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맥그리거 씨. 그간 잘 지내셨나요?"
칼 융은 맥그리거의 구속복을 풀어주며 그를 맞이했다. 맥그리거는 몸을 크게 스트레칭하며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박사님의 요청 덕에 구속복을 자주 벗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실력이 많이 줄었는데, 그래도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정신 에너지의 원활한 해소는 적극적인 활동에서 오니까요. 모두 이 프로젝트 덕이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씩 격리실 밖에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미첼 양과 오마르가 간간이 사무실에서 제 업무를 도와주고 있지요. 맥그리거 씨도 곧 그렇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꿈 일기는 잘 작성하고 계신가요?"
"물론이죠, 박사님의 말씀대로 매일 꿈을 기록하고 있으니 점차 꿈을 더 자주 꾸고, 그 꿈도 더 잘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습니다. 당신의 꿈 기록은 저희 분석심리학부의 큰 자산이 될 겁니다."
칼 융은 그의 노트와 스케치를 받아들었다. 퀴퀴한 노란 종이에 휘갈긴 글씨와 그림들이 마치 일렁이듯 수 놓여 있었다. 글씨는 힘겹게 알아볼 수 있었지만, 그림은 정교하고 명확했다.
"역시 예술가의 솜씨는 다르군요."
칼 융이 감탄하며 그림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고대 로마 시대의 벽화처럼 기괴하게 생긴 생물들의 그림, 또는 맥그리거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린 듯한 거친 삽화, 어떤 것은 기호와 형태만이 존재하는 추상화까지 어느 것 하나 겹치는 것 없이 각양각색의 스케치를 볼 수 있었다.
"이제부터 이 꿈들을 하나씩 분류해 볼 겁니다."
"꿈에도 종류가 있나요?"
"물론이죠. 혹자가 말했듯, 꿈은 무의식의 창입니다. 그리고 무의식은 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죠. 즉, 꿈은 개인무의식의 창의 역할을 하는 '작은 꿈'과 집단무의식의 창의 역할을 하는 '큰 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자, 이걸 보십쇼."
칼 융이 두 스케치를 그의 앞에 나열했다. 하나는 밀밭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꼬마, 다른 하나는 커다란 강철 신발에 깔리는 청년들의 그림이었다.
"이것들은 작은 꿈입니다. 앞의 그림은 아무래도 어린 시절의 기억일 테죠?"
"네 그렇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낮이면 들판에 나가 풍경을 그리곤 했습니다. 이건 그 시절의 기억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요? 강철 신발이 동료들을 짓밟고 있네요."
"이건… 그냥 헛소리 꿈이죠. 꿈이라는 게 으레 그렇잖아요."
칼 융은 웃으며 그의 말을 정정했다.
"헛소리 꿈이란 건 없습니다. 이건 당신의 경험이 상징화되어서 나타난 것이에요. 기록을 확인해 보니 시위에 참여한 전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레드 클라이드사이드. 그곳에서 친우들과 함께 영국 정부와 맞서 싸웠죠. 그놈들이 전차를 끌고 와서 시위대를 쓸어버렸지만요."
"바로 그 기억이 강렬하게 개인무의식에 자리 잡고 강철 신발의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즉, 이것도 맥그리거 씨의 경험에 기반한 작은 꿈이에요."
맥그리거는 연필 끝으로 다른 꿈들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이것들이 바로 큰 꿈이겠군요."
그 꿈들은 조금 더 기괴하고 의미심장하였다. 머리가 둘 달린 사람, 비둘기를 먹는 다람쥐,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작은 석판을 들고 있는 모세와 줄을 지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산송장들.
"이것들 전부가 큰 꿈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아마 꽤 많은 것들이 큰 꿈에 해당할 겁니다. 큰 꿈은 당신의 경험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순수한 인류의 집단무의식의 정신 요소가 꿈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대의 신화에서 많은 연결점을 찾을 수 있죠."
칼 융은 다람쥐 그림을 가리켰다.
"북유럽 신화에선 교활한 다람쥐가 거대한 용과 독수리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이야기가 있죠. 비둘기는 또한 정보의 전달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있고요."
"대홍수의 끝을 알린 동물이 바로 비둘기죠."
"그렇습니다. 결국, 이 큰 꿈을 해석한다면,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커다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다는 건 미래에 어떤 중요한 정보가 변조되어서 큰 절망적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로군요. 익시온 프로젝트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군요."
"어쩌면요. 그 무엇도 확답할 수 없습니다. 저희는 아주 간접적으로 집단무의식의 신호를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거든요. 그래도 위와 같은 방법을 통해 어렴풋이 그 신호를 해설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집단무의식과 연결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바로 명상과 환각이죠. 맥그리거 씨는 후자의 경우를 몇 번 경험해 보셨습니다. 저도 그때 함께 있었고요."
이 이야기를 들은 맥그리거의 안색이 조금 안 좋아진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의 그 경험이 바로 익시온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자산입니다. 이토록 강력하게 집단무의식과 연결된 경험은 전례가 없었을 정도예요. 하지만 무리해서 당신의 뇌전증 증세를 유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불안정한 C2 침공형 텔레파시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줄 잠재성이 있거든요."
"제가 가진 저주이죠."
"그리고 그와 동시에 축복입니다. 명상하는 방법만 잘 배운다면, 맥그리거 씨는 다른 이들보다 더 빠르게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 제3의 눈을 뜨고 열반에 이를 수 있을 겁니다."
칼 융은 이렇게 말하며 그의 미간 위쪽의 이마를 살짝 건드렸다.
"열반… 열반이 뭔가요? 열반에 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불교에서 말하는 무한한 깨달음의 순간입니다. 정말 열중하여 명상하다 보면 몸은 트랜스 상태에 빠져들고 주변의 모든 것이 희미해지며 세상에 자신과 세계 단둘뿐이 남게 되죠. 열반에 드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내면 깊숙한 자기 아키타입과 세계가 합일을 이루는 정신의 최종 진화단계입니다. 지금껏 그 경지에 근접히 도달한 자는 둘밖에 없죠.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그렇다면 박사님은 제가 열반에 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예수님과 제가 나란히 설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하지만 저희는 그저 그것에 접근만 하고자 합니다. 우선은 그저 깊은 곳의 정신이 하는 말을 듣고 저희가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것이 목표죠."
칼 융은 바닥에 흩어진 꿈의 기록들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이 방법으로는 티끌만큼도 근접하지 못할 겁니다. 눈을 감은 채로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셈이죠. 곧, 저희는 사막으로 떠날 겁니다. 그곳에서 제가 알려 드린 그 명상법을 사용한다면…"
"미래를 볼 수 있겠군요."
"정확히는 깊은 곳의 정신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미래에 대한 정보도 들어있죠. 그리고 그것들은 모호한 상징의 형태로 나타날 겁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저의 몫이죠."
"제 변칙성이 과연 인류의 집단무의식 가장 깊은 곳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충분히요.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당신의 변칙성으로 말미암아 저에게 그 경험을 공유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부분이지요."
맥그리거는 칼 융의 말을 경청하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눈은 전에 없던 총명함으로 반짝였다.
"면담 시간 끝났습니다. 박사님."
보안요원의 말에 칼 융은 그의 자료를 주워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봅시다. 맥그리거 씨."
"감사합니다. 박사님."
어두운 사무실 안, 강한 바람이 창문을 두들기고, 스산한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한참을 방치된 채로 있는 칼 융의 탁자에 놓인 서류들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온 바람에 조금씩 휘날렸다. 가볍고 또 은밀한 발소리가 다가와 사무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문 너머의 백열등이 어둑한 사무실에 희미한 빛의 선을 드리웠다. 작은 몸집의 그는 천천히 사무실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탁자 위를 살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 직후 문 너머로 두 명의 발소리와 무언가 의논하는 말소리가 지나갔다. 그가 다시 일어나 탁자의 종이 사이에 반쯤 가려진 열쇠를 찾아내었다. 그는 열쇠를 집어들고 곧바로 빛의 선을 넘어 반대편의 탁자 위에 있는 찻잔의 자물쇠를 풀었다.
달칵이는 소리와 함께 찻잔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안에는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크리스털잔 두 개와 녹색 유리병 안에 담긴 레드 와인 한잔이 있었다.
그는 코르크 마개를 열고 잔에 붉고 맑은 와인을 흘려보냈다. 그는 절반쯤 채우고 다시 마개를 닫아 원래의 자리에 두었다.
그는 빛의 선으로 다가가 그 안으로 잔을 들이밀었다. 그의 짙은 갈색 피부의 손이 드러났고, 크리스털 잔과 붉은 액체가 반짝였다. 천천히 잔을 회전시키자 어두운 방 안은 전구 특유의 노르스름한 빛과 와인의 붉은빛이 뭉친 기묘한 패턴이 희미하게 그려졌다.
그러나 그는 조금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는 손을 거두었다. 춤추던 패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천천히 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고, 와인을 조금씩 들이켰다. 잔에 든 와인은 줄어들고, 그 대신 시큼한 냄새와 알코올의 향이 잔을 채웠다. 그는 입술을 떼지 않고 잔을 모두 들이키고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잔을 깨끗이 닦고 찻잔을 원래 있던 찬장에 올려놓으려 손을 뻗었다.
"구스타브 로렌츠, 피노 누아 리저브. 프랑스가 만들어낸 진정한 예술작품이지."
중후한 말소리에 그는 깜짝 놀라 잔을 떨어뜨렸다. 잔은 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났다.
"네가 그 와인을 좋아한다니, 의외로군. 너무 드라이해서 조금 노친네 취향의 술인데 말이야."
칼 구스타프 융이 사무실의 불을 켜며 말했다.
"맛은 어땠나? 오마르?"
오마르가 여전히 얼어붙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박사님은 분명… 계산에 따르면 박사님은…"
"하하, 그냥 어쩐지 네가 그럴 것 같아서 한번 들러 본 것이란다. 나무라는 게 아니야. 물론, 아직 넌 성년이 되려면 몇 년은 기다려야 하니 술은 지양하는 게 좋지만 말이야."
칼 융은 구석에 놓인 쓰레받기를 들고 와 바닥에 깔린 크리스털 조각을 쓸었다.
"네가 성년이 된다면, 기회가 된다면, 같이 와인이나 한잔하도록 하지. 어떤가?"
오마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다. 칼 융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마르는 당황스러워하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의 손을 뿌리치고 사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도, 아직은 어린아이로군."
칼 융은 그렇게 말하며 크리스털 조각을 한쪽으로 치워 두었다.
맥퀸은 초조한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이리저리 배회했다. 포마드를 바른 그의 머릿결이 뜨거운 햇살을 받아 번쩍였고, 송골송골 맺힌 땀이 그의 뺨을 타고 내렸다.
"이런, 거의 다 왔는데…"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곧, 사무실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고, 맥그리거의 자료를 들고 있는 칼 융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융 박사님. 저희 큰일 났습니다."
"뭐? 무슨 일인가?"
맥퀸이 가슴팍에서 대충 접힌 문서를 하나 건네었다.
"이게… 뭔가?"
"상금감시사령부에서 내려온 공문입니다. 변칙개체를 외부로 반출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렇다는 건…"
맥퀸이 마른 세수를 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희 사막 못 갑니다."
그날 밤 칼 융은 잠을 설쳤다.
속은 메스껍고 몸은 휘청거렸으며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그 날 따라 바람은 매몰차게 불어대며 창틀을 뒤흔들었다.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 천둥처럼 울리는 창틀 소리와 바람이 자아내는 휘파람 소리에 칼 융은 도저히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마치 신 내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그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고통과 공포가 파도치듯 밀려왔으며 그의 이 사이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비명으로 변화했고, 그의 의식은 점차 희미해지며 결국 거대한 꿈으로 굴러떨어졌다.
나: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지?
그림자: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페르소나: 나는 누가 되어야 하지?
자아: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너 스스로 그것을 잊지 않은 것인가?
나: 우리의 앞엔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이지? 우리는 과연 곧 일어날 그 사건에 휘말리고 마는 존재인 건가?
시대의 정신: 곧, 그 일이 일어나리라.
나: 그 이야기만 벌써 4년째야. 그 '곧'이란 게 대체 언제인데?
깊은 곳의 정신: 곧, 곧, 아주 조금 뒤에 있으리라.
나(외향-사고): 이건 미친 짓이야. 이런 식으로라면 죽기 직전에나 그 일이 일어날 거야. 혹은 내가 죽은 후에.
나(내향-직관): 하지만 이것이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이론을 증명할 유일한 기회야.
나(외향-사고): 난 그 이론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 이제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야.
나(내향-직관): 하지만 깊은 곳의 정신이 그리 말하고 있지 않나? 그것의 말에 귀를 기울여봐!
깊은 곳의 정신: 곧, 혼돈이 있으리라. 인류는 그 앞에서 자신의 형상을 잃어버리리라.
나(외향-사고): 이것은 내가 가진 공황장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맥그리거가 그렇듯이 말이야.
나(내향-직관): 맥그리거도 그것을 본 것이라면? 아니,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우리 이후에 일어날 일을 알게 된 것이라면?
나(외향-사고):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익시온 프로젝트야. 두 번째 세계대전이 언제 발발하는지,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제일 중요해. 그래서 그것은 언제 일어나지?
시대의 정신: 곧. 아주아주 곧.
나(내향-직관): 나는 그가 예고하는 것이 단지 2차 세계대전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란 걸 알고 있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어.
나(외향-사고): 현재 주어진 정보로 얻어낼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합리적인 예측이야. 난 과학자야. 예언가가 아니라고.
나(내향-직관): 아니야 과학자는 절대로 정신이라는 진리에 접근할 수 없어. 인간의 정신은 과학으로는 절대 설명되지 않는 구역이야. 난 예언자야. 예언자의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해.
나(외향-사고): 하지만 나는 SCP 재단에 소속되어 있는 걸. 그리고 SCP 재단은 과학자들의 집단이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건 과학자인 나야. 예언자인 내가 아니야.
나(내향-직관): 하지만 익시온 프로젝트는 과학자는 절대로 풀어낼 수 없어. 예언가만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어.
나(외향-사고): 그렇지만 현재 달성한 것이 크게 의미 있어 보이지는 않아. 정상세계의 정치 분석가가 나보다 훨씬 빠르다면, 익시온 프로젝트가 무슨 의미가 있나?
나(내향-직관): 나의 이론이 맞았다는 걸 증명하기엔…
나(외향-사고): 그래서 언제인데? 언제 '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지?
나(내향-직관): … 모르겠어. 근거는 없어. 하지만 믿을 뿐.
나(외향-사고): 언제? 언제 인간을 광기의 도가니에 빠져들지? 언제 인간은 서로를 뜯어 죽이려 하지? 언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이지? 언제 우리를 혼돈에 빠뜨릴 보탄이 나타날 예정이지?
나(내향-직관): …
페르소나: …
아니마: …
아버지 컴플렉스: …
그림자: …
늙은 현자: …
신성한 아이: …
침묵
깊은 곳의 정신: 바로 지금이다.
천둥번개가 천구를 반으로 쪼갠다.
쪼개어진 하늘의 돔 사이로 별빛이 피처럼 쏟아진다.
트럼펫의 팡파르와 전쟁의 북소리가 세계를 뒤흔든다.
거대한 무지갯빛 사이로 거대한 신들의 왕, 혹은 왕들의 신이 행차에 나선다.
이 땅 위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신의 얼굴을 보고자 엎드리지 않고 실눈을 뜨고 그에게 다가간다.
그의 머릿 뒤편에 붉게 타오르는 태양 십자가 마치 헤일로처럼 떠서 열기와 광휘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손짓을 한다.
그는 인자하게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이 내면 깊은 곳의 잔인함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는 모든 인간의 두 배는 되는 자였으며 모든 것이 우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 속은 놀라우리만치 썩어 곪아 있었다.
심장의 썩은 내가 코를 찌르고 나는 구역질이 나 고개를 숙인다.
신이 나에게로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나는 구역질을 참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또한 나를 바라본다.
그래.
네놈이로구나.
나: 신 중의 신, 마법과 시와 연극과 지혜와 전쟁의 신, 보탄이여.
보탄: 인간 중의 인간. 철학자이자 신자, 과학자, 예언자이며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보려 하는 이단자여.
보탄은 거대한 창공의 꼭대기까지 솟은 산, 혹은 거대한 옥좌에 앉아 나를 내려다본다.
나: 너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의 소중한 것을 더럽혔노라. 그리고 이를 통해 네놈이 저지를 짓을 나는 알고 있다.
보탄: 그래 맞다. 내가 더럽혔다. 내가 인간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나는 그가 깔고 앉은 산, 아니 옥좌, 아니 수많은 인간의 모습을 바라본다.
보탄: 바로 인간들이 나를 신으로 만들었다.
보탄은 손을 들어 반들반들한 얼굴 가죽을 벗겨 낸다.
그러자 교활하고 음흉한 다람쥐, 라타토스크가 나타난다.
그가 한 번 더 얼굴 가죽을 벗기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리고 짜라투스트라가 나타난다.
그리고 길거리의 부랑자의 얼굴,
헤르메스의 얼굴,
칼 구스타프 융의 얼굴,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러고는 칼 융은 잠에서 깨었다.
"결국 그가 총통이 되었군."
그는 침대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혼잣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