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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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개가 싫다.

내 어린시절은 술 안주 삼기에 굉장히 적절하다. 나를 낳은 어머니는 대구에서 무진까지 차를 몰고 오는 수고를 해 가면서 갓난아이를 무진시 지하철 역에 버렸고, 때마침 막차를 놓친 소망 고아원의 원장님이 부모 잃은 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무진이 늘 그렇지만 그때는 심한 안개가 끼어 있었기 때문에 원장님은 내 이름을 '무연'이라 지으셨다. 나는 그곳에서 자라 교사님들을 친 부모님처럼 여기며 양부모님이 날 입양하기 전까지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가 끝나면 나는 교사님들중 한분께 바닷가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그곳에서 흙으로 작은 세계를 빚으며, 혹은 떨어지는 해에 경의를 표하며 어둠을 기다렸다. 놀다 지치면 방파제 옆의 가로등에 기대서 약간의 꿈을 꾸었다. 교사님은 먼 발치에서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즈음의 나는 안개를 매우 좋아했다. 눈 앞이 안 보이는 체험도 신기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안개가 심한 날에는 친구가 한명 오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짙게 낀 날이면 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잠을 청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고개가 옆으로 떨어지고, 잠이 깨고 나면 나는 언제나 물방울 무늬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있었다. 아직도 소녀의 외관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이유는 그녀가 내 어린시절의 유일한 친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나이도 물어보지 않은 채 장난을 쳤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감정을 공유했다. 내게 다른 아이들은 관심사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했다. 아주 가끔 안개가 끼지 않기라도 하면 나는 분무기로 물을 뿌려대 안개를 기원하며 가로등에 주저앉아 오지도 않는 잠을 청했다. 교사님은 그걸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리곤 하셨다. 가끔 연락하는 소망 고아원 교사님들중에서 유일하게 연락이 되지 않는 분이시지만 성정은 평온하고 따뜻하셨던걸로 기억한다. 내 생일에는 조금 늦게 돌아가도 별 소리 안하셨던 분이니까.

내 생일은 10월 2일이었다. 지하철역에서 원장님에게 발견된 날짜는 4월 7일이요, 딱 한번 만나본 친부모는 내 생일이 4월 5일이라고 얘기해주었지만 어느샌가 내 생일은 10월 2일이 되어 있었다. 어느날 그녀는 내게 자신과 처음 만난 날이 10월 2일이니까 우리끼리는 10월 2일을 생일로 하자고 얘기했고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생떼를 써서 내 생일을 10월 2일로 바꿔버렸다. 다음 날 소녀는 어딘가 기쁜 표정을 지닌 채 바꿔줘서 정말 고맙다고 대답했다. 아직도 난 그녀가 내가 생떼를 부린 일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귀신이라느니 스토커라느니 놀려대지만 난 그런 귀신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소녀와 놀고 집에 가는 길은 늘 약간 씁쓸했다. 안개가 자욱한 길을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교사님 곁에서 나는 늘 칭얼대며 있다 다시 잠이 들고는 했다. 눈을 감으면 늘 소녀가 꿈에 나왔고 그제서야 나는 원없이 놀다 꿈에서 깨었다. 꿈에서 깨면 놀랍게도 항상 고아원 앞에 차가 도착해 있었다. 그러면 난 이제 눈을 감아 조용히 마음 속으로 '고마워' 라고 말하는 그런 날. 그게 내 일상이었다.

소녀와 나는 꼬박 3년을 같이 지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어린 소년은 이제 중학교 1학년이 되었으며 소녀도 초등학생이라기 보다는 중학생이 되어갔다. 우리는 일몰을 수도 없이 보았고 서로를 안개 속으로 수도 없이 떠나보냈다. 교사님의 감시를 피해, 바닷가 안에서 우리들만의 모험을 했으며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우산을 같이 쓰고 지냈다. 물에 반쯤 젖어 창백해보여도 그때만큼 투명한 웃음은 본 적이 없다고 맹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해 10월 2일 우리는 마지막 생일파티를 했다. 교사님의 묵인 하에 나는 생일 케이크와 카드를 써 갔고, 그때 마침 짙게 낀 안개를 축복하며 가로등에서 잠이 들었다. 잠이 깨었을 때는 약 10분이 지난 후였다. 나름 그날만은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자부한다. 일몰은 늘 그랬듯이 멋졌지만 소녀의 눈에는 어딘가 불안감이 있었다. 우리는 같이 생일 케이크를 불었고, 파도와 바람이 노래를 불러주었으며 별빛과 함께 해안을 걸었다. 소녀는 밤이 깊어가자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날 집에 가라고 재촉했었다. 나는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일 또 보자고 말을 건넸고, 소녀는 앞으로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노력해보겠다며 대답했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적어도 이유라도 들어두었으면 이렇게 한탄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밝게 웃으면서 그러면 나중에 다시 보자고 인사한게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기억이다.

다음날부터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안개가 아무리 짙게 껴도, 전날 밤을 아무리 새도 잠은 오지 않았고 물방울 원피스는 내 눈앞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다음해 10월 2일까지 그 헛된 일을 계속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11월에 나는 입양되었고 미국으로 떠났다.

이국의 땅에서 새로 얻은 부모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아버지는 비누를 만드는 작은 회사에 다니셨다. 항상 경건한 마음가짐을 강조하셨던 분이셨다. 어머니는 가정주부로 일하고 계셨고, 주로 방 안에서 이상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게 기억의 대부분이다. 그 서류들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대답은 해 주지 않으셨다. 지금 와서 짐작하기로는 아마 내 입양과 관련된 서류거나 아버지의 회사에서 날아온 공문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내 목표는 어떻게든 한국에 가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양부모님은 한국에 친지가 있었고, 돈 역시 충분했기 때문에 나는 여름방학마다 한국에 가는 호황을 누렸다. 내 목표였던 무진시에는 항상 들렀으나 자세한 기억은 신기하게도 남지 않았다. 지난 6년동안 무진시에 방문했던 것 중 가장 선명한 기억이라고 할 만한 건 고등학생 2학년 때의 기억이다. 나는 무진시로 가는 고속버스에 타고 있었고, '아는 친구'를 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갔었다. 무진시 입구에 있는 "무진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팻말 구석구석 녹이 슬어 있었다. 안개는 엄청나게 짙게 꼈다. 일기예보에서는 무진시의 안개가 얕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실망했던 차인데 꽤나 짙은 안개여서 굉장히 기뻐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기억은 없다. 그 다음 기억은 고속버스에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비웃음을 짓는 듯한 하얀 팻말을 본 게 전부이다. 이 여행을 제외하면, 난 여름방학에 매번 가던 무진시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안개가 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소망 고아원은 그대로인지. 원장 선생님과 주고받는 편지에서 유추해야 실낱같은 장면이라도 떠오를 뿐이다. 단편적으로 소망 고아원에서 애들이랑 노는 장면, 혹은 평상복을 입은 사람 둘이랑 이야기 하는 장면. 영화의 필름을 억지로 자른 것 같이 뚝뚝 끊기는 그런 그림 몇 개가 전부다. 아직도 궁금하다. 나는 매년 무진에서 무엇을 했던 걸까. 해안가를 가기는 갔을까. 가로등에 누워는 보았을까. 소녀를 다시 만났을까. 미국에서 8년동안 생일을 보냈지만 나는 여전히 한국사람인것과도 같다. 내 기억은 여전히 무진 속에 있다. 안개가 짙게 낀 그 해안가에서 일몰을 바라보며, 영원히 정지한 채로 멈춰있다.

재작년에 대학교 입학 기념으로 한국에 다시 갔었다. 무진시를 들러 해안가에 다시 가 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갔는지, 가지 않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다. 인천 공항의 안개는 기억나는데. 무진시에 있던 미국에 있던, 안개가 끼는 날이면 그 여자아이 생각이 난다.

그래서, 나는 안개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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