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던 때를 기억하는가?
안타깝게도, 나는 그러하다.
다른 기억들 보다도 가장 희미하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처음으로 불분명한 시야로 흐릿하게 쏟아져 나오는 그 천막 아래의 밝은 빛, 양수로 막힌 귓구멍을 울리는 어머니와 산파의 목소리, 싸늘하게 몸을 감싸는 바깥세상의 냉기와 나를 감싸는 거친 천의 촉감. 난 이 세상에 내던져질 때의 그 모든 감각을 기억한다.
어머니가 말하길, 나는 태어났을 때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가만히 명상하듯 태어났다고 한다. 원래 아이가 울지 않는 것은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뜻한다고 하나,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그저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일인 세계를 감각하는 것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1921년 5월 20일 우간다의 한 천막 아래의 일이었다.
태어난 이래로, 내 모든 관심사는 세계의 모든 것을 느끼고 파악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포근한 요람은 나의 지식의 저변을 넓히는 것을 방해하는 거대한 장벽이었으며, 완전히 발달하지 못한 소근육은 내가 원하는 것을 다루지 못하게 하는 족쇄였다. 나의 부모는 어디로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것을 방해하고 다시 장벽 안으로 나를 가두어 둘 뿐이었다. 나는 그런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걷고 말할 수 있게 될 때에나 나는 그 감옥에서 벗어나 집 안을, 그리고 흙먼지가 휘날리는 마을을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좁디좁은 마을이었지만, 그때의 두근거림은 여전히 기억한다. 내 인식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고양감을 주었고, 나를 설레게 하였다. 다른 아이들이 땅바닥에서 진흙을 가지고 놀 때 나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곳을 가보고자 했다. 난 매번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더 먼 곳으로 걸었고, 또 해가 질 때쯤에 다시 돌아왔다. 부모는 그런 나를 매번 구박했지만, 내 머릿속은 내일은 어디를 가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또래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들은 눈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느라 바빴다. 나는 마을 외곽의 메마른 평지와 막 깔려 고무 타는 냄새가 나는 길, 나무가 듬성듬성 난 작은 숲과 조그만 하천의 상류까지 마을 주변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그러면서 만난 몇 가지 새와 버섯, 들쥐와 승냥이, 개구리와 잠자리들. 그때만큼은 나는 마르코 폴로 못지않은 개척자였다.
하지만 그 기쁨이 사그라지는 것은 그리 머지않은 미래였다.
변방 나라의 변방 마을의 주변엔 존재하는 것이라곤 그게 끝이었다. 마을의 남쪽은 아무리 걸어도 똑같은 초원뿐이었고,마을 서쪽을 감싸는 하천의 모양새는 결국 상류로 가던, 하류로 가던 똑같았고, 마을 북쪽에 있는 작은 숲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았다.
이제 그 어떤 것도 내 흥미를 만족시켜 주지 못했다. 나는 병적으로 더 많은 것을 보고자 했지만, 내 환경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나는 장벽 밖으로 나온 줄 알았지만, 이제는 드넓은 평야라는 또 다른 장벽이 나를 막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날 신부가 찾아왔다. 그는 저 멀리서 기묘하게 생긴 자동차를 타고 나타나 두꺼운 책 여럿이 든 상자를 내렸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아주 오래전에 살던 한 목수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난 그의 말보다도 그가 가져온 책들에 더욱 흥미가 갔다. 그는 세계 곳곳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그림책과 그곳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가지고 왔다. 때론 두껍고 글자가 빽빽한, 때론 정교한 삽화가 들어있는 책도 있었다. 나는 드디어 이 마을의 장벽에 올라 더 넓은 밖의 세계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우리 마을을 찾아왔으며, 그때마다 새로운 책들을 가지고 왔다. 절반은 우리말로 쓰여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영어로 쓰여 있었다. 나는 그에게 영어를 알려달라고 했다. 난 나의 언어라는 또 다른 장벽을 부수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나에게 기본적인 단어와 문법을 알려주고, 교재까지 쥐여 주었다. 그것의 규칙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메일 마을 주변을 돌며 볼 수 있는 것들처럼, 그것은 결국 부분적으로 엇비슷한 것들의 합이었고, 그것을 통해 다른 것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신부는 어린 나이에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나의 영어실력에 감탄하였다. 곧이어 그와 영어로 문제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나를 위한 귀중한 책을 가져오겠다고 했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알 수 있게 하는 책과 더 깊은 세계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책을 말이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고, 그는 한 트렁크를 채울 정도로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대부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책들이었다. 그것이 그가 말한 '더 넓은 세계'를 보게 해주는 책이었다. 그의 선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기묘한 글자가 표지에 새겨진 책 한 권을 쥐여 주었다. 그것이 바로 '더 깊은 세계'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그 책의 이름은 바로 '대수학개론'이었다.
난 하루 밤낮을 그 책을 읽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다. 하루하루 백과사전의 지식은 나의 것이 되었고, 그렇게 세계에 대한 지평은 더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 권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이제 또다시 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의 장벽 안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언제쯤 나는 장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과연 이것이 끝날 수 있을까. 내가 죽기 전에 인간이 쌓아온 지식의 끝에 다다르지는 않을까 공포심이 들었다. 나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내 지능이 축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제야 이것이 나를 옭아매는 저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수십 권의 책 가운데에서 남은 단 한 권의 책, '대수학개론'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기적적이게도, 그 책에 내가 보낸 시간은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서 보낸 시간보다 다섯 배는 길었을 것이다. 적어도 이 책 한 권이 소개하는 완벽히 다른 차원의 세계는 진짜 우리의 세계보다도 더 이상했으며, 또, 흥미로웠다. 인간이 만든 체계가 이렇게까지 아름답게 변모할 수 있는지 나는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매력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지만, 여전히 마무리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는 데에 더욱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지식의 저변은 확대되었고, 내가 지쳐 생각을 그만할 때까지 그 확장은 계속되었다. 나는 그때 내가 진정으로 지식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다고 느꼈다.
친구는 필요 없었다. 사실, 이제 와서는 그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마을에 있는 그 누구와도 말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영재라 부르며 치켜세워졌지만, 나와 저들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나는 절대 저들과 같아질 수도 없고, 같이 어울릴 수도 없고, 세상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 내가 광장의 흙바닥에 임의의 양수 엡실론과 충분히 작은 양수 델타에 대해 설명했을 때, 그리고 짜증 나리만치 풀어 헤쳐져 공허히 하늘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난 모두가 그게 대단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계산만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16253501 더하기 50826350는 67079851, 91647 곱하기 19236는 1762921692. 그럴 때마다 그들은 그제야 이게 대단한 것이란 걸 깨닫고 나를 영재라 부르며 박수를 쳤다.
신부는 계속해서 새로운 책을 가져왔다. 미적분학, 기하학, 논리학, 이산수학. 그가 가져오는 모든 책 하나하나에 새로운 세계가 있었고, 나는 곧바로 그 세계로 빠져들었다. 때로는 한 챕터의 한 공식에 대해서만 하루 반나절을 고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내가 모든 책을 다 읽어나가던 때에, 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패턴. 모든 것엔 패턴이 있었다. 마치 강의 상류와 하류로 흐르는 물길이 비슷하게 보이듯이, 마치 숲의 나무에 자란 잎들이 모두 비슷한 곳에 나듯이, 마치 페아노의 공리계가 그리는 귀납적인 규칙성과 같이, 마치 오일러의 함수가 복소평면에 그리는 주기성과 같이 말이다. 나는 세계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최초로 패턴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으나, 한번 그 규칙성을 이해하고 나면 곧이어 꽤 자명하게 변모했다. 패턴을 파악하는 능력을 통해 나는 세계의 많은 것들을 예측해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물리적 법칙을 경험적으로 깨닫는 수준이었지만, 곧이어 물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과의 규칙성과 패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바라본 세계는 생각보다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나의 합리를 넘어서는 것이었고, 곧, 세계는 그리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고, 또, 그리 정상적이지도 않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과거의 누군가는 여기에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마법, 주술, 기적… 그것들은 사실 이런 비합리적인 인과에 대한 결과물에 불과했고,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들로 인해 유도된 확률적 수렴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고대인과 신비주의자들은 그것에 억지로 의미를 부여했지만 말이다.
나는 매일 저녁 해가 질 때쯤에 광장에 나와 말했다. 내일은 바람이 세게 불 것이다. 내일은 비가 내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들어맞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의 나에 대한 경외는 숭배로 바뀌어 갔다. 나는 그렇게 천재에서 예언자, 그리고 악마가 되었다. 부모의 기대는 필요 없었다. 이장의 축복도 필요 없었다. 다른 이들의 시기 역시 아무런 의미가 있지 못했다. 나는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알 수 있을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미지의 영역을 조금씩 더 정복해 나갈수록, 세계는 점차 예측 가능한 것이 되었고, 그럴수록 삶은 더욱 지루해져 갔다.
나의 삶의 유일한 낙이던 수학도 곧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에 숫자를 붙이고 명제를 그러한 숫자로 치환하여 재귀적인 지칭으로 인해 일어나는 모순점을 회피하는 메타논리학적 접근을 한다면, 그 어떤 공리계도 무모순인 동시에 완전할 수 없었다. 나는 스스로가 증명해낸 증명할 수 없는 지식의 한계를 묵도했고, 차라리 그것을 알아내지 못했으면 하고 후회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약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식을 얻는 순간에는 내 삶은 활기로 차올랐지만, 그것을 한입에 꿀꺽 삼켜버린 이후로는 다시 천천히 죽어갔다. 나는 매일 밤 내가 모르는 것을 찾고자 좀비처럼 책들과 이론을 들쑤셨다. 그리고 내가 그 지식을 얻고 나면 잠깐의 황홀경과 함께 다시 깊은 절망의 늪으로 서서히 빠져들어 갔다.
신부가 마지막으로 우리 마을에 찾아온 순간, 나는 그에게 빌었다. 더 넓은 세상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고. 나를 데리고 이 마을을 떠나게 해 달라고. 그는 웃으며 거절했다. 그는 무책임하게도 꼬마 아이에게 달콤한 마약을 던져주고는 그대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나는 그를 저주했다. 그가 항상 품에 안고 있던 책에 나오는 목수도 저주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신 또한 저주했다. 난 이렇게 태어나게 한 부모를 저주했다. 난 마지막으로 이렇게 태어난 나 자신을 저주했다.
그 이후부터 나의 가장 최우선 목표는 이 지긋지긋한 마을을 나가는 것이 되었다. 어디든, 누구든, 어떻게든 상관없으니, 더 많은 것을 더 많이 보고 싶었다.
나는 케냐의 몸바사에서 무역업을 한다는 삼촌의 회사에 가겠다고 했다. 많은 이들이 걱정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어떻게든 더 많은 것들이 오가는 더 큰 세상을 보고픈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부모는 마지못해 허락해 주었고, 나는 그 어린 나이에, 또래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동요를 배울 나이에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삼촌은 나를 값싼 인간 계산기 취급을 했다. 내 일에 대한 보수는 한 푼도 없었고, 하루에 엄청난 양의 계산 업무를 처리했지만, 전혀 부담되지 않았다. 나는 계속해서 쏟아져 내려오는 숫자들과 정보들, 출발하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물건들이 그리는 궤적을 보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비정상적인 패턴들을 하나씩 익혀 갔다.
프랑스의 한 마을의 집값은 이곳에서 코트디부아르로 향하는 배가 얼마나 연착되는지와 관련이 있었다. 도쿄의 열차 시간표는 오리건 주의 부동산 시세와, 와이오밍주의 한 들판에서 발생한 폭발의 세기는 뉴욕의 지하철이 얼마나 순조롭게 운행되는지와 관련이 있었고, 오늘 아침 복숭아의 시세는 나를 해치고자 하는 사람의 수와 연관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련의 사건들을 이용해 특정한 사건이 일어나는 분기를 유도해 낼 수 있었다. 예컨대, 내가 특정한 때에 엄지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은 이후 삼촌이 업무 중에 한번 재채기를 하는 미래를 유도해내었다. 그리고 그 재채기를 하며 분 바람은 테이블을 넘어 명함 하나를 떨어뜨렸고, 그것은 어떤 인부가 업무 중에 손에 쥐가 나게 하는 미래를 유도했다. 높은 확률로 그 인부가 손을 털며 쥐에서 회복하면, 2시간 뒤에 그는 사과가 담긴 바구니를 옮기는 미래 분기로 나아가게 되었고, 이제 그때에 내가 유리조각으로 갑판의 고양이의 눈을 부시게 만들면 고양이는 자리를 피해 사과를 옮기는 인부 쪽으로 다가가 인부를 놀라게 해 사과 하나를 떨어뜨리게 하였다. 그 사과는 갑판 아래로 굴러떨어져 그 아래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나의 손으로 착지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손가락을 까딱이고 신발 끈을 더 꽉 조여 매는 것으로 이 회사를 부도낼 수 있었다. 물론 나는 뉴욕 증권가의 모든 주식을 예측하고 그것으로 떼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나에게 그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난 그저 세계를 바라볼 뿐이고, 그것을 해석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좋았다. 또한, 그것이 언젠가 다 예측 가능해지리라는 것 또한 깨달았고, 그때가 되면 나는 또다시 죽어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 내가 이 세상에 의미를 찾기 위한 몸부림의 연속이었다. 더이상 흥미로울 게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더 새로운 것을 찾고 받아들이려는 처절한 몸부림.
아주 오랜만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영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뉴욕으로 향하게 될 배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실릴 것이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벽돌 자재라고 표기되어 있었지만, 내가 해석한 모든 패턴은 그게 벽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에 대해선 그 무엇도 나에게 입을 닫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나는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것이 연속된 배송착오로 이 무역회사에 오는 분기를 유도해내었다. 정말 정교하게 짜인 인과의 시스템을 구상했고, 아주 세심히 그것을 실행시켰다. 높은 확률의 수렴 점이라는 톱니바퀴가 천천히 돌아가며 그것은 뉴욕에 도착하지 않았고, 대신 찰스턴으로 향했다. 찰스턴에 도착한 그 상자는 도로를 타고 애틀랜타로, 댈러스로, 로스 앤젤러스로 향했고,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도쿄로 향했다. 그것은 다시 동아시아의 해안가를 따라 홍콩으로, 베트남으로, 싱가포르를 넘어 인도로 향했고, 인도양의 한가운데에서 배는 폭풍을 만나 좌초했다.
금속 상자는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며 해류를 따라 아라비아 해로 움직였고, 그곳의 민간 선박이 철제 상자를 발견하고 배에 싣기까지 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 배는 지부티로 향할 계획이었지만, 중간에 해적선을 만나 그 배의 선원 전원은 목숨을 잃었다. 해적들은 그 상자를 자신의 선박에 싣고 그것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오랫동안 바닷물에 의해 부식되어 눌어붙은 그 철문을 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들은 끙끙거리며 문을 여는 사이에 수평선 너머에서 군함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군함은 해적선과 충돌하여 가볍게 이들을 무력화시켰고, 이들의 약탈품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그 상자를 회수했고, 그대로 몸바사로 향했다. 이들 역시 이 상자를 열기엔 역부족이었기에, 제대로 된 장비가 있는 항구인, 우리 회사의 항구에 입항했다.
나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너무 궁금하여 맨발로 갑판이 내려다보이는 탑에 올랐다. 상자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카리브 해 근방의 해적선에 있던 약탈품입니다. 아무래도 이런 커다란 철제 상자를 무리하게 실으려다 배가 무거워진 모양입니다. 제대로 도망가지도 못하더군요."
"안 그래도 해적들도 철갑선으로 배를 갈아타고 있는 추세인데, 이런 것까지 싣기엔 역부족이었겠지요."
한 인부가 커다란 볼트 커터를 들고 부식하여 눌어붙은 경첩을 잘라냈다.
"그래서, 이게 뭐래요?"
"우리도 몰라. 아무래도 오랫동안 바다를 떠다니던 거 같던데."
"조난당한 화물선에 있던 물품 같습니다.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흔적이 있군요."
"용케도 가라앉지는 않았군그래."
"내부가 엄청 단단히 밀폐되어서 내부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엔 망치로 뒤틀린 뚜껑을 두들겨 꽉 맞물린 부분을 헐겁게 했다.
"상자 안에서 무슨 소리 안 들리나?"
"뭔가… 단단한 걸 긁는 소리 같은데요?"
"안에 살아있는 뭔가가 있는 건가?"
"에이, 설마 그러겠습니까?"
망치로 두들겨 낸 틈 사이로 크로우바를 집어넣고 비틀어 틈을 벌렸다.
"아이씨, 이게 무슨 냄새야!"
"안에 있던 게 뭐든 완전히 썩어버린 거 같은데요."
"이… 이건 썩은 냄새가 아니라… 대변 냄새인데…"
인부는 마지막으로 뚜껑을 잡고 상자에서 뜯어내었다. 나는 그 안에 든 것을 보려고 몸을 기울였다.
"이건…"
"조각상이군."
"참 이상하게도 생겼네요."
"어디, 인도 같은 곳에서 발견된 유물이 아닐까요? 그 유물을 옮기다가 난파를 당한 거죠."
사람들은 그 조각상에서 시선을 떼고 서로 이 조각상이 어디에서 왔는지, 과연 무엇일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논의하였지만, 나는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뜻밖의 무언가가 나온 것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 못생겼고, 또,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내가 한번 눈을 깜빡이자, 군인의 목이 부러졌다.
갑판 위가 피로 흥건해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비규환이 되어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나는 이 광경을 천천히 묵도하였다. 그것은 내가 눈을 깜빡일 때 움직였다. 내가 한 번 깜빡이면 한 사람이 죽었고, 내가 두 번 깜빡이면 두 사람이 죽었다. 나는 탑 위에서 그것을 천천히 관찰했다.
곧이어 나는 시체들 위에 홀로 남게 되었다. 기괴하게 서 있는 조각상 하나만이 해가 지고 난 뒤의 어스름 속에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눈을 감을 때 마다 그것은 내가 있는 탑 위로 올라오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려 했지만 짧은 사지와 뻣뻣한 몸체 탓에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나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그것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와 그것의 얼굴은 한 뼘 사이로 가까웠다. 가쁜 나의 숨결이 그것을 때렸고, 딱딱하고 피가 묻은 콘크리트 얼굴에 반사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그것은 마치 숨을 쉬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왔다.
나는 더 알고 싶었다. 그것이 어떻게 물리 법칙을 거스르고 움직일 수 있는지, 누가 왜 이것을 철제 상자에 담아 뉴욕으로 보내고자 했는지. 그리고 세계에 이런 것이 얼마나 더 있는지.
다음날 해가 떠오를 때 나는 탑 위에서 독특한 화살표 인장이 달린 철갑선 하나가 입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 배에서 군인들과 주황색 티를 입은 인원들이 총을 들고 피가 눌어붙은 갑판으로 올라왔고, 조각상을 회수했다. 나는 이들이 그 조각상을 보냈고, 또 받아야 했을 집단임을 알아챘다. 복숭아 시세는 평소보다 조금 더 높았기에, 난 이들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았다.
난 그들에게 소리쳤다.
"제가 했습니다."
그들은 탑 위에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다만, 주황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조각상을 주시했다.
"제가 인과를 뒤틀어 그 조각상이 이곳으로 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무언가를 수군거렸다.
"저를 데려가세요. 전 당신들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고, 나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경위이다.
이들은 나를 이용하기보다는 내 능력을 시험하고 연구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내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팻말과 함께 격리실에 넣었다. 냄새나는 스코틀랜드 화가와,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과학자와, 못생긴 과부 사이에.
이제 남은 것은 이렇게 평생을 살다가 죽는 것이었다. 뭐, 이전과 다를 것은 없었다. 예상 가능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은 결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렇게 나의 삶은 더욱 단조로워 졌다.
드디어 나는 모든 인간의 종착점에 다다랐다고 생각이 들었다.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이 하고자 하는 것도 없이,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가는 것.
문제가 있다면 나는 이제 겨우 9살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99.95%의 확률로 일어날 미래였다.
하지만, 기적이라 할 만한 일, 예상 밖을 넘어섰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
칼 구스타프 융.
이 자는 그 자체로써 내 모든 예상을 부정하는 존재였다. 나는 살면서 그렇게 혼란스러운 사람을 처음 보았다. 다른 이의 행동은 모두 예측이 가능했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99.5%의 확률로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예상하면, 매번 말도 안 되는 확률로 그것을 비켜 나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의 수많은 행동은 예측 불가능했으며, 그의 말과 행동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람에게 흥미를 느꼈다.
그가 SCP 재단에 오는 것도, 그가 나를 만나게 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것도 예상 밖의 일이었다. 이로써 나의 정해진 미래는 다시 계산되어야 했다. 그의 존재가 생겨나며 나의 미래는 훨씬 역동적으로 변해서, 다양한 확률적 분기와 미지의 영역도 생겨났다. 그 가능한 미래의 시나리오 중에는 내가 이 SCP 재단 평의회의 일원이 되는 것도 있었다. 내가 그에게 말라가는 마룻바닥이 맞물리며 내는 소리를 예측하면 그는 나에게 관심을 두고 그의 아래에서 일하며 이 분기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내 계산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그가 이 확률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 프로젝트는 실패할 것이고, 그는 재단을 나가게 될 것이다. 이 사건은 약 85%의 확률로 일어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건, 그에게 있어서 계산된 확률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히 이 확률을 보기 좋게 비켜나갈 것이다. 나는 선창에서 그 조각상을 본 날보다도 그 동그란 안경을 쓴 심리학자에게 더욱 강렬한 흥미를 느꼈다.

난 살아생전 처음으로 이렇게 믿게 되었다.
세계는 계산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칼 구스타프 융. 그가 바로 실존하는 증거이다.
그는 드디어 나에게 삶의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살아있는 느낌을 쥐여주었다.
그렇기에 그는 어쩌면…
어쩌면…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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