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겨울 이른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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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그 사람이 죽었다.

차가운 도로 가장자리 바닥에 그 사람은 쓰러져 있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사방에서 진동하는 경적 소리. 잦아드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차가운 서릿바람이 그녀의 등을 몇 번이나 할퀴고 지나갔다. 바닥의 핏자국까지도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가 쉴새없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의식이 끊어졌을 때가 되어서야, 구급차가 달려와 그녀의 육신을 싣고 사라졌다. 마침내 구급차가 사라지고, 견인차가 나타나 차를 지고 또 사라질 때까지도 그녀는 그 도로에 쓰러져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의식 사이로 아득한 경적과 자동차 달리는 소리가 지나갔다.

그리고 모든 소리가 적색편이를 그리며 저 아득한 곳으로 멀어져 가던 도중, 단 하나의 소리는 떨리듯 가까워졌다.

시하얀 잔설은 그 밤이 끝날때까지 몰아치고 있었다.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보는 이 없는 시공(時空)에
없는 것 모양 걸려 왔더니라.

스스로의
혼란과 열기를 이기지 못해
눈 오는 네 거리에 나서면,

눈길 위에
연기처럼 덮여 오는 편안한 그늘이여,
마음의 기(旗)는
눈의 음악이나 듣고 있는가.

— 김남조, <정념의 기> 中

 




그 사람의 꿈은 아이돌이였다.

어릴 때부터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부러웠고, 말도 다 못 할 때부터 그들의 춤을 따라 췄고, 듣는 사림이 아무도 없어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본격적으로 꿈을 꾸게 되었을 때는, 저 빛나는 별들을 향해 손을 뻗으리라 마음먹고는 부모님을 보채서 전문 학원의 길을 밟았다.

쉬운 일은 없었다.

그러나 고난 하나하나를 신경 쓸 시간에 손발을 한 번이라도 더 움직이리라 마음먹었다. 손을 뻗고 또 다리를 펼치며 저 하늘 위 별들에 닿으려 노력했다.

자신을 욕하던 또래들이 하나 둘 학원에서 자취를 감출 때 까지도 그녀는 꿈꿔왔던 곳을 향해 나아갔다. 뜨거운 정념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그리고 어느 날 꿈 이야기가 끝났다.

붉은 잉크로 눈밭에 마침표를 찍으면서.









—자. 끝났네.



그 사람은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을 편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어둠에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두려웠을 깊은 어둠은 오히려 편안한 이불처럼 느껴졌다.

—상태는 회복된 것 같고, 모습도 멀쩡해졌어.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며, 그녀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기요?

침묵.

—여기 병원이에요?

대답 대신에 싸늘한 바람만이 흘러들어왔다. 어둠 저편에서는 누군가의 옷이 부시럭거리는 소리만이 기계적으로 들려올 뿐이였다.

—깼구나. 불을 켜야겠네.

몇십 초의 침묵을 깨고 다시 그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내 부시럭거리는 소리와 딸깍 하고 스위치를 누르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딸깍.

방 안이 푸른 불빛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눈이 부신 나머지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이어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잡을 때까지.

—일어날 수 있겠니?

목소리의 주인은 답도 듣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 천천히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꼭 죽었다 깨어난 것처럼.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 또래의 남학생이었다. 단발머리에 핏기 없이 하얀 피부. 단지 조금 이상한 점은, 그가 교과서나 영화에서만 보던 옛날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였다… 붉은 피가 잔뜩 묻은 새카만 교복을.

—네. 좀 어지럽긴 한데… 누구세요?

그녀는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쥐며 말했다. 뚜렷한 상황 판단이 어려웠고, 생각들이 뒤죽박죽으로 얽히고 섥혔다. 기억과 생각은 핍진성이 없는 추리만을 계속했다.
그 생각을 끊는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나는 성재야. 심야클럽의 윤성재.

—…무슨 클럽이요?

—심야클럽.

윤성재라는 자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넌 죽었어. 그래서 여기로 데려온거야.

—무슨 소리에요? 제가 죽었다니.

남학생은 아무 말 없이, 손거울을 품에서 꺼내 그녀의 얼굴 쪽으로 돌렸다.

거울 속에는 방의 정경이 있었다. 침대가, 회푸른 벽이, 오래되어 보이는 텔레비젼이 그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놀랐지. 처음 죽어보는 거라.

이런 모습은 몇 번이나 보았다는 듯, 태연하고 차분한 목소리.

—…생각 정리되면 복도로 나와. 오늘은 손님 없으니까.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방을 나섰다. 냉기가 그 뒤를 따랐다.

나무 그림자가 방 안으로 길게 늘어졌다.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 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윤동주, <또 다른 고향> 中





그 모텔은 언제부턴가 그곳에 있었다.

산을 끼고 도는 도로 가장자리에 위치한 모텔은, 제아무리 깔끔할지라도 무언가 숨겨져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곳이였다. 마치 수수께끼의 범죄자들이 암약하고 있는 곳 같았다.

반은 사실이였다. 범죄자들 대신 귀신들이 숨어 있다는 것만 빼면.

본래 근본 없는 폐가였던 이곳을 클럽 측 인물들이 회수했고, 깔끔히 정돈했다. 본래 귀신이 나오기로 유명했던 폐가는, 이제 모텔으로 둔갑해 아지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외진 곳에 있다보니, 손님은 한 달에 몇 명이 올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다.

그 건물에서도 가장 지하에 위치한 방에서는 종종 회의나 만담이 이루어졌다.

—애는, 깼어요?

흐릿한 형상의 중년 여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앞에 앉은 남학생은 침착하게 말했다.

—예. 깨기는 깼는데, 귀신이 된 지 얼마 안 돼서 영 혼란스러워 하던데요. 다행히 몸도 괜찮고, 원귀가 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윤성재가 계단 위를 흘긋 바라보았다.

—마음 정리되면 나오라고 했어요. 클럽 소개도 할 겸… 어떤 사람인지도 봐야죠.

—빨리 회복했으면 좋겠네요.

그때 복도 끝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열리고 대화의 주인공께서 걸어나오는 소리일테지, 그들은 일시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푸른 빛이 보이더니, 새카만 머리의 소녀가 계단을 걸어내려왔다.

—아이구, 학생 왔어?

중년의 귀신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 또한 "안녕하세요" 하면서 가볍게 목례했다.

—여기 아무 데나 앉아도 돼. 뭐, 공중에 앉아도 상관없고.

소녀는 애써 웃어보이며 남는 의자에 앉았다. 아니, 귀신의 육체로 보자면 몸을 지탱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녀는 턱에 손을 괴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윤성재는 침착하게 질문을 기다리기로 했다.

뜻밖의 말이 날아왔다.

—…여기 지옥인가요?

그는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옆에 앉은 동료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웃어댔다.

—아니. 지옥은 아니고…

—그럼 죽은 사람을 데리고 오신 이유가 뭐에요? 혹시 저승사자 뭐 그런 거에요?

다음 질문은 더 예상하지 못한 것이였다.
그는 저승사자를 여러 번 마주쳤고, 심지어 저승사자가 죽는 것도 보았지만 자신이 그것들로 오해받기는 또 처음이였다.

—아냐. 나도 귀신이야, 너처럼 한 번 죽은 사람.

—그럼 왜…

소년이 손을 뻗어 탁자에 놓여 있던 명함 몇 장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마술과도 같은 광경에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말했지? 우린 심야클럽이라고.

잿빛 명함 한 장이 공중에서 팔랑팔랑 날더니, 소녀의 자리 위에 내려앉았다.

—심야클럽은 한 번 죽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곳이야. 우리는 서로서로 도우면서 다른 망자들을 구휼하기 위해 일해.

—귀신이라는 게 진짜 있었네요…

—물론이지. 사실 귀신보다 더한 것들도 많아. 이런 건 차차 설명해줄게.

소년은 그녀의 표정이 미약하게나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대화하기를 좋아하는구나, 예상하기 쉬운 표정이였다.

—자, 이제 네 이야기를 좀 해 볼래? 싫으면 안 해도 되고.

—아, 저는…

그 사람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의 꿈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끼면서.





부대장님.

뭐야.

GoI-0899 측 인물의 움직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추적은?

중간에 항밈적인 변칙성을 쓰는 바람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소속된 것으로 보이는 인물의 신상은 알아냈습니다.

추적은 아쉽게 됐군. 그나저나 그 인물이라는 건?

심령 독립체화가 막 진행된 민간인입니다. 현재는 GoI-893 측에 가입한 것 같고요.

민간인이라… 이거 애매한데. 하여간 생전 정보 조사를 좀 해 봐야겠어.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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