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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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어둠.

1은 자신의 테라스 안에서 홀로 서 있었다.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는 말없이 난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아무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저녁이었다. 한가하고, 동시에 지옥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존재하는 이 시간.

그는 이 모든 것이 시작된 날을 떠올렸다.

그는 한때 루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서북부에서 나고 자란 그는 부모님 밑에서 형과 여동생을 형제로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유복하지는 않았지만 공부는 곧잘 했고, 때문에 가족의 희망이 되었다.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는 부모님께서 그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그 말이 가지는 무게를 다섯 살짜리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부모님이 하시는 또 하나의 말인 줄로만 알았으므로.

이제 그는 그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안다.

그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괴물이 집을 덮쳤다. 그 시절의 기억은 이제 흐릿해졌음에도 그날—바로 그 시간의 인상은 선명하다. 그 괴물이 부모님을 산 채로 으깨고, 형의 허리를 두 동강 내고, 여동생을 집어삼키는 그 광경. 1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여동생이 내지르는 비명을 들은 것 같아 눈을 부릅떴다. 그래, 그들은 죽었지. 나는 죽지 못했구나. 그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는 그의 소년기를 일관되게 지배한 악몽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나? 그는 마침 출동하여 괴물을 소탕한 연합 조직원들에게 구출되었다. 그리고는 연합 기지로 인도되었다. 1은 그때를 떠올리려고 시도하다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 그의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수많은 금속성의 소음과 창백한 빛깔 뿐이었으므로. 그리고 그 위에 덮인 어떤 감정. 불안? 아니, 아니다. 그것은 경이였다.

본래라면 현장에서 구출된 고아들은 해당 지역 고아원에 보내지는 게 원칙이었지만, 그는 특이한 케이스였다. 1은 그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딱히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군대식 교육을 받고 자랐죠."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자라났다. 장성한 청년이 되었고, 때가 되자 ICSUT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그곳을 수료했다. 처음에는 연구직이 되려고 했으나, 그의 신체 능력을 주의 깊게 본 피직스 분과의 한 높으신 분이 그를 추천했다. 그는 곧 피직스 분과의 제9958타격조 "호미"Homie에 들어가게 되었다.

"저는 정보 교란과 잠입에 유능했기에 코드네임으로 카멜레온이 붙여졌죠. 그땐… 글쎄요, 솔직히 재밌었습니다. 어릴 적 내 가족을 모두 앗아가버린 괴물들을 잡는다는 생각에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저는 어렸으니까요."

"누구나 다 그렇지. 자네가 지금껏 여러 번 한 이야기가 아닌가."

1은 등을 돌려 9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단아한 백색의 한복을 입은 소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곰방대를 입가에 대고 있었다. 소녀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1은, 그 연기가 마치 향 같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향.

"람다-92가 전멸했다더군요."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산의 이상성부 시설은 무력화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잠시 멈추어 선 것 뿐이었다. 더 높은 효율, 더 많은 생산을 위하여. 쓰레기장은 공장과 무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둘은 서로에게 달라붙어서 끊임없이 확장을 추구하는 제국주의자와 같은 탐욕을 비벼대고 있었다. 공장이 재가동했으니 쓰레기장 역시 그 영역을 넓힐 터.

"6은 사보타주를 통하여 연합과의 동맹을 체결할 생각인 것 같던데." 9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6. 흔히 이야기하기를, "외교관". 그러나 더 많이 쓰이는 별칭은 "마르스"였다. 군신 마르스. 1은 이따금 6의 눈가에서 이글거리는 거센 불꽃을 볼 때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전쟁을 대할 때면 그는 일종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군사와 다툼과 분쟁과 전쟁.

"그것이 그의 주무기니까요."

"어리석은 자다."

"그 어리석은 자가 우리 병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게, 진즉에 대처를 했다면 좋지 않았겠느냐."

"제가 늘 웅녀님의 말에 따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한때 한 국가의 대모였던 여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늘 벌벌 떨기만 하던 녀석이 많이 컸구나."

"배운 거지요, 연기를. 까마득히 어린 것들에게 내색도 않으시고 존대를 쓰시는 분께."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9는 웃음을 거두고는 한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1은 착잡한 표정으로 난간에 걸터앉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쉽게 만나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세계멸망을 1열에서 바로 보고 싶어지더군."

1은 자신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대로 말하지요. 5는 방주 계획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9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거하게 실패한 계획을?"

"네." 1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아주 굳건하게 밀고 나갈 것처럼 보이는군요."

"돌덩이 같은 자식이…"

"묘안이 있겠습니까?"

"내가?" 웅녀는 1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내가 무슨 묘안이 있겠나. 이 사건에 대해 내가 해줄 말은 없어."

"그래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정치적 입지 탓이라면—"

"그보단," 9가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데."

도무지 속일 수가 없군. 1은 난간에서 일어나서 9에게로 다가갔다.

"사태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공장장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도 없는데, 각지에선 변칙 활동이 증가하고 있죠. 더군다나 이런 상황에 연합과의 동맹은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무고한 생명을 없애면서요."

"O5가 할 말은 아니군." 9가 무미건조하게 지적했다.

"전 한 번도 O5가 되길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에 앉아있지. 그러니 이와 같은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직시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직시함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우린 5와 6을 막아야 해요."

"연합과의 동맹을 막자?"

1은 품속에서 한 종이를 꺼냈다.

"알 피네에게서 온 전보입니다."

"알 피네…?" 9가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자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어떻게…?"

"알고 지내던 사이라고 해두죠."

"대체 알 피네가 자네에게 할 말이 뭐가 있다고 전보를 친 겐가?"

1은 잠시 침묵했다. 자신의 별칭처럼.

"연합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고 하더군요."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합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다. 그 말에 담긴 어떤 의미를 해석하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 피네는 도주 중입니다. 안전한 장소에 도착하는 즉시 전보를 보내기로 했어요."

"그럼 도대체 지금 연합의 통제권을 쥐고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제 예상대로라면…"

1은 잠시 고개를 돌려 난간 너머를 바라보았다. 밤의 파리는 안온하였다. 이 도시가 불바다가 되지 않기를 그는 빌었다. 그러나 지금 내뱉는 말은 이를 실현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1은 잠시 주저했다.

그러나 꼭 해야만 하는 말이다.

"7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테라스 문이 폭발했다.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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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런 짓을 한 겁니까.

불 꺼진 방. 쇠창살 사이로 온 얼굴이 멍투성이가 된 남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꾀죄죄한 행색에 한동안은 씻지 못한 듯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그는 지쳐 보인다. 유일하게 그의 얼굴에 생기가 감도는 것은 눈빛 말고는 없다. 허나 그마저도 긴 앞머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남자 하나가 쇠창살 밖에 서 있다. 이 남자는 누런 군복을 입고 있다. 건장하지만 어딘지 유약한 분위기를 지닌 그 남자, 그의 계급장은 군복의 주인이 소위라는 사실을 보인다. 이름표에는 정자로 '사사키 다카요시'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사사키 소위가 힘겹게 입을 뗀다.

— 형님, 대체 왜…

— 어어, 왔구나야. 내 동생, 자식… 좋아 보이는구나.

사사키는 입술을 앙다물고 옥 안의 사내를 바라본다.

— 대체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짓을 하신 겁니까.

— 미안하구나, 혹시 네게 피해라도 갔다면은…

—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습니까.

사사키는 한숨을 쉰다.

—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금방 꺼내드릴 테니…

— 형주야.

침묵이 흘렀다.

사사키는 조심스럽게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가 고개를 든다. 그의 눈빛은 전에 없이 강렬하게 불타오르고 있다. 젊은 소위는 제 형의 얼굴을 보고 이상한 소름이 등줄기에 돋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다른 사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 형주야.

— 예, 형님.

— 넌 언제나 착한 동생이었다.

— …

—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 형과는 달리 부모님 속도 썩이질 않았지.

— 왜…

—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사내는 제 동생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사내가 말을 반복한다. 그리고는 부러진 다리를 이끌어서 철창으로 다가선다. 사내가 철창을 붙잡을 때, 철창에 족쇄가 부딪혀서 마찰음을 내었다. 사사키는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어떤 광경을 떠올린다. 어머니의 가위질 소리. 물레방앗간의 물소리. 온종일 형과 산을 쏘다니며 놀던 시간.

— 그렇게 열심히 살고, 그렇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던 네가 이렇게 온 모습이 너무나도 두려워서다.

— 대체 왜 그러십니까, 형님.

— 형주야, 그 길이 맞느냐?

사사키는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멈칫한다. 당연히 이 길은 옳다. 조선인으로서는 뚫기 어려운 갑종간부후보생이 되어, 견습사관 시절도 버티고 소위로 임관했다. 가족들 모두가 즐거워했다. 진정으로 신민이 되었다고 여겼다. 그런데 왜 지금 눈앞의 이 사내, 언제나 자신의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형이 어째서 이러는 걸까.

— …그렇습니다.

사내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 이 길은 옳은 길입니다.

— 일본인이 되어, 네 이름과 네 나라 모두를 잊고 사는 게 옳은 길이라 이 말이냐?

— 적어도 부모님을 위하는 길입니다.

— 네 자손을 위하는 건 아니지.

— 그러는 형님께서는 그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사사키는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본다. 사내는 입술을 다문다. 사사키의 눈가는 떨리고 있다.

— 형님께서는 무얼 하셨습니까. 부모님과 절연하고, 학교를 나와 그동안 무얼 하신 겁니까.

— 너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사내와 사사키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아주 닮은 눈빛이 허공에 맞붙어서 사그라든다.

— 어릴 적 형님은 저보다도 똑똑하셨습니다. 형님이야말로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라고들 말하지 않았습니까.

— 헛된 일이었다.

— 할아버질 죽인 이 나라가 어찌 중하다고 그렇게 애를 쓰시는 겁니까.

— 이제 그 나라를 죽인 나라가 곧 우리에게도 칼날을 돌릴 테니.

— 저는 형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안다.

사내는 픽 웃는다.

— 이제 가라, 넌 나를 다시는 만나서는 안 된다.

사사키의 눈이 커진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다.

— …

— 앞으로 날 찾아오지 마라. 날 옥에서 꺼내려고도 하지 마라. 네게 형은 없는 거다.

사사키는 사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미 안다. 조선에 있는 부모님은 이미 그에게 말했다. 만주로 떠나는 그에게 애원했었다. 형은 없는 거라고. 형과 엮이게 되면 군에서 퇴출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상범으로 몰리고 말 거라고. 이미 그의 집에서 형은 죽은 사람이었다. 관청에도 그의 형은 사망 처리가 되어 있었다.

— …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 다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오라고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사키는 깨달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 존재하는 이 사내는 그가 알던 형이 아니라고. 언제나 우러러보던 형은 이제 없다고. 그가 여태 기억했던 다정하고 든든했던 형의 모습은 갑자기 시선 끝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목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차오르면서 힘이 들어간다. 이제 끝이구나. 이게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형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숨이 폐 안에서 흘러나온다.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내는 그런 그를 조용히 바라본다.

— 네가 내가 되지 않는 한 넌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게다.

사내는 잠시 사사키를 바라본다. 사사키는 이를 악물고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 사내는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인다.

— 몸조심해라, 형주야.

사사키는 조용히 뒤로 돌아 형무소에서 걸어 나온다. 어딘가에서 어린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불타는 노을이 그에게로 날아든다. 언젠가 드넓은 논에서 보았던 저녁놀의 인상이 눈가에 맴돈다. 따스하고 안온했던 그 심상. 바람이 불면서 형무소 밖에 걸려 있던 국기가 펄럭인다. 널리 퍼져나가는 해의 기상을 표현한 그 깃발. 사사키는 언제나 그 깃발을 보며 자긍심을 가졌다. 그 기상을 널리 퍼트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저 차갑고 서늘하기만 한지. 눈이 매워 잠시 하늘을 바라본다. 노을은 어느새 저편으로 저물고 있다. 아주 저편으로.



"형님은 몇 년 뒤 죽었어. 끝까지 조선의 사람으로."

남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 꺼진 커피숍에는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커피숍의 주인은 조용히 남자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난 끝까지 형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조사국에 나아가 수신도와 세을가의 기술로 나를 뜯어 부수고 재조립했을 때도, 수집원과 음양료의 기술로 내 안에 지옥을 넣었을 때도, 재단과 연합의 기술로 내 시야를 확장했을 때에도… 난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

남자는 걸음을 옮겨 커피숍 창문 저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도시는 제 자신의 문제에 열중한 채 차분히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그 안의 모든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이 기를 쓰고 숨겨놓은 모든 비밀을 볼 수 있었다.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과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 전체를 도서관의 책처럼 빌릴 수도 있었다. 그것이 그의 권능이었다. 그것이 관리자라는 존재의 권능이었다.

"지금도 나는 모든 인간을 알 수 있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커피숍의 주인은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형님만큼은 이해할 수 없었어."

"업보네."

주인이 입을 열었다.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

"다음은 뭘 할 거야?"

"8을 막아야지."

주인이 흥미로운 듯 커피를 홀짝였다.

"그리고 모든 건 다시 시작될 거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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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는 재빨리 방진을 생성하여 파편을 막아냈다. 1 역시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9가 그에게로 달려갔다. 둘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서로 교환했다.

그리고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어느 소속인지조차 알 수 없는 무리. 그러나 그들의 왼쪽 어깨에 부착된 휘장이 그들이 재단 소속임을 알리고 있었다.

"반역이군." 9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먼지가 걷히자 1은 그들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붉은 오른손'이었다. 알파-1, 붉은 오른손. O5 직속 부대. 9 역시 숨을 삼키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혼돈의 반란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결국 그때와 같은 일이 또 벌어지는 건가. 우선 생존해야 했다. 1이 속삭였다.

"전면전은 자살 행위입니다. 어떻게든 저들을 따돌리고 여기서 탈출하는 방향으로 생각해 보죠."

"동의하는 바야."

그들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부대원들이 진입하는 것과 동시에, 1이 그들 쪽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진압 방패에 부딪히는 바람에 궤적은 달라졌지만 위력은 그대로였다. 가장 선두에 선 대원 둘이 순식간에 폭탄으로 끌려가더니 그 자리에서 압축된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사방으로 혈액이 튀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9가 곰방대로 일련의 인발을 그려냈다. 생성된 인발은 낙엽처럼 바닥에 내려앉더니, 가공할 속도로 이동하며 부대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비명이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제자리에 서 있는 부대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실력 안 죽었네."

1은 슬쩍 웃고는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한 대로 지역 경찰로 위장한 재단 인원들이 출입을 막고 있었다. 전부 그에게 반대하는 자들일 것이었다.

"아래도 막혔습니다. 더 올라올 것 같은데요."

"조졌네."

1의 말대로 인원들은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게다가 아까 쓰러지지 않은 부대원들 역시 공격을 재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엄폐물에 몸을 숨겼다. 장식물 파편이 튀기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먼지가 일어났다. 1은 목표를 겨냥하지 않고 저편으로 다시 한 번 무기를 던졌다. 번쩍이는 스파크가 일더니 비명과 함께 네다섯 명의 적들이 하늘로 치솟았다가 각기 다른 곳에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둘 주위를 감도는 푸른색의 방진이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튕겨내고 있었다.

총알 하나가 방진을 뚫고 1의 귀 바로 옆에 박혔다. 1은 질겁하며 자세를 낮추었다. 9의 방어장은 최강이었다. 그의 실력은 심지어 뱀의 손 무리 중 그 누구보다도 강력했다. 변칙과 비변칙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런 방어장이 뚫렸다?

1의 시야에 왼쪽 팔을 지혈하고 계속 다라니를 적어내려가는 9의 모습이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1은 재빨리 9의 왼쪽으로 돌아가 상처를 확인했다. 총알이 팔을 관통한 것 같았다.

"대체 왜 말도 안 하시고…"

"말하면 뭐가 낫나?" 9가 고통에 얼굴을 찌푸렸다.

1은 재빨리 부서진 목재 하나를 집어들어 자신의 옷을 찢고는, 9의 팔에 대고 묶었다.

"이거 큰일인데."

걱정스러운 9의 말에 1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것들 반기적학적 장비를 했어. 게다가 연합 쪽 변칙적 무기도 사용하고 있고. 이거…"

7. 둘 모두의 의식 속에 그 숫자가 떠올랐다.

"…아주 우리한테 크나큰 시련을 안겨주는구만."

"7뿐만이 아닙니다. 저들이 사용하는 장비는 최신품입니다. 다른 부대는 이런 게 존재하는지도 모를 겁니다. 6도 이 일에 개입했습니다. 우리가 만나리란 걸 알고 있던 겁니다. 내통자가 있는 겁니다."

9는 재빨리 곰방대를 입에 물고는, 연기를 내뱉었다. 연기는 이내 불어나 테라스 전역을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고함과 총성이 저편에서 들려왔다. 9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이내 다시 한번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연기를 내뱉었다. 이번 연기는 붉은색이었다. 붉은 연기는 흰 연기를 파고 들어가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비명이 들렸다.

"당분간 시간은 벌 걸세." 9가 설명했다. "연락해서 데리러 올 사람이 필요한데."

"누가 포섭되고 포섭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6과 7은 철두철미한 사람들입니다. 분명히 손을 써뒀을 겁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여기 발이 묶인 셈이로군."

1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력감이 마음을 침식해 갔다. 지금 이렇게 버틸 수는 있지만 언젠가 무기는 끝이 난다. 저들의 반기적학 무기로 9의 도술 역시 무력화될 가능성이 컸다. 저 밖에 있던 경호원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수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아래에서 비명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9를 돌아보니 그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9의 공격도 아니다. 그렇다고 1이 한 일도 아니다. 그럼…

저편에서 소란이 벌어지더니 어지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대개 누구냐, 뒤편이다, 등의 말이었다. 분명히 공격자들이 알던 자가 아님은 확실했다. 숨이 끊어지는 소리와 고통에 차 지르는 비명이 이어지더니, 이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테라스 밖으로 추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잠시만요,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이 입에 손가락을 대고 몸을 노출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넌 뭐냐."

1은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기동특무부대 알파-1의 부대장이었다.

그리고 칼로 써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부대장이 옆으로 쓰러졌다.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1은 다시금 몸을 뒤로 빼고 피스톨을 장전한 뒤 엄폐물 밖으로 조준했다. 9도 덩달아 곰방대를 치켜들고 방진을 그려내었다.

안개가 걷혔다.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 남자였다. 남자는 검은 양복을 입고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었으며, 그의 오른손에는 검이 하나 들려 있었다. 동양 쪽에서 만들어졌을 법한 칼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1은 9가 저도 모르게 긴장하는 것을 느꼈다. 9의 눈가가 떨리고 있었다.

남자가 오토바이 헬멧을 벗어 땅바닥에 내던졌다. 남자는 동양계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창백한 얼굴에 짙은 검은색 홍채와 살짝 긴 검은색 머리는 그 자체로 봤을 때 전혀 이상한 점이 없으면서도 묘한 공포감을 느끼게 했다. 마치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사람처럼.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감독관이오, 파운데이션의?"

"그러는 당신은 누구요?" 1이 몸을 일으키며 반문했다.

"그대들을 데려오기 위해 왔소."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9를 일으켰다. 9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가 잠시 9의 상처를 눈여겨보더니, 천을 끄르고 부목을 바닥에 떨궜다.

"지금 뭐하는—"

그러나 1의 말은 끊기고 말았다. 남자가 자신의 검에 손바닥을 긁더니, 그곳에서 나온 피로 9의 팔을 문질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팔은 급속도로 낫기 시작했다. 1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다가 불쑥 내뱉었다.

"당신…사르킥교도인가?"

남자가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잠시 머쓱해진 1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내 말은 낼캐교도—"

"난 아니오. 내 스승님들은 그랬지만."

9의 팔에서 손을 떼어낸 남자가 1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순간, 9가 중심을 잃고 남자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자신의 몸을 주체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출혈이 심했군. 잠시 쉬어야 할 거요."

1은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남자가 1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등을 돌려 반대편 건물을 바라보았다. 1은 무어라 항의를 하려고 하다가 저만치서 큰 진동이 울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자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고라니가 뛰어오고 있었다.

"…뭐야…?"

건물 한층 크기 정도가 되어 보이는 그 고라니는 금세 그들이 서 있는 테라스로 뛰어들었다. 굉음을 내며 착지한 고라니는 이내 그들을 향해 콧김을 내뿜었다. 그 막대한 기세에 살짝 기가 죽은 1은 조심스레 뒤로 물러섰다.

잠시 뒤 고라니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래로 흘러내리더니 근육과 근육이 매듭지어 어떤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곧장 등뼈였던 부분이 직립하더니 꿈틀거리며 여러 개로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서진 뼛조각들은 다시 뭉쳐가는 근육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장이 작게 조각나더니 재조립되었다. 마침내 한 명의 여인으로 재탄생할 때까지.

여인은 처음에 나체였지만, 곧장 피부가 검게 물들더니 부풀고, 마치 의복과 같은 형태를 하기 시작했다. 여자의 이마에는 푸른 색감의 눈이 하나 더 존재했다. 그 눈이 자신을 쳐다보자, 1은 조금 소름이 돋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여자가 빙긋 웃더니 그들에게로 걸어왔다.

"반가워요."

"…이 여자가 지금 뭐라는 거요?"

"반갑다는 거요." 남자가 나직하게 대꾸하고는 여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왔소?"

"전체가 다. 다 당신 덕이야, 바누야트. 그들이 움직일 줄은 몰랐어."

"그들 역시 이 사건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터이니."

"…당신들 뭐라는 겁니까?"

남자가 다시 1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아뒤툼어요." 남자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1을 응시했다. "우릴 따라오시오. 안전한 곳을 압니다."

"잠시만, 난 아직 당신들을 신뢰할 수 없소." 1이 항변했다. "난 심지어 당신들 이름조차 모른단 말이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곁눈질했다.

"이 여자의 이름은 나르탈리야Narrtallia요. 카르시스트 나르탈리야."

여자가 살짝 눈인사를 했다. 1은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당신은?"

남자가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첸. 라자루스 바누야트 첸Lazarus Vanuuyart Chen. 그게 내 이름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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