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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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평소와 같이, 시작은 단순한 대화였다. 릴 박사는 티스푼으로 차를 아무렇게나 휘저었다. 그는 다음 주에 출장을 간다는 말을 어느 타이밍에 내뱉을까 고민하는 중이었다. 누군가에게 말하기를 조금 어려워하는 그에게 그건 특히나 껄끄러운 주제였다. …항상 그랬듯이, 그의 앞에는 슈나이더 박사가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근에는 연구를 하는 중이야. 말없이 웃던 그가 특유의 조곤조곤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릴은 그것을 듣고 그저 그래, 란 한 마디를 짧게 내뱉고는 찻잔을 들었다. …참 이상하게도 노력하는구나, 싶었다.


슈나이더와 릴은, 설명해 보자면 꽤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우연히도 재단에 입사한 시기가 같았고, 보기 드문 동년배였으니까. 공통점이라, 찾아보면 수도 없이 많았지. 야심가인 둘은 목표하는 것마저도 꼭 하나 같았다. 권력, 더 나은 자리.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명예, 더 과장해서 말하자면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들. 사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어서 어떤 면에서는 동족혐오가 일어날 정도였다. 그 관계를, 글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간단하게 동전의 양면에 비유해 본다면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 둘이 아무리 흡사하다고 해봤자 반드시 똑같은 점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 굳이 하나 집어 보자면 능력 정도가 그랬다. 슈나이더와 릴의 차이는 분명하고 확실히 보였다. 주어진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언제나 릴 박사가 한 발짝 더 앞서갔고, 그러면 슈나이더는 느린 속도로 그 뒤를 쫓았다. 변하는 일은 없었다. 가진 꿈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재능의 유무는 확연히 드러났다. 시간이 지나자, 릴은 완전히 승승장구하여 수석 연구원의 지위를 얻어냈고, 그가 그럴 동안 슈나이더는 말단에서 조금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현실은 늘 씁쓸했으며 결코 따뜻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인정받으리란 욕구를 결코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슈나이더는 자신과 무대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뿐이다. 라는 식으로 모든 일에 진지하게 임했다. 최근에 연구를 시작한 것도 나름대로 그가 말하는 '준비'라는 것을 하기 위해서였고. 그는 재단의 한 번 쓰고 버릴 체스 말에 불과해지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정말로 그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재단의 위험한 쪽을 건드릴지도 몰랐지만 뭐 어떠하랴. 그에게는 그다지 상관없는 것이었다. 슈나이더는 자신감이 있었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도 충분히 넘쳐났다. 연구할 때의 그는 마치 사자와 같았다. 왜 아직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나, 의아스러워질 정도로. 슈나이더라는 사람은 늘 그랬다. 그런 타입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가 하지 않은 걱정은 전부 릴 박사의 몫이었다. 그는 친구가 혹 재단의 크나큰 것을 실수로라도 건드려 버려서, 무슨 징계라도 받는다면 어쩔까 싶었다. 설마 벌써 기밀에 가까이 접근한 건 아니겠지, 란 생각도 들었고. 불안하지 않다고 자신할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일회용 말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그도 그럴 것이, 릴의 직책은 꽤 높았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친우인 슈나이더가 측은했다. 언제쯤이면 저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명백히 위에서 바라보는 기분은 편치 않았다. 마음만은 뒤에서라도 도와주고 싶었으나, 재단의 방침은 그도 어기기가 껄끄러울 정도로 단단했다. 그렇기에 릴은 그저 먼 발치에서 방관할 뿐이었고, 그에게 어떠한 변화도 주지 않았다. 둘은 절친한 사람들이었지만, 일면으로는 그런 냉정한 비즈니스 관계이기도 했다.

"축하해 줘, 거의 끝나 가거든."

"…넌 그게 괜찮을 거로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여기 일부가 있다고. 이건 너한테 보여줘도 문젯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야. 글자투성이인 보고서 종이를 팔락이며 슈나이더는 살풋 웃었다. …확실히 여기까지는 위험한 내용은 없는 것 같지만. 조심해, 걱정된다고. 난 네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 종이를 대충 흩어본 릴 박사는 거기까지 단숨에 빠른 속도로 말을 뱉어내다가 제 딴에는 너무 나갔다는 사실을 깨닫곤 자신의 충고가 무의미한 잔소리로 들리는 건 싫었기에, 도중에 입을 다물었다. 방은 급속도로 조용해졌고, 괜히 무안해진 릴은 이 상황을 극복할 무언가의 대화 주제를 찾다가 엉겁결에 자신이 다음 주에 출장을 간다는―사실 오늘 들은― 것을 다시금 상기해 냈다. 왜 절친한 친구에게 말하는 것을 꺼렸는가. 약간의 후회도 들었지만, 어쨌든간에 지금엔 딱 맞는 주제겠지. 그가 어째서 더 빨리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조금 이상하게 생각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출장, 화요일에 가."

그의 말을 듣자 슈나이더는 의외였는지, 눈을 조금 동그랗게 뜨고는 되물었다. 네가? 그쪽 기지가 바빠서 그렇게 됐대. 그럼 난 그때까지 심심하겠네. 그는 약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연구라도 박차를 가해 계속할 수밖에 없나. 뭐, 네가 올 때는 완성해 있겠어."

박사가 가볍게 던진 발언에, 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어쩐지 아주 약간은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그는 그냥 모르겠단 식으로 넘겨 버렸다.


떠넘겨진 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이런 거로 사람들을 부르고 난리치다니- 박사는 혀를 차고 버릇처럼 가운을 털었다. 할 것을 전부 마치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슈나이더였다. 아마도 지금쯤 그가 한 연구가 끝나 있을 텐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신중하다고 말이 자자했던 릴 박사도 이번만큼은 걱정보다는 궁금함이 조금 앞섰다. 그는 굉장히 자신만만해 보였으니까. 인정받을 수 있는 정도라고? 관심 없는 척했다만 호기심이 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릴은 눈에 익숙한 기지에 도착해 평소대로 리더기에 보안 카드를 찍고, 건성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느릿하게 들어가며 그는 눈을 돌려 친구를 찾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슈나이더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뭐, 담배라도 피우러 간 건가. 그는 거기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도 어디로 갔는지는 물어보자는 마음으로―자신이 당장 할 일이 없다면 일단 그와 대화부터 먼저 할 심산이었다―, 그는 옆에 자리한 동료한테 로버트 슈나이더는 어디 갔습니까? 라고 질문을 던졌고, 돌아오는 예상치 못한 대답은 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네? 그게 누구예요?"


릴 박사는 마음을 도저히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대체 그 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직접 본인에게 묻고 싶었다. 어쩌다 존재 자체가 지워져 버린 거냐고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슈나이더는 이 자리에 없다. 끔찍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이리저리 뒤섞여 최후에는 참을 수 없이 쓰라린 것으로 변모했다. 그는 차라리 자기의 머리를 뜯어내고 싶었다. 일단은 수석 지도 연구원, 그러니까 상급자인 세넬 박사가 조금 전 자신을 호출했으니까 어떻게든 해명해 줄 것이다. 그는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조금 더 심정이 편했으니.
릴은 박사의 사무실 문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열었다. 늘 그랬듯이 오늘도 단정한 차림의 세넬 하르트만 박사가 그를 손짓으로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 상황에 대해 당신은 해명할 수 있습니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되는대로 말을 끄집어냈다. 따지고 본다면 굉장히 무례한 짓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은 그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넬 박사는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일으키지 않은 채 느릿하게 깍지를 꼈다. 일단 거기 누워 주세요. 절차입니다. 그는 침대를 가리키며, 다시금 손짓했다. 릴은 무슨 절차인지 의문점이 들었지만, 명령을 들을 정신은 아직 존재했기에 시키는 대로 따랐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당신은 그의 가장 친한 사람이었으니 특별히 조금은 알려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래 봤자 소용없겠지만은."

릴 박사는 세넬 박사가 우아한 손놀림으로 주사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대충 상황을 파악하셨으니 불복종하지는 않으시겠죠. 그래요, 슈나이더 박사가 하던 연구 말입니다만. 곤란한 일이 생겨서."

그는 도중 불의의 사고가 터져서 사망했습니다만, 하필이면 그 사고가 기지에서 보관하고 있던 정신자 SCP 개체와 귀찮게도 얽히는 일이 생겨 버렸습니다. 일종의 인식 재해죠. 세넬 박사는 철저한 무감정이 담긴 높낮이 없는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가 그 말을 하는 중 어떤 태도를 보였느냐면, 릴의 감정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었다.

"이제 저와 당신, 모두 기억 소거를 해야 할 겁니다. 전 마지막으로 기억이 남아 있었고. 네, 물론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서죠. 다행히도 아직 돌아 버리는 일은 없더군요."

어째서- 그는 그 발언에 무엇인가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입을 떼었지만, 곧 말문이 막혔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여기서 뭘 할 수 있는 건데? 숨을 쉬기가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감이 엄습했다. 자신은 이렇게 추하게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그렇게 된 이유라도 자세하게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불가한 영역이었다. 더는 넘보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건 사태의 재발 방지에 대한 부득이한 조치입니다. 혼란스러우실 것에 대해선 죄송합니다만,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걸 알 필요가 없었으니까.

제 할 말을 다 마친 세넬 박사는 준비하라는 듯 무정하게 릴 박사에게 시선을 돌렸고, 박사는 멍하니 그의 마치 기계부품 따위를 보는 것 같은 아무 감정 없는 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아, 그래. 나는 정말 바보 같았구나. 퀸이나 폰이나, 결국 체스판 위의 말인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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