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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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이른 새벽이다. 눈을 뜬 바다의 정면에 이소의 얼굴이 있다. 숨이 막힐 듯한, 손을 맞잡는 듯한 행복감이 바다에게 감겨들어버렸다.

그 날과도 같은 밤이다. 함께 보내는 두 번째 밤. 다시는 바닥에서 따로 자지 않을 작정으로 이소가 바다에게 안겼던 그 날. 몇 개월만에 느낀 순수한 행복에 울어버렸던. 그마저도 장난스레 살결을 비비면서 즐거워했던. 어느새 시간이 흘러 헤어나오지 못해버린. 지금까지 흘러온 시간들이었다.

바다는 이소에게 한 뼘 더 다가갔다. 풋풋한 체취가 느껴진다. 눈을 감고, 머리를 이소에게 더 기댄다. 가슴의 한복판에 이마가 닿았다. 박동, 박동은 어디에 있을까. 바다는 자신의 박동을 이소에게 전해보며 다시 한 뼘 더 다가갔다. 누구에게서 난 건지 모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녀는 감싸주지 않았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지는 오래지만, 오늘따라 출국객이 많은지 무안국제공항 내부는 훈훈했다. 바다와 이소는 로비 한가운데에서 찐한 포옹을 마치고 떨어진 참이었다.

"안 가면 안돼?"

"출장도 어쨌든 회사 생활의 일종인걸! 두 달만 참으면 휴가 나오고 오래 보니간 기다려!"

노래하는 말투와 반짝이는 눈에 바다는 한 번 더 이소의 품으로 쓰러졌다. 바다가 등을 쓰다듬어주자 이소도 등을 쓰다듬어줬다.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차가운 안내음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거기에 리듬을 맞추며 이소는 바다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쉬워하는 바다에게 이소가 손을 흔들어주며 말했다.

"나중에 봐, 아쿠아마린!"

아쉬워하던 얼굴은 굳어버렸다.

"언니!"

"응?"

"바다라고 불러주라."

이소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고민하다가 말을 온통 덮어버린 밝은 아우라로 대답했다.

"아쿠아마린이 재밌는걸!"

이소가 출국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다들 이소가 탄 비행기를 타러 간 듯 공항 로비는 드문드문해지고 튀는 머리색의 바다가 유독 덩그러니 남겨졌다. 아쿠아마린으로 남겨진 거 같아 바다는 속이 차가워졌다. 이게 허무해서 그런 건지, 그저 순간의 불안감일지는, 몇 주 더 지켜봐야 할 일이리라.

그러니 밖이 더 추워도 버텨봐야겠다.


나람이 자기 사무실의 손잡이를 잡았을 때 위화감과 악수를 했다. 콜라가 들어있는 왼쪽 바지 주머니에서부터 한기가 몸통에 가득 차올랐다. 분명 문을 잠그고 나왔는데 문이 따져있다. 왼쪽 소맷부리에 박음질한 메스를 꺼내 손에 쥐고 나람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여차하면 상대 목을 그어버릴 생각이었던 왼쪽 팔은, 문틈으로 보이는 연푸른색 머리카락을 보고 욕지거리와 함께 내려갔다.

파이프 의자 위에 아쿠아마린이 쓰러져 있었다. 의자 옆에는 캔맥주가 주인의 모습대로 찌그러져 널브러져 있었다.

"환희야아아앙."

본명까지 튀어나온 거 보니 여기 오기 전에도 한 잔 했나보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업무 시간에 술 마셔도 되요?"

"오늘 비번이지롱!"

"그럼 숙소 가서 처 자요, 좀."

나람은 바닥의 빈 캔들을 주워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이미 들어있던 캔 때문에 양철 부딪치는 소리가 사무실에 처량하게 울렸다. 한 차례의 소음이 줄어들자 시체 다루는 장소 특유의 냉담함이 가라앉아 살풍경해졌다. 그제서야 나람은 마음 한 구석의 딱한 생각을 발견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술기운인지 아쿠아마린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풀린 눈과 홍조 띈 얼굴, 늘어진 몸이 무언가가 사라진 사람처럼 보였다. 아쿠아마린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팔꿈치를 무릎에 대어 몸을 지탱하고 말했다.

"환희야."

말 딱 한 마디에 나람은 사뭇 진지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애초에 소문난 주당인 아쿠아마린이 취해서 온 상황부터가 별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본명을 두 번이나 부른 것도 심상치 않았다. 처음은 취기에 장난스레 부르더라도, 두 번이나 그런 건 회사에서 씌웠던 가식을 모두 내려놓으리란 행위였다. 재단의 아쿠아마린이 아닌, 환희의 누나인 바다로서 얘기한다는 선언이었다.

"왜요, 누나?"

"너 내 여친보고 뭐라 하지 않았니?"

"ㅈ.. 이소 누나요? 그거 누나랑 사귀기 전에 얘기한 거긴 한데…"

"뭐라 했는지 기억 나?"

환희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재단에서 머리와 뇌를 갈라보고 싶은 사람이 딱 한 명 있다면 그런 사람이라고 했죠."

바다의 입술이 수평으로 되었다. 환희를 바라보던 눈도 초점을 잃었다. 역시 괜히 말했나란 생각이 들 무렵, 장난기 섞인 바다의 눈이 환희를 마주했다. 하지만 입은 여전히 수평이었다.

"그럼 진짜 해볼래?"

어안이 벙벙한 침묵. 말의 느낌에 더욱 살벌해진 침묵을 환희는 애써 깨뜨려보려 말했다.

"둘이 싸웠어요?"

떨리진 않았지만, 충분히 당황스러웠던 목소리에 바다는 만족한 듯이 입꼬리를 누그러뜨렸다. 가볍게 튀어나온 코웃음과 함께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안 싸웠어. 그냥, 어제 언니가 돌아가고 나니까 뭔가 궁금해져서."

"뭐길래 죽일 생각까지 해요?"

어떻게든 장난스레 내뱉어본 말이었다. 그렇지만 대답의 무미건조함은 안 그래도 무거운 시체 관리소의 분위기를 더욱 낮게 깔리어 술렁이게 만들었다.

"날 정말 사랑하는 걸까?"


아쿠아마린의 얘기에 글라스 박사는 노트북 속에서 무심하게 말했다.

"그렇죠, 사랑이란 감정은 아무래도 복잡하니깐요. 가뜩이나 이런 데에선 사랑과 관련된 연구도 힘들 상황인데 즈소 씨는 좋은 표본이지 않을까 싶네요."

글라스 박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즈소가 만난지 얼마 안 됐을 때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남 속도 모르고 좋은 동생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었던 건지, 심리학 관련자라서 붙여두면 재밌다고 생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자로는 잘 맞아서 매주 학술적으로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남을 함부로 연구 표본으로 쓰지 말아요. 저도 당사자라 기분 나빠요."

"아하, 그랬죠. 그러면 좋은 표본으로 아쿠아마린 씨도 추가할게요."

"저기요."

"어떻게 보면 아쿠아마린 씨가 더 특이한 상황이에요. 즈소 씨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죠?"

아쿠아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린 씨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라고 하면 망설임없이 당길 사람이에요. 멈추게 할 감정이 없으니까."

아쿠아마린은 애써 웃어보였다. 진실이 잔혹해서 나오는 목소리의 떨림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적합한 무대에서 파고들어야할 주제 앞에서, 바다는 두드려야만 했다.

"이소 언니는 긍정적인 생각만 하죠. 사랑도 긍정적인 생각일 텐데, 왜 지금 우리의 결론은 색다르게 될까요?"

"연인이라고 꽤나 순한 표현을 쓰는군요. 즈소 씨는 더 극단적인 사례죠. 부정적인 생각이 삭제됐다고 보는 편이 더 맞습니다. 부정과 긍정은 상대적이죠. 부정이 없으면 긍정도 없고, 긍정이 있어야 부정이 있는 법이죠. 하나만 없어도 다른 하나는 의미가 없어요. 즈소 씨가 보이는 행동이 절대적으로 보기에 기뻐하기만 할 사람이지만, 넓게 본다면 아무것도 못 느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즈소 씨와의 사랑은 불행할 수 밖에 없어요."

"그 때는 왜 그렇게 설명 안 해놨어요?"

"그걸 그냥 다르게 적어놓은 거예요. 지금보다 좀 마일드하게 적어놓기도 했고요. 아쿠아마린 씨의 얘기를 듣고 더 극단적으로 살짝 틀었을 뿐이고."

"뭐, 저도 동의하는 바이긴 해요. 하지만 분명 거기서 끝날 일이 아니에요. 어찌됐든 긍정적인 감정은 느낀다는 건 사실이잖아요. 그리고 사랑은 긍정적인 감정이죠. 그런데 왜…?"

바다는 말을 삼켰다. 자신이 쏟아내린 애정이 웃는 얼굴을 적시고 안에 스며들면, 그대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느낌을, 박사에게 전해줄 자신이 없었다. 아직 글라스 박사는 아쿠아마린의 본명을 몰랐다. 내밀한 기쁨도, 말문을 막게 한 허무함도, 완전하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이 말에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버린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뭐가 말이죠?"

"사랑은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에요."

"뭐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감정의 정점에 사랑이 있다고 믿죠. 하지만 사랑을 되찾기 위해 일부러 질투를 불러일으키려는 흔한 클리셰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사랑은 긍정적인 걸로만 남은 감정이 아니에요. 누군가를 향한 애정, 호의, 그런 긍정적인 감정에 따르는 질투, 소유욕, 연인이 없을 때의 고독 등등의 것들이 시너지를 일으키면 사랑이라는 거대한 감정이 된다고 봅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감정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모두가 행복한 연애를 했겠죠."

침묵.

"그래서 즈소 씨가 사랑이 가능하느냐는 질문에 저는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즈소 씨는 질투도 하지 않아요. 무작정 소유하려고 하지도 않죠. 무엇보다 연인이 없다고 해도 고독이란 감정도 없어요. 즈소 씨의 머리는 꽃밭이죠. 거기에선 붙잡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것들은 없어요. 그게 연인이든,"

"그만."

침묵. 아차하는 입술과 변명거리와 달래려는 말을 찾으려는 눈.

"이제 그만해주세요."

바다의 이 말에 모두 가려지고 화면이 꺼져버렸다.


오늘따라 출국자가 많았는지 무안국제공항의 주차장에는 빈 차들이 많았다. 바다는 차 안에서 비행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옷차림은 처음 만났을 때 그 옷이었다. 연인을 만나기엔 캐주얼한 옷이었지만 바다는 이소도 그렇게 나오리란 걸 알고 있다.

비행기가 착륙한다. 사람이 없는 차들은 전율하지도 않는다.

담배가 고팠다. 끊으라고 잔소리 해줄 유일한 사람은 비행기가 아니라 기지에서 시체를 만지고 있다. 그럼에도 피지 않는 이유는 이미 더한 것에 중독되었기 떄문이리라. 담배 중독에 폐암으로 육체적으로 죽기 보단 건강하게 행복하고 정신만으로만 아픈 게 낫지 않을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를 놓지 않는 이유가 이걸지도 모른다.

주차장으로 들어오는 부스스한 푸른 머리가 보인다. 바싹 여민 트렌치 코트 바깥으로 평범한 청바지가 보였다. 몇 가닥 튀어나온 삐죽머리가 제멋대로 까닥거리는 모습을 자동적으로 눈을 좇게 되었다. 반짝반짝한 안광이 바로 눈에 들어왔지만, 한 풀 벗겨내면 보이는 밋밋하고 무방비한 움직임에 짜릿해졌다. 원래 짓고 있던 미소가 차를 보고 더욱 커졌다. 발걸음이 경쾌해진다. 차 문 손잡이를 잡고 벌컥 열어젖히자, 이소가 기대하던 향기가 코 끝을 스치었다. 바다는 그만 눈을 감을 뻔했다.

"이소 언니!"

"마린 동생!"

둘이 껴안았다. 이내 풀어지긴 했지만 무뚝뚝한 표정이 속에 담아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바다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얼굴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편안한 표정만이 얹혀 있으리라. 이제 떨어져서 애써 미소짓는 표정을 짓더라도 그 뒷면을 알아채지 못할 사람.

그래도 떨어지면서 바다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맴돌던 질문을 결국에는 꺼내면서.

"이소 언니."

"응?"

"나 사랑해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굳어진 바다의 귀로 알 수 없을 정도로 즉각적인 답이 찾아왔다.

"그럼!"

너무나도 당당한 대답에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되물으려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대답이 한 번 더 바다를 두드렸다.

"우리 바다 내가 많이 사랑해!"

달래려는 목소리였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의 이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일지도 몰랐다. 바다의 웃으려던 입모양은 웃지도 못하고 입을 벌려버렸다. 속에 차오르던 무언가가 말문을 막고 입으로 넘쳐흘러 기쁨도 표출을 못하고 가만히만 있게 되었다.

머엉한 공백을 인지하지도 못하고 바다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이소의 뒷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슬쩍 앞으로 밀자 이소도 그만큼 앞으로 나와주었다. 살짝 궁금해하는 이소의 표정에 바다도 더 다가왔다. 손이 인도하던 이소의 코 끝이, 바다의 코 끝이 서로 맞닿자, 바다는 고개를 살짝 틀었다. 드디어 두 입술이 맞닿았고, 바다가 몸을 지탱하던 팔을 안아주기를 선택하면서 둘은 불편하지만 아름답게 몸을 겹쳤다. 아까처럼 벌어진 호 같은 입술의 틈에 바다의 타액이 이소에게 넘어가면서 그 아래로 사라졌다. 숨소리, 손가락, 머리카락도 함께 섞여져 차 안을 농밀하게 채웠다.

둘은 떨어졌지만 바다는 이소의 목언저리에 팔을 두르고 한 뼘만 물러섰다. 차 안보다 더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서로의 숨결이 계속 섞이는 거리. 여전히 깨끗한 이소의 눈과 이제는 흐트러진 바다의 눈이 맞춰졌다.

바다라고 불러줬어. 바다라고 불러줬어. 흐려진 눈 안 쪽으로 같은 글귀들이 채워졌다. 하지만 종착지에는 그제 노트북을 닫아버렸던 까만 스크린에 멈춰버렸다. 필연적인 슬픔을 예감하고 스스로 새운 벽이었다. 본명 한 마디에 뛰는 심장박동이 박자마다 여기를 뒤흔들었다. 최초의 떨림으로 이미 빗장은 풀렸다. 지금의 순간을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불행을 직감하면서도 미쳐가는 마음을 믿어야 할까? 지금의 이 두근거림 때문에? 초점을 잃은 시선과 빠르게 움직이는 마음과 복잡한 머리에 바다는 이소가 손을 드는 것도 보지 못했다.

이소가 손을 들어 바다의 입가에 넘친 타액을 닦아주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소가 서서히 다가왔다…

왜인지, 아까보다도 부드러웠다.

바다는 울었다. 이소가 바다에게 방아쇠를 당겨도 결국 사랑할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바다는 이소랑 같이 잤다.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아닌지는 바다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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