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변칙으로 식량을 재배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작물이 빠르게 자라는데 필요한 것은 그저 약간의 음악뿐이었다. 물론 너무 많은 작물을 그리한다면 땅이 메말라 버리겠지만, 매 끼니에 필요한 감자 몇 개, 양파 조금 등의 정도는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다.
메이가 그리하는 것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작물로만 요리를 할 수는 없었고, 때로는 물물교환을 위해 마을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 하는 것 또한 익숙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물교환을 해 감자와 우유를 바꾸어 올 무렵에, 굶주린 듯한 아이를 만난 것도 그리 특별하지는 않은 일이었다.
독재자의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굶어 죽은 부모와, 먹을 것을 찾아 거리로 나온 아이.
메이는 그러한 모습들을 모른 척 할 수 있을 만큼 모질지 못했다.
주머니를 뒤적였지만 동전은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메이는 그게 아이에게 큰 도움은 되지 못됐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어린아이에게 동전을 건네봤자 분명 빼앗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대신에 메이는 다른 선물을 하기로 하였다.
평소 애용하던 트럼펫은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주머니에는 하모니카가 있었고, 적당한 이노말리티 음악 정도는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꼬마야, 집이 어디니?"
메이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기로 결심했다.
메이가 아이의 집에 따라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판자를 덧대 만든 작은 집. 비가 오면 물이 샐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 만큼 낡은 집에, 아이는 메이를 안내했다. 약간의 두려움과 걱정, 그리고 희망까지 그 모두를 더해 아이는 메이를 바라보았다.
"꼬마야, 세상에는 먹을 수 있는 게 참 많단다. 어디나 피는 노란 꽃을 아니?"
메이는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을 도울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을 도와도 그게 온전히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사람을 돕는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감사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자신이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안다. 그럼에도 메이는 그저 지나칠 수가 없었을 뿐이다.
메이는 주머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불었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집 안과 밖을 맴돌았다.
한마디.
바람이 불어왔다.
두마디.
바람이 휘몰아쳤다.
세마디.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부는 바람이 아이의 집을 맴돌았다.
네마디.
어디선가 새하얀 꽃씨가 바람에 날려 오기 시작했다.
다섯마디.
조금씩 조금씩, 꽃씨들이 날려와 집 근처 땅에 내려앉았다. 마치, 첫눈처럼.
여섯마디.
꽃씨들이 벌어졌다. 뿌리가 뻗어 나왔다.
일곱마디.
씨앗에서 싹이 올라왔다. 잎이 돋아났다.
여덟마디.
꽃봉오리가 올라와 그 노오란 자태들 드러내며 펼쳐졌다.
꼬마의 집 밖에는 민들레가 땅 위를 수 놓고 있었다.
신기함을 가득 담은 아이의 순수한 시선을 보며 메이는 웃었다. 드디어 아이답게 웃는구나 생각했다. 잠시 아이가 신기함을 만끽하기를 기다리며 메이가 하모니카를 정리해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다시 아이가 메이를 바라봤을 때, 메이는 웃으며 저 꽃들에 대해 설명했다.
민들레, 먹을 수 있는 꽃.
꽃 자체가 아니라 잎을 먹는 것이지만, 어디서나 잘 자라고 어디서나 잘 늘어나기에 이 아이 하나라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설명하였고, 그리 생각하며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 여린 잎을 골라 따 가면서 설명도 해 주었다. 맛은 쓸테지만, 그럼에도 배를 채우기 위해 열심히 먹는 아이를 보면서 메이는 웃었다.
그렇게 아이와 잠시의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달래고, 우는 것을 받아주고 난 후에, 메이는 그 집을 나섰다. 조금 늦게 돌아가게 되었지만,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이해해줄 것이라 믿으며.
그리고 메이의 의식은 날아갔다.
메이가 나간지 다섯시간이 넘었을 즈음, 단원들은 메이의 걱정에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한두 시간이라면 물물교환이 조금 힘들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세네 시간이라면 십중팔구 누군가를 돕고 있으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섯시간이 넘은 지금은,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찾으러 나가야 한다는 벨과 캐시를 이기지 못하고 다른 단원들도 각자 나가 메이를 찾기로 했다.
메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P 부서라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게 공존도 평화도 아니라는 것만은 메이에게는 확실해 보였다.
메이의 손톱은 이미 두 개 뽑혀 나갔다. 담뱃불로 손등이 지져졌고 여기저기 맞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명을 질렀다, 눈물도 흘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단원들을 버릴 수 없었다. 떡갈나무를 해하려 한다면, 그녀의 단원들도, 그녀가 아끼는 사람들도 해칠 것이기 때문에. 아픔을 참고 고통을 참고, 비명을 최대한 속으로 삼켜가며, 나오는 비명을 욕설로 채워나갔다.
그녀는, 생각보다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 강인함이 그녀를 지켜주지는 못했을망정.
묶인 손발목의 줄은 메이가 비명과 함께 몸부림칠 때마다 살갗을 파고들었다. 쓸린 자국으로 시작되던 상처는 메이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선명해져만 갔고, 어느새 상처로 이어졌다. 옅은 상처를 파고드는 줄에는 조금씩 붉은 빛이 번지기 시작하였고, 메이의 손목에는 핏방울이 아스라이 보였다.
메이가 그 줄의 속박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 노력은 줄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캐시는 쉽게 불안해졌다. 그동안 메이가 이렇게까지 늦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떻게 해?"
캐시가 불안에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었다.
불안하기는 벨도 마찬가지였다. 불안과 걱정을 품에 안았으나 벨을 기다림을 지키기로 했다.
"괜찮아 캐시, 괜찮아. 아마 누굴 또 도와주고 있을 거야, 메이라면 분명."
"그걸 어떻게 알아!"
캐시가 벨에게 소리를 질렀다.
모른다. 벨은 알고 있지 못했다. 다만 그렇게 믿고 싶을 따름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이 벨의 어깨에 스산한 한기를 얹고 떠나며, 벨을 캐시를 달래려 노력했다.
"메이잖아, 메이가 얼마나 대단한데."
벨이 웃었다. 아마도.
제이콥이 아이 둘을 살짝 끌어당겨 안았다.
"우리 꼬맹이들, 그렇게 걱정되면 찾으러 가볼까? 어디선가 누군갈 돕고 길을 잃은 걸지도 몰라. 그렇지?"
모나가 오랜만에 목소리를 높였다.
"제이콥, 그러다 애들이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해. 가만히 기다리자."
한이 그에 동조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생각해보자. 아직 초저녁이잖아."
왼손 손톱이 다 뽑히자, 다음은 오른쪽 손톱의 차례였다. 다만 다른 것은, 오른쪽 손톱은 뽑히는 게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오른쪽 손톱에는 새빨갛게 달군 쇠꼬챙이들이 억지로 손톱과 손가락 틈 사이의 여린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있었다. 메이가 비명을 지르든 말든, 그들은 그걸 뽑았다가 꽂으며, 다시 메이에게 답만을 요구했다.
메이의 입에 욕설이 섞였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떡갈나무와 관련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비명, 비명, 비명.
그저 비명뿐이었다.
쇠꼬챙이들이 달궈져 손톱 밑을 파고들고, 그녀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상처에는 소금물이 들이부어 진다.
눈앞까지 와서 위협하는 것은 벌겋게 달궈진 인두였다. 그 열기만으로도 충분히 눈이 아파왔으나, 메이의 입에서 비명과 욕설 외에 나오는 것은 없었다.
초저녁이 지나고, 결국 하늘이 짙은 남색으로 물들었다.
캐시의 불안은 커져만 갔고, 단원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두는 메이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메이를 걱정하며, 메이를 찾으러 어둠 속을어둠속을 헤매기 위해 마을로 향했다.
캐시는 한과 함께, 벨은 모나와 함께, 제이콥은 혼자서, 그렇게 세 그룹으로 나누어 어둠 속을 향했다.
캐시는 끊임없이 한에게 투덜거렸다. 왜 안 오는 거냐며, 왜 이리 늦는 거냐며,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냐며, 반쯤 울먹이었고, 반쯤 투덜거렸다.
벨은 그저 입을 닫았다. 불안하였으나, 그 불안을 타인에게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벨은 모나도 메이를 걱정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하여 더 괜찮은 척 굴었으나, 그래봤자 아이는 아이었다.
모나는 벨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그저 벨의 손을 꼭 붙들어 줄 뿐이었다.
제이콥은 불안하였으나 그 사실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분주하게 마을을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눈을 움직이며, 분주하게 메이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메이의 아름다운 다갈빛 머리카락이 물에 젖어 아무렇게나 엉켜갔다.
머리가 억지로 물에 쑤셔박히고, 숨을 쉴 수 없어 억지로 참던 폐는 한계에 다다라 결국 물을 들이켜고 말았다. 그렇게 기도가 물로 차갈 때 즈음, 메이의 머리는 다시금 외력으로 인해 물 밖으로 끌어 올려졌다.
메이가 기침하며 물을 토해냈다. 공기가 부족해 눈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거뭇거뭇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것은 시가를 피우며 메이에게 같은 질문을 하는 남자뿐이었다.
"그래서, 그 원리가 뭐지? 넌 어디 소속이지?"
메이는 대답 대신 눈을 감았을 뿐이었다. 남자는 그를 대답으로 받아들이고는 다시 메이의 얼굴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메이의 기침 소리와 욕설, 비명이 방안을 떠돌았으나, 방 밖으로 빠져나오지는 못하였다.
캐시는 민들레가 수놓은 마당을 발견하고 직감적으로 이것이 메이의 흔적이라 눈치챘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 아이를 발견하고 화를 내며, 메이가 어디있느냐 물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아이의 울음뿐이었다.
한이 그런 캐시를 말렸다. 그러나 두 아이 모두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두 아이 모두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화를 내었지만, 결국 그건 흐느낌으로, 그리고 다시 악에 받친 눈물과 비명으로 변해갔다.
한은 결국 두 아이를 토닥였다.
그렇게 별과 달이 하늘을 흘러갔다.
손가락 하나가 회색 바닥을 뒹굴었다. 막 자른 손가락은 단면에서 피를 흘리며 바닥들 붉게 물들였다.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 짧게 자른 손톱, 수십 년을 음악에 종사해온 듯, 굳은살이 군데군데 박인 손가락.
메이의 것이었다.
앞으로 트럼펫은 무리겠네… 메이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잠시 정신을 놓았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무통은 잠시동안 이어졌다. 상처가 불에 달군 인두로 지져질 때까지.
"이래도? 응? 이래도? 이래도 말 않나 볼까?"
메이가 비명을 지르고, 또다시 반복되었다.
손가락이 몇 개 없어지면, 음악은 어떻게 할까. 벨처럼 타악기라도 칠까. 메이가 흐릿한 정신 속에서 멍하니 생각했다.
메이의 의식이 다시 날아갔다.
벨은 헤맸으나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읊조린 메이의 이름의 10분의 1, 아니 20분의 1만을 외쳤으나 벨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이제 갈라져 나왔다. 목이 쉬어버린 벨을 모나가 조심히 달래며 말리고 있을 뿐이었다.
저 멀리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벨은 한 줌의 희망을 품고 그곳으로 달려 나갔다. 너무 무리하게 달려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하였지만 결국 넘어지는 일 없이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곳에 기다리던 것은 캐시와 어느 아이가 울고 있는 장면이었다.
한과 모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아이를 달래려 노력했다. 그렇게 그들이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벨은 자리를 뛰쳐나갔다.
캐시처럼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메이를 찾아야 했다.
메이의 옷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였다. 폭행과 인두는 메이의 몸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제는 슬슬 화풀이에 가까워진 고문은 메이의 몸을 망가뜨리기 충분했다.
메이의 발목은 부러졌고, 팔은 기괴한 각도로 구부러졌다. 자잘한 상처와 함께 부러진 뼈가 피부를 찢기도 했다.
음악은 이제 메이와 먼 것 같아 보였다.
더는 음악을 할 수 없어 보였다.
메이는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마저도 비명으로 목이 쉬어 노래인지도 알기 힘들 정도였다. 이는 곧 폭행으로 가로막혔다.
메이가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메이의 배를 때리던 손이 살짝 빗나갔다.
메이를 찾는 벨을 찾아 한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한이 마주한 것은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메이를 찾고 있는 제이콥이었다.
제이콥은 메이가 물물교환한 집을 찾은 상태였다.
메이가 감자와 우유를 바꾸었다는 것도, 그리고 어느 쪽 길로 갔는지도 들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 메이는 없었다. 메이는 없었다.
메이는 그 길 어딘가에서 증발해버렸다.
벨은 뛰었다. 뛰고 또 뛰었다. 온 마을을 뛰어다니며 메이의 이름을 미친 듯이 외쳤다. 그러나 메이는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벨에게 상냥하게 너무 뛰어다니지 말라며 말해줄 것 같은 메이는 벨의 머릿속에서만 그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메이! 메이! 메이!"
벨이 몇번이고 몇번이고 불러 울린 그 외침은 울리어 돌아오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외침. 그 외침이 돌아오고 돌아오기를 반복했을 무렵, 벨은 지쳐버렸다. 헉헉대는 숨소리에 섞인 조급함이 벨의 몸을 좀먹어갔다. 그러나 벨은 그런 줄도 몰랐고, 알았다 한들 멈출 생각조차 없었다.
메이가 없는데 어떻게 벨이 자신의 몸을 아낄 수 있겠는가. 벨은 간절했고, 절실했으며, 또한 조급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메이도, 한도, 제이콥도, 모나도, 캐시도, 그 누구도 없이 벨은 혼자 달렸다.
벨의 세상은 조금씩 무너져내려 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벨이 그를 인정하게 된 것은,
그저,
동이 트는 하늘의 아스라이 비치는 하늘색으로부터 내리쬐는 빛이 비친 색 때문이었다.
저 멀리 흑백의 세상 속의, 어지러이 놓인 쓰레기더미 옆에 선혈로 물든 다갈색 머리를 보았을 때, 벨은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벨은, 그럴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메이는, 이미 아스러졌기 때문에.
붉은색으로 물든 메이의 너덜거리는 옷과 피를 토한 듯 붉게 물든 메이의 얼굴. 온몸의 상처와 멍 자국. 손 발목이 새빨갛게 쓸린 자국.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와 피투성이 상처들까지.
이는 이미 살아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리만치로 창백하고 차가운 메이를 발견한 벨은 그를 인정할 수 없었다.
메이는, 따듯해야만 했다.
언제나처럼.
벨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벨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이건, 전부. 그저 악몽이었을 뿐이다.
그리 생각하며, 울긋불긋한 색으로 물든 메이 옆에 조용히, 그리 자리를 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