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시.
"여름이에요. 5월 초였습니다. 저는.. 저는 뭘 했죠?"
좋아요. 요청대로 되어가고 있네요. 기억나는 대로 말해주세요.
내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이 떨렸다. 틀림없이 기억 어딘가에 박혀 있던 이야기는 사라졌다. 눈앞의 소년은 그 하얀 머리에 걸맞은 하얀 웃음을 지으며 나를 재촉했다. 무슨 이야기를 더 하라는 거야. 5월 초. 여름. 내가 뭘 했지? 내가 어디서, 누구와 춤을 췄지? 바위에서 누가 떨어졌나? 9시에 집에 내가 왜 돌아갔지? 건너편의 청년이 혼돈에 떨리는 내 눈동자를 한심한 눈초리로 보았다. 아니. 한심한 눈초리가 아냐, 저건. 텅 빈 거야. 검은색으로 가득 메워진 눈은 물감 덩어리와도 같이 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백발의 소년은 청년을 제지했다.
귀신 군, 그 정도만 해요. 저 사람 힘들어하잖아.
내 몸을 목줄에 채워놓은 걸로도 모자라서 내 시선까지 목줄에 채우려고 하는 건가. 난 네 애완동물이 아냐.
맙소사. 저게 사람의 목소리라고? 웃기지 마. 소년의 말에 대답한 청년은 그 끔찍한 목소리를 통해 나를 현실로 끌어냈다. 그 목소리는 분명 너무나도 끔찍했지만 어딘가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를 때 느끼는, 그런 연민. 정신을 차려 보니 그의 눈은 내 눈에서 멀어져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덕에 나는 압박감이 한층 가시는 걸 느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그 백발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내게 '자우'라고 소개했다. 자우는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내게 말했다.
미안해요. 귀신 군은 당신이 감당하기는 힘들 거에요. 다시 쳐다보지는 않을 테니 진정하세요. 자, 그럼 다시.
"아, 그래요. 우리 어디까지 했나요?"
5월 초, 여름이요. 잘 생각해봐요. 당신은 집에 왜 돌아가야만 했죠?
"그거야 그때 친구 집에 놀러가서.."
그리고 나는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과거의 기억은, 그러니까 내가 지우려고 했던 기억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내가 왜 여기 앉아 있었는지에 대해 떠올렸다. 나는 길을 가다 기억을 지워준다는 전단을 보았고 그곳에 흥미를 느껴 전화를 걸었을 뿐이었다. 이 두 명, 소년과 청년이 정말로 그 일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소파에 앉아서 그들이 말해준 대로,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을 말하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내가 진실로 잊어버리고 싶던 기억 하나를.
5월 1일. 여름. 콜로라도의 여름은 따뜻하다. 미시간과 비교할 바 없이. 나는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시니어였다. 고등학교 4학년이 늘 그렇듯 내 주말은 파티로 시작해서 파티로 끝났고, 나는 시간을 흥청망청 보내며 그달 말에 있을 졸업만을 기다렸다. 그 날에, 나는 케이트가 준비한 파티에 갔었다. 파티라기보다는 작은 모임이었지만. 케이트의 집에는 앤드류, 릭, 던컨, 그리고 리즈가 있었다. 나는 남들보다 일찍 도착해서 케이트와 마인크래프트를 했고, 한 시간 후에 앤드류와 릭이 왔다. 슬슬 비디오 게임에 질리기 시작할 무렵 리즈가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던컨이 왔다.
우리는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케이트네 뒷마당에 나갔다. 해는 이미 졌지만 하늘은 아직 파란색 물을 덜 뺐고, 우리는 던컨이 집 구석을 뒤져 찾아낸 싸구려 스피커로 노래를 틀었다. 그 여름날의 음악 위에서, 우리는 춤을 추었다. 아, 그래. 앤드류와 케이트가 우리한테 스윙 댄스 가르쳐준다고 했지. 앤드류, 케이트, 릭과 던컨은 뒷마당에서 춤을 추었고 리즈는 자리에 앉아 구경했다. 나는 멋쩍게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리즈는 내게 물었다.
"음, 나 지금 엄청 긴장했는데 긴장 푸는 법 알려줘."
"그런 걸 갑자기 내게 물어봐도.."
"너 토론부잖아. 사람들 앞에서 말하려면 엄청 긴장할 텐데? 그런 거 막 혼자서 풀고 그러지 않아? 더군다나 그쪽은 영어가 모국어도 아닌데 말이야."
이 상황에서 "아니, 난 그냥 긴장한 상태로 토론해. 내가 괜히 저번 지역 대회 예선 탈락한 게 아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내 머릿속을 뒤졌다. 결국, 찾아낸 방법은 내 개인적인 사견으로 보자면 매우 실망스러웠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나는 리즈에게 그 방법을 알려주었다.
"눈을 감아봐."
리즈는 정말로 눈을 감았다. 늪 색의 눈동자가 굳게 닫힌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잡념이 내 마음에 머물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그녀는 그대로 달려나가 앤드류에게 고백했다. 따뜻한 공기가 그 어색하고 순수한 감정의 주변을 감쌌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케이트가 달려가서 그 둘을 껴안기 전에. 릭이 크게 웃어버리기 전에. 던컨이 환성을 지르기 전에. 모든 게 끝나버리기 전에.
"어?"
잠깐. 리즈가 고백하기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했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은 순식간에 장편의 영화에서 컷이 분할된 만화로 변했다. 그리고, 그 만화책은 내가 리즈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장면부터 리즈의 고백까지 잘려나가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드러냈다. 자우는 눈치가 매우 빨랐고, 나를 다시 안심시켜 주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다음 이야기를 해 주세요.
"네. 이거 정말 당혹스럽네요."
리즈는 그 떨리는 눈으로 앤드류를 쳐다보았다. 앤드류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눈을 감고 고백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은 새로운 커플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 둘에 몰려 왁자지껄 떠들었다. 나는 창 바깥으로 그걸 본 직후, 케이트의 집 안에 들어가, 정말로 웃기는 일이지만 마인크래프트를 하기 시작했다. 리즈가 앤드류에게 안길 때부터 환성이 들리기까지. 아. 물론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사각형 블록을 하나둘 세심하게 쌓으면서, 그들이 그 고백의 뒷처리를 할 때까지 바깥으로 나갈 적절할 시간만을 재고 있었다. 나는 소리가 잠잠해질 때쯤 바깥으로 나갔고, 리즈에게 말을 했다.
저녁 식사는 맛있었다. 그리고 다시 당혹스러움은 내 마음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리즈에게 저녁 식사가 맛있다고 한 건가? 어째서 기억이 듬성듬성하지? 분명히 처음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기억하던 날인데 어딘가 부족했다. 벌레가 파먹은 듯, 기억 곳곳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절대로 메우지 못할 구멍이. 아니, 메우고 싶지 않을 구멍이. 나는 비로소 이 위화감을 이해했다. 자우는 조용히 미소짓고 있었다.
"아, 그래요. 저녁 식사는 맛있었죠."
빨리 배우시네요. 네, 그렇게만 해주시면 돼요. 자연스럽게 기억을 얘기해주세요.
그래.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맛있었지. 파티가 끝나고, 차가 있는 사람은 다들 떠났다. 집 안에 남아있는 건 케이트와 나, 그리고 리즈 뿐. 앤드류는 분위기를 읽는데 끔찍했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다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콜라를 맥주 삼고 감자 칩을 안주 삼아 이야기를 했다. 화제가 오늘의 고백으로 옮겨가자, 나는 그 대화에 조금 참여하다 살며시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달이 매우 아름다웠다. 구름 안에 유폐 당한 슬픈 위성. 지구의 옆을 영원히 맴돌지만, 인간에게 그 품을 빼앗겨버린 은색 바윗덩어리. 아아, 그래요. 우리는 같습니다. 완전히 같다고. 빌어먹을 정도로 같아.
문이 열리고 누군가 따라 나왔다. 나는 차를 타고 집에 갔고, 옷을 대충 집어 던지고 침대에 누워 한 시간 이상을 꺽꺽댔다. 어둠은 내 이성을 삼켜버렸고 어느 때와 같은 주말이 다시 시작되었다. 기억의 구멍은 그곳에 가장 크게 있었다. 문이 열릴 때부터 차를 탈 때까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고마워요. 자, 다시.
"여름이었습니다. 5월, 아 그래요. 5월 1일. 저는.."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불완전한 기억은 그냥 넘어갔다. 백발 소년은 내 이야기를 천천히 지휘하며 들어주었다. 때로는 어느 부분을 강조해서, 때로는 어느 부분을 누락해서. 그에게 이야기를 다시 말할 때마다 기억은 희미해져 갔다. 이내, 그 날의 기억은 내 기억이 아닌 전혀 새로운 사람의 기억이 되었다. 몇 시간 전의 내 기억이. 아무리 머리를 감싸 쥐어도 그 날의 세세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텅 빈 여름 공기에 공허하게 울리는 내 묘사만이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 날의 자취마저 씻어냈다. 3인칭 관찰자 시점 문장으로서의 완전한 전환이었다. 그래. 윌리엄은 2011년 5월 1일, 파티에 갔다. 그게 전부다. 나머지는 처음부터 없던 일이야. 나는 마지막으로 자우에게 질문했다.
"근데 이 대화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지우죠?"
아, 그건 좀 다른 방법을 쓰죠. 제 직장에서 쓰는 방법이요. 전 좋아하지는 않지만.
"직장.. 이요? 혹시 FBI 같은 데서 일하시는 분인가요?"
비밀이에요. 보수는 이미 기억으로 받았으니까.. 음, 이건 선물이라고 해 두죠. 제 직장 동료들이 윌리엄 씨에 대해 알게 되면 큰일 나요.
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을 느끼며 곯아떨어졌다. 잠이 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 자우가 이상한 알약을 꺼내는 장면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윌리엄 윌슨은 2015년 5월 2일에 깨어났다. 그는 5월 1일, 귀중한 토요일에 자신이 뭘 했는지 정말로 궁금해했다. 아, 빌어먹을. 좀 더 신중하게 놀았어야 했는데. 술이라도 마셨나.
한편, 5월 1일 오후 어느 집의 대문을 막 나서는 백발의 소년과 검은 셔츠의 청년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귀신 군. 오늘도 만족스러웠어요. 이 기억은 분명히 좋은 이야기가 되겠죠?
글쎄. 나는 별로. 너는 네가 편식이 심하다고 자각하지 않나?
사랑 이야기는 강한 감정을 담고 있어요. 그래서 짝사랑 이야기는 씁쓸하면서도 강한 단맛이 나죠. 캔커피처럼. 아메리카노만 먹는 편식의 왕, 귀신 군은 모를 맛이죠. 귀신 군이 나한테 편식 얘기를 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메리카노도 커피 원두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달라지지. 삶의 끝에 몰려있는 사람의 기억은 전부 다 다른 맛이 나는 법이야.
그러니까, 결국 한 종류만 먹는다는 거잖아요. 편식쟁이. 앞으로 나한테 편식 얘기는 꺼내지도 마요.
캔커피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재단의 전화가 날아드는 핸드폰 액정에는, 5월 1일이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저 얘기 듣기에는 과도하게 적절한 날이었어. 대문을 나서는 자우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고, 검은 셔츠의 청년은 그걸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백발의 소년은 대문을 벗어나 보도블록에 그 발을 내디뎠다. 그 날 밤에 먹을 기억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