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 것이 없는 세상에서

쿵 하고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자 나는 눈을 비비며 등받이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유리창 너머로 앙상한 검은빛의 나무들이 가지가 꺾이기라도 할 만큼 눈이 쌓인 채로 줄지어 서 있었다. 엔진 소리가 커지면서 나무들을 스쳐 가는 속도가 빨라졌다. 자갈 깔린 길을 지나서인지 버스의 덜컹거림은 점점 심해져 갔다. 나는 피로가 쌓이기 싫어 이를 꽉 깨물고 앞 좌석 등받이에 달린 손잡이를 붙들어 잡았다.

지금 내가 가는 목적지에 무엇이 있을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내 기억에 의존하여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했다. 수중에 있는 돈이라고는 겨우 30달러뿐이었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목적지 근처의 정류장에 도착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렇게나 멀리 있는 것을 보아하니 나의 기억이 얼추 맞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몸의 긴장이 풀려 나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까부터 코를 골던 저쪽 좌석의 남자는 용케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길이 계속되면서 차츰 익숙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눈보라. 겨울철 이 길을 지날 때마다 항상 눈이 내리곤 했다. 거의 매일 내렸던 것 같았다. 그 덕분에 도로가 미끄러워지기도 전에 푹신하고 깨끗한 눈으로 덮여 출근하기 버거웠던 적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의 추억일 뿐이다.

갑자기 멀미가 나서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렸다. 버스에 타기 전에 두통약을 하나 사 먹어야 했었다. 다행히 두통은 금방 나아졌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차창 밖을 내다봤다. 처음에 이 길을 다닐 때는 도로가 하도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멀미가 심하게 나곤 했다. 점점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니 이상한 기분이 몸 속에서 울컥거렸다. 나는 마음을 달랠 겸 가만히 좌석에 눕고 그동안 나의 행적을 돌이켜 보기로 했다.

나는 도망자였다. 그 누구보다 멀리 도망쳐 온 사람이었다. 그 전의 나는 직장을 다니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직장은 아니었다. 신뢰해도 되는 사람에게도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되는 일루미나티 같은 곳이었다. 물론 여느 기업이나 다름없이 거기서 나는 매일 정해진 업무를 반복했고, 때로는 근육에 쥐가 날 정도로 앉아 있어야 했다. 삶의 보람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애초에 원해서 들어간 곳도 아니었다. 나는 원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곳의 연구원이었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아 그들의 뜻을 따라 자연스레 취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매일이 지루하거나 빨리 시간이 흘러갔으면 바란 것은 아니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서로 고충을 털어놓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만난 연인과 시간을 나누면 힘들었던 기억을 쉽게 잊을 수 있었다. 나는 기회만 된다면 바로 일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자칫 다른 이들에게도 피해가 갈까보 두려웠다. 결국 나는 안정적인 삶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힘겨운 현실을 택하여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위험한 도망을 감행하게 된 이유도 그들과 관련이 깊다. 내가 다니던 직장 — 우리는 간단하게 "재단"이라고 불렀다. — 은 굉장히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곳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효율성만 따진 나머지 예방 가능한 사고를 자주 일으키곤 했다는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일하던 곳, 제19기지에서 큰 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염산 욕조에 담군 괴물 한 마리가 갑자기 격리 절차를 무시하더니 유리창을 가볍게 부수고 보이는 족족 박살 내기 시작했다. 그 대상에는 점심을 먹고 나오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괴성에 가까운 비명, 총성, 새빨간 피 웅덩이, 목적을 알 수 없는 질문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있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하나뿐이던 방의 창문 밖에는 지금처럼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문제의 원인이었던 유리창은 이전에 여러 번 충격을 입은 바람에 조금만 세게 쳐도 금이 갈 만한 상태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다니던 직장은 하필이면 그때도 어김없이 효율성을 우선시했다.

나는 많은 것을 잃어야만 했다.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인간관계, 그로 인하여 저 멀리 떠나버린 연인과 나를 모른 체하는 옛 동료들. 새로 얻은 것이라고는 이번 사건에 대한 책임뿐이었다. 모든 일이 다 그렇듯, 누군가 그 일에 대해 총대를 매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높으신 분들은 당연하게도 그 총대는 격리 책임자인 나에게 떠넘기기를 원했다. 며칠 동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일어서기 싫었다. 나 혼자 서 있을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무슨 일을 당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꿈이기를 바랐지만, 어디까지나 헛된 꿈이었다.

침대에 누워 생각해 보니 지난 인생에서 내가 있어야만 했던 곳이 있긴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 하나 없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재단처런 거대한 기계에서 사소한 부품 하나 빠져봐야 새로 교체만 하면 될 뿐이었다. 결국 나는 여태까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음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몸이었다. 기억해 주는 사람도 더는 없었고, 나의 가치도 바닥을 치는 판국에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이유조차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과연 가치가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버스가 정류장 앞에 멈추고 소음과 함께 뒷문을 열었다. 나는 낡은 푸른색 버스를 뒤로 한 채 눈길 위로 올라섰다. 검은색 아스팔트 도로 위로 진흙과 섞인 눈덩이가 가득했다. 어깨를 몇 바퀴 돌리고 기지개를 피자 따뜻한 입김이 새어 나왔다. 방금 내렸는데도 귓볼이 벌써 빨개져 있었다. 나는 서둘러 발길을 옮겨 숲속으로 향했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곳은 거기에 있어야 했다. 제19기지.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빽빽해지는 숲이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두려운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더 추워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박사박, 걸을 때마다 부드러운 눈 밟는 소리가 고요한 숲속을 채웠다. 한참을 걸었건만 작은 동물 한 마리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들 겨울잠에 든 것 같았다.

10분 정도를 쉬지 않고 걷자 흙으로 덮힌 작은 길을 발견하였고, 나는 그 길의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벽이 붉은색 페인트로 칠해진 작은 집과 그 옆에 펼쳐진 밭이 있었다. 눈이 덮인 밭 중앙에는 엉성하게 만든 허수아비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꽂혀 있었다. 나는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조심스레 그곳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이 2층짜리 집의 앞문과 뒷문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집주인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론가 외출했는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창문 너머로 집 안을 내다보았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시골집이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다행인가, 불행인가. 나는 줄곧 제19기지가 이 세상에는 없기를 바랐지만, 정작 정말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분명 나는 도망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이 굉장히 찝찝했다. 또 무엇보다, 허무했다. 도망쳐봤자 이곳의 나는 원래 있던 세상에서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경비원 눈을 속여 몰래 병실에서 빠져나와 기지 구석에서 격리하고 있는 '탈출구'로 향했다. 직접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그 탈출구를 넘어가면 변칙성이 없는 말 그대로 '정상적인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한 고위직 인원도 무슨 이유 때문인디 탈출구로 넘어가 아직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 그때는 무심결에 들은 말이었고 대체 누가 그런 세상으로 넘어가겠냐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넘겼었다. 그랬던 내가 그 탈출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갔다는 것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탈출구로 넘어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하면서도 끝까지 나에게 겨눈 총부리를 내리지 않았다. 과연 내가 돌아가서 내가 있어야만 할 곳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들의 강한 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나는 탈출구 너머로 천천히 한 걸음씩 걸어갔다. 아주 짧은 그 시간 동안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실제로는 수 초 동안의 기나긴 암흑 끝에 눈을 떠보니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본 적 있는 것 같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분명 처음 보는 황홀경이었다.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옆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쉬었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았다. 서럽게 찌르르 우는 풀벌레 소리만이 들려왔다. 우연의 일치로 원래 도착해야 할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도망치자마자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잡혀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글로 쓰면 어떨까는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거기 누구십니까?"

내 뒤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때문에 나는 깜짝 놀라 헛발을 내딛어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어보니 한 손으로 가방을 들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방 안에 식료품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본 나는 그가 이 집의 주인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나와 그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중에서 먼저 입을 연 쪽은 나였다.

"아… 그게, 다른 곳을 찾는다는 게 그만 여기까지 와버렸나 봅니다. 잘못 찾아온 것 같네요."

"글쎄요, 제 생각에는 맞게 오신 것 같군요. 추울 텐데 이리 들어 오시죠."

그는 열쇠로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나는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어 몇 번을 사양했지만, 눈보라가 심해지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슬그머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의 내부는 창문으로 본 것보다 더 아늑하고 따뜻했다. 그는 난로를 피우고 거실 가운데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나를 건너편의 가죽 소파에 앉도록 안내했다. 나는 그가 건네준 커피를 홀짝이며 추운 몸을 녹이고 있었다. 이런 집에서 글을 쓴다면 누구든지 대문호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커피가 참 맛있어요."

"편히 있으세요. 지금 이 눈보라가 가라앉으면 나중에 돌아갈 때 덜 추울 겁니다. 우리 통성명이나 할까요?"

"웨즐리입니다. 웨즐리 윌리엄스요."

"저는 편하게 찰스라고 부르세요. 이곳에 온 손님은 참 오랜만이네요. 아무래도 우리, 서로 같은 이유로 여기를 찾아온 것 같군요. 그 카드를 보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 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가볍게 마셨다. 나는 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런 외진 곳에 농장을 지어 혼자 사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그렇게 말했는지도 알고 싶었다. 나는 그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를 위협적으로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고, 옛 친구를 만난 것만 같았다.

"사실 아까 당신 코트 주머니로 직원 카드가 살짝 보였습니다.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알파벳 세 개. 저도 가지고 있거든요."

"카드요? 설마 이거요?"

나는 깜짝 놀라고 가슴팍에 달린 코트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보여주었다. 내가 제19기지로 발령되고 처음 발급받은 직원 카드였다. 이 하얀색 플라스틱 카드는 세월의 풍파를 맞아 여러 흠집이 나 있었지만, 카드 오른쪽에 인쇄된 젊은 나의 사진은 여전히 밝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지갑에서 나의 직원 카드와 똑같은 구조의 카드를 꺼내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고 카드 속 그의 얼굴을 관찰하였다. 아직 그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고, 눈의 생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꽤 오래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는 카드를 지갑 안에 도로 넣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제19기지. 저도 이곳이 저의 직장이었죠.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절반은 거기서 보냈을 겁니다. 제2의 고향이랄까요… 당신도 저처럼 연구원이셨겠군요."

"예. 한 8년 일했습니다. 하루하루가 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었어요. 지루하고, 따분했습니다. 게다가 저를 지탱해 주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니까 도저히 그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조차 못 느끼게 됐죠. 그래서 이곳까지 넘어왔습니다. 딱히 별거 아닌 이유 때문에요. 그나저나 여기서 저와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이거 참, 기분이 신기하네요."

그 별거 아닌 이유로 이 세상으로 넘어온 나는 그 순간에는 그저 행복했다. 해방감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재단에서 나를 붙잡으러 쫓아오지는 않을까 두려웠지만, 다행히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눈치였다. 나는 처음 당도한 숲에서 가까이 있는 도시에 정착하기로 했다. 문제는 이제 여기서 어떻게 해야 먹고살 수 있을지였다.

이곳에서 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부모는 재단에서 만난 사이였기 때문에 재단이 없는 세상인 만큼 당연히 이곳의 부모여야 할 두 사람은 서로 만나는 일도 없었다. 그 때문에 얼마 없는 현금을 아끼며 신분 없이 할 수 있는 여러 잡일을 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마치 불법체류자라도 된 느낌이었다. 나는 이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후회감이 치밀었다. 차라리 돌아갈 방법을 지금이라도 찾아볼까 생각하던 중에 생각난 곳이 바로 제19기지였다. 어쩌면 이곳에 재단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만큼 큰일이 있으셨다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믿기지 않아요, 하하. 조금 실례지만, 그쪽은 어쩌다가 이곳에 정착할 생각을 하셨나요?"

나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은 다음 그에게 예민한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그는 아무 표정 변화 없이 빈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난로 위에 놓인 앨범으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내가 앉은 소파와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앨범 안에 찰스와 그의 아내와 딸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사이좋게 웃고 있는 사진이 들어 있음은 알 수 있었다. 그는 저 사진을 찍었을 때보다 주름이 많아진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저에게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항상 즐거웠고 함께 행복을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특히, 제 아내의 검은색 눈동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답니다. 그 눈동자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에게 커피를 더 마시겠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실례를 끼치기 싫어 괜찮다고 답했다. 그는 두 머그잔을 둥근 식탁에 놓고 의자에 다시 앉아 말을 이어갔다.

"저와 아내 사이에서 딸을 하나 낳고 평범하게 지내던 중에, 아내가 갑자기 큰 병에 걸렸습니다. 저는 돈이 부족해 아내에게 필요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항상 괜찮다고만 말하며 저를 안심시켰죠. 하지만 아내의 몸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만 갔습니다."

"……"

"결국 저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자리를 급하게 알아볼 수밖에 없었고, 그때 저에게 유일하게 높은 월급을 제안해 준 곳이 바로 재단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저를 눈여겨 봐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정색에 가까웠던 그의 얼굴이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나는 심각한 분위기를 느끼고 말 없이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었다. 눈보라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불어와 창문이 거세게 흔들렸다.

"재단은 저를 아내와 만나는 것을 막았습니다. 저더러 아내와 딸은 잊고 주어진 업무에만 집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명령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만나보려고 해봤는데, 그때마다 가족을 생각해보라면서 협박했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단순한 직원 하나였던 겁니다. 결국 저는 제 행동 때문에 아내가 위험해질 거라고 생각했죠."

"그럼 지금 아내분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편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임종은 끝내 못 봤습니다."

"……"

나는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그만두었을 이야기를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게 끝내려고 애쓰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딸아이는 어디론가 맡겨졌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온 도시를 찾아봤는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후로 여전히 재단을 다니면서 저는 아내와 딸아이 생각을 떨쳐내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게 감정을 거의 못 느낄 수준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이 된 셈이었죠."

나는 그제야 왜 그가 감정이 없는 듯한 행동을 고집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무표정한 얼굴 속 그림자가 한층 더 깊어졌다는 것은 분명했다. 어쩌면 그의 감정은 이곳으로 온 후로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그 사실을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결국 높은 자리까지 올라오고 많은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지만, 마음 한쪽에는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친구들도 하나둘씩 떠나가고 저에게 주어진 권한 또한 늙었다는 이유로 줄어들고 있었죠. 그때 저도 당신처럼 그 세상에 있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더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겁니다. 갑자기 막심한 후회감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 순간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 쓸쓸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갈 필요가 없었다고요.

"찰스 씨도 저와 비슷한 이유로 탈출구로 넘어오셨군요. 그것도 우연의 일치 덕분에 말이죠."

"네, 다행히도 다른 곳으로 넘어왔죠. 그때는 아무 걱정 없이 기뻤습니다. 저의 바람대로 재단이 없는 세상에 도착했으니까요. 그러나 현실은 힘들었습니다. 분명 같은 세상이었으나 무언가 큰 것이 달랐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저나 당신 같은 사람들은 알아채는…"

"그게 바로 '변칙성'이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로 속 불길은 이글거리며 화염을 토하여 장작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의 가족사진은 아지랑이 때문에 형체가 일그러지고 있었다. 앨범은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난로 모서리에 세워져 있었다. 그는 그것이 신경 쓰였는지 나에게 실례를 구하고 앨범을 안쪽으로 놓으려고 움직였다.

"제19기지가 있던 자리에 농장은 세운 데에는 이유가 있으시겠네요. 당신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 믿으셨던 거죠."

"맞습니다. 이곳을 찾을 또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했거든요. 저처럼 재단에서 일했던 사람 말이죠. 또 오래전부터 가족과 함께 작은 밭을 일구며 살기를 원하기도 했고요. 예전에는 제19기지 대신 이 커다란 땅에 농장을 지으면 어떨까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머물면서 평소에 어떤 느낌이 드셨나요?"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허탈했죠. 재단이 없는 세상을 바라여 여기까지 왔는데 사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거든요. 이 세상에서의 저와 제 가족도 찾을 수 없었고. 오히려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때로는 그냥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모든 것을 잃고 아무 생각 없이 넘어왔죠.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 봐야 여기서 저는 이방인이었어요. 재단도, 연합도, 뱀의 손도, 원더테인먼트 박사도… 제가 아는 모든 것은 모두 없었어요. 게다가 이 세상의 저는 아예 없는 사람이더라고요. 애초에 제 부모님이 재단에서 만난 사이였으니 그럴 만도 하죠."

나와 그는 둘 다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문뜩 생각난 질문을 그에게 말해봤다.

"이제 무엇을 할 생각이신가요? 특별한 계획이라든가…"

"글쎄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이 작은 농장을 가꾸면서 조용히 살고 있죠. 하지만 언젠가는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어도, 왜 내가 이곳까지 왔는지 그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는 이윽고 나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웨즐리 씨,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싶으십니까?"

"저는… 저는 글을 쓰고 싶어요. 평소에 글 쓰는 게 취미기도 했고, 재단에서 겪은 이야기가 많아서요. 목 꺾는 조각상이라든가, 죽지 않는 도마뱀, 얼굴 보면 죽는 괴물, 소재가 참 여러 가지 있죠.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좋아해 준다면 좋겠어요."

나는 말을 마치고 쑥스러워서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그는 창밖을 보고 말했다.

"분명 당신이 이 세상으로 넘어온 데에는 아까 말했듯이 이유가 있어서일 겁니다. 그 이유는 웨즐리 씨 자신만이 알고 있겠죠. 자기 자신을 믿어 보세요."

눈보라가 완전히 잦아들고 어디선가 새의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잠에 들지 않은 새인 모양이었다. 맑은 햇빛이 흐린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창문을 통해 집 안을 비추었다. 우리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그저 그 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인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슬슬 버스가 올 시간이라서요. 방금 해주신 말씀은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정말 고마웠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이야기를 나누니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다행이군요. 조심해서 가세요. 저쪽으로 쭉 걸어가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기 전에 드릴 것이 있습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면서 집 내부를 짧게나마 다시 둘러보았다. 아까보다 훨씬 넓어진 느낌이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짓고 바구니에 무언가를 담고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 안에는 여러 음식이 들어 있었다. 나는 고마운 마음에 밝게 웃으며 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잘 지내세요, 찰스. 나중에 만날 수 있다면 또 만납시다. 그리고 언젠가 가족분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랄게요."

"하하. 찰스 기어스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웨즐리. 앨리슨과 만나게 되면 꼭 알려드리죠."

그때 그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는 것 같았다. 나는 그와 악수하고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햇빛 덕분에 들판을 덮은 눈이 녹아내린 것 같았다. 겨울 공기가 무척이나 맑고 깨끗했다.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중고로 산 노트북이 또 말썽을 피우고 있었다. 버퍼링이 너무 느린 나머지 나는 답답한 마음에 모니터를 툭 치며 컴퓨터에 대한 불평을 쏟아냈다. 그제야 컴퓨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형편이 좋아지면 컴퓨터를 새로 하나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으로 연재하는 나의 공포 소설은 차츰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재단에서 겪은 일을 각색하고 살을 덧대어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 이야기 전개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한동안 벌이 걱정을 덜어낼 수 있었다. 어쩌면은 좋은 출판사를 만나 책을 내게 될지도 모른다. 쿨러를 바쁘게 돌리고 있는 노트북은 그런 주인의 행복한 고민을 모르는 듯 예전보다 작동이 더 느려졌다.

나는 기지개를 피고 환기나 할 겸 창문을 열었다. 초여름 새벽의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저 멀리 날아갔다. 그렇게나 춥던 겨울이 다 지나가고 어느새 봄을 거쳐 새싹이 돋아나는 여름이 찾아왔다. 그 후로 아직 그의 집을 찾아가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나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 번 찾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올해는 그의 밭에 무엇이 심겨 있을지도 궁금했다.

오늘 써야 할 분량은 전부 다 썼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슬슬 잠잘 시간이었다. 나는 잠들기 전에 잠시 웹 서핑을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출시한 휴대폰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저번 제품보다 특별한 기능이 더 많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광고를 치우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구글에서 흥미로운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창백한 색의 콘크리트 조각상이 벽에 손을 대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예전에 관리했던 한 SCP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았다. 다행히 이 조각상은 사람 목을 꺾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불현듯 저번에 그와 만났을 때 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커서를 내리며 다른 사람들의 크리피파스타를 둘러보다가 재밌는 생각이 났다.

'내가 재단에서 겪은 일을 각색 없이, 아예 진지하게 보고서 형식으로 올려보면 어떨까?'

갑자기 의욕이 솟아나자 나는 과거의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 봤던 SCP의 문서를 칸에 정성스럽게 적기 시작했다. 너무 급하게 썼는지 중간마다 오타가 몇 군데 있었고, 빠뜨린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글의 내용이 주는 오싹함은 여전했다.

오랜만에 진심으로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기롭게 생각나는 대로 모든 글을 전부 쓰기 시작했다. 꼭두새벽에 이런 진지한 보고서 형식의 괴담을 읽으면 더 무섭고 진짜 같다고 느끼게 되리라 생각했다. 글을 전부 완성하자 나는 업로드 보튼을 누르고 기지개를 폈다.

재단은 이 세상에 없지만, 흔적조차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그처럼 재단을 기억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는 이상 재단은 어디에나 있었다. 물론 창작물 속의 재단이 사형수를 실험체로 쓰는 실존 단체가 아니기는 했지만 말이다.

업로드가 완료됐다는 창이 뜨자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너무 밤을 샜는지 졸음이 쏟아져 왔다. 나는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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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즐리 윌리엄스 a.k.a. Moto42Moto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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