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모코로의 여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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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고향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인데, 남쪽에 면한 바다에는 물살이 강한 곳이 많아요. 옛날에는 배 몇 척을 가지고 물살이 센 길목을 틀어막고 있으면 외적의 배가 절대 뚫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 말로는, 그렇게 물살이 강한 이유가 오래 전에 그곳 바다에 걸린 주술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 어떤 다른 목적도 없이 오직 흐르는 물을 광포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걸어놓은 주술이었지만, 워낙 강력한 힘이다 보니 그 여파가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우리 조상들은 수백년 전부터 그 힘을 끌어다 사용했어요.

하지만 기원이 되는 주술이 너무 강력했기에, 우리 조상들은 어디까지나 부가 효과에 불과했던 그 힘도 제대로 제어하거나 조작할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오히려 그 힘에 잠식당해버렸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바다의 힘을 간접적으로만 이용하기로 했고, 지금은 남쪽 바다에 걸린 주술의 힘을 아주 간접적으로 이용하는 몇몇 의식들밖에 전해지는 것이 없어요.

지금까지 내려오는 의식들 중에 이런 게 있어요. 남쪽 바다의 수평선 아래로 반쯤 구름에 감긴 해가 사라지는 그 순간, 비바람이 귀신들린 것처럼 몰아치는 장소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만 그 용도도, 정체도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을 바다를 향해 내던지면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잠시 멈췄다가 굉음을 내며 내던진 물건을 삼킨다고 해요. 그러고 나면 내던진 사람은 그 물건에 대한 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게 되고, 바다가 삼킨 그 물건은 언젠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가장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된대요."

니카는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슬픈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필요한 물건이 필요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요?"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어떤 것을 잊어버리는 것 말야. 잊어버리면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무지는 해결되지 않아."

"하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은 물건이라면요?"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어떤 물건이 모르는 게 나은 물건인지, 몰라선 안 되는 물건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방법 밖에 없어."

"그러네요."

나는 잠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니카가 내 머리맡에 앉아 아주 오래된 것이 분명한 어떤 곡조를 흥얼거리는 동안 나는 눈을 감고 지금도 강력한 힘이 감돌고 있을 남해의 어딘가를 그려보았다.

"니카."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응?"

"우리 조상님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단다.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무지를 두려워해. 하지만 때로는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고, 인간은 자신이 무서워하는 지식을 결코 잊을 수 없어."

"당신은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을 알고 있나요?"

그러자 니카는 그녀 목에 걸린 열쇠를 꼭 쥐며,

"그래."

라고 대답했다.

"잊고 싶어요?"

"그래. 하지만 절대로 잊혀질 수 없어."


일련의 불행한 사건들이 발생한 결과 나는 갈 곳 없는 꼬맹이 휘영을 거두게 되었고, 더 이상 추리소설 작가 겸 프리랜서 기적사를 자칭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을 때 쯤 나는 한숨을 한 번 크게 내쉰 다음 10년 만에 방랑자의 도서관을 다시 찾아갔다. 뱀의 손이 기적사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배움의 기회, 일거리, 피난처 등등 여러가지가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능구렁이 손은 내가 알았던 다른 손들과는 달리 퍽 급진적인 조직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이념이 활동에 백 퍼센트 반영된 결과 배움의 기회나 일거리는 넘쳐났지만 피난처는 1제곱미터도 없었다.

더 유감스러웠던 점은 그들에게 결여된 것이 정치적 중립성 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능구렁이 손의 맹원 수는 아주 적었고, 내가 들어왔을 때는 부주석 자리가 공석이기까지 했다. 나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맹원들 사이에서 일명 '경력있는 신입'이 부주석 직책을 맡아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서, 결국 대학 중퇴자에 지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이 능구렁이 손의 2인자 자리에 오르는 참사가 벌어졌다.

물론 나는 끈질기게 거절했지만, 나와 휘영에게는 그렇지 않아도 긴장감 넘치는 한 해가 기다리고 있었다. 심신이 지친 나는 대장과 담판을 지었고 그 결과 몇 주 동안의 휴가를 얻을 수 있었다. 능구렁이 손의 부주석 직책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이었다. 누가 봐도 손해보는 장사라는 것이 명백했지만 그 당시 우리 둘에게는 그 정도로 휴식이 절실했다. 일단 미래를 팔아서 휴가를 사고 나니 정말 오랜만에 고향 생각이 났지만 한반도에는 우리가 완전히 긴장을 풀고 지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다른 나라, 되도록이면 GOC나 다른 녀석들이 결코 예상할 수 없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는 것이 분명했고, 그래서 일부러 차원문을 엉성하게 설계하는 방식으로 아예 목적지를 무작위로 고르기로 결정했다.

나름 괜찮은 수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구의 절반은 물이라는 것을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이 패착이었다. 다행히 해안이 멀지 않은 곳에 떨어진 덕분에 떠밀려온 고래 시체같은 몰골로라도 뭍에 닿을 수는 있었지만,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알 방도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디 말을 걸어 볼 사람이라도 없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나라는 사람은 알량한 기적술 능력 외에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래도 나름 내가 자부심을 느끼는 장기 중 하나는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를 한 번 흘끗 본 것 만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아주 디테일한 부분은 휘영의 도움 없이는 알아차릴 수 없지만, 이 기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 경험과 재능에 기반하고 있다. 이 기술은 특히 첫인상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대할 때 아주 유익한데, 예를 들어 대장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렇다.

그런데 지금 우리 눈 앞에 나타난 사람한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열쇠가 달려 있는 목걸이를 찬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만화경 속의 풍경이었다. 온갖 번쩍이는 것이 그녀 주위에 있었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진짜가 아니고, 단지 화려한 환영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형체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일반인은 아닐 거라 생각했고, 어쩌면 다른 나라의 도서관에서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국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어느나라 말을 해야 알아들을 지 아는 것도 아니었다.

고맙게도, 내 또다른 반쪽은 누구든 모르는 사람이 우리 코앞까지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는 대신에 일단 먼저 부딪혀 보는 쪽을 택하는 사람이었다. 휘영은 그 여자한테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세요?"

방금 간신히 익사의 위기를 모면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더 이상 상쾌할 수 없는 말투.

"반가워,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리고 더욱 상쾌한 응수. 세상 모르는 곳에 떨어져서 처음 만난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이런 거라면 우리는 우리 삶의 반전이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인해 나와 휘영은 잠시 혼란에 빠져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녀가 우리에게 한국어로 대답했다는 것에 놀랄 심적 여유조차 없었다. 나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의 원인 제공자를 바라보았다.

그 열쇠 목걸이를 한 여자는,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부르긴 했지만, 그리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그 호칭을 입에 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호칭이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내 눈은 그녀 목에 걸린 화려한 장식의 열쇠 외에 다른 특징을 찾아내지 못했다. 키는 위화감이 들 만큼 크지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작지도 않았고, 피부색은 적당히 희었고, 태도는 친절했고, 그 밖에 사람의 눈길을 끄는 특별함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육신의 눈 말고도 다른 눈이 있다.

내가 기적사로서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준 그 눈 덕분에 나는 사람 성가시게 하는 아나키스트인 능구렁이 손의 우두머리가 수백년 묵은 여우 요괴라는 것을, 내가 내 조수 겸 양녀로 삼은 애가 하늘에서 떨어진 달의 파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그 눈은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여자는 지금까지 네가 보았던 그 무엇과도 다른 존재이며, 너는 지금 환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니카라고 했다. 그 밖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니카는 아무 조건 없이 나와 휘영이 그녀의 집에서 머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집이라기 보다는 신전 같은 곳이었다. 그녀는 이 신전에서 모시는 신인가, 아니면, 그게 누가 되었든 간에, 이 신전의 주인을 모시는 신관인가? 그녀가 정말 신이나 신관이라면 둘 중 하나였다. 아주 방임주의적인 신이거나, 아주 방임주의적인 신의 아주 충실한 신관이거나.

그녀는 "의식"이라던가, "숭배"라던가, 하다못해 "관리"라는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니카는 아주 드물게 무언가를 먹을 때는 제외하고, 늘 해안선을 따라 걷거나 집 뒤편의 숲에서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그 밖의 다른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다른 일'이란, 엄연히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인 나와 휘영의 기분이나 기타 등등에 최소한의 관심이라도 보이는 것 또한 포함된다. 덕분에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 자고 먹고 씻었음에도 불구하고 천대받는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그게 싫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와 휘영은 휴가의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니카의 신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도피처로는 최적의 장소였다. 나도 어딘지 모르는 장소를 내 추적자가 찾아낼 수는 없다. 날씨는 항상 화창하고, 바람은 적당하고, 하늘은 맑고, 이곳이 환상의 세계라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이 편의주의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기후였다. 이곳의 날씨에 비하면 우리 세계의 날씨는 심심하면 지나가는 사람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불한당 같았으니까.

때로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더 안으로 들어가는 날도 있었다. 나와 휘영이 묵는 방과 연결되어 있는 중앙 현관 뒷편에 대리석이 깔린 복도가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신전의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면 더 이상 자연광이 닿지 않는 부분에 화로와 거대한 문이 나온다. 니카는 깊은 밤이 되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더 이상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그 다음날 새벽에 이미 바깥에 나와 있었다. 나와 휘영은 그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고,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둘 다 어떤 것에 관심이 생기면 관련자의 허락을 받는 것보다 관심사의 충족을 우선시하는 성향의 소유자이기에 니카가 산책 나간 틈을 타 그 문을 몰래 열어보기로 했다.

어느 날 아침에 휘영과 나는 각자 손전등을 하나씩 들고 예의 문 앞까지 다가갔다. 화로는 24시간 활활 타오르고 있었지만 주변을 밝힐 만큼 밝은 빛을 내지는 않았고, 또 문 안쪽에도 광원이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문 앞에 다가가 섰을 때, 갑자기 화로의 불이 더 밝게 타오르며 어두침침하던 주변을 더 선명하게 비추었다. 그러자 그 전에는 어둠 속에 숨겨져 있었던, 찬란한 벽장식이 드러났다. 벽에 그려진 아주 복잡한 문양들이 갑자기 드러나자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약간 몸을 움츠리게 되었다.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신비한 힘이 깃든 것임에 분명한 보석과 금속들로 이루어진 장식이 형형색색 빛을 발했고, 그 빛은 알게모르게 내가 처음 니카를 보았을 때 그녀의 주변에서 번쩍이고 있던 환영들과 닮아 있었다. 그것은 아름다웠지만 미지의 존재였고, 그래서 위협의 의미가 없더라도 알 수 없는 경외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화로의 불이 갑자기 사그라들자, 화려한 벽장식과 그 신비한 반사광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침침한 그림자의 장막 속으로 사라졌고, 우리는 약간이나마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와 휘영은 약간 겁을 먹긴 했지만 처음의 모험심을 조금이나마 유지하고 있었기에, 벽과 달리 수수한 흰색 문을 열기 위해 문에 손을 대었다. 약간 실망스럽게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문고리를 찾아보았지만 그런 것은 이 문을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 다음으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열쇠구멍이었다. 니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 목에 달려 있던 커다란 열쇠가 생각난 탓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열쇠도 벽을 장식하는데 쓰인 금속과 같은 재질이었던 것 같다. 니카는 언제나 그 열쇠를 목에 걸어 몸에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열쇠구멍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유감스러운 난제를 해결한 것은 이번에도 내 더 나은 반쪽 휘영이었다. 휘영은 참 유감스럽다는 듯 팔짱을 끼는 나를 참 유감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문에 등을 기댔고, 문이 열리지 않았던 것은 그저 우리가 더 세게 밀지 않았을 뿐이라는 놀라운 해답을 제시하며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유쾌한 감정을 느끼며 휘영을 일으키려고 몸을 숙였으나, 휘영이 갑자기 격렬한 동작으로 일어나 빠르게 문 바깥으로 뛰쳐나온 것을 보자 그 감정은 금방 사라졌다.

휘영은 놀란 눈을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 순간,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열린 문의 내부를 가리켰다. 나는 그녀의 손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달은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휘영은 빛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을 무서워한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공간이었다.

나는 손전등을 켜 문 안의 어둠을 비추어 보았다. 손전등의 빛은 마치 어둠에 의해 잡아먹힌 듯 사라져 버렸다.

첨언하자면, 그 날의 모험은 그걸로 끝이었다. 니카는 비틀거리며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해변가로 나와 풀썩 주저앉은 우리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지나가고 내가 팔아먹은 미래가 슬슬 떠오르기 시작할 즈음에, 나는 니카에게 말을 걸어 보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결정하게 된 원인은 일단 권태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슬슬 돌아가야 할 날이 다가와서, 어떻게 해야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대장이 정해준 기한을 어기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신전 앞의 평평한 바위를 골라 앉았다. 잠시 후 여느때처럼 니카가 산책하러 나왔을 때 나는 그녀를 불렀다.

"니카!"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내 옆 자리를 가리켰다.

"얘기 좀 해요. 괜찮죠?"

니카는 지난 몇 주간의 무관심을 생각하면 퍽 빠르게 대화에 응했다. 그녀가 내 옆에 앉자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말했다.

"그동안 묵게 해줘서 고마워요.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요?"

"보답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걸."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을 묵게 해도 되는 곳인가요? 물론 맘에 안 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쉴 곳 없는 사람에게 쉴 곳을 제공하는 건 모든 사람의 의무잖아."

"아니, 그러니까, 이 땅의 주인이라던가, 뭐 그런 사람한테 허락을 받지도 않아도 되나요?"

"이곳의 주인은 나야. 저기 있는 건 내 집이고, 이 모든 건 내 소유물이지.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이니 그런 걱정을 해 줄 필요는 없단다. 물론 아주 사려 깊은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러면 여기는 대체 어디죠?"

"여기는……" 니카의 눈이 반짝였다.

"여기는 세계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세계에 포함되지 않는 곳, 모두가 꿈꾸지만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 곳, 인간의 가장 깊숙한 염원의 파편이자 생명의 씨앗이 잠든 곳이지."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다고요? 하지만 우리는 여기 있잖아요."

"물론 너는 이곳의 해변가 바위 위에 앉아 있지. 하지만 잘 생각해 봐. 너가 앉아 있는 그것은 정말 바위일까?"

나는 바위를 내려다 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건 순도 백 퍼센트의 바위라는 결론 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대꾸하려고 고개를 들자 니카 주변에 감돌고 있던 희미한 신기루가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니카는 그런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곳의 모든 것은 가장 진실된 환영이자 가장 거짓된 현실이야. 때로는 바위처럼 변함없다가도 파도처럼 부질없어지는……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전부 하찮은 비유에 불과할 뿐, 그 어떤 언어로도 이곳을 제대로 설명할 방법은 없을 테지."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있었는데 깜빡 잊고 있었네요.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그게 무슨 소리야. 들어왔잖아. 어떻게든 이 곳에 들어왔다면 들어온 그대로 나가면 돼. 그저 방향을 달리 하면 될 뿐이지. 그 정도의 응용을 못 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으으음, 그게 말이죠……"

나는 되도록이면 내가 차원문을 '잘못 설계'했고 그 여파로 이리 오게 되었다는 얘기까지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니카의 질문 방식은 집요할 뿐만 아니라 매우 교묘했고, 몇 주 동안 입을 안 열고 지낸 사람 답지 않게 능숙한 심문에 넘어간 나는 그만 여우 요괴의 노예로 목숨을 저당잡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비롯해서 관련된 모든 것들을 털어놓아 버렸고, 니카는 내 이야기의 중간쯤부터 피식거리더니 이야기를 끝마칠 적에는 무서울 정도의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 들었더라면 기겁하기 딱 좋은 웃음소리였지만 이 환상의 땅에서 니카의 웃음소리는 신비로우면서도 명랑했고 듣는 사람을 마법처럼 유쾌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원하는 곳, 하지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 니카는 잠시 동안 계속 낄낄거리더니, 아주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내가 이 곳의 주인이 되고 나서 첫 번째 방문자가 실수로 들어온 사람이라고! 수천 해가 지났건만 운명의 장난기는 그침이 없구나."

"예, 마음껏 웃으십쇼. 어쨌든 그래서 나가는 법을 좀 알려주셔야겠는데요."

니카는 내게 이곳에서 현실 세계로 향하는 차원문을 설계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약간 복잡했고, 우리는 자리를 옮겨 신전의 작은 골방에 있는 복잡한 도면과 서적을 검토하며 마지막 날의 대부분을 보냈다. 나는 그 방에 있던 자료들에 쓰인 지독하게 오래된 문자들을 도저히 해독할 수 없었다. 아까 수천 해 운운했던 것을 생각해 봤을 때, 그녀는 보기와는 달리 굉장히 나이가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알 게 뭐람. 이곳의 모든 것은 신기루인 걸.

아무튼 내가 그녀가 보여주는 자료를 전혀 해독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니카는 매우 뛰어난 선생이었고, 나는 매우 뛰어나다고 하긴 뭣하지만 그래도 선생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제자는 아니었으므로 그녀가 가르쳐주는 내용을 나는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중간에 깨어난 휘영이 니카의 방에 들어왔지만 온갖 기괴한 주문들을 주워섬기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소금을 피하는 민달팽이처럼 천천히, 그러나 필사적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아침, 나는 니카의 신전 앞에서 성공적으로 방랑자의 도서관으로 돌아가는 차원문을 만들었고, 나와 휘영은 짐을 챙겨 그 위에 올라탔다.

"만약 원한다면, 나중에 다시 와도 좋아." 니카는 돌아가는 우리를 배웅하며 말했다. "이곳에 올 때는 나갈 때와 같은 방식으로 하면 돼. 나는 너희를 기다리지는 않겠지만, 언제나 여기 있을 거야."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현실 세계의 공기가 내 피부에 닿는 순간 갑자기 한때 의식하지 못했던 역겨움이 나를 잠식했다. 나는 휘영에게 뭐라 경고의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먹은 것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그 신기루의 땅에 속박된 자가 되었다.


확실히 우리 둘에게 있어 몇 주간의 휴가는 아주 유익했다. 우리는 푹 쉬었을 뿐 아니라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더 자라서' 돌아왔다. 정확히 뭐가 자란 건지는 나도 휘영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처음 야매 차원문 위에 올라탔을 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분명 달랐다.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물론 대장이었다. 대장은 마치 부주석이란 주석의 노예를 말하는 고급진 표현이 아니냐는 듯이 나를 무자비하게 부려먹기 시작했고, 자기가 시킨 일을 내가 모조리 해치우자 내가 무슨 약이라도 한 건지 궁금해했다. 그 다음에는 대장과 계속 붙어다니는 까마귀 여자 모리안이 나한테 관심을 보였고, 자기 일거리를 나한테 떠맡기려다 대장에게 들켜 먼지나게 맞는 일이 있었다.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는 내 눈앞을 아른거리는 니카의 환영에 시선을 빼앗겨 있었다.

그 누구도 갈 수 없는 금단의 땅에 들어간 것이 내 정신에 영향을 남긴 게 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그곳의 정체도, 존재 이유도,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환상의 땅은 계속해서 내 앞에 환영이 되어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나는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환영에는 익숙하다. 여러번 당해 봤고, 어떻게 하면 떨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짓을 해도 니카와 그녀의 섬, 그리고 그녀가 사는 집, 그 아래 깊숙한 곳의 화로와 벽장식과 어둠을 감추고 있는 문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잠들었을 때에도 계속해서 니카의 환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나는 꿈 속에서 언제나 니카의 집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니카는 그곳에 없었지만 언제나 그녀의 목에 걸려있던 열쇠가 내 발 앞에 있었다. 그것은 황금빛으로 번쩍였고, 몸을 숙여 집어들었을 때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이 내 고통을 모두 사라지게 했다. 나는 그 열쇠를 내 목에 걸었다. 그러자 영겁의 권능이 나를 감싸며, 내가 오랫동안 떠나왔던 내 진정한 기원으로 나를 이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 늘 내가 잠에서 깨는 순간이었다.

피해는 괴멸적이었다. 처음 며칠 간의 기괴한 내 업무 처리량은 어디까지나 정신의 절반이 환상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에게 종종 보이는 징후였다. 환상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현실에 더더욱 골몰하려고 애쓴 결과였던 것이다. 물론 그런 과도한 운동량이 육신에 유익할 리 없다. 나는 며칠 뒤 몸져 누웠고, 육신이 무너지자 정신은 점점 더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서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간신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에 의해 무생물마냥 방랑자의 도서관에서 꺼내져 작고 빛나는, 나와 정신적으로 아주 가까운 어떤 존재에 의해 니카의 집 앞으로 옮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휘영은 나처럼 이상 징후를 겪지 않았지만, 그 아이와 나의 정신은 서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분명 그녀에게도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니카의 신전 방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내 옆에 지칠 대로 지친 휘영이 엎어져 있었다.

그렇게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나는 내가 떠나갔던 그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왠지 모를 씁쓸한 패배감과 함께, 나는 나를 그토록 괴롭히던 환영과 꿈이 이곳으로 돌아온 즉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환상의 땅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 환상 속의 여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니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녀 목에는 여전히 열쇠가 걸려 있었지만,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휘영에게 들었어.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구나." 여전히 명랑하고 동시에 고귀한, 나와는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옛 신화의 여신 같은 말투로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환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어째서죠?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휘영에게는요?"

"마지막 질문에는 확실히 대답할 수 있어. 너와 함께 온 그 아이는 아무 탈 없을 거야. 서로를 정말 아끼는 것 같네." 니카는 그렇게 말하고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휘영에게는 이미 얘기했어. 네게도 말해주어야겠지."

"무엇을요?"

"이 곳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네가 영원히 떠나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곳은 환상의 땅이기 때문에 현실의 존재가 쉽게 발을 디딜 수 없어. 그리고 그렇게 오더라도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지. 예민한 정신은 한번 완벽한 환상의 존재를 알게 되면 거기에 끌려가게 돼. 육신은 사람이 어머니 자궁에서 나왔을 때부터 늘 그래왔듯이 깃털처럼 흩날리는 정신을 붙잡고, 끌어당기고, 윽박지르겠지만, 이 경우에는 통하지 않아. 그래서 한때 사람들은 이곳을 도모코로라는 이름으로 불렀지."

도모코로라는 단어를 니카가 말할 때 나는 불길한 감각에 몸을 떨었다.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져 조그맣고 축축한 흔적만을 남긴 것만 같았다.

"그건 어느 땅의 언어인가요?"

"잊혀진 땅의 주민들이 사용하던 잊혀진 언어지. 현실에 남겨져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파편에 불과하고, 그조차도 그들은 해독하지 못하고 있어. 그 언어는 아주 오래되고 강력한 힘을 담고 있으며, 비록 지금은 잊혀졌지만 한때 주변을 정복하고 자신의 포로로 만드는 강대한 나라의 주민들이 그들의 신에 대한 경외의 마음을 담아 만든 정복자의 말이자 지배자의 말, 그 언어로 도모코로는 '빼앗는 땅'을 뜻하지."

"빼앗다니, 무엇을요? 아니, 알 것 같아요. 그리고 설령 모른다고 해도 알고 싶지 않아요." 나는 진저리를 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일단은 안정을 취하도록 하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지는 너가 좀 더 회복된 다음에 고민해 보는 게 좋겠지."

"니카." 나는 방을 나가려는 그녀를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니?"

"그렇다면 그 열쇠도 도모코로의 열쇠겠지요." 나는 힘겹게 말했다.

니카는 아무 말도 없었다.

"발을 디딘 것 만으로 그들의 정신을 빼앗을 수 있는 땅이라면, 그런 땅의 주인인 당신 목에 걸린 열쇠는 어떤 자물쇠를 열도록 되어 있는 걸까요. 잠긴 문 뒤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건가요. 왜 그런 열쇠를 당신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에요……?"

"도모코로의 여주인 외에는, 그 누구도 가져선 안 되니까."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 방을 나갔다.


다음 날, 편안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나는 니카와 함께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만약 도모코로의 환상성에서 도망칠 수 없다면 도모코로를 이해하고 육체가 거기에 적응하도록 만들어 정신과 육체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게 그날 아침 니카와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휘영은 도모코로를 나보다 먼저 떠나서, 대장에게 내가 어쩌다보니 저지르게 된 직무유기에 대해 사과하고 그녀에게 내가 최소 일주일 이상은 돌아올 수 없음을 이해시키는 상당히 막중한 일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주일 동안 우리는 걸었다. 해변가를 거닐고 숲을 지나다녔다. 그러나 그 화창한 날씨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이곳의 공기에 내 몸을 적응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현실 세계로 돌아왔을 때 저번과 같은 증상들이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나는 도모코로의 비현실적 편안함 속에 내 자신을 최대한 노출시키는 동시에, 정신적으로는 이곳의 모든 것, 내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내 자신에게 주지시켜야 했다.

가장 단련된 정신에게도 아주 어려운 일이었지만,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내 옆에는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도모코로의 여주인으로서 살며 그 모든 허와 실을 아는 사람이 서 있었다. 니카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나를 붙잡고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가르쳐 준 것 덕분에 나는 저기 서 있는 나무의 역사를 알게 되었고, 내 발밑의 모래밭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되었으며, 우리가 앉아 있은 바위의 속성을 이해하게 되었다. 미치도록 더딘 과정이었지만, 인고의 시간이 지난 이후 나는 도모코로를 '알았다'. 니카의 집이자 도모코로의 신전 주변의 땅은 이제 내게 매우 친숙한 곳이자 얼마든지 현실과 분리될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얼마 뒤 휘영이 돌아왔다. 몇 가지 설명 후 내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휘영은 내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나는 고맙고도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음 고생이 심했겠구나. 미안하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니카를 돌아보았다. 그녀 역시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그늘이 있었다.

"니카?"

그녀는 빠르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늘은 언제 있었냐는 듯이 그녀의 얼굴 속에서 사라졌지만 내 마음 속에는 남았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구나." 그녀는 말했다. "명심하렴, 너는 도모코로를 알게 되었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야. 아직 너가 모르는 것에 비하면 지금까지 배운 것은 아주 조그만 일부분에 불과하니, 되도록이면 더 이상 도모코로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 것이 나을 거야. 아예 이곳에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것이 좋겠지."

내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언젠가 운명이 허락한다면 돌아올게요."

내가 대꾸하는 말을 듣고 니카는 웃었다. "운명이라…… 그래, 돌아오렴……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나는 그 때에도 이곳에 있을 테니까."

나와 휘영은 그렇게 돌아갔다. 여전히 현실의 공기는 역겨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도모코로의 거짓된 쾌청함 탓임을 나는 이제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나자 도모코로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현실의 공기는 예전에 아무 거부감 없이 호흡하던 그 공기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도서관의 동료들에게는 그냥 과로로 인해 몸이 망가져서 잠시 쉬다 왔다는 정도로 설명을 끝냈다. 대부분은 그 얘기를 납득했지만, 무시무시한 타입 그린이자 수백년 묵은 요괴인 대장은 나중에 내게 더 디테일한 설명을 요구했고 나는 한때 소설을 쓰던 경험을 살려 최대한 약을 팔아야 했다. 대장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눈치 챘을 테지만, 아무래도 되도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모습이 귀여워서 봐 준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부주석으로서 지독하게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모코로와 그 여주인에 대한 것은 내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결과적으로는 아주 조그만 조각이 되었다.


"언젠가 운명이 허락한다면 돌아올게요."

"운명이라……" 아득한 기억 속의 목소리였다. "그래, 돌아오렴……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나는 그 때에도 이곳에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곳에 없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모래사장 위에 서 있었다. 기만적일 정도로 화창한 날씨. 이 날씨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하지만 어디였지?

"운명이라…… 그래, 돌아오렴……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나는 그 때에도 이곳에 있을 테니까."

아까의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하지만 들은 지 너무 오래된 목소리.

저 너머에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이 보였다. 나는 그 반짝임에 이끌려 어딘가 익숙하던 해변가를 걸었다. 반복되는 목소리는 내가 걸어갈수록 희미해지고, 조금씩 들리지 않게 되었다.

"……돌아오렴……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이곳에 있을 테니까."

마침내 나는 그 반짝임의 기원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열쇠였다. 열쇠에 줄이 메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가 목에 걸고 다니는 물건 같았다.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면…… 이곳에……"

나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들었다.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

이 목걸이는 누구의 것이지?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

갑자기 내가 알던 목소리가 완전히 새롭고 이질적인 목소리로, 더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어조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놀라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여기에 언제나 있어야 하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운명이 그것을 요구한다!"

"니카!"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진심이에요?" 휘영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 꿈으로 인해 내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모든 것이 다 기억났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꿈 속에서 도모코로를 보았을 때 니카는 늘 그곳에 없었다. 그저 그녀가 목에 걸고 다니던 열쇠, 도모코로의 열쇠만이 거기 있었을 뿐이었다. 이게 의미하는 건 뭐야? 니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거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새벽에 내가 깨워 일어난 휘영은 내 눈이 번쩍이는 것을 보고 기겁했고, 내가 도모코로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두 번째로 기겁했다.

"하지만 니카가, 니카가 돌아오지 말라고 했었잖아요!" 휘영은 나를 말렸다. "저번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잖아요. 그런데 그런 곳에 다시 돌아가시겠다고요?"

"그런 것 같아."

"하지만 어째서요?"

"운명이 그걸 요구해."

"하지만…… 하지만……!"

"휘영아, 너와 나는 연결되어 있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 눈높이에 맞춰 앉아 말했다. "내가 꿈 속에서 들었던 것, 그걸 너도 들었을 거야. 나도 정확히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니카가…… 어쩌면 도모코로가 나를 부르고 있어. 이게 잔혹한 기만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가야 해. 니카를 위해서."

그녀는 더 이상 뭐라 항의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나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같이 가요."

"위험할 수도 있어."

"저랑 연결되어 있으시다면서요? 이럴 때만 놓고 가면 안 되죠!"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알았다. 가자."

우리는 빠르게 차원문을 만들고 그 위에 올라탔다. 잠시 후 우리는 도모코로의 해변가, 니카의 집 앞에 서 있었다.

니카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녀는 바위 위에 앉아 먼 바다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오면서 발생한 소음이 그녀의 주의를 끌었고, 니카는 우리를 보더니 굳어버렸다. 나는 그녀 뒤에서 한때 잊혀졌던 환상의 반짝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돌아왔구나." 니카는 아주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

"꿈을 꿨어요." 나는 대답했다. "당신이 도모코로에 없었고, 그 열쇠만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렸고요."

"그렇다면 운명이 너를 이곳으로 이끌었구나?" 니카는 그렇게 말하더니 잔잔히 웃었다. 그것이 안도의 웃음인지, 체념의 웃음인지 나는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우리를 향해 첫 발을 내딛은 순간 그녀는 크게 휘청였다. 나와 휘영은 급히 달려가 그녀를 부축했다.

니카의 몸은 소름끼칠 정도로 가벼웠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휘영이 물었다.

"괜찮아. 그냥…… 지쳤을 뿐이야." 니카는 그렇게 말하며 힘겹게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죠?" 나는 말했다.

니카는 그 말을 듣더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들어가자. 내 방을 지나서, 복도 끝 화로가 있는 곳으로. 어딘지는 알겠지."

잠시후 우리는 여전히 어두침침한 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화로의 불은 평소보다 더 밝았고, 화로가 갑자기 불을 뿜는 일은 없었지만 주변의 벽장식과 문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니카가 숨가쁘게 말했다. 나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어깨로 문을 열었다. 여전히 옛날과 똑같은 어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휘영이 멈칫하는 것이 어깨너머로 보였다.

"안으로, 어서! 겁을 내서는 안 돼." 니카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비어있는 왼손으로 휘영의 손을 잡았다.

"내가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마. 이 손만 놓지 않으면 돼. 알았지?" 나는 휘영의 떨리는 손을 굳게 붙잡고 말했다. 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 뒤의 문이 닫히자 사방은 마치 완전한 무의 세계에 들어온 듯 캄캄했다. 그 어떤 빛줄기도 보이지 않았고 동시에 그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 질식할 것만 같은 곳이었다.

그때 내 옆에서 누군가 크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니카는 편하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점점 더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평정을 찾는 것 같자 나와 휘영 역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호흡의 안정을 찾은 니카는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니카?" 나는 그녀를 나직이 불렀다.

"내가 너희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너희를 이곳까지 데려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바로 이곳, 도모코로의 위대한 궁정 바로 그 앞까지 말이야!"

내 어깨에서 그녀 팔의 감촉이 사라졌다. 니카가 마치 힘이 돌아온 사지를 시험해 보기라도 하듯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내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낭랑하고 힘이 담긴 어조로 그녀가 크게 외쳤다.

"섬기는 이들은 들으라! 별의 심장으로 만든 열쇠의 주권자가 여기 있으니, 도모코로의 여주인을 위하여 불을 켜라! 그대 눈 가려진 자들이여, 이제 눈을 뜨고 정복하는 민족, 지배하는 민족의 보물전을 보아라! 보라, 인간이 염원하던 쾌락의 진정한 시작을! 아우게워스의 위대한 궁전, 황금 옥좌와 은 술잔을! 이토록 장엄한 세계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으리라!"

그리고 굉음과 함께 사위가 환해졌다. 나는 갑작스러운 섬광에 눈을 가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하나의 거대한 광휘였다. 거대한 등불에서 밝은 빛이 흘러나와 방금까지만 해도 사방에 만연하던 칠흑으로 모두 박멸하였고, 그 등불을 받치고 있는 것은 고대의 거인이 앉았을 법한 거대한 황금 왕좌였다. 사방의 벽에는 형언할 수 없이 오래 되었을, 그러나 세월의 영향을 피해 간 듯 광이 나고 온전한 대리석 상과 청동상이 서 있었다. 이 모든 것은 현대의 인간이 어줍짢게 흉내 내었던 궁전이나 박물관 같은 곳이 아니었다. 만물은 생동감이 넘쳤고 조명 하나, 타일 하나까지 가장 완벽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도모코로가 환상의 땅이라면, 이곳이야말로 환상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곳이리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떨고 있던 휘영은 방을 가득 채운 광채를 보더니 환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나와 함께 다니기로 한 이후로 이토록 밝고 강렬한 빛을 체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방에 깔린 인간상들을 살펴보았다.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어 그 얼굴의 형태와 특징, 그리고 동작만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강대한 전사들이었고 위대한 왕들이었다. 일만 군대를 이끌어 전쟁에 나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고귀한 위엄으로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위인들이 우리 주변에 서 있었다.

그러나 옥좌 위의 신성한 광휘도, 사방에 서 있는 용사들과 왕들도 이 환상의 전당 한 가운데 선 도모코로의 여주인만큼 빛나지 않았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 주변의 반짝이는 환영에 방해받는 일 없이 니카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니카의 손 끝에서는 보석의 반짝임이 있었고, 자태는 여왕 같았으며,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니카의 목에 걸린 열쇠는 이 정신을 잃을 것만 같은 광채를 한껏 받아 태양에 대항할 만한 밝은 빛을 뿜고 있었다.

눈이 멀 듯한 빛 속에서 나는 니카의 음성을 들었다.

"이곳이 바로 도모코로의 입구란다. 네가 평생의 삶 동안 보게 될 광채보다 더 밝은 빛이 이곳에 있지만, 이 빛도 '빼앗는 땅'의 진정한 영광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아."

니카는 이렇게 말하며 웃었고, 나는 그토록 강력한 기쁨과 자부심이 담긴 웃음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한때 도모코로는 온 세계가 선망하는 이상향이었지.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마법의 땅, 발을 딛는 자의 마음과 정신을 온통 빼앗는 땅! 그러나 우린 빼앗을 필요가 없었어. 그들이 주었으니까. 이 환상의 가장 작은 티끌만으로도 왕의 몸값에 비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내주었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였지."

그 순간 니카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러나 그 이상향은 모두에게 잊혀진 지 오래로다."

환상이 사라졌다. 옥좌 위의 광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밝기가 크게 줄어들어 단순한 등불 수준에 머물렀다. 거대한 빛이 사라지자 그 빛이 환하게 비추던 위대한 영웅들의 상은 그림자 속으로 반쯤 몸을 숨겼다. 더 이상 이곳은 환상의 정의가 아니었고, 사라진 환상의 흔적이었다.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니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광휘는 간데없었고, 우리가 그녀를 부축했을 때와 같이 힘없고 약한 모습으로 그녀는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니카는 자신의 두 발로 서서 고개를 들었다.

"도모코로의 여주인으로서, 관리자로서 필멸의 인간 수백 세대에 비할 만큼 오랜 삶을 살아온 자여. 도모코로의 광휘는 예전같지 않고, 마지막 날이 점차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는가. 이제 도모코로의 마지막 방문자와 함께 운명의 때가 도래하였도다."

그렇게 말을 끝낸 니카는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따라오렴. 이 열쇠가 어디에 쓰이는지 보여줄게."

그러면서 니카는 옥좌 뒤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갔다. 옥좌 뒤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고 여기에도 복잡한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이 문의 중간 부분에는 열쇠 구멍이 하나 나 있었다. 니카는 그 앞에서 몸을 돌려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이 뒤는 도모코로의 심장부로 향하는 통로가 되고, 적법하게 정해진 도모코로의 주인이 아닌 한 그 누구도 이곳을 들어갈 수 없지. 안타깝지만, 나는 너희를 들여보내 줄 수 없어. 나는 적법한 도모코로의 여주인이지만, 얼마 안 가서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될 테니까."

"그 말은……"

"나는 곧 죽을 거야. 간단하게 말해서." 니카는 그렇게 충격적인 소식을 담담하게 전하고는 말을 이었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혼자서 이곳을 지켜 왔지. 마지막 순간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구나."

"운명이 요구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군요."

니카는 대답 대신 잔잔한 미소로 응답했다. "돌아가자. 내일은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될거야. 그 때에 같이 있어줬으면 해."

우리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다시 우리가 지나왔던 문으로 돌아가 한때 우리가 오래 묵었던 방에 다시 돌아왔다. 휘영을 옆에 눕히고 잠들 준비를 마쳤을 때 머릿속에 내가 오늘 보았던 그 모든 광휘가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환영이라는 사실도.

내가 지금까지 살며 보아왔던 것 중 가장 찬란하고 위대했던 것이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나를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꿈 속에서 나는 도모코로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모두에게 잊혀진 상상 속 세계 도모코로가 아니라, 과거의 영광스러운 이상향 도모코로의 주인이었다. 나는 찬란한 로브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도모코로의 심장부를 여는 열쇠가 달려 있었다. 왼손에는 권위를 나타내는 홀을, 오른손에는 힘을 나타내는 채찍을 손에 쥐고 고대 왕의 황금 옥좌 위에 앉은 나는 그 어떤 왕보다 존귀하고 위대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필멸자들이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은 웃고, 울고, 비명지르고 울부짖으면서 내게 자비를 구했다. 나는 그들이 도모코로의 빛을 조금이라도 받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을 즐겁게 구경하였고, 나의 신하들을 시켜 그들의 살, 뼈, 내장과 눈을 받아갔다. 그들은 자기 몸의 절반을 뜯어간 나를 찬양했고 내가 베푼 환상의 조각을 애지중지하며 돌아갔다.

신전의 밖에서는 우리의 위대한 함대가 승전의 소식을 들고 저 멀리서 검은 연기로 하늘을 질식시키며 돌아왔다. 배마다 채찍을 맞으며 고통스러워하는 포로들이 가득 있었고, 가장 지독한 적수들, 가장 하찮은 반란자들의 머리가 창 위에 꽂혀 있었다. 우리는 광소하면서, 모래밭에 자신의 피를 흘리며 힘없이 걸어가는 포로들을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다. 나는 우리의 강대한 용사들이 적의 가죽을 벗겨 만든 깃발을 휘두르며 포효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나의 신하들을 한데 모았다.

"돌아가자.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같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근위병들에게 한때 경쟁자였던 나의 포로를 불러오라 명했다. 근위병 두 사람이 옥좌 뒤에 사슬로 묶여 있던 포로를 끌고 왔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비를 구걸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눈물 흘리는 그 패배자는 바로 휘영이었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으나 도모코로의 왕좌를 걸고 나와 경쟁했다. 내가 승리했고 휘영이 패배했으므로 나는 그녀에게 잔혹한 죽음을 선사함으로써 마침내 도모코로의 주인으로 모두에게 인정받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 과정을 가장 도모코로에 걸맞는 사람답게 그 과정을 수행하느냐였다.

갑자기 휘영이 있는 힘껏 몸부림치며 근위병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바깥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리는 그녀를 본 신하들은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나는 씩 웃으며 성큼 걸어가 땅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사슬을 밟았다. 휘영의 목에 연결된 사슬이 그녀를 잡아챘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 나는 내 채찍을 잠에서 깨웠다. 채찍에 달린 입들이 깨어나 으르렁거리고, 딱딱거리고, 이빨을 갈았다.

휘영이 간신히 일어나 또다시 도망치려 할 때, 나는 미친듯이 웃으며 그녀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에 달린 굶주린 입들이 휘영을 물어뜯었고, 감히 도모코로의 주인에게 대적하려고 했던 그녀에게 공포와 고통을 한없이 안겨주었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었다. 바로 옆에서 휘영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첫 수십 초 동안 나는 충격 속에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나는 휘영의 보호자였지만 꿈 속에서 휘영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평소에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끔찍한 행위를 꿈 속의 나는 웃으며 저지르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기 전까지만 해도 도모코로의 본질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과거에 도모코로가 어떤 일이 이뤄지는 곳이었는지, 어떤 자들의 소굴이었는지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으나, 알았다고 생각했다.

니카 때문에. 그 도모코로의 여주인에 의해 나는 그것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아니 배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오늘 꾼 꿈이 그 모든 지각을 산산조각냈다. 도모코로의 화창한 날씨, 그 여주인의 태도와 말,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보았던 장엄한 형상, 그 모든 것이 기만책이었고 사기였으며, 실상은 피와 패자들의 비명소리로 얼룩진 여느 제국과 다를 바 없는, 아니 더 잔혹하고 충격적인 멸망한 문명의 파편이라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덜덜 떨고 있는 휘영을 진정시키려 했다. 극도의 죄책감과 공포, 그리고 약간의 억울함이 뒤섞인 상태에서 나는 그녀를 붙잡아 안심시키려고 했지만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나를 할퀴고 때리며 내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간신히 휘영을 진정시켰을 때 그녀의 손톱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진정해 줘, 제발! 그건 내 꿈이었어, 내가 진짜로 너한테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고!"

"꿈이었어요?" 휘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생생했어요…… 누군가의 기억을 대신 체험하는 것처럼 사실이어서, 나는 도모코로의 여주인이 되려고 싸웠고, 패배해서 사슬에 묶여 있었는데…… 으흑, 대체 그건 뭐였죠? 도모코로는 대체 뭐죠?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에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우리가 누굴 찾아가야 할지는 알 것 같아."

내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은 도모코로의 풍경을 꿈 속에서 투영하게 된 것이라면, 그 기억이 누구의 것일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의 창백한 빛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던 한 사람을 찾아 해변으로 나왔다.

니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충격이 사라지자 흥분이 그 빈 자리를 채웠고, 나는 온 몸에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니카!" 나는 소리쳤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니카가 입을 열었다.

"왕께서 아우게워스를 도모코로의 주인으로 임명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빼앗는 땅의 주인이 되어라. 가서 우리의 힘으로 적들을 지배하고 고문해라, 피는 곧 신성이고 쾌락은 곧 권력이니, 욕망은 만물의 척도가 되고 우리는 그 척도의 정점에 설 것이다. 하고 싶은 자에게 하고 싶은 것을 하라.'"

소름끼칠 정도로 특질이 없는 메마르고 비통한 목소리에 나는 뭐라 소리칠 의지를 잃었다. 우리는 그대로 서 있었다.

"2천년 뒤에 니카가 도모코로의 여주인이 되기를 원했으므로 아우게워스가 니카를 죽이려 했다. 그가 니카에게 채찍을 휘둘렀으나 니카가 먼저 그의 목을 찔렀다. 아우게워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선언했다. '도모코로의 주인은 이와 같이 해야 한다. 경쟁자를 죽이고 쓰러뜨려야 한다. 도전하는 자는 고문하고 항복하는 자는 노예로 삼으라. 너는 그렇게 해야 이 옥좌 위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지니, 도모코로는 모두를 종으로 삼는 까닭이니라.'

니카가 묻되, '도모코로가 빛을 잃게 되어 도전자가 찾아오지 않게 되면 그 때에는 어찌합니까?' 아우게워스가 답했다. '그 때는 붙잡아야 한다. 환상의 땅에 발을 디디는 자가 있을 것이다. 도모코로에 붙잡혀 잘못된 계산으로 이곳에 떨어지는 자가 있을 것이다.'"

피가 식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지금 하는 말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을 의미한다면……

"……그게 저란 말입니까?"

"'너는 그를 붙잡아야 한다. 방식은 좋을 대로 하라. 그러나 잔혹한 기만이 그 중 으뜸일 것이다. 실수로 이곳에 떨어지게 된 자를 속여라. 이곳의 본질을 알리지 마라. 그는 도모코로가 선택한 자이니, 자신의 기억을 뜯어내지 않는 한 결코 도망칠 수 없다. 그를 준비시켜라.'"

온 몸이 두려움과 분노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까지 기만당해 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그에게 도모코로를 이해시켜라. 모든 것을 말하지 말되 스스로 도모코로의 공기를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라. 때가 되면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라. 그가 무엇을 느끼는 지, 무엇이라고 말하는 지는 관심을 가지지 마라. 네가 무관심할수록 잔혹해질 것이다. 그것이 좋다.'"

"니카! 빌어먹을,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외치면서 주먹을 쥐었다. "다 거짓말이었다고! 당신이 내게 보여준 환대와, 그 모든 빌어먹을 환상들이 다 날 여기에 묶어두려는 목적으로 만든 가짜였다고 하는 거야?!"

니카는 조용히 있었다. 나는 고함을 질렀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던 게 그것 때문이야? 내가 당신을 이어받게 만드려고? 날 치료하고, 나한테 도모코로에 대해 가르쳐주고, 그 모든 헛것을 보여준 게 다 그것 때문이냐고!"

"'그는 분노할 것이다. 억울해 할 것이다. 고뇌할 것이다. 도망치려 할 것이다. 상관하지 마라. 그는 도모코로에게서 도망칠 수 없고 도모코로는 놓지 않을 것이다.'"

억울한 감정이 나를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나는 나를 이곳으로 이끈 모든 사건을 저주했다. 내가 그 빌어먹을 차원문을 만든 것, 내가 이 저주받은 곳의 바닷속으로 그냥 가라앉아서 죽어버리지 않았던 것, 내가 망할 놈의 휴가 계획을 세운 것, 그리고 내가 휘영을 거둔 것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새로운, 그러나 훨씬 더 지독한 생각이 내 머리를 채웠다.

"그러면 휘영은,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니카는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분노를 치밀어오르게 할 정도로 무표정했지만, 그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 눈물 때문에 나는 니카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했다. 니카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대답이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아우게워스의 목에 칼을 꽂는 니카와 꿈 속에서 휘영을 채찍질했던 나를 떠올렸다. 도모코로의 주인은 둘일 수 없고, 승자는 패자를 고문해야 한다.

"그건 안 돼." 나는 말했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럴 수는 없어. 난 그렇게 못 한다고!"

"도모코로를 거스를 수는 없어." 니카가 비통하게 말했다. "그 누구도 도망칠 수 없어. 네 머릿속에 도모코로의 기억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너는 여기에 묶인 몸이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네가 그렇게 만들었고, 도모코로가 그렇게 만들었지."

니카는 자기 목걸이를 풀었다. 그녀는 열쇠를 손에 쥐고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자리를 당장 벗어나고 싶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지금이라도 뿌리치고 싶었지만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거대한 무력감 속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목에 도모코로의 열쇠를 걸어주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 목걸이를 뜯어내고 싶었다. 분노하고, 울부짖고, 고함을 지르면서 날 이곳으로 밀어넣은 그녀를 산산조각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당신도 알잖아요, 니카." 나는 울면서 말했다. "내가 휘영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있어." 니카가 조용히 말했다. "다섯 낮과 다섯 밤 동안 너는 도모코로를 나갈 수 있어. 그 이후부터는 너는 이곳에 매인 몸이 될 거야. 그 때에는 결정을 내려야 해."

"다섯 날이 아니라 다섯 세기를 주더라도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나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저항했다. "제기랄,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는 거에요? 어떻게 당신이 치료하고 구한 사람을 속여서 이 지옥 같은 곳에 가둘 수 있는 거에요? 어떻게 그 사람에게 구역질나는 짓을 이따위로 강요할 수 있냔 말이에요!"

니카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나는 분노를 터뜨리다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허탈감 때문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니카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때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차갑고 잔혹했지만, 동시에 피곤함과 고통으로 가득한 그 눈은 그녀가 수천년 동안 도모코로의 여주인으로 살아오면서 피폐해진 영혼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언젠가 나와 니카가 나누었던 대화가 기억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단다. 인간은 이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무지를 두려워해. 하지만 때로는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고, 인간은 자신이 무서워하는 지식을 결코 잊을 수 없어."

"당신은 무지보다 더 무서운 것을 알고 있나요?"

"그래."

"잊고 싶어요?"

"그래. 하지만 절대로 잊혀질 수 없어."

그제서야 나는 그녀가 알게 된 것을 후회하는, 잊고 싶지만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기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잊을 수만 있다면, 이 모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니카가 울면서 말했다.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잊혀지지 않아. 결코 잊을 수 없어. 미안해. 내게는 이 방법 밖에는 없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 없어."

니카는 휘청이더니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주저앉은 채 그녀를 안았다.

"미안해." 니카는 몇 번이고 그 말을 되뇌었다. 나는 다른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녀를 그렇게 안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맥박이 멎었다. 그리고 도모코로는 망자에게 품위 있는 안식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내 손 안에서 그녀는 썩어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피부는 검게 변해 문드러져 갔다. 순식간에 한때 가장 고귀한 여왕 같았던 니카의 육체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지독한 시신이 되어 내 품에 안겨 있었다.

나는 악취를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붙잡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울었다.

그리고 토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도모코로의 주인이 된 내게는 위안이 되지 못했다.


나는 휘영을 방랑자의 도서관에 맡겼다. 5일 뒤에 돌려보내 달라는 얘긴 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면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휘영이 내 곁을 떠나자,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누가 나를 추적하든 말든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나는 남해의 경계를 걸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말도 안 되고 충격적이어서, 그냥 아주 재수없는 꿈이 아닐까 하는 희망까지도 품었다. 그러나 내가 무슨 방식의 도피를 생각하든 그것은 전부 말이 되지 않았다. 아예 기억을 지울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모코로에 대한 것을 완전히 잊을 수 없었고, 도모코로에 대한 기억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내가 애써 잊은 기억은 모두 회복되었다.

물론 죽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나는 니카가 수천년 동안 살아 있다가 도모코로의 여주인 자리를 포기하자마자 썩을 대로 썩은 시체가 된 것을 떠올렸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내 목숨이라지만, 그것도 도모코로의 잔혹한 법칙 안에서는 무효화되었다.

내 목에 걸려있는 열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도모코로의 심장부로 향하는 문을 연다는 열쇠였지만 내게는 용도도, 정체도 유의미한 값을 가지지 못하는 애물단지에 불과했다. 이 열쇠는 내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짓을 저지를 때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 뿐이었으니까.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남해바다 속에 어딘가 나를 구원해줄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절박하게 찾고 절박하게 구했다. 그러나 바다가 나를 비웃듯 출렁이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나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 버렸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땅을 내려치면서 내가 아는 모든 존재들에게 기도했다. 제발 내 운명을 거두어 달라고. 이 멍청한 삶의 끝을 이따위로 장식하게 될 이 우둔한 자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빌었다. 눈물샘이 메마를 때까지 울었고, 목이 망가질 때까지 외치고, 손이 부러질 때까지 땅을 쳤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것도 할 힘이 남지 않았을 때 나는 내 고향의 바다 앞에 쓰러졌다.

갑자기, 한 줄기 미약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스쳤다.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무시무시한 폭풍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생전 처음 겪어보는 거대한 폭우가 쏟아졌다. 나를 무자비하게 때려 깨우는 빗줄기를 느끼며 나는 실소했다. 그래, 이제 내 고향마저 나를 밀어내려 하는가? 그러다가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내 앞에 남쪽 바다의 수평선이 있었다. 비바람이 미친듯이 몰아치고 있었고, 반쯤 구름에 감긴 해가 수평선 너머로 막 사라지려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우리 선조들의 아주 오래된 의식을 떠올렸다. 나는 내 목에 걸린 줄을 풀고 열쇠를 손에 쥐었다. 내가 가지고는 있지만 그 용도도, 정체도 알고 싶지 않은 그 애물단지를.

그리고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한 동작을 수행했다.






















내 고향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인데, 남쪽에 면한 바다에는 물살이 강한 곳이 많다. 옛날에는 배 몇 척을 가지고 물살이 센 길목을 틀어막고 있으면 외적의 배가 절대 뚫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 말로는, 그렇게 물살이 강한 이유가 오래 전에 그곳 바다에 걸린 주술 때문이라고 한다. 그 어떤 다른 목적도 없이 오직 흐르는 물을 광포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걸어놓은 주술이었지만, 워낙 강력한 힘이다 보니 그 여파가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갔고, 우리 조상들은 수백년 전부터 그 힘을 끌어다 사용했다.

하지만 기원이 되는 주술이 너무 강력했기에, 우리 조상들은 어디까지나 부가 효과에 불과했던 그 힘도 제대로 제어하거나 조작할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지만 오히려 그 힘에 잠식당해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바다의 힘을 간접적으로만 이용하기로 했고, 지금은 남쪽 바다에 걸린 주술의 힘을 아주 간접적으로 이용하는 몇몇 의식들밖에 전해지는 것이 없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의식들 중에 이런 게 있다. 남쪽 바다의 수평선 아래로 반쯤 구름에 감긴 해가 사라지는 그 순간, 비바람이 귀신들린 것처럼 몰아치는 장소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만 그 용도도, 정체도 짐작할 수 없는 물건을 바다를 향해 내던지면 빠르게 흐르는 물살이 잠시 멈췄다가 굉음을 내며 내던진 물건을 삼킨다고 한다. 그러고 나면 내던진 사람은 그 물건에 대한 것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게 되고, 바다가 삼킨 그 물건은 언젠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가장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반쯤은 전설로 받아들여지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 의식을 실제로 해 본 적이 있다.

다만 내가 깨끗이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는, 당연하게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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