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내 라임 오렌지 나무
평가: +3+x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머지않아 당신은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폴 부르제

문이 열렸다. 제이미는 자그마한 안전보안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위 간부들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위해 사용하던 방이다. 그 안에 펠릭스가 뒤돌아 서 있었다.

"불렀어?"

그녀가 머리만 돌려 그를 흘깃하더니 고갯짓으로 들어오라고 신호했다. 제이미는 그 말대로 문 옆의 스위치를 눌렀다. 잠금장치가 활성화되는 소리가 들렸다.

"웬일이야, 이런 데로 사람을 다 부르고."

제이미는 거드럭거리는 시늉을 하며 펠릭스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옆에 마련된 의자에 등받이가 잠깐 뒤로 젖혀질 정도로 털썩 걸터앉았다.

"너도 알지? 우리 이상한 거."

"뭐라고?"

처음에 제이미가 생각한 것은 단편적인 관점이었다. 그가 애매모호한 눈웃음 속에 약간 불안함을 담고 물었지만, 펠릭스는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불안정하잖아. 전부. 급조된 것처럼."

"너 지금 무슨…… 오."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지? 이러면 도저히 모른 체할 수가 없잖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듯한 모양새지만 사실 우리 기억 속에는 아직도 다 남아 있어. 너무 급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돌연 고개를 쳐들며 말을 이었다.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그냥, 세상 얘기."

"아." 제이미가 대답했다.

잠시 뒤, 맞은편의 의자에서도 풀썩하는 소리가 났다.


"이해하기 힘들군."

컵 속의 물이 여전히 찰랑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알베르토는 다른 한 손으로 반지를 낀 손가락을 감추며 묻고 있었다. 리지웨이가 다른 곳을 바라보며 반문했다.

"알베르토,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건 무엇입니까?"

"보고 있는 거라니?"

그가 반사적으로 리지웨이에게 눈을 들었다가 흠칫했다. 시선을 다시 내리자, 알베르토는 물컵 속의 하얀 그림자가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건 거울입니까, 아니면 창문입니까?"

"거울이라고? 창문?"

"그 안에 담긴 것이 정말 실재하는 상인가를 물었습니다."

알베르토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나는 모르겠네."

리지웨이가 그를 돌아보며 익살스럽게 미소 지었다.

"많은 일들이 이미 있었지요. 현재에 비하면 과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요. 하지만 쓸모없는 일은 없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쓸모를 말하는 건가?"

"당신이 시작했던 일 말입니다."


섀넌이 물었다. 아무래도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레버,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

그는 아까부터 대답이 짧았다. 섀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침묵을 알아차린 레버가 멈칫하더니, 이를 드러내는 웃음을 내비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알겠어, 섀넌. 말해줄게."

"뭘요?"

"내가 찾고 있는 것 말이야."

"화이트잖아요."

"맞아, 하지만 그 여자는 아니야……. 처음부터 아니었어."


거짓말은 처음에는 부정되고, 그다음에는 의심받지만, 되풀이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믿게 된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이 얘기 들었어?"

"응, 알지."

"걸어서 돌아다니는 시체. 한 명은 그대로 연락 두절. 하지만 알 수 없는 건…… 왜 이제 와서야 이걸 보고 있느냐는 거야."

펠릭스가 종이를 측면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제이미는 다른 이야기를 가져왔다.

"이것도 그렇지. 늦게 발견된 게 아니야. 이것들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되는 이야기들이거든."


테이트는 복도를 걸으면서 생각했다. 왜 하필 여기인 거야? 이 불길한 장소를. 마지막 모퉁이에 다다르자 그는 더 이상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멀찍이서 보안문을 바라보았다. 관계자외 출입엄금.

그는 이 자리에서 벽에 기대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패닝이 어떻게 찾아올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바쁜 몸일 텐데. 자기 임무는 어디다 두고?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무단 외출로 징계를 삼을 수도 있는 노릇인데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잠깐 초조한 것도 같았지만, 곧 휠체어가 끼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이 공간에 단둘만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다른 것들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테이트는 깨달았다. 징계 같은 건 이제 걱정할 필요 없었다. 장소 한 번 살벌하게 잘 잡았군, 패닝!


"정말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나?"

알베르토가 유리컵을 바라보며 말했다. 리지웨이는 컵을 창문 가까이로 옮겼다. 자그마한 수면이 계속해서 요동쳤다.

"그렇습니다."

알베르토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우리들도?"

리지웨이가 그를 안심시켰다. 그는 손가락을 컵에 가져다 댔다.

"예. 준비는 끝났습니다."

땡그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지웨이가 컵을 살짝 퉁기자, 물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베이커는 책상이 미약하게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책상만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방 전체와 벽에 매달린 웃옷들, 각종 도구들, 쓸 일도 없던 수갑이 쩔그럭거리는 소리까지 오만 것들이 다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니 책상 위에 놓여진 '형사'라고 쓰인 명패가 흔들리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가 일어나서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가, 결국은 이런 순간이 오는군. 뭔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연의 몫은 응당 응원하는 것뿐이지.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 그는 손님 맞을 채비를 하면서 괜찮은 생각을 해냈다.


휘청거리던 레버가 중심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젠장, 벌써 시작됐어! 섀넌, 이제 그들이 나타날 거야. 놀라 자빠지겠지, 이럴 줄은 몰랐을 테니까 말이야! 하지만 잘 들어, 섀넌.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건 우리에게도 마지막 기회야.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응? 알았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요, 레버!" 섀넌이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레버가 웃었다.

"괜찮아, 섀넌. 괜찮아! 당신도 알고 있어!"


"이번 말고도, 세계가 한 번 뒤집힌 적이 있었지."

"그래, 재앙."

"하지만 우린 사실 재앙이 정확히 어떤 거였는지 조금도 몰라."

펠릭스가 키득거렸다. 제이미가 화답했다.

"그렇지,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거였으니까. 아까 그 이야기들과 같아. 다른 차원에 반쯤 걸쳐진 사건이었지."

"다른 차원이라고! 단지 그 수준은 아니잖아, 제이미. 우리 세계에 디버그가 시도된 거야. 그리고 어렵게 어렵게 재구축된 거지."

"그렇게 말하니 좀 미안한걸."

"아무렴, 그런 걸 짜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고 있는 거지, 그렇지 않아?"

다시 키득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알베르토는 붉게 변한 물컵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리지웨이가 대신 그 말을 받았다.

"지금의 우리 세계라고 할 수 있죠. 당신이 발견했던 겁니다."

"내가 실패했던 게 아니라?"

"제가 말했지요? 당신은 번데기 속의 나비였다고."

"그러면……"

"예, 당신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관찰자는 이제 지켜볼 뿐이죠."


테이트가 말했다. "정말 이걸로 괜찮냐, 패닝?"

"그럼. 우리가 아니라 남겨질 사람을 생각하라고."

"이거 분명히 별로 맘에 안 드는 녀석도 있을 거야."

"누군지 알겠어, 형.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발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패닝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 형. 여기야."

"여기?"

"응, 다시 올 거야." 그가 휠체어를 돌려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번은 문가에서 알베르토와 리지웨이가 그들 사이에 둔 유리컵을 섬뜩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한 게 컵 속이 완전히 붉었다. 리지웨이라는 남자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자꾸만 흔들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때마다 기지 전체가 함께 부르르 떠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나 있는 걸까?

'그렇지만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그렇지?'

그는 말리지 않았다. 땡그랑, 리지웨이가 다시 한 번 컵을 퉁겼다.


"섀넌, 섀넌! 정신 차려! 할 수 있어! 당신이 할 수 있어!"

땅이 온통 흔들렸다. 섀넌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내가요? 난 모르겠어요!"

"당신도 알아, 당신도 안다고! 이쪽을 봐, 섀넌. 이쪽!"

"레버, 레버!"

갑자기 끌어당겨지는 느낌이 들면서 잔상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고,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섀넌은 그것이 레버가 자신을 붙잡아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 어서, 당신은 알베르토 박사님을 찾아가. 당신이 뭘 해야 할지 박사님은 알고 있을 거야."

"당신은요?"

목소리가 어렴풋이 떨리고 있었다. 레버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이맛살을 찡그리며 웃어주었다.

"화이트를 찾아야지. 하지만 이제까지 찾던 그 여자가 아니야. 이제 알겠어!"

그가 그녀 뒤편을 쳐다보더니 별안간 눈에 띄게 허둥거리면서 고개를 돌려대다가, 마지막에 섀넌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당신은 할 수 있어, 섀넌."

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 황급히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섀넌이 입을 벌리고 레버의 뒷모습을 쳐다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검은 인간들이 그녀를 제치고 튀어나오더니 레버를 쫓아 질주했다.

섀넌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기지를 향해 뛰어갔다.


방황하는 이들 모두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존 로널드 루엘 톨킨

"모두들 다른 것을 쫓아서 달리고 있어."

천장에서 모래 부스러기 같은 것이 흘러내렸다. 기지 전체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그렇지만 목적은 하나잖아."

"그게 재밌는 부분이지."

모니터에 띄워진 항목들이 명멸하다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뒤틀린 연극도 포함되어 있다.

"근데 우린 왜 이러고 있을까?"

"글쎄. 하나 정해볼까?"

"이제 와서 뭐하러."

이제 그들은 관리자처럼 테이블 위에 발을 꼬아 올려놓고 데이터베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부는 어때?"

"웃겨, 정말."


오늘따라 그는 눈에 띄게 동요했다.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갑자기 붕괴가 시작될 줄은. 도무지 개연성이 없지 않은가?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는 처음으로 그것을 알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지면서 서류 가방에서 쩔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평정을 잃어서는 안 되지, 그는 멈춰서서 넥타이를 고쳐맸다. 목이 탄탄히 조여지는 느낌을 받자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붕괴를 막을 수 없다면, 태엽을 한 번 더 돌리는 수밖에. 정말 그런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그 수밖에 없어.

아무도 아닌 자는 맞은편에 휠체어를 타고 있는 박사가 멈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이번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줄은 알지?"

알베르토의 느지막한 경고에도 리지웨이는 컵을 퉁겨대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예. 하지만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겁니다."

"자신해도 되는 일인가?"

그가 웃었다. "알베르토, 당신은 좀 믿어볼 필요가 있어요."


레이번은 리지웨이의 지적에 깜짝 놀라 바깥을 쳐다보았다. 저 멀리서 섀넌 베일리가 기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한 무리의 검은 인간들이 쫓고 있었다. 그녀는 오래가지 못하고 따라잡힐 것이다. 레이번은 언제나 충실하던 임무를 또 한 번 다하기 위해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저 분을 여기까지 안전히 경호해 돌아오겠습니다!"


레버는 안개 속을 헤치며 달리고 있었다. 휘파람 소리인지 종소리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검은 인간들이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배회하는 동안, 그는 구덩이를 파고 있는 묘지기와 만났다. 그리고 시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도와드려요?"

서 있는 남자가 당황한 듯 멀뚱거리며 그를 돌아봤다가, 시체를 곁눈질하고 옅은 탄식으로 대답했다.

"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시체를 구덩이 속에 눕혔다. 그들이 구덩이에서 빠져나오자 묘지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흙을 다시 덮기 시작했다. 남자는 레버를 돌아보며 손짓을 했다. 레버는 그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다시 비탈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세상의 비밀을 까발려놓고 있는 것도 꽤 재밌는데, 제이미. 현실 조정자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펠릭스는 데이터베이스의 분할 화면을 가리켰다.

"넌 전부터 충분히 마녀였어, 펠릭스."

그녀는 제이미의 놀리는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강조하듯 데이터베이스를 가리켰다.

"저것 좀 봐, 갈팡질팡하는 귀여운 친구들."

"그래도 소름 끼치는 놈들이야."

"검은 것들? 아냐,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그래?" 제이미가 알만 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엔 자네인가?"

그가 중절모를 눌러쓰며 물었다. 휠체어에 탄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하려는진 알겠지?"

"날 막을 셈이라고?" 아무도 아닌 자가 웃었다.

"난 너희들을 도우려는 거야."

그는 아직까지도 여유로웠지만, 마주하고 있는 상대는 다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맞아, 우리도 알아. 하지만 이제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

미약하게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건물의 지지 기반이 어긋나면서 흔들리는 소리였다. 아무도 아닌 자의 입이 벌어졌다.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진 서류 가방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뭐라고?"

패닝이 미소 지었다.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


알베르토 대신, 리지웨이가 그녀에게 질문했다.

"이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위험이 따릅니다. 알고 있지요?"

"네."

"그렇지만 당신은 이겨내고 싶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네."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스스로에게 마주할 용기가 있다고 생각하시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맞아요." 섀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밖으로 나가세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제 말을 기억하고 계시죠?"

그녀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보낸 뒤 방을 나가는 것으로 대답했다. 알베르토의 눈이 그녀의 뒷모습을 좇았다.

"검은 사람들은?"

"레이번이 모두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리지웨이가 붉은 컵을 들고 일어서는 것을 본 알베르토는 뒤따라 의자를 밀어넣고 유리창으로 향했다.


베이커는 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이 드러내는 적의는 노골적이고, 또한 불쾌했지만, 그럼에도 베이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래요, 지금 당신들이 묻는 것은…… 상당히 앞뒤가 안 맞는 전개 같은데요. 알고 있습니까?"

한 존재가 당황한 듯 소리를 높였다.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상관없어. 그가 누군지 말해!"

천장이 또 한 번 크게 흔들렸다. 검은 인간들이 불안한듯 주변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베이커는 장난치듯이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어디, 천성이 밝고, 의지가 굳건하고, 조력자가 존재하고, 강하고,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인물……"


삶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언제나 우리 자신이 만들어 왔고, 앞으로도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나갈 것이다.

그랜드마 모세

"주인공."

"그래, 그거야, 뻔한 거 아니겠어? 척 보면 주인공 같은 캐릭터가 있잖아. 당연한 소리지."

"글쎄, 솔직히 당연한 건 아니었지."

"시끄러워, 펠릭스. 그래도 조건에는 다 들어맞는다고."

"별반 활약이 없었잖아."

"그 정도면 충분한 활약이었지. 줄거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잖아."

"'좋은' 활약은 없었던 걸로 기억해. 그다지 모범적인 모습은 아니었는데."

"에이, 그건 넘어가. 그땐 다 난장판이었잖아."


아무도 아닌 자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모든 것의 붕괴를 바란다는 소리인가? 이번엔 아무도 남아나지 않을 거야!"

"어쩌면. 그렇지만 당신도 힘들잖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대로라면 우리 모두 사라져버릴 거라고!"

"하지만 이대로 남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 아니겠나?"

패닝은 자신의 없는 두 다리를 툭툭 쳐 보였다. 아무도 아닌 자가 분노하여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럴 순 없어! 이대로 전부 사라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는 패닝에게 닿지 못했다. 그의 두 팔이 휠체어에 닿기 직전에, 모퉁이에서 돌연히 테이트가 튀어나와 그의 목에 푸른색 칼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워워, 진정해, 친구. 내가 저번에 칼부림을 배워두었다는 거 기억하나?"

칼등에 금으로 새긴 장식이 번쩍였다.

"작은 설정 하나 놓치지 말아야지."


웅덩이는 무릎까지 올라왔다. 레버는 엉거주춤한 꼴로 반쯤 허우적거리면서도 꾸준히 물살을 가르며 계속 뒤를 살폈다. 검은 인간들은 이번에도 어두운 늪 속에서 자신을 혼동하며 헤매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레버는 다 쓰러져가는 풀잎을 발견했다. 거기에 나비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나비는 날개를 천천히 펼쳤다가 접는 일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중이었다. 마치 뭔가를 잊어버린 듯한 모습이다. 레버가 그것에게 다가가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넌 그냥 날아가면 돼. 이미 번데기를 벗고 나왔잖아."

나비는 그가 상기시켜준 사실에 문득 놀라 날개를 몇 번 퍼덕여보더니, 풀잎에서 고스란히 떨어져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눈앞에 조각상이 서 있었다. 그것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다. 처음에는 단지 문제를 회피하지 말라는 신호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말라는 강요와 압박으로 뒤바뀌어버렸다. 섀넌은 그 흉물스러운 덩어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식시켰다. 그리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을 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조각상은 그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뒤로 걸으면서 그것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대한 두상에 왜소한 몸을 가진 기형적인 모습이었지만, 그것은 돌을 긁으며 기다릴 줄 안다. 어느 순간에 그녀는 이미 조각상과 저만치나 멀어졌다. 섀넌은 이것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눈을 깜빡거릴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흐릿하게 보이는 조각상의 형태를 자신의 눈동자 속에 담아두려고 애썼다. 거의 눈 안에 새겨질 정도로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잠시 뒤, 섀넌은 앞으로 걸어갔다.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그 조각상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달려들지도, 그녀를 해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단지 뒤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돌아서서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제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남은 것은 그저 앞으로 계속 걸어갈 일뿐이다. 섀넌은 웃음을 터뜨리며 계속 걸었다. 그녀는 해냈다.


"놀라우신 모양이군요."

리지웨이가 약간 짓궂게 얘기했다. 알베르토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동시에, 비틀거리던 기지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이제 돌덩어리가 천장에서 떨어져내렸다. 패널과 철골 구조물이 걷히면서 하늘이 드러났다. 태양이 일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일출의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이제껏 그들은 어둠 속에서만 지내왔으니까 말이다.

알베르토가 리지웨이의 손에 든 컵을 보고 물었다.

"어떻게 한 거지?"

리지웨이는 그것을 들여다보다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노을빛이었거든요."

그가 컵을 기울이자, 투명한 빛깔의 물이 유리 잔에서 빠져나왔다.


"그놈 어디 있어? 어떻게 잡을 수 있지?"

베이커는 여유를 부렸다.

"그는 한 번 목표를 정했다 하면 결코 이루고야 마는 자였습니다."

검은 사람이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며 소리쳤다.

"다물어!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마!"

"그는 이번에도 해낼 겁니다.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그들 중 한 명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이제 됐어, 그만해! 빨리 결단을 내려야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아, 기다리세요, 한 가지 말해드릴 게 있습니다."

검은 사람들의 이목이 한순간 집중됐다. 베이커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자식 오토바이 하나는 귀신같이 잘 타요. 무슨 짓을 해도 그것만큼은 따라잡을 수가 없더군요."


레버는 결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여전히 검은 사람들이 그를 쫓고 있었다. 급히 몸을 숨기기 위해 생각 없이 아무 곳에나 뛰어들었던 그는 순간 자신이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를 알아채지 못했다. 거기에 매끄러운 회색 바닥이 있었고, 공구들이 담긴 선반도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열려있는 셔터가 바깥으로 통했다. 어떤 차고였다. 다시 안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 레버는 한 방 먹은 것처럼 잠시 멍해졌다. 거기에 오토바이가 있었다.

이내, 그는 히죽 웃었다. 그리고 선반 위에서 헬멧을 찾아 쓴 뒤, 이제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페달에 발을 걸었다.


화면이 발작하듯 번쩍거렸다. 기지 전체가 좌우로 뒤흔들리고 있었다. 제이미와 펠릭스는 조심스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긴 문 저편에서 고함소리와 함께 마구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데이터베이스를 종료하기로 했다. 이제 어차피 더 볼 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작을 따라가는 건 포기하는 거야?"

"글쎄, 아이작은 어차피 롤모델이었지, 그 녀석하고 완전히 똑같아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뭐라고, 정말이야?"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어쨌든 너는 동생을 좀 닮았다면 좋았겠지만 말이야."

"시끄러워, 망할 제이미."

"그래, 맞아, 웃어 봐, 펠릭스! 오늘이 그날이라니까!"

"예, 알았네요. 웃을 날이 오는 거지."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 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우리 형이 하던 말이랑 너무 똑같네, 당신."

테이트가 불편한 자세로 꿈틀거렸다.

"계획 같은 건 없어. 흘러가게 놔둘 뿐이지."

"뭐라고?"

키득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도박은 나쁜 일이지, 암."

아무도 아닌 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복도가 무너져내렸다. 이제 붕괴가 그들에게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무너뜨리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니네. 다시 일으킬 수 있어야지."

알베르토는 여전히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리지웨이가 의자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그가 해낼 겁니다."

"어떻게?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던 것을."

"그랬지요. 그러나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동안 계속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어요……."


레버는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걸었다. 이미 반쯤 무너진 건물 속에서 발견한 통로의 문은 마찬가지로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잠시 발견했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문 앞에서 기다리던 레버는, 수초 내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문을 열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문이 부서지면서 검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제이미와 펠릭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뒤돌아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본 검은 사람들이 넋을 잃고 그 자리에 멈췄다.

"안 됐네, 친구들. 사람 잘못 찾았어."


리지웨이는 억새밭이 그려진 엽서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을 바라보던 그의 닳디닳은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일어난 뒤에는, 다시 잘 해나갈 수 있을까?"

"모두들, 언제나 잘 해왔습니다."

알베르토가 다가서자, 리지웨이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작별을 표했다. 잠깐 뜻밖이라는 표정을 보이던 알베르토는 그 모습에 그만 먹먹해진 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곤, 천천히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는 걸음을 디디며 뒤로 한 마디 던졌다.

"뭐, 자네한테 하는 말은 아니었네……."


벌써 몇 차례의 층계참을 지났다. 흐릿한 형상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 그를 방해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 존재였다.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레버는 아래쪽의 목소리를 향해 내달렸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자네도 한 번 걸어 봐."

자기 자신도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차분한, 안정된 목소리가 나왔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아무도 아닌 자의 중절모가 미끄러 떨어졌다.

그가 망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끝난 건가?"

패닝이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 다 끝났어."


이제 벽이라곤 거의 남지 않았다. 곧 있으면 바닥도 함께 떨어져 내리고 없게 될 것이다. 레이번은 안간힘을 써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들을 피하며 알베르토의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박사님, 박사님! 위험합니다! 어서 여기서 피해야……."

그의 의자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레이번은 얼떨떨한 심정으로 책상 앞에 다가갔다. 거기에는 알베르토가 늘 끼던 반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가 그것을 집어 들자, 반지가 번쩍거리면서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주님이 최고예요!"

"뭐야……." 허물어지는 것들 속에서 레이번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레버는 마지막 층계참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 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거기에는 귀여운 곰 캐릭터 '버저스'가 그려진 손수건도 있었다. 손수건은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있었고, 소녀는 계속해서 도와달라고 중얼거렸다.

그는 소녀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소녀는 움찔하더니 젖은 눈을 들고 레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녀가 레버의 눈과 내민 손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조금씩 자신의 손을 내밀어 레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레버는 조금 뒷걸음질을 쳤다. 소녀가 팔을 조금 더 뻗자, 그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소녀의 얼굴에 도로 울먹이는 빛이 스쳤다. 그녀가 잡을 곳을 잃은 손을 허우적거리면서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왜? 잡아주지 않아? 어디로 가는 거야? 레버는 그저 말없이 웃어 보이며 다시 한 번 걸음을 물렸고, 소녀는 그의 손을 잡기 위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레버는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허리를 굽힌 자세 그대로 계속 뒤로 걸어갔다. 그녀가 중심을 잃고 휘청이면서 한쪽 무릎을 세웠다. 레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물러나기를 멈추지 않았다. 위태로운 자세로 중심을 잡기 위해 애쓰던 소녀는 그러는 동안에도 레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뒤로 걸어갔고, 마침내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소녀가 목소리를 내며 팔을 뻗자, 몸이 기우뚱했고, 반사적으로 반대편의 다리가 앞으로 뻗어나갔다. 그리고,
 

새는 알을 까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헤르만 헤세

/ 1 2 3 4 5 6 7
종말 바다 기억 인간 캐릭터 세계
봉인 레비아탄 카인과 아벨의 만남 붉은 웅덩이 펜리르 기계의 완성 화이트 핵무기
징조 세이렌의 노래 배반 죽지 않는 도마뱀 황혼의 그림자 태엽장치 바이러스   안녕    우리들. 

 
소녀가 일어섰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