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의 상실
  • 평가: +24+x

의상실.png


서울 구도심 어딘가의 오래된 1층짜리 상가건물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어떤 가게가 있다.


그 가게는 여느 양복점과 다를 것 없이 모두에게 옷을 지어주는 가게였다. 그러나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 가게는 정말 누구에게나 그에게 맞는 옷을 지어주는 가게였다. 그 가게에서 옷을 지어 입은 사람들은 무엇이든 좋은 일을 겪는다. 사장님은 한사코 아니라 했지만 손님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딸 결혼식에 참석할 외팔이 노신사에게 지어준 검정 연미복은, 별것 아닌 빈자리를 잊게 해주어 신사분이 품은 연륜과 품격만 빛나게 해준다. 휠체어에 탄 취업준비생 아가씨에게 지어준 진청색 슈트는, 가뿐함과 당당함을 선사해 그가 훨훨 날아다닐 수 있게 해준다. 앞을 못 보는 아저씨에게 맞춰준 멋들어진 금테 지팡이는, 힘들이지 않아도 손이 절로 척척 앞길을 트게 해준다.

우람한 체격이 눈에 띌까 걱정인 김서방에게 지어준 산뜻한 셔츠는, 가벼우면서도 말쑥한 분위기로 속 여린 청년을 감싸준다. 온몸이 검은 깃털로 뒤덮인 말없는 손님에게 지어준 케이프코트는, 흰 스카프가 어울리는 멀끔한 차림새를 선사해 마음 놓고 거리를 다닐 수 있게 해준다. 먼 길을 떠나온 흰빛 말씨의 어린 신부에게 지어준 화사한 자줏빛의 재킷은, 천리를 내키는 대로 거닐어도 힘겹지 않게 기운을 북돋아준다.

갓 개업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 가게는 언제나 그래왔다.
그렇지만 오늘 그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의상실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어떤 사장님이 있다.


사장님은 언제나 똑같이 가게에 머무르며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옷을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가게에 들르는 많고 많은 단골들 중에도, 사장님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똑같이 묘사한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가게엔 무한히 많은 사장님이 있는지도 모른다. 손님들 사이엔 그런 소문이 떠돌았지만 그 가게에 사장님은 언제나 한 명뿐이다.

곧 대학을 졸업하는 어느 젊은이는, 무뚝뚝한 아버지와 빼닮은 모습의 사장님이 묵묵히 옷을 지어주고는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며 꼭 안아주었다고 한다. 영정사진을 준비하느라 정장을 맞추려던 어느 영감님은,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친구와 빼닮은 모습의 사장님이 함께 수다를 떨며 일을 마치고는 언제나 건강하라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두고 옷집을 추천받아 온 어느 예비부부는, 주례를 맡기로 해주신 은사님과 빼닮은 모습의 사장님이 덕담과 함께 턱시도와 드레스를 지어주고는 언제나 행복하라며 기도해주셨다고 한다.

어느 시설에서 탈출해와서는 변장할 옷을 내놓으라던 어느 사형수는, 마치 집행 전날 찾아와 고해를 들어줄 신부님처럼 느껴지는 모습의 사장님이 이야기를 들어주고는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라며 번듯한 양복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 죄수를 뒤쫓아 가게를 찾아온 어느 요원은, 마치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넘나든 동료 선배처럼 느껴지는 모습의 사장님이 시계를 하나 맞춰주고는 늘 수고하는 걸 안다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전해듣고 찾아온 어느 민속학 교수는, 마치 먼 옛날 헤어진 친구처럼 그리움이 느껴지는 모습의 사장님이 편안한 세미정장을 지어주고는 언젠가 다시 보자고 정중하게 인사했다고 한다.

그 가게가 문을 연 지 35년이 다 되도록 사장님은 언제나 그래왔다.
그렇지만 오늘 사장님은 가게에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장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떤 아이가 있다.


매일 가게에서 일손을 거드는 그 아이는 손님들에게도 항상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 많은 손님들 중에서, 그 아이가 정확히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라곤 다섯 명이 되지 않았다. 그 가게의 그 귀여운 꼬마는 대체 무슨 연유로 거기 있을까.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그 아이가 사장님과 어떤 관계일지 추측할 뿐이었지만 아이는 그저 아이일 뿐이다.

누군가는 그 아이가 열다섯 쯤의 사내아이라고 했다. 작달막한데도 소매가 조금 남아 걷어올린 하얀 와이셔츠에 회색 조끼를 입었지만, 불편한 듯 타이는 매지 않고 단추 한두 개를 풀어둔 차림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대개는 사장님을 쫓아다니며 도구를 건네거나 옷감을 옮기는 등 잡다한 일을 도왔지만, 이따금 가게 한편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이런저런 디자인을 그려보곤 한다. 가끔 아이에게 옷을 맡기겠다는 호기심 많은 손님도 있었지만 언제나 조심히 거절할 뿐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그 아이가 열 살 남짓의 계집아이라고 했다. 언제나 연한 회색빛의 잠옷을 입고, 조그만 제 몸집보다도 더 조그만 곰인형을 항상 껴안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고들 했다. 대개는 가게 구석의 소파에 기대듯이 앉아 혼자 졸거나 종종 말동무를 거들 뿐이지만, 손님이 외출복 말고 편한 실내복을 찾으면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일어난다. 이것저것 묻고 재보더니 슥삭 재단해오는 아이의 잠옷은 너무나 편해서 입으면 스르르 잠이 찾아온다고 한다.

사장님이 아이를 거둔 이후 아이는 언제나 거기 함께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아이는 거기 없었다.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