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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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동의 일기장은 낡고 빛바랜 푸른색이다. 속지도 오래되고 메말라 쓰기가 버겁다. 종이가 손에 바스락거리며 부딪혀 와 반대편으로 쓰러지면 그의 글씨가 보인다. 그의 필체는 단정하고 또 맑다.

R은 사흘 전에 이 일기장을 넘겨받았다. 그의 물건 중에 재단이 활용할 수 있는 물품들은 모두 제외하고 남은 것이 이것이다. R은 고인의 유품을 받기가 어색하기만 하다. 김수동은 사흘 전에 죽었다. 의약품과 식량을 구하러 4층 탕비실로 가려다 시체 사이로 굴러떨어졌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김수동의 일기가 꺼려진다. 이성을 잃은 채 썩어가는 그의 껍질이 아직 저 위에 있는데 지성과 감정으로 충만한 그의 치부와 투정과 사상과 생각을 접하기는 무언가 그의 싱싱한 뇌를 받는 듯해 마뜩잖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 2층 B212호로… 3시 15분에 윤리위원회가 김수동의 행적을 두고 논의를 할 것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행적을 무엇 하러 왈가왈부하나 싶지만 그는 그 치들의 작고 차가운 눈동자 사이에서 아무런 발언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 R은 그들의 말은 차갑고 날카로울 뿐 진실에는 어떠한 자상도 내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정말로 위험하다는 것도 역시 안다. 결국 김수동은 재평가되어 재확립되고 재생성되어 재단의 전당에 안치되거나 말소될 것이다. 누구나 겪을 일이다. 적어도 R은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한다.

시작까지 40분 전… 그는 지하 4층 계단 위에 서 있다. 엘리베이터를 가동할 전기를 줄여 다른 유용한, 이를테면 격리를 지키는 일에 써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인원은 계단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왠지 사람이 적다. 상당히 적다. 벌써 B212호로 다 몰려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자리에서 혹시 모를 위협을 경계하는 공 벌레처럼 문을 단단히 붙잡고 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인데, R은 전자가 두렵다. 가장 친했던 친구의 거취를 자신이 없는 곳에서 누군가가 정해버렸을지도 모른단 불안감이 그를 엄습한다.

지하 3층에 가까워졌을 때 R은 문득 B212호의 논의에서 신의 심판을 연상한다. 그렇다고 하면 사람들이 돌을 던지겠지… 그는 남은 인원들이 윤리위원회를 언급하는 억양을 기억한다. 기억 속 잔향에서 그 낱말에 감도는 흩어지지 않은 작은 감정을 읽어낸다. 두려움… 공포… 분노… 심판… 죽어서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결정하는 시간… B212호… R은 이마에서 땀을 훔친다. 심판… R은 김수동이 어디에 갈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재단을 위해 열심히 일하다 죽었으니 분명 천국행이겠지… 그러나 요즈음 천국이 그렇게 유들유들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제만 해도 재단을 위해 일해온 건실한 청년 셋이 008에 감염되었단 이유로 말소된 것을 안다. 말소… 마침내 그러한 일이 그의 친구에게도 닥치자 그는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만 같다. 그들을 뻔히 쳐다보며 그는 태연스럽게 보고서에 무언갈 적지 않았던가. 평화롭게 삶을 영위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 보고서에 무얼 적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전당… 천당… 그는 전당과 말소를 가르는 기준을 알 수 없다.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윤리위원회만이 그 답을 알리라.

윤리위원회… R은 그 화려하고 기름진 발음에서 B212호실 강당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신도와 포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탐욕스러운 무정형의 신을 느낀다. 그는 이때 이 신은 결코 SCP-343, 또는 야훼와 모든 이름있는 신 같은 존재가 아님을 확신한다. 그러한 이들은 이미 이곳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곳 아래에서는, 신은 식량이고 약이자 규율이다. 누군가가 러시아를 두고 '이 나라에서는 지각 있는 이들과 정신 나간 이들과 좌절한 이들이 한 몸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R은 이것이 신에게 붙여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칭호라고 생각한다. 러시아와 신의 차이란 그때의 러시아엔 시체가 없었다는 점이다. 하하하. R은 자기가 한 농담에 소리 내 웃어본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시체의 울음소리와 다름이 없다고, 그는 생각한다. R은 문득 자신의 웃음소리와 저 위의 시체와 뜯어먹힌 신과 목숨을 부지한 신과 아래의 신과 B212호의 신이 다르지 않은 듯한 생각이 든다. 모두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을 R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히 느끼고 있다. 삶.

B212호로… R은 계속 걷는다.

R은 2층 복도로 이어지는 거대하고 차가운 금속 문을 슬쩍 밀어본다. 냉기가 그의 손을 저릿하게 마사지하고 그의 뼈를 타고 올라가 심장께를 두드리며 코를 알싸하게 지나가고 마침내 뇌에 이른다. 그는 전기가 이런 식으로 지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전기가 지나가고, 그의 왼쪽이 마비되고, 마치 김수동이 죽은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처럼… 그는 자세를 고쳐 왼손으로 김수동의 일기장을 들고 오른손으로 문을 연다. 김수동에 대한 미안함을 이렇게라도 표출하고 싶어서다. 그러나 그는 사실 김수동에 대해 자기가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른다.

B212호는 지하 2층의 정 중앙에 위치해 있다. 문은 4개이고 원격으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문을 나가서 바로 비상계단이 보인다. 비상계단은 윤리위원회 소속 요원들이 지키고 있다. 계단은 모두에게나 열려있다.

R의 시야에 웬 비실대는 요원 하나가 불쑥 굴러들어온다. 아니다. 가까이서 보니 비실댄다기보다는 건강하고 힘 있어 보인다. R보다도 더 근육질일듯하다. 그런데 왜 그는 이 남자를 비실댄다고 여겼을까. 그는 무심결에 나뭇결이 베일 듯이 날카롭게 선 문을 바라본다. B212호의 문이다. 보기만 해도 이질에 걸린 병사처럼 기운을 쫙 빼게 할 법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R은 무심결에 김수동의 일기장을 꽉 움켜쥔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강력하고… 날카롭지만… 비실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그가 문에서 시선을 돌리자 소리는 누군가가 볼륨을 낮춘 듯 순식간에 잦아든다. R은 문득 안에서 흐느끼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
- 오늘의 논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요원은 물끄러미 R을 내려다보다가 대답한다.
- 샐리 박사요. 샐 박사의 인격이 제어를 뚫고 나오려 하길래 그녀가 버틸 수 있을 동안 논의를 열도록 한 거요.
그는 말하는 동안 흐르는 이마의 땀을 훔친다. R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저 안에 들어간 이들의 처지를 설명하면서도 땀을 훔쳤을지 궁금하다. 혹은, 그 자신이 저 안에 들어갔을 때에도 땀을 훔치며 윤리위원회 앞에서 변명할지도 궁금하다. 결국엔 그는 자기 일도 영원한 타인의 처지처럼 생각하며 무정히 말할 것이다. R은 요원이 왜 비실대는 것처럼 느껴졌는지 알 것만 같다.

논의 시작부터 29분 전… 요원이 시야 밖으로 굴러떨어지고, R은 찌르는 듯한 문의 시선을 피해 그렇게 꺼려지던 김수동의 일기장을 편다.

김수동의 일기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 사흘 전부터 시작한다. 그가 처음으로 SCP-███-KO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낸 날이다. 그때의 감동이 얼마나 그에게 크고 거대했는지는 그의 필체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R은 일기를 읽어내리다 말고 눈을 감고 그때의 김수동을 상상해본다. 마음속 망막에 그의 기뻐하는 얼굴이 맺힌다. 작은 일에도 기뻐하는 사람이었으니. 그런 그가 그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두려워했을까. R은 바로 사흘 뒤 기록으로 건너뛴다. 글자보다 먼저 망막에 맺히는 그의 필체가 심히 요란하고 또 가늘다.

"두 개의 메일이 내 메일함에 꽂혀 있다. 무엇 하나를 고르기 어렵다. 나는 둘 다 내게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을 안다. 다만 순서의 차이이리라. 이 일기를 쓰고 있는 와중에 건너편 김 박사가 책상에 고개를 묻고 울고 있다. 괜찮냐고 묻자 대답 없이 그의 아이 이름을 악을 쓰듯이 외칠 뿐이다… 나는 그것이 하나의 대답이 되리란 것을 알고 있다. 그 역시 알 것이다.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아 두 메일중하나를 선뜻 고르지 못하고 앉아 있다. 두 (제목없음) 사이에서 압사당하는 기분이다. 무의미한 폭력의 연속 사이에서 나는 하나의 폭력을 골라야 한다."

R은 김수동이 결국 어떤 메일을 먼저 읽었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그는 김수동이 여백에 "어머니는 지금 어디에서 누굴 먹고 계실까? 아니다, 그럴 상태가 아니실 수도 있다. 그렇든 그렇지 아니하든, 밖은 그래도 지옥임이 틀림없다."라고 적어둔 것을 본다.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니. 그는 새삼 충격을 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발끝에서 전해져오는 고동은 숨길 수 없다.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니. R은 계속 읽는다.

"관리관 노래마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나는 그녀를 알지 못한다. 이전에 한 번쯤 대화를 나누었을까. 사람들의 평판은 좋았다. 유쾌한 사람이라고 했다. 많은 사람이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R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죽음이 마냥 슬프지는 않다. 그녀가 죽었다고 해서 우리의 상황이 더 나빠지거나 더 좋아질 리는 없을 테니까."

R도 사태가 벌어지고 2주 뒤에 그레이스 노래마인이 죽었다는 소문이 돈 것을 기억한다. 그는 그녀를 떠올린다. 노래마인…그녀를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또 그리워하고 추억하는 사람은… R은 눈에 선명히 떠오르는 그녀의 인영을 마음 한가운데 묻었다. 그녀가 행방불명된 후 일주일 뒤의 일이었다. 죽음처럼 찾아온 사랑이었다. 그게 사랑임을 R은 그녀가 사라진 다음에 깨달았고, 그 후로 그는 무덤에서 시체처럼 일어나는 그녀를 없애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계속 총질을 했더래요. 그녀는 시체처럼 계속 일어나 그에게로 안겨 와 계속 지껄였더래요. '내가 저밖에 있단다, R. 내가 저밖에 있고,' 그러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더래요. 왜냐하면 그녀를 짝사랑했던 얼간이가 그녀의 이마에 구멍을 뚫어버렸기 때문이었죠! R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환영에 정신을 잃을 듯이 몸을 떨다가 정신을 차린다. 아니다, 아무 일도 없다. 그는 다시 김수동에게, 그리고 노래마인에게 정신의 화살을 옮긴다. 정말로 죽었건 아니건, 그녀는 마치 허상처럼 사라졌고 윤리위원회가 그 자리를 꿰찼다. 김수동이 틀렸다. 그녀의 부재는 새로운 신이 이곳에 도래하게 했다. 그게 나쁜 일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 이번엔 꽤 오래 걸리는군.
시야 저 너머에서 굴러떨어져 으스러진 요원의 목소리가 지껄이고 있다.

"미주가 죽었다. 4층이었나, 5층이었나 하는 곳에서 상비품을 구하러 가다 죽었다고 했다. 시체 사이로 굴러떨어졌다고 했다. 끔찍하다. 화가 난다. 내가 어쩌면 구할 수 있었을 텐데… 갑자기 모든 것에 적막이 감돌고 산산이 부수고픈 욕망이 미주와 함께 보냈던 밤들의 성욕보다 강하게 일어난다. 그와 동시에 힘 잃은 노인의 허리마냥 으스러지듯이 공포감이 일어난다. 두려움은 이내 끔찍하게 변해버린 미주의 모습을, 그리고 그녀보다 더 흉측한 나의 정신을 가리킨다.

미주는 김수동의 애인이었다. R은 그녀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김수동의 면면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둘 사이에 결혼 이야기가 오갔다는 사실 역시 알았다.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둘은 결혼했을 터였다. 하지만 봄이 오고 그녀는 죽었다. 죽어서 시체가 되었다. 그는 김수동이 그때부터 말수가 부쩍 적어진 것을 기억한다. 그는 김수동의 모습을 다시 뇌 언저리 어딘가에서 긁어낸다. 다쳤군… 다친 이리처럼 돌아다니던 김수동을 그는 어떻게 도와줘야 할 수 있었을까. '밀림이 파괴되는 동안 당신은 무얼 했지.' R은 환영 속에서 환영을 뛰어넘기 위해 제자리를 돈다. '무얼 했지.'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밀림은 나 자신이고 나는 또다시 그것이 불타는 꼴을 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나는 타버린 밀림이다.' 환영은 죽음처럼 다가온다.

"마침내 날은 다가오고 나는 죽은 미주에 대한 잡념을 떨쳐낼 수가 없다. '방책이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나는 결국 자연사 이외의 방식으로는 죽을 수가 없었다. 적탄에 쓰려져 죽는 나의 죽음까지도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1 여태껏 변칙을 연구하면서도 변칙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이제 알겠다. 시대가 변칙이다. 이 시대가 변칙이고 이 좁디좁은 곳에 갇혀 정신이 온전한 자들이 변칙이다. 우리가 여태까지 느꼈던 모든 변칙은 변칙이 아님을 모든 것을 잃어가면서 느끼고 있다. 이제 날은 다시 날로 오고 나는 곧 살 것이다."

김수동이 죽기 하루 전 일기다. 환영을 떨쳐내려 눈을 껌벅이며 R은 일기장을 덮으면서 마른 침을 꿀꺽 삼킨다. 정말 털끝만치라도 생각해보지 않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지 않을 가능성이었는데… 그의 시야로 묵직하게 날이 선 문이 들어온다. 마치 망막이 찔려 아무것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게 된 것만 같다. 사취를 풍기는 요원이 뭐라고 말하자,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누군가가 나온다.
- 이 좆같은 고양이 새끼야! 샐은 안돼… 샐은.. 샐은 안된다고…
아아. R은 낮게 신음한다. 아아. 방책이 없는 세상에서, 목숨이 살아남아 또다시 방책을 찾는다… 목숨을 밀어냄으로써 목숨을 살리는 일이 검은 신이 찾아낸 방책임을 R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생생히 느끼고 있다.
-안돼…
박사는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다. 한참을 못 봤는데, 푸석푸석하고 갈라진 머릿결이 R의 시야에 들어온다. 다쳤군… 샐리의 발악을 보며 R은 사태 이전의 박사를 기억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R 그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박사가 요원 둘에게 끌려가며 몸부림치다 R과 눈이 마주친다.
-…
둘의 시선이 맞닿는다. 시선이 맞닿는 것보단 망막과 망막이 직접 맞닿는 것 같다. R은 그녀의 시선 안에 무언가가 비틀거리고 있는 것만 같다. 비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R은 문득 비틀거리고 있는 저자가 누구인지 알 것만 같다. 저자는 샐이다. 아니다, 김수동이다. 내 망막을 건드리고 있는 그녀는 미주다. 순식간에 샐리와 미주는 같은 사람이 되고 샐은 김수동과 합쳐져 재평가되어 재확립되고 재생성되어 다른 누군가가 되어버린다. 밤이 깊다. 밤이 깊어 변칙은 그 안에 숨고 온갖 살아있는 자와 죽어있는 자들이 서로를 껴안고 밤새도록 운다. 밤이 육체를 입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그는 숨을 쉴 수 있을 것만 같다. 멀어져가는 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B212호실에 들어가기 전 떠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어떤 청년 하나를 생각해낸다. 그 눈의 진동 속에서 윤리위원회는 무엇을 보았길래 그에게 말소를 판결했을까. 판결이라는 말도 맞지는 않을 거라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집행. 집행이라는 말이 훨씬 옳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김수동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제 3분 29초. 곧 저 문이 열리고 죽어 없어진 김수동 대신 그가 들어가 그를 변호할 것이다. 이제 3분 27초. 그는 이 순간 김수동이 그의 친구가 아니었더라면 한다. 아니, 아예 그 자신이 김수동이었으면 한다. 그가 김수동을 변호하기엔 그는 너무 나약하고 힘이 없다. 그는 아예 자기가 신이었더라면 한다. 친구를 사람들이 기억하게 만들었으면 한다. 윤리위원회에 빌붙었더라면… 이제 2분 58초.

그는 갑작스레 너무 두렵다. 문이 그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혹하고 냉정한 문짝의 시선은 신의 그것과 닮아있다. 그는 머리 안에서 변칙이라는 단어가 떠도는 것을 막을 자신이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입 밖에 나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변칙이 어디 있는가. 변칙이 어디에 있길래 이 모든 사태 안에서 노곤히 숙면이나 취하고 있는가, 했는데 아니었다. 변칙은 안에 있었다. 변칙, 그 무정형의 검은 신이 바로 변칙이었다. 변칙이 죽음 안에서 살아남아 삶을 죽이고 있었다. 진짜 변칙은 008이나 시체가 아니었다. 변칙은 윤리위원회였고, 살아남아 실권을 쥔 사람들이었고, 실권 안에서 편하게 숙면을 취하려하는 사람들이었고, 말소되었단 표식 안 괄호에 숨어 다른 사람들을 내쫓으려 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변칙은 삶이었다.

R은 벤치에서 일어나 윤리위원회의 '모두에게 열려 있는 비상계단'으로 올라간다. 그는 이미 백골이 되어 버린 요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게 옳은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어야만 한다. 그는 계속해서 올라간다. 그의 발자국 소리가 그의 머리를 울리고 지나간다. 지하 1층, 1층, 지키고 있는 요원들은 그를 잡지 않는다. 신의 계단을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그는 자신이 신이라고 착각하지만, 망막에 다시금 샐리의 눈동자가 와닿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린다. 그는 김수동을 다시 보고싶다. 김수동과 미주가 보고싶다. 그들의 결혼식에 꼭 가보고 싶다. 그들의 자식도 보고 싶다. 2층, 3층, 정복되지 않은 변칙들이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생취(生臭)가 강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삶을 반증하는 신음이 곳곳에 널려있다. 그는 문득 노래마인을 생각한다. 이마에 구멍이 뚫려 밝게 웃는 그녀의 인영을 떠올린다. 그녀의 부재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의 생을 생각한다. 김수동의 부재… R은 4층 위의 배기관 위에 올라선다. 한참을 기어가자 김수동의 일기장과 똑같은 색으로 얼룩진 탕비실의 문이 보인다.
-드디어.
그는 어느새 몰려든 그의 친지들을 바라본다. R은 관중들 사이의 한 사람에 시선이 꽂힌다.
-김수동.
R은 이제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김수동이 저곳에 있기 때문이다.

김수동은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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