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음비

"휠러 씨! 휠러 씨!"

매리언 휠러는 예정되어 있던 SCP-8473 점검을 지금 막 마치고 담배나 한 대 태우러 가던 참이었다. 누군가 달려와 SCP-8473 격리 단위 밖에서 그녀와 마주쳤다. 휠러는 그 사람이 엘리 모레노 박사라는 걸 알아본다. 고작 6개월 전에 항밈학과에 합류한 수습 현장 연구원이다.

"모레노 박사. 도와줄 일이라도 있을까?"

"어음." 모레노가 쭈뼛쭈뼛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그녀는 휠러보다 머리 하나만큼은 키가 크고, 나이는 절반 정도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하고 아주 안경알이 두꺼운 안경을 썼다. 그녀에겐 경험이 부족하다. 하지만 매우 똑똑하고, 아주 빠르게 배워나가고 있다. 1년만 지나면, 학과에 당장 소속된 이들과 비교해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있던 이들과 비교해도 최고로 손꼽힐 인물이다. 휠러는 그걸 기대하고 있다. 뛰어난 사람만큼 그녀가 사랑하는 건 없으니 말이다.

물론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러한 미래가 다가오기까지 시간이 꽤 필요할 것이 자명해져 간다. "모레노 박사.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보통 이것보단 더 빠르게 요점을 말해."

"기지— 뒤 숲에 돌 하나가 있어요." 모레노가 불쑥 말한다. "엄청나게 큰 돌이요. 마치 마천루 같아서, 해까지 가리는 거 말예요. 제가 뭐 말하고 있는지 아시나요?"

"알지."

"하지만 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그런 걸 이제껏 본 적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기지 전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태껏 계속 있었나요?"

"그렇지."

"그럼 혹시 그게—"

"—당신이 오늘 아침 처음으로 군사 작전용 기억제를 복용해서 그런 거냐면, 맞아."

모레노는 불안해하는 눈치다. "그냥 그런 식인 건가요? 저렇게 큰 게 그냥 있어도 우리는 볼 수 없는 거라고요?"

"그래." 휠러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머릿속으로 예정되어 있던 약속 몇 개를 옮긴다. 이 "담배 휴식 시간"을 오후 전체로 늘리고. 예정되어 있던 SCP-3125 점검은 그대로 두고. 승진 검토는 운동 이전 말고 이후로 하자. 저녁… 이러다가는, 절대 못 먹겠지…

뒤이어 떠오른 질문의 무게에 숨이 막히던 모레노는, 마침내 그 질문을 내뱉는다. "저게 뭐죠?"

휠러는 왼쪽에 난 복도에 손짓한다. 그녀가 이제 그쪽으로 갈 참이고, 모레노도 따라오라는 뜻이다. "보여줄게."

*

데이터베이스 상에는 SCP-9429라 되어있다. 모레노는 해당 항목을 읽어본 적이 없다. 열람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돌은 부피 91m x 91m x 147m의 수직으로 선 직육면체로, 아주 오래되었으며 풍화를 거친 하나의 온전한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주 살짝, 북쪽으로 기울어진 채로 서 있다. 모서리의 각도를 보면 인간이 조각하여 만든 인공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상은 제41기지 동쪽에 있는 숲에 서 있어서, 해당 방향으로 난 기지 중앙 건물의 창문에서 보았을 때 풍경을 완전히 가리지는 않아도 두드러지게 보인다. 부피만 놓고 보면 돌은 기지 자체보다도 훨씬 크다. 지하 시설까지 포함해도 말이다. 대상은 흐릿하게 보이는 동시에 시야에 담지 않을 수가 없다. 휠러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동안이라도 누군가 대상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도 사람을 매우 불안하게 만든다.

휠러는 짧은 숲길을 통해 모레노를 돌 근처로 데려가서, 둘레를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 돌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간다. 비가 오는 날이기에, 직육면체 상단부 모서리에서는 돌 바로 옆에서 자라고 있는 침엽수 이파리에서 그러하듯 빗물이 똑똑 흘러내리고 있다. 비가 지속적인 백색소음을 만들어 내며, 다른 소리를 지워내고 있다.

"이 돌 주변에는 약한 항밈적 가림막 효과가 있어." 휠러는 모레노의 앞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길을 따라 걸으며 설명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돌이 안 보여. 당신도 분명 여기 다른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와 봤을 거야. 당연히 거기서 이 돌이 분명하게 보였어야 했겠지만, 당신은 돌의 너머를 보았지. 그게 정상이야. 돌을 방문하면 그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관련된 효과가 있거든. 그 효과가 훨씬 더 강해. 당신이나 내 기억제 효과를 그대로 뚫고 들어오니까."

"그러면 이걸 전부 잊어버릴 거라고요?" 모레노가 묻는다.

휠러가 낡고 작은 수첩 하나와 싸구려 파란색 볼펜을 꺼내 든다. 모레노는 이해한다. 그녀도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니니까. 정보 억제는 범위가 복잡하다. 때로는 기억이나 전자 정보, 전파 신호나 심지어 가청음마저도 억제하는 영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필기된 기록뿐일 때가 있다. 재단에서 의무적으로 보급한 "벽돌 휴대폰"과 함께, 다수의 항밈학과 요원들은 습관적으로 즉석카메라와 기계식 테이프 녹음기, 수첩과 무전기를 같이 들고 다니곤 한다…

그중 무엇하나 모레노가 오늘 필요할 거라 생각했던 건 없다.

"물론이지." 휠러가 말을 이어 나간다. "가림막의 부작용 중 하나는 정확한 길을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거야. 표지판을 세워놓을 수도 있겠지만, 어째선지 결코 작업이 끝나질 않아… 물론 항밈적 효과 때문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게으름 때문이야… 아, 이쪽으로 가야 할 것 같네."

둘은 돌 옆에 난 길로 들어선다. 사실 길이라기보다는 엄청 깊게 난 홈에 가깝다. 홈은 직육면체의 윗면에서 아래까지 이어져 있어서 머리 위로 뚫린 가는 선 모양 구멍으로 구름 낀 하늘이 보이고, 위로 향하는 계단이 있다. 휠러가 계단을 오르고 모레노가 그 뒤를 따른다. 둘은 몇 분 동안 조용히 계단만 오른다. 모레노는 이따금 몇 번 발걸음을 멈추고는, 몸을 앞으로 숙여 빗물로부터 수첩을 보호하며 몇 가지 메모를 남긴다. 그리고는 서둘러 휠러의 뒤를 따라간다. 그동안, 휠러는 무심하게 일정한 속도로 걸어 올라가고 있다.

모레노가 얼마나 많은 계단을 올라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뒤, 홈 안에 난 계단은 왼쪽으로 90도 꺾어져 계속해서 위로 이어진다. 휠러는 모레노보다 윗단에 선 채로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돌려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뭘 알아냈어?"

"여긴 뭐 하는 곳이죠?" 모레노가 묻는다.

"당신이 말해봐."

"음." 모레노는 잠시 말을 고른다. 이 대화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불확실하다. 그녀는 자신이 적은 메모를 확인한다. "음, 그러니까. 지질학적으로 말하자면, 이 돌은 이 지역의 것이 아녜요. 처음에는 인간에 의해 이 위치에 있던 산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파내진 것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 돌 자체가 틀려요. 근처에 있는 다른 산과 언덕과는 달라요. 이런 현무암을 찾으려면 적어도 500 킬로미터는 이동해야 해요. 그 말은 다른 곳에서 파내졌고, 어쩌면 해당 위치에서 현재 형태로 깎아내진 뒤에 이곳으로 이동되었다는 말이죠."

휠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나, 그러한 태도가 모레노가 제대로 짚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죠." 모레노가 말을 이어 나간다. "이건 하나의 돌이에요. 크기와 밀도로 보았을 때, 질량이 대략 300만 톤 이상은 될 거란 말이죠. 그것도 조각된 이후에 말이죠. 그런 일을 불가능해요. 인간 문명은 이 정도 크기의 물체를 온전한 하나로는 옮길 수 없어요. 그런 기술은 존재하지 않죠."

"맞아."

"그럼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죠?"

"좋은 질문이야."

모레노는 기다린다. 그녀에게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없기 때문에, 휠러가 답을 제공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휠러는 그러지 않는다. "또 뭐가 있지?"

"…각인이 되어 있어요." 모레노가 지금껏 걸어온 통로의 벽을 가리키며 말한다. "도구를 이용해서 말이죠. 게다가 외벽도 마찬가지인 걸 확인했어요. 상당한 풍화가 일어났긴 했지만, 생물학적 오물 사이 이곳저곳에 아주 명확하면서도 규칙적인 패턴이 있어요. 바로 저기요, 보이죠? 작은 수직 직사각형이요. 마치… 오래된 컴퓨터 터미널에서 볼 수 있는 블록 커서 같은 모양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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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활자 폰트에서 볼 수 있는 묘비 기호와 같지." 휠러가 말한다.

모레노는 눈을 깜빡인다. "…네. 일정한 패턴이죠. 아주 세심하게 작업 되어, 현대 기준에서 봤을 때도 상당히 뛰어난 도구를 요구했을 것으로 보여요. 이러한 패턴이 돌의 외부 전체를 덮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돼요. 그리고 그런 경우, 이 패턴의 직사각형들은 매우 작고 돌은 엄청나게 크니 원래는 수억 개나 새겨져 있었겠죠."

"그래." 휠러가 다시 말한다. "뭐가 또 있지?"

모레노는 잠시 생각을 한다. 그녀는 비가 내리는 위쪽을 응시한다. 조각상이라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되는 이 돌이 나타내는 분위기를 생각하며 말이다. 고독함, 조용함, 황량함, 경외감… 위압감. 그리고 약간의 공포. 다만 위압적이면서도 공포심을 들게 하는 분위기와는 달리, 무언가 위험한 상황이라는 느낌은 없다. 위협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도 없다.

"우린 스스로를 강력한 문화권의 소유자라 여기고 있었어요." 그녀는 큰 소리로 말한다.

휠러도 그 말을 듣지만, 후속 질문을 던지지는 않는다. 만족스러운 듯한 모습으로,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는 계속해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고, 모레노는 그 뒤를 따른다.

통로는 몇 번 더 꺾이며, 불규칙하면서도 직각으로 이리저리 구부러진 길을 만들어 낸다. 모레노는 더는 메모를 남기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무릎이 꺾일 즈음이 되어서야 둘은 꼭대기에 도착한다.

둘은 비치는 빛에 눈을 깜빡이며, 빗물이 흥건하고 바람이 거세게 부는, 살짝 기울어진 고원에 있다. 바닥에는 작은 검은 상자 문양이 더 새겨져 있다. 직육면체 가장자리가 약간 떨어진 곳에 보이긴 하나, 도드라지진 않는다. 짙은 회색 바닥이 그냥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직선에서 끝나버리고, 수평선은 그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 광경에 모레노는 살짝 현기증을 느낀다. 표면이 한쪽 모서리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상태에다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고 해도 현무암 표면은 상당히 매끄럽고 젖은 데다가 계속해서 오는 비 때문에 계속 젖어가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이 위에는 재단 과학 장비가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두툼한 방수 장비들이 천막 아래에 쌓여있다. 튼튼하면서도 낡아빠진 컴퓨터 터미널이 전원이 꺼진 상태로 탁자 하나 위에 올려져 있다. 멀리에는 디젤 발전기가 있다.

휠러는 장비들을 무시하고는, 모레노로부터 고개를 돌린 채로 하늘을 바라보며 다른 방향으로 걸어 나간다. 그러면서 담배 라이터를 만지작거리나, 뭔가에 실제로 불을 붙이진 않는다. 라이터는 사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물려준 물건으로, 원래는 난로에 불을 붙이기 위한 작은 프로판 버너다. 휠러는 더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모레노는 한기 때문에 팔짱을 낀 채로, 점차 빗물에 젖어가며 잠시 기다린다. 그녀는 천막 아래로 들어가 비를 피하려 들지 않는다. 휠러도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언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걸 느낀다. 휠러는 보통 상당히 침착한 태도를 취하며 생각을 읽기 어려우나, 이번에는 불안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누가 본다면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라이터 불에 집중한 채로, 휠러는 모레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지금 이게 뭘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다음 부분을 강행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오리엔테이션? 입회? 신고식?

아까만 해도 빠르게 요점을 말하라든가 하지 않았나?

"이건 추모비로군요." 모레노가 말한다.

"흐응." 휠러는 라이터 뚜껑을 착 닫고는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약간 감명받은 모습이다. 약간이긴 하지만 말이다. "맞아. 물론, 사실상 말해준 거나 다름없지만 말야. 좀 전에 내가 묘비라는 단어를 언급—"

"얼마나 많은 항밈적 전쟁이 있던 거죠?"

그 말이 휠러를 붙잡는다. "젠장. 천천히 연출해서 알려주려고 했는데. 누군가 말해줬어? 항목을 읽어봤다던가?"

모레노는 제 신발만 쳐다본다. "음. 아뇨. 사실, 한 번도 여길 본 적이 없어요. 그냥 추론했을 뿐이죠."

"당황한 기색이네." 휠러가 말한다. "내 예상보다 자기가 30분은 더 일찍 올바른 대답을 맞췄다는 것에서 당황하고 있어.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생각한 거지. 그렇지? 엘리. 날 봐봐."

그녀가 시선을 마주한다.

"계속 그 수준으로 일하도록 해. 나나 다른 사람들 체면 차려주려고 늑장 부리지 말고. 중요한 부분이야."

"왜 여기 왔는지 알려주시겠어요?" 모레노가 묻는다.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머리 한구석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일련의 계산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

"문제는 말이야." 휠러가 말한다. "세상에서 고급 기억제에 접근이 용이한 모든 인물은 바로 이곳에서 내 휘하에 일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학과는 사람이 부족해서 난리지. 당신과 나를 포함해서 학과에는 40명이 있고, 눈알 40 쌍은 충분하지 않아. 한 번에 세상을 충분히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어. 세상에는 그 누구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구석이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정말로 많아. 그로 인해 온갖 항밈적 연구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제약을 받고 있어. 항밈생물학, 항밈고생물학, 항밈우주학, 항밈고고학… 이런 학문들은 전부,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어. 어디에도 없다고.

"그런데도 우린 이 문화권의 도시를 찾아냈어. 한두 곳 정도는 아직도 존재해. 순수한 천운으로 발견했지. 학과 연구원이 휴가를 갔다가, 아직 약물 효과가 남은 상태에서 네바다를 가로지르다가… 지평선 부근에서 뭔가를 보게 되었어. 이런 걸 말이야. 도시는 박살이 난 상태였고, 강한 항밈적 효과가 도시를 가리고 있어서 우리조차도 연구를 진행하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지. 이 돌과 같은 크고 단순한 것들은 좀 더 원형을 유지한 채로 살아남긴 했지만… 우린 이 돌이 해당 문명이 멸망하기 직전에 만든 최후의 물건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들은 인간이었어. 우리보다 훨씬 더 기술적으로 진보한 이들이었겠지. 수만 년 전에, 어쩌면 수십만 년 전에 존재하던 이들일 거야. 우리가 알아낼 방법은 없지. 문화 밈복합체 전체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아서 그들에게 정확히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워. 그들의 핵심 문화 개념, 어떤 걸 만들고 어떤 걸 지지하고 고평가했는지를 다시 밝혀내거나 전파할 일은 없을 거야.

"우린 그들의 문화에 어떠한 발상이 은밀하게 들어왔고, 그들에게는 그에 방어할 수단이 없었다 생각하고 있어. 발상의 복합체. 밈복합체적/케테르급 세계멸망 시나리오 말야."

휠러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한동안 비가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만 있는다.

"…그리고 우린 그저 잊은 거고요?" 모레노가 묻는다. "다른 모두가요. 전쟁에서 살아남아, 현대 인류가 된 이들이요. 당신과 저와 다른 모두가요. 우리는 그저 뭐, 시선을 돌린 건가요? 그리곤 발걸음을 옮겨 '넘어간' 거고요?"

"그래."

모레노가 비틀거린다. 현기증이 첨가 강해지더니 잠시동안 참으려는 그녀의 의지를 이겨낸다. "수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지만 우린 그저 잊었다고요? 그걸 보여주시려고 그런 건가요? 제가 그걸 받아적길 원했고요?"

"그래." 휠러가 말한다. "그래. 받아적어. 오늘 네가 첫 번째로 배운 거니까. 인간은 무엇이든 잊을 수 있다. 어떤 건 잊어도 괜찮아. 우린 필멸의 존재이며 유한하니까. 하지만 어떤 건 기억해야 해. 기억하는 게 중요한 거야. 뭔가라도 기억하게 해줄 수 있는 걸 적어놔야 해."

모레노가 고개를 끄덕인다. 비가 거세게 내리고 있기에, 그녀는 천막 아래로 후퇴하여 책상을 사용한다. 그럼에도 비 몇 방울이 수첩에 튄다. 그녀는 한동안 몰두하여 빠르게 적어 내려간다. 그녀가 서둘러 정제되지 않은 내용을 적어 내려갔기에, 여러 곳에 X자가 그어져 있다. 그녀는 그 내용을 처음으로 읽게 될 때 자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해진다.

얼마 뒤, 휠러도 천막 아래로 들어온다.

모레노는 제 수첩을 바라보며, 휠러에게 묻는다. 마치 그 답을 아직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두 번째는 뭐죠?"

휠러가 말한다.

"해당 문화에는 재단과 같은 기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항밈학과 또한 있었을 수 있지. 만약 그랬다면, 그들의 재단과 항밈학과는, 실패한 거고.

"현실은 아주 커. 재단 또한 크지. 케테르급 개체는 매우 많고 케테르급 시나리오도 마찬가지야. 그렇기에, 어쩌면 세계멸망은 다른 부서의 문제일 수도 있어. 그리고 맞아, 당신이 고용되어 할 일에 가장 큰 부분은 기초 연구가 차지하고 있지. 실험실에서 일하는 것만큼 안전한 건 없어. 그리고 맞아, 수천 년이 지났고, 앞으로도 수천 년이 지날지도 몰라.

"하지만 어쩌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어. 어쩌면 우리의 문제일 수도 있지. 당신의 첫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우리가 아는 항밈적 전쟁이 하나 있었어. 우리가 모르는 건 여러 번 있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전쟁이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

모레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낙담하고 경악한 기색이다. 그녀에겐 그럴 권리가 있고, 휠러는 이러한 반응이 익숙하다. 당연하게도, 이건 새 항밈학과 요원 오리엔테이션의 일부분이다. 책임의 정도는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야 한다.

"항밈학과에 온 걸 환영해." 휠러가 말한다. "오늘이 당신의 첫날이야."

*

모레노는 한동안 메모를 적는다. 휠러는 조용히 기다린다. 비는 잦아들 기색이 없다.

"그렇지만 뭐죠?" 모레노가 묻는다. "그 발상이라는 거 말이에요."

"SCP-9429-A." 휠러가 말한다. "70년대에 밈복합체 자체를 격리해 냈어. 지하 2층 베가스룸에 석판 형태로 있지. 지금은 사실상 무해해. 현대 인류에게는 문화적으로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논리정합성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 이집트 상형문자를 떠올리면 될 거야. 나중에 보여줄게."

"저 이집트 상형문자 읽을 줄 알아요." 모레노가 말한다. "부활할 방법이 없다는 건가요?"

"지금 형태로는, 가능성은 매우 낮지."

모레노가 하늘 저 멀리 어딘가를 손으로 가리킨다.

휠러가 그 방향을 바라본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그저 구름 낀 하늘과 비뿐이다. "뭔가 보이는 거야? 기억제를 상당량 복용하고 나면, 일부 사람들은 이곳에서 유령을 본다고 하더라고. 그에 대한 면담 기록도 좀 남아있어. 개인적으로는 신빙성이 낮다고 생각하지만…"

"음. 유령처럼 보이진 않아요. 마치… 거식증 걸린… 카이주 같아요. 괴수요. 거미로 이루어진 기둥 같아요. 이 돌보다 크고요. 2배는 되어 보여요.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이러기도 하나요?"

"아니." 휠러는 이미 체크 리스트를 뒤지고 있다.

"저게 뭐죠?"

"나도 몰라."

"신고식의 일부가 아닌 거예요?"

"아냐. 너한텐 거짓말 안 해, 엘리. 맹세코." 모레노가 묘사한 것처럼 괴물 같은 외형을 하고 항밈학적으로 은폐된 독립체는 유순한 성정을 가졌을 확률이 거의 0에 가깝다. 지원이 필요하다. 휠러는 휴대전화에 신호가 잡히지 않는 걸 본다. 모레노의 휴대전화를 확인하는 것도 소용은 없다. 이미 아는 사항이다. 이곳에서 밖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기로 적은 메모를 통해서다. 여기 꼭대기에서 숲 쪽으로, 종이비행기라도 접어서 날려야 하나?

"몸을 구부리고 있어요. 절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모레노가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말한다. 휠러가 인지할 수 있는, 비가 오는 와중에 비가 없는 영역 같은 것도 없다. "머리는 아주 커서, 폭이 10미터는 되는 것 같아요. 몸 전체에… 손과 절지동물 같은 다리가 나 있어요. 눈도 아주 많고요. 일부는 멀어있는 상태에요. 그 위에 누군가 타고 있어요."

"뭐? 기수를 묘사해 봐."

"백인 남성, 20대 정도, 몸이 말랐어요. 청바지, 운동화, 칙칙한 갈색 머리카락에, 이발이 필요할 정도의 길이고요. 총에 맞은 적이 있어요. 사방에 피를 흩뿌리고 있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는 기색이에요. 간이 있는 위치와 목 쪽, 쇄골 바로 위 두 곳이에요. 미소 짓고 있어요. 그가… 그가 말하고 있어요. '아니. 그랬던 적은 없어.'"

휠러는 아주 짧은 순간 총상이 일부러 섬뜩하게 만들기 위한 장식인 건지, 아니면 단순히 남자가 일종의 발전된 항밈적 힘을 사용하여 치명상을 무시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한다. 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어떻게 하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힘을 사용하기 이전에 살아있을 수 있었는지도 고민한다. 하지만 훨씬 긴급한 질문이 우선이다. "그가 당신을 보고 있어?"

"네."

"나도 볼 수 있나? 내 말을 들을 수 있고?"

모레노는 얼어붙은 채로, 엄청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는 기색이다. "제가 누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지 알고 싶어해요."

"알려주지 마. 우리에 대한 정보를 그 남자가 얻어서는 안 돼, 알겠어?" 휠러는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고는 비상 신호 발신 기능을 작동한 뒤, 몸을 돌려 제41기지 중앙 건물 쪽으로 최대한 멀리 던진다. 운이 좋다면, 멀쩡하게 SCP-9429의 억제 구역 너머에 있는 숲에 떨어져서, 기동특무부대를 보내줄 것이다. "그가 누군지 물어봐."

모레노는 가만히 서있는다. 양팔이 옆구리에 딱 붙은 채로 움직이질 않는다. "누구세요?… 남자가 말하길… 말하길 거의 끝이라고 해요. 이젠 절 죽일 거래요."

"좆까라 그래. 엘리, 내 말 들어. 우린 이제 도망칠 거야. 계단을 통해 다시 내려가야 해. 돌 외곽으로 다시 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 기억을 지워줄 거야."

"움직일 수가 없어요."

휠러는 모레노의 팔 하나를 붙잡고 끌어본다. 움직일 수가 없다. "한쪽 발을 다른 발 앞으로 내밀어!"

"절 붙잡고 있어요." 모레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과호흡하기 시작한다.

휠러는 뒤로 물러나서는 상황을 살핀다. 모레노를 붙잡고 있는 거미 다리는 물론, 모레노가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는 엄청난 얼굴이나 그 위의 기수도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저기 있고, 어떠한 수준의 "실재"로는 실재하고 있다는 모레노의 말을 믿는다. 그녀는 손을 뻗어 옆구리로 가져간다. 하지만 휴대 무기는 가져오지 않았다. 이곳은 안전 기지에 있는 안전 등급 SCP니까, 그럴 이유가 없다. 게다가 이 가공의 기수가 총상쯤은 웃어넘길 수 있다는 점에서, 있었더라도 상황이 크게 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당장 눈앞에 놓인 선택지가 많지 않다. 그녀는 욕설을 내뱉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혀를 강하게 깨문다.

모레노가 비명을 지른다.

"엘리!" 휠러가 외친다. "녀석을 보지 마. 날 봐."

"할 수 없어요."

"넌 이것보다 강해."

"그렇지 않아요." 모레노가 울음을 터뜨린다.

"넌 우리 중 최고야." 휠러가 말한다. "지어내는 게 아냐. 아무도 저놈을 보지 못하는 와중에 너만이 보고 있어. 그 말은 네가 우리보다 똑똑하고 강하단 소리야. 넌 싸울 수 있어. 침입 훈련 받았잖아!"

"우릴 너무나도 증오하고 있어요." 모레노가 말한다. "생각을 할 수가 없어요. 볼 수가 없어요. 제발. 제발 그러지 마요."

휠러는 그녀가 의식을 잃게 한다. 모레노 뒤로 돌아가, 안정성을 위해 한 손을 그녀의 어깨 위에 올린 채로 귀 뒤쪽을 후려친다. 모레노는 그 자리에서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무릎을 꿇으며 앞으로 쓰러진다. 모레노의 머리가 땅과 부딪히기 직전에 휠러가 그녀를 붙잡는다.

하지만 충분히 강한 힘으로 치지 못했다. 모레노는 오직 잠깐만 의식을 잃을 뿐이다.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모레노가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마치 한 악몽에서 깨어나 다른 악몽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모레노가 휠러의 손을 꽉 붙잡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곧 모레노의 심장이 멈춘다.

휠러는 모레노의 몸을 눕히고는 CPR을 실시하나, 장비 없이는 모레노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 무전기를 충분히 멀리까지 던지지 못했다.

15분이 지나고 나서야 휠러는 포기한다.

*

곧 휠러는 마지막 계단 칸 바로 위에서, 통로 벽에 몸을 기대고 쓰러지듯 앉는다. 저 한 칸만 내려가면 SCP-9429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녀는 대체 시발 뭐라고 스스로에게 전할 메모를 남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대체 저건 뭐였지? 모레노가 한 일이라고는 녀석에 대해 생각한 것밖에 없는데 놈은 모레노를 죽였어. 그녀는 학과 모두 만큼이나 훌륭한 요원이었어. 오늘은 재능의 최대치로 유능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럼에도 충분하지가 않았어. 최고의 항밈학자만 먹어 치우는 항밈적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싸우지?

어쩌면… 어쩌면 일종의 반밈을 만들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작업 중에는 내내 차폐되어 있어야 해. 완전히 밀폐되고 자급자족이 가능하며, 생태 건축학에나 쓸법한 정도로 큰 연구실이 필요해. 바트 휴즈가 쓰곤 하던 그런 거 말이야. 마치… 제41기지 지하에 있는 그런 거.

젠장. 우린 도대체 이것과 얼마나 오랫동안 싸워오고 있던 거지?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휠러는 고개를 돌린다. 계단 저 멀리 위에, 남자가 있다. 모레노가 묘사한 기수가 말이다. 뼈만 앙상한 젊은 남성이 강한 적대감을 내비치며 인상을 쓰고 있다. 그리고 물론, 계속해서 피가 흘러나오는 총상 두 개도 있다. 남자의 신발은 피로 완전히 적셔진 상태다.

남자가 외친다. "매리언 휠러! 호수에서 있던 일의 빚을 갚아줄 때로군."

휠러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남자가 말하는 호수에서 있던 일이 뭔지 그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기수가 손짓한다. 온갖 크기의 파란 거미와 갈색 거미, 검은색 거미가 구석에서 쏟아져 나오더니, 남자의 무릎 높이까지 통로를 가득 채운다. 이윽고 남자의 어깨 너머로도 쏟아져나오며, 휠러를 향해 폭포를 이루며 달려든다. 달려드는 동안 기이하면서 유기적인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마치 젖은 이파리처럼 말이다. 수백만 마리는 되는 것 같다. 만약 휠러가 그 광경에 조금이라도 겁을 먹었다면, 거미들은 훨씬 더 효과가 있었으리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막 이 독립체에 대한 다량의 정보를 얻은 참이다. 함께 엮인 이력이 있고, 개인적으로 그녀를 싫어하며, 보아하니 인간형 구강구조를 가지고 있고… 끔찍한 상상력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미 폭포가 그녀를 덮치기까지는 고작 몇 초밖에 남지 않았고, 그 정도는 수첩에 단어 하나라도 적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시간이다. 그렇다면, 모레노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인 것이다.

휠러는 뒷걸음질 친다. 경계 밖으로.

*

비가 마침내 잦아든다. 휠러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중앙 건물로 향한다. 예정되어 있던 SCP-3125 점검 시간이 다 되었다.

다음: 사건명 증오의 적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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