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불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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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어 시쯤, 은혁은 이 시간대가 대기초소에서 가장 졸음을 참기 힘든 때라고 평가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진작에 잠이 싹 달아나버렸다.

"충성! 작전 중 이상 없습니다. 저는 █-1번 초소 근무자 상병 박은혁입니다. 저희 대기 초소를 방문해주신 연소하 대위님께 감사의 말씀 드리며, GOP 경계 작전 현황 보고드리겠습니다. 저희 █소초 책임 구역으로는···"

난데없이 초소를 방문한 어느 장교에게 브리핑하는 박은혁 상병, 그리고 그 옆에 바짝 긴장한 채 앉아 있는 임승훈 이병은 옆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창문 너머의 산에 시선을 고정하려 애쓴다.

"초소 전방 █.█km 앞에는 ██산이 형성되어 있고 ██산 █~█부 능선에 적 ███GP가 위치해 있습니다. 최근 TOD 관측 결과 적 특이동향이 상당히 관측되어 현재 경계 형태가 격상되어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군 지형은···"

가뜩이나 긴장 상태인 승훈은 눈에 띄게 덜덜 떨어댔는데, 큰 비가 막 그쳐 쌀쌀한 야간의 추위 때문인지, 잠자코 브리핑을 듣던 연 대위가 신병인 본인에게 뭔가를 질문할까 봐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입대 후 첫 GOP 근무라 그런 건지 은혁은 알 길이 없었다. 단지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그런다고 달라질 게 있겠냐마는, 급기야는 식은땀 한 방울을, 승훈은 내보이고 말았다. 두 손 주먹을 꼬옥 쥔 채로.

"···이상으로 현황 보고 마치며, 궁금하신 점 있다면 성심성의껏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브리핑 종료. 연 대위는 흡족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아냐, 됐어. 아주 훌륭해." 그렇게 말하고는 자신의 파일철에 V자 몇 개를 표시한다. 승훈이 흘깃 훔쳐보았을 땐 '… 근무 기강 상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보나 마나 '매우 양호' 였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실로 멋진 브리핑이었으니까. 이등병은 동경심 비슷한 것을 느낀다. 파일철의 내용이 궁금해 몸을 비트려는 순간 연 대위도 승훈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다이아몬드 세 개.

"이 친구는 처음 보는데, 누구지? 신병인가?"

어쩌다보니 어정쩡한 자세로 눈을 마주치게 된 승훈은 당황하며 관등성명을 댔다. "아, 예. 이, 이병 임승훈! 저어, 맞습니다! 신병…"

"크크. 이 친구가 막 처음 근무를 들어와서 그런지 바짝 긴장했나 봅니다. 제가 잘 케어하겠습니다." 은혁이 뒷받쳤다.

"그래애. 뭐. 나야 은혁이 믿으니까." 연 대위는 곧 떠나려는 어조로 말하다 은혁의 녹색 견장을 보곤 손날로 목을 베는 시늉을 한다. "벌써 분대장도 달고 말야."

"켁, 상병 박은혁." 그런 그와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친해 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좋아. 그럼, 신병. 오늘 암구호가 뭔지 말해볼래?"

승훈은 답하지 못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연 대위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은혁은 그렇지 못했다. 연소하 대위가 떠나고 은혁은 잠깐의 교육 시간을 마련했다.


"많이 긴장돼? 첫 근무라 그런가." 은혁은 순찰로에서 앞장서 계단을 내려간다.

"아무래도 좀 쫄립니다. 지금도 저 철책 너머를 못 쳐다보겠습니다. 뭐 튀어나올까 봐." 승훈도 뒤이어 따라가며 답했다.

정말로 야밤의 철책 너머는 경계등의 불빛도 거의 닿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이다. 거기에 좀 전보다 짙어진 안개가 암흑과 뒤섞여 만드는 광경은 귀신이든 뭐든 상상 가능한 섬뜩한 것들을 떠올리게끔 만들곤 한다. 은혁도 일이병 시절, 오인보고 깨나 해본 적이 있어 이해한다.

"그래도 익숙해지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박은혁 상병님처럼… 아, 아까 좀 멋있으셨습니다. 그, 브리핑하실 때."

"백날 천날 연습하면 이 정돈 하지. 아, 천날 했으면 진즉에 전역인데."

"흐, 쉽지 않습니다." 임 이병이 한숨을 쉰다.

"그래, 쉽지 않다." 박 상병도 끄덕인다.

위화감 없이 진해진 안개는 어느새 박 상병과 임 이병을 둘러쌌고 박 상병은 본인이 반지름 30m짜리 흰색 돔에 갇혀있다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하늘에선 가랑비의 첫 방울이 떨어졌다. 뒤이어, 비는 한참을 내렸지만 빗방울이 충분히 굵어질 때까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알아챈 후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아, …비 오네." 은혁은 잠시 고민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초에서 우의를 챙겨오기엔 너무 멀리 온 게 문제였다. 차라리 진작에 비가 왔으면, 하는 심정이다. 졸졸 따라오던 부사수도 잠시 멈춰서서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됐어, 막사 들리기엔 너무 많이 왔다. 빠르게 찍고 오자."

"옙." 둘은 조금은 급한 걸음으로 다시 터벅터벅 내려갔다. 빗속에서 한참을 걸으니 은혁은 감기 들겠다, 싶었다. 가랑비에 옷 다 젖는다더니 이젠 더 이상 가랑비도 아니었다. 소총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어가는걸 보니 복귀하면 총부터 닦아야한단 생각에 마음이 착잡하다. 은혁과 승훈 사이엔 침묵 뿐이었고 이제는 빗소리가 그 사이를 가득 메운다. 무의식이 저절로 발걸음을 옮겨줄 만큼 멍한 정신 상태를 환기시킨건 어느새 저 멀찍히 보이는 ██-1 초소였다. 둘은 책임구역 끄트머리에 다다른다. 이 너머서는 ██소초네가 맡는 곳이다.

"우리가 근무 끝나고 도는 순찰은 이렇게 타 소초 협조점까지 돌고 복귀하는거야. 우리 같은 경우엔 여기지." 은혁이 초소 안에 꽂힌 순찰일지를 꺼내 승훈에게 건네 작성하게 했다. 예, 혹시 펜 있으신지. 감사합니다. 승훈이 일지를 쓰는 동안 은혁은 수화기를 들고 순찰 완료 보고를 한다.

지직. 지지직- 삑, 딸깍.

"통신 보안, ██소초장입니다."

"통신 보안, █소초 상병 박은혁입니다. 아, 송 중위님. 저희 협조 순찰 왔습니다."

"뭐? 무슨 순찰? …뭔 소리야! 지금, 너희 상황 터진거 못들었어?"

"어, 어떤, 잠시만 기다려주심까." 은혁은 잠깐 얼탈 뻔했다. 빠른— 한참은 늦었겠지만— 판단으로 승훈의 가슴팍에 달린 무전기를 낚아채어 전원을 확인했다.

오프.

은혁은 잠깐 맥박이 멈춘 듯한 경험을 갖는다. 승훈도 대충 상황을 눈치채고 얼른 예비 배터리를 꺼내 건넸다. 은혁은 배터리를 갈아 끼우자마자 울리는 무전 노이즈와 다급한 목소리들이 지시하고 보고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데다 너무 큰 음량에 승훈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재빨리 [-] 버튼을 눌러대는 새에 은혁은 혼잡한 무전들 속 본인들을 찾는 전문을 들었다.

"C조! 주야간 C조 등장 바람! 빨리!"


"헉, 허억—, 헉— …" 두 병사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며 내뱉는 숨소리는 둘 사이의 침묵을 완전히 메꾸었다. 천사처럼 친절했던 지난 내리막길은 뒤를 돌자 지옥 같은 오르막길이 되어있었다. 그들이 있던 ██-1번 초소에서 █-16, 15, 14를 지나 13번 초소 앞까지 가려면 300m가량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은혁에게도 끔찍한 시간이었지만 신병에겐 난생 처음 겪는 고문이었다. 들숨을 방해하는 강우와 날숨을 방해하는 풍속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은혁은 자꾸만 뒤처지는 승훈을 앞에다 세우고 화기와 탄통을 뺏아든 채 승훈의 등짝을 앞으로 밀며 내달렸다.

"괜, 헥- 괜ㅊ… 헉-" 승훈은 무언갈 말하려 했으나 역한 질식의 고통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은혁은 이제서야 '이 악물고'라는 표현의 뜻을 이해했다. 위아래의 어금니가 서로의 압력에 눌려 깨질 듯이 시려왔다. 뜀 걸음 당 한번씩 달그락거리는 개머리판이 정강이를 후두려 패댔다. 보나마나 내일 아침엔 멍으로 퉁퉁 부어있을 것이다. 끝 없을줄 알았던 계단도 결국은 끝장이 났고 둘은 비인지 땀인지 모를 것에 흠뻑 젖어있었다. 몇 분 만에 그 계단 수 백 개를 돌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혁은 오늘만큼 빨리 오른 것은 신기록이라 여긴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13번 초소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쌓아놓은 날개진지에서 경계하던 귀순자 작전 팀도 보였다. 경계조가 수하를 실시하자 앞장 섰던 승훈이 거의 숨 넘어가는 소리로 암구호를 댔다.

"[기밀 제한됨]?"

"[기밀 제한됨]."

"누구냐?"

"밀조 2팀."

"신원이 확인되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무전이 들려왔다.

█-13 초소 전방 100m 지점 미상 거수자 1명 식별됨. 지속 남하 중. 100m 전방. 이상.


은혁과 승훈은 귀순 작전 팀의 경계조였다. 은혁은 초소 옆 진지에서 전방을 주시하며 승훈의 기관총에 링크탄을 연결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탄통을 처음 까 본 승훈은 링크탄을 보고 영화 람보를 떠올린다. 이젠 100m 안팎이다. 진짜, 코 앞이었다. 은혁은 북책 너머의 안개 속 어둠을 바라보다 다시 이등병 때의 패닉이 떠올랐다. 입술은 바짝 마르고, 그걸 알아채 입을 열었을 땐 목구멍도 바싹 말라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지랑이 같은 환상이 눈앞을 방해할 때쯤 은혁의 시야에 승훈이 흘깃 들어왔다.

승훈은 겁에 질려 발발 떨고 있었다.

"이런 씨," 순간. 은혁의 가슴 속에 거대한 책임감이 떨어져 앉으며 공포, 패닉, 뭐가 되었든 다 박살 내버렸다. 당장은, 나보다도 분대원이 우선이었다. 은혁은 승훈의 어깨를 꼭 잡으며 말했다.

"승훈, 저것들 시발 떨 필요 없어. 너 지금 분당 몇 발 나가는 기관총을 들고 있는지 알아? 여차하면 네가 다 갈아버리면 돼. 그럼 되는 거야. 저 새끼들은 널 건들 수도 없어. 누가 위인지 보여주라고."

승훈은 끄덕이며 얼굴에 흐르는 비, 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선 전방을 향해 시선을 맞추고, 언제든 쏠 수 있게 폼을 취했다. 이제서야 진짜 기관총 사수의 자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좋아."

그때였다. "살려달라!" 모두가 들었다. 전투분대장 유경목 하사가 팀원에게 '자세 낮춰' 완수 신호를 보냈다. 앙상한 나뭇가지를 비집고 나온 형체 하나가 모두의 시선에 담기기 시작했다. 보인다. 눈앞에 있다. 뼈에 붙을 듯한 살가죽에 옷가지를 벗고 흔들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귀순자였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소초장과 전투분대장이 남책 쪽으로 다가갔다. 숨죽인 채로 모두가 그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건 소초장이었다.

"정지! 손 들어! 허튼짓하면 쏜다!"

귀순자는 두 팔을 번쩍 올렸다.

"우리는 자유 대한민국 헌병이다. 귀순할 의사가 있는가? 있다면 손을 흔들어라!"

귀순자는 앙상한 두 팔을 휘저었다.

"함께 온 다른 의거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손을 흔들어라!"

이번에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추적거리는 비 사이에 서 있을 뿐이었다. 소초장은 다음 질문을 할 차례였다. 질문의 내용은 현장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었고, 모든 이가 '아니' 라고 답해주길 바랄 그런 질문이었다.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곤, 소초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추격조가 있는가? 있다면 손을 흔들어라!"

귀순자는 손을 흔들었다. 결국 가장 바라지 않았던 대답을 보고야 말았다. 상황실과 실시간으로 통신하던 통신병이 낮은 목소리로 소초장에게 보고했다.

"소초장님, 관측 결과 추격조는 MDL 북방 30m까지만 관측되다가 지금은 식별되지 않는답니다. 대대장님은 추격 실패로 판단하셔서, 지금 바로 유도 작전 시작하랍니다."

소초장은 눈을 질끈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썅. 까짓거. 시작한다."


"그래서, 왜 못 가게 하시는 거죠?" 연 부장이 스크린 속의 누군가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13 초소면 베이스캠프부터 별로 멀지도 않다고요!"

소용없었다. 태블릿 너머의 한 감독관은 여전히 완강했다. "다 알고 파견 온 거지 않나. 재단이 간섭할 수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고. 자네가 대한민국 출신이란 사실 역시 중립성엔 대단히 방해될 것이고."

"그래서, 그냥 이렇게 두겠다고요? 823-KO-1이 무슨 짓을 벌일 수 있는지 알잖아요! 왜, 왜 우리는 남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그럴 수 없는 건데요!"

제██기지 감독관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치라는 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게 아니란다. 애송아."

연 부장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하늘로 젖히며 눈을 감았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 결심했다.

"정치는 개뿔."

그녀는 개인 화기와 확성기를 챙겨 뛰쳐나갔다.

휴게실에 앉아 있던 요원들이 반응조차 못 할 만큼 빠르게.


전투분대장이 통문의 키를 따자 가장 먼저 병사 둘이 진입하였다. 경계조 둘은 귀순자가 있는 곳보다 더 추진하여 양옆으로 멀찍이 자리 잡았다. 그 둘과 은혁, 승훈이 있는 위치를 선으로 잇는다면 삼각형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 귀순자가 엎드려 있었다.

다음으로 전투분대장과 유도조 셋이 줄줄이 들어왔다. 작전팀은 일사불란하게 대형을 갖추었다. 유경목 하사는 숙련된 솜씨로 포박을 실시하였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의무병이 귀순자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통신병은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를 했다.

"현재 귀순자 조우 후 포박까지 완료하였음. 인원, 장비, 탄약 이상 없-"

쾅!

커다란 폭음. 남책 너머서는 순간 흙먼지가 일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비명들. "씨발, 뭐야! 뭐냐고!" 잠시 후 먼지가 걷히자 은혁은 그 폭발이 북책에 걸려있던 크레모아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북책엔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겨있었다. 그런데 왜, 왜 갑자기 터진거지? 고통에 찬 몸뚱아리들이 철책 너머에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크레모아의 후폭풍에 휩싸인 것이다. 끝없는 비명에 거북한 역함을 느끼기도 채 전에 갑작스레 경계등 불이 꺼졌다.

그리고 또 다시,

탕!

귀청을 울리는 거칠고 낯선 총격음이 북쪽에서 들려왔다. 소초장은 소리를 질렀다

"추격조다!"

은혁은 빠르게 헬멧장착대에 딸린 야간투시경을 내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너 발의 총격음이 더 들렸다. 그러고 나서야 아군 측에서도 총을 쏴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교전이 있는 동안, 은혁은 재빨리 DMZ로 넘어갔던 소대원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귀순자의 이마엔 총알 구멍이 두 개쯤 뚫려있었다. 크레모아의 후폭풍에 휘말려 상반신이 죄다 뭉개진 채 고꾸라져 있는 형체들도 보였다.

세 명뿐이었다. 철책 너머의 아군들 중 정신을 잃지 않고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 겨우 세 명뿐이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총음은 들려왔다. 은혁은 그제서야 북괴들을 식별했다. 순간, 알 수 없는 울컥함을 느꼈다. 동시에 이전엔 느낀 적 없던 유례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평소에는 느낄 수 없었던 '전우애'라는 것이 가슴팍에서 터져 나왔다. 승훈 역시 총기에 결합한 야간 장비로 상황을 파악하곤, 말없이 방아쇠를 꾸욱 당겼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탕—

잠깐 손을 눌렀다 뗐을 뿐인데 80여 발가량의 탄환이 쏟아졌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적 하나가 산산이 찢어졌다. 다른 하나는 소초장의 탄환에 맞고 쓰러졌다. 남은 하나가 재빨리 바위 뒤로 엄폐했다. 교과서마냥 배운 교범대로— 엄폐한 적에게는 수류탄 따위의 곡사 공격을— 은혁은 수류탄 핀을 뽑고 전방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목격한 날아오는 수류탄,

"이런 씨ㅂ,"

은혁은 승훈을 낚아채 진지 밖으로 내던지곤 엎어졌다. 그리고 폭음.

펑!

위액까지 끓여버릴 듯한 진동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다행히 파편으로부턴 안전했다. 순식간에 개박살이 난 날개 진지와 초소는 더 이상 엄폐물이 되지 못했다. 폭발 소리보다 더 큰 이명에 갇힌 은혁은 삐─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같이 엎드려있는 승훈이 무어라 무어라 뻐끔거리는 것도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

은혁의 손에 쥐어진 핀 빠진 수류탄을 승훈이 빼앗아 저 멀리다 던졌다. 수류탄은 얼마 못 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얼떨결에 일어나버린 승훈은 적과 눈이 마주쳤다. 승훈의 눈과, 적의 가늠쇠와, 가늠자, 그리고 적의 눈까지. 직선이 완성되었다. 야간 장비 따위는 없어도 알 수 있다. 자신이 곧 죽는다는건.

그때였다.

"전원 정지! 멈춰!"

확성기 소리다. 누구지? 알 수 없는 노이즈 소리가 머릿속에 가득히 들리며 이상하게도 승훈은 몸이 급히 나른해진다. 승훈도, 은혁도, 철책 너머의 북괴 하나도. 그 현장에 있던 모두가 '안정 상태'에 돌입했다.

저 멀리서 달려온 건 낯선 차림의 익숙한 얼굴— 은혁이 잠시 눈을 찌푸리자 그녀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챘다. 연소하 대위였다. 확성기에서 울리는 오묘한 노이즈가 커질수록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성큼성큼 다가온 연 대위는 생전 처음 보는 총기를 메고 있었다. 전투복도 훨씬 세련되어 보였다. 연 대위가 은혁의 가슴팍에 꽂힌 무전기를 뽑아 들고선 뭐라 뭐라 소리 지르는 듯 보였다. 무슨 말인지는 전혀 안 들리지만, 대충 누군가에게 분노의 쌍욕을 박아대는 것만은 확실했다. 연 대위가 철책 너머로 넘어가 확성기를 돌리고 또 이상한 노이즈를 보내자, 북괴는 그냥, 제걸음으로 되돌아갔다. 승훈 입장에선 보고도 못 믿길 광경이었다.

잡음이 멈추고 '안정 상태'가 풀렸다. 승훈은 후들거리던 다리 그대로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은혁도 긴장이 풀려 다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었지만, 엉금엉금 기어가 쓰러진 부대원을 얼싸안았다. 모두 차갑게 식어있었다. 여전히 세상은 삐─ 소리로 가득한지 승훈이 엉엉거리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현장에 있던 이들 중 은혁과 승훈을 빼놓곤 모두 전사했다. 은혁은 위 속에서 토할 듯한 죄책감이 끓어 넘치기 시작했다. 연 대위는 그 광경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결국 일을 벌였군, 연?" 영국 억양을 가진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쨌든 잘 끝났는걸요. 쟤네 기억 소거나 잘 시켜주세요." 캠프로 돌아온 연은 전투 장갑을 소파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

"착각하고 있나 본데, 네가 만든 건 가짜 평화야. 이봐, 연. 재단의 삼대 강령을 알고 있나?"

"확보. 격리. 보호죠."

"그런데 너는 그들을 지배자라도 된 마냥 조종했어. 그 오만한 태도로!" 태블릿 너머에서도 책상을 꽝 하고 때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막 데운 쨈 토스트와 우유를 내오던 조쉬 요원도 깜짝 놀라 컵을 거의 쏟을 뻔했다.

연은 한숨을 푹 쉬고 한국어로 궁시렁거렸다. "돈이라도 많이 주던지, 망할 직장."

영국인 기지 감독관 J.가 한국어를 알아들을리는 없겠지만 눈치가 있다면 투덜대는 소리임은 알 수 있었다. 그 태도가 감독관의 심기를 자극했지만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곧 전하게 될 비보가 저 여유만만한 표정을 구겨줄테니까.

"상급 감시사령부에서 네 행위를 식별하고 공문을 하나 보냈어. 네 이메일에도 도착했을텐데, 어디 한 번 열어서 읽어보겠나?" 보나마나 징계 아님 활동 제한일 것이다. 어떻게 될 지는 연도 잘 알고 있었다.

"저한테요? 엄, 어디 한 번 보죠." 소하는 메일함에서 새 메일을 발견하고 클릭한다. "수신. 제███기지 연구부장 연소하에게. 음… 중간부터 읽자면, 귀하의 그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측 및 기록되었습니다. 재단 소유의 SCP를 무단으로 이용한 것은 제재되어야 할 부분이었습니다."

감독관은 어떻게 말해야 연을 골려 먹을지 멘트를 짜고 있다.

"…하지만 그 창의와 용기에 기반한 맹활약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또한 지난 시간 동안 해당 임무 외 다양한 업무를 수월히 진행해왔음에 공을 인정하여 기지 연구부장에서 제███기지 부감독관으로… 임명하는 바입니다? 뭐야 이게!" 감독관의 표정이 굳었다.

연이 토스트를 집어 들며 물었다. "어… 혹시 이거 아직 안 보시고 알려주신 거예요?"

감독관은 본인도 메일함을 열어 빠르게 내용을 속독한다. 틀림없었다. J.는 한탄한다. "해도 하필 저런 녀석하고…"

"아니, 제가 뭘요! 일 잘하지, 리더 경험도 많지, 천재에, 이쁘고, 싸움도 잘해."

감독관은 앓는 소릴 내곤 화상 회의를 꺼버렸다. 연소하 부감독관은 토스트를 베어 물었다.


실험 제안 19.3

개요: SCP-823-KO-1의 잠재적 위험 및 국군 작전 간 악영향 등을 차단하기 위해 대상에게 치명적인 청각 재해를 송신하여 반영구적 손상을 가한다.

비고: 본 제안은 심의 중이다.


일주일 후, 17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저녁 시간대.

그리고 갑자기 생활관 문을 발로 까고 들이닥친 한 사람.

바로 연 대위였다.

"싸이버거가 입장하고 계십니다. 부대 차렷." 늘 합이 잘 맞았던 보급관이 옆에서 다스베이더 등장 배경음을 틀었다.

"와, 뭐야!" 한데 모여 TV를 보던 소대원들이 깜짝 놀라 일어난다.

"뭐야는 반말이고 이시끼들아!" 연 대위는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옆구리엔 커다란 박스를 끼고 있었다.

행정보급관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위에서 위문품으로 사주는 거니까 감사하다고 하고 먹어!"

"잘 먹겠습니다!" 다들 아주 신이 났다. 연 대위 뒤로 피자 상자나 콜라캔 팩 따위를 나르는 병사들이 지나다닌다.

"빨리 먹거라, 저글링들아. 에효, 내 연휴 보너스 다 날렸네." 연 대위가 궁시렁거렸다. 그렇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우리는 햄버거를 다 먹은 뒤 남은 콜라 몇 캔을 챙겼다. 우리는 주말 연등 때 과자랑 먹기 위해 오늘 밤까지 남겨놓을 셈이었다. 음료를 이중 창문 틈에 끼워 놓는 김에 환기를 시켰다. 창문으로 찬 바람이 불어왔다. 하늘엔 까마귀 두어 마리가 날아다니고 있었고, 그 밑엔 소나무 말곤 울창할 것 없는 산이 솟아있었다.

나는 왠지 모를 먹먹함을 느낀다. 분명 부족할 것 같은 음료의 수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도 의아했다. 우리 분대원이 이렇게 적었었나.

유난히 추운 날씨였다.

나는 창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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