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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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할머니가 사시는 산골로 몇 주씩 지내러갈 때가 있었다.

할머니는 연세만큼 아시는 것도 참 많은 분이었다. 아마 그 산골의 작은 마을에서도 지혜로운 어르신으로 불리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거나 다툼이 있을 때면 꼭 할머니를 찾아왔고, 항상 할머니는 친절하게 질문에 대답해주시거나 현명하게 다툼을 중재하셨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 보다 내가 할머니를 좋아한 이유는 할머니 댁에 찾아가면 할머니가 밤마다 들려주시는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무서운 이야기, 으스스한 이야기, 괴물 혹은 정체불명의 것들에 대한 옛날이야기거나 할머니가 직접 겪으신 - 직접 겪었다고 말씀하시는 - 이야기들이었다. 뭐, 꼭 항상 저런 이야기들만 들려주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재미있고 훈훈한 이야기라면 모두가 까르르 웃으며, 무섭고 으스스한 이야기라면 나를 포함한 내 동생이나 사촌들은 모두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벌 떨면서 이야기를 들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재미있었기에 할머니 댁에 가기만 하면 밤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나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보통 할머니 댁에 간 날 밤은 다음처럼 흘러간다.

"할머니! 할머니! 이야기 들려주세요!"
먼저 내가 할머니께 이야기해달라고 조른다.

"에에, 난 할머니 이야기는 거의 다 무서워서 싫은데…."
"뭐가 무서워, 재밌기만 한데."
그러면 내 동생이 태클을 걸고, 난 그 태클에 대한 태클을 건다. 보통 같으면 여기서 동생의 저항은 끝나지만, 가끔은 더 이어갈 때가 있다.
그런 내 말에 할머니는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호호호, 오냐. 이 할미가 해주는 이야기가 그리도 재밌든?"
"네, 할머니!"
"아니 그니까 나ㄴ…."
바로 이렇게 추가로 헛소리하면, 난 항상 녀석의 입을 양손으로 막아 헛소리를 원천 봉쇄시킨다.

"얘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가, 자꾸만 헛소리하네. 얜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이야기 들려주세요, 할머니!"
"그랴, 그랴. 어디 보자….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이러면서 할머니는 이야기를 시작해주시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무엇보다 할머니와 함께 있는 것이 나 혼자이다.
동생과 연관된 무슨 일이 생겼기에, 나 혼자 이렇게 할머니 댁에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 말인즉슨,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그런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난 할머니 댁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저 왔어요!"

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큰 소리로 할머니를 부르자, 곧 한쪽의 방문이 열리더니 할머니의 얼굴에 보였다.

"할머니!"
"어이구, 우리 강아지 왔어?"

나는 할머니 품에 안겨들었고, 할머니는 날 반갑게 맞이하며 안아주셨다.

"할머니…. 목소리가 좀 이상한데…. 괜찮으세요?"
"으응? 응, 이 할미가 감기에 좀 걸린 것 같구나. 기침은 안 나오는데…."
"감기요? 좀 푹 쉬셔야죠…."
"괜찮어, 괜첞어. 이 할머니한테는 말이다, 손주 얼굴이 약이란다."

그러면서 씩 웃으시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자, 자. 안에 들어가자. 밥은 먹고 왔구?"
"헤헤, 할머니가 해주는 밥 먹으려고 안 먹고 왔어요."
"이잉, 밥을 안 먹구 댕기면 쓰나. 자, 들어가자. 이 할미가 금방 밥 채려줄테니까."
"네에."

방에 들어가니 밥상에 이미 누가 앉아있었다. 긴 머리의 여자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가 여성의 목소리였다. 할머니 정도의 나잇대 목소리라고 할까? 게다가 치마는 어딘가 종이로 만든 것 같이 보였다.

"어…안녕하세요…?"
"…안녕……."

여자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할머니에게 여자가 누군지 물어보자 '그냥 할미 손님이여'라고만 말씀을 하셨다. 결국, 손님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먹는 동안 내가 먹으려는 반찬을 먼저 집어가서 짜증이 났다.


낮은 가고, 밤이 찾아왔다.

할머니를 너무 오래간만에 뵈어서 그런지, 이상하리만치 낯설었다.
그렇지만 좋았다. 할머니니까.
사랑하는 할머니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았다.

방에 들어가 보니 이미 할머니는 요를 깔고 누워 나를 올려다보고 계셨다.

"우리 강아지, 빨리 들어와라."
"네, 할머니."

나는 얼른 할머니 옆에 깔린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이불은 포근했고, 친숙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냄새였다.

"자, 그럼 불 끄마."

딸칵.
형광등의 불이 나가며 방 안에는 어둠이 찾아왔지만, 산골의 하늘은 도시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르고 맑아 달빛도 그만큼 밝았다. 창문으로 한 줄기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달빛은 그대로 나와 할머니를 비추었다.

그 달빛을 보면서 가만히 누워있다가, 넌지시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할머니…. 주무세요?"
"으응…? 안잔다…."

왠지 모르게 피곤해 보이신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포기할 순 없는 법.
할머니, 죄송해요. 이런 것도 불효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기, 할머니."
"으응?"
"이야기 들려주세요!"
"으응…? 이야기?"
"네, 매번 들려주셨잖아요!"

착각이었을까. 순간 할머니가 당황하신 듯한 표정을 지으신 것 같았다. 이크, 너무 갑자기 말을 한 건가. 피곤해보이시는데, 왠지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할머니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시는 것이 들려왔다.

"으음…. 어디 보자….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렇지만 곧바로 들려주실 이야기를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 할머니는 역시 할머니였다.

"옳거니.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가 있었구나."

그리고 할머니는 천천히 이 밤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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