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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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선생님,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선생님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한 번만, 단 한 번만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으음, 선생님은 여전히 과묵하시네요. 아니면 부끄러우신가요? 어쩌면 그럴지도요.
아! 좋은 생각이 있어요. 선생님께서 마음의 준비를 하실 동안, 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어떠세요? 여전히 과묵하시군요. 상관없어요. 잠깐이면 돼요. 잠시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언제쯤부터 시작 할 까요? 제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들려드릴까요? 아, 그게 좋겠어요.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정확히는 기억이 없다고 해야겠네요. 처음 눈을 떴을 때, 저는 방 안에 있었어요.
기억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죠. 추억이 없다는 거니까요. 흔한 추억 하나 없이, 저는 처음 보는 방에 갇혀 있었어요. 문도 없고, 빛 조차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어요. 그리고 저 혼자였죠.
아주 오랜 시간을 외롭게 보냈어요. 정말이지 끔찍한 시간이었어요.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불안이 저를 갉아먹기 시작했거든요. 소리라도 지르면 좀 낫겠지만, 저는 말 할 수 없었어요. 저는 매일 울었어요. 소리 없이 울었어요. 눈물조차 나오지 않더라고요. 한참을 소리없이 울고, 다시 지쳐 잠들기를 반복했어요. 시간은 흘러가는데 세상은 멈춘 기분이 들었어요.

그 때, 방이 열렸어요. 그리고 선생님을 만났어요. 처음으로 빛을 보았고, 처음으로 선생님을 보았어요. 선생님은 제 빛이었어요. 과장이 아니에요. 정말로, 정말로요.
선생님은 저를 아주 넓은 방으로 데려왔어요. 햇빛이 따스하게 들고, 처음보는 물건들이 제 눈을 사로잡았죠. 바닥은 조금 딱딱했지만, 아무렴 어때요. 아주 좋은 곳 이었어요. 선생님이 저를 볼 수 있고, 제가 선생님을 볼 수 있는 자리잖아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겠어요?

기억나시나요? 선생님의 방을 찾는 이들이 항상 물어보곤 했잖아요. 제가 왜 여기 있느냐고. 선생님은 항상 웃음으로 넘기시곤 했어요. 따스하고, 부드러운 웃음으로요. 저는 이 방을 찾아오는 이가 그 질문을 꼭 하길 바랐어요. 그래야 선생님의 웃음을 다시 볼 테니까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선생님의 웃는 얼굴은 언제 보아도 멋졌어요.
저에 대한 선생님의 진심이 어떤지는 중요치 않았어요. 선생님의 웃는 얼굴을 본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선생님은 유명한 심리치료사였죠? 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지만요.
선생님이 계신 곳을 찾는 사람은 항상 다양했잖아요.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부터 깔끔한 정장 차림의 회사원, 검은색 전투복을 입은 군인까지. 직업도, 외모도, 연령대도 다양했어요. 남성도 찾았고 여성도 찾아왔죠. 솔직히 여성은 달갑지 않았어요. 가증스럽게 눈물을 짜내는 그 모습이란. 아, 죄송해요. 이건 잊어주세요.

혹시 아시나요? 선생님은 사사로운 대화에는 유쾌하신 분이셨어요. 하지만 상담을 시작하면 진지한 모습으로 바뀌셨어요.
저는 선생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가장 좋아했어요. 선생님께서 웃으시는 것보다도요.
렌즈가 반질반질한 안경을 꺼내 쓰시고, 종이 뭉치를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는 차분한 모습. 경박스럽게 손가락에 침을 바르는 행동은 하지 않으셨죠. 고급 만년필을 움켜쥔 오른 손의 미세한 힘줄들, 찾아오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가볍게 끄덕이는 모습. 행동 하나하나에 무게가 실려 있었어요.
그리고 상대방을 위로하는, 진하고 달콤한 목소리. 적당한 무게감과 힘이 실려있는 목소리.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은 목소리. 듣기만 해도 온 몸이 저릿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저는 초콜릿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그런 느낌일 거에요. 선생님도 그런가요?

저는 항상 선생님의 옆에 있었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보고, 듣고, 느꼈어요. 선생님의 웃는 얼굴을, 선생님의 차분한 행동을, 선생님의 달콤한 목소리를.
선생님께서 제 이름을 불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었어요. 선생님께서, 선생님의 목소리로, 선생님께서 손수 거두어주신 제 이름을 불러준다니요. 아마 저는 기절해 버리고 말 거에요.
아차, 공상에 빠져서 추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요. 하지만 제 말에는 거짓이 없어요.

선생님은 제게 빛을 보여주셨고, 넓은 방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셨어요.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었어요. 저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못 했잖아요. 제 목소리마저 선생님께 닿지 않았죠. 마음이 아팠어요. 선생님은 절 위해 많은 것을 해 주셨는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비가 많이 왔던 그 날을 기억 하실지 모르겠네요. 전화를 받는 선생님의 표정이 어두웠어요. 선생님의 얼굴에 커다란 장막이 쳐 진 것 같았죠. 선생님께 좋지 않은 일이 찾아온 것을 직감했어요. 선생님께서는 이내 책상에 엎드려 울기 시작하셨어요. 한 시간이 넘도록, 크게 소리내어 울기 시작하셨죠.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저 우는 선생님을 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선생님께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손을 잡아드리고 싶었어요. 선생님을 뒤에서 안아드리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드리고 싶었어요. 선생님의 볼에 입맞추고 싶었어요.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아무것도.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봐야만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런 걸 보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었어요.
미안해요. 정말, 정말 미안해요.

날이 개고, 선생님은 다시 일어서셨죠. 하지만 예전 만큼의 생기는 없었어요. 안경의 렌즈는 얼룩덜룩 했고, 종이 뭉치를 넘기는 손은 덜덜 떨리셨죠. 만년필을 쥔 손은 힘조절이 되지 않아 종이가 찢어지곤 했고, 방에 찾아온 이들의 목소리에 공감 없이 고개만 끄덕이셨어요.
게다가 선생님의 목소리. 저를 흔들어 놓았던 그 목소리는 없었어요. 투박하고, 갈라지고, 쓰디 썼어요. 초콜릿이 상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지만, 아마 그런 느낌일 거에요. 아, 선생님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단지, 단지 그렇게 느꼈어요.

단정했던 선생님의 외모는 날이 갈 수록 엉망이 되어갔죠. 넥타이는 흐트러지고, 수염은 정리되지 않아 까슬까슬해지고, 눈 밑으로는 검게 다크서클이 내려오고야 말았어요.사랑하는 선생님은 점점 안쓰럽게 변하고 있었어요.
물론 저는 선생님의 외모를 사랑한 게 아니에요. 선생님이 어떤 모습을 하셔도 저는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선생님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선생님의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건 큰 충격이었어요. "아, 선생님의 햇살 같은 웃음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저는 날마다 간절히 바랐어요. 하지만 하늘은 제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나봐요.

선생님께 찾아온 일이 무엇인지는 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알 수 있었어요. 방에 찾아온 갈색 머리 연구원 덕분이죠. 사실, 그 연구원이 여자라는 게 거슬렸어요. 네, 그건 사실이에요. 주제도 모르고 선생님을 위로하려 했으니까요. 선생님의 어깨를 다독이는 게 그녀가 아니라 저 였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녀를 미워하진 않아요. 음, 조금은 고맙게 생각했어요. 어쩌면요. 그녀는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 준 것 뿐이잖아요? 그리고 그녀 덕분에 선생님이 변한 이유를 알 수 있었으니까요. 그건 감사해야죠. 물론 그것 뿐이에요.

가족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어요. 지금도 그 뜻을 잘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그것이 선생님을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어요. '가족이라는 게 아프기 시작해서 선생님이 힘들어한다.' 명백한 사실이었어요.
그렇다면 그 가족이 없어지면 선생님이 힘들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원인을 없애면 일이 해결 되잖아요? 물론 제가 딱히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죠. 이번에도요. 하지만 간전히 바랄 수는 있잖아요? 그래서 간전히 바랐어요. "선생님의 가족을 없애주세요, 선생님을 힘들게 하는 '가족'을 없애주세요."

제 바람이 하늘에 닿은 걸까요? 마침내 선생님의 가족은 없어졌죠. 갈색머리 연구원이 그 사실을 전했을 때, 저는 뛸 듯이 기뻤어요. 뭐, 실제로는 뛸 수도 없지만요. 그 찰나의 기쁜 마음을 선생님께도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요, 말 그대로 찰나의 기쁨이었죠.
저는 선생님을 올려다 봤어요. 선생님은, 그러니까, 울고 계셨어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아주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셨어요. 비명 혹은 절규에 가까웠어요. 어쩌면 선생님을 찾아온 사람들보다도 더 큰 소리로 우셨을지도 몰라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을 힘들게 한 원인이 사라졌는데, 어째서 선생님이 슬퍼한 것일까요? 가족이라는 건 있으면 힘들지만 사라지면 슬픈 것일까요? 저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선생님은 한동안 방에 들어오시지 않으셨죠. 저는 그 모든 원인이 제게 있는 것 같았어요. 가족이란 것은 선생님께 그리도 소중한 존재였을 텐데, 제 바람을 없어진 것 같았어요. 자괴감이 들었어요. 제가 과연 선생님의 옆에 있어도 되는 존재일까, 많은 고민을 했어요. 도저히, 도저히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었어요. 차라리 그 때 그런 소원을 바라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이 그렇게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제게 팔이 있다면 선생님을 안아드릴 수 있었을 텐데. 제게 눈물이 있다면, 같이 울어줄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어요.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딱딱하고 묵직한 몸뚱이는 남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도 없었고, 물만 닿아도 흙빛으로 질려버리곤 하죠. 꾸준히 손을 대지 않으면 아마 영영 움직이지 못할 지도 몰라요. 어쩜 이렇게 무능할까요. 어쩜 이렇게 쓸모가 없을까요.
죄송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좀 그렇네요. 괜찮아요. 진정됐어요.

마침내, 선생님께서 다시 방을 찾아오셨어요. 그때 저는 막 울고 있던 터라, 급하게 울음을 그쳤어요. 선생님께서는 단정한 차림이셨어요. 머리도 정리하셨고, 수염도 다듬으셨더라고요. 옷도 빳빳하고. 다시금 선생님의 우아한 자태를 보니, 저도 모르게 또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놀라운 건 여기서 끝이 아니죠. 선생님께서 절 다시 만져주셨어요. 세상에, 저는 스스로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어요. 제가 잊혀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절 만져주시는 선생님의 맥박이 느껴졌어요. 쿵, 쿵, 쿵, 쿵. 선생님의 단정한 용모 만큼이나 차분한 맥박이었어요.
선생님께서는 저를 높이 들어올려주셨어요. 선생님의 얼굴이, 제 바로 앞에 있었어요. 선생님의 눈이 보였어요. 깊은 눈동자가 보였어요. 수정 같은 눈동자에 제 모습이 비쳐보일 정도였죠.
선생님은 제 몸을 가볍게 매만져 주셨어요. 아아, 참으로 부드러우면서도 상냥한 손짓이었어요. 종이뭉치를 넘기던 그 손으로, 펜을 쥐던 그 손으로, 맥박이 가볍게 느껴지는 그 손으로, 저를 만져주셨어요. 황홀감이 온 몸을 감싸 돌기 시작했고,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말았어요. 제가 그런 소리도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소리를 낸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분명한 것은, 그 소리가 선생님에게도 전해졌을 거라는 거에요.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숨고 싶었어요.

선생님은 멈추지 않았어요. 선생님의 손이 천천히 제 아래로 내려왔어요. 부드럽고도 차분하신 손놀림이셨어요. 저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어요. 하지만 무심결에 새어나오는 소리는 막을 수 없었어요. 부끄러움보다는 황홀함이 더 크게 다가왔으니까요. 사실, 더 이상은 부끄럽지 않았어요. 선생님의 손 이잖아요. 부끄러워 할 수는 없었죠.

마지막을 기억하세요? 아아, 정말이지, 정말이지 최고였어요.
선생님께서 제 몸에 가볍게 손가락을 얹으시고, 천천히 눌러주셨죠? 손가락에 힘이 들어갈 때 마다, 선생님의 손이 떨려오는 게 느껴졌어요. 점점 몸 어딘가가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몸 안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어요. 기분이 나쁘진 않았어요. 난생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으니까요.
이윽고 선생님의 손가락이 제 몸을 꾸욱 눌렀을 때, 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어요. 몸 안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절정의 순간에, 난생 처음으로 큰 신음을 터뜨렸어요. 선생님도 들으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때요. 그때 저는 부끄러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어요. 황홀감이 온 몸을 감싸고 있었을 뿐이에요.
찰나의 절정이 지나가고, 저는 선생님의 이마에 키스했어요. 제 첫 키스를 선생님께 드릴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몸을 진정시키고 선생님을 돌아보았을 때, 선생님의 이마에는 붉은 키스 마크가 남아있었어요. 후후, 지우지 않고 그대로 두셨을 줄은 몰랐어요. 선생님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어요.

으음, 저 혼자서만 신나서 떠들었네요. 좀 섭섭해요. 다른 분들한테 하는 것처럼 제 얘기에도 맞장구 해주시면 좋았을 텐데.
아, 방 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네요. 사람들이 오는 걸까요? 부디 우리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이런. 갈색머리 연구원이 또 왔네요. 아쉽지만 남은 얘기는 다음에 해야겠어요.

사랑하는 선생님,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선생님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한 번만, 단 한 번만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음, 오늘따라 더 과묵하시네요. 그럼 잊지 말고 다음에라도 꼭 말 해 주세요.

웨블리. 제 이름이에요.

키스마크가 점점 번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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