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음
평가: +3+x

낮보다 밝은 가로등이 노숙자를 향해 내리쬐고 있었다. 새벽 밤인데도 그렇게 춥지 않았는지, 아니면 가로등의 빛이 따뜻했는지 노숙자는 안방이라도 찾은 것마냥 불편 없이 가로등에 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가로등 반대편에는 중절모의 남자가 건물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급한 발걸음이었다. 그리고 손바닥만 한 휴대 전화를 걸어가면서 계속 만지고 있었다. 노숙자는 중절모 남자의 급한 발걸음에 깨버렸다. 좋다 말은 표정을 지은 노숙자는 그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숙자가 바라본 방향은 커피 전문점이었다. 중절모의 남자는 어떤 눈길에도 무시한 채 건물 입구를 들어갔다.

건물 안은 노숙자가 원했던 가로등의 빛보다 더 밝지는 않았다. 그래도 은은한 빛은 건물 안을 모두 비추고도 남았다. 입구 앞에 들어선 중절모의 남자는 그에게 만큼은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중절모의 남자는 약속된 장소인 만큼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 쪽에 있는 벽에는 커튼이 걸려있는 유리창이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벽은 창문이 없는 벽이었다. 건물 공간의 크기가 넓진 않지만 4 인용 소파를 8 개정도 배치해 채우고도 돌아다닐 수 있는 길목만이 남았다. 중절모 남자 앞에는 은은한 조명 아래 정장을 입은 사내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내는 창문을 향해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탁상과 반대편에 배치된 소파가 있었다.


말없이 입구 앞을 앉아서 지켜본 사내는 중절모가 입구 안쪽으로 들어오자 마시던 커피를 내리고 일어섰다.

사내가 말했다. "칼린, 생각보다 일찍 왔군. 커피가 식을까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

사내는 중절모의 남자에게 악수로 맞이한다. 칼린은 중절모를 소파 위로 올려두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칼린은 중절모와 나란히 앉았다. "벗이 필요하다면 와야지. 리도"

리도라는 사내를 만난 칼린은 커피 앞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린은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건물의 주인으로 보이는 바리스타 복장을 한 여인이 보인다. 일을 한지 얼마 안 되서인지 조금은 서툴러 보인다. 구석 쪽에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늦은 새벽에 두 손님은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늦더라도 만나길 원했던 연인의 열애는 칼린에겐 관심 밖이었다. 안심하고 칼린은 리도에게 대화를 시작했다.

칼린: 바쁜가 보군. 연락도 없고, 밤중에 만나자고 하니.

리도: 맞아, 나 사업해.

칼린: 무슨 사업?

리도: 비누 회사.

칼린: 그냥 잘 닦이면 되는 제품인데 그렇게나 잘 팔려?

리도: 뭐, 그냥 적잖이 들어오지. 그래도 제조 회사에서 특허낸 것도 많으니까. 내 자랑은 이만하면 됬어. 너는?

칼린: 정말 바빠서 모르는 눈치군. 뉴스는 보기는 해?

리도: 오전에 동물원에 코끼리 탈출했다는 건 알아. 그리고 지금 바로 내 눈 앞에 있지.

칼린은 덩치가 컸다. 그리고 리도의 농담에 잠시 웃음 소리가 커졌다.

칼린: 정말 잘 지내나 보는군. 알려주지. 나 정치해.


그리고 칼린의 자랑거리를 늘리기 시작했다. 리도는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칼린이 말하길, 이제는 정보만이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는 사람들은 글과 말 따위에 쉽게 현혹되고, 바쁜 사람들은 그저 결과만 바라본다고 갑자기 비판했다. 칼린은 리도가 모르는 사이에 벌써 3 년째 정치가 역할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이제 연설만이 아니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벌써 그가 지켜온 정당의 지지율이 절반을 압도한다고 한다. 비교적으로는 단순해도 이미 정부는 칼린이 거느리는 정당에 의지하고 있었다.

칼린은 언어적으로 천재였다. 하지만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지 리도는 칼린이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리도: 친구.

칼린: 응?

리도: 사람이 그렇게 쉽게 현혹되진 않아. 요즘 네가 하는 연설을 TV에 본 적이 있어. 잘 들어. 친구. 아직까지는 사람와 공유하는 건 정보 뿐이야. 친해지기 위해서는 종종 같은 취향으로 들먹이고, 들어주지도 못해도 알아주는 농담에도, 혹은 육체적인 소모 없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수단에도 대화로 이뤄진 정보 뿐이야. 가끔씩 신뢰를 깰 수도 있지만, 제일 가까운건 바로 앞에서 대화하는 사람이야. 진심이 필요할 땐 대화의 입이 아닌 사람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도 볼 수 있다고. 물론 진심이 가려질 수도 있지만. 정보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인지 알려 줄 수 있어?

칼린: …. 다시 되돌아가는 거야.

리도: 무슨 말이지?

칼린: 사람이 생존 본능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 대화의 정보에 깔려버린 인간의 본심은 육체적으로도 표출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 모두들 말로써 당하고 겪는 모습이 안타까워. 왜 당하고 있는지도 조차 모르지. 그건 바로 대화에 능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런 일에 어수룩 한 사람은 정 반대로 육체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모습을 찾지 못해 해메는 거야. 그러나 이걸 육체적으로 보여주는 예술이나 본성이 아니지. 아니,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것만으로도 부족해.

리도: 부족하다고?

칼린: 그래. 왜 그렇게 부족하게 될까? 본성이 무엇에 가려진 것일까? 그건 바로 양심이야.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 법 밖으로도 암묵적인 룰에는 양심이 있어. 양심으로 당하고 사는 것이지. 단순하게 말하자면 착하다는 거야. 사람들에게 양심을 팔지 못하지. 그런 사람들은 이미 정보로써 전쟁을 하고 있잖아. 경쟁에 밀린 사람들의 반은 양심의 짖굳은 결말을 겪은 사람들이야.

리도: …..

칼린: 이제 선거가 얼마 안 남았어. 사람들은 새로운 걸 갈구하기도 해. 나는 그 새로운 개념을 창조할 거야. 사람들은 정의를 평생토록 추구하고 있어. 하지만 그 반대로 필요한 경우도 요구되지. 내가 원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야. 바로 시간의 흐름이지. 그리고 흐름의 변화를 점점 느낄 때가 되었어. 그 때가 되었다고 확신해. 그 때는 정신적으로 통했던 일들이 모두 육체적으로 통하는 거야.

리도: 칼린….?

칼린: 이제 몇 분 있으면 자정이야. 곧 있으ㅁ…

리도: 칼린!!!

칼린: 알았어. 너무 설친거 같아. 미안해.

리도: ……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곧 다음날이 되는 건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커피 전문점이 문을 닫는 시간이었고, 손님도 리도와 칼린 둘 뿐이었다. 리도는 칼린이 이루고 싶은 꿈을 듣고 오랜 벗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었다. 이렇게 만난지 20 년이 된다. 칼린은 15살에, 리도는 10살에 만났다. 처음에는 형제로 생각했으나 너무 똑같이 어울렸었고 마음도 맞았었다. 그리고 그저 나이만 다른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만났지만 길은 달랐다. 그리고 칼린은 10 년만에 리도를 찾아왔다. 그러나 좋지 않는 변화였다.

리도는 생각했다. 커피만 주문해서 다행이다. 그러나 이마저 커피도 맛이 없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는 너무 지나친 변수였다. 그의 앞에 내놓는 설득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도 결국은 그의 의도대로 대화가 변할 것이다. 집념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칼린: 리도….

리도: …..

칼린: 생각보다 많이 가정적으로 변했어. 현실을 잘 따르고, 잘 살고 말이야. 결혼은 했어?

리도: 아직은.

칼린: 내가 죽기 전에라도 네 애인 좀 알고 싶다. 소개라도 시켜 줄께.

리도: 아냐. 괜찮아. 알아서 짝은 맞춰져.

칼린: ….

리도: 칼린….

칼린: 왜.

리도: 친구로서 솔직해 준거야? 너 말고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니?

칼린: 아직 나 뿐이야. 그렇게도 해보고 싶었고.

리도: 우리가 처음에 언제 만났지? 2025년?

칼린: 오리건에서 만났지. 그 땐 정말 답도 없었는데. 그래도 이렇게 너와 만난 후 이렇게 정상까지 갈 수 있었지. 고마웠어.

리도: … 그래.


커피 전문점의 문이 열렸다. 커피 전문점 안이 어두워졌다. 커피 전문점에는 한 사람이 먼저 나왔다. 그러나 한 사람은 걸어서 나오지 않았다. 리도 뒤에는 커피 전문점의 주인으로 보이는 바리스타 복장 한 여자가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나온다.

리도: 본부에도 알렸나? J 양.

J: 네. 사망 시각 2039년 8월 31일 수요일. 23시 59분. 본부도 알 겁니다.

리도: …. 그렇군.

J: …. 어떻게 하실 겁니까?

리도: 다음날에 신고해서 괴한한테 당했다고 전해. 이 건물 주인은 안 됐군.

J: …. 괜찮으신 겁니까?

리도: …. 커피는 마셔봤나?

J: 아뇨. 차를 좋아합니다.

리도: 다음부턴 찻집으로 하지. 형편없는 연기력 때문에 들통 날 뻔했어. 자꾸 대화할 때마다 너만 힐끗 쳐다봤다고.

J: 조심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주변을 살펴봤다. 가로등 아래에 있었던 노숙자는 사라졌다. 리도는 곧바로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연락했다. 통화음이 끊어지자 리도는 대답했다.

"상황 종료. 복귀하겠다."

리도의 귀 아래로 손을 내려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휴대 전화의 날짜를 확인했다.

2039년 9월 1일 00시 02분

잠시 후 재단에서 메시지를 보냈다.

문자 메세지 한 건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에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