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한 짧은 메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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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곳은 어느 버스정류장이었다.

2.

여느 때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다. 그녀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살짝 지친 표정을 짓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안개를 뚫고 도착할 버스 따위는 없었다. 무진의 대중교통 체계가 그리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나는 나름 무진에서 몇 년쯤 지내온 경험으로 잠시 멈춰서 말했다.

“이봐요.”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 지친 표정 그대로.

“버스 안 다녀요. 터미널 쪽에 가서 택시라도 잡아요.”

내 말을 들은 건지 아닌 건지, 그녀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돈을… 두고 나왔어요.”

어눌하고 어색한 한국어. 그러고 보니 생김새도 약간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혹… 시 저쪽에 산에 가려면 어떻게 가죠?”

그녀는 손가락으로 안개 너머를 가리켰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북서쪽 산. 무영댐이 있는 곳. 살짝은 망설여졌다. 무영댐은 내가 담당하는 것 중 하나니까. 그러나 그녀는 딱히 내가 속한 세계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그곳에 가서 할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거긴 무슨 일이 있어서요? 댐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그녀는 머뭇거렸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빛이 역력했다. 나는 오히려 호기심이 들었다. 무언가 예감이 들었다.

“그럼 내가 데려다 주죠. 같이 가는 거 어때요?”

여전히 머뭇거림은 가시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그녀는 나란히 몇 분쯤 걸어 차에 도착했다. 차는 두어 번 털털거리다 시동이 걸렸다. 나는 차를 안개 속으로 몰았다.

밖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여전히 안개뿐이었다. 거리에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텅 빈 거리가 안개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뿐.

“이 안개 지겹지 않아요? 모든 걸 다 가려버리는데.”

“나는 지금… 까지 안개 본 적 없어요. 캔스필드에서 자랐죠.”

캔스필드라. 이상한 지명이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그 곳은 어떤 곳이죠? 뭐 여기처럼 해안도시인가요?”

“네. 하지만 한 번도… 이런 안개를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거긴 이상한 도시에요. 사람들의 욕망… 거짓말… 뭐 그런 것들이 부글거리죠. 나는 이렇게 모든 걸 덮는 안개가 좋아요. 그런 역겨운 걸… 가려주니까.”

“하지만 이 안개 속에 뭐가 숨어 있는지는 무섭지 않아요? 차라리 모든 게 드러나 보이는 게 진실되지 않나요?”

“모르겠어요. 그걸 알아야 할 필요… 가 있기나 한지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화는 이걸로 끝인 것처럼 보였다. 정작 아직 왜 그 산에 가고 싶어하는지 이유는 듣지도 못했는데.

“엄…그래서 그 캔스필드 얘기나 해줘요. 그곳은 어떤 곳이죠?”

그녀는 여전히 창 밖을 내다보았다.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나직하게 말소리가 들려왔다.

“난 부모가 없어요.”

“네?”

“아니면 부모가 둘이라 해야 하나.”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별로 즐거움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진에 어울리는 그런 분위기의 웃음이라고나 할까.

“날 낳은 사람들은… 날 입양보냈어요. 딱히… 원망… 하지는 않아요. 이유가 있었겠죠. 캔스필드의 그 사람들은… 부모라 부르기도 그렇네요. 필요했던 건 도시를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구걸…을 하고, 남이 다듬는 생선 훔쳐오고, 뭐 그럴 사람이… 하나 더 필요했던 거니까. 한 번도 부모라는 걸 느껴 본 적이 없어요.”

“아…” 나는 그녀에게 말을 붙인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이런 음침한 도시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 음침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그녀의 말이 맞았다.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일 필요는 없다. 나는 차를 안개 속으로 계속 몰았다. 안개는 차의 불빛을 탐욕스럽게 삼켜버리는 것도 모자라 모든 소리마저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계속 나직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소리를 애써 안개 속에 덮어두며 듣지 않으려 했다.

나는 차를 계속 몰았다. 아스팔트가 끝난 듯 차 밑의 땅이 덜그럭거렸다. 거의 다 온 것일까. 지독한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포기했어요. 아, 나는 그냥-”

그녀의 말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그 때, 차가 쾅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말이 끊겼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안개 사이로 철망이 희미하게 보였다. 도착한 것이다. 무인 초소를 설치하여 민간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며, 철망을 세워 출입을 막는다. 내가 세운 격리 절차인데도 잊어버릴 뻔 했군. 그렇다면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물론 해가 지지는 않았으니 상관은 없겠지만 어쨌든 썩 내키는 곳은 아니었다. 그녀가 앞좌석으로 몸을 내밀었다.

“길이 막혔나요?”

“그렇군요, 보아하니.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날 저기 너머까지 데려다 줄 생각이… 없죠? 아니에요?”

나는 살짝 간파당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그럼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죠?”

내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호수가 있죠.”

그녀는 대답을 듣지 못한 듯 계속해서 안개 너머를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영감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마을이 있죠. 호수가 품고 있는 마을이.”

“아… 역시.”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철망을 뚫고 나가? 아니면 댐 쪽으로 우회해서 가볼까? 아니면 여기서 그냥 돌아가야 하나? 나는 그녀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여기 오면 날 낳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녀를 낳은 사람들이 갑작스레 고향을 잃어버렸던 것. 그 비참함 속에서 살아갔던 것. 그러던 중 그녀를 낳았던 것. 그리고 버렸던 것. 캔스필드에 있던 이들과 싸웠던 것. 입양을 주선했던 고아원을 찾아갔던 것. 이곳까지 찾아오던 일. 하고 싶었던 말들. 나는 그런 것들을 애써 듣지 않으려 했다. 그것들은 이제 바꿀 수도 없는 과거의 일이다. 내가 더 이상 손쓸 수도 없는 것들. 그런 것들은 그저 시간에 깎여 내려갈 뿐, 보면 볼수록 아프기만 할 뿐이다. 나는 그녀의 말을 외면했다. 한참이고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끊길 줄을 몰랐다. 저 호수에서 물이 흘러나가듯 그녀의 이야기도 흘러나갔다. 결국 그녀 역시 그저 말할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고여 있는 물이 썩듯, 나오지 못하고 마음 속에 고여 있는 이야기도 썩어갈 테니까. 그러나 나는 거기에 적합한 대상은 아니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온전히 품어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저 이야기를 정돈하도록 하는 것뿐. 그런 생각에 나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럼 혹시 여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거 있어요? 아니면 해 보고 싶은 일이나?”

그녀는 살짝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음… 안개요.”

“네?”

“그냥 안개 속을 걷고 싶어요.”

나는 웃었다. “안개 속을 걷는다… 그건 거리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아니요… 그런 거 말고… 그냥 아무 것도 없는 곳을. 안개와 나 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곳. 군데군데 드러나 보일 것이… 없는 곳 말이죠.”

나는 잠깐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어디일까. 아무리 가도 안개가 걷히지 않는 곳이라. 그곳을 떠올리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SCP-521-KO. 아마 그곳이면 그녀의 바램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하나였다. 그곳의 격리 절차를 어떻게 깨고 들어가느냐.

3.

나는 차를 뒤로 몰았다. 곧 차는 매끈한 아스팔트 위로 다시 돌아왔다. 철망이 안개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돌아갈 때는 일부러 댐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그녀가 찾아갈 수 없는 마을을 가까이서나마 볼 수 있도록. 그러나 안개는 매정하게도 모든 것을 가려버렸다. 댐의 모습조차도, 거의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나는 가속 페달을 밟으며 고심했다. 어떻게 해야 SCP-521-KO의 격리를 깰 수 있을까? 육지 쪽으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경비대원의 눈을 피해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면 바다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그리고 미리 탐조등 같은 걸 가지고 간다면, 나중에도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아까 말했던 거. 진심으로 하고 싶은 거에요?”

“그… 안개 속을 걷는다는 거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혹시 머물고 있다는 그 숙소, 알려줄 수 있어요? 내가 내일 준비해서 데리러 갈게요.”

그녀가 말한 숙소는 꽤 큰 곳이었다. 무진에서도 나쁘지 않은 곳. 나는 차를 그곳으로 몰았다. 입구에서 나는 차를 세웠다.

“방까지 바래다 줄게요.”

“아니, 괜찮아요. 정말로… 그럴 필요 없어요. 내일… 다시 봐요.”

그녀는 차문을 열고 내렸다. 나는 그녀를 뒤에서 부르려 했지만, 그녀는 황급히 총총걸음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안개 속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내일, 내일이 있을 테니까. 나는 다시 차를 몰았다.

4.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보트를 빌리는 것은 쉬웠다. 물론 낡아빠진 작은 보트이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거기다가 덤으로 탐조등까지 빌려 준다 했으니, 필요한 건 다 갖춘 셈이다. 창문 밖의 안개는 조금은 사라져 있었다. 내 속도 그만큼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잠을 청하려 커튼을 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내가 방금 전 내려놓았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적막을 깨고 울려대는 전화기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이 시간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 따위는 없는데. 직장 상사나 동료라면 보안 처리된 핸드폰으로 걸 것이고, 이 무진에 따로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에 수화기를 들어올리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오늘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나 하나?”

“네?”

“SCP 개체들을 터무니없이 그 여자에게 보여 주지 않았나. 그 여자는 스파이야. 반란에서 온 스파이란 말일세.”

칼날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당신 누구죠? 그건 어떻게 아는 거고?”

“나에 대해서는 알 거 없네. 자네가 알아야 할 것,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야. 그 여자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는 걸세.”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군요. 설령 그 여자가 스파이라 쳐도, 난 그냥 격리 담당자입니다. 그런 건 요원들을 보내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 하지만 그 여자는 자네를 믿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가 추가적인 지시를 내릴 때까지 자네가 할 일은 분명하네. 오늘처럼 멍청한 짓은 절대 하지 말고. 705나 711 같은 위험한 것들을 보여주는 것은…”

“뭐라고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705?

“난 705-KO를 보여준 적 없습니다. 당신 누구야?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그깟 일련번호 한 번 틀린 것 가지고 이렇게 신뢰가 무너지다니. 그래. 뭐였더라… 아마…”

그 목소리에 확연하게 망설임이 배어났다.

“당신 모르지. 안 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 번만 더 벌였다가는 당신이 끌려가게 될 거야. 내가 당신에게 경고해 두지. 이만 끊겠다.”

“자네 그 여자에게 된통 당하게 될 거야. 후회하고 싶지…”

나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기록을 살펴보았지만 마지막 기록은 내가 보트를 빌리러 걸었던 것뿐이었다. 일련번호 하나 제대로 못 말하는 그런 전화가 진짜일 리는 없겠지만, 대략적인 사항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이 전화를 건 자들이 반란이나 다른 요주의 단체 인원이어서? 내가 감시당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밤을 보냈다. 커튼을 살짝 걷어보니 안개는 다시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밤을 꼬박 보내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그때쯤에는 나 역시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목소리를 믿을 수는 없었다. 일련번호 하나 제대로 못 말한다면 더더욱.

5.

그녀는 숙소 입구에서 이미 나와 있었다. 작은 백 하나를 손에 들고,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어제와 입었던 옷이 똑같았다. 나는 차를 세우고 그녀를 태웠다. 그녀가 웃어 보였다.

“이제… 어디 가는 거죠?”

“어제 말했던 거요. 안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

나는 차를 몰고 바닷가를 따라 달렸다. 도착하니 이미 배는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 넓지는 아니지만, 나름 모터도 달려 있으니까. 그녀는 차문을 열고 내렸고, 나는 트렁크를 열고 미리 준비해 온 조명등을 꺼냈다. 그녀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어… 혹시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요. 빠져 나올 때를 대비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내가 그 조명등을 배에 싣는 것에 뭐라 하지 않았다. 그 배는 내 생각보다도 작았다. 그녀의 무릎이 내 몸에 닿았다.

“아, 미안해요.”

“아니, 아니에요. 오히려 좋은걸요.” 그 말이 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내뱉고 나니 갑작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후회감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모터를 만지작거리는 시늉을 했다. 털털거리며 배는 출발했다. 어색함을 가득 담고서.

6.

SCP-521-KO까지는 멀지 않았다. 한 10분쯤 털털거린 다음에 그 패널이 보였다. 아마 본다는 것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녀가 목을 내밀고 그 쪽을 바라보았다.

“어…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이 바뀌면… 세상도 바뀐다. 맞나요?”

“아마 비슷했던 것 같은데요.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될 것 같은데.”

“글쎄요.”

그녀가 물을 내려다보았다.

“저는… 좀 달라요. 세상은 안 바뀌고 바뀌는 건… 자기 감정이죠. 세상을 보고 무엇을 느끼느냐가… 달라지는 거죠. 똑같은 걸 봐도 어떤 감정이 드느냐가 바로 문제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배가 제방에 부딪쳤다. 제방을 잡고 기어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붙잡는 곳마다 끔찍하게 미끄러운 데다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손바닥을 까져 가며 가까스로 기어오르고, 위에 엎드려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고 기어올랐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함께 끝없는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그 속을 무어라 해야 할까.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어떤 것도 없었다. 어떤 것도 변하지 않을 영원한 곳. 무덤 같은 곳이었다. 나는 그녀를 곁눈질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 안개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그녀와 내가 똑같은 걸 보면서 느끼는 다른 감정은 뭘까.

사실 내가 그 끝없는 안개 속을 걸으며 든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녀와 함께 걷는다는 게 싫었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만, 이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도 분명히 들었다. 시계를 슬쩍 들여다보니 한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10분이 지나면 내가 보트에 놔둔 탐조등에 장치된 타이머가 작동할 것이다. 그러면 탐조등 불빛이 이 안개에서 나가는 길을 비쳐줄 테니까. 그 때 그녀가 말했다.

“지루해요?”

“네?”

아마 내 얼굴은 당황으로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것이다. 황급히 변명이라도 해야겠는데.

“괜찮아요. 어차피 10분 후면 끝나는걸요. 어쨌든 이렇게 안개 속을 영원히 걸을 수는 없는 거니까.”

그녀는 피식 웃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글쎄요. 우린 영원히 이렇게 걸을 수 있어요. 멈추지 않고. 사실 당신이… 설치하는 걸 봤어요. 미안하지만… 그걸 껐… 어요.”

나는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라고요?”

내 목소리에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감정이 실렸던 것 같다. 그녀가 내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렇게 영원히 걷는다는 건 불가능해요! 언젠가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맞는 거지!”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더 물러났다.

“아니요. 이렇게 안개를 걷는 건 왜 일상이 될 수 없죠? 아무 걱정도, 속임수도 없이 이렇게 편안하게 걷는 게 왜 일상이 될 수 없다는 건데요?”

“아.”

다음 순간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엉뚱한 것이었다.

“조금 전에 한국어 되게 잘 한 거 알아요?”

그녀의 얼굴에 한 순간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안개 속으로 점점 물러났다.

“당신도 이해 못 해요. 당신도 결국 이해 못 한다고요.”

그녀는 홱 뒤로 돌아 뛰어갔다. 안개 속으로. 나는 허둥거렸다. 한 순간 바닥이 확 다가오더니 내 이마가 바닥에 부딪쳤다. 비틀거리며 일어났을 때 그녀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안개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침착해, 침착하라고. 일단 여기서 나가야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았다. 탐조등을 꺼놓았다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 상황에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지독하게 끔찍했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다리 사이에 묻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햇빛이 드는 것 같았다. 안개가 걷히고 멀리 경비초소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그쪽으로 황급히 뛰었다. 초소에서 경비원이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 초소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쳐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비원이 다가왔고 나는 주머니에서 허둥지둥 신분증을 꺼내 흔들었다. 경비원이 내게 물었다.

“아니,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실험 계획 같은 건 전혀 고지받은 게 없는데.”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입 다물고… 당장… 불빛 비춰. 최대 밝기로. 빨리. 저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다고.”

경비원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군말 없이 초소로 돌아갔다. 곧 불빛이 환하게 안개를 몰아냈다.

7.

나는 그녀를 초소로 데려왔다. 그녀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고,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노려보았, 아니, 약간은 지나친 표현인 것 같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를 다그쳐 보았다. 어차피 내가 안 하면 경비원이 할 테니까.

“도대체 왜 그런 거에요?”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은… 이해 못 한다니까요. 결국에는… 나는 항상 떠나야 하죠. 무엇을… 하든 간에.”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그녀가 말하지 않은 이야기는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맴돌며 고여 썩어가는 이야기는 더 많을지도.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요?”

내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그녀 역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아니에요.”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 때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경비원이 서류를 들고 다가왔다. 아니었다면 나는 또 멍청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경비원이 내민 서류에 서명하는 것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난 것이다. 경비원은 나와 그녀를 숙소까지 ‘호송’시키는 것이 모든 면책의 조건이라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그녀와 같은 숙소에 머물 수 있었다. 나나 그녀 모두에게 다행스럽게도, 무진의 낡아빠진 모텔은 아니었다. 재단 소유의 대피용 2층집이었고, 최소한 방이나 화장실이 두 개는 있었다. 짐을 풀고 이를 닦고 나니 그녀는 이미 2층에 있는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방문을 살짝 열어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확인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을 때 갑작스레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방정맞은 삘릴리 소리와 함께 핸드폰이 웅웅거렸다.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나오지 않았다. 분명히 보안 처리된 핸드폰이니 등록되지 않은 번호는 전화할 수 없는데. 그런 생각에 황급히 전화를 받자, 어제와 똑같은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당신 이 번호는 어떻게 알았죠? 도대체 보안 처리된 핸드폰으로 어떻게…”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안 그런가? 자네 말마따나 보안 처리된 건데 말이지. 가능성은 딱 하나 아니겠나? 내가 사실을 말하고 있고, 자네에게 신원을 밝힐 수 없을 정도로 보안 등급이 높은 사람이고, 그 여자는 진짜로 스파이라는 거지.”

“하지만 증거가 도대체 뭐가 있습니까? 도대체 그 여자가 스파이라는 증거가 뭐에요? 증거가 있다면 나한테 전화를 하는 게 아니라 내부 보안부에 통보하면 끝 아니냐고요?”

“혼돈의 반란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섣부르게 움직이면 안 되지. 신뢰를 좀 쌓아두기 위해 한 마디 해 두자면, 그 여자는 이제 자네 덕분에 711과 521을 보았지-”

“이제 일련번호는 제대로 외우시나 보죠?”

내가 비꼬는 것을 무시하고 그는 말했다.

“이제 무진에 남은 SCP는 몇 개 안 돼. 아니, 몇 개도 아니지. 그 산부인과 하나. 아마 그 여자는 내일 거기에 관심을 보이게 될 게 분명해. 이 정도면 자네 신뢰를 쌓는데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내 말을 계속 듣기는 하겠지.”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자기 할 말만 끝내고.

8.

잠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해는 밝아오고 있었다. 아니, 해가 밝아오는지 아닌지는 보이지 않았다. 알람시계를 보고 해가 밝아온다는 걸 알았던 것뿐. 안타깝게도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였다. 그녀를 깨우고 짐을 다 꾸리니 이미 10시가 다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차는 어제 SCP-521-KO에 들어가는 보트를 빌렸던 곳에 서 있을 것이었다. 그곳까지 나와 그녀는 나란히 아무 말 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안개 속에서 튀어나왔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우리 둘은 말없이 거리를 걸어갔다.

그 때 그곳이 보였다. 그 산부인과. 아니… 어쩌면 나는 오히려 일부러 그쪽으로 걸어간 것 같다. 어젯밤에 들었던 그 목소리가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분명히 약간은 있었던 듯. 옳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재단의 일원으로서는 결국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싶다. 결국 우리는 그 산부인과의 맞은편을 걸어가고 있었다. 안개를 뚫고 붉은 글씨가 보였다. 폐업. 나는 한순간 무언가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천천히 산부인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업. 무슨 뜻이죠?”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그 전화의 목소리의 말이 그대로 들어맞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섣부른 짓이다. 아직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 건 아니니까. 나는 그런 생각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저긴… 뭐 하는 데죠? 약간… 이상한 분위기가 풍기는데.”

결국, 그녀는 그 말을 꺼냈다. 그녀는 멈춰 서서 그 산부인과를 계속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 마음 속에서 감정이 복잡하게 들끓었다. 아니, 그리고 내가 했던 말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되풀이할 생각도 없다. 끔찍했다. 그녀는 당황하고, 살짝은… 겁에 질린 얼굴로 움츠러들기만 했던 것 같다. 결국에는 내가 제풀에 지쳐버렸을 정도로. 그녀는 더 이상 산부인과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어떻게 차가 있는 곳까지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르고 주변에 신경을 쓸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핸들을 붙잡고 있었다. 백미러를 보니 최소한 그녀가 뒤에 앉아 있기는 했다. 후회감이 밀려왔다. 내가 한 짓은 끔찍한 과민반응이었다. 내가 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렇게 내 곁에 앉아있지 않은가. 진짜 스파이라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스파이라면 들켰다는 걸 대충 알고 도망가 버렸을 게 분명하니까.

나는 차를 그대로 몰았다. 첫날 그녀가 있었던 숙소. 그곳에 도달해 나는 말없이 내렸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방 두 개를 잡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열쇠 하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그 열쇠를 받아들지 않았다. 열쇠를 잡고 내민 손을 피해 물러설 뿐이었다. 한 순간 온몸이 식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끝에, 가까스로 내 입에서 한 마디 말이 새어나왔다.

“제발.”

그렇게 툭 튀어나온 말에 그녀는 그나마 마음을 정해준 것 같았다. 열쇠를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그녀는 돌아섰다. 그래, 그래도 아직 떠나지는 않았다는데 만족하기로 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한참 후에야 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을 때, 갑작스레 비명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폰인가? 그러나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 방에 있는 전화기였다. 전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도대체 뭐가 사실인지 전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저 뿌연 안개가 사방을 덮고 있을 뿐. 전화기를 집어 올리자 그 목소리가 말했다.

“어때, 보았나? 내 말이 맞지?”

“난 잘 모르겠-”

갑작스레 그 목소리는 고함을 내질렀다. 끔찍하게 분노한 목소리로.

“아직도 모르겠나? 이제쯤 됐으면 뭐가 중요한지 결정을 내리고 어느 한 쪽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나? 애초에 자네에게 주어진 기준은 간단해! 재단이냐, 아니면 그 스파이냐? 도대체 그 간단한 결정 하나를 못 내려서 이 지랄을 하는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고!”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문을 분명히 잠갔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뒤를 돌아보니 그녀가 서 있었다.

“이거… 놓고 갔길래…”

한 손에 수화기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던 찰나, 갑작스레 그 목소리가 고함을 내질렀다. 아직도 도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분명히 전화를 통해 들리는 목소리인데, 갑작스레 스피커폰에서 나오는 것처럼, 방 전체에 선명하게 울려나왔다.

“그 여자는 스파이라니까! 반란에서 온 스파이라고! 잡아! 잡으라고! 재단의 일원으로 행동하라고! 올바른 길을 택하라고!”

그녀의 얼굴에 갑작스레 공포가 어렸다. 내가 봐도 미친놈이라 생각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녀가 진짜로 스파이여서 그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났다. 점점 그녀는 주춤거리다가, 결국 한 마디를 던지고 달아난다. 가까이 오지 마요, 라고.

그녀가 그렇게 뛰쳐나가 버리고도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소리질렀다. 쫓으라고, 잡으라고, 쫓으라고. 머리를 감싸쥐고 자리에 앉아도 그 목소리는 계속 들린다. 수화기를 내려놓아도, 전화선을 뽑아도 계속 들린다. 도대체 어디서 들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목소리가 계속 들리기나 하는 건지도. 그냥 내 마음속에서 메아리치는 걸지도 모른다. 결론을 내려야 했다. 그게 뭐가 되었든 간에. 그래야만 끝날 것 같았다. 그래야만.

9.

그러나 나는 끝내 결론을 내리지도 못했다. 핸드폰을 집어들고 전화 한 통만 걸면 모든 건 끝난다. 내부 보안부든, 내 상관이든, 현장 요원들이든, 누구든지 전화를 걸기만 하면 그녀는 바로 잡힐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녀를 지금 쫓을 결심도 하기 힘들었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내 상관이었다. 전화는 내가 서울로 재배치되었으니 내일 상경하라고 말했다. 아니, 그 전화는 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고민이 헛된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 그 전화는 모든 것은 무진과 안개, 모든 것을 흐리고 가리는 안개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니, 그 전화는 모든 것이 낯선 땅에서 느끼는 자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니… 나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나는 안개 속으로 향했다. 얼마나 걸었는지는 모른다. 어디를 헤맸는지도 잘 모른다. 안개 속에서 나는 무엇을 찾았던가. 내가 도달한 곳은 그 버스정류장이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곳. 그 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 곳에 앉았다. 그녀는 어쩌면 버스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렇게 앉아 있으니 그녀가 왜 이렇게 앉아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안개는 역겨운 것들을 덮어주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것들도 덮어버린다. 아마 그녀는 거기서 나올 무언가를 찾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안개 속을 앉아서 들여다보았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아무것도 오지 않는다. 그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버스 안 다닌다면서요.”

결국 그녀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확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과 함께,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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