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융은 제12기지의 외곽 도로까지 걸어갔다. 하늘은 기우는 햇살이 짙게 밴 구름을 물들여 어둡고 붉은빛으로 가득했다.
익시온 프로젝트의 전례 없는 위기에 수많은 생각이 그의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습기가 차 무거운 대기가 그를 짓눌렀고, 끈적한 바람이 그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어쩌면 여기까지가 하나님이 주신 내 역할이었던 걸지도."
그는 돌아서서 12기지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크게 공감하던 미첼 부인, 바싹 마른 과학자, 베게너씨, 냉담하고 방어적이지만 분명히 그 내부에 청아한 소년이 잠들어 있을 울웨, 드디어 자기 자신과 내면을 통해 마주 볼 수 있게 된 맥그리거.
굵은 빗방울이 한둘씩 떨어질 때가 되어서야 칼 융은 고민에서 깨어났다.
"이런. 비가 내리는군."
칼 융이 발걸음을 돌리고 기지로 돌아가려는 순간, 하늘에서 기묘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정지 정지! 신원 불상의 민항기 발견! 순순히 투항하라!"
탐조등이 켜지고 노란색의 중형 비행기를 비추었다. 비행기는 양쪽에 프로펠러가 달린 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투항 의지를 밝혔고, 천천히 속도를 줄인 채로 기지의 내부로 들어왔다. 비행기는 능숙하게 도로를 활주로 삼아 가볍게 착지했다. 무장한 보안요원 둘이 권총을 빼 든 채로 비행기를 둘러쌌다.
"신원을 밝혀라."
파일럿이 천천히 조종석에서부터 사다리를 타고 빠져나와 그들 앞에 서서 두 손을 들었다. 그는 약간 희끗한 머리와 짙은 팔자 주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칼 융보다는 젊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노신사에게서나 볼 법한 훨씬 중후하고 깊은 멋이 배어 있었다.
"상급감시사령부 소속의 애덤스 요원입니다."
그는 총구 앞에서도 당황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에 칼 융은 그가 예의상 손을 들고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목적은?"
"상급감시사령부의 보안인가 6등급 초극비 명령을 전달하고자 왔습니다."
"명령 수신자는?"
"칼 구스타프 융."
그가 여유롭게 융을 바라보았다. 융은 그 기세에 눌려 잠시 숨을 멈추었다.
"증명 수단은?"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암구호."
보안요원은 잠시 서로를 쳐다보았다.
"빨리 암구호의 문어를 주십쇼. 제가 답어를 드릴 테니."
보안요원 중 하나가 입을 열고 더듬더듬 말했다.
"검… 검은 달은 우는가…?"
그리고 파일럿이 거침없이 말하였다.
"태양 아래 만물을 달이 가려버렸기에."
"맥그리거 씨, 일어나십시오. O5 평의회의 명령입니다!"
칼 융이 숨을 헐떡이며 맥그리거의 격리실 문을 두들겼다.
"네? 무슨 일인가요? 융 박사님?"
맥퀸이 당황한 채로 그의 옆으로 달려왔다.
"방금 상급감시사령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네. 익시온 프로젝트는 속행될 것이고, 지금 당장 우리는 사막으로 떠나야 하네."
"네? 그게 무슨… 어떤 공문도 내려오지 않았는데요?"
"비밀 명령이라 그러네. 아무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빨리 준비를 돕게 자네도."
"… 알겠습니다. 맥그리거 씨는 전신마취시켜 이송하겠습니다."
오마르는 눈을 뜨고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듯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융 박사님?"
"외곽 도로로 가면 노란 비행기가 있을 거야. 짐을 챙기고 그곳에서 만나자고. 보안요원에게는 말해 두었네. 널 보면 바로 인솔해 줄 거야."
"네."
오마르는 묵묵히 격리실을 빠져나왔다.
칼 융은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부랴부랴 서류가방에 노트들과 자신의 펜, 그리고 성경 한 권을 챙겨 가방에 욱여넣었다.
빗방울이 창문을 강하게 두들겼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융은 갑자기 우두커니 서서 창문을 타고 흐르는 붉은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가방 속에서 성경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는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린 후, 성경을 탁자 위에 올려둔 채로 가방을 들고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나갔다.
"맥그리거 씨! 맥그리거 씨는 왜 거기 혼자 있는 거지?"
"저 왔을 때부터 이렇게 병실 침대에서 자고 있었어요."
"자고 있는 게 아니라 마취상태라서 계속 기도를 확보해 줘야 해! 그럼, 맥퀸 씨는 어디 가고?"
엔진 시동음이 이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프로펠러가 젖은 비를 양옆으로 튕겨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럼 다 모인 거죠? 어서 타십쇼. 저분 잘 태울 수 있겠나요?"
애덤스가 레버를 내려 비행기의 뒷문을 열었다.
"애덤스 씨, 혹시 맥퀸 행정관을 보셨나요?"
"저분 데리고 오시고는 빠르게 본부로 돌아갔습니다. 맥퀸 씨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건가요?"
"프로젝트 인원이지만, 사막까지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그럼 그냥 신경 쓰지 마시고 빨리 타십쇼! 시간이 없습니다!"
칼 융과 애덤스는 맥그리거가 누운 침대를 밀어 서로 마주 본 뒷좌석의 사이에 올려 고정했다. 완전히 고정된 것을 확인한 융은 자리에 앉아 벨트를 매었다. 뒤이어 오마르도 따라 좌석에 앉았다. 애덤스는 앞좌석으로 올라타 비행기의 시동을 걸었다.
빗방울이 거세지고 바람도 크게 휘날렸다. 비행기가 바람에 조금 휘청였다.
그러자 우렁찬 사이렌 소리가 12기지를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맥퀸 씨는 애덤스 씨를 신고하러 12기지 본부로 간 겁니다."
오마르가 답했다.
"뭐라고?"
멀리서 자동차와 무장 병력이 이들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의 한쪽 구석에서 맥퀸이 확성기를 들고 이들에게 소리쳤다.
"상급감시사령부는 허가한 적 없답니다! 확인된 그 어떤 기록에서도 오늘 누군가 찾아온다는 공문은 없었습니다! 박사님!"
애덤스 요원은 프로펠러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고는 바퀴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칼 융 박사님, 당신은 지금 납치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주십쇼."
프로펠러의 출력은 당장에라도 비행기를 나아가게 하는데 충분해 보였다.
"이 비행기는 사막으로 갑니다. 당신을 내려주고 7일 뒤에 다시 당신을 데리러 올 겁니다. 박사님은 납치된 상태라는 명분에 따라 7일간 고립되어 그간 원하는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여기서 내리실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동료들과 함께 제가 내려 드리지요. 박사님의 선택에 따르겠습니다."
칼 융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애덤스 요원과 멀리서 다가오는 맥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 선택의 시간이로군.
깊은 곳의 정신: 어떻게 할 것인가?
나: … 물론 당연히…
그것을 잡을 것이다.
"출발하게."
융이 이렇게 말하자 애덤스는 곧바로 브레이크를 풀었다.
관성에 의해 몸이 젖혔다. 굵은 빗줄기들을 뚫고 비행기는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융 박사님!"
맥퀸이 소리쳤다.
"발포합니까?"
"정지! 박사님이 다치시면 안 돼!"
"그럼 어떻게 합니까!?"
비행기가 충분한 속력을 가지자 기수는 하늘을 향해 떠올랐고, 유유히 12기지의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곧이어 짙은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하아… 이런…"
맥퀸은 망연자실하게 하늘을 바라본 채로 빗물이 차오른 도로 위에 주저앉았다.
비행기는 깊고 습한 구름 속에서 진동했다.
"융 박사님, 이런 상황에 드리긴 좀 이상한 말이지만, 사실 정말 팬입니다. 1903년의 자료부터 지금까지 발행한 대부분의 책들을 다 탐독했습니다."
"음… 고맙네…"
비행기는 한차례 크게 흔들리더니 상승세가 훨씬 가팔라졌다. 그리고 곧이어 맑은 하늘이 드리운 구름 위에 도달했다. 해가 막 지평선 아래로 사라진 터라 땅과 그 위의 구름은 어두웠지만,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고천의 깃털 구름은 태양 빛을 받아 주황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노란 비행기의 몸체는 그것들의 빛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태양이 그린 서쪽 하늘부터 동쪽 하늘까지의 우아한 색채의 변화가 선명히 보였고, 동쪽 하늘에는 밝게 빛나는 별들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다.
"좀 추울 겁니다. 좌석 아래쪽에 마른 수건이 있을 테니 몸을 좀 닦으십쇼."
칼 융은 좌석 아래에서 수건을 참아내 오마르에게 먼저 건네 주었다.
"고맙네, 애덤스."
"제 이름은 애덤스가 아닙니다. 게으른 가명이죠.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군요."
그는 몸을 틀어 칼 융을 바라보았다.
"혹시 지금 제가 혼돈의 반란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이 모든 상황에도 그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아까 말씀드린 정보 중 하나는 정확히 들어맞습니다. 전 상급감시사령부 소속이 맞아요."
그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애덤 브라이트입니다. 그냥 그 정도만 알고 계십쇼."
칼 융은 여전히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마르 울웨는 그 이름을 듣고 수차례 입속으로 되뇌었다.
"그럼 이제, 드디어, 사막으로 가봅시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래를 보자고요."
비행기는 크게 선회하며 아프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