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소실
평가: +1+x

“저 왔습니다.”

아무도 아닌 자의 말에, 조용히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노인은 말없이 읽던 책의 표지를 덮었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었다. 노인은 의자 옆에 있는 조그마한 탁자에 책을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느닷없이 찾아온 방문객에도 놀라지 않고 노인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늦었군.”

“이제는 늙어서 그런지 요즘 주의력이 많이 떨어져서 말이죠. 바쁘기도 했고.”

“자네가 늙었다고 하면 내가 뭐가 되나.”

SCP-343은 또 하나의 안락의자를 만들어내더니 아무도 아닌 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의자에 앉았고, 343은 아무도 아닌 자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았다.

“차 한잔하겠나?”

“홍차가 좋겠군요.”

“같은 생각이로군. 난 얼 그레이를 좋아한다네.”

343은 그렇게 말하며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아무도 아닌 자도 제 손에 들린 잔을 들었다. 훌륭한 차였다. 아니, ‘훌륭하다’라는 말로 한정 지을 수는 없었다. 극상의 맛. 지고의 향. 이것이 아마도 궁극의 얼 그레이 홍차가 아닐까. 아무도 아닌 자는 옅게 미소 짓고 말했다.

“엄청나군요.”

“우주 최고의 맛이지. 다른 우주에서도 먹히는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도 모르는 것이 있나요.”

“이 우주 한정이지. 아는 친구가 왜 그러나.”

아무도 아닌 자는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차를 입에 머금었다. 맞는 말이다. 343은 잔을 탁자에 내려놓더니 입을 열었다.

“…기사들이 떠났다고 들었네.”

“네. 안부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예전부터 그런 친구들이었지. 안부를 전하고 싶으면 직접 와서 전하면 될 것을.”

미간을 찌푸리고 투덜대는 343을 보며, 아무도 아닌 자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재단이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니까요.”

“그런 부분에서는 성가신 작자들이야.”

둘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343은 손에 든 과자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마들렌이었다.

“홍차와 함께 먹기 좋지.”

아무도 아닌 자는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상큼한 레몬 향이 났다.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그런 맛이었다. 이런 면에서 343과 만날 때는 좋았다. 자신보다 오래 산 존재다 보니, 이 나이를 먹고 무얼 해야 기분이 좋아질지를 알고 있다.

“요즘은 좀 어떠신지요.”

“안부를 참 빨리도 물어보는구먼. 뭐 언제나와 같지. 이 방에서만 지내고, 상당히 재미나게 지내고 있어.”

아무도 아닌 자는 방 내부를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푹신한 안락의자에 따뜻한 모닥불이 지펴지고 있는 벽난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전등에다가 거대한 책장까지. 게다가 안이 밖보다 큰 방이다. 절대로 재단의 격리실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확실히 그렇군요.”

“떠나야 한다니 아쉽지.”

아무도 아닌 자는 손에 들고 있던 잔을 탁자 위의 찻잔 받침에 올려놓았다.

“굳이 가실 필요가 있을까요.”

“기사들과 같은 이유라네. 이제 내 존재 의의는 사라졌어. 모든 게 바뀌었잖는가.”

“신이시잖습니까. 이 우주를 만드신.”

“그렇지. 끝낼 역할도 있었고. 하지만 그 역할은 다른 이가 가져가지 않았는가?”

아무도 아닌 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사들도 그렇고 전혀 설득할 수가 없었다. 343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필사적이군.”

“여기서 스트레스를 푸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자네는 언제 봐도 재밌는 친구야.”

343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도 아닌 자는 웃지 않았다.

“자네를 처음 봤을 때는 상당히 놀랐었지. 내가 만들지 않은 존재였으니까.”

“그 얘기 벌써 백 번도 넘게 들었습니다.”

“쯧쯧…. 노인 공경도 다 죽었구먼.”

아무도 아닌 자는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차는 어느새 식어있었다. 하지만 그 나름의 맛이 있었다.

“어차피 모든 존재는 운명의 물결 위에 떠 있는 나뭇잎에 불과하다네.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신인 당신도요?”

“다 알면서 왜 그러나. 나는 그 물결의 수원지에 불과해.”

343은 잔을 비우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수원지를 찾아내고 물길을 파는 존재는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자네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존재 말이네. 그가 이렇게 결정했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순응할 뿐인 것을.”

343은 안락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행복한 표정이라고 아무도 아닌 자는 생각했다.

“창조의 순간에는 정말로 기뻤어. 그 속에서 사는 것도 정말 즐거웠지.”

신은 아무도 아닌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아닌 자도 신을 보았다.

“이제는 끝낼 때가 된 것일 뿐이라네.”



아무도 아닌 자는 방 가운데에 혼자 서있었다. 한때 중세 영국 스타일의 호화로운 방이었던 장소는, 이제는 텅 비어버린 작은 콘크리트 방으로 변해있었다. 정확히는 되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방 내부를 쓸쓸하게 둘러보다가, 곧 사라졌다.


부록 343-4: ████년 ██월 26일, SCP-343이 사라졌다. 격리실의 내부는 대상이 격리되기 이전으로 되돌아갔으며, 격리실 문에는 '그동안 즐거웠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현재 대상을 수색 중이며, SCP-1295 개체들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훅 하고 여덟 번째 조각이 부서졌다
« 프롤로그 | 허브 | 징조 »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