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世之說 悖亂篇 第一章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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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世之說

悖亂篇

그 순간 내 깨달은 바 있으니, 이 이물(異物)을 그대로 두었다간 반드시 사직(社稷)이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이르겠는지라.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내 어이하여 이를 이제야 깨달았을꼬? 이물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고 새가 포수(砲手)의 그물에서 벗어났으니, 여기서 조선(朝鮮)이 정녕 멸망(滅亡)하려는 것인가? 안 된다. 아니 될 말이다! 내 분골쇄신(粉骨碎身)하야 사직을 지키리라!

위세지설(危世之說) 패란편(悖亂篇) 제일장(第一章) 17:25~26

금제소(禁制所).

비광(朏光)은 작은 것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두리번거린다.

"오라버니, 어서 오시지요!"

"그래, 지금 가마."

앞에서 월화(月花)가 재촉하나, 비광은 주위에 놓인 이물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만져보느라 정신이 없다.

"내 보전원(保傳院)에 들어온 뒤로, 반드시 금제소라는 곳에 가 보아야겠다 단단히 마음먹었거늘, 지금껏 차일피일(此日彼日)하여 미루느라 오지 못하였는데, 이제야 비로소 오게 된 것이니라. 작은 것 하나까지 신묘(神妙)하고 경이(驚異)로워 눈길을 뗄 수조차 없구나."

"하오나 만지지는 마시지요. 혹 어떤 이물은 손끝으로 건드리기만 하여도 그 사기(邪氣)가 침범(侵犯)하기도 하옵니다."

"내 이미 몇몇을 보았느니, 허나 만지지는 않았느니라. 그런 것들은 이미 남달리 결박(結縛)하여 알아보기에 용이(容易)하더구나."

그러고 보니, 월화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금제소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호리병과 족자다. 비광이 그 중 하나를 가리킨다.

"이 호리병이 얼마나 큰 것까지 담아둘 수 있겠느냐?"

"이는 호리병 중에서도 지난 고려(高麗) 때 만들었던 청자(靑瓷)요, 청자 중에서도 바위 위로 학(鶴)이 날개를 치고 있으니, 실로 진귀(珍貴)한 보배이옵니다. 무엇을 가두었는지는 소녀(小女)도 짐작할 수 없사오나, 그 앞에 기록(記錄)하여 왈(曰) 용력(勇力) 십사호(十四號)라 하였으니, 분명히 보통 이물은 아닐 것이옵니다."

"허면, 무엇을 그렸는가가 그 힘을 좌우(左右)한단 말이더냐?"

"청자라면 그렇사옵니다. 특히 이와 같이 십장생(十長生)이 그려져 있으면 오랫동안 변함없이 제어(制御)할 수 있음인데, 이 호리병은 그것도 둘이나 그려져 있으니, 담고 있는 이물도 극히 까다로운 이물일 것이요, 그것을 담은 이 호리병도 금제소의 몇 안 되는 귀중한 물건일 것이옵니다."

"이 쪽에는 청자가 아닌 호리병도 있구나."

"청자는 그 수가 한정되어 있어, 함부로 오용(誤用)치 못할 물건이옵니다. 지금은 그저 원년(元年) 사호(四號)로 특수(特殊)히 만든 사기에 법랑(琺瑯)등의 유약(釉藥)만을 올린 도자(陶瓷)만을 만들고 있을 따름이니, 이것은 이물을 직접 담을 수는 없으되, 자기 몸뚱이보다 더 큰 것을 담는 것만은 가능하옵니다."

"허어, 고려 때엔 어찌 이런 청자를 만들었단 말이더냐."

"본디 풍악산(楓嶽山) 산자락의 절간에서 가져온 것인데, 소녀 듣기로 그 절에서 얻어먹으며 지내던 눈먼 도공(陶工)이 있어, 얻어먹는 보답으로 이와 같은 기이(奇異)한 물건들을 만들곤 하였다 하옵니다. 처음에는 절간에 시주하였으나 태조(太祖) 대왕(大王)께서 대업(大業)을 이루시고 세상이 변한지라, 선대왕(先大王)들께서 세인(世人)의 이목(耳目)을 피하여 조금씩이나마 궐(闕)로 가져오라 명(命)하셨던 것이지요. 저 왜란(倭亂) 때에는 의주(義州)서 요동(遼東)으로 파천(播遷)하여 대명(大明)에 내부(來附)를 할까 염려하던 차, 이 청자를 가지고 종묘(宗廟) 위패(位牌)를 모시려고도 하였다 하옵니다."

"결국에는 내부를 단념(斷念)치 않았더냐."

"그렇사옵니다. 헌데… 내명부(內命婦)에서 떠도는 말이, 그 위패들을 청자에 모시고 도강(渡江)하려 하였으나, 청자가 심히 떨고 위패에서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오는가 하면, 마른 하늘에 갑자기 벽력(霹靂)이 치고 나인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러한 연고(緣故)로 내부를 하지 않았을 거라는 소문도 파다했었사옵니다."

"정말이지 놀랍구나. 대체 어디서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었느냐?"

"소녀, 이곳에서 일하며 풍월(風月)을 조금 얻었는지라, 그것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옵니다."

이번에는 벽에 웬 족자들이 잔뜩 걸려 있다.

"저것들은 다 무엇이냐?"

"원년 육호(六號)에 당(當)하는 족자이옵니다. 이곳은 이 금제소의 영수(領袖)에게 시급(時急)한 전보(傳報)를 하는 곳인지라, 세상의 봉화(烽火)처럼 세인의 눈에 띄지는 않으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은밀(隱密)하게 세세(細細)한 소식을 전할 수 있사옵니다. 소녀도 이 이상으로 자세히는 알 수 없사오나, 쌍둥이 족자를 통(通)하여 그 얼굴을 마주보고 목소리를 발(發)하여 그 뜻을 전할 수 있다는 이치(理致)라고 들었사옵니다. 보전원 내부에는 이와 같은 식으로 하여 저 지밀(至密)에까지 족자가 이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도 있사옵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오오, 저기 저 곳으로 가 보자꾸나."

비광이 가리킨 곳으로 가자 웬 넓은 방이 있는데, 천장은 높고 기둥들이 오열(伍列)을 맞추어 섰고, 기이하게도 둘레가 두 아름은 될 법한 동색(銅色) 철구(鐵球)들이 가득 매달려 있어 그 수효(數爻)는 능(能)히 짐작할 수조차 없다. 철구들의 크기는 다 같지는 않으나 둘레가 두 아름 정도에서 엇비슷하고, 매달린 높이는 삼척동자(三尺童子)의 머리 높이만큼 낮게 내려온 것에서부터 저 높은 천장 가까이 매달린 것까지 제각각이다. 철구들은 마찬가지로 동색의 철쇄(鐵鎖)에 연결되어 있고, 비광이 자세히 살펴보니 저 천장 근처의 철구들 사이에는 길이가 거의 석 자에 이를 법한 붉은 철추(鐵椎)들도 있다.

"이게 다 무엇이냐… 신기하구나."

가운데에는 바닥에 검은 숯과도 같은 것으로 기이한 문양(文樣)이 그려졌으며, 그 문양 바로 위로는 채 한 자도 떨어지지 못한 곳까지 내려온 철추가 있는데, 이 철추는 비광이 이 곳에서 발견한 그 어떤 것보다도 큰 것이다. 비광이 보기에 이것은 마치 진자(振子)와도 비슷하다. 그리고 그 철추를 매단 철쇄의 중간중간에는 서로 다른 높이에서 서로 다른 크기로 철추들이 여럿 연결되어 있다.

어딜 갔었는지, 뒤늦게 월화가 비광의 뒤로 다가온다.

"소녀도 그것만큼은 알지 못하오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듯싶사옵니다."

비광이 웅크리고 앉아 그 커다란 철추를 살펴보는데, 문득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내가 자네라면 그것만큼은 만지지 않겠네."

비광이 돌아보니 무영 선생이다.

"다모(茶母) 월화, 무영 어르신을 뵈옵니다."

"아아, 무영 선생. 대관절 이것은 무엇인지요?"

"이 방 전체, 그리고 각 기둥들과 철구, 철쇄, 철추, 바닥의 이 문양까지,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이물을 금제하기 위한 것이네. 이물은 지금 우리의 발 밑에 묻혀 있고, 이금위(異禁衛)에서 산술(算術)을 통해 이 문양의 형태와 규모(規模)를 정한 것일세. 따라서 이 모든 장치들이 단 하나라도 없을 경우 무슨 일이 생길지는 장담할 수 없네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중심추일세. 이 때문에 중심추에는 나름대로의 보호 장치가 있지."

"그렇군요. 어떤 도깨비 같은 이물인지는 몰라도 금제가 지난(至難)함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습니다 그려."

"그래야겠지, 자네가 아직 저 쪽으로는 가 보지 않았을 터이니, 저 쪽으로 가 보세나."

얼마쯤 가니 한구석에 웬 비석이 섰는데, 거친 무명과 삼베로 둘둘 감싸여 있고, 그 위에는 다시 철쇄가 묶였으며, 무명과 삼베 위로 붉은 진사(辰沙)로 쓴 듯한 글씨로 '사(邪)' 라고 적혀 있다.

"저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비광이 묻자, 무영은 고개를 천천히 흔들며 말한다.

"…저것만큼은 아직 자네가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일세. 지극히 음험(陰險)한 비석인데, 그 비석의 쓰임새에 대해 생각이 다른 자들이 있어, 간밤에 저렇게 해 놓은 모양이네. 일단은 그렇게만 알고 있게."

"…알겠습니다."

무영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보고 비광도 더는 묻지 않는다.

비광이 막 그 자리를 뜨려는데, 문득 비광의 눈에 벽에 걸린 뭔가가 들어온다.

"아, 저것은……"

무영이 돌아보고는 말한다.

"그래, 자네와 월화가 두 밤 전에 충주(忠州) 탄금대(彈琴臺) 근처에서 가져왔던 왜인(倭人)들의 탈이 아니던가."

"그렇지요, 아무튼 저 탈이 저기 있는 것을 보니… 금제는 된다지만 말조심을 해야겠습니다 그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저것을 어찌 되었든 파괴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바뀌었다 하네. 왜란과 호란(胡亂)을 겪으며 느낀 바가 있어서겠지. 외적(外敵)들이 침입(侵入)하여 사직이 위태로울 때 쓰겠다고 하네."

"과연…… 그렇겠군요."

비광은 한 차례 더 그 탈을 바라보았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월화도 다소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그 탈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뜬다.

그들의 등 뒤로, 벽에 걸려 있는 그 탈은 언제나처럼 괴기(怪奇)스런 웃음을 띤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해코지라도 하려는 듯이.


이틀 전의 일이다.

"허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길을 떠나라니, 참으로 암중모색(暗中摸索)이로다."

"소녀, 최선을 다해 오라버니를 보필(輔弼)하겠사옵니다."

비광이 무영 선생에게서 받은 언질(言質)은 단 한 마디였다.

충주 땅에 기괴천만(奇怪千萬)한 죽음이 연잇고 있다 하니 그대는 속히 가서 탐문(探問)하라.

무영

"일단은 죽음이니 무엇인가. 용력이겠느냐?"

"지금으로서는 갈피를 잡기 어렵사오나, 확실한 것은…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일일 것이옵니다."

"지난 왜란 때 그곳에서 원통(冤痛)히 죽은 원령(怨靈)들이 많을 것인데, 그것들이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니겠느냐?"

"소녀도 그 점이 염려되오나, 전심(全心)으로 국운(國運)을 회복(回復)하기 위하여 초개(草芥)처럼 목숨을 바친 자들이었으니, 원령의 장난이라면 아마도 왜군(倭軍)의 소행(所行)이 아닐까 하옵니다."

비광이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참으로 조리(條理)에 닿는 짐작이로다. 우리는 서로 말이 잘 통하는 것 같구나."

"황송(惶悚)하옵니다."

비광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다시 입을 연다.

"무영 선생께서 이 자리에 계셨더라면… 무익(無益)한 헤아림은 그만두고 탐문에나 골몰(汨沒)하라 하셨을 것이니라. 헌데, 내 헤아리기로, 우리가 무엇을 쫓는 줄을 알아야 제대로 쫓을 것이 아니더냐. 내 말이 틀렸느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물론 무영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도 백번 천번 지당(至當)한 것이지. 하지만 이번에는 저번처럼 워리도 없고, 자칫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이물일 터인데, 내 걱정되어 하는 말이니라."

"소녀 또한, 이 이물에 대해 모든 경우를 헤아리고 따져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긴요(緊要)할 줄로 아옵니다."

두 남녀(男女)는 탄금대에 오른다. 비광이 풍광(風光)을 한 차례 훑어본다.

"허어, 산수(山水)가 요요(姚姚)하니 이는 참으로 장부(丈夫)의 기상(氣像)이라. 실로 장상(將相)의 기개(氣槪)가 어린 곳이니, 어찌 장부가 이 곳에서 생(生)을 달리하는 것이 아름답지 못하다 하겠느냐. 비록 육(肉)으로는 지키지 못하였으되 그 혼(魂)으로는 아직도 사직을 지키고 있는 것을."

"참으로 아름다운 경치이옵니다. 참혹(慘酷)한 죽음이 연잇고 있는 곳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사옵니다."

"그래, 이제 이 충주 땅에서 기운을 어지럽히는 요망(妖妄)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꾸나."

"예."


"허어, 비루한 과객(過客)이올시다. 거, 점심이나 한 상 내 오시오."

비광은 평상 한쪽에 느긋하게 엉덩이를 들이댄다. 옆에서 팔자 좋게 늘어져 있던 중늙은이 양반이 비광을 보고는 마지못해 비켜 주기라도 하는 듯이 다리를 척 치워 준다. 그의 이마에서 기름이 반짝거리며 흘러내리는 걸 보면 적어도 이 동리(洞里)는 저번처럼 배를 곯지는 않는 듯하다. 반짝거리는 이마에 자꾸만 파리떼가 들러붙고, 중늙은이 양반은 기름에 거진 흠뻑 젖은 망건(網巾)을 귀찮다는 듯한 손길로 애써 끌어올리고는, 그 손으로 성가신 파리를 쫓고 있다.

상이 들어오도록 주위를 둘러보니 어째 다들 뒤숭숭한 표정이다. 주모(酒母)의 턱으로 흘러내리는 땀은, 방금 전까지 후텁지근한 증기(蒸氣) 속에서 밥을 지어서가 아니라, 뭔가 불길(不吉)한 운명(運命)이라도 느껴서 흘리는 식은땀처럼 보일 정도다. 비광이 주모의 불안에 떠는 눈을 잠시 바라본 후 다시 말한다.

"참으로 좋은 고을이오. 산천(山川)도 아름답거니와 이렇게 상을 차린 걸 보니 인심도 후(厚)하구려. 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고을이니, 이 고을 원님은 두 어깨가 절로 춤을 추겠소이다."

"……"

주모는 뭐라 대답하기는커녕 애써 눈길을 피하면서, 그저 사례(謝禮)의 표(標)로서 고개를 살짝 한 번 숙이고 도망치듯 돌아갈 뿐이다. 비광이 그 뒷모습을 보며 의아해하는데, 아까부터 파리떼 쫓기에 여념(餘念)이 없던 중늙은이 양반이 혀를 끌끌 차면서 비광에게 다가온다.

"예끼 이 양반아. 눈이 있으면 좀 보란 말일세. 어째 위인(爲人)이 이다지도 눈치 코치가 없는가 몰라 그려."

중늙은이 양반은 평상에서 엉덩이를 떼지조차 않은 채 꿈틀거리며 비광에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니 그는 몸의 왼쪽 반신(半身)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다. 비광이 조심스레 그를 부축하면서 묻는다.

"…그러고 보니 다들 표정들이 좋지 않소이다. 이 아름다운 고을에 어인 일이란 말이오. 원님네에 무슨 상(喪)이라도 당한 것이오?"

"차라리 그런 거라면 모르지, 타지(他地)에서 왔으니 어찌 우리 동리의 흡면귀(吸面鬼)를 알겠나."

"…그건 또 무슨 말이오. 흡면귀라니? 사람 낯을 빨아들이는 귀신(鬼神) 말이오?"

비광은 짐작은 하였으나 얼핏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그는 애써 웃으려 하며 말을 잇는다.

"내 길지 않은 생(生)을 살면서 이러니저러니 많은 일들을 겪었으나, 흡면귀라는 건 여기서 처음 듣소이다. 얼핏 듣기엔 조금은 가공가소(可恐可笑)하나, 여기 사람들 표정을 보니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긴 한가 보구려. 괜찮다면 노인장께서 조금 이야기를 해 주시겠소이까?"

비광이 말하는 동안 멀쩡한 오른손을 느릿느릿 흔들며 사래를 치던 그가 다시 입을 연다. 와중에 파리 한 마리가 이마에 달려들자, 중늙은이 양반이 부자연(不自然)한 모양으로 우스꽝스럽게 자기 이마를 탁 친다. 조용히 지켜보던 비광이 아무 말 없이 무명 조각을 건네주자 그가 이마를 닦아내고 다시 말을 시작한다.

"…흡면귀라는 건…… 사실 우리 동리의 그 누구도 이게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지 못하네. 그러나 벌써 저 김 진사까지 다섯 명째 참혹하게 죽었으니, 그저 우리로서는 이게 귀신의 소행인가보다 짐작할 뿐이지."

"잠시만, 노인장, 변고(變故)를 당한 자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시겠소?"

중늙은이 양반은 별걸 다 묻는다는 투로 비광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는 표정을 한다.

"거어…… 누구냐, 처음 변을 당한 자는 이 옆 골짜기에서 학동(學童)들을 가르치는 훈장(訓長)이었네. 아마 불혹(不惑)은 넘겼을 거야. 그는 본디 마을 사람들과 그다지 왕래(往來)를 즐기진 않았네. 남에게 섣불리 굽히지 아니하고 콧대가 높기로는 유명했지. 뭐 옛말에 저 곰보도 저 잘난 맛에 산다지만 그는 특히 그러했네. 다만 사람됨이 포부(抱負)가 그리 크진 않았던 것 같으이. 그저 학동들 가르치는 재미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이었던 모양이야."

"어떻게 변을 당했는지 말씀해 주시겠소?"

"…거, 참 흉(凶)헌 일에만 일일이 캐묻는구먼. 흡면귀가 달리 흡면귀겠나. 학동들 돌려보내고 나서 그 사이에 목숨이 끊어진 것이지. 흡면귀에게 잡아먹혀서 그런가, 유독 얼굴만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 형체(形體)조차 없었지. 그걸 처음 발견한, 저 양평(楊平)댁 말뚝쇠는 나무하러 가다 그만 주저앉아 실금(失禁)까지 했지. 그 놈은 지금도 아예 말을 않는다네."

"흐음… 뭐가 어찌 되었건 그 훈장이 첫 희생자이니, 짐작이 가는 것은 없소이까?"

중늙은이 양반이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치켜뜨자, 비광이 부연(敷衍)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죽음을 알고 뭔가 대비를 했다거나… 귀신을 쫓기 위해 기괴한 언행(言行)을 했다거나……"

"거……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타인을 달갑게 반기지 않는 자라 나도 잘은 모르네."

"아무도 없는 와중에 누군가와 대화(對話)를 하거나 그러진 않았소?"

중늙은이 양반은 반쯤 얼굴이 굳는다.

"…허이구, 소름끼치는 얘기 할 거면 관두게. 젊은 사람이 참 지독허구만."

"아, 아니오. 뭐 어쨌든 다음 사람들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아직 네 명이나 남지 않았소?"

"……그 이후로 죽은 양반이 아마 이 고을 근처에서 병참(兵站)을 맡아 보던 자였을 걸세. 우리 동리의 사람은 아니었지. 휘하(麾下)의 그 누구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는데 그 양반 혼자 송장이 되어 나왔고, 이번에도 여전히 얼굴만 지독하게 뜯어먹힌 거야."

"얼굴 이외에는 해(害)를 가하지 않는다. 혼자 있을 때를 노린다. 한 사람 외에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 흥미롭긴 하지만 오리무중(五里霧中)이로군. 나라에선 어찌 하였소?"

"그저 범에게 그렇게 되었다 하고 끝냈지. 이미 어떤 이들은 그 훈장 일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지만 말일세. 그러던 것이 바로 그 다음날 저녁에 또 한 사람이 송장이 된 거야."

"……"

"이번에는 우리 고을의 나장(羅將)이 그리 된 거야. 훈장 이야기에 픽 웃음을 치던 사람이었지. 아무도 그가 어찌 그리 됐는지는 모르네. 일가식솔(一家食率)들은 그저 그 양반이 소피를 보러 나갔다고만 했지 그 이상은 아는 자가 없었지. 그리고 그때부터 흡면귀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한 걸세. 이번에도 똑같이 얼굴만 뜯어먹혔으니까. 나장 자리가 비게 된 후로는 저기 충청감영(忠淸監營)에도 사람을 불렀네."

"이런…… 어쨌거나 이번에도 혼자였군. 다음은 누구였소이까?"

"…이방(吏房) 임 영감이었지. 그대가 관심이 있어 보이니 말하네만, 그도 혼자 있을 때 당한 모양이야. 그날따라 그는 갈팡질팡하는 나졸(邏卒)들과 사령(使令)들 앞에서 일장(一場) 훈시(訓示)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고 하네. 자기도 무섭긴 했던지 자시지도 않던 술을 잔뜩 자시고 돌아오던 길에 변을 당한 것이지."

"이번에는 술이라. 어찌 되었건 그들은 혼자 있을 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상태에서 변을 당한 것 같구려. 김 진사도 그러하였소?"

"거… 아마 그랬을 거야. 김 진사는 마침 임 영감과 만나기 위해 임 영감네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네. 일이 이렇게 되니 흡면귀 이야기가 온 동리에 퍼져나갔고, 김 진사는 이방 일을 대행(代行)하면서 흡면귀 소문을 있는 대로 억눌렀네. 그러나 어디 그게 그 사람 뜻대로 되나.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말이야. 김 진사는 이미 반쯤 공황(恐惶)에 빠져 넋이 나가려 하고 있었고, 그게 그대로 김 진사를 덮친 걸세."

"자세히 설명해 주시구려."

"김 진사는 그때 마누라와 함께 있었다고 하네. 하지만 그 청주(淸州)댁 여편네가 잠깐 물을 끓이러 간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지 뭔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얼굴은 형체도 없어지고 한바탕 피곤죽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지. 그때 마침 감영에서 관찰사(觀察使)의 부관(副官)인가가 왔다길래 그에게 수습(收拾)을 부탁했네. 그 양반 말로는 아무래도 한양에 서찰(書札)이라도 보내야 하겠다고 하더군."

"……내 들어보니, 원한(怨恨)에 의한 사건일 수도 있겠소이다. 진범(眞犯)을 잡지 못하도록 흡면귀 소문을 내는 건 쉬운 일이오. 노인장, 이 동리에 그들과 원한이 맺힌 사람은 없겠소이까? 처음 훈장은 연습삼아 저지른 일이라 치고, 나머지 넷은 전부 지체 높은 몸이니, 그럴 만도 하지 않겠소?"

"거…… 그랬을 수도 있겠네. 자네 말을 들으니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 싶구먼. 귀신이라기보단 차라리 사람이었으면 좋겄어."


"월화야, 어떻더냐?"

월화가 치마를 붙들고 잰걸음으로 오면서 아뢴다.

"흡면귀라 하옵니다. 귀신의 소행이라는 말들로 떠들썩하옵니다."

"과연!"

월화의 표정도 상기(上氣)되어 있다.

"빨래하는 아낙네들과 그네를 타는 소녀들, 삯바느질하는 할멈까지 모두가 입을 모아 흡면귀라는 말만 했사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한에 의한 살인은 아니겠느냐? 아니면 혹 정말로 귀신이겠느냐?"

"소녀도 여러 모로 헤아렸으나, 일단은 감영에서 사람이 와서 이 문제에 손을 댔다 하니, 그 사람부터 만나봐야 할 것 같사옵니다."

"옳은 말이다. 허나, 우리가 과연 그를 만날 수 있겠다는 말이냐?"

비광이 근심하자 월화가 재빨리 대답한다.

"안 될 것도 없지 않겠사옵니까? 우리의 신분(身分)을 감춘다면 무영 어르신께서도 별 말씀은 안 하실 것이옵니다."

"…그래, 뭐 만난다고 하자. 그러하여도, 어떻게 만나겠느냐? 무슨 수를 구실로 삼아서 그를 만날 수 있겠느냐?"

월화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가 문득 급히 얼굴이 밝아진다.

"소녀… 좋은 수가 있사옵니다."


"오오, 마침 반가운 일이로구나! 어서 모셔라!"

과연 그 무거워 보이던 빗장은 쉬이 열렸다.

"어서들 들어오시지요. 제가 그러잖아도 명일(明日) 조반(朝飯)을 먹고 바로 길을 나서려 하였는데, 하늘이 무심(無心)치 않으셨는지 이렇게 오늘 저녁에 뵙게 되었군요."

"환대(歡待)해 주셔서 오히려 생광(生光)스럽습니다."

비광은 감영 부관에게 넉살을 부리며 말한다.

"그래, 마침 필요한 때에 이렇게 지관(地官)께옵서 와 주셨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게다가 곁에 딸린 소저(小姐)는 용하다는 사무(師巫)에게 사사(師事)받았다고요?"

월화가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자, 비광이 대신 말한다.

"소생의 누이인데, 아직 미련하지만 그나마 약간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짐작할 수 있어 여러 모로 도움이 되지요. 유가(儒家)에서 자란 여식(女息)으로서 우연히 신병(神病)을 앓는 통에 이래저래 고생이 많았소이다. 소생도 본디 유자(儒者)이오나, 예학(禮學)을 살피던 무렵에 여차여차(如此如此)한 연고로 풍수(風水)에 조금 눈을 떴을 뿐입니다."

감영 부관은 그저 적시(適時)에 적자(適者)가 나타났다 하여 감개무량(感慨無量)하기 그지없는 듯 보인다.

"어쨌든 이렇게 선비께옵서 용한 무녀(巫女)와 함께 와 주셨으니 그야말로 기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이곳은 화(禍)를 당한 인물 중 하나인 김 진사 댁이고, 저는 이곳에서 이 일에 대해 고심(苦心)하고 있던 중이었지요. 아,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 했다고, 들어오셔서 직접 보시고, 고사(告祀)라도 지내야 하는지 어쩔지를 살펴 주시지요."

"알겠소이다."

비광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고, 월화도 허리춤에서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뒤따른다. 그러나 막상 들어가 보니 현장은 참혹하다. 실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참화(慘禍)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송장은 언제쯤 치웠소이까?"

비광이 피비린내에 코를 틀어쥐고 묻자, 부관이 얼른 대답한다.

"서너 시진 전에 치우긴 했으나, 워낙에 출혈(出血)이 중(重)한지라 아직도 이렇습니다."

"온 방이 온통 피범벅이군."

"그 흡면귀인가 뭔가가 김 진사의 목구멍까지 파먹은 고로 이리 된 듯합니다."

비광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분명 이만한 출혈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 둘러보니 피가 튄 흔적으로 보아… 서 있는 상태에서 변을 당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얼마간 방을 맴돌았군요. 흡면귀를 대적(對敵)하느라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흡면귀가 그렇게 빠르게 밀살(密殺)하지 못했다는 증좌(證左)도 되겠지요. 그러나 식솔(食率)들 중 그 누구도 비명 소리나 싸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김 진사가 서 있는 상태에서 먼저 목부터 끊은 것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필경(畢竟)에는 비틀거리다 쓰러지게 되었을 것이고… 송장의 낯을 훼손한 것은 다른 목적이 있거나 아니면 다음 표적(標的)을 향한 신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연 부관은 비광을 더욱 신뢰하는 눈치다.

"오오, 소관(小官)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비광은 속으로 미소지으며 수정 선생에게 감사한다. 물론 그가 했던 것만큼 깊지는 못하나, 이 정도만으로도 그럴싸한 헤아림을 덧붙이니 부관은 멋모르고 좋아할 뿐이다. 비광은 이번에는 월화에게 묻는다.

"네가 보기엔 어떠하냐? 뭔가가 있어 보이느냐?"

"소녀 보기에, 이 방 안에까지는 아니지만, 천지(天地)에 요사(妖邪)한 기운이 충천(衝天)하니 몸조심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월화는 행여 말실수라도 할까 하여 조심스레 대답한다. 비광 역시 그 심중(心中)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비광이 뭐라고 말을 더 하려는데, 갑자기 월화가 부관의 허리춤을 가리킨다.

"외람(猥濫)된 말씀이오나… 혹시 그것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무엇 말이냐? 이것 말이더냐?"

부관이 보인 것은 다름아닌 탈이다. 희고 길쭉한 것이 왜인들의 것임이 분명한데, 이상할 정도로 기분나쁜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이다.

"부관 나리, 그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비광이 묻자, 부관이 그걸 이리저리 만지면서 답한다.

"…이건 본래 이 집에 있던 것인데, 조금은 의심스러운 바가 있어 내 직접 가져가 세세히 관찰(觀察)하려는 것이지요. 그 생김새로 보아하니 예전 왜란 때 왜인들이 떨어뜨리고 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분명 저 뒷산이나 그런 곳에 반쯤 파묻혀 있었는데, 동리의 가이나 어린것이 주워 온 것이겠지요."

"흠, 고인(故人)의 유품(遺品)이란 말씀이오? 그렇다면 그건…"

"무슨 뜻인지 내 짐작하였으나, 아마도 이 집에서 보관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하여 가져가는 것입니다. 조선 팔도(八道)에 어디 쓰기도 어려운 골칫덩이이니, 이 집 식솔들도 딱히 괘념(掛念)치는 않았지요."

"…알겠소이다. 월화야, 너는 왜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하느냐."

무안해진 비광이 타박하자 월화도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미욱한 소녀를 넓은 아량(雅量)으로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부관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애써 웃으며 가슴을 친다.

"허허, 어쨌거나 소관은 감영에 돌아가서 아병(牙兵)들을 데리고 와, 그 흡면귀인가 뭔가 하는 놈을 때려잡을 생각입니다. 내 더 이상 이런 참혹한 일이 발생하도록 두지는 않을 것이니, 선비께서는 너무 염려치 마시지요. 여차하면 내 감사(監司)께 여쭈어 별무사(別武士)들까지도 불러오게 할 것이니. 내 그럴 만한 힘 정도는 있으니, 선비께서는 행여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해코지나 하지 않을지 살펴만 주시면 됩니다."

비광의 눈치에는 그저 한바탕의 허풍(虛風)으로 보일 따름이다. 비광은 좀 전에 대문 앞에서 자신을 맞이하던 그 표정을 기억하고 있다. 아직도 부관의 눈에는 그 공포가 서려 있다. 지금까지 죽어갔던 망자(亡者)들도 이러하였다. 제어할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히자 애써 스스로를 추켜세우며 그 공포를 덮으려 하였다. 어째서 그러하게 행동하였는가? 이것이 인간인가? 아니, 소인(小人)만 이러한 것인가? 아니, 행여 나 자신도 공포에 질리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그 무렵, 밖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부관 나으리, 동헌(東軒)에서 서찰(書札)이옵니다."

"오, 그래. 선비께서는 잠깐 여기 계시지요. 내 잠시 다녀오리다."

부관이 방을 나서자, 월화가 다급히 속삭인다.

"이것이 귀신의 소행이든 원한을 품은 자의 소행이든, 지금 부관은 지극(至極)히 위험한 상황이옵니다. 기운이 좋고 믿을 만한 자를 빨리 불러서 그가 혼자 있지 못하게 해야 하옵니다!"

"나 또한 같은 생각이니라.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예이."

"지금 당장 기운 좋고 믿을 만한 자를 찾아, 부관과 함께 있으면서 그를 지키도록 하라!"

"예이."

일면식(一面識)도 없는 외인(外人)이 이래라저래라 하니 이상할 법도 하지만, 지금만큼은 다들 비광의 뜻에 따르고 있다. 갑자기 엄습(掩襲)해 오는 불안(不安) 때문이리라. 다시 월화가 속삭인다.

"이곳에서는 그 어떤 단서(端緖)도 찾을 수 없사옵니다. 차라리 방을 나가서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고, 멀리서 부관이 있는 곳을 감찰(監察)함이 옳을 줄로 아옵니다."

"오히려 방을 나가면 더욱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문에 구멍을 내고 지켜보는 편이 낫겠구나."

비광이 문에 구멍을 뚫고 눈을 들이댔으나, 시야(視野)가 좋지 않아 부관은 보이지 않는다.

"어떠하옵니까?"

"부관이 보이질 않는구나. 다시 뚫어야겠다. 그나저나 아까 탈 이야기는 왜 꺼내었느냐?"

"…느낌이 좋지 않사옵니다."

"좋지 않다니?"

"일단… 지금 이 상황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사옵니다. 그렇지 않사옵니까?"

그 순간.

"─────아아악!"


"이… 이게 대체 또 어인 변고란 말이더냐!"

사방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일부는 거품을 물고, 또 어떤 이는 실신(失神)하여 쓰러지기까지 한다. 지키도록 되어 있던 머슴은 그저 고개를 들지 못할 뿐이다.

비광이 뒤늦게 달려와서 대로(大怒)하여 외친다.

"내 부관을 지키라고 네놈에게 단단히 명(命)하지 않았더냐!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그, 그게 나으리께서 잠시 소피를 보러 가신다고 하여……"

"또 소피, 그놈의 소피, 소피! 네놈이 뚫린 입이라고 아직도 할 말이 있었더냐!"

그때 월화가 뒤늦게 달려오더니 현장을 보고 그만 입을 움켜쥔다.

"우웁!"

"월화야, 괜찮으냐? 일단은 안채로 들어가 있거라. 내 이 무능(無能)한 자를 치죄(治罪)한 후 곧 너를 살피겠느니라."

아닌게 아니라 부관의 시신(屍身)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지금까지의 다른 희생자들과 꼭 같이, 이 자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뜯어먹혔다. 차라리 목 위로는 그냥 시뻘건 피가 뚝뚝 듣는 고깃덩이에 허연 뼛조각들이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형국(形局)이고, 지금도 그 밑으로는 피가 아직도 세차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 모습을 보는 비광은 오히려 이상하리만치 기묘(奇妙)한 감정에 사로잡힐 따름이다. 사람이 얼이 빠진다는 게 과연 이와 같은 것인가 싶다.

월화를 들여보내고 나서 다시 돌아온 비광이 주위를 둘러보아도 도무지 범인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나무 위를 살펴도, 담장 너머를 살펴도 허탕이다. 이제 해는 저물고 어둠이 깔려 오는데, 이렇게 되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위험해지게 될 것이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나이 많은 머슴 하나가 나아와 아뢴다.

"……나리, 우선 이곳은 쇤네가 장정들을 이끌어 모두 정리토록 하겠사옵니다. 또한, 급히 서찰을 써 주시오면 이를 제가 동헌에 하나, 감영에 하나 전달(傳達)토록 하겠사옵니다. 한시가 급하고 우리 중에 글을 아는 자는 나리밖에 없사오니, 두 장의 서찰을 써 주시면 제가 직접 가져가도록 하겠사옵니다."

"그대의 생각이 매우 영민(英敏)하기는 하나, 이렇게 위험한 시국(時局)에 그대 혼자만을 보내는 것은 어렵다."

"온갖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어, 비록 나이는 많사오나 웬만한 장정 정도는 아직 상대할 만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된 이상 그 누구도 쉬이 의탁(依託)하기가 어려워, 부득불(不得不) 쇤네가 직접 하기를 청하는 것이옵니다."

비광은 그런 그가 내심 마음에 들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비광은 속으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도와줄 이를 붙여서 뒤따르게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대가 그렇게 자신한다면, 내 기꺼이 맡기겠다. 이곳의 정리와 서찰의 전달을 책임져 주도록 하라."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본격적인 추궁(追窮)이 시작되었으나, 목격자라 할 수 있는 두 사람, 즉 동헌에서 서찰을 가져온 이와, 비광이 따로 시켜 지키도록 한 머슴의 말이 서로 달랐다.

"도대체 그대들은 무엇을 믿어야 한단 말이더냐! 동헌의 녹(綠)을 먹는 이가 허투루 대답할 이유는 없으니, 분명 장쇠 네놈이 구차(苟且)히 변명함이 아니더냐!"

뒤늦게 도착한, 김 진사의 아우 김 서방이 호령(號令)하자 장쇠는 고개를 숙이며 어쩔 줄을 모른다.

"하이구, 제발 살려 주시옵소서. 제가 일평생 일심(一心)으로 충성(忠誠)되이 김씨 문중(門衆)을 섬겼는데 어찌 이제 와서 도리를 저버리겠나이까."

다른 머슴들도 낯빛이 파랗게 질려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동헌의 사령(使令)도 그저 먼 산만 바라보며 머쓱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뿐이다.

"한 사람은 부관이 소피를 보러 갔다 하고, 한 사람은 부관이 길흉을 따지기 위해 무녀를 만나러 갔다 하니, 어찌 이다지도 말이 다를 수 있다는 말이냐!"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월화가 비광에게 속삭인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뻔하지 않느냐. 저 놈의 장쇠란 종이 거짓으로 꾸미고 있는 것이다. 부관 자신부터가 이미 소피를 혼자 보러 갔다가 당한 자의 일을 알고 있거늘, 어찌 혼자 소피를 보러 가겠다고 하겠느냐."

"방금 전에 늙은 종이 서찰을 가지고 출발하였사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데, 어떻게 하시면 좋겠사옵니까?"

"오, 나도 그 때문에 마음이 쓰였느니라. 지금 와서 헤아려 보건대, 내가 직접 거리를 두고 뒤를 밟으면서 그의 안위(安危)를 살펴야겠다. 내 봇짐에 단궁(檀弓)이 있으니 설사 위험이 닥치더라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몸조심하셔야 하옵니다. 그렇다면 소녀는 다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오라버니를 뒤따르겠사옵니다. 만일 기운이 부치시거든, 마땅히 소녀가 지니고 다니는 벽력탄(霹靂彈)을 써서 저지(沮止)하겠사옵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물러나 대문으로 향한다.

"……표정이 밝지 않구나, 월화야. 괜찮다. 끔찍한 기억은 이제 잊고……"

"그것 때문이 아니옵니다."

"…허면, 무엇 때문이냐?"

"그, 그것이……"

월화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를 악물고 나직하게 말한다.

"방금 전에 출발한…… 그 늙은 종의 허리춤에, 아까 그 탈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사옵니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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