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정신자학 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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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연구원 김(Kim)은 재단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달랑 네 시간 되었으면서도 방금 첫 신입 개론 강의에서 머리에 모루라도 맞은 마냥 완전히 갈려 나간 느낌이었다. 때는 점심시간이었고, 자리는 식당 저 멀리 구석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을 만한 곳을 찾아 앉은 참이었다. 그곳에서 김은 비변칙적 음식을 씹어 삼키고, 세상의 종말만큼 강렬한 커피를 마시고, 아침의 그 힘든 교육 내용을 뱃속에서 소화할 수 있었다.

재단이 제공한 핸드폰으로 김은 자기 인가로 볼 수 있는 SCP 파일들 몇 가지를 바작바작하는 마음으로 넘겨보았다. 대부분 농담하고 자빠질 글이었다. 딱 그렇게만 보였다. 굉장히 나쁘고 어둡고 몸서리칠 만한 농담들.

김은 새로 들어온 하급연구원 열한 명 중에 하나였고, 나머지 열 명은 다른 탁자에 다른 무리를 지어 앉아 명랑하게들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강사들도 여기저기서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이네들을 빼면, 이백 명도 더 넘게 앉을 만큼 널찍한 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김에게는 조금 이상한 일이었다. 제41기지가 콜로라도 중심부의 숲에 무심한 듯 묻혀 있긴 하다지만, 널따란 지하실 달린 빌딩이 세 개는 있는 곳인데. 다들 어디 있담?

잿빛 정장을 입은 남자가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김하고 눈을 마주치고는 단호하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정장이 말쑥해서 사람이 듬쑥해 보였다. 남자는 넥타이핀과 벽돌만한 백금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자리를 몹시 잘못 찾아온 사람 같았다. 제41기지는 사무기지였다. 훈련하고, 교육하고, 연구하고, 개발하고, 분석하고, 더구나 안전급 SCP를 정말 얼마 안 될 만큼 격리하는 곳이었다. 간부급이 올 법한 곳은 아니었다. 그럼 이 분은 뭐지? 헬기장을 찾다가 길을 잃은 간부인가? 아님 연구원이나 강사가 자기 원하는 다른 자리가 있어서 차려입은 건가?

"첫날에 욕보시군요." 남자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앨러스터 그레이(Alastair Grey)입니다. E가 들어가는 grey죠."

"김입니다." 김이 말했다. "폴 김(Paul Kim)이요."

"반갑습니다. 어디 말씨인가요, 물어도 괜찮으시다면?"

김이 눈을 깜박이다 말했다. "뉴욕이요. 제가 뉴욕 출신입니다. 혹시 기지 관리자님이신가요?"

"불안해 보이군요."

"그럴 만했죠. 안 그랬겠습니까?" 김이 되물었다. "개론 강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다 아실 겁니다. 자아 속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기분이에요. 제가 알던 거의 모든 상식이 막 바로 뒤집어졌습니다. 성인이 다 되어서도 제가 '위험한' 지식을 모르게 '보호를' 받고 계속 살았던 거잖아요. 바깥 세상이 무슨… 7세 미만 아동용 볼풀장이 세상인 것처럼 알고 산 건데. 이 풀장에서 나오려고 하니까는… 자괴감이 들긴 하네요. 일단 그래요. 또…" 김이 눈을 다시 깜박였다. "저기 그런데, 정확히 뭐 하시는 분이세요? 아직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만."

"그쪽이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만." 그레이가 말했다.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김이 말했다. "이 말씨는 제가—"

그러고는 김이 멈추었다. 생각의 열차가 선로 끝에 닿기 전에 공중에 떠버린 기분이었다. 하려던 말, 그레이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는데 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거참 이상하네요." 김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이때 김은 그레이가 배지를 달지 않은 것을 또한 알아차렸다. 순전히 실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손 쳐도 굉장히 심각한 실수였다. 간부급이라 하면 자기 하는 일 모두 고지식하리만치 정확하게 해야지 간부급을 달 수 있는 거 아닌가?

"누구세요?" 김이 다시 물었다.

"당신의 인생은 흥미로웠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은 언어 네 개를 구사했죠." 그레이가 말했다. "지금은 하나고, 곧 전혀 없겠지만. 지식인이 전공하긴 너무 방대하지만, 당신은 생화학과 비교문학을 융합한 학문을 공부했죠. 당신은 머릿속에 해외의 생각들을 더 많이 우겨넣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처럼 살았죠. 당신은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배고파했지만, 가는 나라마다 다른 행성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었죠. 당신은 인류학에 잠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세상은 한 사람은커녕 한 인류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많죠. 인류가 너무 많아요. 줄여야 할 겁니다."

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러고는 일어나 재빨리 다른 탁자로, 그날 일찍 만났던 강사에게 뛰어갔다. 가까이까지 다가갔을 때 김은 무언가 정전기 비슷한 게 일어나는 기분을 느꼈다. 강사의 어깨를 흔들어 보고, 살짝 움직일 순 있었지만 타르 속을 비집고 만지는 느낌이었다. "선생님! 문제 발생했습니다. 침입자가 있습니다. SCP 같아요. 박사님, 저 좀 봐주세요! 저기요?" 반응하지 않았다. 시끌벅적 떠드는 신입 동료들도 똑같이 불러 봤지만, 수다를 떨고 가설을 풀 뿐이었다. 귀에다 소리 지르고 손뼉을 쳐 봐도 아무도 의식하지 못했다. "저기요! 여러분! 잠시 제 말 좀! 아니, 아니, 안 돼, 안 돼."

김은 뒤를 돌아봤다. 그레이가 일어서서 자기 앞으로, 그 자신감 있는 미소 그대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다가오는 모습이 탁자를 뚫고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강현실 홀로그램 영상이 눈알에 쑤셔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공포감이 찔러 오는 와중에 김은 눈을 깜박여도 그레이가 보인다는 걸 알아차렸다. 눈꺼풀을 닫아도, 그레이는 그곳에 있었다. 살면서 완전히 자신만의, 혼자만의 어둠이었던 곳에 유령처럼 남아 있었다. 그레이를 보지 않을 방법은 등지고 돌아서는 것뿐이었고, 그랬을 때조차 김의 눈알 뒤에서 무언가가 방사능처럼 따끔거렸다.

김은 한 신입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입의 주머니 속 전화가 울리고,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응은 없었다.

"말도 안 돼." 김이 말했다.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하십니까?" 그레이가 말했다.

"전 아버지를 몰라요." 김이 서서히 물러나며 말했다. "어머니한테 자랐어요."

그레이의 얼굴에는 하얀 미소가 여전했다. "저들은 당신의 관점을 좋아했어요. 당신을 변칙 항정신자 업무에 배당하고자 했죠. 하지만 당신이 존재함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당신은 존재하지 않죠."

김이 혼잣말하듯 말을 꺼냈다. "이 기지에 위험한 SCP는 없고. 안전 기지인데. 당신이 위험하지 않거나, 아니면 아무도 당신의 존재를 모르거나. 그런데 아무도 당신이 존재하는지 모른다면, 당신은 아주 새로 왔거나, 아니라면… 당신이… 항정신자가 뭔가요?"

"첫날에 욕보시군요." 그레이가 말했다.

"당신은 지각이 있나요?" 김이 물었다.

"불안해 보이군요." 그레이가 말했다.

김은 도망쳤다. 식당을 빠져나와, 모퉁이들 돌아 복도를 따라 열 곳인가 열한 곳을 내달려, 엘리베이터까지 뛰어갔다. "아래" 버튼을 허겁지겁 누르고 기다렸다. 엘리베이터 문은 윤기가 많이 나 반사가 잘 되었다. 김은 거울면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가 충격으로 넘어질 뻔했다. 전에 본 적 없는 모양의 얼굴이었고, 그러나 분명 자기 얼굴이었다. "세상에! 뭐야, 이거 뭐야." 김은 횡설수설했다. "이게 무슨, 이게 무슨—"

그레이가 모퉁이를 돌아 이쪽으로, 여전히 시적시적 걸어왔다. 때맞춰 엘리베이터가 철컹 하며 열렸다. 김은 뛰어들다시피 하며 가장 낮은 층, 지하 8층으로 가는 버튼을 꾹 눌렀다. 감으로 한 일이었다. 다 지나고 나서 합리화를 덧붙일 순 있었지만. (차 타고 도망갈 수야 없었다. 그레이가 기지에 묶여 있는 게 합리적 "현실"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보다 나았으니까. 그러려면 김이 자기가 갈 수 있는, 기지 가장 낮고 어두운 구석으로 후퇴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레이를 기다리고. 그리고 들어오는 모든 문을 잠그고.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했고, 이제 문이며 바닥을 넘어서까지 보이는 그레이의 유령은 위쪽으로 멀어지며 원근법 덕분에 작아졌다. 그러나 여전히 김을 내려다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김은 엘리베이터에서 서성거렸다.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안 나. 저게 내가 쓰던 제2언어를 모두 먹어버렸다는데, 영어 말고 뭘 배웠는지 기억 안 나. 그렇담— 내 기억을 먹어치우는 거야. 정보를 흡수하는 거야. 그리고 누구한테 직접 접촉할 수 없단 말은, 나 혼자 대처해야 한다는 거야.

이런 교육 받은 적이 없는데.

김은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한 번 더 부딪치고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모르잖아. 내가 교육을 받았는데, 더는 교육 내용을 기억 못 한다면? 내가 여기서 몇 년을 일했는데 오늘이 첫날이라 생각할 뿐이라면? 전에도 저걸 마주친 적 있다면? 이 기지 모든 사람이 몇 번씩 마주… 치고는… 아무도 기억 못 하는 거라면? 이런 게 항정신자라는 건가?

김은 거진 비어 있던 식당을 떠올렸다. 몇 마일 이어지면서 텅 비었던 복도와 아무도 없는 사무실과 연구실 또한 떠올렸다. 어쩌면 내 기억만 먹는 건 아닐지 몰라. 인간을 통째로 먹어치우고 역사 속에서 완전히 들어내는 걸지도 모르지. 기지를 몇 년은 돌아다녔을 수도. 그래서 기지가 그렇게 썰렁했던 걸까. 우리를 거의 몰살했으니까?

구조 요청이 필요해. 경고를 해야만 해. 그런데 어떻게? 나는 말도 걸 수 없고, 전화도 걸수 없어. 그러면— 그러면 SCP를 작성해야겠어.

하지만 분명히 누군가 벌써 그렇게 생각했을 텐데.

김은 핸드폰을 꺼냈다. 목록 표시를 띄웠다. 만 개쯤 되는 SCP 항목들. "항정신자" 태그 하나만 달린 것만 백 개 정도는 되었다.

김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E가 들어가는 그레이. G-R-E-Y. 그러면 4-7-3-9.

SCP-4739

등급: 케테르(Keter)

특수 격리 절차: 포맷은 무시한다. 시간이 금이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대체로 벌써 재단에서 고립되었을 것이다. 구조 신호는 보내 봤자 소용없다. 당신은 지금 4739의 식도 안에 들어 있으며, 섭취되고 나서 소화를 기다리고 있다. 최대한 빨리 실험실 S041-B08-053으로 가서 연구를 진행해라. 그레이를 막거나 죽이는 법을 찾을 때까지, 당하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진 나머지는 읽지 마라.

설명:

그 순간 지하 8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앨러스터 그레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순진한 미소로. 앞으로 다가왔다.

다급해진 김은 핸드폰을 들어 대상의 이마로 던졌다. 핸드폰은 금속 고체 덩어리였고, 그곳에 명중했다. 그레이는 뒤로 휘청거리더니 벽에다 머리를 부딪었다. 다시 몸을 추스르는 동안, 김은 멀리 달아났다. 왼쪽 복도로 뛰어내려갔다. 콘크리트에서 울리는 발소리가 작아졌다.

45도를 두 번 돌아가자 53호실이 보였다. 가장 멀리 끝에 있는 문이었다. 잠수함 격벽 같은 모양이었다. 김은 탈출구에 키패드가 달린 것을 보았다. 네 자리 수. 김은 4739를 눌렀고, 한 번 만에 잠금이 풀렸다. 격벽 장치는 짜증나리만치 느리게 열렸다.

"제발, 제발, 빨리 좀!"

"당신의 어머니를 기억하십니까?" 복도 끝에서 그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부모님 같은 거 몰라. 나 고아였어요." 김이 낮게 뇌까렸다. 아주 잠깐 그레이가 정말 그런 뜻으로 말했는지 궁금해졌지만, 따져 볼 시간은 없었다.

격벽이 열렸다. 김은 휭하니 들어가 뒤팔로 문을 끌어 닫고는, 일 초라도 벌어야 할 것처럼 장치를 다시 잠갔다. 연구실은 상당한 크기에 창문은 물론 없었고, 김이 알아보기도 어려운 장비들이 천장까지 한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발밑에는 두꺼운 유리조각들이 더러 깔려 있었다. 한구석에는 컴퓨터 단말기가 잠금 상태로 있었다. 김은 잠금을 해제했다. 똑같은 항목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명: SCP-4739는 강력한 완효성 항정신자 살해 물질로, 백인 남성 재단 간부 모습을 띠며 자신을 "앨러스터 그레이"라고 자칭한다. SCP-4739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유기물 형태로 저장된 정보의 밀집 클러스터이다. 본질적으로는 매우 박식하고 생각이 많고 흥미로운 인물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SCP-4739는 자신의 희생자를 외부 세계에서 고립시키고자 항정신자장으로 감싸, 희생자 및 희생자의 모든 행위를 인식 및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리고는 SCP-4739는 희생자의 기억과 지식을 흡수하여 식물인간이 되거나 사망하도록 한다. 이 과정은 15분 내지 2시간 정도를 소요하며, "알츠하이머병을 빨리감기하듯" 일어난다고 묘사된다.

SCP-4739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지각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지각 있는 존재의 행동을 모사하기는 하지만, 지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희생자는 자유롭게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는데, 어차피 한 번 붙잡힌 이상 탈출하거나 구조를 요청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육필이나 그래피티나 전자우편 같은 의사소통은 전달이 가능한데다 현실 속에 남아 있지만, SCP-4739의 효과는 각 메시지까지 퍼져서 외부 관찰자는 그 메시지들을 인지할 수 없다. SCP-4739에게 자기가 잡히기 전까지는.

현재 읽고 있는 SCP 항목은 SCP-4739의 희생자들이 제작하여 유지하고 있다. SCP-4739의 희생자에게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 SCP 항목을 읽고 있다면, SCP-4739에게 붙잡힌 것이다. 당신은 지금 재단 전체에서 고립되었으며, 사실상 혼자만의 재단을 구성하게 되었다. 당신은 15분 내지 2시간 만에 제41기지로 가서, 지하 8층으로 가서, 실험실 053호로 가서, 기존 연구에 익숙해져서, 연구를 계속한 다음에 SCP-4739를 격리하거나 퇴역시킬 방법을 찾아내거나, 아니면 공산이 더 큰 쪽으로는 그냥 죽을 것이다. 당신의 전문 분야가 항정신자 격리와 관련이 없다면, 우리는 심심한 사과를 표하며 지금부터 배워나가기를 조언하고자 한다. 빨리.

SCP-4739는 2013년 8월 3일부터 세어나간 이래 재단 연구원 ||||| ||||| ||||| ||||| ||||| ||||| ||||| ||||| ||||| ||||| ||||| ||||| ||||| ||||| ||||| |||| 명을 흡수하였다. (처음 읽는 분은 표시 하나를 더해 주길 바란다.) 우리가 희생자의 적어도 50%는 이 데이터베이스 항목까지도 오지 못했다고 추산하는 고로, 실제 희생자 수는 이 숫자의 두 배는 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떡하라고?" 김이 소리쳤다. 연구 내용을 스크롤하고 또 스크롤했다. 내용은 혼란스럽게 마구잡이로 배열되어 있었다. 정리할 만한 시간이 날 사람이 없었을 테니. 희생자들이 조각조각 붙여 잇따라 작성한, 연구 내용이 담긴 별행(別行)이 수십 개는 달려 있었다. 마지막 줄은 모두 이런 식으로 끝났다. "나는 X를 해 본다. 이 글을 읽고 있다면 X는 성공하지 못했고 나는 죽었으니, X라는 접근법은 가망이 없으며 당신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김은 계속 읽었다. 그레이와 물리적으로 부딪쳐 보는 데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시간을 끈 사람도, 몸을 피한 사람도, 걸음을 늦춘 사람도, 설득에 성공한 사람도, 다른 목표로 관심을 돌린 사람도 없었다. 이해하지 못할 아이디어를 담아 독살시켜 보려는 사람도 있었고, 그레이를 늦춰 보려고 기억을 찔끔찔끔 제공했던 사람도 있었고, 그레이가 먹기 전에 다른 기억을 갈아끼운 사람도 있었고, 너무 많은 기억을 강제로 먹여 배를 터뜨려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다. A등급 기억소거제 다량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성공한 사람은 없었다. 백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대개 분명히 박사학위를 들고 있었을 사람들이, 이 대상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잠시 싸워 보고는 존엄성이 있는 방식으로든 없는 방식으로든 모두 죽어버렸다.

더 이상 시험해 보지 않은 방법들이 없었다.

"시발 망했어!" 김의 결론이었다. 위를 흘끗 보았다. 그레이는 아직 방 안에 없었지만, 복도에서 연구실로 뻗은 마지막 길을 차분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는 완전히 형체가 없는 존재였고, 물리적 방해 수단은 작용시킬 수 없었다. 다치게 할 수도 없었다.

김은 주머니를 움켜잡았다. 대개 핸드폰을 두던 곳이었다.

잠깐만 있어 봐.

김은 화면을 다시 스크롤했다. 그레이를 물리적으로 상대하려다 죽은, 애석하고 다급했지만 가련한 희생자들 서너 명을 찾았다. 컴뱃 나이프와 글록 총. 야구 배트(김은 고개를 들어 방 안을 훑었다. 물론 배트가 책상 밑을 구르고 있었다). 나이 지긋했지만 이런 문제에 미숙할 수밖에 없었던 한 식물학자는, 찾을 만한 물건 중에 가장 무거운 걸 사용해 보겠다고 적어두었다. 왜 CRT 텔레비전이 산산조각이 나고 격벽 주위 바닥에 두꺼운 유리조각이 얇게 깔려 있는지 납득이 갔다. 더구나 식물학자의 시도를 촬영한 CCTV 영상도 있었다. 시도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레이는 홀로그램 같은 유령이었고, CRT는 유령을 뚫고 곧바로 떨어졌고, 땅바닥에 닿자마자 그레이의 발밑에서 박살이 났다. 나머지 영상에서 식물학자는 한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만 있었다. 그레이가 차분하게 지켜보는 동안 서서히 미쳐가면서.

차이점은 그거야. 김은 무언가를 깨닫고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핸드폰은 정보로 가득 찬 단단한 덩어리라는 점. 그리고 내 이전에는, 정보를 던지는 무기로 사용해 본 사람은 없었어.

김은 실험 목록들을, 흩어진 기록들 중에 몇몇 부분뿐이었지만 다시 훑어보며, 희생자들이 다른 데이터 소스로 그레이의 주의를 돌리려 한 사례를 찾아보았다. 기본적 아이디어는 너무 많은 정보를 담은 무언가를 들이대 그레이에게 과부하를 거는 계획인 모양이었다. 인터넷, 입자가속기 실험에서 실시간으로 나오는 테라비트 규모 피드, 이진법으로 원주율의 첫 몇천조(兆) 자리를 담은 하드 드라이브 무더기 등. 그러나 그레이의 주의를 흩트릴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은 아직 없었다. 데이터로 가득 찬데다 아주 눈에 잘 보이기까지 하는 스크린은 그냥 무시당했다. 전자기 형태(무선이나 레이저)로 쏜 데이터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더구나 그런 정보들을 희생자의 생각 속에 추가 기억 장치처럼 뚫고 들어갈 방법을 생각해 낸 사람도 아직 없었다. 결국 불가능한 계획으로 취급받고, 연구 방향으로서 버려지다시피 하고 있었던 방법이었다.

김은 컴퓨터 옆 작업대를 보았다. 하드 드라이브들이 떡하니 있었다. 하프랙 장치였고, 볼링공만큼 크고 무거운 직육면체 금속 덩어리였다. 인간이 생각할 만한 투척무기 중에서 효율이 가장 떨어진다 해도 될 만한 도구였다.

김은 실험실에 있는 이더넷 케이블 중에 가장 긴 것 세 개를 찾아 얼른 집어들고는, 케이블을 엮어 기다란 줄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김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자기 책무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기억했다. 컴퓨터로 가서, SCP 항목에 들어가서, 희생자 표시를 하나 더하고는 자기가 정확히 어떤 방법을 시도할지 써내려갔다. 내가 마지막일지는 모를 일이고, 아니었다면 이 방법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야 할 테니까.

*

그레이가 실험실 격벽을 통과해 들어왔다. 실험실의 장비 대개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장비들의 자리에 대신 생긴 공간으로, 폴 김이 검은색 회색 드라이브 어레이를 네트워크 케이블을 엮은 2미터 줄에 묶어 머리 위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레이에게는 전진을 멈출 만한 지능이 없었고, 어레이는 그레이의 옆머리를 랙마운트 지점으로, 샛별처럼 직격했다.

그레이는 충격에서 1조 개는 넘을 숫자들을 흡수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초록색 빛이 확 퍼지면서 지하철이 합선되는 소리가 나더니, 그레이는 한구석에 나가떨어져 있었다. 머리는 함몰되고, 드라이브 어레이가 조금 부서져서는 그 주변에 파편을 흩트리고 있었다.

역사는 역사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농담이라면 뭐든지 자기 안에 펼칠 수 있다는 게 김의 추단이었다.

*

"항정신자 부서를 계급 따라 올라가며 부서를 씹어먹던 중이었어." 사건의 여파에 아직 잠겨 있는 김에게 휠러가 말했다. "더 심각한 인물이 뜯겨나가는 건 시간 문제였겠지. 기초 실력을 꼭 필요할 때 발휘하게 된 점 축하해. 수십 명이 실패했던 일이니까."

김은 아직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충격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옅어지고 있었다.

이제야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매리언 휠러(Marion Wheeler)는 항정신자 부서의 부서장이었다. 바로 김이 새로 모시게 될 상사였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것 같아요." 김이 말했다. "그냥 핸드폰을 던졌을 뿐이고, 그냥 본능으로 한 일이고, 그냥 몸이 기억한 일인데요. 오늘은 제 첫날이고,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라고 말하고 싶지만, 저는 여기 앉아 있고, 그건 그 말들을 꺼내기 전에 더 생각을 해 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그 말들 중에 진실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이겠죠?"

휠러는 다음 말을 기대라도 하듯이,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부서장님은 제가 새로 모시는 사람이 아니군요." 김이 말했다. "그냥 계속 모시던 사람이에요. 오늘은 제 첫날도 전혀 아니고요. 여기서 일한 지는… 뭐 십 년은 너끈하게 넘었을까요? 저는 적어도 2000년대 중반부터 항정신자 전문 연구원으로 있었던 것 같군요. 단지 그레이가 첫날 이후의 모든 기억부터 먼저 먹어치웠을 뿐이고요.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 일은 운 때문에 해결된 게 아니야." 휠러가 말했다. "본능이나 근육기억은 깊은 훈련에서 나오는 결과지. 방금 말했잖아, 기초 실력이라고. 나 자신의 삶과 지난 모든 기억을 누구보다도 빠를 만큼 다시 그러모으는 능력. 그게 바로 우리가 자네한테 부어넣어 주려는 능력이야. 그리고 가끔은 다행히도, 효과가 있지."

"심지어 우리가 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 아니에요." 김이 계속 말했다. "또 다른 사건들이 있었죠. 기억소거 능력이 있는 다른 SCP들. 부서장님은 거기 앉아서 제가 이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몇 번이고 지켜봤죠."

"그리고 그렇게 오래 전 일도 아니었어." 휠러가 인정하며 말했다. 능글맞은 미소처럼 보일 수도 있는 표정을 지으며.

"회복하려면 대개 얼마 정도 걸리죠?"

"몇 달은 걸리겠지." 휠러가 말했다. "하지만 더 솔직하게 말하면, 이 부서 사람들은 나중에 항상 가지고 있을 실력만큼이나 첫날에도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지. 자네가 할 일은 전심전력을 다하거나 아무것도 안 하거나, 둘 중에 하나야. 나머지는 미세한 조정 과정과 화학 공부뿐이지."

"그러니까 제 정신상태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바로 일으로 복귀하라고 말씀하시는 거군요." 김이 말했다.

휠러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SCP 항목 업데이트가 필요해. 그레이의 포식 패턴을 확정짓고 자네가 그레이를 이겨낸 정확한 과정을 말해 줘. 사체를 가지고 무슨 일을 했는지도 알아봤으면 좋겠어. 태웠는지, 분해했는지, 아니면 기지 아무데나 지각 불가능하게 은폐된 썩어가는 무더기를 만들어 놨는지. 그리고 그레이가 돌아올 때 사용할 대책도 마련하면 좋겠어."

"죽은 거 아니었어요? 잠깐만요." 김이 말했다. "이건 알 것 같아요. 저한테 다시 돌아올 거예요. '아이디어는 죽지 않으니까'."

다음: 망각 불가, 그게 바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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