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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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그리고 다시 한 발.

늦저녁의 대교는 늘 강풍이 분다. 나는 귀에 이어폰을 끼고는 얼굴을 때리는 바람의 세기를 느끼며 달리고 있다. 이제 루틴이 되어버린 저녁 조깅이다.

다리의 근육이 수축했다가 이완된다. 숨이 살짝 거칠어지면서 살짝 열기가 돈다. 다리 너머 강물에 비치는 달빛은 맑다. 내 옆을 빠른 세기로 스쳐 지나가는 차와 버스들은 늘 그렇듯 저녁의 일상을 표상하고 있다. 이렇게 조깅하러 나올 때마다 보는 광경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권유였다.

후배 녀석이 같이 저녁에 조깅을 나가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온 것이다. 녀석은 잘 알려진 운동 마니아였다. 책상물림인 나와는 전혀 딴판인 성격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내게 그런 권유를 해왔다. 한 손에는 전해질 음료를 들고는.

물론 처음에는 거절했다. 운동을 좋아하는 편도 아닐 뿐더러 매일 업무로 피곤한 내게 그런 시간은 사치였고, 나아가 피로만 돋우는 행위였다. 한 시간의 운동으로 돌아오는 대가가 수 시간의 졸음이라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그러나 후배 녀석은 포기를 않고 내게 들러붙어 계속해서 조깅을 권유했다. 그게 한 일주일 정도 되었을까. 노력도 지극하다 싶어 한 번 같이 나가게 된 것이, 이젠 오히려 내가 더 즐기기 시작한 것이다.

체력이 돌아오니 나름의 재미도 있었다. 이쪽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나는 다시 바람을 느끼며 속도를 낸다. 온몸에 전율이 가득 찬다.

그리고 전화벨 소리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화면을 보니 후배다. 내게 운동을 권유한 이 후배는 며칠 전 업무 중 부상을 당해 지금까지 병상에 누워 있었다.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지만, 며칠 간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긴 했다. 나는 잠시 난간에 기대서 지금까지 바통 삼아 흔들고 다니던 물병을 열어 수분을 보충하고, 전화를 받는다.

"선배, 또 조깅이십니까?"

"어어." 나는 조금 허세를 담아 목소리를 냈다. "안 달려주면 몸이 쑤셔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이고, 그렇게 나가기 싫어하시더니."

"그땐 이 매력을 몰랐으니까."

잠시 낄낄댄 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마을버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좀 어때?"

"몇 가지 더 검사할 게 있답니다. 침식된 상태면 큰일이라고 하는데, 그거 검사하느라 오늘은 내리 굶었어요."

"니가 욕 본다. 하여간 요원들 무시하면 안 돼. 제일 고난이라니까."

"그래도 이게 죽을 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죠." 후배의 목소리에 웃음이 묻어 나왔다. "조금만 있으면 바로 현장 복귀할 테니 너무 외로워 마십쇼."

"징그럽구로 뭔 소리고. 됐으니까 빨리 잠이나 자라."

"옙, 알겠습니다."

쾌활한 목소리에 마음을 놓았다. 어떤 부상이든 쉽게 안심해서는 안 되는 게 내가 일하는 곳이다. 오늘은 멀쩡하던 녀석이 다음 날이면 기괴하게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너무 많이 보았고, 앞으로도 많이 볼 예정이리라.

그리고 나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잠시 멈추었다. 귓가에 어딘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 기지 전체에 울리는 소리. 코드 알레프. 코드 알레프. 혼란스러운 웅성거림과 누군가 달리는 소리.

"야, 야 무슨 일이야? 코드 알레프라니? 격리 실패라고?"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지 내에 격리된 건 아닌 것 같은… 선배, 밖 아닙니까? 이거 이러다 선배 쪽에서 장막 정책 깨겠네. 일단 끊습니다. 이따가 기지 오셔서 확인하세요."

"아, 알았다. 그럼 이따가 보자. 점호 전에 팀원들이랑 잠깐 들르마."

"알았어요."

전화가 끊어지고, 나는 잠시 멈춰 허공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재빨리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시간에 조깅이나 즐기고 있을 때는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버리고 말았다. 업무 중에 충전해뒀어야 하는 건데, 잊고 말았다. 낭패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글렀다. 나는 다시 한 번 물병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들이켰다. 빨리 돌아가야 한다. 무슨 일이 났던지 간에…

나는 다시 슬슬 걷다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대교에서 내려와 강변을 따라 달리는 편이 좋았다. 한참 뛰다 보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계단에는 사람이 많았다. 대교를 통해 건너편 학원에 가려는 학생들, 나처럼 조깅을 나온 사람들, 잠깐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올라오거나 내려가고 있었다. 나는 이들을 헤치고 빠르게 아래를 내려갔다.

"어, 아저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뭘 떨어뜨린 건가 해서 뒤를 돌아보니, 놀라는 소리와 함께 아까의 학생들과 산책 나온 사람들이 계단 중앙에서 쓰러진 초로의 남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보아하니 발을 헛디딘 것 같았다. 머리를 부딪쳤는지 남자는 쉽게 일어나질 못하고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빨리 가야 하는데…'

잠깐 머뭇거리다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나 배터리가 없는 것을 다시 깨닫고는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내가 있어봤자 도울 수가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남자가 컥컥거리는 신음을 내뱉는 장면이었다. 퇴근 시간이라 구급차가 오기까지는 오래 걸릴 터였다.

아니,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지. 나는 다시 앞으로 돌진해 나갔다. 강변길을 따라 달리다 보면 기지로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 나왔다. 내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만약 상황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다면 출입로가 막혀 있겠지만, 열려 있다면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모두 무사하겠지. 나는 더욱 다리를 움직였다. 가쁜 날숨이 배어 나왔다. 속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15분 정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그럼—

그러다 앞에 있는 사내에게 부딪혀 넘어지기 전까지는, 모든 게 괜찮다고 생각했다.

"아으…"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조깅용 옷에 흙먼지가 묻었지만, 우선 내가 부딪힌 사람에게 사과하는 게 먼저였다. 정신을 부여잡고 남자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운동복에 운동화를 신은 차림으로, 누가 봐도 완연하게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이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을 아는 사람이었다. 조깅하다가 몇 번 말을 섞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프리랜서라고 소개했다. 조깅도 나올 정도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면 필시 일거리가 많고 급료를 잘 받으리라고 예상한 적이 있었다. 걸음이 느려 같이 뛰다가도 뒤에 남겨둔 적이 많았다.

"현성 씨 아닙니까… 괜찮습니까? 저 범류민입니다. 몇 번 뵀었는데."

남자는 잠시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몸을 잘 못 놀리는 것 같아 불쑥 걱정이 일었다. 원래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그는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잠시 뒤 상체를 일으켰다. 상체와 하체가 따로 움직이면서 기이한 움직임을 자아냈다. 분명 취한 게 틀림없었다.

"아 범류민 씨였군요… 예 괜찮습니다."

남자의 말은 느리고 단조로웠다. 평소에도 그렇게 발랄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딘지 더 움직임이 괴이쩍었다. 몸의 움직임은 굼뜨고 느릿느릿했지만, 그의 눈빛은 이글거리는 카펠라(Capella)의 광채를 닮아 있었다. 술이 아니라 마약류의 물질에 접한 것인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어디 다치시기나 한 거라면…"

"그 정도로 다칠 몸이 아닙니다. 걱정 마십시오."

여전히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살짝 비틀거리는 움직임에 초점을 잃어가는 눈동자. 그러나 광채만은 여전히 뚜렷하다. 몸을 일으키니 그의 모습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났다. 흙먼지가 묻은 얼굴에 듬성듬성 난 수염. 관리는 고사하고 며칠 간 씻지도 못한 것 같았다. 걷힌 소매 속에서 무언가에 물린 것 같은 자국이 드러났다. 치열은 자세히 확인할 수 없었지만, 분명 대형견 따위가 문 자국처럼 보였다. 상처가 곪아 들어 가는데도 소독조차 하지 않은 듯, 상처에서 노란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같이 뛰시겠습니까?"

"예?"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는 당황했다. 모로 보나 남자의 상태는 뛸 수 있을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그냥 집에서 쉬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나는 지금 같이 뛸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이런 내 우려를 전하니, 남자는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라는 듯 잠시 콧방귀인지 한숨인지 모를 무언가를 내쉬더니 손을 내저었다.

"운동하면 나을 겁니다. 운동하면…"

남자가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난처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을 따라 부는 바람이 더욱더 한랭해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리와 차가 멈추는 소리, 경찰 사이렌이 울리는 소리가 왜인지 모를 경계의 능률을 더하고 있었다. 지금 남자의 제안을 뿌리친다 하더라도 이 상태라면 결국 남자와 행로가 같아져 버린다. 빠르게 뛰어 남자를 따돌리고 바로 기지로 돌아갈까 싶기도 했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연구원이었지 요원이 아니었다. 내 속도로 이 남자가 내가 조깅 코스를 벗어나 이상한 곳에 들어가는 걸 목격하는 걸 방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이 오면 일이 너무 커져 버리고 만다.

그래도…

"제가 갈 곳이 있어서 아무래도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럼 먼저 가보죠."

나는 돌아서서 말없이 뛰기 시작했다. 거추장스러운 권유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니었다. 기지 입구까지는 아직도 그렇게 짧은 거리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었다. 숨이 찰 정도로는 뛰어야 간신히 시간 안에 갈 수 있을 터였다. 잠시라도 쉴 새는 없다. 살짝 속도를 낮추어 물을 입에 머금고는 다시 가볍게 다리를 놀렸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남자였다.

남자는 보던 모습과 다르게 어느새 기운을 차렸는지 가공할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날 따라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내 남자는 내 옆에 서서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의아함과 동시에 불쾌가 치밀었다. 분명히 따로 가자고 이야기를 했을 텐데.

나와 남자는 뭐라고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얌전히 뛰기만 했다. 귓전에 바람 소리가 스쳐지나 갔다. 자전거 도로에서 자전거들이 달리는 소리. 누군가가 틀은 라디오 노랫소리. 지직거리는 잡음. 새의 울음소리. 소방차 사이렌. 무언가의 울음소리.

"이 시간에 달리면 좋죠?"

예의 말투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저도 매번 여기로 옵니다. 항상 즐겁습니다. 자연을 보고 그 옆에서 운동하는 게 좋더라고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욕지거리를 내뱉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면 다음부터는 본 척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왜 이렇게 장소가 안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되게 웃기지 않나요."

남자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원천적으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자기 몸을 움직이면. 될 것을 굳이 무언가를. 만들어서 자연을. 자신들의 구역에서 몰아내고는. 산업과 인위에 둘러싸여. 몸뚱아리를. 떨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자연의 모조품. 곁으로 가지요."

남자의 중언부언은 점차 느려지고 잘 들리지 않았다. 차츰 그는 달리는 와중에 고개를 자신의 품에 묻었다. 저러다 앞으로 고꾸라지지나 않을까 했지만, 휘청거릴 즈음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확실히 남자가 술이나 약 둘 중 하나에 취했음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르럭대는 소리.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은 옆을 향했다. 남자는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남자의 턱이 부들거리면서 입술에서 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런 주제에 몸은 계속 앞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다리는 점차 느려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남자는 중심을 잃더니 거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러나 나는 봐줄 새가 없었다.
술에 취했으면 집에 가라고 한 건 나였고, 그걸 반대한 건 자신이었다. 따라온 것도 자신이었다. 저대로 길바닥에 쓰러진대도 뒤에 오는 사람이 구해줄 것이었다. 하다못해 기지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다면 내가 직접 경찰에 신고해서 남자를 귀가시킬 수도 있었다. 아무튼 지금은 내게 기지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나는 계속 내달렸다.

그리고 어깨를 누군가 내려치는 감각이 들었다.

나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왼쪽 어깨가 얼얼하더니,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불타는 것 같은 아픔이 전신에 흘렀다.

그리고 누군가가 발을 질질 끌며 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후 시야에 누군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남자였다.

"왜 혼자 가고 지랄이야… 씹새끼가."

나는 욕이라도 내뱉으려고 했지만 아픔 때문에 입이 열리질 않았다. 남자가 나를 걷어차며 말했다.

"응? 안 그래? SCP 재단 3등급 연구원 범류민."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알고 있었구나.

남자가 거품을 문 턱에 힘을 주더니 고개를 낮추고 쪼그려 앉았다. 그의 얼굴은 조금씩 경련하고 있었다. 손에 무언가 검은 걸 들고 있었다. 총이었다.

"야 이, 야 이 재단 새끼야." 남자가 어눌하게 말하다가 킬킬거렸다. "아…이 재단. 좆같은 옥리 새끼."

"너…어디서 왔어." 나는 간신히 아픔을 참아내며 물었다.

"보채지 마… 내가 이야기할 거니까."

남자가 총을 자신의 권총집에 집어넣고는 내 머리를 움켜쥐고는 들어 올렸다. 목에서 뚜둑하는 소리가 났다.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우린 더 이상. 좌시할 수가 없었어. 우리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이 푸른 행성이 다 조져질 거였다고. 알아?"

"이 씨발 BE 새끼들."

"이해력이 좋네."

남자가 히죽 웃다가 잠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나랑 게임 하나만 하자. 너 사람 추월하는 거 존나 좋아하잖아."

"뭐…?"

남자가 우악스럽게 자신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무언가에 물린 자국. 그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대형견이 아니었다. 인간이었다.

"…그 바이러스? 이걸 어떻게…"

"확실하게. 없애야 했거든. 자연을 지키는 대신 인간만 없앨 수 있는 특효약…" 놈이 입꼬리를 올렸다. "이건 인간만 덮쳐."

"그렇다고 그걸 직접…" 얼굴에서 피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골라."

남자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남자에게서 알 수 없는 냄새가 풍겨왔다. 잠시 뒤에야 그 냄새가 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사취.

"나랑 뛰어. 뛰어서 잡히면 넌 나한테 죽어. 중간에 도망가도 넌 죽어. 널 산 채로 뜯어먹을 거야. 네가 고통을 끝까지 느끼도록. 어렵지도 않아. 배부터 씹어먹을 거거든. 언제나 자기 창자에 목이 졸려 죽는단 소리가 뭔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네."

남자가 히죽거렸다.

"근데 네가 날 이기면. 이기면 먹기 전에 죽여줄게."

남자가 권총집를 두드렸다.

"이거로. 이거로 네 뇌를 부숴줄게. 머리에 한 발. 가슴에 한 발. 남는 거 없는 장사지."

그리고 남자가 날 일으켰다.

어깨를 지혈할 새도 없이 나는 달렸다. 더 이상 조깅할 때처럼 쉬엄쉬엄 달릴 수는 없었다. 어깨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는 않은지 피는 처음만큼 많이 나진 않았다.

입을 꾹 닫고 달린다. 바람이 불어와 얼굴에 부딪힌다. 이전과는 다른 향기가 강변을 메우고 있다. 재와 시체의 냄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갈려나간 어깨가 욱신거리면서 아파져 왔다. 달릴 때마다 어깨가 움직이는 통에 고통은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혔다.

남자는 뒤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뒤는 돌아볼 수 없었지만 소리로 남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달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까 넘어질 뻔한 건 변환 과정의 일환이었을까.

머릿속에서 자꾸만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의 장면들이 생각났다. 산 채로 뜯어먹히는 사람들. 고통을 느끼다 갑자기 변이하고, 그렇게 좀비가 되는 과정. 식은땀이 났다. 실제 008 감염자들의 모습도 생각났다. 기지 하나가 전소되었다고, 기록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불타면서도 버둥거리는 시체들…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보행 도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달 아래서 달리는 것은 오로지 나와 미친놈 둘뿐이었다. 날숨이 거칠어지면서 폐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들이켜는 숨 하나하나마다 칼처럼 아팠다. 점점 무리가 오고 있었다. 루틴보다 너무 많은 거리를 달렸다. 당연히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발이 엉켜 넘어지고 만다.

"씨발…!"

불에 덴 듯이 몸을 일으키고 바닥을 헤집는다. 바보처럼 혼자 넘어지다니.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미친 듯이 다시 속도를 내지만, 발목을 접질린 듯 부서지는 고통이 다리를 꿰뚫는다. 식은땀이 흘렀다. 목이 바짝 타오르면서 강렬한 갈증이 났다. 등 뒤에 놈의 숨결이 와 닿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보았던 도축되는 돼지의 단면이 떠올랐다. 피와 담즙이 흘러 살갗을 적시는 그 모습. 펄떡일 듯 신선했던 그 붉은 살. 숨이 가빠졌다.

바람이 야속하게 불어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남자의 속도가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본래 SCP-008은 사람을 변환시키는데 약 하루 정도가 소요된다. 저 미친놈이 말하는 것만 보면 변화는 몇 분 뒤에 완료될 듯했다. 아마 변칙적인 조작을 가한 모양이었다.

어찌 되었든 변화의 중추적인 요소인 숙주의 생물학적 사망은 소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를 노리면 된다.

죽어라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는 동시에 날카로운 바람이 목구멍을 턱턱 때렸다. 발목의 통증 때문에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 번 더 멈추기라도 하면 뒤에서 달려드는 식인종 새끼가 내 목을 물어뜯을 것이었다. 뒤를 슬쩍 바라보니 놈은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속도가 더 붙은 것 같았다. 조작이 변이 속도에만 개입된 건 아닌 것처럼.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려 눈앞으로 떨어졌다. 눈이 따가웠지만 대충 훔쳐냈다. 눈앞이 컴컴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기지 입구까지는 이제 채 50m가 남지 않았다. 위장이 꿈틀대면서 위액을 목구멍으로 뿜어냈다. 눈앞이 핑핑 돌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욕망이 뇌내에 가득 찼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위태롭던 발목에 한 번 더 격한 통증이 일었다.

"썅…"

뛸 수가 없었다. 더는 거세게 움직이지 못하는 오른쪽 발에서 천천히 부어오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놈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가운 비소가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갔다. 제대로 디딜 수 없는 발을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움직이고 움직였다. 팔다리가 무거워졌다. 마치 무정형의 무언가가 등 뒤에 업힌 듯이. 기를 쓰고 앞으로 나아갔다. 살아야 했다.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기괴한 신음이 더욱 커져갔다. 놈은 점점 변하고 있었다. 더는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으면서 찢어질 것만 같은 다리가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심장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고통스러웠다. 멈출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고만 싶었다.

그리고 눈앞에 기지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빽빽한 억새와 갈대밭으로 가려진 입구는 하수도 처리시설로 위장되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직원증을 갖다 대면 열리는 구조였다. 나는 재빨리 품속에 넣어진 직원증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다가갈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저기로 다가가 직원증을 찍으면 놈이 기지의 위치를 알게 된다. 더군다나 내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놈이 날 가만 놔둘 것 같지도 않았다.

영원히 이렇게 뛸 수는 없다. 발은 이미 한계다. 어깨에서 흐르는 피도 아직 멈추질 않는다.

아직 기지 입구까지는 몇 미터 정도가 남아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디어가 났다.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놈은 신경계에 문제가 생긴 듯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나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속도는 엄청났지만 신체적 사망에 이르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그 정도면 되었다.

나는 갈대밭으로 몸을 던졌다. 괴성이 울려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놈의 소리였다. 인간의 말도 잊어버린 수준인지. 총성이 뒤를 이었지만, 갈대만이 흔들렸다.

필사적으로 몸을 숙여 안쪽으로 내달렸다. 발끝에 통증이 느껴지더니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군대 시절을 생각하며 포복으로 계속 전진했다. 뒤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게, 거친 목소리로 어딨느냐고 소리치는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 역시 나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입구 쪽으로 몸을 숨겼다. 권총집에서 권총을 꺼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놈의 모습이 보였다. 놈의 손은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놈은 분명히 변이의 끝을 겪고 있음이 분명했다. 여러 번의 기침이 이를 반증했다. 그의 다리가 살짝 꺾이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왜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는지는 모르겠다. 바닥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주인공의 다리를 잡는 장면. 좀비의 손.

그리고 나는 놈의 뒷다리를 움켜쥐었다.

놈이 당황하더니 허공에 권총을 쏘아댔다. 날 제대로 조준하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놈의 다리를 끌어안고 앞으로 무게를 실었다. 그러자 놈의 몸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놈이 겪는 경련의 진동이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사취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놈의 손에서 권총이 빠져나간 걸 확인한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앞으로 굴러가듯 튀어 나갔다. 그리고는 놈에게서 반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놓인 권총을 주워들었다. 긴장이 전부 풀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엔도르핀으로 간신히 목숨줄을 붙여놓았던 근육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다 끝났다. 끝난 거야.

괴성이 들려왔다.

재빨리 몸을 돌렸지만 놈에게 밀려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양손으로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놈은 일말의 고통조차 보이지 않았다. 목이 졸린다는 개념조차 놈에게는 사라지고 없었다.

"씨발…!"

놈의 눈은 이미 번들거리는 회색으로 표백되어 있었다. 입이 벌려졌다가 사냥용 덫처럼 흉악한 소리를 내며 여닫혔다. 인간의 입이 아니었다. 이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살덩어리에게 달려드는 포식자의 입이었다. 최대한 내 얼굴에서 떼어놓으려고 했지만, 총상을 입은 내 어깨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왼팔에 힘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총성.

순간 놈이 움찔하더니 축 늘어졌다. 기겁하며 놈을 밀치고 보니, 머리 후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멍하니 총을 쏜 곳에 시선을 던졌다. 후배가 그곳에 서 있었다.

"…너 괜찮냐?"

"지금 걱정할 건 선배 같은데요."

후들거리는 무릎으로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후배가 다가와 날 부축해 주었다.

"저 새끼 엔트로피를 넘어서야. 스스로 좀비, 그러니까 SCP-008에 감염되어서—"

"알아요."

후배가 뒤를 가리켰다. 몸을 놀려 뒤를 돌아보았다.

온 세상이 안개에 가려져 있는 듯한 환상에 빠졌다. 자세히 보니 그건 고층 건물들에서 나는 연기였다. 소방차와 경찰차의 사이렌이 지치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타들어 가는 매캐한 연기가 눈을 아프게 했다.

곧이어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귀를 찢었다. 달릴 때 들렸던 울음소리. 전보다 수십 배로 커진 그 울음소리. 그리고 이에 화음을 맞추는 비명.
저 멀리서 마을버스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강으로 떨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어떤 내음. 지금까지 전혀 의식하질 못한 내음이었다. 무심결에 코를 막았다. 너무나도 역한 그 내음은 어느새 강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냄새가 어떤 냄새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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