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용어집

 


 

子不語、怪、力、亂、神。

공자께서는 괴, 력, 난, 신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논어》 제7〈술이〉편 제20절

군무

간자(間者)
간첩을 가리키는 옛말.

갑사(甲士)
오위 중 중위인 의흥위에 속한 직업군인. 투구, 갑옷에 각종 무기로 무장한 정예병이었다. 《경국대전》 반포 무렵인 성종 때 정원은 14,800명 정도였다. 서울에 주둔한 경갑사(京甲士), 국경지대인 평안도와 함경도에 주둔한 양계갑사(兩界甲士), 말을 타는 기갑사(騎甲士), 식인 호랑이 퇴치를 위한 착호갑사가 있었다. 갑사 채용은 취재(取材)라 했으며, 취재는 장교를 뽑기 위한 무과와 달리 무예만 보았지 병법 등은 보지 않았다. 경갑사 복무를 마치고 임관하면 거관법에 따라 종4품을 받았으며, 조선 중기 권신으로 유명한 유자광도 이런 갑사 출신이었다. 갑사는 본래 지배계층 자제들 중에서 주로 뽑았고, 말이나 군장을 직접 준비해야 하는 등 애초에 본인 부담이 컸다. 그러나 지배층의 군역기피와 문반 선호로 인해 갑사 정원을 채우기는 어려워졌고, 경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상민들의 입대도 허용하다 보니 질의 저하로 이어졌다. 갑사는 부실화된 상태로 임진왜란을 맞았고, 임진왜란 이후 오위제가 속오법으로 전환되는 와중 17세기가 되면서 완전히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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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에 가면 있는 경번갑

경번갑(鏡幡甲)
중세 중동에서 발생한 갑옷 형식. 영어로는 플레이티드 메일(Plated mail)이라 한다. 쇄자갑(사슬갑옷)에 철판들이 삽입된 형식을 하고 있으며, 이는 베고 찌르는 공격에 강하지만 타격이나 사격에는 약한 쇄자갑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경번갑의 개발로 인해 그 이전까지 사용되던 찰갑, 판갑, 어린갑들은 도태되었다. 한반도에서는 늦어도 고려 중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경번갑은 16세기경까지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걸쳐 사용되다가, 화승총이 발달함에 따라 도태되고 서양에서는 판금갑, 중동에서는 거울갑옷, 동양에서는 두정갑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금군(禁軍)
국왕 경호를 맡은 근위병. 내금위, 겸사복, 우림위의 병사들이 금군이다. 현종 7년(1666) 금군청(禁軍廳)을 설치해 세 부대를 관리하다가 영조 31년(1755) 금군청을 용호영(龍虎營)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기총(旗摠)
1개 기(旗)를 통솔했다. 품계는 없다. 현대의 소대장급.

녹영제(綠營兵)
청나라의 군사제도. 만주인·몽골인·한인들이 모두 존재한 황실 친위부대인 팔기군과 달리 전통적 징집병으로서 거의 대부분의 병사가 한인이었다. 1644년 오삼계가 이끄는 명군이 청군에게 항복하면서 위수제에 따르던 명군이 흡수된 것이 녹영제의 시초이다. 녹영군의 수장은 각 성의 제독이었으며, 제독 이하 여러 장군들이 여단급, 대대급으로 나뉘는 하위 부대를 지휘했다. 성의 행정을 담당한 총독 또는 순무 역시 자신에게 직속된 대대급 녹영군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성의 녹영군 대부분은 제독의 휘하에 있으며, 무관인 제독이 문관인 총독 또는 순무의 명을 따르는 식으로 군부와 행정부가 협조하는 관계에 있었다.
부대 관직 인원 위상 비고
파총(把總) 최소 10수명 소대급
천총(千總) 최대 100여명 중대급
영(營) 수비(守備) 불규칙
영(營) 도사(都司) 불규칙
영(營) 유격(遊擊) 불규칙
영(營) 참장(參將) 불규칙
협(協) 부장(副將) 좌우 약 1천
진(鎮) 총병(總兵) 1 ~ 2, 3천
녹영(綠營) 제독총병관(提督總兵官)
또는 제독(提督)
1 ~ 6, 7만 사단 내지 군단급

대장(大將)
종2품 무관 벼슬. 1개 영(營)을 통솔했다. 현대의 사단장급.

대총(隊摠)
1개 대(隊)를 통솔했다. 품계는 없다. 현대의 분대장급.

동개일습(筒箇一襲)
활을 넣는 주머니인 동개와 화살을 넣는 주머니인 시복(矢服)을 함께 이르는 말.

두석린갑(豆錫鱗甲)
조선에서 사용된 어린갑의 일종. 어린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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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정갑

두정갑(頭釘甲)
천이나 가죽으로 옷을 만들고, 옷 속에 철판을 누빈 뒤 리벳을 쳐서 고정시킨 갑옷. 북동아시아 유목민들에게서 발원했으며, 몽골 제국이 흥기할 때 서양과 동양에 모두 전래되었다. 동양 갑옷 중에서 제일의 방호력을 지닌 갑옷이며, 동서양을 통틀어도 판금갑 다음가는 우수한 갑옷이다. 서유럽에서는 브리건딘(brigandine), 러시아에서는 쿠야크(kuyak), 일본에서는 귀갑(亀甲), 중국에서는 면갑(緬甲), 만주에서는 정갑(釘甲)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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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석화시 모포

불랑기(佛郞機)
서양의 원시적 후장포가 명나라 때 중국과 일본에 전해진 것. "불랑기"는 "프랑크"를 가차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석화시(石火矢이시비야)"라고 불렀다. 자포에 화약과 탄환을 재어 모포의 뒤에 삽입해 발사했다. 장전이 빠르고 조준이 쉬운 장점이 있으나, 모포와 자포 사이를 완전히 개폐할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그 틈으로 가스가 새서 총통보다 위력은 떨어졌다. 또 틈으로 화약이 샐 경우 폭발사고 일어나기 딱 좋았기에 화약을 적게 넣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가스샘으로 인해 떨어지는 위력이 더 떨어졌다. 그래도 연사력과 조준력은 확실히 우수했기에 개화기까지 홍이포와 함께 꾸준히 애용되었다. 조선의 불랑기는 불랑기 1호부터 불랑기 5호까지 있었으며, 숫자가 클수록 크기는 작았다.

세작(細作)
간첩을 가리키는 옛말.

속오법(束伍法)
명나라 장군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따른 오군영과 속오군의 편제 방법. 큰 단위부터 순서대로 영(營) - 부(部) - 사(司) - 초(哨) - 기(旗) - 대(隊) - 오(俉)로 하였으며, 상세는 다음과 같다. 다만 속오법은 일괄적으로 적용된 것이 아니고 중앙군과 지방군 사이에 차이가 또 있고 중앙군 사이에서도 각 군영마다 차이가 존재했다.
부대 지휘관 인원 위상 비고
오(俉) - 병사 5인 공격대급
대(隊) 대총(隊總) 2오+대총=11인 분대급
기(旗) 기총(旗總) 3대 소대급 기총과 대총은 품계가 없으며 장교가 아니다.
초(哨) 초관(哨官) 3기 중대급 기본 운용 단위. 초관이 최하급 장교이다
사(司) 파총(把摠) 5초 대대급
부(部) 천총(千摠) 3사 연대급 임진왜란 때인 초기 속오법에는 없었다.
부 단위는 1600년 이후 나타난듯하며
1614년 《진부총도》에서 존재가 확인된다.
영(營) 대장(大將) 5사 또는 2부 여단급 또는
사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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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쇄자갑

쇄자갑(鎖子甲)
철사를 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엮은 갑옷. 사슬갑옷, 체인메일(chain mail)이라고도 한다. 고대 유럽의 켈트족이 발명했으며, 이후 로마 제국, 바이킹, 러시아, 중앙아시아, 인도, 티베트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다. 동양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자체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한반도에서는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까지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 군인이 쇄자갑을 착용할 때는 갑옷 안에 사슴가죽이나 노루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갑옷 위에는 별다른 옷을 입지 않았다. 쇄자갑은 제작 및 유지보수 비용이 상당하기 때문에 조선 후기로 올수록 제작량이 감소하여 도태되었다.

수발총(燧發銃)
화승총에서 치륜총을 거쳐 개발된 근세의 총기.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의 부싯돌이 화약접시를 때려 그 스파크로 화약이 점화, 총이 발사된다. 영어로는 플린트락(flintlock)이라 한다. 화승총의 도화선이 없어짐에 다라 귀찮은 준비물이 하나 줄어들고 악천후에서도 화약만 젖지 않게 관리하면 발사할 수 있는 혁신을 이루었다(물론 악천후에서 완전히 해방되려면 뇌관의 발명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서양에서는 1650년대를 전후해 총기가 모두 수발총으로 대체되고, 그에 따라 머스킷 시대가 열려 판금갑으로 대표되는 냉병기는 종말을 고했다. 조선에서는 1626년 표류해 들어온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가 수발총 제작 방식을 전수해 주었으나 제작비용이 비싸고 구조가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장되어 전혀 사용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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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동엽갑

어린갑(魚鱗甲)
금속 조각을 물고기 비늘처럼 붙여 만든 갑옷. 비늘갑옷, 스케일 아머(scale armour)라고도 한다. 어린갑은 고대 그리스 시대 스키타이 전사들의 무덤에서도 발견되는 물건으로, 찰갑, 판갑과 함께 가장 오래된 형태의 갑옷이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나머지 두 갑옷과 달리 거의 쓰이지 않다가,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구리로 비늘을 만든 어린갑을 만들었다. 이때 도금한 구리, 붉은 칠한 구리, 검은 칠한 구리를 번갈아 사용하면 두석린갑(豆錫鱗甲)이라 하고, 도금한 구리만 쓰면 도금동엽갑(塗金銅葉甲)이라 했다. 두석린갑이나 도금동엽갑들은 강철도 아닌 구리로 만들었기에 방호력 자체가 낮았고, 충격을 분산시키기도 어려운 비실용적인 갑옷으로서 고위 장수의 의전용으로만 사용되었다.

오군영(五軍營)
임진왜란 이후 문관 중심의 오위 체제가 붕괴하고 수립된 군영 체제. 훈련도감, 총융청, 수어청, 어영청, 금위영이 이에 해당한다. 다만 오군영은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각 군영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상설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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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의 대완구

완구(碗口)
조선의 구포(臼砲). 밥사발처럼 생겼다. 포탄을 고각으로 쏘는 곡사포로, 성벽 따위 엄폐물 너머로 포탄을 쏘아보내거나 해전에서 적선의 갑판 위에 포탄을 떨어뜨리는 등 서양의 모르타르와 그 사용 용법이 거의 동일했다. 체급에 따라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가 있었으며 가장 큰 대완구는 전장 65 cm, 구경 26 cm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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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불랑기 자포

자포(子砲)
불랑기의 본체인 모포 뒤에 삽입하는 약실. 여기에 화약과 탄환을 재어서 모포에 끼워 사용한다. 이때 가스샘을 줄여서 위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오른쪽 그림처럼 나무토막을 끼우거나 납조각을 쑤셔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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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된 전장포의 단면.

전장총포(前裝銃砲)
탄자와 추진제를 총포구, 즉 화기의 앞쪽으로 삽입해 장전하는 화기. 머즐로더(muzzleloader)라고도 한다. 후장총포에 밀려 도태되어 현대에 살아남은 전장총포는 박격포 정도가 유일하다. 하지만 전근대에는 오히려 불랑기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화포가 전장식이었다. 1824년 프로이센의 췬드나델게베어 드라이제Zündnadelgewehr Dreyse가 개발되기 전까지 후장총포가 개인화기 수준으로 소형화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종사관(從事官)
종6품 무관 벼슬. 군영이나 포도청 등에 여러 명 배치되어 상급자를 보좌했다. 현대의 부대대장급.

중군(中軍)
종2품 무관 벼슬. 영을 통솔하는 대장이나 지역 도지사인 관찰사 등 최고 지휘관을 보좌했다. 현대의 부사단장급.

착호갑사(捉虎甲士)
식인 호랑이 호랑이를 퇴치를 위해 선발한 갑사. 착호갑사라는 용어는 1416년(태종 16년) 음력 10월 27일에 처음 등장하므로 그 이전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1421년(세종 3년) 당번 20명과 비번 20명 총 40명을 뽑아 양번제로 운영했고 1428년(세종 10년) 음력 9월에는 규모를 두 배로 증가시켰다.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 보면 착호갑사의 정원은 440명이고 5개 번으로 나뉘어 30개월마다 6개월씩 5교대 근무하였다.

천총(千摠)
정3품 무관 벼슬. 1개 부(部)를 통솔했다. 현대의 연대장급.

초관(哨官)
종9품 무관 벼슬. 1개 초(哨)를 통솔했다. 현대의 중대장급.

치륜총(齒輪銃)
방아쇠를 당기면 철제 바퀴가 돌아가며 발생시킨 마찰 스파크로 화약접시에 불을 붙이는 화기. 영어로는 휠락(Wheellock)이라 한다. 화승이나 도화선 따위 거추장스러운 것 없이 점화할 수 있는 최초의 총이었다. 기원후 1500년경 개발되어 화승총과 병행 사용되었으나 구조가 복잡하고 복잡한 만큼 내구성이 떨어지는 심각한 약점이 있었다. 1560년대에 탁식총(스냅펀스락), 1600년경에 수석총(플린트락)이 개발되자 경쟁에 밀려 순식간에 도태되었다.

파총(把摠)
종4품 무관 벼슬. 1개 사(司)를 통솔했다. 현대의 대대장급. “파총 벼슬에 감투 걱정한다”는 속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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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고딕 판금갑

판금갑(板金甲)
열처리한 금속판을 리벳 등으로 이어서 만들되, 착용자의 전신을 둘러싸는 갑옷. 플레이트 아머(Plate armor) 라고도 한다. 단순히 금속판을 사용한 갑옷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판갑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전신을 둘러치는 판금갑은 중세 말기 유럽에서 개발되었다. 냉병기 시대가 만들어낸 방어기술의 결정체로, 유라시아 대륙의 갑옷들 중 최강의 방호력을 자랑하지만 한반도를 비롯한 동양에서는 사용된 바가 없다. 화승총의 발달로 경번갑이 도태되는 상황에서도 판금갑은 우수한 방어능력으로 17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수발총이 발달한 1650년대가 되어서야 사양세로 접어들어 흉갑으로 대체되었다.

호준포(虎蹲砲)
동양의 박격포.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호준포라 부른다.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 장군이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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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의 홍이포

홍이포(紅夷砲)
서양의 컬버린포가 명나라 때 중국으로 전해진 것. "홍이"란 붉은 머리카락 오랑캐, 즉 네덜란드인을 말한다. 만주족이 명나라를 정복하는 데 최후 장애물로 작용했던 강력한 무기로, 명청교체기 당시 조선에도 전래되어 네덜란드인 표류자 벨테브레이가 훈련도감에서 홍이포 관리를 맡아 일했다. 전장 약 2미터, 중량 1.8 톤, 구경 12 cm, 유효사정거리는 700 미터 정도이다. 불랑기는 후장포이나, 홍이포는 전장포이다.

화병(火兵)
취사병.

화승총(火繩銃)
불이 붙은 화승을 점화구에 갖다 대어 총알을 발사하는 총. 영어로는 매치락(matchlock)이라고 한다. 하켄부크셰나 핸드캐넌, 총통처럼 불씨를 직접 화약에 갖다대는 원시적 화기를 탈피해 기계장치("화기 작동 메커니즘")를 사용한 첫 총기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서양의 아쿼버스가 그 원형이며, 이것이 일본에 전해진 종자도총(타네가시마), 조선과 중국의 조총은 모두 화승총이다. 조선에서는 화승총에서 더 이상의 총기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임진왜란 이후 개화기 때까지 화승총을 계속 제식총기로 사용했다.

변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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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구미호(九尾狐)
꼬리 아홉 달린 여우 요괴. 《산해경》에 따르면 중원 동쪽 청구산에 사는 요괴로 목소리가 어린아이 같고 사람을 잘 잡아먹는다. 구미호를 잡아먹으면 요사스러운 기운에 홀리지 않는 능력을 얻는다. 《현중기》에 따르면 여우가 천년을 묵으면 구미호가 되고 구미호의 수준에 다다른 여우는 하급신에 가까운 능력을 지닌다. 한국에서 전승되는 구미호는 알사탕 정도 크기의 푸른색 여우구슬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입에 문 채로 인간에게 입을 맞추어 구슬을 입과 입 사이에서 움직이며 정기를 빨아 먹는다. 전우치, 문가학 등 도교 계통의 인물들이 절간의 술을 훔쳐먹던 구미호를 붙잡아 여우구슬을 훔치거나(《청장관전서》) 도술 비급서를 뜯어내서(산청군의 전승) 도통했다는 전승들도 전한다. 구미호의 천적은 늑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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놋페라보우

달걀귀신[卵鬼神]
얼굴의 이목구비가 없는 귀신. 별다른 흉악한 짓을 하지 않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 사람은 공포에 경기가 들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된다. 달걀귀신 역시 적극적으로 사람을 홀리는 모습을 보여주기에 악귀의 일종이라 할 법 하다. 경기도 파주에 전해져 오는 전설은 다음과 같다(출처). 공릉 장터에서 산 물건을 잔뜩 짊어지다 보니 귀가시간이 늦어버린 어느 젊은이가 귀신이 출몰한다는 탑삭골(오늘날의 파주시 조리읍 능안리) 능선을 지나다가 앞서 가는 노부부를 보았다. 무서워 죽겠는 참에 동행이 생기자 반가워 다가가는데, 노부부는 길을 새서 귀신 나온다는 탑삭골 숲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황한 젊은이는 거기 귀신 나오는 곳이니 어서 나오세요 라고 불렀는데, 노부부가 다시 길로 나오자 반가워서 다가가 보니 그 노부부야말로 다름아닌 달걀귀신이었다. 노부부가 처음 보였을 때부터 젊은이는 이미 홀려 있던 것이었고, 젊은이는 시름시름 앓더니 한달을 못 넘기고 죽어 버렸다. 달걀귀신을 보고 살아난 사람이 없자 탑삭골 사람들은 아예 날씨 궂은 날이나 해가 진 이후에는 탑삭골 고개를 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일본에도 야비방(野箆坊놋페라보우)이라는 눈코입 없는 요괴가 전해지는데, 이 요괴를 보고 도망친 사람이 메밀국수 포장마차에 들어가 포장마차 주인에게 얼굴 없는 요괴를 보았다고 하자 주인이 돌아서면서 “이런 얼굴이요?” 라며 달걀귀신 얼굴을 보여주면서 포장마차 불이 꺼져버렸다는 전승이다. 귀신을 피해 사람을 만나 안심한 순간 그 사람이 바로 피하려던 귀신이었다는 반전이 한국의 달걀귀신 전승과 거의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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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야마 세키엔의 요괴화집에 실린 망량

망량(魍魎)
물귀신의 일종. 《회남자》에서 “망량은 세살먹은 어린아이와 같다. 피부색은 검붉고 눈은 새빨간데 귀가 길고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한다. 《본초강목》에서는 “망량은 죽은 자의 간을 즐겨 먹는다. 망량은 호랑이와 떡갈나무를 무서워하는 본성이 있다. 또 불술(弗述)이라는 것이 있어 땅속 시체의 뇌를 파먹는데, 나무로 모가지를 쑤셔 버리면 죽는다. 이것도 망량이다.”라고 되어 있다. 산천의 요괴 요정들을 모두 싸잡아 "이매망량"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망량"이 곧 이 망량이다.

모노노케(物の怪)
일본의 고전이나 민간신앙에서, 사람에게 씌어 병에 걸리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귀신, 사령, 생령 등의 넋. 음양사를 비롯한 미신이 성행한 헤이안 시대 문헌에서 자주 언급된다. 의학적인 지식이 미비했을 시절 승려나 수행자가 기도를 하고 모노노케를 "쫓아" 다른 사람(주로 하녀 등)에게 옮아가게 함으로써 질병을 쾌유시키는 둥의 일이 벌어졌다.

바케모노(化け物)
일본 민속에서, 본래 갖추어야 할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변화한 것, 또는 그 변화를 말한다. 소위 "괴물"이라고 변역되지만, 괴물과 바케모노의 개념이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생령(生霊)
일본 민속에서 살아 있는 인간의 영혼이 몸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것. 그러니까 유체이탈한 영혼이다. 반대 개념으로 죽은 이의 넋이 사람에게 해코지하는 사령(死霊)과 성불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유령(幽靈)이 있다. 흔히 머리에 삼각형 띠를 두르고 다니는 것이 일본 유령이다. 생령, 사령, 유령으로 넋을 구분하는 것은 일본의 특이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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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조

짐조(鴆鳥)
중국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깃털에 맹독을 가진 새. 짐조의 독을 짐독, 그 독을 섞은 술을 짐주, 짐주를 먹여 사람을 죽이는 것을 짐살이라 한다. 중국 남부 광동성(오늘날의 홍콩, 마카오 일대)에 서식하며 크기는 독수리 정도이고 깃털은 녹색, 부리는 구릿빛, 피부는 흑색, 눈알은 적색이다. 살무사와 칡을 먹고 살며, 짐조가 논밭 위를 날면 독기 때문에 논밭이 말라 죽었다. 짐살에 대한 기록은 《한비자》, 《사기》 등에 빈번히 나타나며, 진시황의 생부 여불위가 진시황에게 숙청당한 뒤 짐주를 마시고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짐조는 남북조시대까지 실존하는 것으로 취급되어 짐조가 산다는 산을 통째로 불태우는 등의 예방대책도 이루어졌다. 그러다 당나라 이후에는 정부에서도 짐조의 존재을 부정하게 되어 전설 속 존재로 잊혀졌다. 그러나 1992년 뉴기니 섬에 서식하는 피토휘(pitohui)라는 새의 깃털에 바트라코톡신 계열 신경독 알칼로이드가 함유되어 있음이 밝혀지면서 짐조 역시 실존했다가 멸종한 종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바트라코톡신은 남미 독개구리들도 분비하는 맹독이며, 피토휘는 이것을 스스로 만들지는 못하고 Choresine속의 독성 딱정벌레들을 잡아먹고 독성분을 얻는다. 이는 살무사를 잡아먹고 독성분을 얻는다는 전설 속 짐조의 행태와 일치한다.

창귀(倀鬼)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귀신. 호랑이를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유인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게 만든다. 호환이 일어나면 죽은 사람이 창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봉인무덤인 호식총을 만들었다.

복식

가체(加髢)
부인들의 머리를 꾸미기 위해 올리던 타이어 모양의 가발. 중국에서 전해졌는데, 비싸기도 비싸고 무거운지라(작은 것은 3 kg, 크고 화려한 것은 10 kg에 육박했다) 착용자의 목을 상하게 하는 등 악폐가 심했다. 1756년(영조 32년) 금지령을 내리고 대신 족두리를 쓰도록 했으나 오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갈모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던 고깔. 기름종이로 만들었다.

성인 남성이 쓰던 의관의 하나. 보통 "갓"이라 하면 흑립을 말하는 것이나, 시대에 따라 발립, 중립, 흑립 등 다양한 종류가 있었고 또 신분에 따라 상술한 갓들 뿐 아니라 초립, 평립 등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각각의 항목들을 참조.

갓끈
갓을 맬 때 쓴 끈. 보통 헝겊쪼가리로 만들었으나 호박, 산호, 수정 등 보석으로 만든 장식적인 것도 있었다. 여름에는 헝겊이 땀에 절기 쉬워서 구슬갓끈을 썼다고 하는데 매우 사치스러웠다. 갓끈의 예도 계급에 따라 달랐는데, 당상관은 융복을 입을 때 주립(朱笠; 붉은 갓)에 산호, 호박, 대모 등을 꿰어만든 패영(貝纓)이라는 갓끈을 썼고 당하관은 융복을 입을 때 흑립(黑笠)에 수정을 꿰어만든 정영(晶纓)이라는 것을 썼다. 전립의 갓끈에는 이런 보석 구슬들 대신 납조밀화(蠟造蜜花)라 하여 밀랍을 뭉쳐 만든 모조품을 사용하기도 했다. 상술했다시피 매우 사치스러워 일찍이 세종 때부터 단속이 시작되었고, 《경국대전》과 《대전후속록》 에서 모두 마노, 호박, 명금, 산호, 청금석을 사용한 갓끈은 당상관 이상만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개립(蓋笠)
갈대나 대오리로 거칠게 엮은 갓. 흔히 삿갓이라고 한다. 꼭대기가 뾰족한 고깔의 형상을 띤다.

개짐
생리대. 생긴 모양이 현대의 T팬티와 똑같다. 다만 고정이 잘 되지 않아 보통 이 위에 또 다리속곳을 입었다.

구군복(具軍服)
조선시대 무관들이 입던 군복. 구군복이라 함은 하나의 단일한 옷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립, 이엄, 협수, 전복, 전대, 목화를 갖춰 입은 세트를 말하는 것이며, 이는 융복, 사모관대, 금관조복 등의 경우와 동일하다. 흔히 생각하는 사또 옷이 바로 이 옷이다. 조선 중기까지는 군복으로 융복이 성행하다가, 순조 때 들어 화려한 군복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구군복이다. 이후 융복은 구군복으로 거의 대체되었고, 구군복은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될 때까지 군복으로 사용되었다.

구의(裘衣)
갖옷, 초복(貂服)이라고도 한다.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입는다. 목은 둥글고 양 소매가 달렸으며 길이는 무릎 밑까지 내려간다. 고급 구의는 담비 모피를 사용해 만들었다. 《중종실록》 2년 음력 5월에 보면 가죽옷의 사치가 심하기에 단속을 해야겠으나 부녀자들이 애용하는 옷이라 그것이 힘들다는 내용이 나온다. 세월히 지나면서 작아져 코트의 모습은 잃고 저고리나 배자 안에 받쳐입는 속옷 형태가 되었는데 이를 갖저고리라 한다. 함경도 지방에는 소가죽, 제주도 지방에는 개가죽으로 만든 옷이 있었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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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복을 입은 대원위 대감

금관조복(朝服)
종묘에서 제사를 지나거나 정월 초하루나 동지 같은 명절 때, 또는 왕의 즉위식이 있거나 하는 등 옷자랑 할 일이 있을 때 문무백관이 갖춰 입던 격식 높은 배사복. 푸른 두루마기(청초중단) 위에 붉은 겉옷(적초의)를 걸치고 머리에 금빛의 양관(梁冠)을 쓰고 손에는 홀(笏)을 들었다. 조선 전기에는 제용감에서 제작해 관사에 맡겨두고 쓸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 입었지만 중종 이후에는 개인적으로 준비해 입어야 했기에 돈이 없어서 조복을 구하지 못한 이는 주변에서 빌려 입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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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령을 입은 대원위 대감

단령(團領)
관리들이 입던 제복. 흔히 "관복"이라 하는 옷의 정식 명칭이다. 옷깃이 둥글기 때문에 둥글 단 자를 써서 단령이라 한다. 당나라 시절 북서 이민족들의 복식, 즉 호복에서 유래되어 신라시대인 64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김춘추가 수입해 오면서 도입되었다. 이후 고려 말 정몽주가 사모단령을 정식 관복으로 채용하면서 단령이 공무원 제복으로 정착된다. 홍단령 청단령 흑단령 등 다양한 색깔이 있었으나, 어떤 직급에 따라 정해진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유행에 따라 달라졌다. 대원군 집정기를 전후한 조선 말에는 사치를 막기 위해 대부분 흑단령을 착용했다.

당혜(唐鞋)
혜(운두가 낮은 가죽신)의 하나. 앞코와 뒤꿈치에 꼬부라진 눈을 붙이고 덩굴무늬를 새겼다. 남녀 공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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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롱이

도롱이
짚으로 엮은 비옷. 녹사의(綠蓑衣)라고도 한다. 주로 농민들이 사용했으며, 양반들은 머리에 갈모만 썼다. 한반도 뿐 아니라 중국 강남, 베트남, 일본 등에서 널리 발견된다.

목혜(木鞋)
나무로 만든 혜. 소위 나막신이다. 앞뒤에 높은 굽이 있어 비오는 날 주로 신었다.

목화(木靴)
화(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신)의 하나. 사모관대를 할 때, 즉 단령이나 조복 따위의 관복을 입을 때 신었다. 바닥은 나무나 가죽이고 검은 사슴가죽으로 목을 길게 만드는데 그 모습이 어그부츠와 매우 비슷하나 다만 신발코가 버선처럼 앞으로 치켜올라간 것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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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립을 쓴 이숭인

발립(鉢笠)
둥글납작한 갓. 정수리에는 구슬을 달아 장식했고, 테가 둥글게 둘러졌다. 고려시대에 몽골을 통해 전래되었으며, 조선 초기까지 사용되었다.

방립(方笠)
초상집 상제가 외출할 때 쓰던 갓. 방갓이라고도 한다. 가는 대오리를 엮어 만들었으며, 그 모양이 삿갓과 비슷하나, 네 귀충이가 우묵하게 패이고 꼭대기가 뾰족하지 않고 둥그스름한 것이 차이점이다. 상제가 외출할 때는 대개 방립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포선으로 얼굴을 가렸다.

복건(幅巾)
건의 일종. 검은 헝겊으로 위를 둥글삐죽하게 만들고 뒤쪽에는 넓고 긴 자락을 늘였다. 양옆에 끈이 있어서 머리에 쓰고 끈을 뒤로 돌려매 고정했다. 천원짜리에 있는 퇴계이황이 쓴 것이 바로 복건인데, 정작 퇴계는 복건을 싫어하고 정자관을 즐겨 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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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계변가화〉의 소창의를 입은 선비

소창의(小氅衣)
포의 일종. 소매가 좁으며 아오자이마냥 겨드랑이부터 밑단 끝까지 터져 있다. 서민들은 겉옷으로 입었고, 사대부들은 실내복으로 입고 외출할 때는 이 위에 도포, 대창의 등을 받쳐 입었다. 초기에는 이렇듯 두루마기와 마찬가지로 서민들의 옷이었으나 후기로 가면서 두루마기와 함께 양반도 입는 옷으로 격이 높아졌다. 신윤복, 김홍도의 그림에 보면 소창의를 입은 양반을 자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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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를 입은 송시열 영정

심의(深衣)
유학자들이 입던 겉옷. 흰 천으로 만들어 깃이나 소맷부리 등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을 두른다. 일반적인 포와는 달리 상의(衣)와 하의(裳)를 따로 만들어 허리를 이어붙이며, 이는 심의의 영향을 받은 철릭도 동일하다. 포의 일종인 학창의와 흑백의 생김새가 유사하나 심의는 옷고름을 따로 매지 않고, 세조대로 고정하는 학창의와 달리 대대(大帶)를 착용한다. 심의를 입었을 때는 대개 머리에는 복건을 썼다.

운혜(雲鞋)
혜(운두가 낮은 가죽신)의 하나. 신발코와 뒤꿈치에 구름무늬 새겼다. 여성용.

유건(儒巾)
유생들이 쓰던 실내용 건. 민짜건이라고도 한다. 햄버거를 포장해주는 종이 도시락 봉지를 뒤집어쓴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유혜(油鞋)
질은 땅에서 신는 혜. 들기름 먹인 가죽으로 만들었고, 바닥에 징을 박기도 했다. 진신, 이혜(泥鞋)라고도 한다.

융복(戎服)
넓은 의미로는 갑옷까지 포함되는 군복 전반이 다 융복이지만, 좁은 의미로는 철릭, 광다회, 목화, 동개, 환도, 병부주머니, 갓으로 구성된 의복 세트를 뜻한다. 왕의 행차에 수행할 때, 외국 사신으로 파견될 때, 국난을 당했을 때(예컨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착용했다. 임진왜란 때 융복은 군복으로 정립되어 철릭에 광다회를 매고 전립을 쓰고 목화를 신었다. 영조 때의 《속대전》에 보면 당상관은 붉은 갓에 보석 갓끈을 하고 남철릭을 입었으며, 당하관은 검은 갓에 수정 갓끈을 하고 청철릭을 입었다. 순조 이후에는 구군복이 융복을 거의 대체해 나갔다.

전립(戰笠)
조선 군인들이 쓰던 털모자. 흔히 생각하는 사또 모자 또는 포졸 모자가 바로 전립이다. 정확히는 사또 모자는 안올림벙거지라 하여 고급 털로 만들어 공작 꼬리깃, 술대, 옥로 등으로 장식했고, 포졸 모자는 그냥 벙거지라고 하며 돼지 털로 만들었다.

전모(氈帽)
여성들의 외출용 모자. 우산처럼 넓은 테두리에 살을 대고 기름종이를 붙여 만들었다. 의녀, 기행나인, 기녀 등 다소 신분이 낮은 여성들이 사용한 예가 발견되는데,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이 사용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조선 말엽의 전모를 보면 온갖 장식을 해서 화려하게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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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을 쓴 김시습

중립(中笠)
대오리로 엮어 검게 칠한 갓. 쓰개 부분이 흑립처럼 평평하지 않고 둥글다. 조선 초기에 애용되었다.

초립(草笠)
누런 빛깔이 나는 풀로 엮어 만든 갓. 어린 나이에 관례를 한 사람이 썼다. 평량립과 흡사하나 초립은 흑립처럼 쓰개가 평평하고, 평량립은 중립처럼 쓰개가 둥글다.

태사혜(太史鞋)
혜(운두가 낮은 가죽신)의 하나. 신발코와 뒤꿈치에 태사문이라 하는 커다란 흰 줄무늬를 새겼다. 남성용.

평량립(平涼笠)
대오리를 잘게 쪼갠 댓개비로 엮고 검은 칠은 하지 않은 갓. 패랭이, 평량자(平涼子)라고도 한다. 초립과 흡사하나 초립은 흑립처럼 쓰개가 평평하고, 평량립은 중립처럼 쓰개가 둥글다. 또한 초립은 양반 미성년자들이 쓰고 다녔으나, 평량립은 반대로 역졸, 보부상, 천민 등 신분이 다소 낮은 이들이 썼다. 역졸은 평량립에 검은 칠을 하고 보부상은 목화송이를 달아서 자신들의 직종을 밝혔다.

포(袍)
바지와 저고리 위에 입는 겉옷. 그러니까 한복의 외투 전반을 말한다. 단령포와 직령포가 있는데 단령포는 사모관대 관복이고 보통 포라 하면 직령포를 이른다. 소창의, 대창의, 학창의, 도포, 두루마기 등이 모두 포의 종류이다. 포는 웃옷 부분인 의(衣)와 하의 부분인 상(裳)을 따로 재단하지 않고 통짜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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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의를 입은 대원위 대감

학창의(鶴氅衣)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입은 매우 긴 한복. 창의의 일종으로, 대창의·소창의와 마찬가지로 소매가 넓고 옆선과 뒷솔기가 트였다. 하지만 색깔이 흰색이고, 옷깃 등 트인 부분에 검은 헝겊으로 넓게 띠를 두른 점이 구분된다. 심의와 생김새가 매우 유사하나, 학창의는 포의 일종으로서 상의와 하의 구분 없이 한꺼번에 재단했고, 입을 때도 옷고름을 매고 세조대, 광대 등의 끈을 묶는 것이 심의와는 다르다. 학창의를 입었을 때는 복건, 정자관, 동파관 등을 머리에 썼다.

흉배(胸背)
단령을 입었을 때 가슴과 등에 덧대 붙이던 표장. 장식기능 뿐 아니라 품계의 높낮음을 표시하는 기능도 했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흉배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정몽주황희 초상을 보면 그점을 알 수 있다. 흉배는 처음에 명나라 홍무제 때 처음 만들어진 것을, 세종 때 도입을 논의하였으나 검소하지 않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러다 단종 2년(1454년) 흉배가 제정되어 사용되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무늬가 사용되었는지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단종 때 제정된 흉배는 당상관들에게만 적용되었으나, 연산군 11년(1505년) 1품부터 9품까지 모든 신하가 흉배를 착용하도록 하고 돼지, 사슴, 거위 등 무늬도 세분화하였다. 이후 영조 때 당상관과 당하관, 문관과 무관의 네 가지로만 나누게 간소화하였고, 고종 때 다시 한번 변하였는데 그 상세와 그림은 다음과 같다.
단종 시기 제정된 흉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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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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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택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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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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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표
호랑이나 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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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안
구름과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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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표
호랑이나 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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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한
흰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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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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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치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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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신화의 동물
영조 시기 제정된 흉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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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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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택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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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학
구름과 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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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표
호랑이나 표범
당하문관 %EB%B0%B1%ED%95%9C_%ED%9D%89%EB%B0%B0%2817%EC%84%B8%EA%B8%B0%29.jpg
백한
흰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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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비
고종 시기 제정된 흉배
대군,
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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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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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택
신화의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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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학
두루미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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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호
호랑이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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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학
두루미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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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
호랑이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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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립을 쓴 하회마을 어르신

흑립(黑笠)
말총으로 엮어 검게 옻칠을 한 갓. 조선 중기 이후 확립된 갓으로, 현대에 "갓" 이라고 하면 대개 이 흑립을 이름이다. 말총으로 만들었기에 내구도가 약했고, 갓통 따위에 따로 보관해야 하는 나름 사치품이었다. 칠립(漆笠)이라고도 한다. 옥으로 된 해오라기 모양 장식을 단 것을 옥로립(玉鷺笠)이라고 한다.

인명

남궁두(南宮斗, 1526년 ~ 1620년?)
조선 중기의 도사. 법호 총지(摠持), 본관은 함열 남궁씨. 1555년(명종 10년) 진사과에 급제하였다. 서울에 지내다 고향에 돌아왔는데, 첩이 독수공방 끝에 5촌 조카와 간통하는 것을 목격하고 두 남녀를 활로 쏘아 죽이고 암매장했다. 남궁두의 농장 관리인이 자신의 횡령 사실이 탄로날까 두려워하던 와중 이 사실을 알고 관아에 발고했고, 남궁두는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도피한다. 남궁두는 전라도 무주에서 신선을 만나 그에게서 술법을 사사받아 도통하였으며, 허균이 나중에 1608년(광해군 원년) 남궁두를 우연히 만났는데 83세의 남궁두는 생김새가 마치 40대와 같았다고 한다. 《해동이적》, 《지봉유설》에도 남궁두가 벽곡술과 단전수련, 호흡법을 통해 건강을 유지, 90세에도 전국 명산대천을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무예 스승으로 나오는 백발 노인이 남궁두이다.

남사고(南師古, 1509년 ~ 1571년)
조선 중기의 도사. 자는 경초(景初), 호는 격암(格庵). 본관은 영양 남씨. 양사언이 그의 제자이다. 역술법(예언술)이 당대에 가장 뛰어나기로 이름을 날렸으나 정작 자기 일은 잘 예언하지 못해 과거시험에 9번이나 떨어졌고 아버지 묫자리도 잘못 잡았다고 한다. 저서로 《격암일고》와 《남사고비결》이 있는데, 이 중 후자는 소위 예언서로서 조선이 망하고 나서까지 들먹여지는 희대의 떡밥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접할 수 있는 《남사고비결》은 물론 위서이다. 한국판 노스트라다무스.

박지화(朴枝華, 1513년 ~ 1592년)
조선 중기의 기인. 자는 군실(君實), 호는 수암(守菴). 정선 박씨의 시조이다.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현감 벼슬을 지냈다고 하나 구체적인 일생은 불분명하다. 유교 불교 도교에 모두 조예가 깊었다고 하며, 허준의 친척이며 훗날 남인 영수 허목의 아버지인 허교가 박지화의 제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80세의 박지화는 피난 중에 백운산에서 일본군에게 포위되었고, 절명시를 남기고 계곡에 투신자살하였다. 청안의 구계서원에 봉향되었는데, 사람들은 박지화가 사실 수선(水仙)이 되었다고들 수군거렸다. 저서로 《수암유록》이 있다.

변인태(邊仁泰, ? ~ ? )
제주도 애월면 출신 사람.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서귀포에 배치된 군졸로, 서귀진 조방장의 심부름꾼이었다. 꾀가 많은 거짓말쟁이로 속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며, 제주 지역에 전설들이 전승된다.

양사언(楊士彦, 1517년 ~ 1584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본관은 청주 양씨. 조선 전기 4대 명필 중 하나로 초서체 제일이었다 한다. 1546년(명종 원년) 문과 급제하여 주로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지방 수령을 지냈는데, 자연과 운치를 즐겨 회양군수 재임 중에는 금강산에 자주 갔다.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 즉 "나 봉래 왔다 감"이라고 새겨놓는 자연파괴 행위를 하기도 했다(이거 아직 남아있음). 안변군수로 재직 중인 1582년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마초를 비축했는데, 여기 불이 붙어 지릉(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의 능)에까지 번지자 책임지고 파직되어 황해도로 귀양 갔다. 2년 뒤 귀양이 풀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금강산에서 전우치를 갈구고 있는 서경덕을 만나 두 사람에게서 도술을 전해받았다는 전승도 전하며, 남사고에게서도 역술법을 배웠다고 한다. 저서로 《봉래집》이 있다. 양사언이 애용한 거문고를 더러 봉래금(蓬萊琴)이라 했는데, 이를 허엽(허난설헌 남매의 아버지)의 외손자 박종현(朴宗賢)에게 선물로 주었다. 박종현의 손녀 박씨는 남양 홍씨 문중에 시집가니 박씨부인의 고손자가 영정조 시기의 실학자 홍대용이다. 홍대용의 《담헌서》 중 〈봉래금사적〉에 천안 본가에 봉래금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

윤군평(尹君平, ? ~ ? )
조선 전기의 기인. 본관과 생몰년은 미상이며, 고향은 한양이다. 《지봉유설》과 《청강쇄어》에 따르면 어려서 무예를 익혀 군관이 된 뒤 서울로 가는 도중에 이인(異人)을 만나 《황정경》과 수련법을 전수받았다. 이를 익히니 당대 도술이 높기로 전우치와 호각을 다투었다고 한다. 전우치가 못된 짓을 일삼고 다니자 여자로 둔갑하여 전우치를 찾아가 그를 죽였다는 설도 있다. 김시습의 제자이며, 곽치허의 스승이다. 김시습에게 배운 연단법 덕분에 80세 이상 장수하였고, 그 아들 윤임(尹霖)도 그 술법을 배워 90세까지 살았다.

위한조(魏漢祚, ? ~ 1602년)
조선 중기의 도사. 자는 중염(仲炎), 호는 청학상인(靑鶴上人). 본관과 생몰년은 미상이며, 고향은 갑산이다. 이혜손의 제자이며 해동칠선의 스승이다. 축지법을 배워 하루에 수천 리를 달렸으며 동양 여러 나라를 두루 유람하다가 나중에 청학동에 정착했다. 1602년(선조 35년) 정월 보름날 제자들에게 죽을 때가 되었다고 말한 뒤 안개 속으로 걸어가더니 다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위한조와 그 제자들의 이야기는 조여적의 《청학집》에 나와 있다.

이혜손(李惠孫, ? ~ ? )
조선 전기의 도사. 자는 유후(裕後), 호는 백우자(百愚子). 본관은 미상이고, 연산군 때 사람이라 하나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이다. 고향은 경주. 통견원문(通見遠聞) 즉 천리안의 술법을 깨우쳤다고 하며, 청학상인 위한조의 스승이다. 가문인 한미하고 재산이 없는지라 농사를 짓다가 세상을 떠났다.

전우치(田禹治, 14??년 ~ 15??년)
조선 전기의 기인. 호는 우사(羽士). 본관은 남양 전씨.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다. 흔히 지금의 개성인 송도 출신이라 하나, 《청장관전서》에서는 전라남도 담양이 고향이라고 하여 어디가 진짜인지 불확실하다. 어쩌면 고향은 담양이고 거주지는 개성이었을 수도 있다. 《청장관전서》 제68권 〈한죽당섭필 상〉에서는 전우치가 어렸을 때 절에서 공부를 하다가 절에서 빚은 술을 훔쳐먹은 여우를 붙잡아 풀어주는 대신 여우의 도술서를 받아냈다고 한다. 《전우치전》 일사문고본에서는 전우치가 어렸을 적 인간 여자로 둔갑한 여우와 성관계를 하던 도중에 여우 입 속에 들어있는 구슬을 삼켜 먹고 도술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대동야승》 중 〈송와잡설〉에 따르면 가정 연간(1522년 ~ 1566년)에 이길의 농장이 있는 부평에 전염병이 성하였는데, 이길의 종과 이웃 10여명이 앓아눕자 이길이 전우치에게 부탁해 병을 물리쳤다고 한다. 백성을 현혹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죽었다는 설도 있는데, 그 뒤 동문인 차식의 집에 홀연 나타나 《두공부시집》을 빌려갔다. 전우치가 죽은 줄 몰랐던 차식은 이 이야기를 주위에 전했고, 전우치의 관을 열어보니 시체가 온데간데 없었다고 한다. 전우치는 빈민의 비참함에 분노하여 왕과 관료들을 기만하는 의협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친구를 위해 과부를 보쌈하는 비행을 저지르다 강림도령에게 혼나는 등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비범한 능력이 있음에도 대개 그것을 장난질에 사용하는 등 대단히 마이페이스적인, 전근대 한국에서 사례를 찾기 힘든 트릭스터형 인물로 그려진다.

정희량(鄭希良, 1469년 ~ 1502년?)
조선 전기의 문신, 기인. 자는 순부(淳夫), 호는 허암(虛庵). 귀양간 뒤로는 이천년(李千年)을 자칭했다고도 한다. 본관은 해주 정씨이고 김종직의 제자이다. 1495년(연산군 1년) 별시문과에 병과 급제하였고, 이듬해 신용개(신숙주 아들), 김일손 등과 함께 사가독서를 할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1497년 연산군에게 상소를 올렸다가 미움을 샀고, 무오사화 때 장 100대를 맞은 뒤 의주에 유배되었다. 1500년 김해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어머니가 죽자 고양에서 무덤을 지키다 단옷날 어디론가 도주해 버렸는데 물가에 신 두 짝만 남아있을 뿐 종적을 알 수 없어 행방불명 처리 되었다. 일설에는 신선로의 발명자가 정희량이라 한다.

최치원(崔致遠, 857년 ~ ? )
신라 말기의 문신. 자는 고운(孤雲), 시호는 문창공(文昌公). 경주 최씨의 시조이다.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귀족들은 부패하고 지역에서는 도적들이 할거하는 상황 속에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자 난세를 비관하여 가야산 해인사에 은거했다. 908년까지 생존해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청학집》에서는 최치원을 한반도 도교의 비조로 비정하고 있다.

홍대용(洪大容, 1731년 ~ 1783년)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 본관은 남양 홍씨. 고향은 천안이고 거주지는 서울 남산 기슭의 저택 유춘오(留春塢). 소위 북학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석실서원의 김원행(金元行)에게 성리학을 배운 노론 벽파로, 선배 및 동기로 김종후, 김종수가 있다. 1765년(영조 41년), 35세 때 숙부인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으로 수행하여 많은 문물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홍대용을 따라서 친구 박지원과 그 제자 박제가도 중국을 다녀온다. 귀국 후 나경적(羅景績)과 안처인(安處仁)이라는 재야 발명가들을 만나 각종 천문기구들을 만들고 배워 천안 고향집에 농수각(籠水閣)이라는 사설 천문대를 세우고 즐겼다. 40이 넘을 때까지 과거에 계속 실패하다가 50이 가까워서 음서로 세손익위사에 들어가 세손(훗날의 정조)의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세손은 홍대용의 혁신적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홍대용은 실망하여 측근이 되어달라는 권유를 거부하고 정조가 즉위한 뒤에도 지방관으로만 나돌았다. 그러면서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생각들을 실현해 보려 했으나 별 성과는 거둘 수 없었다. 1782년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사직하고 서울 집으로 돌아갔는데, 어머니의 병세는 호전되었으나 정작 본인이 뇌졸중을 일으켜 급사했다. 그의 사회개혁 사상은 박지원을 거쳐 박제가, 박규수 등에게 계승되었으나 과학 사상은 계승되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지리

방(坊)
서울 오부를 다시 나눈 하위 행정구역. 오늘날의 동(洞)에 해당한다. 방의 하위에는 또 오늘날의 통(統)에 해당하는 계(契)가 있었다. 한성의 방들은 건국 때 52방으로 시작해 세종 때 서부 3방을 폐하여 49방이 되었고 영조 때는 5부 46방 328계였다. 1865년(고종 2년)에 경모궁방이 신설되어 47방 339계가 되었다. 각 부에 딸린 방의 목록과 18세기 사대문안 지도는 (→오부) 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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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의 서울 및 그 주변

성저십리(城底十里)
사대문 바깥 10리 지역으로, 사대문안 뿐 아니라 이곳도 조선의 수도인 한성으로 취급되어 서울시장격인 한성부윤이 관리했다. 성저십리에 해당하는 지역은 오늘날의 종로구, 중구, 성북구, 동대문구, 서대문구, 용산구, 성동구, 마포구, 은평구, 강북구, 여의도가 대체로 해당하나, 시대에 따라 그 경계는 가변적이다. 다만 여의도를 제외하면 오늘날의 강남 지역이 성저십리에 포함된 적은 없다. 다만 사대문안과 비교해 성저십리의 인구는 매우 적은 편이었으며, 한성부의 하위 행정구역인 5부 52방 중 성저십리에는 6방만 존재했다.

양계(兩界)
한반도의 군사적 우범지대인 동계와 서계를 아울러 이른 말.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된 용어로, 동계는 강원 북부와 함경도, 서계는 평안도를 말한다.

여우고개[狐峴]
경기도 부천과 시흥을 잇는 고개. 나무가 많고 후미져서 여우가 자주 출몰한다는 전설이 있다.

오부(五部)
한성부의 하위 행정구역. 부는 오늘날의 구(區)정도에 해당한다.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가 있었다.
  • 동부 12방
    • 연희방(燕喜坊)·숭교방(崇敎坊)·천달방(泉達坊)·창선방(彰善坊)·건덕방(建德坊)·덕성방(德成坊)·서운방(瑞雲坊)·연화방(蓮花坊)·숭신방(崇信坊)·인창방(仁昌坊)·관덕방(觀德坊)·흥성방(興盛坊)
  • 남부 11방
    • 광통방(廣通坊)·호현방(好賢坊)·명례방(明禮坊)·대평방(大平坊)·훈도방(勳陶坊)·성명방(誠明坊)·낙선방(樂善坊)·정심방(貞心坊)·명철방(明哲坊)·성신방(誠身坊)·예성방(禮成坊)
  • 서부 11방
    • 영견방(永堅坊)·인달방(仁達坊)·적선방(積善坊)·여경방(餘慶坊)·인지방(仁智坊)·황화방(皇華坊)·취현방(聚賢坊)·양생방(養生坊)·반석방(盤石坊)·신화방(神化坊)·반송방(盤松坊)
  • 북부 10방
    • 광화방(廣化坊)·양덕방(陽德坊)·가회방(嘉會坊)·안국방(安國坊)·관광방(觀光坊)·진정방(鎭定坊)·순화방(順化坊)·명통방(明通坊)·준수방(俊秀坊)·의통방(義通坊)
  • 중부 8방
    • 정선방(貞善坊)·광행방(廣幸坊)·관인방(寬仁坊)·수진방(壽進坊)·증청방(澄淸坊)·장통방(長通坊)·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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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서울 지도 made by Pablin. 클릭하면 확대됨

조령(鳥嶺)
충청도 괴산과 경상도 문경을 잇는 고개. 한성에서 출발해 조령까지 걸어서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4일이 걸린다. 고개 높이는 1,017 미터.

추풍령(秋風嶺)
충청도 영동과 경상도 김천을 잇는 고개. 노령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점이자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다. 한성에서 출발해 추풍령까지 걸어서 오는 데는 약 4일이 걸린다. 고개 높이는 221 미터로 소백산맥 최저점이다.

풍습

가포교(假捕校)
가짜 포교. 즉 경찰관 사칭범이다.

가락지
반지 두 개를 이어붙인 두짝짜리 쇠고리. 보통 기혼녀가 착용한다.

각(刻)
시간의 단위. 1각은 15분이며 4각이 1시간이다.

개평
노름자리에서 남이 딴 돈을 얻어 가지는 것. 보통 탈탈 털린 이에게 먹고 떨어지라고 조금 던져준다.

검험(檢驗)
살인 사건이 났을 때 형조의 검관이 현장에서 시체를 검시하고 검안서를 쓰던 일.

경(更)
일몰부터 일출까지 열 시간 가량을 다섯으로 나눈 시간 단위.
  • 일경(一更): 19시 ~ 21시
  • 이경(二更): 21시 ~ 23시 - 통금 시작
  • 삼경(三更): 23시 ~ 01시
  • 사경(四更): 01시 ~ 03시
  • 오경(五更): 03시 ~ 05시 - 통금 끝

관노비(官奴婢)
관가에 속해있던 노비. 남자는 관노, 여자는 관비라 했다.

교형(絞刑)
목 졸라 죽이는 사형 방식. 조선에서는 교형을 참형보다 격이 높은 것으로 쳐 주었다. 교형보다 격이 높은 사형으로는 사약이 있다.

근심까치
저녁에 우는 까치. 보통 까치와 달리 불길한 징조라 한다.

냥(兩)
단위. 1냥 = 10돈 = 16분의 1근. 무게 단위로 쓰일 때는 37.5 그램.

노사(老士)
선비들 사이에 연장자를 존경을 담아 이르는 말.

노형(老兄)
남자가 자기보다 여남은 살 많지만 지위는 비슷한 남자를 부르는 대명사.

다모토리
소주를 사발로 마시는 일. 위스키 스트레이트라 생각하면 되겠다.

단위. 1돈 = 0.1냥 = 10푼. 무게 단위로 쓰일 때는 3.75 그램.

등청
관청에 출근함.

딱따기
야경 돌던 순라군들이 서로 마주쳐 딱딱 소리를 내던 나무토막. 격탁(擊柝), 경탁(警柝), 야탁(夜柝)이라고도 한다.

빙모(聘母)
남의 장모를 이르는 말

빙장(聘丈)
남의 장인을 이르는 말

선달(先達)
과거에 급제했지만 아직 벼슬을 하지 않은 사람. 선달은 문무과에 모두 존재했으나, 문과는 대개 말직이라도 관직에 모두 진출할 수 있지만 무과는 자리가 나지 않아 평생 선달로 늙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에 무과 합격자만 선달인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다. 높여 부를때는 "선다님"이라 부른다.

수청(守廳)
기생이 몸으로 접대를 하던 일. "수청을 든다"는 식으로 표현한다.

순라군(巡邏軍)
이경(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 사이)에 통금이 내려진 뒤 오경(새벽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까지 도성 안팎을 순찰하던 군졸. 궁성 안은 오위장과 오위부장이 순라군 다섯 명씩을 데리고 순찰하고, 궁성 밖은 훈국, 금위영, 어영에서 군사를 내어 순찰을 돌게 했다.

십이시(十二時)
하루를 열둘로 나누는 시각 명명법. 상세는 다음과 같다.
  • 자시(子時): 23시 ~ 01시
  • 축시(丑時): 01시 ~ 03시
  • 인시(寅時): 03시 ~ 05시
  • 묘시(卯時): 05시 ~ 07시
  • 진시(辰時): 07시 ~ 09시
  • 사시(巳時): 09시 ~ 11시
  • 오시(午時): 11시 ~ 13시
  • 미시(未時): 13시 ~ 15시
  • 신시(申時): 15시 ~ 17시
  • 유시(酉時): 17시 ~ 19시
  • 술시(戌時): 19시 ~ 21시
  • 해시(亥時): 21시 ~ 2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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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압슬

압슬(壓膝)
무릎을 꿇리고 무릎 위에 돌을 올려놓은 뒤 밟거나 돌을 두들기는 고문 방법. 무릎을 꿇리는 자리에 사금파리나 자갈을 깔아서 고통을 극대화시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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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의 애체

애체(愛逮)
안경을 가리킨 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실려 있는 표현이다.

오입(誤入)
기생, 흥녀, 색주가 등 노는계집과 성관계를 가지는 일. 오입을 즐기는 자를 오입쟁이라 한다.

오작(仵作)
관아에 속하여 수령이나 검관이 시체를 입검·검험할 때 보조하던 하인.

왈짜
깡패. 집합적으로 왈짜패라 한다.

이십사시(二十四時)
하루를 스물넷으로 나누는 시각 명명법. 상세는 다음과 같다.
  • 자시(子時): 23:30 ~ 00:30
  • 계시(癸時): 00:30 ~ 01:30
  • 축시(丑時): 01:30 ~ 02:30
  • 간시(艮時): 02:30 ~ 03:30
  • 인시(寅時): 03:30 ~ 04:30
  • 갑시(甲時): 04:30 ~ 05:30
  • 묘시(卯時): 05:30 ~ 06:30
  • 을시(乙時): 06:30 ~ 07:30
  • 진시(辰時): 07:30 ~ 08:30
  • 손시(巽時): 08:30 ~ 09:30
  • 사시(巳時): 09:30 ~ 10:30
  • 병시(丙時): 10:30 ~ 11:30
  • 오시(午時): 11:30 ~ 12:30
  • 정시(丁時): 12:30 ~ 13:30
  • 미시(未時): 13:30 ~ 14:30
  • 곤시(坤時): 14:30 ~ 15:30
  • 신시(申時): 15:30 ~ 16:30
  • 경시(庚時): 16:30 ~ 17:30
  • 유시(酉時): 17:30 ~ 18:30
  • 신시(辛時): 18:30 ~ 19:30
  • 술시(戌時): 19:30 ~ 20:30
  • 건시(乾時): 20:30 ~ 21:30
  • 해시(亥時): 21:30 ~ 22:30
  • 임시(壬時): 22:30 ~ 23:30

자모전(子母錢)
모전이란 원래 돈이고 자전이란 모전이 새끼 친 것이니 곧 원금과 이자를 말한다. 자모전을 만진다 하면 돈놀이, 즉 사채업을 한다는 뜻이다.

전기수(傳奇叟)
문맹이 많았던 조선시대에 시장판 같은 곳에 자리를 깔고 이야기책을 읽어주는 것으로 벌이를 하던 사람. "수(叟)"는 "늙은이 수" 자로, 풀면 "책 읽어주는 할아버지" 정도의 뜻이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이 주인공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주인공이 좌절하는 장면에서 전기수를 낫으로 찍어 죽이는 황당한 일도 많았다(사례). 중국에서도 삼국지연의를 공연하다가 조조를 맡은 배우가 돌에 맞아 죽었던 적이 있다.

전표(傳票)
금전 출납이나 거래 내용을 적은 쪽지. 일종의 영수증으로 기능한다.

조사(曹司)
하급관리를 이르는 말.
e.g.) ““전 조사의 이런 호기있는 줄 알지 못하였나니, 그대는 재주대로 하라.” (전우치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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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에서 주리를 트는 모습

주리
두 다리를 묶고 정강이 사이에 두 개의 나무막대를 끼워 비트는 고문. 사극에서는 패시브 고문처럼 취급되지만 실제로는 골반이 뒤틀리는 끔찍한 후유증이 뒤따랐다.

집주름
부동산 중개인. 그 가게를 집주름방(복덕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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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을 참하라

참형(斬刑)
목과 몸을 분리시켜 죽이는 사형 방식. 조선식 참형은 우선 사형수의 두 귀에 화살을 찔러넣고, 얼굴에 하얗게 회칠을 한 뒤 나무널 위에 목을 올려놓고 엎드리게 한다. 그리고 망나니가 언월도를 내려쳐 목을 잘랐다. 그림으로 보면 오른쪽과 같다. 참형은 교형이나 사약보다 격이 떨어지고, 거열이나 능지보다는 격이 높은 사형 방식이다.

책쾌(冊儈)
조선시대의 도서 외판원들. 책을 반값에 사들여 필요한 이에게 제값에 파는 등의 행위로 이문을 올렸으며 전국적으로 활동했다. 구한말에 장지연이 쓴 《일사유사》에 따르면 영조 연간 조생(曺生)이라는 책쾌가 금서나 희귀본을 구하는 데 매우 능했다고 한다. 1771년(영조 47년) 조선 왕을 모독한 중국 책 《명기집략》이 수입되자 책들을 수거하여 분서하고 책을 유통시킨 자를 처형하니 죽은 자가 백여 명에 달했는데, 조생은 그런 와중에도 붉은 수염을 휘날리며 신출귀몰하니 세도정치 시기 문인 조수삼은 《추재집》에서 그를 조신선이라 불렀다 한다.

추렴
더치페이. 각출(醵出), 염출(捻出)이라도고 한다. 용법은 "추렴하다."

퇴청(退廳)
관청에서 퇴근함.

단위. 1푼 = 0.1돈 = 0.01냥. 무게 단위로 쓰일 때는 0.375 그램이며 돈의 단위로 쓰일 때는 옆전 한 닢이 한 푼이다.

한량(閑良)
양인 이상의 특수신분층. 시대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달라졌다. 고려 말에는 관직 없이 한가로이 사는 사람을 한량이라 하였고(《용비어천가》) 조선 초기에는 관직을 가지다가 낙향해 별 직업 없이 사는 이를 가리켰으며, 조선 중기에는 벼슬도 하지 못하고 서원이나 향교 같은 학교에도 들지 못한 니트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는 무예를 익히며 무과 준비를 하는 고시생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는데, 시대에 따라 그 뜻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직업 없이도 먹고사는 유한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형장(兄丈)
나이차이가 크지 않은 친구 사이에서 연소자가 연장자를 높여 이르는 대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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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부도옥균"

효시(梟示)
사형당한 이의 목을 베어 그 수급을 저잣거리나 성문 등에 매달아 구경거리로 삼아 대중을 경계시키던 일. 효수(梟首)라고도 한다. 장대 끝에 목을 매다는 것(이렇게)은 서양식 효시이고, 동양에서는 오른쪽 사진처럼 효시를 했다.

행정

공조(工曹)
육조 가운데 토목공사, 도량형, 산림과 소택 관리, 교통 정비 등을 맡은 관서. 현대의 국토교통부에 해당한다. 공조에는 상의원, 선공감, 수성금화사, 전연사, 장원서, 조지서, 와서 등의 속아문이 딸려 있었으며, 대개 정승이나 판서·참판이 각 속아문의 도제조 및 제조를 겸했다. 속아문을 제외한 공조 본조의 직제는 다음과 같다.
  • 정2품 공조판서(工曹判書) 1인
  • 종2품 공조참판(工曹參判) 1인
  • 정3품 공조참의(工曹參議) 1인
  • 정5품 공조정랑(工曹正郞) 3인
  • 정6품 공조좌랑(工曹佐郞) 3인

군기시(軍器寺)
병기, 기치, 융장, 집물 따위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아. 병조의 속아문이다. 고려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는 군기감(軍器監)이라 하다가 1466년(세조 12년)에 군기시로 개명하였다. 1884년(고종 21년)에 폐지되고 그 업무가 기기국으로 이관되었다. 현대의 국방과학연구소에 해당한다. 오늘날의 서울시청 자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서울시청 지하 1층에 가보면 군기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군기시의 직제는 다음과 같다.
  • 감독직
  • 도제조(都提調) - 병조판서 또는 병조참판이 겸임
  • 제조(提調) - 종1품 ~ 종2품 무관이 겸임
    • 실무직
    • 군기시 정(正) - 정3품 당하관
    • 군기시 부정(副正) - 종3품
    • 군기시 첨정(僉正) - 종4품
    • 군기시 판관(判官) - 종5품
    • 군기시 주부(主簿) - 종6품
    • 군기시 직장(直長) - 종7품
    • 군기시 봉사(奉事) - 종8품
    • 군기시 참봉(參奉) - 종9품
      • 기술직: 품계 없음
      • 칠장(漆匠) 12인, 마조장(磨造匠) 12인, 궁현장(弓弦匠) 6인, 유칠장(油漆匠) 2인, 주장(鑄匠) 20인, 생피장(生皮匠) 4인, 갑장(甲匠) 35인, 궁인(弓人) 90인, 시인(矢人) 150인, 쟁장(錚匠) 11인, 목장(木匠) 4인, 야장(冶匠) 130인, 연장(鍊匠) 160인, 아교장(阿膠匠) 2인, 고장(鼓匠) 4인, 연사장(鍊絲匠) 2인

금제대전(禁制大典)
가상의 조직 보전원(保傳院)에서 관리하는 가상의 서적. 보전원의 각종 이물들에 대한 금제의 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새 이물이 들어오게 되면 내용이 추가되어 정리된다. 이 서적이 분실되면 금제가 깨어졌을 때 그 이물을 다시 금제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워지게 되므로, 대량으로 필사되어 각각 분산 보관되어 있다.

금화도감(禁火都監)
조선 전기의 방화관서. 한성부의 속아문으로 현대의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에 해당한다. 1462년(세종 8년) 한양 대화재를 계기로 설치되었으며, 직제는 관원은 제조 7인, 사(使) 5인, 부사(副使)와 판관(判官) 각각 6인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설치한 뒤에 별로 할 일이 없자 6월에 성문도감과 합하여 수성금화도감이라 하고 소방 외에도 도로정비, 성곽과 교량보수 등의 업무도 맡았다. 1460년(세조 6년) 중앙관서 통폐합의 일환으로 수성금화도감은 폐지되었다가, 이후 1481년(성종 12년) 수성금화사로 격상되어 부활했다. → 수성금화사

기담찰요(奇談察要)
가상의 조직 보전원(保傳院)에서 관리하는 가상의 서적. 보전원 소속 감찰부(監察府)의 수하들이 현장에서 직접 민간을 조사하고 탐색하며 소문을 살피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최우선의 수칙 및 방법론이 기록되어 있다. 감찰부에 새로 들어온 인원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책의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감찰부 소속 인원들은 기담찰요를 매우 중하게 여겨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여러 대목들을 필사하여 휴대하고 다니기도 한다.

기로소(耆老所)
70살이 넘어 정년퇴임한 정2품 이상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한 기관. 국립 경로당이다. 기로소에 들어간 이들을 기로당상(耆老堂上)이라 했다. 국왕도 늙으면 기로소에 들어가기도 했으며, 숙종은 60세,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기로소에 들었다. 정식 관서로 독립한 것은 1765년(영조 41년)이며, 왕도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으므로 관서 중 서열 1위로 정해졌다. 수직관(守直官) 2인, 서리(書吏) 2인, 고직(庫直) 1인, 사령(使令) 4인, 군사(軍士) 1인이 경로당 일을 돌보았으며, 수직관은 승문원과 성균관의 7품 이하 참외관들 중에서 뽑아가 겸임했다. 육조거리의 끄트머리인 중부 징청방에 청사가 소재했으며 이는 오늘날 청계광장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해당한다.

무록관(無祿官)
녹봉이 없던 벼슬. 의금부 당하관, 제거, 제검, 별감, 별제, 별검, 판관, 찰방, 교수, 훈도, 검률, 역승, 도승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벼슬을 맡은 자의 양반 신분은 유지해주되 국고 지출은 아끼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다.

보전원(保傳院)
재단의 격리 및 연구기관에 해당할 조선의 조직. 물론 실제 역사에는 그런 거 없다. 보전원 직제는 다음과 같다.
  • 보전원(保傳院) - 제학(提學), 부제학(副提學)
    • 금제소(禁制所) - 승(丞), 부승(副丞)
      • 주둔청(駐屯廳)
      • 기기감(機器監) - 정(正), 부정(副正)
    • 감찰부(監察府) - 주부(注簿), 참봉(參奉)
비변사(備邊司)
비국(備局)이라고도 부르는 조선 후기 국정을 총괄하던 관청. 비변사의 당상관(비국당상)들이 모여 있는 일종의 합의체로, 본래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비상 시국에 대비하기 위한 관청으로 설립되어, 변방의 군사 문제만을 담당하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며 그 권한과 위세가 급격히 강화되었다. 이는 인조 대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하며 민정, 외교, 재정, 심지어는 간택까지 담당하며 사실상 의정부를 완전히 무력화시켜 버릴 정도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1865년 폐지된다.

삼부리[捕頭포두]
포도청 부장(포교)들의 우두머리. 형사반장쯤 된다 볼 수 있다.

속아문(屬衙門)
어떤 관서에 딸린 하급 관서를 가리키는 말. 예컨대 군기시는 병조의 속아문이다.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
1460년(세조 6년) 폐지되었던 수성금화도감이 1481년(성종 12년) 부활 및 격상된 관청. 금화도감은 오늘날인 서울시청인 한성부에 속했지만, 수성금화사는 국토교통부격인 공조의 속아문으로 설치된 바 현대의 소방방재청에 해당한다. 수성금화사는 보신각 종루 동쪽에 자리잡고 멸화군(滅火軍)이라 하는 소방대원 50명이 24시간 상근했다. 멸화군은 군인 신분이었으며, 급수비(汲水婢)라는 관비들이 멸화군에게 물을 떠 주는 일을 맡았다. 도끼, 갈고리 등의 소방용구가 비치되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유물이 남아있는 것은 없다. 수성금화사의 직제는 다음과 같다.
  • 도제조(都提調) 1인, 제조(提調) 2인 - 명목상 책임자.
  • 정4품 수성금화사제검(修城禁火司提檢) 4인 - 무록관. 상근자 1인이고 나머지는 겸직.
  • 정5품 수성금화사별좌(修城禁火司別坐) 6인 - 상근자 2인이고 나머지는 겸직.
  • 정6품 수성금화사별제(修城禁火司別提) 3인 - 상근자 2인이고 나머지는 겸직.
  • 멸화군(滅火軍) 50인 - 일선 소방관.
  • 관비 급수비(汲水婢) 다수 - 소방 보조.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상근자와 겸직자가 모두 모여 합의제 운영하였으나, 평상시에는 상근 관료는 5인 뿐이었다.

이금위(異禁衛)
재단의 기동특무부대 내지 전술대응반에 해당할 조선의 조직. 물론 실제 역사에는 그런 거 없다. 1668년(현종 9년 무신년) 기준 이금위의 직제는 다음과 같다.
  • 이금위영(異禁衛営) - 대장(大將) 1인, 중군(中軍) 1인 휘하 1734명 :: 총 1736명
    • 이금별장(異禁別將) 1인 휘하 620명
        • 차마초(車馬哨) - 차마종사관(車馬從事官) 2인 휘하 80명
        • 졸초(卒哨) - 졸초관(卒哨官) 8인 휘하 530명
    • 이금천총(異禁千摠) 1인 휘하 1112명
      • 괴이사(怪異司) - 괴이파총(怪異把摠) 1인, 괴이종사관(怪異從事官) 2인 휘하 200명
      • 용력사(勇力司) - 용력파총(勇力把摠) 1인, 용력종사관(勇力從事官) 2인 휘하 350명
      • 귀신사(鬼神司) - 귀신파총(鬼神把摠) 1인, 귀신종사관(鬼神從事官) 2인 휘하 200명
      • 패란사(悖亂司) - 패란파총(悖亂把摠) 1인, 패란종사관(悖亂從事官) 2인 휘하 350명
        • 장초(將哨) - 초관(哨官) 1인 휘하 51명
        • 상초(象哨) - 초관(哨官) 1인 휘하 163명
        • 사초(士哨) - 초관(哨官) 1인 휘하 51명
        • 포초(包哨) - 초관(哨官) 1인 휘하 81명
          • 전포기(前包旗) - 전포기총(前包旗摠) 1인, 전포대총(前包隊摠) 2인 휘하 18명
          • 후포기(後包旗) - 후포기총(後包旗摠) 1인, 후포대총(後包隊摠) 2인 휘하 16명
          • 좌포기(左包旗) - 좌포기총(左包旗摠) 1인, 좌포대총(左包隊摠) 2인 휘하 15명
          • 우포기(右包旗) - 우포기총(右包旗摠) 1인, 우포대총(右包隊摠) 2인 휘하 20명

장례원(掌隷院)
노비문서 관리를 담당한 관아. 형조의 속아문이다. 임진왜란 때 왕과 조정이 몽진하자 분노한 노비와 민중들이 이곳을 습격해 불태우기도 했다. 장례원의 직제는 다음과 같다.
  • 정3품 장례원판결사(判決事) 1인
    • 정5품 장례원사의(司議) 3인
    • 정6품 장례원사평(司評) 4인

직수아문(直囚衙門)
다른 기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죄인을 구금할 수 있던 기관. 병조, 형조, 한성부, 사헌부, 승정원, 장례원, 종부시, 비변사, 포도청이 이에 해당하며, 지방에 파견된 관찰사와 고을 수령들도 직수아문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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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졸의 모습

포도청(捕盜廳)
한성과 경기도의 방범 치안을 맡던 관서. 현대의 경시청 또는 서울경찰청에 해당한다. 좌포도청과 우포도청을 함께 이르는 것으로, 서울의 동부·중부·남부와 경기좌도는 좌포청이, 서울의 북부·서부와 경기우도은 우포도청이 맡았는데 좌포청과 우포청은 서로 관할과 직제가 분리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각 지역에 도둑이 발생했을 때마다 포도주장(捕盜主將)을 임명해 파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다가, 1481년(성종12년) 좌변과 우변을 나누어 상설화하였다. "포도청"이라는 말은 1540년(중종 35년)을 전후하여 사용되기 시작했다. 포도청의 직제는 군대의 그것을 따랐으며, 순경급인 포졸들은 곧 포도군사라 하였다. 좌포도청은 정선방(오늘날 서울 종로3가역 9번출구 근처)에 있었고 우포도청은 서린방(오늘날 서울 광화문역 5번출구 근처)에 있었다. 1894년(고종 31년) 좌포청과 우포청이 통폐합되어 경무청(警務廳)이 되었고 내무아문에 부속시켰다. 《속대전》에 따른 좌포도청의 직제는 다음과 같으며, 우포도청의 직제 또한 "좌"를 "우"로만 바꾸면 동일했다.
  • 종2품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 1인 - 경찰서장 총경급.
  • 종6품 좌포도종사관(左捕盜從事官) 3인 - 서장 보좌 및 죄인 심문을 맡은 행정직. 경찰간부 경정급.
  • 포도군관(捕盜軍官) 42인 - 현장 수사나 순라를 맡았다. 경사 ~ 경감급.
    • 종6품 좌포도부장(左捕盜部將) 4인 - 형사반장급. 포두(捕頭), 삼부리라고도 한다.
      • 기찰군관(譏察軍官) - 탐정 수사를 맡은 포도군관. 기찰포교, 기교(譏校)라고도 한다.
    • 무료부장(無料部將) 26인 - 품계가 없다. 일반 형사급. 무료군관, 포교(捕校)라고도 한다.
    • 가설부장(加設部將) 12인 - 정원 외에 더 둔 부장. 가설군관이라고도 한다.
  • 서원(書員) 4인 - 중인들로, 사무기록을 담당한 서기들이다.
  • 포도군사(捕盜軍士) 다수 - 소위 포졸(捕卒).

한성부(漢城府)
현대의 서울시청. 한성부는 다른 지방 기관과 기능은 동일했으나 수도 담당이라는 점에서 육조와 같은 격의 관청으로 대우받았다. 사대문 안 한양과 사대문 밖 성저십리가 관할 영역이었다. 한성부의 직제는 다음과 같다.
  • 정2품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또는 한성부윤(漢城府尹) 한성판윤(漢城判尹) 1인
    • 종2품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각 1인
    • 종4품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 1인
    • 종5품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2인
    • 정7품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3인 - 그 중 1인은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1인이 파견 와서 겸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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