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世之說 怪異篇 第三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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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世之說

怪異篇

이물(異物)은 무릇 칼과 같은 것이라. 군자(君子)가 들면 그 종묘사직(宗廟社稷)과 강토(江土)를 능히 수호(守護)할진대, 소인(小人)이 들면 천하(天下)에 이만큼 뭇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그 한(限)이 하늘에 사무치게 함이 없으리라. 칼이 그와 같듯이 이물도 그러한 것이다… 이물이 얼마나 악하게 쓰일 수 있을지는 구구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이제부터 내 한 가지 기억해 낸 어느 사소(些少)하고도 무서운 이물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위세지설(危世之說) 괴이편(怪異篇) 제삼장(第三章) 1:22

"……아이고, 아이구야."

강 영감은 부들부들 떠는 몸을 힘겹게 일으킨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습기가 가득하고, 바닥에 드문드문 깔려 썩어 문드러진 지푸라기는 이슬에 젖은 채 퀴퀴한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그 냄새가 미처 코에 이르기도 전에, 강 영감은 그의 허리와 어깨, 노구(老軀)의 이곳저곳에서 합창하듯 아우성치는 고통에 오만상을 찌푸린다.

"아이구, 하이구, 끄응… 아쿠구구, 나 죽네, 나 죽어."

생각을 정돈할 겨를도 없다. 강 영감은 여기가 대체 어딘지도 종잡을 수 없다. 그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지금 온 몸의 크고 작은 상처들이 만들어내는 고통밖에는 없다. 강 영감은 몸을 좀 더 일으켜 본다.

"끄으응…… 하유, 하이유… 죽겄네 죽겄어."

아무래도 뼈를 다친 모양이다. 상반신을 반쯤 일으키려 하였으나 그 이상은 도무지 올라가질 않는다. 헐떡이는 숨을 잠시 진정하려는데, 문득 그의 귓가로 어둠 속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듯한 소리가 스며든다. 멀리서 피리 우는 듯한 소리도 들리나, 여기까지는 경황(景況)이 없어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에구구… 아이구…"

"흐으윽… 흐윽… 끄응……"

신음소리들이 점차 높아져 가려니까, 어둠 속 약간 먼 곳 어딘가에서 한 줄기 날카롭고도 묵직한 고성대질(高聲大叱)이 터져 온다.

"거 조용히 있지 못해! 자꾸 시끄럽게 하거든 몰매를 때릴 것이니 그리 알아!"

신음소리들이 일거(一擧)에 가라앉자, 아까 전의 그 피리 소리만이 남는다. 들릴 듯 말 듯, 저 바깥 멀리 어딘가에서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며 스며드는 소리… 강 영감은 그 소리를 그냥 무시하기로 한다. 무엇보다도 지금 강 영감은 여기가 어디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문득 밖에서 사람 몇이 더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 뭐라고 이야기가 오가는가 싶더니, 곧이어 아까 소리쳤던 그 자가 걸어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이나마 감시에서 자유로워진 것인가. 다른 이들도 그걸 눈치챘는지, 여기저기서 금세 다시 신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으으으… 끄으응…"

"끄응, 끙… 끄응…"

"…노인장은 여길 어떻게 오셨소?"

순간, 강 영감은 바로 곁에서 확 끼쳐드는 목소리에 움찔한다. 같은 방이다. 등 뒤다. 강 영감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젊은 남성의 목소리지만, 강 영감은 아무리 헤아려 봐도 그가 아는 목소리는 아닌 것 같다고 느낀다.

"그게…"

강 영감은 골치가 우는 듯하다.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돌려서 뒤를 바라보자, 어둠에 익숙해진 그의 두 눈으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비록 초라할지언정, 먹물깨나 자신 듯한 기품(氣品)을 보니 아마도 다른 마을의 젊은 선비임이 분명하다.

"…하아… 솔직히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소이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오?"

"…춥고 습하며 저 밖에는 나무 창살이 있으니… 아마도 옥(獄)에 갇힌 것이 아니겠소이까."

"잘 아는구려. 지금 밖에서는 풍악(風樂)이 저리도 자지러지거늘, 어찌 노인장은 저 떠돌이 가이만도 못한 모양으로 끌려와서 이러고 계시오?"

"이 늙은이가 육십(六十) 평생 낮으로는 전답(田畓)을 갈고 밤으로는 행실(行實)을 삼가 남보기에 부끄러운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어인 일로 이렇게 끌려온 건지 기억이 나질 않소이다."

"잘 생각해 보시오. 잠깐 정신이 없어 헤아리지 못하는 것일 듯싶으니."

"글쎄올시다…"

"뭐 예를 들면 관아(官衙)의 나졸(羅卒)들이 바치라는 세(稅)를 내질 않았거나…"

그 순간, 비로소 강 영감은 무릎을 친다.

"그러고 보니 저, 그 인납(引納)할 마포(麻布) 다섯 포와 수피(樹皮)를 내지 못하긴 했었소이다. 허지만… 오오라, 이제 좀 기억나오. 전세(田稅) 스무 두(斗)를 내질 못해서 이리 되었소이다."

강 영감은 이제야 모든 것이 명료하게 떠오른다.

"그저 젊어서 고생헐 적엔, 척박한 땅이라도 좋으니 내 전답 좀 몇 마지기만 있으면 좋겠다 하였더니, 이제 와서 나랏님은 이 몹쓸 황무지를 보고 일등전(一等田)이라 하여 스무 두씩 전세를 바치라 재촉을 하니, 세상에 어디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그거 내고 나면 올 겨울에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살라느냔 말이올시다."

"내 듣자하니, 결(結)에 스무 두씩이면 삼천리 팔도(八道)에 극히 좋은 옥토(玉土)라 하던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오?"

"선비께서도 농(弄)이 심하시오 그려. 세상 천지 어디에 그걸 그렇게 따진단 말이오. 그저 사또 나으리께서 궁(窮)하시거든 자연히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도 옥답(玉畓)이 되는 것이올시다."

선비는 조금 멈칫한다.

"내 살던 곳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소이다. 솔직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구려. 어찌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단 말이오."

강 영감은 선비에게 이질감을 느낀다. 아마 먼 곳에서 온 사람인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어찜인가? 어이하여 행려(行旅)하던 선비가 우리 고을의 옥에 갇혀 있다는 것인가?

"선비께서는 어찌 들어오셨소?"

"아… 그게 말이오…"

어둠 속에서 그가 상투 튼 뒤통수를 긁적인다.

"자세히 풀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본의 아니게 동헌(東軒) 곡창(穀倉)에서 그만 발각되었소이다."

강 영감이 미처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선비는 다급히 덧붙인다.

"타촌(他村) 선비가 그곳은 어인 행차(行次)냐고 묻지는 마시오."

"……"

강 영감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윽고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묻는다.

"선비께서는… 함자(銜字)가 어찌 되시오?"

선비는 잠깐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어둠 속에서도 보일 듯한 미묘한 미소를 짓고 대답한다.

"비광(朏光). 비광이라 부르시오."


그러니까, 그 날 해가 막 떠오를 무렵의 일이었다.

그 때, 강 영감은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사령(使令)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매달리고 있었다.

"하이구, 제발 한 번만 살려 주시오. 어찌 이런 논에서 그만큼 많은 쌀이 나온단 말이오."

"에헤, 이 노메 얼어죽을 늙은이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아! 저리 가디 못해!"

어린 사령은 일전에 한 차례 크게 병을 앓았음이라,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제멋대로요, 눈자위도 풀린 데다가 들창코에 혀까지 짧았다. 혀 짧은 말에는 예법(禮法)이라고는 없었으며 그저 어린것 떼쓰는 듯한 투였지만, 적어도 그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실제로 장정들을 불러다가 강 영감을 때려죽이라 해도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었다.

"있는 힘껏 애를 써도 이만큼이 다이올시다. 제발 눈감아 주시오 그려."

"드끄러! 어쨌든, 스무 두 채워! 아 이 노메 늙은이가, 저리 떨어지란 말야!"

강 영감이 어린 사령의 바지가 흘러내리도록 끝까지 매어달리니, 옆에서 나장(羅將)이 벽력(霹靂)처럼 윽박질렀다.

"무엇 하는 짓이냐!"

포졸(捕卒)들이 득달같이 덤벼들어 강 영감을 떼어내 내던졌다. 강 영감은 엉덩방아를 찧고는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린 사령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부터 그토록 친자식처럼 아꼈건만, 그에게는 육방관속(六房官屬) 모직(某職)을 지내는 아버지가 있었고 강 영감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것이 차이였다. 어린 사령은 강 영감에게 은혜(恩惠)를 몰랐고 강 영감은 그때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저기 말일세, 강 영감."

아까부터 옆에서 잠자코 서 있던 호방(戶房) 김가가 나선다.

"자네 사정은 모르는 바가 아닐세. 사령이 아직 나이가 어려서 원리원칙을 따지니, 우리끼리 잘 해결하기로 함세. 자네도 알겠지만 올 겨울 자네 식솔(食率)들 먹을 것은 있어야 하니, 이번에는 딱 열다섯 두만 내도록 내 힘 좀 써 주겠네."

강 영감으로서는 그저 귀가 번쩍 띄이는 일이었다.

"하이고, 고맙소이다 그려! 역시 김가 어르신밖에는 없소이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강 영감이 내려던 전세는 아마 열일곱, 못해도 열여섯 두는 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보다도 오히려 감해준다고 하는 것이니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새로 열다섯 두를 재어 보아야 하니, 동헌에서 가져온 척(尺)을 가지고 헤아려 보겠네."

그러면서 김가는 소매에서 놋쇠 자를 하나 꺼냈다. 이상할 것은 전혀 없었다. 놋쇠 자 한편에 새겨진 눈금, 그 눈금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새까만 손때가 반들반들하게 묻어 있어 멀리서도 아주 잘 보일 정도였다.

……그 눈금들이 이상할 정도로 벌어져 있다는 것을 뺀다면…

"기… 김가 어르신!"

"왜 그러나?"

"그… 그 척이 좀 이상하지 않소이까?"

"이거 말인가? 잘 모르겠는데."

"어, 어떻게 그걸로 열다섯 두를 재신단 말이오. 그걸로 한 두를 재면 석 두가 좀 못 되게 나올 것이 아니겠소이까. 그걸로는 지금 저 쌀도 고작 열 두도 되지 못할 것이온데…!"

"이건 나랏님이 정하신 도량(度量)인데, 강 영감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네?"

강 영감은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입이 바싹바싹 탔다.

"김가 어르신, 기, 김가 어르신, 왜…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소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렇진 않았지 않소이까!"

"아, 그거? 작년까지 도량 없이 그냥 되는 대로 받았더니 징수(徵收)가 되지 않기에, 원님께옵서 올해부터는 이렇게 거두라고 지시하셨네. 임금님께서 친히 정하신 눈금에 불만이 있다는 얘긴가?"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저는 열 두밖에는 낼 수가 없지 않소이까…"

"그럼 더 이상은 나도 곤란하지. 나도 위에 눈치봐야 하는 입장이고 여러 모로 곤란한데. 자네가 올 여름에 좀 더 열심히 농사를 짓지 그랬나. 그냥 자네의 게으름에 대한 응보(應報)라고 생각하게."

"…어, 어르신……!"

강 영감은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전세를 내지 못하겠다 하니, 당장 형방아전(刑房衙前)에게 기별(奇別)하여 치죄(治罪)케 하라!"


"…그런 일이 있었구려."

강 영감은 한숨을 푹 내쉰다.

"솔직히, 이제는 어느 집이고 간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라고 생각하는 곳도 많소이다. 나야 이제 다 늙었고 더 바랄 것도 없지마는… 기력이 다한 내 마누라나 내 퇴끼 같은 자식들, 손주들은 어찌 살아가야 한단 말인지…"

"내 견문(見聞)이 좁아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는 직접 들은 적이 없었소이다. 이런 참혹한 일이 조선 팔도에 벌어지고 있단 말이오? 어찌하여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쳐서 그 죄값을 받아내지 않는단 말이오? 참으로 놀랍고도 딱한 일이올시다."

젊은 선비는 강 영감보다도 더욱 흥분한 듯 보인다. 오히려 강 영감이 조용히 그를 제지한다.

"관두구려…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것이 아니겠소이까…"

"어찌 수령이라는 자가 이토록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빤단 말이오. 어찌 이렇게 고통받는 백성들의 원망 소리를 듣지 않고 있다는 말이오. 지금 밖에서 한창 즐기는 풍악은 대체 무엇을 뜻함이며, 누구를 위함이란 말이오?"

"조심하시구려, 선비께옵서도 이 늙은이와 엮여서 함께 화(禍)를 당할까 걱정이오."

"…아까 눈금이 이상하리만치 넓은 척을 말하였던데, 이것에 대자면 얼마쯤 되었소이까?"

갑자기 선비가 품에서 뭔가 작은 막대기 같은 것을 꺼낸다. 강 영감은 어떻게 이런 것이 났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억을 더듬어서 그 막대기에 대고 자기 손가락을 벌려 보인다.

"한 이쯤 되었소이다."

"허어, 이 정도라면 두 배를 족히 넘어 세 배는 되겠구려. 확실하오?"

"이 늙은이가 비록 육신은 늙었어도, 바로 오늘 아침에 본 걸 잊지는 않소이다."

선비는 아까 강 영감이 벌려 보였던 만큼대로 자기 손가락을 벌려 대 보더니, 이내 그 막대기에 대고 뭔가를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 강 영감은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호기심도 동하고 하여, 그리고 가만히 있기 민망하기도 하여, 뭐라고 말이라도 꺼내기 위해 입을 연다.

"거…"

그 순간, 다시 밖에서 소란스런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도, 강 영감은 바로 자기 앞 창살 앞에 서서 나무로 된 문을 여는 포졸들의 모습을 본다. 맨 뒤에서 뒤따르는 포졸이 들고 온 횃불이 너무 밝게 느껴져서, 강 영감은 일순 눈이 부셔서 앞을 볼 수 없다.

문이 열리고, 산적처럼 험상궂게 생긴 나장이 강 영감과 선비를 함께 바라보며 굵은 목소리로 말한다.

"원님께서 부르신다."


끌려나가는 동안 강 영감은 선비의 행태에 질린 나머지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키야아아 ──── 육선(肉膳)이 즐비하고 자리마다 미주(美酒)로다. 육방 장부(丈夫) 호령하니 천하가 벌벌 떨고, 교태(嬌態)로운 기생들은 면면(面面)마다 경성지색(傾城之色), 꽃조차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달조차 시샘하여 구름 속에 숨겠구나."

"거 좀 조용히 하시오!"

"서산(西山)에 해는 지고 휘영청 명월(明月)이라. 풍악(風樂)이 우쭐대고 박수 소리 화답(和答)하니, 이 어찌 오늘 밤이 즐겁지 않겠는가? 달 따라 구름 따라 지나가던 무명(無名) 선비, 풍류(風流)를 알거든 어찌 그냥 지나치랴?"

포졸들이 조용히 하라고 몇 번을 외쳤으나 선비는 들은 척 만 척이다. 비록 폐포파립(敝袍破笠) ㅡ 아니다. 옥에 갇히느라 갓을 쓰지 못하였으니 그저 폐포에 불과하겠으나, 이런 볼품없는 의관(衣冠)임에도 어디서 이런 넉살이 나오는지 강 영감은 도통 모를 일이다.

방금 잔치가 파한 듯 조금은 어수선한 모양새다. 한쪽에서는 이미 자리를 조금 치웠고, 포졸들은 그 쪽으로 비광이라는 그 선비와 강 영감을 이끌고 간다. 대청의자에는 수령이 앉았는데 의관은 엉망이요 이미 적잖이 마신 게 있는지 얼굴도 시뻘겋다. 그의 바로 곁에는 기생 하나가 붙어 서서 온 몸을 그에게 비벼대고 있다.

"……"

마침내 수령의 앞에 이르자, 포졸들이 둘을 꿇어앉힌다.

"…강 영감."

"예에, 사또 나으리."

술에 취한 듯 거의 잠겨 가는 목소리다. 수령은 애초에 강 영감에게는 흥미도 관심도 없고 그냥 만사가 귀찮은 듯 보인다. 강 영감은 꽁꽁 묶인 채로 고개를 힘껏 숙인다.

"너 저번에 마포 인납 때도 못 낸다고 봐달라고 했었지?"

"봐달라고 했었지? 호호호!"

기생이 가늘고 높은 음성으로 수령의 말 뒤끝을 따라하며 웃는다.

"…예에, 사또 나으리. 조, 조금만 기다리시면…"

"그 담에 수피도 못 냈댔지?"

"수피도 못 냈댔지?"

"사… 사또 나으리……"

"그리고 오늘 낮에도 전세를 못 냈다매?"

"오늘도 전세를 못 냈다매?"

강 영감은 눈앞이 캄캄하다. 도대체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감을 잡을 수조차 없다.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얼마 동안 침묵하니, 나름대로 참을성 있게 기다린다고 기다리던 수령도 금세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손가락을 의자에 대고 초조하게 두드린다. 기생의 낮고 교태로운 음성이 들리는 걸로 봐서는 수령에게 무슨 짓거리를 하는지 알 만하긴 했지만…

"아… 아이… 사또 나으리… 그건 너무하시옵니다… 호호호!"

잠시 입술을 깨물던 강 영감은 힘겹게 입을 연다.

"보름만… 말미를 주시면… 어떻게든 마련하겠사옵니다. 그러니 제발…"

"야, 강 영감."

강 영감의 목소리조차 사또의 낮게 잠긴 목소리에 뚝 끊긴다.

"너, 왜 사냐?"

"……!"

"뭐하고 사냐? 그 좋은 전답 놔두고?"

"사또 나으리…!"

"야, 영감탱이, 왜 사냐고 묻자나──── !"

충주댁 막내딸이다… 기생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강 영감으로서는 속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남다른 외모로 신임 수령의 눈에 든 이후로는 줄곧 저러한 것이다. 강 영감은 사람이란 본래 그런 것인가 싶다.

"송구하옵니다, 나으리… 딱… 보름만……"

"보름만? 보름 지나면 하늘에서 쌀이 뚝 떨어지냐? 영감이 할 수 있는 게 뭔데? 쌀이 나오길 해, 국이 나오길 해?"

"쌀이 나오냐 국이 나오냐?"

새된 소리로 날아드는 기생의 목소리가 강 영감의 마음을 찢는다. 사실, 수령의 말이 옳다. 보름 더 기다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저 고통스런 시간만을 연장하는 것일 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더 이상 변통(變通)할 길도 없고, 무마할 방법도 없는 게 사실이다.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바라보던 수령이 문득 입을 연다.

"강 영감."

"예에, 사또 나으리…"

"올해는 영감이 똑바로 농사 안 지어서 이리 된 것이니까는… 올해는 그냥 낼 수 있는 만큼만 내."

"…사, 사또 나으리…!"

강 영감은 이것이 어떠한 상황인지 잘 알고 있다. 아주 나락까지 떨어질 셈인가.

"대신에 올해 못 낸 분량만큼은 본관(本官)이 내년에 취리(取利)해서 받지 뭐."

"그, 그것보다는 어떻게든…!"

"방법이 없잖아, 영감이 어쩔 건데? 이제 됐잖아? 어이, 내일 사령더러 가서 있는 대로 걷어오라고 해."

"예이."

"사또 나으리!"

"다음."

강 영감의 마지막 호소는 수령의 귀찮아하는 목소리에 끊긴다. 수령은 비광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우리 고을 사람이 아니네?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고?"

"예에, 그저 구름 따라 바람 따라, 산천(山川)을 누비며 자연을 벗삼아 도(道)를 즐기는 서생이올시다."

"향적(鄕籍)이 어디인고?"

"워낙 한미(寒微)하고 미천(微賤)한지라 아실지나 모르겠습니다."

"그럼 잔반(殘班)이네."

"송구하옵니다, 나으리."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선비 비광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다. 오히려 입가에는 슬쩍 웃음기를 띤 것이, 지금 이 상황을 흡사 즐기는 것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수령이 그것을 보고 있을런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강 영감이 보기에 옆에 있는 기생과 좀 옆에 선 이방(吏房)은 그것을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헌에 들어와서 곡창에 손을 댔다매?"

"그렇지 않사옵니다. 곡창 앞에서 발각되었을지언정 곡창 문을 연 적은 없사오니, 믿지 못하시겠거든 그 포졸을 불러다 대질(對質)하시오면 명명백백(明明白白)히 아실 수 있으실 것이옵니다."

"허면… 사리(事理)를 분별(分別)할 줄 아는 유생이 남의 고을 곡창에는 어이하여 갔는고?"

"그것이… 소생이 육십갑자(六十甲子)로 쥐띠가 되는지라, 그만 저 서생원(鼠生員)처럼 곡식 냄새를 맡고 저도 모르게 흘러들어간 듯하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강 영감은 아무 말도 못 하겠고 그저 속으로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다. 기어이 수령의 이마에 한 줄기 깊은 주름이 패인다. 강 영감은 비광에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 주고 싶을 정도다.

"어허, 지금 그대가 나를 능멸(凌蔑)하는 것인가!"

"그런 뜻이 아니었사옵니다. 이 또한 송구하옵니다, 나으리."

끝까지 입가의 웃음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대가 말로써 송구하다고는 하나, 어찌 그대의 말을 믿겠는고?"

"소생, 시골 벽촌(僻村)의 순진한 유생이라, 동헌에 직접 와 보게 되니 실감이 잘 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나으리."

"끄응……"

강 영감은, 아까 옥에서 들었던 그런 신음이 수령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듣고는 속으로 놀란다.

수령의 좀 옆에서 이방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수령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저기, 사또……"

이방이 뭐라고 중얼거리자, 이번에는 그걸 듣던 기생도 전에 없이 굳은 표정으로 수령의 귀에 또 뭐라고 재잘댄다. 그 말들을 모두 듣던 수령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직하게 말한다.

"거기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

수령은 휘적휘적 뒤로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간 안에서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

"……"

비광과 눈이 마주친 강 영감은 눈짓으로 무엇을 할 작정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비광은 그저 씨익 웃으며 여유를 부릴 뿐이다. 강 영감은 자신이 꿈도 꾸지 못할 짓을 태연하게 벌이는 비광을 보며 더 이상 할 말을 잃는다.

잠깐 침묵이 이어지는데, 그 침묵조차 참지 못했는지 비광이 다시 또 입을 연다. 강 영감은 또 한번 움찔한다.

"키야아아 ──── 이 늦은 밤중에 그대들이 수고들이 많소. 아까 고기도 뜯고 주색잡기(酒色雜技)도 하고 하던데 그대들도 좀 즐겼는지 모르겠구려."

"조용히 하시오."

군뢰(軍牢) 하나가 이를 악물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비광은 잠시라도 말을 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인 듯하다.

"그대들이야말로 마땅히 나랏님이 크게 포상(褒賞)하여 그 공적(功績)을 기려야 함이 아니겠소이까? 이처럼 기강(紀綱)이 바로서고 규율(規律)이 엄중(嚴重)하니, 이 고을이야말로 참으로 살기 좋은 고을인 모양이오."

그 때, 다시 문이 열리고 수령이 휘적휘적 걸어나온다. 수령은 대청의자까지 나오지도 않고 비광을 힐끗 보더니, 그냥 손짓을 하며 짧게 말한다.

"그만 옥으로 들여가."

"옛!"

비광은 포졸들에 이끌려 가며 계속 껄껄 웃는다. 강 영감은 그런 비광의 뒷모습을 보며 적잖이 답답할 뿐이다.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시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또 나으리께서 그냥 넘어가셨지만, 평소 같으셨으면 크게 경을 치실 일이었단 말이오."

강 영감이 숨죽인 목소리로 따지나, 비광은 그저 여유로울 뿐이다.

"허허, 그렇소이까. 이거야 원.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곳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나와 청풍명월(淸風明月)을 보니, 나도 한번쯤 좀 노닐어 보고 싶어져서 말이오."

"노닐 곳이 따로 있지, 어찌 선비께서는 그런 눈치가 없으시오?"

"오히려 노인장이 눈치가 없어 보이는구려. 내 관상(觀相)을 좀 배운 바가 있으니, 짐작컨대 이 고을의 수령이라는 사람은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워 자신을 희롱(戱弄)하는 말에도 개의치 않아 보이는데 말이오."

"이보시오, 이 마을을 이토록 비참하게 만든 사람인데 어찌 그런 너그러움이 있겠소?"

그 순간, 비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강 영감도 그 기세에 더 말을 잇지 못한다.

"…내 모르는 바가 아니나, 이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이오. 내일 이후로는 이런 경험도 두 번 다신 할 수 없을 것이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오늘 밤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하랴 싶어서 한번 놀아 보았소이다. 왜, 떠도는 이야기에 흔히 등장하는 그런 거 말이오. 나는 오늘, 탐관오리(貪官汚吏) 앞에서 멋들어지게 풍류를 논하며 그를 비꼬아 단죄(斷罪)한, 이야기 속의 멋진 인물이 되는 것이올시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으나… 내일이 되면 대체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말씀이시오?"

묻는 말에 비광은 아무 대답이 없다. 순간, 강 영감의 머리를 뭔가가 빠르게 스치고 지나간다.

"서… 설마…!"

"설마 무엇이오?"

강 영감은 저도 모르게 비광의 옷소매를 붙잡는다. 말로만 듣던…

"설마 그… 어… 어사또 나으리십니까…!"

그 순간.

"그 입 다물라!"

"흐읍…!"

비광은 심지어 강 영감의 멱살까지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씩씩거린다.

"네놈의 방정맞은 입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화를 자초할 셈이더냐! 그런 소리는 절대 발설(發說)치 말라!"

"예… 예이, 죄송하옵니다…"

"……"

침묵이 이어진다.

가만히 생각하니 어째 강 영감은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도 같다. 만약 비광이 정말로 어사라면, 그가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서기 전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는 이런 짓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따라서 비광이 아까 그토록 분노한 것도 이해가 된다. 한편, 만약 비광이 어사가 아니라면, 그것도 역시 행여라도 소문이 퍼지면 나중에 비광이 감히 어사를 참칭(僭稱)하였다 하여 압송(押送)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 영감 자신이 비광을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 되는 것이니, 이 역시 그가 저렇게 반응할 만도 한 일이다.

"으흠…"

비광이 헛기침을 한 번 한다.

"아까는… 실례했소."

"아, 아니올시다… 이만큼 나이를 먹도록 혀 단속도 못 하여 오히려…"

그러나 강 영감은 한 줄기 희망을 느낀다. 어쩌면… 살 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지금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우리 고을 사람들을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잠들었음인가.

"…이보시오, 선비."

"으음…"

"이보시오… 이보시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그것도 나직하면서도 견딜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끄응… 누구요? 오밤중에."

"이 고을의 나장이오. 잠깐… 얘기 좀 합시다 그려."

"후우…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러시오."

강 영감은 잠은 깨었으나 계속 자는 척하며 엿듣고 있다. 비광은 상대방이 나장이고,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듯하다.

"거… 솔직하게 대답해 주시오. 그대가 혹시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맞소?"

"……"

강 영감은 자다가 그만 발작(發作)이라도 일으킬 정도로 놀랐지만, 비광은 의외로 묵묵부답(默默不答)일 뿐이다.

"대답 좀 해 주시오. 지금 원님의 기생이 얘기한 게 있어서 온 동헌에 소문이 파다하오. 정말로 오늘이오?"

"거 참 말이 많구려. 내가 어사라면 어찌 솔직하게 대답하겠으며, 어사가 아니라면 뭣하러 어사라고 하겠소. 게다가 오늘이라는 얘긴 대체 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려."

그러나 나장은 끈질기다.

"…만일 그대가 어사라면, 내가 신호를 받고 내통(內通)하여 아전이고 노비고 아주 그냥 쥐새끼 한 마리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지키겠소이다. 그리고 지금의 어사 소문을 진정시켜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만들 거요. 대신 나 하나만큼은 보호해 주시오."

"…척을 찾고 있소."

강 영감은 다시 한번 기겁할 정도로 놀랐지만, 가까스로 내색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어사가 맞단 말인가?

"척이라면……"

"어디에 보관되어 있소? 작일(昨日) 새벽에 보기로는 넷째 곡창 뒤로 창고가 두 곳 더 있던데…"

"제대로 보셨소. 그 척은 그 두 곳의 창고 중 뒤쪽에 있소. 그런데 그 척을 왜…"

"거기까진 알 필요는 없소이다. 아무튼 고맙소."


그 나장이 간밤에 있었던 밀약(密約)을 지키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강 영감은 오늘도 아침부터 떠들썩하게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에 놀란다. 지금쯤 호방 김가가 가서 강 영감의 집에 있는 모든 쌀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가져올 것이지만, 지금 강 영감에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천하가 태평(太平)한데 어찌 노래가 나오지 않겠으며, 어찌 시(詩)가 나오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소 여러분!"

"옳습니다! 어허허허!"

옥사 가까운 곳에서까지 잔치판을 벌였는지 뭐라고 떠드는지도 다 들릴 지경이다. 어제보다 오히려 더 크게 잔치를 베푼 걸 보면 확실히 수령이 의심을 거둔 것 같다. 밖에서 구걸하는 거지들의 각설이 타령까지 들릴 정도다.

"아주 거하게 하는구만."

비광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강 영감은 짐짓 모른 체하며 나직하게 말한다.

"지금쯤 호방 김가가 쌀을 싹 걷어오고 있을 터인데…"

"어허, 걱정 마시구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다들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으니."

"……"

시간이 지나도록 잔치는 더욱 질펀해진다. 강 영감은 속으로 생각한다. 지금쯤 때가 되었을 터인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지금 이 어사라는 사람은 이곳에 갇혀 있으니 기별조차 할 수 없고, 이 와중에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밖에서 그 나장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은 곧 그 자에까지 이른다. 대체 왜 어사는 그 척의 위치를 물어본 것인가? 어차피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보고 싶다면 정식으로 가져오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이 급박한 상황에 그 척의 위치가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시간이 흐르며 강 영감이 비광의 눈치를 본다. 이제는 좀 초조해질 만도 하건만 비광은 그저 여유로울 뿐이다.

"허어… 정말 아무것도 주지 않을 모양이구만. 저 가이들도 뼉다귀 하나쯤은 얻어먹는 것이 아니던가."

"바라지할 사람이 없으시오?"

"지나가던 선비일 뿐이니, 일이 그렇게 되었소이다. 오늘만 굶으면 되긴 하지만, 어허, 그래도 배고픈 건 어쩔 수가 없구려. 아침도 굶고, 벌써 점심때가 지나가고 있는데 말이오."

"큰일이구려… 옥바라지할 사람이 없으면 꼼짝없이 굶어죽기 십상인데 말이오. 정말로 누구 말처럼 오늘 무슨 난리라도 터져서 뒤집어지지 않는다면 모를까……"

말끝을 흐리며 강 영감이 슬쩍 비광을 바라보지만, 비광은 여전히 혼자 빙글빙글 웃으며 배만 쓰다듬고 있다.

시간이 흘러간다.

"……"

"……"

기분만으로는 벌써 해가 몇 번씩 저물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손바닥만한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의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 신시(申時)에도 이르지 못한 듯하다.

강 영감은 몇 번이고 비광과 눈을 마주쳤으나, 도무지 비광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이쯤 되니 강 영감은 그가 과연 어사가 맞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다시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강 영감은 혼자 답답한 가슴만 쥐어뜯는 수밖에는 없다.

"……"

"……"

밖에서 새 지저귀는 소리만 나도 이것이 신호인가 하여 강 영감이 먼저 움찔거리고, 바깥이 조금만 소란스러워져도 때가 되었는가 하여 강 영감이 괜히 떨리고, 밖에서 훤화(喧譁)하는 노랫소리가 조금만 가라앉아도 벌써 시작되었는가 싶다.

"……"

"……"

"…그… 저기……"

참다 못해 강 영감이 먼저 입을 열려던 그 때.

갑자기 평량립(平凉笠)을 쓰고 육모 방망이를 든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옥사의 문을 연다.

"오, 출도(出道)인가."

"이미 육방 아전에 대한 사열문박(査閱問迫)이 시작되었으니, 어서 속히 가시지요."

비광이 급히 뛰쳐나가고 그 뒤를 강 영감이 무작정 따라 달린다. 강 영감이 황급히 따져 묻는다.

"이제는 말씀해 주시오, 그대가 정녕 어사가 맞소?"

그러자 비광이 등 뒤로 소리쳐 말한다.

"나는 어사가 아니오! 어쨌건 잠깐 어사 놀음을 한 건 참 재미있었소 그려!"

"뭐… 뭐요?"

"부득이 상세히 말하진 못하였으나, 어쨌건 잠깐이나마 어사 대접을 받으니 기분은 좋구려! 아무튼 내 말대로 된 게 아니겠소?"

밖으로 나가니 이미 벌써 엎어진 상은 사방으로 치워지고 있고, 그 가운데에 아전들이 모여 예를 취하고 있는 가운데, 저 위에 대청의자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 바로 저 사람이 어사인 것이다.

뒷마당 쪽으로는 아직도 소란이다.

"아이고 살려 주시오!"

"암행어사 출도야아 ────!!"

"암행어사 출도야아 ────!!"

"서문(西門)서도 출도야!"

"동문(東門)서도 출도야!"

"북문(北門)서도 출도야!"

"수령 이갑순은 당장 나와서 어사를 영접(迎接)하라!"

때리고 엎어지고 부서지는 야단(惹端)에, 비광은 그 틈새를 이리저리 빠져나가 곡창으로 향한다. 강 영감도 무슨 일인가 궁금하기도 하여 그 뒤를 쫓아간다.

비광은 도망치는 노비들에게 호통을 친다.

"어사 출도에 어딜 가느냐! 어서 빨리 창고란 창고는 전부 열지 못할까!"

"어이쿠, 예에! 예에!"

곡식 창고 문들이 열리고 가마니들로 가득 찬 모습이 드러난다. 심지어 아래에 눌린 가마니는 썩기까지 하였다.

마지막 창고 문이 열리자, 비광은 얼른 그 안으로 뛰어든다.

"네 이놈, 여기 있었구나."

"뭐… 뭐 하는 거요?"

뒤따라온 강 영감이 묻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광은 작은 목함(木函)을 열더니 그 속에 있는 자를 꺼내어 소매 속에 넣고, 품에서 똑같이 생긴 다른 자를 꺼내어 목함에 넣는다.

"뭘 바꾸는 거요?"

"노인장이 알 일은 아니오. 아무튼 이제 노인장도 그만 가 보는 게 좋겠구려. 아니면 저기서 심리원옥(審理寃獄)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좋겠고…"

비광은 드디어 의기양양(意氣揚揚)한 표정을 짓는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소?"

"그렇소이다."

"……"

강 영감은 계속 헛웃음만 나오다가, 이내 옆에 보이는 낡은 담뱃대를 냅다 들고 비광을 때리기 시작한다.

"엥이, 이 좀도둑 같으니라고! 그렇게 짐짓 허위(虛威)를 꾸미기에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려나 했더니, 이제 보니 기껏 한다는 게 척 하나 훔치고는 기뻐하는 것이냐! 엥이, 이런 좀도둑 놈! 이렇게나 사람을 속일 수가 있느냐!"

"어이쿠, 노인장, 그만하시구려. 아이구… 담뱃대가 꽤 맵소."

"입이나 다물거라! 대장부가 되어서 이 정도까지 판을 벌였으면 더 그럴싸한 걸 해야지 척이나 하나 훔치고 앉았느냐!"

"아이구, 아이구……"


어사를 영접하러 나온 수령은 뜻밖에도 의외로 대담한 모습이다.

"이렇게까지 많은 나졸들을 데리고 오시지 않으셔도 되었을 것이옵니다."

"이 고을의 원성(怨聲)이 하늘에 사무치고, 수령의 비위(非違)가 있다 하여, 내 직접 이를 감찰(監察)코자 왔느니라."

"소관(小官)은 얼마든지 조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사옵니다."

이렇게 나오니 오히려 어사가 당황할 지경이다. 옆에 서 있던 나졸들이 어사에게 보고한다.

"이 고을의 저수지와 보(洑)는 최소한의 갖추어야 할 것을 갖추었으며, 딱히 짚을 만한 점은 없나이다."

"성벽 역시 크고 높으며, 간혹 벌레먹은 곳이 있기는 하나 문설주도 든든하옵니다."

어사로서는 난감한 소식들이다. 수령의 목에는 이미 힘이 들어가 있다.

"……의외로다. 그렇다면 징수는 어떠한가. 보고하라."

"반열창고(返列倉庫) 하사이다. 곳간은 열두 개소에, 도합(都合) 팔백 석이옵니다."

"…들었는가. 이만한 고을에 팔백 석의 전세는 과중했을 터. 이것이 어떠한가?"

"이 고을은 예로부터 물이 맑고 공기가 좋아, 따로 퇴비를 주지 않아도 곡식이 절로 자라는 문전옥답(門前沃畓)이 많아, 이만큼 많이 걷고도 오히려 풍족하여 남음이 있사옵니다."

"내 이 지역이 그만큼 풍족하다는 이야기도 듣지 못하였고, 탐문(探問) 중에 배불리 먹는 이를 본 적이 없으니, 어찌 그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어사는 고개를 돌려서 호령(號令)한다.

"유척(鍮尺)을 가져오라!"

아전 하나가 가서 동헌의 자를 가져오자, 어사가 유척을 들고 엄중하게 말한다.

"이 유척은 전하께서 국가의 표준(標準)으로 삼으시고자 특별히 어사에게 하사(下賜)하시는 물건인즉, 이 동헌의 척이 만일 유척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다면, 거짓으로 전세를 과도하게 징수한 것으로 간주하여 그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니라."

그러나 수령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미소가 번진다.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따위는 없는 것이다.

"소관 역시 알고 있사옵니다. 어찌 전하께서 명하신 기준을 어기겠사옵니까. 만일 한 치라도 다르다면 소관이 그 죄를 달게 받겠나이다. 그러나 소관이 이 고을을 다스리면서부터 그런 문제는 결코 없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하옵니다."

"……"

어찌 저리도 담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아전이 동헌의 자를 어사에게 건네자, 어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고 나서 다시 한 번 수령을 바라본다.

"…그럼, 내 직접 견주어 보겠느니라."

그 순간, 어사와 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진다.

"허억……!"

"어사께서는 어인 일이십니까?"

어사의 안색이 새파래지고, 유척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니, 수령은 불안감을 애써 감출 뿐이다. 어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주위에 선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한다.

"……팔도를 돌았어도 이만한 척은 처음 보는구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척으로 전세를 매길 수 있다는 말이오?"

"이 고을에서 쌀 한 두가 다른 고을에서 석 두라. 전하께서 아시면 대노하실 것이거늘…"

그 순간, 수령이 벼락처럼 달려든다.

"그,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소관 결코 부당한 징수를 하지 않았사옵니다! 유척과 똑같을 것이온데… 유, 유척과…… 또… 똑같을……"

두 자를 몇 번이고 가져다 대며 견주어 보던 수령은, 그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이… 이럴 리가 없거늘…… 누군가가 분명 척을 바꾸어 놓은 것이옵니다…! 그… 그 척이 있어야……"

"죄인은 더 이상 소란케 하지 말라!"

낯빛이 변한 어사가 불호령을 내리자, 수령은 그 즉시로 입을 다문다.

"그간 실로 뭇 백성들의 고혈을 취하였도다. 엄연히 나라의 녹(祿)을 먹는 그대가 어찌 이와 같은 죄를 저질렀는가! 마땅히 중죄에 처해야 할 터, 내 직접 한양에 상경(上京)하여 그대의 죄를 전하께 낱낱이 아뢰겠노라!"

어사는 장내를 한 바퀴 둘러보며, 마지막으로 쩌렁쩌렁하게 호령한다.

"이제 유치죄인(留置罪人)하고, 고을 백성들을 두루 불러서, 곡창을 모두 열고 방곡(放穀)하여 천하에 굶주리는 이가 없게 하라! 지금 즉시 시행하라! 부당하게 빼앗은 것들을 모두 돌려주라!"


"그대의 도움이 매우 컸네."

어사의 말에, 비광은 쑥쓰럽다는 듯 웃는다.

"허허, 저야 불의(不義)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초야(草野)의 유생일 뿐이지요. 어사님이 아니었다면 이 고을의 어려움은 해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처음에 결정적인 제보를 하였기에 큰 도움이 되었네."

"저도 저 나름대로 이 고을에 볼 일이 있어 온 것인데, 그냥 모른 체할수도 있는 것을, 어사님을 너무 대놓고 알아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닐세. 내 평생 처음으로 해 보는 어사 출도인데, 여러 모로 미숙한 점이 많았을 것이네. 탐문도 너무 대놓고 했고 말일세."

"탐문이라면 제가 늘 하는 것이기도 하니, 더욱 제 눈에 띄었는지도 모를 겁니다."

"음…?"

어사가 어리둥절해하는 동안 비광은 그냥 웃어넘길 뿐이다. 어사는 뭔가 떨떠름한 것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연다.

"……그런데 말일세. 대체 그 척 말이야… 나는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도통 모르겠네. 그때 왜 그 수령이 그렇게 행동한 것인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허위를 부리는 것이지요."

"그게… 아닌 것 같네. 마치…… 그 척이 제멋대로 눈금의 크기를 바꿀 수 있기라도 한 듯이……"

"……"

비광의 표정이 조금 굳는다.

"…누군가가 바꾸어 놓았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는데…… 그 점이 좀 마음에 걸리네."

"설마, 세상에 그런 요상한 척이 있기야 하겠습니까. 좀 과로(過勞)하신 듯합니다. 산 좋고 물 좋으니, 이 고을에서 머리도 식힐 겸하여 잠깐 쉬시고 가시지요."

비광이 다시 웃음을 짓자, 어사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 때.

"이보시오, 이보시오! 나 좀 살려 주시오!"

"응?"

비광이 돌아보니 어젯밤의 그 나장이다.

"약속하지 않았소! 그대가 정녕 어사거든 나만큼은 눈감아 준다 하였거늘!"

비광은 쩟쩟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다.

"미안하게 되었소. 실은 내가 어사가 아닌지라."

"…뭐요?"

"어젯밤에 날 어사 대접해 주어서 고마웠소. 애초에 내가 어사가 아니니 그 약속도 성립이 되지 않겠지. 그대의 죄를 그냥 달게 받으시오. 그 편이 그대에게 좀 더 좋을 것 같소이다."

"이… 이보시오! 이보시오…!"

나장은 맹렬히 발버둥을 치나, 결국 육모방망이를 몇 대 맞고는 다시 질질 끌려간다.


시장 한켠에서 비광이 정신없이 그릇을 비우는데, 문득 담뱃대 냄새가 풍겨 온다.

"어지간히도 배가 고팠구만 그래."

비광이 고개를 들어 보니 무영 선생이 와 있다.

"아, 연락을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네. 이물은 잘 챙겼는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제 배부터 먼저 좀 채워야 하겠습니다. 어제 새벽부터 밥 한 톨도 못 먹고 남들 잔치하는 거 군침만 삼키고 있다가, 이제 이렇게 따끈한 국밥을 보니 오죽 식욕(食慾)이 동(動)해야 말입니다."

"……"

"마침 이 동리(洞里)에 오일장이 열리기도 하고, 어사께서 적절히 출도하시니 곡창이 열려 제가 이렇게 국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잘 된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이 밥이 오늘 아침만 해도 곡창에서 썩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 생각하면……"

"……그렇기에 우리가 그 원흉(元兇)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비광은 마지막 한 톨까지 싹싹 비운 후에 곧 품에서 그 자를 꺼내 보인다.

"옆에 다른 척을 가져다 대면 저 혼자서 눈금이 바뀌게 되지요. 먹으로 칠한 것도 아니요, 척에다 직접 홈을 파 놓은 것인데도 그것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이런 물건이 탐관오리의 손에 들어갔으니 오죽했겠나."

무영 선생도 품에서 다른 자를 꺼내 둘을 서로 붙여 보면서 중얼거린다. 비광이 바라보니 놀랍게도 두 자는 서로 꼭 같은 눈금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곧 서로를 이척(二尺) 이상으로 벌려 놓자 그 자는 다시 원래의 눈금 크기로 되돌아간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인가?"

"…이 물건은…… 누군가가 마치 탐관오리들을 위하여, 탐관오리만을 위하여 특별히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혹하게 징수를 하는 목적이 아니거든 이 척을 어디에다 쓸 수 있겠다는 말입니까."

"흐음, 확실히…… 이 척은 범부(凡夫)들이 쓸 만한 물건은 아닐세. 그러나 누군가가 일부러 만든 것 같다는 그대의 생각에는 좌증(左證)이 필요하네. 아직까지는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만… 이곳에 좀 더 남아서 조사를……"

"물론 우리라고 그런 가능성을 닫아두고 있는 것은 아닐세. 너무 심려치 말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오늘 저녁에는 절경(絶景)이나 한번 찾아가 보세나."




괴이(怪異) 병술(丙戌) 제(第) 삼호(三號)

상(詳) 눈금의 크기가 자유롭게 변화하는 척(尺)
당(當) 감찰관(監察官) 비사대부(批士大夫) 무영(無影)
결(結) [某] 의 어사출도(御史出道) 시에 입수(入手)
현(現) 비록(秘錄)에 기록 및 보전원(保傳院)에서 보관(保管)

선비가 말한다.

이 척은 그 눈금의 크기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으며, 이척(二尺) 이내에 있는 다른 척의 눈금 크기에 저절로 맞추어진다. 그 유래는 불명(不明)이다. 본래 [某] 지방에서 수령(守令)을 맡아 보던 관리 [某] 의 소유였으며, 그는 이 이물(異物)을 활용하여 백성들에게 전세(田稅)를 가혹하게 징수하였다. 그러던 차에 [某] 가 상(上)의 밀명(密命)을 받들어 출도(出道)하였으매, 이때 이 이물이 안전하게 무사히 입수되어 지금까지 보전원(保傳院)에서 맡아 두고 있다. 본디 그 성질상 민생(民生)을 도탄(塗炭)에 빠지게 할 것인즉, 이러한 악한 이물을 폐기(廢棄)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상황이 변하지 않는 한 당분간은 보전원에서 보관하기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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