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야

안식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호야를 달구어 어둠을 몰고 거친 방구들 위에 정좌하니 접동새 한 마리 날러가며 비명 지른다.

저 밖에 기어가는 이가 누구뇨.

인식이 언제나 그러하듯 삶은 공허하며 슬픈 인종의 입은 이따금 아─아 탄식하고, 휘몰아 되새겨 볼 제 가뭄은 우리 모두의 입술에 있나니.

저 밖에 꿈틀거리는 이가 누구뇨.

굳은 밤,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아 달은 스스로 사무쳐 몸을 숨기었고 태양은 떠오르려면 멀었으니, 부디 이불 속에 몸을 숨기어라.

저 밖에 기대어 서 있는 이가 누구뇨.

여명은 오지 않았다, 온다던
저 머나먼 곳에서 뭉그적대는 광명(光明)─

— 김철현, 「고대(苦待)」




1910년 9월 4일
일본, 도쿄, 코지마치(麹町) 구

청명한 밤이었다.

한 남자가 관사 발코니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근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만지고 지나갔다. 편안하고 신선한 미풍이었다. 언제나 이곳의 바람은 맑고 푸르렀다. 수심에 잠겨 있는 남자의 얼굴에도 약간의 여유를 가져다 줄 정도로.

그는 몸을 돌려 어린 딸들이 놀고 있는 거실로 거닐어 갔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오는 줄도 모르고 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새된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 나잇대 특유의 발랄함으로 가득한 비명이었다. 아이들은 쉽게 회복하고, 쉽게 자라난다.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며 멈추어 섰다. 시간은 어느새 놀이의 끝을 알리고 있었다.

"후유, 유키, 이제 자야지."

아이들이 동시에 머리를 들어 올렸다. 판박이로 닮아 있는 두 얼굴이 그를 응시하자, 남자가 피식 웃으며 아이들에게로 걸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즐거움으로 넘실대던 얼굴 둘 모두가 이제는 완연한 아쉬움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근데 아빠 "

흰 유카타를 입고 있는 아이가 말끝을 길게 늘였다.

"우리 조금만 더 놀면 안 돼요?"

"지금은 안 돼."

사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후유, 말했잖니. 아빠 내일 해외로 나가야 한다고. 내일 아빠 가는 거 보려면 오늘은 일찍 자야겠지?"

"조오금만이라도?"

"조오금만이라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지만, 사내는 웃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아이들은 주위의 말투를 잘만 습득한다. 이 너스레를 떠는 말투를 어디서 배워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은 녀석이 능청맞게 구는 걸 보고 있자니 유쾌한 기분이 절로 일었다.

후유는 쌍둥이 중 첫째였다. 겨울에 난 그의 쌍둥이 딸들은 계절에 맞추어 겨울이라는 뜻의 후유, 눈이라는 뜻의 유키라는 이름을 얻었다. 보고 있으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똑닮은 생김새였지만, 첫째인 후유의 남다른 활발함은 둘째인 유키의 조용함과 비교하면 금세 드러났다.

붉은 유카타를 입고 있는 유키는 그 성격대로 이미 자리를 조용히, 그리고 꼼꼼히 정리한 뒤 일어서고 있었다. 남자는 유키를 왼쪽 팔로 안은 뒤 다른 쪽 팔을 후유에게 내밀었다.

"가자, 후유. 고집 부리지 말고. 그래, 장하지."

남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그는 아이들이 침대에 눕도록 도와준 뒤, 이불을 끝까지 여며주었다.

"침대에서 장난치지 마렴. 내일 아빠한테 손 흔들어 주다 말고 꾸벅꾸벅 잠들면 어떡해. 우리 강아지들 손 흔들어주는 거 좋아하잖아, 그렇지?"

"좋아해요."

후유가 우스꽝스럽게 대꾸했다. 부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다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킥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키는 이 자그마한 익살에 동참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아빠."

유키가 남자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유키가 이럴 때에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였다. 후유처럼 나대는 성격과는 정반대인 이 아이는 언제나 신중하고 조용하게 다가와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남자는 몸을 숙여 유키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러니, 유키."

"꼭 가야해요?"

"…그래."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유키의 이마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빠 임무란다. 나라에서 아빠가 거기 꼭 가야한다는구나. 걱정하지 마라, 우리 딸. 가족들이  니카호 일족이 너희들을 보살펴 줄 터이니."

"난 후미코가 좋아요. 진짜 엄마 같아. 아빠, 후미코가 진짜 우리 엄마가 되면 안 돼요?"

후유가 졸린 투로 대꾸했다.

남자의 얼굴이 갑작스레 굳었다. 엉뚱한 말에 놀라고 또 그것이 한없이 사랑스러워 웃음도 나는 것이 사실이었으나, 이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그의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 갑작스러운 아픔 앞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딸들 앞에서 아무 일도 없는 척 웃음을 쥐어 짜내는 것뿐이었다. 그래야만 했으니까.

"그러면 안 되는 거란다, 후유."

남자가 쓴 웃음을 지으며 최대한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만약 너희 아빠가 후미코랑 결혼하게 된다면, 후미코의 아빠가 너희 아빠를 죽이려고 들 거란다. 둘째, 후미코는 따져볼 때 너희 사촌이고, 그 말인즉슨 후미코는 아빠의 조카라는 뜻이거든. 사람들은 이런 걸 근친 결혼이라고 부르고, 그런 짓은 하면 안 되는 거란다. 그리고 셋째 "

남자가 숨을 들이쉬고 아이들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너희 정말로 음… 엄마가… 있으면 좋겠니?"

그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남자는 자신 안에 내재한 슬픔을 가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서글픔과 아픔도 동시에 그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아내의 모습은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나 다름 없었다. 만일 남자가 이전의 성품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벌써 아이들을 두고 머나먼 땅으로 떠나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변했다. 아내와의 삶으로 하여금.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유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 아이가 미약한 힘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유키의 작은 손에서 전달되는 온기가 갑작스럽게 남자의 가슴을 두드렸다. 눈물이 치솟는 걸 잠시 붙들고 있어야만 했다. 그 작은 몸집 안에 어떻게 그렇게 큰 마음이 들어 있는 건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어느새 자라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남자는 이따금 깜짝 놀라곤 했다. 지금 역시 그러했고.

"기운 내 꼬맹아!"

후유가 침대 위에 폴짝 일어서서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화가 나면 사부로 삼촌이 이렇게 토닥여줬어요. 기운 내요 아빠!"

남자는 무어라고 대답하려고 했으나, 웃음만이 비어져 나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 딸들에게는 고맙다는 말밖에 못하겠구나."

"별 말씀을."

후유가 다시 침대 위에 누우며 우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남자가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어떻게 이런 영애분들을 키웠는지. 이제 자려무나, 우리 아가들."

웃음기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남자는 아이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방의 불을 껐다.

"잘 자렴, 우리 공주님들. 아빠가 사랑한단다."

그는 침실에서 조용히 걸어나왔다. 방안에서 작게 대답하는 소리를 듣고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유키의 온기가 아직 손에 남아있었다. 아픔은 자각하기도 전에 사라져 있었다.


"짐은 다 끝났군."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의 슈트케이스에는 공책과 펜, 그리고 기이하게 생긴 전통 물건이 즐비하게 놓여져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넣어두지 않은 것은 조사국의 제복이었다.

남자는 복잡한 얼굴로 제복을 집어들었다. 누런 군복. 그 메마른 색상에서는 폭력의 내음이 풍겨왔다. 그 처절한 색감 앞에 모든 것은 황국의 영광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지독하게 고통스럽고, 동시에 지독하게 자랑스러운 색상이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가책도 갖지 않고 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할 아무 요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가 할 일은 오직 그의 아이들을 위해 일하는 것뿐이었으므로. 그 장소와 그의 조국에 대한 생각을 전부 잊고.

하지만 이제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턱을 문지르며 군복에 매인 명찰을 바라보았다. 명찰에는 라는 이름이 정자로 새겨져 있었다. 그는 명찰을 부드럽게 어루어 만졌다. 이름마저 성씨 같은, 어딘가 어색한 이름이었지만 이미 너무나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그가 세 번째로 소유하게 된 외국의 이름.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얻은 이름이 되리라. 앞으로는 이 이름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도, 그의 딸들도.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한노는 문으로 재빨리 걸어가 상대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한노?"

말쑥한 인상의 젊은이가 혼란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자네였군, 신페이. 조용히 하게. 우리 딸 둘 다 방금 자러 갔단 말이야. 조심해서 들어오게. 애들은 푹 자야하니."

"알겠어."

신페이라 불린 남자가 낄낄댔다. 젊은 사내의 얼굴은 웃음에 익숙한 듯 입가와 눈가에 옅은 주름을 만들어 냈다. 유쾌한 아우라가 그의 주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정말로, 두 살배기 애들이라도 되는 것마냥 저 애들을 돌본단 말이지. 우리 부친은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생존 여부도 몰랐을걸."

"그야 자네 부친은 사무라이 정신의 소유자 아닌가." 한노가 씩 웃었다.

"빌어먹을 사무라이 것들."

방문객이 얼굴을 찌푸렸다.

"신시대니 뭐니하며 메이지 시대가 온 지가 언젠데. 사무라이는 또 뭐냐고, 응? 뭐 당신 말씀으로는 진짜 마지막 사무라이 나부랭이였던 것 같긴 하다만."

"나이 먹은 사람들이 으레 그러지 않나."

한노가 제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하며 대꾸했다.

"그렇지 뭐. 아, 까먹을 뻔했다."

젊은이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한 병의 청주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한노의 눈이 갑작스레 커졌다. 다음날 떠나야 하는 것을 아는 그였지만, 그 영롱한 빛깔을 보고는 군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아이들과 함께 있을 제에 어떻게 음주를 사사로이 할 수 있었겠는가? 한노는 살짝 주저하는 얼굴로 청주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진급했더니 본가에서 한 병 보내주더군. 알잖아, 내 친가가 예전에 센다이번이 있던 곳이라는 거. 거기 청주가 기가 막힌다니까?"

"알다마다."

한노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생각만 해도 그 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실로 강렬한 유혹이었다.

"내 생각엔 이게 우리 진급의 꽤 좋은 에피타이저가 될 것 같은데. 어디, 한 잔 하는 거 어때?"

한노는 살짝 아이들 쪽을 바라보았다. 한 병을 둘이서 나눈다면 그리 많이 마시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아이들도 지금은 잠에 빠져든 듯, 새근거리는 소리만 미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런 때라면…

"어쩔 수 없군."

전혀 어쩔 수 있는 목소리로 한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딱 한 병만 하세. 애들 안 깨게 조용히!"


□ □ □ □


그들은 발코니 가까이 놓인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청주는 말 그대로 일품이었고, 한노는 아이들의 잠을 깨우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술을 즐겼다. 신페이도 꽤 신이 난 것 같았다. 신페이가 가진 열정과 야망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이 유망한 젊은이의 발걸음은 언제나 빨랐고 또 거세었다. 이제 대위를 단 것은 그러한 그의 저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대위가 된 것은, 제아무리 정식 군사 조직이 아닌 조사국 내부에서도 매우 빠른 승진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기회를 얻은 것이 그에게 퍽 즐거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한노에게도 적용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풍경 한 번 좋군."

신페이는 발코니 위에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신페이가 부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이건 상부한테 꼭 따져야겠어. 왜 나는 관사가 이런 곳이 아닌 거야? 이런 곳이었으면 봐, 하루에 한 병은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풍류가 기가 막히는군그래."

"바로 그래서 자네한테 이런 걸 안 주는 거야."

한노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그렇고, 자네 관사가 여기보다 더 넓지 않나? 거의 두 배라고 알고 있네만."

"그렇지."

청주로 가득 찬 잔을 홀짝이며 신페이가 대꾸했다.

"근데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니까. 독신한테 세 사람 가정이 쓰는 집보다 큰 집을 준다고? 그것도 두 배나 되는?"

"말했잖아. 결혼하라고."

"웃기시네."

신페이가 툴툴거렸다.

"난 늙기 전까진 독신으로 사는 자유를 즐길 거라고. 뭐 자네 가정  니카호 가족을 보다 보면, 뭐랄까, 가족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그런 걸 생각하면 영 기분이 좋질 않다고."

"내 하나 맞춰보지. 나 말고 자네 모친도 자네한테 결혼하라고 잔소리를 한 게지?"

신페이가 아연한 표정으로 한노를 바라보았다.

"자네 이제 마음까지 읽나?"

한노가 눈썹을 까딱하며 씩 웃었다. 신페이가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니카호 대위. 요새 기분은 어때?"

그의 얼굴에 살짝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대위로 진급한 거?"

"아니, 조선에 가게 된 거." 신페이가 청주를 다시 자신의 잔에 부었다. "그 때문에 꽤 난처해보이던데."

"글쎄……"

예상치 못한 주제였다. 정작 내일 같이 떠나면서도 이런 주제를 꺼내리라고 짐작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한노는 목을 문지르다가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자넨 어떤데, 히라누마 대위?"

신페이는 몸을 쭉 폈다.

"전혀 감이 안 잡혀. 약간의 기대감 정도는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나는 타국으로 떠나는 데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부류는 아닌지라."

신페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조선, 가장 최근에 얻은 식민지. 그게 내가 아는 전부야. 근래에 간답시고 이것저것 찾아보긴 했지만, 나야 원래 해외물정에 딱히 관심이 없으니까. 야만스럽지만 꽤 조용하고 고즈넉한 나라라고 듣긴 했다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렇진 않아."

신페이가 한노를 흘끔 쳐다봤다.

"뭐라고?"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말은 이미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노의 가슴 속 한 구석에 박혀 있던 말이었다.

"조선은 그런 곳이 아냐. 그래, 거기 살고 있는 그들은 야만적일지 모르겠지만, 그곳 자체가 평화로운 장소는 절대 아니었네. 적어도 그 백성들에게는."

한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관료들은 하층민들을 수탈하거나 자기 신분만을 공교히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그건 왕족도 마찬가지일세. 문제가 있음을 모두가 앎에도 불구하고 영구히 바뀌지 않은… 그저 자기 파이에 대한 집착으로 얼룩진 땅일 뿐이니. 우리가 배치된 장소는 전국에 걸쳐 불합리와 모순으로 점철된 지옥에 지나지 않지."

한노가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곳에도 이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던 자들이 있었지."

그는 자신의 친우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어. 어떤 이들은 관료들에 의해 억압당했고, 어떤 이들은 외세의 힘을 빌리려다 도리어 그것이 발목이 잡혀 넘어지고 말았네. 완전히 바꾸었어야 했지만… 완전히 기존의 사회를 깨부쉈어야 했지만… 전부 일을 그르치고 말았어. 모두가 연기로 화하고 만 게지, 종국에는."

그의 시야는 옛 기억을 회상하는 듯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래된 수렁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는 익사자의 눈빛으로.

"어쩌면…변혁을 꾀하기엔 너무 늦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신페이는 그의 친우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굉장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자네가 이렇게 많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만. 혹시 조선에 가본 적 있나?"

"…그래."

"그렇다고!"

신페이는 아이들의 존재도 잊어버린 상태로 소리쳤다.

"자네는 내게  아, 미안하네, 한노. 조용히 하지. 그런데 자네는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안 했잖아."

"알고 있네."

한노는 무안한 표정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게…음, 부적절하리라고 생각했거든."

"부적절?!"

"히라누마."

"미안, 정말 미안한데, 근데 왜 그런건가? 그게 부적절할 게 뭐가 있다고? 내가 그 동네에 대해서 조사하는 시간을 좀 줄여줄 수도 있었잖나."

신페이가 툴툴거렸다.

"아, 그래서 상부가 자네를 조선부에 임명한 거로군? 자네는 원래 관서 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랬지."

한노가 무거운 마음으로 대꾸했다.

"…나는 이렇게 빨리 돌아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조선에 가기 굉장히 싫은 것처럼 들리는데."

신페이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라도 있어?"

한노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그를 바라보며 잔을 비웠다. 거센 소용돌이. 저편의 도쿄는 근대화의 정신 아래 들떠 거대한 용처럼 꿈틀대고 있다. 언젠가 보았던 이 땅의 편린을 기억한다. 불모지와 같았던 그 척박한 땅을 기억한다. 이제 그 불모지에는 그 어디보다도 가장 풍요로운 작물이 피어나고 있다. 다른 모든 땅덩이를 도리어 척박하게 만들 가장 아름다운 작물이.

잠깐의 침묵 이후,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다 알려주겠네."

"아, 이거 익숙한데. 만날 우리 부친이 나한테 하던 말이잖아. '신페이, 네놈은 아직 준비가 덜 됐다!' 대충 이러면서…"

신페이가 쉰 목소리를 흉내내며 다시 툴툴거렸다.

"하지만 알겠어. 이유도 없이 그럴 자인가, 자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주지. 기다린다고 손해 볼 거 없으니."

"고맙네, 친구."

한노는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실을 말할 순간이 언제 올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의 모든 진실을. 신페이는 진정으로 믿을만한 친우였지만, 그것이 한노의 모든 특성을 전부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다. 결국 가장 가까운 친우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어쨌거나 그는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그를 믿어준 니카호 일족, 그의 아이들, 그리고 히라누마 신페이 본인도. 알지 못함으로서 안전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함을 그는 알았다. 아주 지독한 방식으로.

신페이가 활달하게 덧붙였다.

"뭐, 그리고 앞으로 조선에서 지내는 건 걱정하지 마. 황군이 이미 그곳에서 공정하고 바른 법도를 세워 다스리고 있지 않나. 우리는 그냥 전에 한 것처럼만 하면 돼. 그리고 자네는 백택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제는 초대 백택계획이라고 해야겠군."

그가 눈을 찡긋했다.

"방해가 될 게 뭐가 있겠어, 응?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그냥 가 봐. 일이 너무 길어진다면 자네 아이들을 근무지로 데려갈 수도 있고."

"맞는 말이야."

한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페이는 마지막 남은 청주를 한노의 잔에 부어주었다. 이윽고 그들은 잔을 맞부딪혔다. 한노는 조금씩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한 걸 느낄 수 있었다. 신페이가 말한대로 너무 생각을 많이 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머릿속에 침전한 잡생각을 몰아내려 잔을 단숨에 비웠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는 내일 조선으로 떠난다.

밤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이 찬란하게 반짝이며 그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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