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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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재창조하다.


#0

내가 아는 사건의 시작은, 친구가 귀에 이상한 피어싱을 달고 온 날이었다. '이거 괜찮지? 새로 뚫었어.' 라고 말하는 친구의 귀에 달린 자그마한 피어싱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난 수십, 수백 개의 미세한 톱니가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작고 많은 기계들이 째깍이며 돌아가는 모습은 징그럽기만 했다.

#1

많은 사람이 바뀌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몸에 기계를 이식하거나, 기계 자체를 숭배하는 경향을 띤다는 것이다. 자신의 팔이나 다리를 기계로 교체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뇌가 훤하게 보이는 채로 뇌에 톱니바퀴를 쑤셔 넣은 상태의 사람 또한 있었다. 나는 방문을 걸어잠구고 방에 틀어박혔다. 핸드폰도 꺼놨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어떻게 보면 좀비물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냥 방구석 폐인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유일한 취미생활은 책을 읽는 것이었다. 기계가 묻지 않은 옛날 책들을. 나는 가끔 바깥으로 나와 서점에서 책을 산다. 전자서적이 아닌 종이책은 이미 일부 급진적인 자들의 만행으로 인해 상당한 양이 파손되거나 소실되었기에 내가 원하는 책을 찾으려면 한참을 돌아다녀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인터넷으로 현재 남은 책 현황을 살펴보는 편리한 짓을 할 수도 없었다. 기계 자체가 무서웠다.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나 또한 괴물이 될 것 같았다. 티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사상이 내게 들어올 것만 같았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편집증적인 망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들은 아마 이미 기계로 변해버린 자들이거나, 그리 변할 자들일 것이다. 질병을 가져 몸에 인공 장기를 이식하는 것은 나 또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쪽이었다. 내가 유교사상에 찌든 기성세대 인물도 아니고, 알량한 신념보다야 생명을 더 우선시해야 된다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은 정도를 넘어섰다. 점차 기계 기술이 발달하여 몸에 이식하는 기계의 종류가 점점 늘어나는 형식이 아니라, 그냥 버튼 하나를 '띡' 하고 눌렀더니 인간이 기계가 되어 나오는 세상인 것이다. 인간이 세탁기로 변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서 나는 이 세상 모든 기계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남들이 정상이고, 내가 비정상인 건 아닐까?

내가 미쳐버린 건 아닐까?

사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 기계에 감염된 것은 아닐까?

세상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의심을 품는 순간 제정신을 잃을 것 같아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내가 의심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니까.

가끔 어떤 교단의 홍보랍시고 콘센트까지 뽑은 티비가 켜지는 것을 볼 때마다 발작을 일으키듯 티비에서 멀리 떨어진다. 나는 기계는 아무 것도 없는 화장실에 틀어박혀 화장실의 거울을 바라봤다. 완연한 살구색이었다. 자기 나이대에 걸맞게 피부 트러블이 어느 정도 나 있는 피부, 오랫동안 씻지 않아 푸석푸석해진 머리카락. 몸에 어떠한 기계도 들어있지 않은… 사람.

나는… 그래, 아직 나는 사람이다. 적어도 그렇게 느끼고는 있다. 세상에 의구심을 품고는 있다.

나는 티비를 부쉈다.

핸드폰과 컴퓨터를 부쉈다.

기계를 전부 부쉈다.

#2

부서진 신의 교단. 그 종교가 모든 일이 발생한 이유였다. 괴물과 대화한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른 존재들과 대화를 하며 알아낸 결과, 본래 해당 종교는 부서진 교단과 톱니장치 정교회, 맥스웰파라는 세 종파로 나뉜 채로 알력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세상이 변했고(다른 존재들은 세상이 변한 것을 신의 뜻이라 언급했다.) 대부분의 인구가 그 망할 부서진 신이라는 작자를 믿게 되었다. 그 존재들과 대화는 정상적으로 통했지만 으레 광신도들이 그러하듯 해당 종교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때, 혹은 해당 종교에 대해 언급하려 할 때마다 그 자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블라인더가 내려간 상태의 창문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시끄러운 소리가 울린다. 살 하나를 슬쩍 손가락으로 내려 바깥을 확인하자, 공중에 떠 있는 홀로그램 스크린에서 얼굴 절반이 기계인 존재가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 부로 34개의 교단이 만들어졌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0대 후반의 남성으로 보이는 존재가 답한다.

말로 할 것도 없습니다! 당연히 부서진 교단을 제외한 모두가 이단입니다! 이미 분열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우리 메카네인의 힘이 위축되어 다른 단체들에게 쉽게 견제받는 입장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메카네인들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 로버트 부마로 성하께서 말씀하시길…

또 누군가 그에 대해 반박하려 하자 나는 그대로 살을 내렸다. 어차피 이제 더욱 들어봤자 쓸모 없는 토론이나 계속될 테지. 뒤를 돌아보자 기계란 기계는 전부 부서진 내 방의 모습이 보였다. 핸드폰과 컴퓨터, 냉장고 등등… 냉장고를 부순 이후 냉장보관이 필요 없는 보존식품만을 먹고, 일도 할 수 없는 상태라 현재 있는 물자를 최대한 아껴 쓰고 있자니 마치 좀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느낌이다. 이 생각을 이전에 했던가? 사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세계는 그럼에도 돌아가고 있었기에. 사실 내 기준에선 아포칼립스가 맞긴 하지만.

바닥에 깔린 이불에 털썩 주저앉는다. 칼으로 과일 통조림 뚜껑을 까서 스푼으로 퍼먹는다. 달콤한 맛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하는 것인지 고민만을 계속 하다 보니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다. 태양… 태양은 이런 세계가 되어서도 똑같다는 것이 몇 안되는 위로가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원래 존재했던 거대한 교단 셋이, 각각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교단을 이단으로 지정하며 전쟁을 선포했다.

…우리의 부서진 주께서는 통합을 주문하셨습니다. 사제도 신도도,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신분여하를 막론하고 여러분과 같은 메카네인이 서로 화합함이 그분의 뜻입니다. 하여 그의 자손들의 땅에서 간악한 살덩어리의 무리하며, 감히 그분의 뜻을 변조하며 형제를 참칭하는 이들을 쫓아내는 일을 돕기를 바라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물론 자리에 계시지 않는 분에게도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신의 뜻입니다…

들은 내용을 정리하자면 본래 부서진 교단이라는 단 하나의 교단이 존재했었는데, 일차적으로 분열이 일어나 세 개의 교단이 생겨났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인해 수십 개의 교단이 생겨났으며, 더 이상의 교리 오염과 기타 등등을 막기 위해 개전하겠다는 말이다. 전쟁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교단과 반대하는 교단, 중립의 위치를 취하는 교단 등 여러 교단이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으며, 한동안은 성전을 선포하기 이전과 같은 나날이 지속되었다.

폭풍 전 고요처럼,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3

-파지짓

전기 튀는 소리가 내 집 창문에 이르렀다. 투명한 유리 창문이 순식간에 얇은 홀로그램 막으로 변해 흘러내린다. 망할, 망할! 쓰레기같은 맥스웰파 놈들!

나는 미리 챙겨놓은 짐을 싸매고 현관을 박차 나갔다. 자동차도, 버스도 ,택시도. 웬만한 교통수단은 전부 기계다. 위험하단 뜻이다. 나는 가방을 들쳐메고 빠르게 다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옛날 싸구려 SF에서 나올 법한 레이저 빔이 사람 눈깔에서 나오는 모습이라니, 그런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에겐 그저 비현실적이란 감상만을 유발할 뿐이었다.

다리가 마비될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머리 근처에 초진동 블레이드(대충 스쳐 지나가며 보기엔 그리 보였다)가 스윽 지나가거나, 레이저 빔이 지근거리를 스쳐지나갈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저런 싸움이 일어나는 거리에서 멀어진 듯 하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감각이 없어질 무렵 숨을 몰아쉬며 이동을 멈추었다. 알지 못하는 장소였다. 반쯤 무너진 건물이 눈에 띄어 걸음을 그 내부로 옮겼다.

나는 건물에 들어서는 그 순간 기겁하며 뒤로 펄쩍 뛰어올랐다. 회백색의 인영이 갑작스레 내 눈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나, 둘… 어림잡아 수십은 되는 인원이었으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모습이었다.

"정신은 사고를 생산하는 공정."
"정신은 사고를 생산하는 공정."
"정신은 사고를 생산하는 공정."
"정신은 사고를 생산하는 공정."

그들은 생기 없는 눈으로,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을 보는 듯 했다. 지금까지 봐왔던 대부분의 존재들은 사람같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생물이기는 했었다. 그런데 저들은… 저것들은…

…하, 맥스웰파보다 지독한 정교 놈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전히 동일한 모습을 하고 같은 말을 내뱉는 그들은 나를 지나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도 자칫하면 저렇게 될 수 있었다는 의미일지도 몰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잠시 멍하니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 발걸음을 돌려 건물의 내부로 들어섰다.

내 방과 별다를 바 없었다. 폐가같은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이런저런 잡동사니가 흩어져 있는 방바닥, 멀쩡한 기계는 거의 없는 채로 부서진 상태였으며, 불은 켜지지 않았다. 짐을 소파 위에 올려놓자 허공에 먼지가 날렸다. 손을 휘휘 저어 공기를 확보하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블라인더와 커튼을 쳤다. 그리고 여전히 먼지가 쌓여있는 소파 위에 몸을 푹 뉘였다. 코끝이 간질거렸지만 이미 온 몸이 녹초가 되어 코를 긁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은 눈을 감았다.

#4

내가 피난처로 삼은 곳은 가을철의 쌀쌀한 바람이 벽의 구멍으로 새어 들어온다는 것만 빼면 참 좋은 곳이었다. 전쟁의 여파가 닿지 않은 지역에다 근처에 다른 존재들이 많은 것 같지도 않아 외출할 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으며, 공중의 선전 부유물 또한 근처를 지나가기에 정보를 수집하기에도 용이했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다가도, 집을 잃고 새 집을 얻은 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내 운명이 화가 나서 텐션이 낮아졌다.

음식이 절반이 남을 무렵까지 나는 책만을 읽었다. 인지가 불가능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톱니들이 거리 한가운데서 모여 돌아가는 모습이나, 사람이 기계가 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정신력을 소모한다. 그것도 바로 앞에서.

책, 그것도 종이로 된 책은 나의 마음을 쉽게 가라앉혀준다. 가장 먼저 혼란스러웠던 나의 마음을 가다듬어 준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며, 기계와는 정말로 동떨어진 분위기에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져온 모든 책을 수십 번 반복해서 읽자,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세상이 변했더라도 화폐 단위가 달라진 것은 아니니 가지고 있는 비상금으로 식량과 서적을 확보하고자 집을 나섰다. 작은 도로 중턱에 있는 집을 나서자 보이는 것은 저 하늘에서 선전하고 있는 부유물과 그 옆에서 여전히 따사로움을 주고 있는 태양, 둘 뿐이었다.

부유물은 매일 아침 새로운 정보를 알려준다. 유희의 교단이란 곳이 어디어디에서 공연을 한다더라, 살육의 교단이 또 범죄를 저질렀다더라, 대부분은 나와 관련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상단과 하단에 복잡하게 나열된 광고와 채널 이름 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속보인가 싶었지만 자막과 시간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서 봤던가 했더니 예전에 유행했던 어나니머스인가, 그런 식의 느낌이었다.

나는 검은 의상의 인원 셋이 서 있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 한 번 말하지. 우리는 너희와 같아. 이 변해버린 세상에 위화감을 느낀 사람들의 모임. 그것이 우리 거부회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새로이 편성된 예능 프로그램인가 싶었지만 아무런 편집이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니, 솔직히 세상에 나 혼자 떨어진 것만 같아 외로웠다. 저 한마디가 나에겐 빛줄기와도 같았다. 사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너희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당연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 떨어진 정상인들이 과연 행복함을 누리고 있을까. 현재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진성 철박이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한 번 교단 놈들한테 크게 데여 봐라. 몸이 기계가 되고 정신도 이상해져 봐야 지금은 상대적으로 행복한 줄 알…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헛소리를 지껄이던 미친 새끼가 다른 사람에게 우악스레 밀려나 발언권을 잃었다. 덩치가 큰 남성이 미친 새끼를 대신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뭐라도 신호를 보내라. 창밖에 깃발을 걸어놓든지, 아니면 길거리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든지… 그게 무슨 신호든지 우리는 확인할 것이다. 확인한 후에, 우리와 같은 사람인 것이 확인된다면 데려와 주마. 건투를 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방송이 꺼졌다. 집의 앞에 '저는 사람입니다.'라고 글을 적어놓았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생필품과 서적을 구매하여 집에 돌아왔다.

#5

잠에서 깨어나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양 팔과 양 다리가 구속되어있었다.

"무… 뭐야… 어디야?"
-요새 실험체 구하기가 힘들었는데 거부회 놈들 덕분입니다.
-멍청한 놈들. 거부회한테 신호를 보낼 것이라면 그 놈들한테만 보이게 하든지.

기계들이다. 목소리에서 확실한 기계음이 섞여 들린다. 그렇다면 거부회… 거부회가 아니었어? 혼란스러운 머리는 눈이 가려진 채로 미미하게 들리는 기계음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

"사… 살려줘!"

본능적으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가 왜 납치를 당한 거지?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걸까? 미쳐버린 세계에서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면 제정신을 유지하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살고 싶다 생각하고 있는 것?

그 어느 쪽도 나에겐 합리적인 대답이 아니어서 눈물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오, 일어나셨군요?
-살려달라뇨, 우린 그저 널 업그레이드시켜드리고자 하는 것 뿐입니다.
-맞아, 살려달라고 말하니까 우리가 나쁜 놈들처럼 보이잖습니까?

맥락이 아니었다면 그것이 웃음인지도 몰랐을 소리가 울린다.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끝납니다.
-금방 끝나다니. 몇 시간은 걸리잖아.
-몸에 기계 심는데 몇 시간이라니, 남는 장사지 않습니까?
-와, 너 천재야?
-제가 좀 천재입니다.

미친 놈들… 그들의 변태같은 대화에 치를 떨고 있자니, 위이잉. 세상이 변하기 전 치과에서 들었던 불길한 소리가 들린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지금까지 뭘 들으신 겁니까?
"아니, 안 돼… 그러지 마…"
-걱정 마십쇼, 눈 감았다 뜨면 끝납니다.
"안…"

말하는 도중 복부에서 격렬한 통증이 느껴진다. 간단히 표현하면 격렬한 통증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느꼈던 것은 마치 갓 지상으로 나온 용암을 복부에 처부으면서 내장을 다 짓이기는 느낌이었다. 눈이 가려져서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으나, 내 몸뚱아리가 뒤져간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끄아아아아!!!"

온 몸에 힘을 주고 격렬히 발악한다. 하지만 금속으로 제작된 듯 단단한 구속대는 나를 절망에 밀어 넣을 뿐이었다.

-저항이 심한데?
"아아아악!!!"
-푸흐. 그래봤자지.
"으… 흐으아아아!!!!"

어딘지도 모르는 곳, 한 사람의 절규와 두 기계의 소리만이 울렸다.

#6

몇 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몇 시간인지, 혹시 며칠이 지났지는 않을까. 체감상으로는 이틀 정도 지난 것만 같았다. 갑작스럽게 바깥에서 발생한 폭음에 두 기계는 당황한 목소리를 내비쳤다. 저런 기계음으로도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몸과 정신이 피폐해진 당시로써는 아무런 감상이 없었다.

둘은 나의 손발을 풀어주고 도망쳤다. 본인들 딴에는 비아냥거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몸에 기계를 심는 것을 자원봉사 수준으로 생각했다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것이 더 기분이 더러웠다. 차라리 이대로 굶어 죽게 놔두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가동시켰다.

바깥은 밤이었다. 가로등 한 대가 길가를 비추고 있었으며, 건물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가로등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길거리를 밝히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움직였다.

삐걱삐걱 돌아가는 관절에 아, 이젠 나는 돌아갈 수 없구나. 세상 차가운 자신의 몸뚱아리에 절망 한 방울. 역겨운 기름 내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운명의 순응. 그 누구보다 기계를 저주하면서도 기계와 누구보다 가까워진 자신의 기구함에 한숨 수십 번.

띵…

띵…

길을 걸으며 들리는 전자 종소리에 몸을 맡긴다. 세상에 동화되는 느낌에 나는 이대로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한 번, 나는 무엇을 위해 기계를 거부했던 것인가… 그냥 기계를 받아들인 채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길을 걷는다. 터벅이는 발걸음 소리가 굉장히 일정하여 그 또한 기분이 나쁘다.

기계가 내 머리를 다 헤집어대는 느낌이다. 부서진 신을 믿으라. 살덩이를 배제하라. 씨발, 살육의 교단이 내세우는 교리와 별다를 바 없는 생각이 끊임없이 든다. 나는 내 머리를 때린다. 사람이 싫은 것인지, 피가 흐르는 살이 싫은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아프게도 때린다. 내 자신의 손으로 머리를 쥐어박는다. 고통으로, 눈물이 핑 돌 정도의 고통으로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그래.

나는 기곗덩이로 살 바엔 인간으로 죽겠다.

나는 가장 가까운 건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 또한 기계니까. 그리고 계단을 계속 올랐다. 오르고 올라,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높이의 층에 멈추어 창문을 향한다. 한 걸음과 두 걸음,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나를 막으러 달려드는 존재들의 모습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창문과의 거리 불과 1미터. 온몸이 붕 뜨는 부유감과 함께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였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실제로 들어보면 세 음절이 아닌 단 하나의 음절으로 이루어진다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떨어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들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 따위는 들지 않았다. 잡생각과 후회, 삶에 대한 열망과 슬픔… 그리고 여러 다른 생각들도 스쳐 지나갔건만 그건 잘 모르겠다.

-콰득

부서졌으니까.

#7

눈을 뜬다.

살아있었나? 죽으려고 했는데 죽지도 못 했구나… 생사마저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는 것이 슬프고도 억울해서 눈물이 조금씩 나온다. 나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뜨거운 눈물이 살가죽에 옅게 발라진다.

…살가죽?

나는 눈을 부릅떴다. 여러 문신이 새겨졌지만 확실히 인간의 피부였다. 얼굴을 꼬집어봤으나, 확실히 고통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꿈은 아닌 것 같았다.

"일어났는가?"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누구시죠."

내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맛이 간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아직 피로가 풀리지 않은 것 같구만. 거부회의 일원일세."
"…거부회요?"

몸이 미약하게 떨렸다. 거부회에 도움을 요청하려다 납치를 당한 것이 나도 모르게 트라우마가 된 것 같았다.

"…정말로 미안하구만. 조금만 더 빠르게 찾았더라면…"
"아니에…"

말이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얼마 전, 온몸이 박살나고 있었을 적에 누군가 도와달라고 속으로 애타게 소리쳤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 현실에 절망했으니까.

"사죄의 뜻이라 하기엔 뭣하지만,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게나. 그리고 이후에 자네의 신분은 우리가 보장하도록 하지."
"우리라면?"
"거부회와 낼캐를 포함한 반기계 세력."

세력은 거부회를 포함하여 낼캐, 부식의 교단, 자연의 교단 등 내가 모르는 이름의 교단들과 단체들이 섞여 있었다. 놀랍게도 이 연합의 주축은 거부회가 아니라 '낼캐'라는 집단이었는데, 이들은 부서진 신을 믿지 않음에 그치지 않고 본인들의 종교를 유지하고 있는 단체라 하였다. 또한 이들은 신비한 힘을 다룰 수 있는데, 내 몸을 고친 것도 그런 능력의 일부라고.

"대신 질병에 조금 취약해질 걸세."
"취약이라뇨?"
"일 년에 두 번에서 세 번쯤은 기본으로 감기에 걸리는 정도."

그 정도야 뭐…

그 외 남자가 설명해준 내용은 일반인인 나로서는 믿기 어려웠다. 신비를 다루는 낼캐라는 특이한 종교. 부서진 신을 믿는 종교 때문에 처음 들었을 때는 막연하게 거부감이 들었지만, 남자가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그들과는 다른 자들이라 했다. 완전히 믿기는 힘들었지만 나를 구해준 사람들이니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질문할 것은 딱히 생각나지 않았기에 남자는 곧 방에서 나갔다.

"머리 아파…"

나는 복잡해진 상황에 한숨을 내쉬었다.

#8

이 낼캐란 집단은 기계를 극히 거부하는 집단이라고 한다. 이후에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그 집단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외부인을 꺼리기 때문에 일부 정상회담 이외에는 단 한 명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하였다. 간간이 나르시스트인지 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렸으나, 높아 보이는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비밀스레 전달하는 정보인지라 확실히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거부회와 연합의 보호를 받으며 세상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시작은 이 '부서진 신'이라는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기독교나 불교, 천주교 등의 유명 종교가 세상에 유행했다면 이리 크게 반향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사 결과 장막 너머의 존재들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관련된 여러 집단 또한 알 수 있었다.

우선 내가 보호받고 있는 이 낼캐는 타인이 부르길 '사르킥 숭배'라 하였고, 이는 경멸을 담은 단어이기에 본인들은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하였다. 부서진 신의 교단과 마찬가지로 여러 종파로 나뉘어있으며, 그 중 원사르킥 종파의 집단인 듯 했다. 완전히 외부인을 꺼리는 모습에, 기계를 싫어한다 하였으니 확실할 것이다. 또한 내가 나르시스트라고 들었던 자는 '카르시스트 이온'이라는 종교의 창시자며, 현재 그의 후손이 원사르킥을 이끌고 있다는 듯 하다. 개인적으로 신비를 다루는 집단의 수장이니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겠거니 추측할 뿐이었으나, 역시나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존재했던 기록도 세상이 변하며 소실된 것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 외 이런저런 내용을 학습한 이후 서고를 나왔다. 종이 냄새에 파묻혀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잠시, 나는 옅게 흘러나오는 혈향에 홀린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냄새였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그런 냄새였다.

어느 정도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하늘에 낮게 깔려 있던 태양 대신에 달빛이 나를 비출 정도인 것으로 보아 몇 시간은 걸은 것 같다. 결국 걸음이 멈춘 곳은 한 움막이었다. 마치 원시 시대에서 튀어나온 듯 한 모습. 그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냄새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발걸음이 하나, 둘…

내부에 들어서려 한 순간 살인마 여럿이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 전신을 핥았다. 소름이 돋아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도 모르는 숲 속이었다. 갑작스레 피부가 뜨거워졌다. 불로 지지는 느낌에 고통스러워 바닥을 굴렀다.

나는 기억을 되짚어, 왔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멈추는 순간 칼을 든 살인마가 내 등짝을 찌를 것만 같았다. 수풀이 스쳐지나가는 소리, 작게 울리는 풀벌레 소리… 여러 소리들을 지나쳐 원래 있던 건물으로 돌아왔다. 인간의 손길이 느껴지는 건물 속으로.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전에 보았던 움막이 더욱 친숙했다.

나는 곧장 잠에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피곤한 하루였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했다.

부식의 저주라는 질병이 세계 곳곳에 창궐한 것이다. 인간이 이용하는 모든 금속뿐 아니라 자연에 묻힌 금속, 심지어는 인간이 합금으로 만든 금속까지 세상 모든 금속이 부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부식의 속도는 금속에 따라 천자만별이지만 금과 철의 경우 3일과 7일에 걸쳐 완전히 부식되며, 티타늄 합금 등의 경우는 아직 완전히 부식된 경우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30일이 지난 현재 절반 정도 부식이 진행되었다.

단지 금속이 부식될 뿐인데 어째서 새로운 미생물이 아니라 새로운 질병으로 분류했냐 하면, 이미 세상 인구의 70%에 이르는 자들이 전부 신체에 기계를 심었기 때문이었다. 작게는 팔부터 크게는 전신까지. 그들에게 있어 기계가 부식된다는 것은 자신의 몸이 천천히 죽어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 말이었다.

참 많은 사람이 패닉에 빠졌다. 정전 상태에 이르렀던 교단들 사이의 관계가 감정적으로 변하여 급작스레 전쟁이 발발하거나, 역으로 성전을 중지하고자 외치는 자들 또한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급작스레 부서진 신을 믿게 된 날과 유사하다고.

#9

"이런 상황이 이상하지 않다는 건가요?"
"글쎄, 특이하다고는 할 수 있겠군."

검은 로브를 입은 남성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렇게 확인한 남성의 표정은 귀찮음이 지배적이었다. 지금 세상의 존망이 걸린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데, 확실히 이상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다인가요?"

내가 노려보자 남성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 신께 비는 것? 운명에 대항하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저 낼캐들에게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비는 것? 이보시게, 우리는 너무 지쳤네. 세상이 달라졌는데 우리들만 그대로라는 점에 우월감을 느낄 치기 어린 시기는 지났으며,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저항하기엔 이미 늙어버렸단 말일세."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엔 탈력감이 가득 차 있어 말문이 막혀버렸다.

"…관계자도 아닌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구만. 잊어주게."
"제가 도와드릴게요! 우린 바꿀 수 있단 말입니다!"
"언제, 어떻게 말인가? 우린 이미 희망을 잃었네. 아직 기계가 아닌 자들을 우리 손으로 빼내오는 것에서 오는 소소한 뿌듯함만이 우리의 원동력이란 말일세. 도와주겠다는 말은 섣불리 내뱉는 게 아니야. 우리도 그리하여 그대와 같은 희생자를 내지 않았나."
"…그건!"

그 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온몸이 벌벌 떨린다.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나의 모습에 남자는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 때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네만, 그에 대한 보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건 보호가 끝일세… 부디 무력한 우리를 탓해주게…"

대화는 그렇게 마쳐졌다. 분명 내가 말재주가 더 있거나, 무엇인가 능력이라도 있었다면 남자를 설득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느라 시간이 조금 지나버렸다.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부회는 그저 이전의 행동에 후회를 거듭하는 늙은 집단일 뿐이었으며, 든든한 울타리라고 생각했던 낼캐는 사실 나를 가두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은 의혹이 생겼다.

나는 걸음을 옮겼다.

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미약하지만 아름다운 향기를 쫓았다. 이전에는 홀린 듯이 아무 생각 없이 이동했던 것과는 다르게 주위를 살피며 이동했다. 여러 갈래로 난 길을 굽이굽이 들어갔으며, 그 후엔 다리 하나를 건너 지도에 있는 줄도 몰랐던 숲으로 이동했다. 향기를 쫓아 조금씩 깊숙이 들어가자 이전에 보았던 움막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움막의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이전에 느꼈던 살인마의 느낌이 더욱 짙어졌다.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뒤를 향하지 않았다.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어 움막의 입구에 도달했다. 지푸라기로 덮여 있는 입구를 손으로 열어젖혔다.

#10

내부의 모습은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몇 배는 넓은 것 같다.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겁에 질려서 확실한 비교를 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그렇게 느껴졌다. 그 향기는 벽에 난 수납 공간에서 새어 나왔다. 원목을 깔끔하게 다듬지도 않은 채로 바닥에 놓인 상태. 나는 가장 짙게 향기가 흘러 나오는 것으로 시선을 옮겼다. 양피지였다. 책과 유사한 느낌이었기에 긴장감이 한층 풀렸다.

내용은 낼캐의 역사서라 해야 하나, 최근의 내용까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왕조실록처럼 실시간으로 적어 내려가는 듯 했다. 하지만 중요한 내용은 긴장이 거의 풀려갈 후반부에 있었다. 나는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눈을 크게 떴다.

"…위대하신 카르시스트 이온께서 승천을 성취하는 과정에 있으며, 그에 따라 우리는 애초부터 잘못된, 이 결함투성이 세상을 파괴하여 새로이 낙원을 창조할 것이다. 역대 이온들께선 낙원의 재창조를 위해 많은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이리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최초이기에 다시 그분의 능력을 찬양하리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분은 세상을 단 한 가지 신을 믿을 수 있게 하였으니, 이는 부서진 신이라는 일개 교단의 단일신이다. 그 이유는 온 세상의 기계를 부식시킴으로써 세상을 손쉽게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질병의 형식으로 부식의 저주를 세상에 퍼뜨리도록 한다. 해당 시대가 된다면 인류는 금속 없이는 거의 멸망에 다다를 것이다. 취약해진 인류를 완전히 재구축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글은 그곳에서 끝이 나 있었다. 나는 종이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 ███ ████ █?"
"보았는가?"

한 여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온몸에 문신을 붉은 색과 갈색으로 덕지덕지 그려놓은 여성 하나와 남성 하나가 나체에 가까운 모습으로 서 있었다. 남성이 본인의 언어로 말을 하면 여성이 이를 통역해주는 식이었다. 그 모습에서 선정성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비현실적인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듯 한 신비로운 감정만이 일었다.

"…보았습니다."
"███ ████ ██████ ██████ █?"
"헌데 어째서 그리 침착한 것인가?"
"세상을 진실을 엿보았다 하여, 저처럼 작은 일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약간의 비꼼이 들어간 것이었다. 당신들은 이미 그들에 속한 시점부터 인간이 아니며,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관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이라고. 야만인들 같으니.

하지만 남성은 이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내 몸이 자연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 자신은 이동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진데. 행동을 제한하려 하자 온몸에 새겨진 문신에서 격렬한 화기가 느껴졌다. 이전에 느껴졌던 그 고통이었다. 살이 불타는 느낌에 표정을 찡그렸다.

"████████ ████."
"반항할수록 고통이 늘 뿐이다."
"…"

나는 입을 다물었다.

#11

그들이 나를 데리고 간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붉은색뿐이었다. 굉장히 넓은 방의 중앙에는 눈에 띄게 거대한 마법진 하나가 있었으며, 그 중앙에는 사람의 심장처럼 보이는 살덩어리가 있었다. 신비하게도 심장은 뛰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으며, 그 주인으로 보이는 자들은 살가죽의 안팎이 뒤집힌 채로 벽에 걸려있었다. 팔다리가 못으로 박혀 있었으며, 뱃가죽은 완전히 갈라진 채로 양옆으로 벌어져 있어 다 헤집어진 내장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더욱 잔인했던 것은 그 사람들 전부가 살아있었다는 것이다. 고통을 담고 있는 듯 한 알 수 없는 신음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째서 말을 할 수 없는지 추측을 굳이 한다면 혀나 성대 또한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겠지.

피가 방의 전체에 발라져 있었다. 다시 보니 나를 데려온 남녀의 몸에 발라져 있는 문신 중 붉은 색은 현재 사방에 보이는 색과 유사했다. 나를 저 자들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 것인가? 두려움이 전신을 지배했다.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 ██████ █?"
"어째서 웃고 있는가?"

나는 그제야 온몸의 제한이 풀린 것을 깨달았다. 여자의 통역을 들은 직후 입가를 어루만졌는데, 과연 웃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다시 방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살덩이들, 참으로 아름다운 울림이었다. 기계와는 달랐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사방에 늘어져 있다는 생각에 흥분으로 몸이 떨리던 것이었다.

"흥분되기 때문입니다."
"어째서지?"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압도되었기에."

언제부턴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이상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괴기와 환상에 취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백골과 왈츠를 춘다는 것이지!' 목소리의 성별을 알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남자는 왠지 모르게 들뜬 것 같았다. '그대 또한 우리와 같구나!' '소속감은 참 좋아. 그게 설령 암덩이들끼리의 그것이더라도.' 무엇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마법진에서 거대한 살덩이가 튀어나왔다. 남자는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만 보이는 환각인 듯 했다. 나의 피부에 붙어 있던 문신들이 뱀이 되어 혀를 낼름거렸다. 숨이 턱 막혔다.

'선과 악을 구분 짓는 것은 뱀.' 따라서 나는 혀를 내밀었다. 혀 끝이 갈라진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살덩이에 손을 댔다. 뜨거웠다.

'좌심방과 우심실을 뜯어먹어라.' 가슴이 격하게 아파왔다.

'질병으로 죄를 사한다.' 기침이 나왔다. '피로 세상을 바꾼다.' 전신의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독이 되어라.' 피가 녹색으로 변했다. '말은 죄악을 불러일으키고 행동은 고통을 불러일으키나니.' 목이 녹아내리고, 몸이 녹아내렸다. '저 살덩이가 비로소 선이 될지어다.' 나는 살덩이가 되었다.

기계를 기피한 끝에 살덩이에 집착하게 된 생명이라니, 딱한 자로다.

이후의 기억은 모호하다.

#12

나는 낼캐와 외부인의 중간적 인물이 되었다. 긍정적인 측면 또한 있으며, 부정적인 측면 또한 있었다. 낼캐에게 외부인 취급을 받지 않으며 그들의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긍정적인 측면이요, 가끔 머리에서 수상하고도 신성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부정적인 측면이다.

뒷방 늙은이와도 같은 거부회와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세상에 순응하며, 현재를 모르는 자들일 뿐이다.

하루는 낼캐의 거주지에 머물렀는데, 바깥이 굉장히 소란스러웠다.

"드디어 세상을 재구축할 때가 도래했다!"
"이쿠나안!"
"이쿠나안!"

몇 낼캐가 어떠한 내용을 외치고, 다른 낼캐가 호응을 하는 식이었다. 세상 모든 낼캐가 모인 것일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채 서 있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들의 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사람이 외쳤다. '희생하리라!'

그 자는 그리 말하고 자신의 몸에 칼을 찔렀다. 복부에 푹 들어간 칼을 좌우로 마구 헤집었다. 그의 몸에서 피가 폭포처럼 새어나왔으며, 내장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얼핏 보기에 낼캐들의 4분의 1 정도 되는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 했다. 순식간에 대지가 피로 물들었으며, 내장이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또 한 사람이 외쳤다. '고통은 제물이라!'

그 자는 그리 말하고 자신의 양 눈을 뜯어냈다. 신경이 아직 연결되어 있는 듯 안면 밖으로 나온 눈이 데굴 굴렀다. 그 자는 바닥에 눈을 던지고 거세게 짓밟았다. 마지막으로 머리를 바닥에 큰 소리가 나도록 박았으며, 이는 그 사람의 생이 끊어질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자 또 다른 4분의 1정도 되는 낼캐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했다. 마치 신에게 빌듯 바닥에 엎드린 형상의 시체가 대지에 가득 찼다.

다시 한 사람이 외쳤다. '죽음의 벗이 되리라!'

그 자는 그리 말하고 병을 토해냈다. 세상의 모든 질병이 응축된 듯 수상하고도 역겨운 색의 액체가 바닥에 스며들었다. 그의 몸은 마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가, 결국은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러자 다시 4분의 1정도 되는 낼캐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했다. 세상이 암덩이로 인해 죽음으로 물들어갔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외쳤다. '구원과 기쁨을 얻으리라!'

그 자는 그리 말하고 가만히 섰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남은 4분의 1정도 되는 낼캐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살덩이가 모이고 섞였다. 마치 동물이 동물을 뜯어먹기 위해 달려들듯 광기 어린 모습을 자아냈다. 살덩이가 점차 붙어갔다. 이는 결국 거대한 살의 덩어리가 되어, 심장이 그러하듯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때, 움막에 도달했을 적에 느껴졌던 살인마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사람은 아주 평범한 외국계 40대 남성으로 보였다. 여성일지도 모르겠다.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가 시끄럽게 굴기 시작했다. 고통을 위해 가죽 안팎을 벗겨내노니. 그리고 그 자는 살덩이 앞에 섰다. 자신의 두개골을 수저로 퍼내리라. 그 자는 입을 열었다.

"재창조하리라!"

그리고 시체와 백골, 질병과 살덩이가 세상을 덮었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13

눈을 떴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을 태양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게 세상은 불타듯 붉은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시체가 없었다. 단 하나의 박동하는 살덩이도 없었다. 만일 이 이상한 빛의 세상만 아니었더라면 그저 꿈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위화감이 들었다.

사람 또한 없었다. 본래부터 몸에 기계가 없던 인원은 세계의 0.01%가 될까 싶을 정도로 적은 인원이었으며 그 또한 미약한 세력으로 인해 성전에 휘말려 사망하거나 기계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사실 낼캐들과 연합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죽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계는 멸망했다.

녹과 핏덩이의 땅 위에 발을 내딛었다.

기독교나 천주교의 지옥의 모습이 이것과도 같을까. 세상이 모두 붉었다. 불으로 인한 붉은빛이 아니라 피로 인한 붉은빛이라는 점에서 더욱 고약했다. 나무와 풀은 핏물을 받아먹고 자랐으며, 땅에 닿은 무생물은 어느새 녹이 되어 스러졌다.

이 곳이 낙원인 것일까. 자신을 희생하여 새로운 세계를 연 이온 또한 이곳에는 없으니 명확한 답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세상에 순응하기로 한 거부회나 세상을 아예 모르고 있던 자들 사이에선 내가 가장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을 것이다.

"…으, 이게 무슨…?"
"콜록, 콜록!"
"뭐, 뭐야! 온몸에 반점이…!"

낼캐의 편에 섰던 자들이 곳곳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저들은 자신이 어째서 병들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겠지. 신성한 신비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또한 모를 것이다.

알고 있는 자의 의무. 그리고 우매한 자들을 위한 자기희생.

나는 이온의 유품을 챙겼다.

나는 새로운 세상, 이쿠나안의 카르시스트가 되겠다.

나는 외쳤다.


"씨앗이 뿌려졌으니, 추수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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