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화, 또는 죽은 박달나무에게 어떻게 예술을 설명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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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길거리의 편의점에서 만나기로 했다. 승은 차가운 방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아 바닥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 십분. 지금은 오후 네 시 오십 분. 시간은 아직 넉넉하다.

그는 대충 세수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금이 잘게 간 화장실 창문밖으로 박달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명천구 이권동의 마스코트인 나무였다. 승이 처음 상경하여 이 동네에 올 때에도, 사람들이 이 동네를 하나둘 떠나갈 때에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던 나무. 고대에는 신으로 숭배받았다고도 하지만, 현재는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젊은 예술가들의 오바이트를 받아내는 처지일 뿐인 나무. 승은 그 나무를 가만 응시하며 얼굴에 물을 묻혔다. 나무가 가진 것이 없는 것만큼 그 역시도 가진 것이 없었다.

승은 다 벗겨진 벽지 아래에 떨궈 놓았던 옷가지를 주워입고 문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가면 박달나무가 더 잘 보였다. 아직도 박달나무를 구에서 신경이라도 쓰는 지, 접근 경계선이 주위에 둘려 있었다. 승은 엉성하게 설치해놓은 경계선을 넘어갔다. 나무는 밤새 고초를 많이 겪었는지 새 생채기가 많이 생긴 모습이었다. 승은 나무 외피에 손을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매일 집을 나설 때마다 하는 일과였다. 이러한 일종의 기도를 하고 나면, 어딘가 마음의 안정이 찾아옴을 승은 알고 있었다. 손에 무언가가 집히자 그는 눈을 떴다. 어딘가 거칠거칠하고 손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무언가가 나무 표면에 있었다. 승은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 무언가를 자세히 관찰했다. 어떤 애벌레의 고치가 붙어있었다. 이런 때에 애벌레가 우화를 하는건가, 하고 승은 얼굴을 찌푸렸다. 하긴 이런 동네인데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변칙 예술가가 모여 살고 있는 동네가 아닌가.

어느덧 시간은 오후 다섯 시. 가난한 예술가들과 모든 것을 포기한 젊은이들이 술을 마시고 온갖 깽판을 부려놓기로 유명한 시간대다. 아니나 다를까 승이 길을 나서자마자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오더니, 온갖 소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소음의 크기는 제각각이었고, 각자 내지른 이의 체념의 크기만큼 제각각이었다. 승은 고개를 빼고 길 저편에서 보이는 희끗희끗한 무언가를 바라보았다. 요전날처럼 속이 울렁거리며 취기가 돌지는 않는 것을 보아하니 소주를 뿌린 인지 재해를 공중에 휘갈기는 짓은 안 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평소라면 구경하러 갈 승이었지만 오늘은 약속이 있기 때문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승은 소음이 나는 곳에서 고개를 돌리고 집에서 고작 10분도 걸리지 않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왔냐."

승이 퍼렇게 네온사인을 공중에 흩뿌리는 편의점 간판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현과 진은 이미 창가에 있는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승은 간신히 입꼬리를 올려 보이며 둘의 어깨를 쳤다.

"뭐하러 여기로 왔어."

"니 우울해 하는 게 전화 너머로도 보여서, 위로해 주려고."

현은 이미 컵라면을 사서 세 사람당 하나씩 물을 올려놓은 참이었다. 승은 겸연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술도 좀 얻어 먹으려 한다. 낙선 기념, 한 번 사시죠."

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현이 제지하지 않는 투가, 아무래도 둘이 서로 작당하고 모인 듯했다. 승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퍽 좋은 친구들 뒀다. 빨리 맥주 한 캔씩 들고 와. 근데 왜 술집으로 오라 안 하고?"

"여기 술집 갈 만큼 돈 있는 새끼가 어딨어. 이 새끼는 월세 밀린지 세 달이란다. 나는 급여 밀린지 세 달이고. 좆같은 담당자 새끼, 이거 홀랑 먹고 튀는 거 아닌지 몰라."

진이 가라앉은 투로 이야기했다. 승은 진의 얼굴을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지 않았으므로 표정은 알 수 없었으나 말투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는 진이 지난주에 보낸 메일을 기억해 냈다. 명천동에서도 이름 있는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가 있었고, 그 전시회를 홍보하는 작업을 했는데 아직도 돈을 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전시회는 성공했지만, 그 전시회에 참가하지 않았던 진에게 돌아가는 몫은 없는 듯했다.

승이 계산한 맥주 캔을 들고 셋은 자리에 앉았다. 서로가 서로를 직접 본 지 꽤 되었으므로 할 이야기는 많았다. 광고 디자인을 하는 진과 승처럼 소설을 쓰고 있는 현은, 각자의 멍에에 매여있었고, 멍에는 좀처럼 벗겨지지 않는 듯했다. 벗겨지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어느 정도 감내했고 어느 정도는 저항의 의사를 내비쳤으나, 내비칠 뿐이었다. 그뿐임을 그들 자신도 너무나 잘 알았다.

"너 낙선은 어떻게 된 거냐?"

시간이 지나자 캔이 한둘 늘어났고, 그 기세를 몰아 진이 승에게 물었다. 진과 현이 떠벌이든 말든 아무 말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기만 하던 승은 자신에게 날아온 질문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낙선이 어떻게 돼, 되기는."

"뭐라 심사평도 안 나오디? 너 예선은 붙었다고 했잖아, 저번에."

승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사평은 나왔지. 나오기만 했으니 문제지…"

"그러면은, 1등작이 뭐냐? 난 거, 1등작 궁금하던데. 그 뭐시냐, '명천 변칙문학상'에서 1등 먹은 놈은 뭐가 다르데?" 현이 인상을 쓰며 물었다.

승은 현에게 똑같이 인상을 써보였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의자에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니네 나 위로해주러 왔으니까 내 이야기 좀 들어야 한다."

"오케." 진은 다 마신 캔을 접어 재활용 투입구에 던져 넣었다. "니 쌓인 거 많지. 딱 보면 보인다니까."

"어, 더럽게 많다."

승이 팔을 양옆으로 쭉 피자, 옆에 있던 현이 옆으로 몸을 피하며 물었다.

"아니, 1등작이 어떻길래 니가 이리 반응이 요상하냐."

"1등작 설명이 그렇게 쓰여 있더라. '새로운 문단의 바람을 일으킬 소설. 자연주의를 효과적으로 담아내면서도 독자에게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 작품…' 등등. 내가 그거 읽어봤다? 어, 생생하긴 생생해. 읽다가 막 손에서 덩굴이 자라나. 그리고는 온몸을 덮지. 책도 놓칠 정도로 강렬하게 온몸을 얽어매는 거야. 그러면 잠이 들고 꿈을 하나 꾸는데, 그게 삐까번쩍하긴 하더라. 무슨 에덴 동산에라도 온 것 같이 주위엔 사슴들이 풀 뜯고 자빠졌고 새들은 지저귀고, 장난 아냐. "

"효과 많이 썼네. 새빠지게 고생했겠어. 그거 효과 때문에 1등 한 거 아냐?"

진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승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내가 집에서 반변칙성 텍스트 읽기 켜놓고 봤지."

"어떻든?"

"어. 약간… 그 느낌이던데. 왜, 사건 중심이고 문장이 얄팍한. 그…"

"어떤 거, 장르소설? 웹소설?" 현이 끼어들었다.

"어, 그런 느낌? 자연주의라고는 하는데, 나중에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는 코빼기도 없더라. 문장 호흡도 너무 길거나 짧고, 사건도 부실해서. 난… 잘 모르겠더라." 승은 우울한 표정으로 라면 건더기를 집어 먹었다.

"뭐… 그래도 효과가 좋나 보지. 아니면 아이디어가 좋던가. 변칙 효과가 중요하긴 하잖아?" 진은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변칙에 방점을 찍어 놓든가 했어야지, 무슨 그게 소설을 논하는 대회야."

승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완연히 묻어나왔다. 셋은 이내 말없이 라면을 먹었다. 승은 이따금 한숨을 쉬었고, 먹다 말고 허공을 쳐다보았고, 진과 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 평가는 어떻든." 보다 못한 진이 승에게 말을 걸었다. "니 글에도 심사평 나왔다면서?"

"어어. 나왔어. 근데 그게 더 빡친다. 아오… 진짜."

승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현은 옆에서 턱을 괴고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심사위원이… 첨 보는 사람들인데? 출판사 사장에다가 수필가, 김 교수는 아는 사람이고. 세 명이네?"

"넌 또 그걸 어떻게 찾았냐, 재주는 좋아요." 승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현을 쳐다보았다.

"김 교수는 누구냐? 난 모르는데."

"무진대 국어국문과 교수. 넌 그림 쪽이라 모를 것 같았다." 현이 여전히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심사위원 중에서 유일한 소설가야. 그마저도 00년대 이후로 소설 안 썼고. 이거 심사위원부터 좀…"

"기회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렇지 뭐." 승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게다가 당선되면 출판도 되고… 그럼 인세 나올 거 아냐."

"맞말이다." 진이 라면 국물을 들이켜다 말고 말했다. "그래서, 심사평이 어떻든?"

"김 교수는 그러더라. 내 소설의 구조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표절했다는 거야?" 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좀 말을 막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고, 식상하다는 거겠지." 여전히 얼굴을 손바닥에 묻은 채로, 승이 말했다. "요즘 유행하는 소설하고 비슷한 전개래. 난 읽어보지도 않은 소설이었는데. 참 트렌디해, 그 양반. 그리고 내 문체도 까더라고.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숙련되지 않은 문체다…' 등등. 연습하긴 해야겠어… 난 내가 문체는 확립된 줄 알았는데."

"그거 안 내서 다행이네. 난 얼마나 얻어맞을지 상상이 안 간다. 김 교수, 대학 내 정치질 사건으로 입방아 좀 찢기더니 말은 더럽게 험해졌네." 현은 휴대폰을 덮고 두 친구를 쳐다보았다. "나머지는?"

"음. 출판사 사장은 딱 한 바닥 썼더라. '가독성 등의 문제로 내용 파악이 어려운 소설이었습니다. 독해가 어려운 이유로 해당 소설은 평가를 거부하겠습니다…' 등등."

"이건 뭔 개소리야." 현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안 읽었다는 이야기야?"

"그런 듯." 승은 깍지를 끼고 목을 받쳤다. "내 반년 간의 노력을 한 번에 보내버린 거지."

진이 라면을 먹다 말고 끼어들었다. "니가 저번에 보내준 거 읽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던데. 물론 나야 소설을 잘 안 읽지만 뭐… 재미도 있고 꽤 읽히기도 하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 승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 양반은 그렇게 안 보이나 보지."

"그 사람 영미 문학의 대가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 아니, 그쪽 문학은 잘도 읽으면서 한국 글자는 도무지 읽히지가 않는대? 야… 엄청난 인간이다. 승, 그 새끼 원하는 대로 쓸 거야?"

현은 황당해하는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승은 그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방향. 현은 그 심사평을 넘겨 버렸고, 그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그리고 문단에서 배척을 당했지. 승은 캔을 들이켰다. 기류를 따르지 않으니 돌아오는 것은 낙오였다. 승은 문득 같이 소설을 쓰던 숱한 친구들을 떠올렸다. 모두가 출판사로, 아니면 아예 다른 직종으로 떠나가고, 이제는 낙오자 둘만 남았다. 시류에 적응도 못 하고 딱 맞는 타이밍에 남에게 빌붙지도 못해서, 그냥 외따로 떨어져 버린 두 머저리. 승은 애써 거칠게 내뱉었다.

"뭐하러. 지 좆대로 안 읽으면 나도 내 좆대로 써야지."

"그래, 씨바. 예술을 하는데 대중을 왜 생각해! 돈만 벌면 다야? 쉽고 자극적이면 다야? 멍청하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들이 무슨…"

현이 창문 너머로 침을 뱉었다. 그는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승은 착잡한 마음에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맥주를 들이켜던 진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현, 그게 뭔 소리냐. 대중하고 우리를 왜 가르고 그래?"

"아이씨, 넌 왜 그래? 우리가 만들어 낸 작품을 지들이 맘대로 폄하하고 찢고 부수겠다는데, 그걸 그럼 다 신경써가면서 비위 맞춰야 해?"

현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반대로 진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분위기는 냉랭해져 갔다. 승은 맥주를 들이켰다. 그는 이런 분위기를 견딜 수 없이 싫어했다. 결국 만드는 건 없는 탁상공론의 현장, 논쟁. 실재하는 무언가는 없이 신념만 내세우는 강건한 태도들.

"그런 게 아니라 감상하는 사람들하고 우리하고 계급을 나누지 말라는 거지. 저 사람들이 마냥 수용만 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

"아, 왜 니들이 싸우고 지랄이야. 앉아, 여기 한 사람만 기분 좆같으면 되지, 왜 셋 다 기분 더럽게 만들려고 해. 앉고, 그냥 다른 이야기 해. 됐다, 이 속 좁은 새끼들아."

현이 뭐라 되받아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자 승이 황급히 말했다. 현은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였지만 얼굴만 구길 뿐, 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진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내 셋은 다시 라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라면 후루룩거리는 소리만이 그들 사이를 메꾸었다. 말을 그만두기 전보다 더 시끄럽다고, 승은 생각했다. 식사가 대화보다 더한 전달 수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식사가 대화를 대신할 수도 있겠지. 승은 건더기를 입에다 쑤셔 넣었다. 이미지가 텍스트를 대체한 것처럼. 국산이 외국산에 지는 것처럼. 의미 없는 대구의 나열 속에서 승은 문득 소주가 마시고 싶었다.

잠시 후 현이 말을 꺼내면서 요란한 침묵은 달아나고 말았다.

"마지막은?"

"응? 마지막… 아, 그 수필가. 어…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게 뭔 소리냐." 진이 팔꿈치를 괴고 물었다. "평가, 받았을 거 아냐?"

"이게 왜 변칙이냬." 승은 세 번째 캔을 따며 말했다. "나는 분명히 변칙적 효과를 넣었는데."

"그 참신한 새끼는 또 뭐야." 현은 진저리 난다는 표정을 하며 말을 이었다. "니가 출품한 거, 저번에 보여준 그 소설 아냐? 한 노인의 시점에서 쓴 이야기. 아마 읽다가 감각 같은 게 노인 수준으로 떨어졌던 것 같은데, 맞냐?"

"맞아. 나도 이해가 안 돼서 여차여차 그 양반이 사는 곳으로 찾아를 갔어. 가서 물어보려고 했지. 그냥 읽어만 봐도 변칙적인 부분이 바로 보이는데, 왜 변칙인지를 모르시느냐고.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느냐고 물어보려고. 자택 앞 카페에 떡하니 있더라. 근데 불러도 들은 척을 안 해. 바로 옆에서 뭐라 뭐라 말하는데. 결국 나왔지. 나중에 메일이 하나 오더라. '그냥 조금 이상한 글 정도로 변칙이라고 운운할 수 없다… 내용이 변칙에 관한 게 아니지 않느냐…' 등등. 그 새낀 내가 옆에서 아첨했어도 들은 척도 안 했을 거야."

"맨날 보는 게 변칙 아니냐. 왜 그리 거기에 집착을 해?" 현이 세 번째 캔을 따다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 새끼 저번에 칼럼에 기고한 것 때문에 논란됐잖아. 변칙적인 주제의 글 이외에는 관심 없다고 하면서, 문단 내에 그런 거 들고 오는 놈은 가치 없다고 지껄였던데. 그래서 그놈이 그런거 아냐?"

"난들 알겠니." 승은 휴지를 한 장 뽑아 탁자에 흘린 라면 국물을 닦았다. "난 그게 이해 안 되던데. 아니, 이딴 판타지 세상에 산다고 판타지 소설을 써야 해? 왜 그냥 평범하게 사는 이야기는 쓰면 안 되냐? 삶이 재밌지가 않은데 왜 재밌는 이야기를 자꾸 쓰라 그러는지… 하루 하루가 사건이 쾅쾅 터져도 우리 통장에는 돈도 한 푼 없는데."

"난 곧 돈 받을 거야. 재수 없는 소리 마라, 이 새끼야." 진이 우물거렸다.

"돈 받을 약속이라도 있는 놈은 좋겠다. 난 돈 낼 약속밖에 없는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현이 말했다. 셋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노을은 하늘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온 사방을 뒤덮기 시작했다. 노을 속에 드러나는 이권동의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그냥, 존재한다는 말만이 어울릴 듯싶었다. 저 멀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고 쩝쩝거리는 소리 역시 울려 퍼졌다.

"심사위원 걔네, 어떻게 심사위원이 된 거야?" 진이 말을 꺼냈다.

"원래 변칙 문학 판에서 이름 있는 새끼들이었으니까." 현이 떨떠름하게 말하자 진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놈들이 이 판에서 중역이라니, 그러니 유화나 만화, 디자인, 그래피티, 조각, 심지어는 풍선 아트도 소설보다 잘 나가지. 우린 이게 뭐냐?"

"난 모르겠다. 그냥 소설을 포기해버릴까?" 승이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고개를 휘저었다. "남들처럼 그냥 재밌는 거 쓰는 거야. 신기한 거, 특이한 거, 남들한테 인정받을 수 있는 거. 실력은 접어두고 존나게 기똥찬 아이디어만 밀고 나가는 거. 그럼 적어도 자기들이 전문가인 척하면서 사람 무시하는 꼰대들한테는 먹히겠지."

"난 솔직히 써도 된다고 본다!" 진이 약간 취기가 든 표정으로 승의 어깨를 붙잡았다. "재밌으면 다 되는 거잖아. 독자도 재밌으니 좋지, 작가도 인정받으니 좋지. 아니, 예술 그거 중요해? 그거야말로 이 시대의 계급 분화와 투쟁의 주추 아니냐? 야, 현. 어떻게 생각해?"

그러나 현은 대답하지 않고 거의 다 먹은 라면 국물만을 들이킬 뿐이었다. 더 이상 말다툼하기 싫다는 현만의 표시임을, 승은 알았다.

승은 붉어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으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럼 나도 좋겠지. 근데 그렇게 쓰는 글들이 소설이냐고. 창작이긴 한가? 그냥 공산품 아니야? 똑같은 구조에 똑같은 요소… 아, 진짜 모르겠다. 그렇게 글 쓸 거면 차라리 재단에 취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거기 머리 좋은 애들 모여서 보고서만 두드리게 생겼더만."

그들은 잠시 말없이 캔맥주만을 들이켰다. 승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시야가 뱅글뱅글 돌다가 좁아지고 넓어지는 상태가 반복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거의 취해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취해갔으므로, 세상은 오히려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누가 너 취직시켜준대?" 말투가 흐트러진 현이 예고 없이 내뱉었다.

"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수재였어, 나쁜 새끼야. 존나 나는 고치였다고. 나비가 될 수 있었어."

승은 그렇게 말하고 낄낄거렸다. 웃음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딘가가 터진 것 같기도 했다. 어디가 터진 거지, 하고 승은 자문해 봤다. 복장이 터진 것 말고는, 그닥 뭐가 터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뭐가 웃긴 걸까. 뭐가 웃긴지는, 승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웃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승은 가끔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으나, 자세히는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냥, 몸을 들썩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승은 홀로 그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어느새 해는 정말로 져버렸고, 붉게 물들어 있던 도로 위는 어둠이 꿇어앉기 시작했다. 내내 들리던 비명 소리마저도 잠잠해진 상태였다. 그는 걸어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를 15분 만에 도착했고, 이는 전적으로 승의 비틀거림 때문이었다.

승이 비틀거린 것을 멈춘 것은 자취방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그는 자취방을 뒤로하고는 앞으로 한없이 걷기 시작했다. 승은 계속 걸어 박달나무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박달나무는 그대로였고, 박달나무에 있는 고치 역시 그대로였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치를 노려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고치가 꿈틀거리기라도 할 듯이. 고치는 그대로라는 사실이 왜 이리 증오스러운지 몰랐다. 고치는 뭔가를 내뱉기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승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런데 내뱉지 않는다니, 직무 유기나 다름없지.

그리고 고치가 꿈틀거렸을 때, 승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고치가 움직이고 있었고, 곧장이라도 찢어져 성충이 된 애벌레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승은 숨죽인 채로 고치를 관찰했다. 고치는 꿈틀거렸고, 그 이외의 것은 하지 않고 있었다. 술김에 봐서 꿈틀거리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고치는 정말로 진동하고

있었다. 뭔가를 내뱉으려는 입처럼. 누군가의 입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입이, 누군가의 말들을 내뱉고 있었고, 다시금 보니 그것은 입이라기엔 손가락이었다. 승은 멍하니 고치의 환영이 손가락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았다. 손가락은 점점 늘어났고, 점점 굵고 길어졌다. 마침내 고치가 10개의 손가락이 되었을 때 그는 눈을 비볐다. 비벼도 사라지지 않았다. 손가락들은 뭔가를 타자로 치고 있었다. 글자가 떠오른다.

"변화하지 않는 자에겐 권태가 깃들 뿐이다."

당연한 소리라고, 승은 생각한다. 굵은 활자로, 효과음과 함께 날아온 글자가 다시 변한다.

"변화한 자를 모르는 이들에게도 권태가 깃들 뿐이다."

이것 역시 당연한 소리라고, 승이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세상엔 아직도 당연한 것이 당연해지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승의 뇌리에 들면서 문득 모든 게 원망스러워진다. 그의 글을 쓰레기 취급하는 패션 창작자들과, 그의 이야기를 들어준 애꿎은 진, 현, 진이 말했던 예술 계급론과, 현이 말했던 좆같음과, 기회조차 없는 이 더러운 세상과, 왜 그를 낳았는지 그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먼 곳으로 가버린 어머니와, 그냥저냥 살아가는 이 거리.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느새 승의 손과 발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것들을 향한 분노, 인정받지 못함에 대한 슬픔, 배척받는 자의 후회와 다시금, 분노. 왜 다들 떠나가는지, 왜 그런 곳에 붙어 열심히 후빨을 해대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또 완벽히 모를 일은 아니었으므로 승은 얼굴을 부여잡고 울었다. 이번엔 울음이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이번엔 어디가 터졌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애써 눈물을 부여잡고 놓지 않는 눈꺼풀 사이로 글자가 떠올랐다.

"변화한 자는 알을 깨어 나간다. 그러나 그는 새와는 다르게 나아갈 신이 없다."

개소리라고, 승은 생각한다. 데미안에서 줏어들은 이야기의 무단 복제나 다름없는 문장이, 그는 싫었다. 그냥 다 잊고, 집으로 돌아가, 크게 자고 싶은 생각이 일었다. 그러나 동시에 승은 자신의 집이랄 곳이 없다는 것을, 낡아빠지고 보일러도 잘 돌아가지 않는 구질구질한 원룸과 쓰레기들의 종착역 이권동을 집이라고 부르기엔 아직 그의 자존심의 여력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쓰레기들의 종착역 이권동.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정확히 네 번 입안에서 되뇌이곤 승은 자신의 글이 쓰레기들에게 쓰레기 취급받는 이유가, 쓰레기들의 종착역 이권동에서 쓰레기 속에 파묻혀 쓰레기들 사이에서 살아가면서 써낸 쓰레기여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승은 알고 있었다. 결국은 다른 누군가를 조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뭔가를 바꿔낼 수는 없는 것이다.

개새끼. 승은 누구한테 욕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욕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씨발 새끼. 글을 읽을 줄도 모르고 사람 무시할 줄만 아는 더러운 새끼들! 이유는 없었고 단지 내뱉어야 할 것 같은 기분. 승은 구역질을 했다. 구역질은 깊고 어딘지 애달팠고, 그는 명치 끝이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승은 잘 체하지 않았지만, 왜인지 지금은 속이 너무 답답했다.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가, 하고 승은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욕이 아닌 무시와 모멸임을 승은 깨닫는다. 그래서 체한 것이다. 평소에는 잘도 먹던 욕이 아니라 다른 걸 먹었으니 이 사단이 나지. 승은 구토했다. 박달나무 앞에서 구토했다. 승이 처음 상경하여 이 동네에 올 때에도, 사람들이 이 동네를 하나둘 떠나갈 때에도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던 나무. 고대에는 신으로 숭배받았다고도 하지만, 현재는 술에 쩔은 젊은 예술가, 이를테면 승의 오바이트를 받아내는 처지.

"따라서 변화한 자는 알 대신 고치를 찢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승의 토사물 위로 굵은 활자가 떠올랐다. 승은 아무렴 좋았다. 단지 고치를 보고 싶을 뿐이었다. 열 개의 굵고 기다란 손가락은 어느새 짧은 하나의 뭉툭한 고치로 변해있었다. 고치는 간헐적으로 진동했다. 간헐적으로 진동하면서, 고치는 조금씩 찢겼다. 찢김은 느렸고, 거대했다. 그 거대함이 고치 외부로 영역을 확장하며 보이는 것은


나비




승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놈은 어디론가로 날아가고 없었다. 그는 나비가 어떻게 그렇게 빨리 우화를 끝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긴 이런 동네인데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변칙 예술가가 모여 살고 있는 동네가 아닌가. 승은 무릎을 일으키며 날아간 나비에 대해 상상했다. 길고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형형색색보단 칙칙한 파스텔 색조의 색상으로 이루어진, 그는 거기까지 상상하다 그건 나방이 아닌가, 하고 자문해본다. 하지만 어느 것도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사실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냥 자취방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늘 그랬듯, 세상은 여전히 돌아갔고 변칙 문단은 누군가의 지탄을 받았고 문단에 도전하는 이들은 많았으며 문단의 중역들은 파벌을 만들고 누군가를 바보로 만들었다. 변칙 소설은 팔리지 않았으며, 유화, 만화, 디자인, 그래피티, 조각, 풍선 아트에 밀려 전시회장을 뺏겼다. 너무나 당연한 알고리즘처럼, 세상은 그렇게 흘러갔고 진정으로 그 과정에 변칙은 없었다.

그러나 승은 저 멀리에 아직도 나비가 날고 있음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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