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10월 9일 오후

평가: +8+x

지금까지 살면서 겪을 일은 다 겪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코우가 마나는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에메랄드 시티 같았다.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들이 가득했다. 간판, 차량, 전광판, 말소리들. 마나가 서 있는 곳은 대로변이었다. 옆으로 다양한 차량들이 경주마처럼 달려나갔고, 이따금 푸른 빛깔의 버스가 짐마차처럼 굴러갔다. 가게의 열린 문에서는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마나는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이 모든 광경으로 마나를 끌고 와버린 정체 불명의 누군가는 이미 수많은 인파에 섞여 사라진 뒤였다.

「잠깐, 뭐꼬?!」

마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른 점심 시간의 거리는 식사를 하러 나온 직장인과 상인,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까지 누구 하나 마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일은 없었지만… 행여나 들키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다.

마나는 재빨리 하라우치 에이도의 연구원 가운을 반쯤 벗어 머리에 뒤집어 쓴 다음 얼굴을 가리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튀어나온 꼬리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저 때늦은 할로윈 코스프레라고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마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아까 그 수족관의 얕은 전등 빛으로 보인 뒷모습을 회상하며.
고풍스러운 외양의 그 의복. 분명 한국의 전통 의상일 것이다. 한복.

마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최대한 눈을 들어 두리번거렸다. 갖가지 색깔의 의상이 눈을 희롱하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 사람의 남색 옷감은 보이질 않았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너무나도 빠르게. 너무나도 많이. 인근 지하철역에 열차가 내린 모양이었다.

마나는 꼬리 쪽에 갑자기 느껴진 아픔에 소리를 지르려던 것을 간신히 참았다. 무언가가 밟고 있는 듯 찌르르한 격통이었다. 마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뒤를 훽 돌아보았다. 웬 꼬마아이가, 저도 놀란 듯 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우와」 꼬마가 말했다. 「누나 상어에요?」

「아, 아냐아! 저리 가아!」

꼬마아이는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멀뚱히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아이의 옆에 서 있던, 분명 아이의 엄마일 중년 여성은 피곤한 듯 둘의 대화에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마나는 불안한 눈길로 여자를 보다가, 살짝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아이가 손을 흔들었다.

다른 곳에서도 그자는 없었다. 찬 바람이 불어 체감 온도가 급감한 날씨는, 거의 헐벗은 마나에게는 치명적인 수준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나는 결국 근처 건물 으슥한 곳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단지 업무를 마치고 선물을 사서 제8148기지로 돌아갈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마나는 뼈를 찌르는 냉기에 몸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수족관의 주소도 알지 못할 뿐더러, 이제 팀원들은 그 수족관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니 돌아갈 길은 없었다. 나아갈 길만이 있을 뿐.

무진.

마나는 벌떡 일어서서 생각했다. 전투 후 기동특무부대장이 했던 이야기, 무진으로 가서 놈들을 일망타진할 것이라고 했던 말. 팀원들은 무진으로 갈 것이었다. 마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다면은, 나도 무진으로 가면 되는 기라!

그런데, 무진이…어데고?

마나는 다시 주저 앉았다. 맞다…나 무진이 어덴지도 모른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젠 돌아갈 수도, 어디론가 갈 수도 없었다. 마나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코 끝이 찡하면서 목이 턱 막혔다. 타케야나기가 코를 찝으면 으레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지금은 그 감각마저도 그리웠다.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기…」

마나는 놀라 반쯤 튀어올랐다. 어떤 여자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마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너 괜찮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이런 데 있으면 감기 들ー」

그리고 다시 한번 마나를 놀라게 한 일이 벌어졌다. 그자가, 마나를 이곳으로 끌고 온 그자가, 그의 눈앞에 등장한 것이다. 여자를 가로막은 채.

여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돌보는 아이요. 염려하지 않아도 좋소.」

강경한 그의 말에 여자는 마뜩찮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여자가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감시하듯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모퉁이 너머로 여자가 사라지자 마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찌르는 듯한 시선에서 호박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나이가 많은 여자인 줄 알았건만, 실상 젊은 여자였다. 이상한 체취가 코를 간지럽혔다. 마치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느낌이었다. 피 냄새, 살 내음, 동물원의 호랑이 우리에서 나는 듯한…그런 체취. 그러나 향은 더 생기 넘쳤다. 황갈색 머리칼이 그가 쓴 모자 아래로 흘러내렸다. 생전 처음 보는 모자였다.

「너, 날 따라왔지.」 그자가 말했다. 묻는 게 아니었다. 「왜냐?」

「…머라꼬예?」

「…뭐?」

「머라는지 암만 모르겠어예…」 마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다, 당신, SPC 조직원이 맞아요…?」

「나도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못 알아듣겠구나」

마나가 고개를 들었다. 이 사람… 일본어를 하잖아!

「다, 당신.」

「너, SPC를 아느냐?」

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된 얼굴로.

「…너, 나 좀 따라와야겠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미로 같은 뒷골목을 한참을 오가면서, 마나는 자신이 지쳐가는 것을 느끼고 새삼 놀랐다. 재단에 들어와서 꽤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너무나 다른 공간에 떨어져 버려서 더 그럴지도 몰랐다.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과 동행하게 되어서 그럴지도.

그들은 종로구 가회동 한복판을 거닐고 있었다. 빛바랜 오토바이와 간판들, 이따금 튀어나오는 한옥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나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한복을 입은 여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부채는 바로 그에게서 받은 물건이었다. 정체를 들킬까 봐 가운으로 얼굴을 가리고 걸음을 내딛는 마나를 보다 못한 그의 방책이었다. 마나는 아직도 호랑이 여자의 말이 귓가에서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 부채로 네 얼굴을 가린다면, 아무도 네게 시선을 두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이물(異物)의 신묘한 힘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보따리에서 부채를 끌러 주었다. 그 말을 믿기엔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정말로 의심스레 쳐다보는 행인이 줄기까지 한 것이다. 덕분에 마나는 계속 자신을 괴롭혔던 불편한 자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기이…」

「뭐냐?」

「…우리 어데로 가는 깁니꺼…?」

「가보면 안다고 내 말하지 않았느냐」 그가 귀찮은 듯 대꾸했다. 「네 이리도 보채니, 가던 길도 잃게 생겼구나.」

마나는 주눅이 들어 대답했다. 「미안해요…」

「별 걸 다 미안해 하는구나. 다 왔다.」

「…벌써예?」

그들이 도착한 곳은 한 막다른 골목이었다. 어리둥절해진 마나를 뒤로 하고, 호랑이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나가 눈앞을 막고 있는 벽돌담을 더듬기 시작했다.

…뭐하는 거람.

이내 그의 손길이 분주해졌다. 곧 벽돌담을 이루고 있는 벽돌 하나를 짚었다. 벽돌은 마치 버튼처럼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윽고 담이 와르르 무너졌다. 마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담이 있던 자리에, 담과 정확히 똑같은 크기의 어스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여자가 마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닥했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

마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호랑이 여자를 삼킨 암흑은 일렁이지도 않고 그저 잠잠했다. 등줄기에 돋는 소름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마나는 애써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너 오라는 소리 못 들었느냐?」

「아아니…거길 우예…」

눈 깜짝할 새였다. 여자가 어둠 속에서 몸을 빼낸 건. 변명을 들어주기 싫다는 듯이 성큼 다가온 그는 마나를 거꾸로 들쳐업고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가 버렸다.

마나의 비명은 덤이었다.

「그러니까 여길… 들어가기 싫다고오오오오!!」

「그러니까아, 여기가 뭐하는 곳이냐구요」

「가보면 안다니까」

「만날 그 소리!」

「네가 익숙해진 모양이구나」

「흥,」 마나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까두, 그런 곳인줄 알았음 안 따라왔을 낍니더」

「이왕 온 거 끝까지 따라오너라. 툴툴대지 말고」

어둠 속을 한참 걷자, 저만치서 불빛 하나가 일렁이며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램프였다. 마더 구스의 세상에 등장할 법한 낡고 고풍스러운 램프.

그 아래에 날렵한 크기의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턱시도 고양이였다. 흑단 같은 검은 털가죽 코트를 입고 양장본으로 제본된 두꺼운 책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둘이 다가가자 고양이가 천천히 일어났다. 고양이의 털이 램프의 빛을 반사하면서 흐릿하게 번뜩였다. 마치 유령처럼.

그리고 고양이가 말했다.

「머나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여, 누굴 찾아 왔는가?」

마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이 고양이가 말을…?」

「그래」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고양이가 노란 눈을 번뜩이며 둘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는 이영이란 자를 보러 왔다. 협회의 정회원이라더군.」

「환영한다, 탐험가여!」 고양이가 대답하며 책에 앞발을 얹었다. 책의 제목은 '말테의 수기'였다. 호랑이 여자가 그 책을 집어들었다.

「책을 열고, 심호흡을 하게. 그렇다면 그대들이 찾는 것을 얻으리!」

호랑이 여자가 책을 열었다.

그리고 둘은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마나는 자신이 차가운 목재 바닥에 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잠깐 정신을 잃은 것인지, 책을 연 직후의 기억이 흐릿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가…

시야가 뿌예서 잠시 비틀거려야만 했다. 마나가 간신히 주변을 짚고 일어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희뿌예한 한 남자의 형상이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창백한 얼굴의.

「으아아악!」

「어…괜찮니?」

「머, 머라고예?」

「뭐라고?」

그 형체가 무어라 말을 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서로는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마나로써는 의사소통의 불편보다도 지금 그의 눈앞에 일렁이고 있는 이 존재의 정체가 훨씬 더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얘, 얘야. 일단 진정하고… 저, 소저, 이, 조금 도와주어야 가(可)할 것 같은데…」

「무, 무슨… 누구심꺼?」

유령 같은 남자가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마나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통나무집에 와 있는 듯했다. 약한 불빛이 머리 위에서 흔들거렸다. 실내는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사람은 어디 있죠? 그, 전통 의복을 입고 호랑이 냄새가 나는—」

「나 여기 있다. 그런데, 호랑이?」

알고 보니 여자는 옆에 서 있었다. 마나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옷이 눌린 것을 보아하니 비슷한 경험을 겪은 것이 틀림없었다.

「소저가 일어를 할 줄 압니까?」 남자가 물었다. 「다행입니다. 통 타국어는 신통치 않아…」

「나의 법명은 도혜고, 천인교사의 도리를 따르는 사람이외다. 대덕이라고 불러주면 고맙겠소. 그대가 분명 그 탐정이겠지요, 혼령의 몸으로 수사를 한다는」

「잘 아시는군요.」 남자가 멋쩍게 웃었다. 「객들을 위해 잠시 저와 같은 혼령들을 보일 수 있는 전등을 켜놓았는데, 아이를 놀라게 한 모양입니다」

마나는 남자가 자신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살짝 겁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어딘가 슬픈 눈빛으로 마나를 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왜인지 남자도 누군가를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이리라는 추측이 뇌리를 스쳐 갔다. 저 눈빛은 너무나도 익숙한 성질의 것이었으니까.

「지인이 그대를 소개해줬소. 쓸만한 정보가 많다던데. 알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소.」

「비록 능력이 일천하나 상황이 이러한지라,」 이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들은 것은 많지요. 어떠한 정보를 찾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귀신의 이점이 있다면 그런 데에 있겠지. 비록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한에 사로잡혀 있지만 않았어도 좋은 정보원이 되었을 테지만.」

마나는 시선을 돌려 어둠 속에서 걸어나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탐정'이 어울릴 것 같았다. 파스텔 톤의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여자. 짙은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방식은 언젠가 보았던 1930년대의 느와르 영화를 연상케 했다. 무엇보다도 마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의 키였다. 여자는 거의 180cm을 넘을 정도의 장신이었다.

「그리되지 않아 다행이지, 천 소저」

이영이 픽 웃었다.

「…아슈비나 첸?」

마나는 다시 시선을 틀어 호랑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누구인가 했더니 자네였군.」 아슈비나 첸이 살짝 미소 지었다. 「잘 지냈나, 도혜?」

「둘이… 아는 사이야?」 이영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어떻게?」

그리고 이영의 얼굴은 도혜와 첸이 동시에 겸연쩍은 표정, 마치 좋지 않게 끝난 애정 관계를 암시할지도 모르는 듯한 애매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을가 사람이랑…소저가 어떻게 만날 일이 있었나 궁금한데. 대개 유럽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었잖아」

「못 만날 거야 없지」 첸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세을가교도들은 생각보다 해외로 많이 퍼졌거든… 그냥 좀 무슨 일이 있었다고만 해두자고, 좀 깊은 무언가였으니…」

「태연하게 흰소리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첸」

「그래서, 정체는 그저 내놓고 다니기로 한 건가? 조금만 나다녀도 육술의 흔적이 진동을 할 것 같은데」

애쉬가 웃으며 받아쳤다.

「자네 부채가 저 상어 꼬마에게로 가 있으니. 저 아이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솔직히 알 것 같지만   저 앨 잘 챙기는군.」

「내가 오늘 여기 온 이유와 관련 있으니까.」

도혜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방 한구석에서 놓아둔 보따리를 끌러, 내용물을 펼쳐 놓았다. 마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오전의 전투에서 보았던 무기들이었다. SPC의 무기. 상어죽빵센터의 무기.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처참한 풍경의 연속이.

마나는 무심결에 도혜의 손목을 잡았다. 무슨 일이냐는 듯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마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벼려내며 짓이기듯 물었다.

「이게 왜 당신 손에 있어? 그 무기들, 그 자식들이 산 무기들을, 당신이 어떻게 갖고 있는 거야? 어떻게?!」

마지막 말은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도혜는 말없이 마나를 바라보았다. 속내를 낱낱이 읽히는 것 같아, 마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노려보는 것은 유지한 채.

조금 뒤 도혜가 천천히 말했다.

「나는 정말로, 그자들과 관계가 없다. 있었던 적도 없고.」

그의 목소리는 전혀 노한 것 같지 않았지만, 어쩐지 느껴지는 위압감이 있었다. 마나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풀었다.

「난 단지 이놈들이 어째서 이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고픈 거다.」

마나는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이야기는 잘 되었습니까? 그렇다면…좋소. 어디 한 번… 볼까.」

이윽고 그는 도혜가 꺼내 놓은 물건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세련된 디자인에 멋들어진 작동음을 내는 기기였다. 한 가지 오점만을 제외한다면 분명 세계 시장에서 비싼 값에 팔려나갈 물건들이리라.

「외물(外物)에 천착하는 자들은 어딜 가나 있으니…」

이영이 물건 하나를 집어들었다.

「어깨에 끼워서 신체 기능을 강화하는 용도로 쓰는 기물입니다. 헌데 여기 앤더슨 사의 인장이 아닌, 그들의 인장을 새로이 파뒀군요.」

이영은 그 물건을 폴터가이스트로 공중에 띄어 분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드러내는 것을 즐겨하는 자가 어찌 예를 따른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사기』에 이르기를 도리불언이라도 하자성혜라. 즉 빼어난 군자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뭇 사람의 흠모를 받는다고 했지요」

「그러한즉 신상촌이 자신의 글에서 이르되 재준인은 의학공근하고 총명인은 의학침후니라. 즉 재주가 뛰어난 이는 마땅히 공손함과 근신함을 익혀야 하고, 총명한 이는 마땅히 침착함과 중후함을 배워야 한다 일렀으니, 삼가는 것이 큰 사업임을 능히 깨달아야 할 테요」

도혜가 조용히 답하자, 이영의 시선이 빠르게 그에게로 향했다. 이영의 얼굴은 오랜 친구라도 만난 것마냥 강한 반가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혹 유학을 배운 분이십니까? 부끄러우나 저 역시 생시 학생으로, 비록 그 뜻을 펼치지 못했으나 고인(古人)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오. 비록 이 내 몸이 세존의 도리를 따르고 있으나 그 근간의 뜻은 같으므로, 둘 사이의 연결점을 찾으려 노력하였지요. 비록 큰 호응은 받질 못했으나…」

「나머지는 청학동 가서 하면 안 되나?」

마나만큼이나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애쉬가 보다못해 끼어들었다. 이영이 자못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기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자…이건 아예 삼두근을 과도히 강화시키게끔 해뒀군. SPC란 조직이… 상어를 때리는 조직이니, 아마 그 효율을 증진시킨 듯합니다」

「왜 이들이 앤더슨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요?」 도혜가 물었다. 「SPC와 앤더슨은 협력 관계가 아니라고 아오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이영이 부품을 차례로 책상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이 SPC라 일컬어지는 단체는, 실상 광인이나 진배없습니다. 하여 대부분의 단체들은 이들과 관계 맺기를 지양하죠. 이득될 일도 없고, 대개는 오히려 실을 더 많이 불러오는 일이니」

「하지만 지금 이건…」

「그렇다면 답은 명료합니다」 이영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들의 공격」

「며칠 전 광양 앤더슨 로보틱스 지사 건물 및 창고가 전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지 모르겠군.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재산 피해가 극심했다는 이야기.」 탐정이 끼어들었다. 「그들 짓이라면 이해가 되겠지」

「하지만 여전히 궁금증이 남네」 도혜가 다시 말했다. 「SPC는 아무리 '지사'라 할지언정 그들을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할 전력이 없지 않은가. 어불성설이야.」

「아무래도… 이 일이 꽤 큰 연관성이 있는 듯합니다」

이영이 탁자 가장자리에 자기 노트북을 불러왔다. 노트북의 화면에는 검은색 코트를 입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떤 남자가 클럽 밖으로 달려나가는 영상이 찍혀 있었다. 싸구려 양복을 껴입은 칼잡이들이 흉기를 꼬나 들고 그 뒤를 쫓았고, 때아닌 추격에 놀라 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그자의 목덜미와 안면 주위에는 다양한 금속 근육들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남자는 격노한 것 같았다.

「달포 전쯤 '포테리' 클럽에서 찍힌 영상입니다. 영상은 유튜브와 펜듈럼을 타고 일파만파 퍼져나갔지만, 지금은 수그러든 상태지요. 당연히 전자에서는 즉시 삭제되었고」 이영이 차분히 설명했다. 「영상 속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 남자가 누구고 왜 쫓기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사건으로 현재 상황이 촉발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도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사건으로?」

「그렇습니다. 영상 속 추격당하던 남자가 벌인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건 직후 포테리 클럽의 수뇌부가 전부 교체당했다더군요. 그것도 본래 파벌이 아니라 적대 파벌의 인사들로」

이영이 뒤로가기를 눌렀다. 곧장 아까의 그 기계 근육 남자가 화면에 등장했다.

「이 사내가 본래 이 클럽을 운영하던 인물입니다. 통칭 '이 부장'. 실명은 알려지지 않았고요. 세라믹파 내에서도 광인이라는 이야기가 많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듣기론, 명철하여 조직의 후계자로 길러지고 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지금까지 놈이 벌인 살인, 폭행 사건만 해도 수십 건이 넘네. 대개 무진경찰서에서 그 가닥을 잡아 해결하고는 있지만, 정작 거미줄을 만든 거미는 잡지 못하고 있지. 골치 아픈 놈이야.」

탐정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니까 자네들 말은, 이 자가 SPC의 배후다, 이 말이군.」

이영이 노트북을 닫고는 다른 곳으로 띄워 보냈다.

「작자는 주도권을 빼앗긴 포테리 클럽 대신 다른 사업장을 필요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광양 쪽이 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광양의 앤더슨 로보틱스는 세라믹파 조무래기에게 보호세 나부랭이를 지급할 정도로 멍청하지도, 약하지도 않았지요. 쉽사리 함락될 단체가 아니었고. 그자는 기회가 올 때까지 엎드렸고… 어느 날 바로 그 일이 일어난 겁니다」

「며칠 전 선주 미상의 선박이 무진항에 정박했네. SPC. 그들은 우연한 기회로 이 자, 이 부장과 접촉했지. 두 조직은 모종의 협정을 맺은 듯하네. 직후 SPC가 광양을 공격했으니까. 센터야 더 효과적으로 상어를 때릴 수 있으니 이득이고, 이 부장 쪽이야 앓던 이가 빠졌으니 이득 아니겠나.」

「아까 코엑스 아쿠아리움에 잠입했었다. 오전의 전투를 마친 자들이 그곳에 있더군.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 역시 무진에 SPC의 근거지가 있다고 보고 그곳으로 향하려 했다. 남은 종자들을 싸그리 격멸할 테지」

도혜가 중얼거렸다.

「…더 늦기 전에 무진으로 가봐야겠어」

그리고 그는 고개를 들어 이영을 바라보았다.

「내, 값을 치르리다」

「아,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이영이 대답했다. 「재단의 동향까지 알았으니 말입니다. 정보 교환이니, 심려치 않아도 됩니다」

「잘 되었구려」 이윽고 도혜는 마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넌 어찌할 셈이냐?」

「에?」 마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어디로 갈 생각이냐?」

마나의 머릿속이 뭐라고 결론 내리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이고 있었다.

「무진, 무진이예. 그까지 가야함더.」

도혜가 피식 웃었다. 「또 동행하게 되겠구나.」

그리고는 이영에게 물었다. 「혹시 남는 옷이 있소? 이 아이가 추워할 것 같은데」

이영이 다시 마나를 바라보았다.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그는 다시 마나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꼭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나서, 마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각이 일었다.

「아마… 있긴 있을 겁니다. 아이에게 좀 크긴 할 테지만」

그리고 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효옥이가 생각나는구나」


「근데, 우리 언제까지 걸어가야 하는 깁니꺼?」

「그럼 차를 타고 가겠느냐?」 도혜가 부루퉁하게 받아쳤다. 「기다리거라. 곧 차보다 더 좋은 것을 탈 수 있음이니.」

그들은 한적한 서울 외곽의 도로를 걷고 있었다.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차가운 바람이 살을 꿰뚫으려 덤벼왔다. 마나는 붉은 후드집업의 모자를 눌러쓰고 걸음을 옮겼다.

산과 연결된 도로에는 차가 적었다. 이따금 엔카를 닮은 노래를 틀어놓고 달리는 대형 버스가 몇 대 지나쳤을 뿐. 덕분에 둘은 상대적으로 편하게 걸어갈 수 있었다.

「그래두, 아까는 순간이동도 했잖아예」 마나가 투덜거렸다. 「함 다시 하면 되지 않아예?」

「그게 네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도혜가 대꾸했다. 「그것을 축지(縮地)라 하는데,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막대한 힘이 사용된다.」

「지금 하면… 우예 되는데예?」

「지쳐서 앞도 못 보고 가다가 장애물이라도 만나면 부딪혀 죽겠지.」 도혜가 무미건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나의 표정이 공포로 얼어붙었다.

「이름이 무어냐?」

도혜가 대뜸 물었다.

「코우가 마나. 고향에서는, 니포 마마나라는 이름을 썼어요.」

「이름이 많구나. 무어라 불러주길 바라냐?」

「…코우가 마나요.」 마나가 대답했다. 조금 머뭇거리다가.

「어찌하여?」

「……니포 마마나는 고향 생각이 나서요.」

마나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목구멍을 막는 슬픔이 저려왔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었다. 홀로 살아남아,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며 온몸으로 애통해하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아픔이었다.

도혜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화제를 바꾸었다.

「내 이름은 도혜(道寭)다. 길 도에 밝힐 혜.」

「도헤?」

「도, 혜.」

「도…흐에.」

「됐다.」 도혜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헌데, 무진에는 어찌 가려는 게냐?」

「어…」 마나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무얼 그리 놀라느냐. 가족이 게 있느냐?」

「네? 네, 네…」

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쳐 말했다.

「가족은 아녜요… 같이 온 사람들이 무진에 있대요.」

「가족은?」

「없어요.」

도혜는 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조용히 물었다.

「어인 일로?」

마나는 조금 뒤퉁스러운 얼굴로 도혜를 올려다 보고는, 한숨처럼 대꾸했다.

「공격이요… 그놈들, SPC의.」

그리고 마나는 입을 다물었다. 말할수록 아픈 기억은 되살아났다. 열두 살이 짊어지기엔 버거운 기억이었다. 그러나 누가 대신 짊어질 수도 없는 기억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고이는 것을 막으려고 후드를 푹 눌러썼다. 매서운 바람에도 눈 아래 맺힌 응어리 같은 눈물은 스러지지 않았다. 찢긴 마나의 삶이 다시 회복되지 못하듯.

「…그거 아느냐? 나도 잃었다.」

마나는 고개를 들었다. 도혜가 전에 없던 따뜻한 눈길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따스함 어린 시선은 도혜의 황색 눈동자와 절묘하게 어울렸다. 황갈색 진주 같은 눈이었다.

「나 역시 가족을 잃었다.」

「…어쩌다가요?」

「너와 같이, 어느 날 나의 고향 땅에 들어 온 이들에게.」

도혜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마나와 눈을 맞추었다. 마나의 푸른 눈동자에 황갈색 시선이 내리꽂혔다. 마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내겐 두 가족이 있었다. 인간의 가족과 범의 가족. 그리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국가는 1911년부터 내 족속을 잡아 죽여왔다.」

도혜의 눈빛에 불길이 타올랐다.

「비록 내 몸이 인간 중에 있거니와 내 동족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며, 내 출신이 금수라 하나 부생모육지은이 있음이라, 어찌 통한하지 않겠느냐. 어찌 비통해하지 않겠느냐.」

「…모두 죽었심꺼?」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이 땅에는 이제 나의 동족이 살지 않는단다. 저 멀리 머나먼 추운 땅으로 갔을 뿐.」

도혜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허나 내 인간 가족들은 그런 나의 고통을 이해하고 동감하였다. 그들 역시 가족을 잃은,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마나는 눈을 크게 떴다.

「…네게도 그런 이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네 편에서 서서, 널 치유하고, 널 지켜줄 사람들이.」 도혜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슬픔에 네 영혼을 상하게 하지 마라. 언젠가 그 치욕을 갚을 날이 올 것이니.」

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에 무언가 치미는 느낌이 들었지만 슬퍼서라기보단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말을 들어서인 것 같았다. 마나는 볼을 긁적이고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도혜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네 오랫동안 걸어왔으니 필히 노곤할 터. 이제 더 쉬운 길을 택하자꾸나.」

「축지는 못 쓴다구 했잖아예?」

「방도가 어디 축지뿐이겠느냐.」

그리고 도혜는 대뜸 어딘가를 가리켰다. 산기슭에서 무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이는 까치였다.

「…까치를 타구…?」

「아니, 그보다 더 큰 것이다.」

까치가 날아오면서 크게 한 번 울었다. 도혜는 품속에서 부적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퉁겨, 불을 붙였다. 부적은 화르르 타올랐다. 마나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도혜의 손짓을 바라보았다. 마법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이내 인근의 모든 가로등이 불이 나갔다.

그리고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달려오는 듯.

마나의 시야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어스름 속에서 다가오는 무언가는 정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마나는 저도 모르게 도혜의 팔을 끌어안았다. 동물적인 경계심이 일어났다.

「저, 저게 뭐, 뭐예요?」

도혜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식하는 소리로 미루어보아 그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마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웃어…?

이윽고 도혜의 손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그 덕에 마나는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접근자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접근자는 호랑이였다.

단순한 호랑이는 아니었다. 그림에서 보았던 호랑이의 무늬와 더불어 표범의 무늬까지 지니고 있었다. 덩치가 집채만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풍기는 위압감은 자연스레 긴장하게끔 만들었다. 그 생물의 목에는 무언가가 많이 장치된 듯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도혜는 재빠르게 허공에 어떤 형태의 방진을 그리더니, 그것을 목걸이에 쏘아보냈다. 순식간에 목걸이의 불빛이 꺼졌다.

「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인사하거라.」 도혜가 태연스레 대답했다. 「우리가 타고 갈 운송수단이자 내 남동생이다.」

「남동생?!」

마나가 질겁하며 되물었다. 「나, 남동생…?」

「물론 녀석이 나와 같은 순혈 범은 아니다. 세간에서는 수호라 알려진 족속으로, 내 아비가 표범과 교통하여 낳은 자식이다.」

「어떻게…」

「네가 그걸 알기엔 좀 이르지 않나 싶은데—」

「아아니, 인간이 어떻게 호랑이 누나냐구요!!」

도혜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은 게냐」

「그런 거, 비유인 줄 알았는데…」 마나가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 진짜 호랑이임꺼?」

「왜, 싫으냐?」

「그,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되었다. 따라와라.」

도혜는 수호에게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렇게까지 무서운 인상은 아니었다. 마나는 처음보다는 덜 긴장한 얼굴로 그 생물을 바라보았다. 우선 전체적인 인상부터가 도혜와 놀랄 정도로 닮아있었다. 더구나 반갑게 인사하는 둘의 모습은 어딘가 정말 남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었다.

정말이었구나…

도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살쪘구나.」

호랑이가 그르렁댔다.

「농이다, 창아. 네 먼 길 오느라 여독이 쌓였을 것을 안다만 부탁 하나만 하자꾸나. 오늘 밤 소을촌으로 향할 생각이다. 헌데 나와 저 아이가 걸어서 당도하기엔 퍽 어려운 일이 아니더냐. 하여, 네 등을 좀 빌렸으면 하는데…」

범이 작게 으르렁거렸다.

「다 그것만 물어보는구나. 내 체력을 너무 많이 소진했다. 본래 모습으로 가다가도 자빠질 판국이다.」

수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허, 누이 부탁이지 않느냐」

범이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면서 낑낑댔다.

「옳지, 창아. 너무 괘념치 말거라. 소을촌 사람들이 널 얼마나 귀히 여기는데. 오늘 밤 조금 고생하고, 내일 호강하거라.」

도혜가 고개를 들어 마나에게 손짓했다.

「빨리 오너라. 당장 출발할 것이다!」

마나가 주저하며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니 수호는 정말 거대했다. 그는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도혜에게로 달려갔다. 얼핏 본 수호의 얼굴은 왠지… 웃는 것만 같았다. 오빠가 기억났다. 어릴 적 함께 놀다가 무릎이 까져서 어쩔 줄 모르고 울던 자신을 달래준 오빠. 왜인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절로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도혜가 뒤에, 마나가 앞에 올라탔다. 수호의 등은 생각보다 푹신했다. 킹사이즈 털침대에 몸을 묻은 것 같았다.

이윽고 호랑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밤공기가 시원하게 얼굴에 부닥쳐 왔다. 피곤한 몸이 덜덜거리는 진동을 즐기고 있었다. 마나는 자신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깨달았다. 하기사 새벽부터 지금까지 휴식 없이 움직인 셈이다. 마나는 졸음을 쫓으려고 했지만, 눈꺼풀은 사정 없이 하강하고 있었다.

짙은 어스름이 시야에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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