다. 궤도 바깥으로 끌어내린다. 그럴수록 숨은 더 가늘어진다.
나는 어둠이 무게를 가진 것 같다고 느낀다. 그 어둠이 내 가슴을, 폐를 압박한다. 생각은 점점 주체할 수 없어진다. 떠오르는 생각들 하나하나가 고통스럽게 몸을 뒤튼다. 어둠이 조여들고 있다. 공포로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숨과 함께, 내 안의 이성도 끊어질 듯 팽팽해진다. 실 가닥처럼 가는 숨결이 입술 틈새로 새어나왔다. 폐에 남았던 마지막 공기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성을 붙잡으려 시도해본다. 너무 늦었다.

마침내는, 궤도를 벗어난다.

7.

올 것이 왔다. 이야기의 결말이 지어질 순간이 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피해망상적 사고가 소용돌이치고 공포가 폐를 짓누르는 힘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런 생각이 찾아왔다. 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했다. 나는 공기가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피부로 느끼고 냄새로 맡을 수 있었다. 반사적으로 내 모든 감각이 일어서는 것도 느꼈다.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불쾌한 공기가 흐르고 찌릿찌릿한 감각이 몸을 덮어가던 그 순간, 전에 없던 수준의 정적이 찾아왔다. 미친 듯이 땅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이제, 내 몸을 덮은 감각은 피부를 찢고 나올 듯 발광하기 시작한다.

그때. 천장이 거의 폭발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흔들렸을 때 나는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했다. 또 한 번 천장이 같은 방식으로 요동쳤고, 흔들림이 잦아들자마자 또다시 그 이성을 흩어놓는 굉음과 함께 천장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이번엔 더 크고 요란했다. 그 격동은 점점 커지고 있었고, 명백히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방이 통째로 격동에 몸을 맡긴 듯 요동친다. 방의 구조 전체가 괴성을 지른다. 숨을 쉬는 건 잊은 지 오래다. 비명이 목 끝까지 차올랐고, 나는 공포로 발작하기 시작한다. 바로 문 앞에 있다. 느낄 수 있다. 어둠 한 겹 너머에 그것이 있다.
결국 이렇게 될 거란 것을 난 알고 있었다. 문이 폭발하듯 부서지며 그것의 팔이 나의 공간을 침범했다.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오고, 그것의 앙상한 팔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뼈에 살가죽만 붙여놓은 듯 앙상했지만 내 몸통보다 굵고 거대하다. 결코 저항할 수 없다. 길고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이 바닥을 더듬으며 다가오고, 마침내 나는 비명을 지른다. 목이 찢어질 것처럼 비명을 지른다. 내 모든 현실을 부정하며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내 눈앞의 손은 현실이다. 단단하고 결코 깨질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그것의 손금을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도 있다. 내 비명을 들은 그것의 손바닥이 활짝 펴지기 시작하고, 마침내는 집어삼킨다.

올 것이 왔다.

8.

비명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진다. 새된 비명은 끝으로 치달을수록 갈라지고 또 갈라져서, 마침내는 비명이라고 할 수도 없는 꺽꺽대는 울음으로 변하며 사그라졌다.
제일 먼저 들린 건 빗소리였다. 갑작스러운 정적으로 사라졌던 빗소리가 다시 고막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막 물에서 건져 올려진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렇다는 듯, 내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다. 그 순간 나를 덮쳤던 손바닥이 떠올랐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공에 팔을 휘저었고, 다시 목구멍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그 힘없이 꺽꺽대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해를 벗어났다. 나는 바닥을 더듬었다. 폭발하듯 흩뿌려졌던 문의 파편들이 잡히지 않는다. 나를 집어삼켰던 손바닥도 사라졌다. 다시 나와 어둠, 빗소리뿐이다.
꿈인가? 아니, 그건 악몽 따위가 아니었다. 악몽 따위보다 훨씬 사실적이고 소름 끼치는 무언가였다. 무엇보다 난 잠이 든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잠에 들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난 그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눈도 감지 않은 채 한 곳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분명 너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생각들이 꼬리를 물어 소용돌이치고, 공포와 압박으로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 그 상태로, 눈도 깜빡이지 않는 상태로 그 모든 것을 겪은 것이다.
나는… 나는 그저 궤도를 벗어났던 것이다. 현실에서 너무 많이 멀어져서, 그 바깥으로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그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고, 그것이 모든 몽상을 쓸어내 버렸다. 방금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환각에 불과했지만 단 한 가지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비명을 질렀다는 것. 방 전체를 울리고 저 바깥의 그것에게 들리고도 남을 만큼,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는 것. 공포가 나를 다시 찾아왔다. 다시 내 목을 죄어온다. 방금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갔다. 이번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단단하고 결코 깨질 수 없는 현실로.

나는 가만히 웅크려서, 다가올 현실을 기다린다.

9.

그리고 나는 기다렸다.

나는 끊임없는 빗소리를 들으며 선고가 내려지기를 기다렸다. 내 비명이 촉발시킨, 고속열차처럼 달려오는 미래를 기다렸다.
머지 않아 모든 것의 끝을 알리는 폭발음이 울릴 것이고, 그때까지 나는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끝은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이다. 금방이라도. 어쩌면 1초 뒤가 그 끝일 지도 모른다. 눈 한 번 깜빡인 뒤에 쾅, 굉음이 울리고 그걸로 끝. 미래는 손에 닿을 것처럼 가깝고, 나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빗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비명 이후로 조금밖에 안 지난 것 같지만 내겐 마치 영원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흘러간다. 시간이 흐르는 모든 순간이 고통이다. 분명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데, 눈앞의 현실은 그대로다. 선고는 언제라도 찾아올 테지만 그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긴장으로 뱃속의 장기가 쥐어짜 이는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끊임없이 비명을 지른다. 머리를 쥐어 싸고 언제인지 알 수 없는 끝을 가늠한다. 내 비명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다. 작고 시끄러운 쥐가 방 안에 숨어있으니, 문을 부수고 찾아낼 때이다. 내 안의 비명은 이제 광기의 정도까지 다다른다. 또다시 목구멍을 타고 터져 나올 것 같다. 나는 필사적으로 비명을 억누른다. 선고를 앞당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귀를 열고 작은 징조라도 찾아내려 노력한다. 쏟아지는 빗소리 틈새로 뭔가 미세한 소음이 들리진 않을지 의심스러웠다. 더 이상의 유예는 없다는 선고, 그것이 오고 있다는 경고. 무언가 삐걱대거나, 아니면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그것일 것이다. 다시 초 단위의 고문이 시작된다. 1초 하나하나가 나를 휩쓸고 지나간다. 지나간 자리에는 지독한 고통만이 남는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하는 걸 느낀다. 빗소리 틈으로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와도, 펑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뛰지 않을 것이다.
그때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끝. 피가 얼어붙는 걸 느끼며 귀를 바짝 세웠지만 곧 내가 낸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마비된 감각 일부가 고통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어디서 이런 고통이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느껴오던 감각이다. 나는 평생 해본 적 없는 일처럼 내 감각을 더듬는 걸 연습했다. 머리카락 끝부터 차례차례 더듬어 나갔고, 마침내 감각이 은밀한 부위까지 닿았을 때, 그 조여드는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맞다, 나 오줌 마려웠지.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방광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줌을 이렇게 오랫동안 참아본 적이 있는가? 마치 칼로 찌르는 듯한 감각이다. 다리 사이를 깊숙이 찔리고, 그것이 천천히 벌어지는 감각. 나는 처절한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어느새 실존적인 공포는 뇌 저편으로 날아가 버리고, 그 빈자리를 이성이 조금이나마 채웠다. 비명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던 거지? 분명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그렇게 느껴졌다. 깊숙한 곳에서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공포가 의심을 덮어보려 했지만,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는다. 그때 칼이 다시 내 살갗을 뚫고 들어오고, 나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고통과 동시에 그동안 절대 떠올릴 수 없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떠올랐더라도 결코 실행에 옮기진 못했을 생각이다. 맙소사. 나는 내게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생각이냐고 묻는다.

아니, 제정신이 아니다. 문을 열고 그것을 보았던 순간 부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10.

끝이 보이지 않는 새벽이고 비는 여전히 그칠 줄을 모른다. 공포가 심장을 잡아끄는 게 느껴진다.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가지 않겠다고 비명 지른다. 그러나 가야 한다. 확인해야만 한다. 이제 기다리는 데는 이골이 났다.
나를 보라. 문을 향해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보라. 마치 걷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나아간다. 온 힘을 다해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긴다. 마치 비 맞은 흙길을 걷는 사람처럼 나아간다. 비가 퍼붓듯이 쏟아져 거의 물속에 있다고 느껴질 때, 흙길을 걷는 사람 같다. 어둠을 뚫고서 드디어 문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어둠 속에서도 문의 표면을 흐르는 결을 볼 수 있다. 그 결을 따라 눈을 내리면, 문고리가 있다. 단단하고 차가운 금속 덩어리가 있다. 나는 관절을 힘겹게 펴가며 문고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돌린다. 그리고 연다. 그러면 바깥이 있다.

거실은 그곳에 있었다. 멀지 않은 시간 전에 봤던 풍경이다. 달빛에 희석된 어둠이 저변에 부드럽게 깔려있었다. 나는 시야 구석에 불길한 것이 보이는 것을 안다. 눈의 끝자락에 공포스러운 무언가가 걸려 나풀대고 있다. 다시 한 번, 공포가 심장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걸음을 옮긴다. 피부에 닿는 바닥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눈은 정면의 화장실 문에 고정되어 있고, 시야 구석에선 어떤 움직임도, 어떤 소리도 없다. 나는 공포로 안면근육이 움찔대는 걸 느끼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고, 돌리고, 연다. 그리고 쾅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문을 닫았다. 문 뒤에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지 빗소리뿐이다.
내가 숨을 거의 쉬지 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발작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화장실의 어둠을 맞이했다. 화장실 불을 켤 겨를은 없었다. 나는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고 어둠 속에서 변기를 찾아냈다. 그리고 바지를 내린 뒤, 찰나의 황홀경을 만끽했다. 신음이 자동으로 흘러나왔다. 그 뒤에는 손을 씻고, 손을 닦았다. 이제 걸어나갈 차례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문고리로 향했다. 문득 빗소리가 마치 발소리처럼 들려왔다. 흠뻑 젖은 누군가의 바쁜 발소리. 만약 그 누군가가 방문객이라면, 분명 불청객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정말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등이 있었다. 그 등은 옅은 어둠에 싸인 채,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웅크려 있었다. 잊고 있던 공포가 치솟았다. 현실이 아니다. 이건 현실일 수가 없다며 내 모든 감각이 괴성을 질러댔다. 튀어나온 척추뼈 위로 살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게 보였다. 혐오가 불어나 왔다. 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것의 등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앞에 검은 점들이 깜빡거리고 비명이 속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비명을 억누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거실이 폭발하듯 요동치고, 거대한 손바닥이 나를 덮치기를 기다렸다. 내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나는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 말라붙은 입안이 썼다.
나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그 등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본 것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고, 악몽도 아니다. 현실이다. 나는 그것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거의 부딪히기 직전까지 다가갔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비명은 무시한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의 등에 맺힌 물방울들이 보였다. 기괴하게 당겨진 가죽 위를 타고 하나둘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 생각엔, 그냥 비를 피하러 들어온 걸 것이다. 비가 그치면, 아침이 오면 사라질 것이다. 잠에서 깨고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러 나오면, 연기처럼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발걸음을 돌리고 방으로 돌아간다. 머릿속의 비명은 절박하게 이어지지만, 곧 갈라지고 또 갈라져서, 결국은 흐느끼는 울음이 되어 사라진다. 더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나는 구겨진 이불을 펴고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이 나를 덮치길 기다린다.

그리고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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