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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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가 일하는 곳이 거대한 연구소의 기록보관실로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연구소 기록보관실의 신참이었고, 무언가 비밀이 많은 연구소의 기록물을 적혀 있는 대로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의 손을 거쳐 기록보관실에 들어간 자료가 수만 개는 될 테지만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얇든 두껍든 그가 받아 드는 모든 기록물은 시험지처럼 질긴 봉투 안에 들어가 있었고, 떨어지지 않는 스티커로 밀봉되어있었다. 스티커에는 "█등급 이상 열람 가능" 혹은 "열람 불가" 와 같은 말이 써져 있었다. 무심한 듯 네모나게 정자로 쓰여진 그 글자들은 언제나 섬뜩했다. 때론 검은색, 때론 붉은색. 가끔 스티커에 적힌 조건들과 똑같은 조건이 적힌 직원 카드나 서류를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공문이 미리 오는 지라, 그는 선임이 시키는 대로 흰 옷을 입은 연구원들에게 서류를 꺼내주었다.

그는 기록보관실의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수많은 봉투와 그 안에 든 수많은 종이들을 알고 있었고, 봉투에 적힌 코드만 들어도 그 봉투가 놓여있는 선반의 모습이 환하게 그려졌다. 그가 일하는 기록보관실은 늘 사람이 부족했다. 특히 기록보관실 그 곳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큰 보관실 안에서 봉투 안에 든 서류를 정리하고, 서류에 적힌 조건대로 코드를 부여하여 컴퓨터에 저장하고, 폐기해야 할 서류를 밖에 내놓아서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에게 건네고, 공문이 내려온 대로 연구원들에게 기밀 서류를 건네는 일은, 그와 그의 선임 단 둘이서 해결하였다. 그보다 보안 등급이 높은 선임이 컴퓨터로 서류를 관리하였고, 가장 낮은 보안 등급을 가진 그는 그저 선임이 시키는 대로 서류에 코드번호를 붙이고, 직접 보관실에 들어가서 서류를 알맞은 선반에 집어넣었다. 바쁜 날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허둥댔지만, 한가한 날은 하루종일 멍하게 앉아있을 정도로 한가했다.

그리고 그 날은 한가한 날이었다.
그는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 동사무소처럼 생긴 안내데스크에 앉았다. 기록관리실은 폐가제로 운영되는지라, 데스크는 외부 사람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담장처럼,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저쪽 끝에 기록보관실 직원이 출입할 수 있게 작은 문이 있다. 그 문마저도 돌림쇠로 잠겨있었다. 정수기는 밖에 있는데, 한번 물이라도 떠오려면 그 긴 데스크를 빙 돌아서 나간 뒤 또 다시 빙 돌아서 정수기에서 물을 떠야 했다. 선임은 간혹 데스크를 넘어 다녔다. 하지만 그는 여기저기 잔뜩 붙어있는 CCTV가 부담스러워서 매번 빙 돌아갔다. 순수하게 코드번호와 공문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양이 낮은 컴퓨터의 회색 화면을 들여다보자니 지루했다. 그는 라디오라도 들을 요량으로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무렇게나 꼬여버린 이어폰이 나왔다. 그는 꼬인 이어폰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 반쯤 풀었을까, 그는 책상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이다. 목에는 보안 등급이 적힌 직원 카드가 매달려 있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그는 손에 든 이어폰을 내려놓았다.
"저, 찾는 문서가 있는데 말이죠."
연구원이 헛기침을 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공문을 본 기억이 없었다.
"기록보관실에서 기록물을 가져가시려면 미리 신청을 하시고 오셔야하는데요."
연구원은 그의 말을 듣고서는 이마를 훔쳤다. 다시 헛기침을 하고 연구원이 말했다.
"신청을 했는데요."
말이 끝나고선 연구원은 또 헛기침을 했다. 여기가 처음이어서 긴장한걸까, 아니면 그냥 헛기침이 버릇인걸까. 그는 고개를 한껏 돌려 기록보관실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공문 온 것 있어요?"
선임이 안쪽의 개인 컴퓨터가 있는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대답 대신 선임이 슬렁슬렁 걸어나왔다.
"공문 온 것 있냐고요."
선임은 그와 그 앞에 선 연구원을 쳐다보았다.
"공문? 그거 왔는데? 오늘 이맘때에 온댔나."
선임은 머리를 득득 긁었다.
"난 못봤는데요."
"네가 보고선 까먹었거나 못 보고 어디 컴퓨터 구석에 박아 놨겠지. 너 자주 그러잖아."
그런가… 이번엔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연구원은 그 동안 이마를 훔쳤다.
"코드 번호 알려줄게. 다녀와."
선임이 말했다.
그는 일어나서 보관소로 갔다. 여전히 머리를 갸웃하면서도 보관소 문에 붙어있는 암호키에 암호를 입력했다. 그런 게 왔던가. 몇 번씩이나 잠긴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류의 실수를 꽤 많이 저질렀다. 열 번 중에 한 번은 꼭 공문이 왔어요? 하고 멍청하게 선임에게 되물어 연구원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보면 그 공문은 컴퓨터의 휴지통 안에 들어가 있곤 했다. 언제 삭제했지. 그는 그것을 보고는 늘 고개를 갸웃했다.

█등급 이상 열람 가능
사건기록 ███-██-█~█

코드번호
KETER ███.██ █ ██-█

그는 서류를 들고 나왔다. 일주일에 한번씩 바뀌는 암호도 확인하는 것을 까먹어 왕왕 높으신 분들 앞으로 불려가기도 했다. 이번도 그런 실수겠지. 그는 열었던 것과 반대로 문을 하나하나 잠갔다. 연구원과 선임은 말을 나누고있었다.
"가져왔어요."
그가 서류를 흔들었다. 연구원은 화들짝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선임과는 이미 알고지내는 사이일지도 모르겠다. 선임은 발이 넓으니깐 말이다. 연구원은 기록물을 낚아채듯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웃음기 없이 허둥지둥 목례를 하고 나가버렸다.
"뭐… 엄청 급한 일인가봐요."
그가 선임을 말똥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게.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급한가보지."
선임은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이 살짝 가셨다. 그가 뭐냐 물을 틈도 없이 선임이 말했다.
"맞다. 며칠 뒤면 새로운 보고서들이 들어오잖아. 미리미리 기록보관소 정리 좀 해놔. 한꺼번에 하려면 힘들잖아."
"저도 좀 쉬자고요."
그가 투덜거리면서 다시 기록보관소로 들어갔다. 선임은 그의 뒷모습을 감시하듯 쳐다보았다.

그는 지금까지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챌 수가 없었다.
아주 바쁜 날이었다. 새로운 문서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선임은 이 문서들이 들어오기 전날, 컴퓨터에 문서 목록을 작성했고, 하나하나 코드번호를 부여했다. 그는 문서가 들어오는 바로 그 날, 선임 옆에 앉아서 코드번호를 봉투에 단단히 붙였다. 끈적한 스티커를 봉투 위에 붙인 뒤, 손으로 슥슥 문지르고, 그 위에 더 끈적한 투명 스티커를 붙였다. 청구번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코드번호는 영어와 숫자와 기호가 섞여있었다. 여러 주제를 한꺼번에 표현하기는 쉽지만, 사서들이 죽어나가기 딱 좋았다. 선임이 문서 입력이 끝내면, 이제 반대로 문서를 삭제해나가기 시작한다. 이미 입력된 데이터들 가운데서 쓸모없는 것이라고 보고서에 쓰여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지우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그것들을 찾아 서가를 미친듯이 돌아다니며 엄청 끈적거리는 투명 스티커를 떼고, 끈적거리는 코드번호 스티커를 떼어 분쇄기에 넣어야했다. 이 일이 모두 끝나면 그의 손은 하얗게 굳어버렸고, 손 끝은 죄다 벗겨졌다. 시간도 상당히 오래 걸려서 하루는 커녕 이틀 안에 모두 끝마치기도 버거웠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미리 끝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 번호를 붙이는 것만 생각하였다. 손이 끈적거렸다. 몇백개 째 붙인 것일까, 몇 천개 째 붙인 것일까. 옆에서 선임은 미친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소리가 멈췄다. 선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선임이 물을 마시려는줄 알았다. 하지만 선임은 정수기를 그냥 지나쳤다.
"어디가요? 할 일이 태산인데?"
그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잠시 바람 좀 쐬러 간다!"
선임 역시 짜증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그는 입을 비죽이고는 다시 코드번호를 붙이는데 열중했다. 한번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끝도없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얗게 일어난 손끝은 욱신거렸다. 그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들고있는 서류봉투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리에서 코드번호 부여가 끝난 서류봉투를 주섬주섬 챙겼다. 열 개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우고, 왼쪽 옆구리에 똑같이 열 개를 끼웠다. 잠시 쉴 겸 보고서들을 차곡차곡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일을 할 때 마다 자신이 왜 대학원을 나오고, 외국에 나가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는지 영 헷갈렸다. 그는 세 번째로 한숨을 내쉬었다. 선임의 컴퓨터는 켜져있었다. 그는 힐끗 그것을 쳐다봤다. 그의 컴퓨터는 사양이 낮았지만, 그의 선임은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했기 때문에 사양이 높은 편이었다. 그는 선임의 컴퓨터의 작업표시줄에 조그맣게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갔다. 메일이었다.그는 눈을 끔벅였다. 받는이는 그의 이름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뜨지 않았다. 두어번 깜빡이던 그것은 쏙 사라졌다. 그는 옆구리에 낀 서류들을 떨어뜨리고 사라진 알림을 쫓았다. 잠겨있었다. 그의 아이디가 위에 떠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춤거리며 자신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접속이 되었다. 그는 눈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영문인지 영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 메일을 읽었다. 첨부파일이 하나 있었고, 그 밑에는 숫자와 기호가 적혀있었다. 메일이 깨졌거나, 아니면……. 그가 컴퓨터에 얼굴을 바투대었다. 아니면…….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바뀌었다. 그는 놀라 한발짝 떨어졌다. 바닥을 나뒹굴던 서류가 발에 채였다. 흰 화면에 붉은 글자였다. 그는 뛰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의 컴퓨터를 쳐다보았다. 그의 컴퓨터도 상태는 같았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경보. 그는 떨리는 눈으로 컴퓨터 화면에 뜬 메세지를 천천히 읽었다.

이 메세지는 자동으로 발송된 것입니다.

그의 머리가 서서히 굳어갔다.

현재 ███급 SCP가 탈주했습니다. 기지 내의 모든 직원은 각자의 자리로 가서 침착하게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눈을 깜빡였다. 그와 같은 0등급 인원을 교육할 때 들은 적이 있었다. 선임이 뻐기듯 말하는 이야기에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바랬다. 모든 말이 화재경보음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기록관리소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귀 기울였다. 나의 자리는 어디지? 기록관리소. 그는 그 자리에 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밑에 떨어진 서류 봉투를 긁어모았다. 서류 봉투의 수를 세었다. 보고서들을 품에 꼭 안고선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 조용하다.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는 계속 귀를 기울였다. 마음이 가라앉자,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눈을 가만히 감았다. 앞이 캄캄해졌다. 저 경고 메세지는 잘못 온 것이다. 그는 애써 생각했다. 저 메세지는 분명히 잘못 온 것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무슨 일이 일어나서 저 것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하지? 그는 눈을 떴다. 시계가 보였다. 5분, 5분만 더 기다려보는 것이다. 지금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기엔 지나치게 조용했다. 5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대피할 것이다. 그는 바닥을 기었다. 천천히 쌓여있는 서류를 그러모아 수레에 올려놓았다. 작업이 완료된 것 부터 올려놓았다. 그는 최대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 쉬는 것이다. 쉬는 겸 겸사겸사 저 서류를 집어넣는 것이다. 그 다음 그는 코드번호가 인쇄된 스티커를 집어 들었다. 서류보다 부피는 작았다. 거의 다 찬 수레 한쪽에 올려놓았다. 두 번 움직일까, 한 번 움직일까. 그는 최대한 천천히 생각했다. 그의 눈은 초점없이 흐렸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3분이 지났다. 건물 전체가 흔들렸다. 전등이 한번 껌뻑였다. 그는 자리에서 번쩍 일어났다. 그는 휘청였다. 수레 손잡이를 꽉 잡고 달렸다. 수레가 벽에 부딪힐 때 까지 달렸다. 그는 수레를 문 앞에 놓은 채 컴퓨터를 끄러 달려갔다. 컴퓨터의 전원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이 안 났다. 그는 서류를 그러쥐고 서랍 속에서 커다란 가위를 꺼냈다. 가위로 전선을 잘랐다. 감전이 생각난 것은 그가 가위로 전선을 다 자른 뒤었다. 그는 가위를 내팽개쳤다. 쇠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전선을 잘랐지만, 그는 멀쩡했다. 컴퓨터의 본체에 전원 스위치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고 다시 달렸다. 그가 수레에 부딪힐 때 까지 달렸다. 위는 소란스러웠다. 그는 수레를 끼고 앞으로 굴렀다. 기록보관실의 문을 잡고 흔들었다. 그의 등 뒤로 무엇인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는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자신이 암호를 입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뜯어내듯 암호판을 열고, 부술 듯이 암호를 입력했다. 두 번을 틀리고서야 그는 진정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회에, 그는 간신히 암호를 입력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는 기록보관실로 수레를 밀어 집어넣었고, 서류들을 냅다 집어던졌다.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그의 선임이 말했다. 이제 그도 먼지가 날리는 종이들과 함께 가장 안전하게 보관이 되어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렸다. 약간 진정이 되는 듯 했다. 그는 무거운 쇠문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그는 쇠문을 당기는 것을 멈췄다.
고개를 빼었다. 불안정한 전등불 아래에서 그의 선임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팔이 다시 떨렸다. 그의 가슴이 다시 뛰었다. 그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나도 같이 들어가!"
선임이 소리쳤다. 선임은 다리를 절고 있었다. 분명 데스크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선임을 무시하라고 소리쳤지만, 그의 몸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 선임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선임의 등 뒤로 본 적이 없는 것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선임의 몸이 뒤로 강하게 당겨졌고, 정신없이 그 괴물을 보던 그 역시 데스크를 넘어 내동댕이 쳐졌다. 그는 기록보관소의 입구를 보았다. 괴물은 자신의 앞에 있었다. 빨리 뛰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픈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흔들리는 다리로 한발짝 떼었지만, 곧 넘어졌다. 선임의 손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의 손목을 강하게 죄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선임은 핏속에 있었다. 그의 하반신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반만 남은 선임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는 하얗게 질려 발로 선임의 손을 찼다. 그의 손목도, 손도, 선임의 손목도 아무렇게나 찧어 대었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그는 그를 덮치려는 그것에게 그의 선임을 내던졌다. 그는 무게 때문에 휘청였지만, 그것은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냈다. 그는 넘어졌다. 하지만 그는 자유로워졌다. 달렸다. 그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달렸다.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소리도 그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상으로 올라왔다. 긴 복도에는 연구원과 군인이 섞여있었다. 서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선임처럼 널브러진 사람도 많았다. 군인이 뛰쳐 올라오는 그를 후방으로 밀었다. 그는 미끄러졌다. 그의 몸은 피투성이였다. 넘어진 그를 다른 사람이 일으켜 세웠다. 흰 실험복을 입은 채로, 손에는 스포이트를 꼭 쥔 채로, 그를 잡아 일으켰다. 그는 그 손을 뿌리쳤다.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는 잡혔다. 잡힌 채로 벽에 내동댕이 쳐졌다.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눈 앞에 불꽃이 튀었다. 앞이 희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이쪽으로 오라고요! 몇 번을 소리쳐야 하는거에요!"
그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 그에게 고함을 쳤다.
그리고 그는 울었다.

그 사람은 그를 빠르게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솔직히, 그를 끌고 갔다. 그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그는 휘청거렸다. 그 사람은 그에게 짜증을 냈다, 고함을 쳤다, 위로했다, 달랬다 했다. 그 사람은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었다. 저편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저편의 건물은 그가 도망쳐온 곳 보다 멀쩡했다. 그는 안심했다. 저편에는 사람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사람도, 그도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가 사람들 무리 속에 들어갔다. 그 사람은 그의 손을 놓고 자신의 무리를 찾아 들어갔다. 저 사람의 동료는 아직 살아있나 보다고 그는 생각했다. 누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쳤다. 그는 내심 기대했다. 그의 선임이기를 바랐다.
"직원 카드를 볼 수 있겠습니까."
군인이었다.
그는 멍하게 있었다.
"신원 확인을 하겠습니다. 직원 카드를 보여주십시오."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카드를 보았다. 피가 튀어있었다. 그가 카드를 주기 전에 군인이 그의 카드를 낚아챘다. 그리고 군인은 그의 팔을 잡고 그를 끌고갔다.

그는 갇혔다. 외등이 하나 천장에 매달려있었고, 철제 책상의 한쪽엔 그가, 맞은편 한쪽에는 의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는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놓여있었다. 밖에서는 급한 발소리가 들렸고, 다급한 말소리가 들렸고, 처절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를 향한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혼자 앉아있기가 싫었다. 그와, 그의 선임과, 그 괴물과, 그리고 그가 열어놓고 나온 기록보관소의 문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숫자를 세었다. 숫자를 세는데 골몰하다 보면 모든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숫자를 세었다. 숫자를 눈 안에 그리고, 그 숫자를 꾸몄다. 그렇게 1025까지 세었을 때, 문이 열렸다. 그는 눈을 반짝 떴다.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꽤 피곤해 보였다. 그는 여자를 쳐다봤지만, 여자는 그를 보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왜 그랬어요?"
여자가 차갑게 물었다.
"…예?"
"왜 그랬냐고요, 이 살인자야."
여자의 목소리에 날이 서있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여자의 말을 들었다.
"지금 당신이 벌인 일 때문에 기지의 25%가 파괴되었고, 어디서 새로 끌어오기도 힘든 귀중한 인재가 다치고 죽은 사람 모두 포함하면 백명이 넘는다고요. 그리고 그 숫자는 아직도 올라가고 있는 중이고요. 대단하십니다."
"전… 아무 일도 안 벌였는데요……."
그가 조용하게 덧붙였다.
"아, 그러시겠죠. 당신은 결백하다고요?"
여자가 비웃었다.
"지금 죽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거짓말이 나와요? 또 누가 있어요? 누구랑 꾸민 일이에요?"
"저는……."
"공범이나 말하라고요. 보니깐 기록실 문도 아주 활짝 열어놓으셨더군요? 그것도 암호 다 풀어놓은 채로 말이에요."
"그건!"
그가 소리쳤다.
"그건 실수였어요, 그 괴물이 저한테 달려들려고 했단 말이에요! 문을 닫을 시간 따위는……."
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괴물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네. 그렇군요. 실수로 기록실 문을 열어놓고, 실수로 그 괴물을 풀어놓고. 당신 어느 단체 소속인 거예요? GOC? 혼돈의 반란?"
여자는 혼자 광분하여 지껄였다.
그는 하얗게 질려 여자를 쳐다보았다.
"누가 시킨 일이냐고!"
여자가 책상을 내려쳤다.
"아무도 안 시켰습니다!"
그가 놀라 소리쳤다.
"의리 하나는 끔찍하구만. 아주 뻔뻔해. 아주 아주 뻔뻔하다고. 얼마나 뻔뻔한지 말해줄까? 네가 오늘 죽인 그 백몇명의 사람들은 다 네 동료고 친구였어. 네가 이 재단에 들어온 그 순간부터 너와 생사를 같이한 사람들이라고! 넌 동족을 살해한거야!"
여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그 괴물을? 풀어놨다고요?"
그가 띄엄띄엄 말했다.
"내가? 내…. 가?"
그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 괴물을?"
그의 입꼬리가 이상하게 비틀어졌다. 손을 뒤집었다.
"내가? 내가……."
한쪽 손목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그는 부은 손목을 돌렸다.
"내가 그랬을 리가 없잖아!"
그가 고함을 질렀다.
"나는 지금까지 그딴 괴물 본 적도 믿은 적도 없다고! 안 적도 없고! 내가 그 괴물을 풀어놓았을 리가 없잖아!"
그가 부은 손목을 여자 앞에 들이밀었다.
"이 손목이 왜 부었는지 알아? 내 선임이 죽었다고! 죽은 내 선임이 살려달라고 내 손목을 붙잡았다고…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내 선임이 죽었다고! 그런데 내가! 왜 내가, 무슨 이유로!"
"이유야 많죠."
여자는 그 사이에 화를 가라앉힌 듯,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선임이 당신의 꿍꿍이를 모두 알고 있지 않았나요? 그러니 그 사람이 죽었다고 슬퍼할 리는 없잖아요?"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었다.
"당신의 선임이 제게 다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무단으로 SCP 보고서를 빼돌렸다고요."
"나는 높으신 분이 시킨대로만 했을 뿐이야! 그 사람들이 내게 공문을 보내오는데 어떻게 뭘 빼돌리냐고요……."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억울했다. 그의 선임이 죽었다.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눈물은 더이상 나오지 않았다.
"공문이 오지 않았는데, 공문이 왔다고 극구 주장하면서 보고서를 빼돌렸더군요. 그리고 의문의 요원과 주고받은 메일도 있고말이죠."
여자가 책상 위로 파일을 던졌다.
그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공문이 왔어요?
"당신이 그 보고서를 준 연구원, 우리 측에 없는 사람이더군요. CCTV가 여기저기 붙어있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허술하게 대처하다니 정말 멍청해요, 이 바보 자식아."
유난히 헛기침을 많이 하던 그 연구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파일을 들췄다. 급작스레 한 행동이라 여자도 같이 일어났다. 감시 카메라에서 뽑아낸 흐릿한 사진이 닥지닥지 붙어있었다.
"이 사람……."
그는 웃었다. 그가 보고서 봉투를 갖고 나오자 선임과 말하다 갑자기 입을 다문 그 사람. 선임과 말하다 갑자기 입을 다문 그 사람. 선임과 말하다. 선임. 그는 파일을 내던졌다. 웃음은 길고 긴 비명으로 바뀌었다. 비명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이 사람, 죽었어요. 하긴. 케테르급 SCP를 풀어놓은 당사자이니 살아있을리가 없겠지만."
신음은 다시 웃음으로 바뀌었다. 지운 기억이 없는데 삭제되버린 공문들. 전해지지 않은 기록보관소 암호. 선임. 부은 손목. 웃음이 급작스럽게 멈추었다. 그는 항의하기를 멈추었다. 이젠 더이상 힘이 없었다. 그의 앞에서 죽은 선임.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긴. 형식적인 수사를 거친 다음, D계급 인원으로 만들어서 내 친구, 내 동료, 내 부하직원들의 죽음에 속죄하게 만들겁니다. 뭐, 당신같은 배신자의 목숨값은 그들의 삶에 쌓인 티끌만큼도 못 하겠지만."
여자는 이를 깍 다물었다.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이 세상에서 가장 괴롭게 죽게 해줄거야."
여자가 뒤돌아 나섰다. 그는 고개를 파묻었다. 피곤했다.
"아, 맞다. 순순히 대답은 해줬으니 직접 짐을 챙길 호의는 주겠어요. 저 사람의 방으로 저 자를 데려가줘요."
여자가 문을 나섰다. 건장한 남자 둘이 그를 끌고갔다. 그는 곧 그의 숙소로 돌아왔다.
"옷가지만 챙겨서 나와."
남자 중 한 사람이 그를 방으로 밀어넣었다. 문은 살짝 닫혔지만, 완전히 닫히지는 않았다. 그는 침대 옆 탁자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목을 쳐다보았다. 손목은 더 부어있었다. 선임이 남긴 손가락 모양대로 부어있었다. 그는 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있을 물건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잠시 바람을 쐬러 간댔더니, 이런 짓을 하려고 간거였나. 그는 텅 빈 서랍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사실 서랍은 비어있지 않았다. 쪽지가 있었다.

이게 지금 필요하지 않아?

선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그에게 뒤집어 씌우고선, 마치 그의 구세주인 양 마지막 호의를 베풀고 있었다.
"빨리 빨리 안 해?"
밖에 서있는 남자가 소리쳤다.

예, 조금만 기다려요.

그는 그 이전까지 그가 일하는 곳이 커다란 연구소의 기록물 관리소인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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