危世之說 怪異篇 第一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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危世之說

怪異篇

이물(異物)들은 한편으로는 패역(悖逆) 도당(徒黨)의 불순한 언행을 조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지한 백성들을 동요하게 하여 관원이 민심을 수습하기 어렵게 하나, 아아, 어찌하여 다른 방향으로도 쓰일 수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였는가! 내 첫 견문(見聞)이 괴이(怪異) 병술(丙戌) 제(第) 일호(一號)였다는 것은, 내게 있어 다시 없을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위세지설(危世之說) 괴이편(怪異篇) 제일장(第一章) 3:8

"반갑네. 내 본디 그리 격(格)과 식(式)을 차리지 않으니, 편하게 대하게. 위에서 그대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네."

편히 대하라면서 초면(初面)부터 듣는 이의 마음을 짓누르는 이 자(者)는, 비광(朏光)의 이십일 년 짧은 생에서 만난 수많은 범부(凡夫)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적어도 한 가지 안심이 되는 것은, 그가 그 자신의 말한 바대로 격식에 초연(超然)해 보이는 인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무영(無影) 선생이라 하셨사옵니까. 부디 많은 가르침을 바라옵니다."

"어디 가르침이라 할 게 있겠는가. 제 목숨 부지하기만 하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

그러더니 무영 선생은 저 혼자 우스웠는지 껄껄 하며 넘어간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비광의 낯에 당혹감이 어린 가운데, 무영 선생은 마치 반가상(半跏像)처럼 오른다리를 척 올리더니 얼마 없는 수염을 어루만진다.

참으로 특이한 인물됨이다.

우선 그의 낯빛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창백하다. 머리의 형상(形像)은 위아래로 길쭉한 것이, 실례인 줄은 알지만 마치 서생원(鼠生員)과도 닮았다. 몸집은 호리호리한 것이 제법 날쌔 보이지만 오히려 역사(力士)가 훌쩍 크게 들었다 놓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도 같다. 항상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영 선생은 상대방과 바로 마주하고도 꼭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바라보는 습관이 있는 듯하다. 그의 가늘게 열린 작은 눈으로는 그 의중(意中)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다. 이러하니 배분(輩分)은 고사하고 춘추(春秋)조차 짐작할 수가 없다. 적게는 비광의 배행(輩行)일 법도 하나, 많게는 지천명(知天命)도 하였을 법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기한 것은, 볕이 아무리 밝게 내리쬐어도 그에게는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처음에는 "무영 선생" 이라는 말을 듣고는 무슨 호(號)인가 자(字)인가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와 마주하고 보니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들어맞는 작명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무영 선생이 몸을 기울여 비광을 바라보고 묻는다.

"놀라지 않았나? 대개 처음 들어온 치들이 많이 겁도 먹고 그러던데."

"저번에 서세(逝世)하셨던 참… 아니, 오호(五號) 어르신께 이미 충분히 놀랐습니다."

"그런가? 아쉽게 되었군."

무영 선생이 과연 자기만의 농(弄)이 실패했음을 아쉬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호 어르신의 서세를 아쉬워하는 것인지, 비광은 밝혀낼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농이라면, 세상에 그만큼 실없고 이해하기도 힘든 희롱(戱弄)도 또 없을 것이라고, 비광은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일이 생겼네."

"일이라면…"

"저기 나주목(羅州牧)까진 가야 할 걸세. 첫 임무치고는 꽤 먼 길이 되었군."

"나주목이라면… 달이 한 번 차고 기울도록 가는 거리가 아니겠습니까?"

"흐흠, 그것도 어지간히 발이 느린 자들이나 그러한 법이지. 그리고 걸어서 가진 않을 걸세."

무영 선생은 다시 한 번 수염을 어루만진다. 어쩌면 자꾸 저렇게 수염을 어루만지니, 가뜩이나 없는 터럭이 점점 더 줄어드는지도 모를 모양이다. 무영 선생도 아까부터 비광이 자신의 수염 어루만지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문득 정신을 차린 모양으로 행동을 뚝 끊는다.

"음, 이번 건은 올해 첫 괴이한 이물이 될 걸세. 여름이 다 되도록 괴이 쪽은 쥐새끼 하나도 나타나지 않다가, 별나게도 되었네."

그러다가 또 자기 혼자 파안대소(破顔大笑)한다. 자기 딴에는 꽤나 즐거운 모양이다. 비광이 도통 함께 웃어주질 않으니, 무영 선생도 겸연스러운지 이내 표정을 바로 한다.

"뭐 어쨌거나, 위험한 놈은 전혀 아니라고 하니, 자네가 한 번 혼자서 가 보는 게 어떤가."

"저… 혼자 말씀이십니까?"

"이번에 막 들어온 젊은 관원 혼자서도 서장(書狀)을 써 올릴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는 말이지. 잠시 바람 좀 쐰다고 생각하고 다녀오게. 어찌 보면 처음부터 이렇게 쉬운 게 걸리는 건 천행(天倖)이라고도 할 수 있네."

"무,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비광 본인도 사실 나쁘지만은 않다. 쉬운 일이라니, 이곳의 일에 익숙해지고 요령을 쌓기 위해서 쉬운 일 하나쯤은 맛보기 식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에게는 상당히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아, 역시 남쪽 바다가 좋기는 좋구나."

지방 관원들에게 알리지 않고, 철저하게 비밀리에 움직여야 하는 신분이기에, 비광은 그저 평범한 시골 서생의 모습처럼 보인다. 여분의 주전부리와 이런저런 것들을 담은 괴나리봇짐도 그렇지만, 혹시나 모를 도적이나 이물의 요란에 대비하여 단궁(短弓)을 풀어서 함께 묶어 놓았다.

이제 비광이 할 일은 현지에 내려가 민심을 탐문하고, 그것이 처음 발견된 장소를 수색하는 일이다. 굳이 이물과 대면할 필요까지는 없으나, 대면할 때에는 마땅히 신중에 신중을 다하고, 드러내 놓고 추적하기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필요한 정보는 이것이네. 그 이물로 인해 민심이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공작(工作)을 꾀하여 수습해야 할 것인지, 이를 판단해야 하네. 바로 자네가 할 일이지. 혹여나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면, 즉각 서장을 써서 올리고, 자네는 엉뚱한 행동 할 생각일랑 말고 곧바로 돌아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모쪼록 신중히 처신하도록 하겠습니다.'

무영 선생이 건네준 쪽지 중에는, 이번 요물에게 새로이 붙은 이름도 있다.

괴이(怪異) 병술(丙戌) 제(第) 일호(一號)

알려준 장소로 가니, 인기척은 드물고 그저 바다 파도 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저 멀리로는 다도해(多島海)의 기암과 절벽과 섬들이 어우러져 절경(絶景)을 이루고, 등 뒤로는 나주 땅의 너른 평야가 눈부신 볕 아래 싱그러움을 더한다. 들판 곳곳이 작은 초가(草家)들이 소녀처럼 수줍은 양, 동백나무들 사이에 살며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바로 저 산만 넘으면 가리포진(加里浦鎭)이라… 내가 밝히 드러내어 왔으면 저곳으로 편히 오는 것일 터인데… 흐흠, 그래봤자 결국 수운판관(水運判官)과 만나게 될 것이니 안 될 일이지만."

민초(民草)들의 시선뿐 아니라 관원(官員)들 역시 피해다녀야 하는 것이 그의 암행(暗行)인 것이다. 비광의 존재 그 자체마저도, 관원들조차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다시 무영 선생의 쪽지를 펴 본다.

떠도는 부평초(浮萍草)처럼,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산 듯 죽은 듯.

그러던 그의 시선에 문득 이상한 것이 들어온다. 바닷가 근처 너른바위 쪽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듯하다. 무슨 제단(祭壇)이라도 차려놓은 것인가.

"인적 드문 바닷가에 이 어인 일인가?"

가까이 가니 상황이 눈에 밝히 보인다. 바위 틈 사이에는 길이가 족히 팔척(八尺) 오촌(五寸)에서부터 십이척(十二尺) 어림까지 되어 보이는 솟대들이 세워졌고, 이를 주위로 하여 청(靑), 적(赤), 황(黃), 백(白), 흑(黑)의 오방색(五方色)을 따르는 깃발들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그 깃발들 사이로 서기도 하고 더러는 그 깃발들을 직접 들기도 한다.

더 가까이 가니, 무지한 민초들의 얼기설기 엮은 상투들 사이로 향불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상투 머릿내가 향내에 섞여서 확 끼쳐 온다. 바다 짠내다.

가장 앞에는 웬 박수무당 같은 자가 나서서 바위 위에 올라가, 춤도 추고 두 손을 모아 바다에 예를 올리기도 하고 한 차례 혀를 놀리기도 한다.

"어허! 그러하니 어찌 사해(四海) 용왕(龍王)께서 우리 작은 촌(村)을 가엾게 여기사 거북 아드님을 보내어 주시지 않을 수 있으셨겠는가! 훠어이…! 저번 풍랑 제 다음 날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 만선지복(滿船之福)에 대길(大吉)할 징조일세…!"

가만히 듣고 있던 비광은 대략의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으나, 짐짓 모른 체하고 자기 앞에 서 있던 사람의 등을 두드려 묻는다.

"거 지나가던 선비인데 말 좀 묻겠네. 자네들은 여기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겐가?"

"예, 저 거시기, 저희는 거저 무지랭이들이라 잘은 모르지만, 여기서 아주 그냥 신통(神通)한 거북이가 잡혔다고 허는디요, 즈기 거 뭐시냐, 이게 바다 용왕님의 아드님이라고 허서 지금 제(祭)를 올린다고 혀요."

"바다 용왕님의 아드님? 용왕님의 아드님이 어찌 한낱 거북이가 된단 말인가? 그렇지 않은가?"

"뭐 선비님 말씀도 글겄지만 거, 그 지난 여름에도 이무기가 승천한 후에 며칠은 아주 그냥 만선을 했당게요. 그러던 차에 이런 신통한 거북이가 잡히니 제를 올려야 한다고 아주 난리구먼요. 아주 암치깨나 대접허면 안 될 일이라 하더만요."

"그렇다 하더라도 각자 생업을 팽개치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을 필요까지야 있나. 관아에 알리고 본업으로 돌아가면 될 것 아닌가."

그러자 그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워메, 선비님도 참 그시기하게 말씀허시요잉. 우리야 뭐 하루쯤 바다 안 나가는 건 암시렁도 않어요. 거 뭍에서는 그저 나랏님 은덕이지만 저기 물에서는 그저 용왕님 은덕이지라."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이야. 비광은 이 모든 일이 그 이물 거북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다행히 금일(今日)이었기에 망정이지, 이 자의 말대로라면, 작일(昨日)이나 명일(明日)이었더라면 이 제를 보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지금 그 거북이는 어디에 있나?"

"벌써 이방(吏房)이 와서 모셔간 지 오래이니, 아마 관아에서는 알고 있을 것 같소. 선비님도 배운 게 많으셔서 긍가, 어째 먹물 잡수신 분들은 하나같이 그게 용왕님 아드님이 아니라 허요. 그 뭐시기, 나랏님께 진상(進上)할 희귀한 보물이라 해쌓든디…"

아마 그 거북과 대면하게 될 장소는 관아가 될 모양이다. 아니, 관아에 들어가선 안 된다. 비광은 그 길로 그 자리를 떠나, 어디론가 발걸음을 돌린다.


"주모, 여기 칼칼한 국수 한 사발이랑 막걸리 한 병 주시오."

"야아."

벌써 서쪽 하늘에 해가 뉘엿뉘엿 저문다. 파발(擺撥)이라 적힌 깃발과 함께, 남자는 말을 버드나무 밑동에 묶어두고 주막으로 들어간다. 숨을 돌릴 참인지, 그는 먼저 바가지를 떠서 통에 담긴 약수를 들이키고는 평상 위에 걸터앉는다.

곧이어 뚱뚱한 주모가 코를 훌쩍이며 국수와 막걸리를 낸다. 두툼한 손으로 술잔까지 내려놓는데, 그 뒤로 낡은 갓을 푹 눌러쓴 허름한 서생이 따라온다.

"거 적적하구려. 같이 대작(對酌)이나 어떠시오?"

남자는 서생을 멀뚱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시구려."

"주모, 국수 한 사발이랑 술잔 하나만 더 갖다 주시오."

"야아."

서생, 비광은 남자의 곁에 놓인 보따리를 본다. 비단으로 조심스럽게 묶인 것으로 보아, 필경(畢竟)에는 한양으로 올라갈 보물이리라. 바로 저것이다. 저것이 그가 쫓는 이물이다.

"촌야(村野)의 비루한 과객(過客)이올시다. 들어서면서 보니 말 한 필이 있던데…"

"내가 타고 온 말이오. 깃발을 보셨다면 알겠지만, 나라의 중대한 일을 하는 중이라, 실로 촌각(寸刻)을 다투고 있소이다."

"그 비단 보따리를 전하고자 하는 것이오?"

"뭐… 그렇긴 한데 함부로 보여줄 수는 없고."

경계하는 눈초리다. 비광은 씨익 웃는다.

"너무 경계하실 필요는 없소이다. 형장(兄丈)께서도 잠시 후면 소생과 함께 호형호제(呼兄呼弟)하게 될 터인데, 그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되지 않겠소이까? 안 그렇겠소?"

"…거 무슨 말이오?"

"…소생이 비록 미천하나 술이 있는 자리에는 가히 약방(藥房)의 감초(甘草)라 불리는데, 우리 한 번 같이 즐거이 대작이나 해 보자는 말이올시다."

비광이 술을 따르자, 남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술을 받는다.


"꺼으윽! 내가 미쳤지, 미쳤어. 내 하나밖에 없는 누이를, 그것도 이제 막 초조(初潮)를 시작한 어린것을, 어이하여 이 거북 하나를 위해 혼례(婚禮) 가약(佳約)을 저 근본도 모르는 자와 약조(約條)하였단 말인가. 아이고 말순아, 내가 죽일 놈이다, 죽일 놈이야."

얼굴이 시뻘개진 비광이 방으로 들어선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한 손에는 비단 보따리를 들고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아랫목에 주저앉는다.

"그래… 이 놈이란 말이렷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비단 보따리를 풀어제친다. 어쩐지 유난히 묵직하다 했더니, 그 속에서 배가 불룩한 항아리가 드러난다. 덮여 있던 뚜껑을 조심히 열고 안을 살펴보는데, 과연 뭔가가 든 것이 보인다.

"여기 있었구나, 이 요망한 것아."

비광은 두 손을 힘겹게 집어넣고, 그것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꺼낸다. 항아리 밖 방바닥에 흰 무명을 깔고 그 위에 두고 나서 보니, 이 거북은 언뜻 보기엔 그냥 별다를 것이 없는 놈이다. 게다가 잔뜩 겁을 먹었는지 머리조차 내밀지 않고 있다.

"…거북이 놈, 어서 머리를 내밀거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을 것이니."

어릴 적에 아무 생각없이 들었던 풍월이 떠올라, 비광은 가만히 읊조려 본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묘한 말이나, 적어도 아는 사람은 다 알 법한, 과히 점잖치 못한 말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말에는 과연 효험이 있는 모양이다. 거북이 가만히 머리를 내미는 것이다.

"오오라, 그래도 네 녀석이 한낱 미물이나 사람 말을 알아들을 줄은 아는구나."

비광은 이 거북이 기특하고 대견하여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그런데 그 때.

"어어, 이것이 대체 무엇이냐?"

거북의 등껍질 위에 노란 빛이 감돌고 있다. 그 불빛은 이내 자세히 보니 한자(漢字)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ㅡ 여기는 어디지요? 선비께서는 누구시옵니까?

"이… 이게 대체 어인 일이란 말이냐.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던가?"

비광이 듣기로, 먼 옛날 요(堯) 임금과 순(舜) 임금이 다스릴 무렵에는, 거북의 등껍질에서 글자를 읽어 하늘의 뜻을 받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이 거북의 등껍질에는,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한자가 너무나도 선명하고, 또 밝은 빛까지 어룽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 이 글자들도 매우 시의 적절한 내용인데, 이 다음에 새로 나타난 글자는 더욱 충격적이라는 것이다.

ㅡ 저를 집으로 데려다 주세요. 아버님을 뵈어야 하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아… 아버님이라고? 네가 실로… 정녕 용왕님의 아들이란 말이냐?"

비광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을 받는다. 거북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새로운 글자를 띄운다.

ㅡ 뭇 어부들이 저를 그렇게 일컫고는 합니다마는…

거북은 다시 한 번 비광을 세심히 바라보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긴 글자들을 연달아 띄운다.

ㅡ 선비께옵서는 사기(邪氣)를 바로잡고 정기(正氣)로 하여금 통하게 하는 기운이 있으신 것이 보이니, 감히 말씀드리겠사옵니다…

거북의 말은 이러했다. 자신은 나주 땅 유력한 양반집의 열두 살 난 자제로, 부모 친지들과 같이 바닷가에 나왔다가 파도에 휩쓸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휩쓸리어 이내 이곳이 땅인지 바다인지, 밤인지 낮인지 혼몽(昏懜)한 와중에, 문득 정신을 차리어 보니 어부들이 자신을 그물에 낚아 올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있는 힘을 다해 뭐라고 목소리를 내어도, 그저 등껍질로 글자가 쓰일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더라는 것이다.

"허어…"

비광은 할 말을 잃을 따름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그는 이내 조심스럽게 다시 묻는다.

"허면, 관아의 관원들에게나 어부들에게는 네 곡절(曲折)을 전부 고하였느냐?"

ㅡ 아버님 댁으로 데려달라고는 하였으나, 소자(小子) 보기에 이는 암중모색(暗中摸索)과 같아, 사리(事理)를 분별하고 명계(冥界)에 인연이 닿은 분을 만날 때까지 세세한 곡절은 아뢰지 아니하기로 하였사옵니다.

"너는 지금 전하께 진상되러 가는 중이니라. 기회가 된다면 전하께 여쭈어 보도록 하거라. 나도 역시 내 힘이 닿는 대로 널 돕겠다. 우선 이 나주 땅에 백방으로 수소문을… 아니, 내가 함께 일하는 윗사람들께 이를 알려서, 사람들을 보내어 네 부모를 찾게 하마."

ㅡ 황송하옵니다. 그럼… 이제는 아버님과 어머님을 뵐 수 있는 것이옵니까?

"그럴 것이다. 아니, 그래야겠지… 그래야…"


다시 한양이다.

"오, 그래. 잘 다녀왔는가."

무영 선생이 반갑게 맞는다. 비광은 예를 표한 뒤, 그와 마주앉는다.

"허허, 거 참. 나는 격과 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래도."

"습관이 되어 이러합니다. 너그러이 봐 주시지요."

비광은 복잡한 심경으로 무영 선생을 바라보았다.

"…무릇 이물이란 흔히 요사한 것이라고들 하나… 저마다 나름의 사연이 있는 듯싶습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나?"

"제가 듣고 본 바는 서장에 되는 대로 적었사오나… 차마 서장에 적지 못한 것이 있사온데…"

"자네가 차마 적지 못했다면, 필경 둘 중 하나이겠군. 패란(悖亂)의 가능성이 있거나, 아니면… 스스로도 믿지 못할 엄청난 것을 경험했거나."

무영 선생의 목소리가 비광의 심장을 찌르는 듯하다. 그러나 정작 무영 선생의 목소리는 그냥 그럴 수도 있겠지 하는 투다. 비광은 침을 한 번 삼킨 후,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 이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미 한양에 당도하였습니까?"

"아, 그래. 괴이 병술 제 일호는 작일 새벽 미명(未明)에 도착하였네. 지방에서 진귀한 보물이라 하여 진상되었다 하는데, 지금쯤이면 자네가 보려 해도 볼 수 없게 되었을 거야."

순간, 비광은 다급히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요 며칠 사이 세자(世子) 저하(底荷)께옵서 병약하시어 시름시름 앓으시는데, 어의(御醫)가 기력이 허(虛)한 데에는 이만한 약이 없다 하며, 마침 그 무렵 들어온 그놈을 가져다가 거북탕을 끓였네."

"예… 예엣?"

비광의 낯빛이 창백해짐을 보고도, 무영 선생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태도다. 흡사 이런 일을 이미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과연 차도가 있었는지, 세자 저하께서는 오늘따라 혈색이 좋아지시고 많이 쾌차(快差)하시었네. 과연 영험한 거북탕이라고 전하께서 몹시 만족하고 계시네."

"…하, 하지만……"

"하지만, 무엇? 자네의 첫 번째 일이 결국 이런 결말로 끝나서 유감인가? 이건 유감이 아닐세.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더군다나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이으실 세자 저하를 소생시키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야말로 실로 조선에 유익이 되는 이물이 아니겠는가."

"……"

비광은 충격을 받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 무영 선생은 혼자 말을 잇는다.

"물론 그대의 어린 마음에는 아쉬울 수 있네. 처음 보는 광경일 테니,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겠지. 그러나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마땅히 내려놓아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이라."

"소생의 변변찮은 학구열(學究熱)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내게 말하려던 그 엄청난 이야기 때문인가? 그 이물이 실은 남모를 곡절이 있다거나 하는?"

무영 선생이 여전히 쉽사리 말하자 비광은 말문이 막힌다. 무영 선생이 숫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읽고 있는 것 같다.

"…아니라고는… 할 수 없사오나……"

"그럼 됐네. 어차피 어디서도 검증할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이미 끝난 일, 다시 들추려 하지 말게. 한바탕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해도 좋네."

그러면서, 무영 선생은 다시 그의 몇 가닥 남지 않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괴이(怪異) 병술(丙戌) 제(第) 일호(一號)

상(詳) 등껍질로 글자를 나타내어 대화(對話)할 수 있는 거북
당(當) 감찰관(監察官) 비사대부(批士大夫) 무영(無影)
결(結) 세자궁(世子宮) 약재로 활용
현(現) 비록(秘錄)에 기록 후 종결(終結)

선비가 말한다.

이 이물은 나주 땅 촌리(村里)의 어부들이 그물로 건져올린 것으로, 등껍질에서 노란 빛을 내면서 글자를 만들어 상대방과 대화할 수 있다. 지방 관아에서 보고하기로는 이 이물이 상대방을 몹시 가리는 것 같다고 하였으며, 민초들은 사해 용왕의 아들이라 믿고 제를 올렸다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이 이물은 사직의 존립(存立)을 위태하게 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하며, 결국 궁중에 진상된 후에는 세자 저하의 병세를 호전시키기 위하여 거북탕이 되었다. 실로 나라를 위하여 크게 쓰인 이물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혹 이 이물에 대하여 곡절과 연유(緣由)가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도 있으나, 이미 이 세상 천하(天下)에서 사라져 다시 없는 이상, 모든 왈가왈부(曰可曰否)는 부질없는 것이라. 이미 끝난 일이니,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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