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10월 11일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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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서울 어딘가.

컵이 큰 소리를 내며 탁자에 착지했다.

「그러니까, 이유가 뭐냐고?」

「큰 소리 좀 내지 말게. 사람들한테 이목 끌고 싶나.」

「이목은 이미 네가 다 끌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한쪽은 낡은 카키색 야상에 짧게 자른 머리, 한쪽은 감색 도포에 갓을 쓰고 한 손에 부채를 든 차림을 한 사람이었다. 정확히 파헤치지 않아도 당연히 누가 누구에게 쏘아붙였는지 알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고, 이를 부정하듯 부채를 든 여자는 기품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복이 뭐가 어때서?」

「그래. 한복은 잘못 없지. 네가 이상한 거다. 누가 동네 술집에 한복을 입고 와?」

때는 정각을 향해 가고 있었고, 둘은 후미진 골목에 자리한 사람 없는 호프집에 앉아 있었다. 그나마 이곳을 찾던 손님들마저 가까이에 새로 단장한 가게로 흘러가고 말았고, 때문에 평소보다 사람은 두 배 가까이 줄어 있었다. 그러한 상황이니 직원들도 제대로 장사를 할까. 가게 사장은 잘 굴러가지도 않는 장사에 텔레비전에나 시선을 두고 있었고, 웨이터들도 열심히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다.

둘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었다.

정랑은 직원들의 불성실을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왜 부른 거야?」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 볼 사이인가.」

「본론만 말해. 흰소리 늘어놓지 말고.」

한복을 입은 이, 도혜는 품속에서 병을 꺼내 잔에 부었다.

「별건 아니고, 일전에 자네가 벌인 일 탓에 그러하네. 어딜 그리 유호수수(有狐綏綏) 돌아다닌 건지.」

「벌인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박지태 살인, 그거 자네가 하지 않았나」

정랑은 피식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랬지.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불쌍한 이도를, 사대림(斯大林)이 열자(列宁)에게 그러했듯 대중의 눈앞에 떡하니 박제했길래. 추가로, 명천의 물을 흐린 죗값도 치르게 하고 싶었지.」

그는 잠시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나, 김철현 그 새끼가 전향해서 소을촌 박살 낸 다음부터 계속 이도를 찾아다녔다. 외피까진 좋다 이거야. 수신도 녀석들 재수 없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그 근본은 남아 있군, 싶었지. 그런데 웬 또라이가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물밑작업을 하고 있단 소리를 들으니 영 불쾌하더라고.」 정랑은 맥주를 들이켜고는 짜증 섞인 투로 내뱉었다. 「젠장, 내가 왜 네게 변명을 해야 하는 거냐?」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하고 자네 혼자 무가내하(無可奈何) 벌린 일이니 그렇지.」

「참내, 마을 가 보라. 최가네 박가네 안가네 다 동의했다. 길성이는 장사도 접고 따라왔고, 혜진이는 곧 기말고사라는 애를 부득이 끌고 왔구만, 나 혼자서 다 벌인 것처럼 그렇게 말하면 어쩌냐」

「유봉자호(有竼者狐)가 솔피유초(率彼幽草)라더니. 군자유휘유(君者有徽猷)면 소인여촉(小人與屬) 아니던가. 자네가 잘 처신했어야 했어. 그이들은 사느라 바빠서 자네가 벌린 일 뒤에 도사린 음모를 못 봤네.」 도혜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박지태가 어디에 의탁하고 있었는지 아나?」

「세라믹파. 일제에 빌붙었다가 몰락한 수신도 분파 병신들. 알지」 정랑은 다시 맥주를 들이켰다. 「그게 뭐?」

「그게 문제라는 걸세.」 도혜는 고개를 틀어 정랑을 바라보았다. 「최근 카쿠레쇼군들의 동향을 파악하던 도중, 놈들이 세라믹파와 교역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네. 더불어 세라믹파 내부의 동향도 조금은 들을 수 있었고」

정랑은 도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알아.」

정랑은 멍하니 도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하얀 얼굴, 흔들리는 갓끈에 비추어지는 불빛, 갓 옆으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누런 머리카락. 꿈결처럼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도혜의 입술은 그 문장을 완성하고 있었다.

「그들이 다 알아, 정랑.」


□ □ □ □ □


영화 채널에서는 '맨 인 블랙' 시리즈를 틀어주고 있었다. 정랑은 문을 열고 걸어들어와 탁자에 팝콘과 맥주캔 서너 개를 떨구었다. 1층 로비에서 사 온 물건들이었다.

ー 왔어? 사오라는 건 다 샀구?

ー 그래.

정랑은 맥주캔 하나를 따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유정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화면을 보는 그의 눈빛이 빛났다.

ー 사온 사람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영화가 그리 좋더냐?

ー 미안. 나 SF 좋아하는 거 알잖아.

화면에서 나온 불빛에 유정의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에서는 욕실 샴푸의 향긋한 내음이 났다. 정랑은 맥주를 홀짝이며 유정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짝 흐트러진 져지의 어깨 부분에서 드러난 기계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라면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겠지만, 지금은 유정의 그런 부분까지 모두 사랑했다. 기계에 대한 증오는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다가오는 현실ー혹은 미래, 혹은 다른 문명의 것들을 증오한 것이지. 정랑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걸 알았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런 그 때문에…

ー 나 팝콘.

생각이 흐트러졌다. 정랑은 조금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유정을 향해 애정 섞인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ー 네가 갖다 드세요.

ー 아아이, 언니 바로 옆에 있잖아. 좀 가져다 주라아.

유정이 팔을 톡톡 건드리자 정랑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팝콘 봉지를 집어다 주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끌어 그의 옆에 붙어 앉았다.

ー 오랜만에 보는데 나한테 집중 안 하지.

ー 자기는 늦었으면서.

ー 얼씨구, 이거 보게.

정랑은 유정의 뺨을 잡고 부드럽게 자기 쪽으로 돌렸다. 얼굴에 웃음기가 남아 있는 유정의 얼굴은 한순간 경직되어 있었다. 어떤 걱정이 내재되어 있는 듯한 표정. 그러나 그런 표정도 잠시, 금세 아무런 걱정이란 것이 없다는 듯 밝게 웃는 유정을 보고 정랑은 그의 뺨을 쓸었다. 아무런 일도 아닌 걸까.

ー 좀 춥게 하고 다니지 말지. 옷이 이게 뭔데.

ー 아디다스가 뭐가 어때서. 난 괜찮아. 언니나 잘하셔. 옷이 이십 년 전에나 산 것 같네.

ー 오십 년 전이다.

황당해 하는 유정을 뒤로 한 채, 정랑은 두 번째 맥주 캔을 땄다. TV에서는 여전히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70년대 뉴욕을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ー 아무튼, 춥지 않게 잘 입고 다녀. 너 안에 브라자만 입고 다니지?

ー 브라자가 뭐야, 브라자가. 브라탑이야! 그리고 그거 패션이거든? 할머니도 아니고.

ー 할머니 맞다.

ー 이렇게 젊은 할머니 못 봤어.

유정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정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랑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유정을 올려다보았다. 유정의 손을 짧은 머리카락이 간지럽혔다.

ー 언니 머리 만질 때마다 기분 좋다.

ー 취향 하고는.

ー 아니, 누가 스포츠 머리 하래. 어? 스크래치 새로 했어?

ー 그냥 자란 거야.

유정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정랑에게 안겨 왔다. 따뜻한 체열과 기계 열이 동시에 전해져 왔다. 유정의 갈색 머리칼이 정랑의 코를 간지럽혔다. 정랑은 애정 섞인 시선으로 제 애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며 등을 다독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런 시선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정말 가늠도 할 수 없었다. 정랑은 오묘한 기분을 느끼며 유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ー 그래서, 이번엔 어딜 그리 많이 돌아다니셨어? 연락도 잘 안 되던데.

ー 연변, 만주, 연해주.

유정이 놀란 토끼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ー 거길 왜? 우리 인턴들이 연변서 좀 오긴 하는데, 언니는 뭐하러?

ー 동포들 찾으러. 우리 사람들, 세을가 사람들 말이다. 한국 전쟁 끝나고 북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은 이제 만나 볼 도리도 없다만,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쪽으로 넘어갔다고들 하더군. 해서 찾아갔지.

ー 좀 만나 봤어?

유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ー 그랬으면 좋을 텐데, 아니.

정랑은 한숨 섞인 실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ー 분단된 지 70년 가까이 되니, 세을가 사람인지는 이제 육안으로는 알아채릴 수도 없다. 간신히 세을가 사람 후손이려니, 하는 인간 집에 가 봐도 영 허탕이고.

ー 모든 세을가 사람들이 다 소을촌에 있는 건 아녔구나.

ー 그 사람들은 애초에 소을촌에 올 수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남한 땅에 산다고 다 소을촌에 사는 건 아냐. 머리 좀 굵어졌다고 마을 밖에 나가서 살면 죽기 십상이다, 이렇게 말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세상이 어느 때라고. 죄다 자식 교육시키랴, 직장 다니랴, 하고 밖에 나와 사는 사람들도 꽤 있다.

유정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ー 이럴 때 보면 진짜 내가 나이 많은 사람이랑 연애하는구나 싶긴 하단 말이지.

ー 웬 뚱딴지같은 소리야?

ー 그 머리 굵어졌다는 사람, 완전 노땅이지?

정랑이 툴툴댔다.

ー 노땅은 무슨, 일흔 살밖에 안 처먹은 것들이.

유정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참 듣기 좋은 웃음소리라고, 정랑은 생각했다. 늘 그렇듯이.

ー 아 맞다.

ー 응?

정랑은 잠시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ー 너, 개조 더 받았더구나.

유정의 눈에 일순간 불안이 스쳤다 지나갔다. 정랑은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유정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그 경직된 표정, 걱정은 이 때문이었구나. 정랑은 단지 너무 싫어하지 않기만을 빌 뿐이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기에 정랑은 더 불안했다. 더 개조한 것을 알아차렸을 때, 짜증을 내는 유정과 크게 싸울 뻔한 것이다.

ー 아, 으응. 난 또 모르는 줄 알았지.

ー 다 봤는걸 뭐.

유정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담긴 우려를 알지 못하는 바 아니었다. 드러내놓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정랑의 반응은 부정적일 것이 뻔했으니까. 연애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것이 바로 신체 개조에 대한 정랑의 반응이었다.

ー 미안… 그래도 나한테 꼭 필요한 거고.

정랑은 유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싸우지 않았다는 안도, 자기 자신 몸에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처지인 연인에 대한 연민이 가슴 속에서 뒤섞였다. 정랑은 손을 뻗어 유정의 머리를 어루어 만지고, 뺨을 쓰다듬었다.

ー 나도 이제 꼬장 부릴 생각 없다. 단지 아까워서 그렇지. 네 피부가 얼마나 아름다운데. 나처럼 인공적으로 불려서, 어떻게든 사람 모습으로 보이려고 애쓴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경이롭지. 그걸 또 기계로 바꾸니 아깝다는 거다.

ー 언니 피부도 예뻐.

ー 징그럽기만 하지, 뭘.

유정은 단호한 얼굴로 정랑의 팔을 잡아채어 소매를 올렸다. 그러자 플라스틱처럼 생기가 전혀 배어 있지 않은 연주황 빛 팔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랑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팔을 빼내지는 않았다. 그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 말고는 괜찮았다. 고통스러움은 시간이 갈수록 옅어졌다. 지금도 그랬다.

유정은 괜찮다는 듯 웃으며 정랑의 팔뚝에 키스했다.

ー 넌 진짜 사람 미치게 할 줄 아는구나.

ー 아, 느끼해.

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각자의 몸이 서로에게 얹혀지고, 몸으로 메울 수 없는 그 간극을 웃음이 메우는 이 순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떨어져야만 하는 걸 알았는데도. 멀어져야만 했는데도.


□ □ □ □ □


그리하여 육의 고(苦), 행(行), 명(明), 퇴(退)가 다르지 않느니, 고로 말미암아 행이 촉발되고, 행으로 말미암아 명이 나타나며, 명으로 말미암아 퇴가 등장한다. 다시 퇴로 말미암아 고가 탄생한다. 우자(愚者)는 이를 두고 연속되었다 칭하나, 목자(牧者)는 이를 두고 한 가지라 말한다.

— 『세을유책언해』


□ □ □ □ □


정랑은 혼자 걸었다. 호프집을 나와 도혜와 헤어지고 나서 돌아가는 길은 어둡고 추웠다. 길은 어둠 속으로 영영 이어질 것만 같았다.

1912년 소을촌은 망했다. 군대를 이끌고 온 일군(日軍)의 총칼 아래. 마을의 창고와 광이 열렸다. 사랑채와 사당이 유린당했다.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관에서 나왔다. 주민들은 죄인처럼 포승줄에 묶여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 하루에 모든 게 망가졌다. 하룻낮 하룻밤의 일이었다.

그때 이도가 탈출했다.

정랑은 그때 소을촌에 있지 않았다. 그때 그는 제정 러시아에 있었다. 러시아인으로 위장해서 유학길에 오른 1905년부터 쭉.

남자로 위장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외국인으로 위장하는 것이 어려웠다. 어려운 만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불필요한 검문, 의심, 부조리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육(肉)을 어르고 달래서 서양인의 외양을 하고 난 뒤에야 원하던 대우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러시아인마저 러시아에게 억압당하는 상황을 빚어내고 있었다.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2년 동안, 정랑은 정처 없이 방랑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루블을 벌기 위해서— 한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수많은 잡일을 하며 지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순간들이었다. 조선보다 훨씬 추운 겨울과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날들은, 조선에서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의 모습보다 훨씬 더 고약했다. 질질 짜며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한 밤에도 마음은 수십 번 오락가락했다.

그러던 중 어느 순간 일이 그렇게 풀리게 되었는지는, 정랑 스스로도 자세히 기억하지 못한다. 운명은 파도와도 같아서, 유심히 관찰하려고 하면 멀어지고 관심을 두지 않으면 다가왔다. 유일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철도 보수 공사를 하기 위해 우랄 산맥을 넘어 첼랴빈스크로 갔던 일이었다. 거기서 옥사나 블라디미로비치 소로킨을 만났다. 둘은 한눈에 서로가 같은 종교의 신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1907년 5월 13일의 일이었다.

옥사나는 정랑이 노동할 때마다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같이했다. 어느 날엔 옥사나의 집에 초대받기도 했다. 정랑은 아직도 그곳의 향기를 기억할 수 있었다. 옅은 겨울 내음이 배인 나무 향기. 안락한 통나무집에는 옥사나가 홀로 살고 있었다.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했다. 좋은 여자였고, 좋은 아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정랑은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옥사나는 정랑이 여자인 것을 깨달았지만 개의치 않아 했다. 몇 달 동안 둘은 동거했다.

그러던 와중 옥사나가 물었다. 대학에 갈 생각이 없느냐고.

1908년 1월 정랑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했다. 옥사나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소로킨의 도움 덕이었다. 원낼캐 신자이자 자본가였던 블라디미르는 종교보단 현실에 더 관심이 있는 자였고 덕분에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정랑은 그의 지원을 받으며 그곳에서 법을 공부했다. 2년간 러시아 일상어와 속어만 들어왔던 정랑으로서는 고된 일이었지만, 밤새 사전을 끼고 글을 익힌 끝에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옥사나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서, 옥사나는 밤새 도란도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조잘댔다. 대학을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어서, 돈을 모아 모스크바에 가서 사는 것. 옥사나에게는 모스크바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모스크바에만 가면 서유럽의 멋진 문물들을 향유하며 지낼 수 있으리란, 어찌 보면 허황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에만 가면 평생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여겼다.

정랑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정랑은 1909년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공교롭게도 대학 선배인 레닌의 볼셰비키 파벌, 중앙파의 일원이 되었다. 차르 지지자였던 블라디미르 소로킨와는 저절로 멀어지기 시작했고, 그건 옥사나와의 관계도 비슷했다. 옥사나는 정랑이 인용하는 혁명, 볼셰비키, 중앙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했고, 정랑은 옥사나에게서 풍기는 부르주아적 색채를 감당하지 못했다. 둘은 서로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했다. 1909년 11월, 정랑이 옥사나의 집에서 떠나면서, 둘의 관계는 끝이 났다. 저절로 대학교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먼 훗날 그 해를 회상할 때 정랑의 의식 속에서는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당 위원 취임, 그리고 소을촌의 붕괴 소식.

모든 세을가인들이 소을촌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때, 세을가 사람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땅에서 살아가다 죽었다. 오가며 떠도는 장돌뱅이 인생을 사는 일도 허다했으나, 그것이 수신도의 순례처럼 필히 조선 팔도를 모두 돌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소을촌은 많은 세을가 마을 중 하나였고, 그뿐이었다.

그러나 정랑에게는 그 소을촌이 다른 어떤 마을들보다 더 애착이 갔고 소중했다. 그가 금수에서 사람—온전한 사람으로 변한 곳은 그곳이었다. 청에게 패한 왕의 차남이 조선을 다스리고 있을 때 태어난 정랑이, 나라가 망할 때까지 살아가던 곳이 그 소을촌이었다. 가족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어떤 이에 대한 사랑이 청등처럼 피어오른 곳도, 한 번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해본 적도 없는 그 사랑을 갈무리한 곳도 소을촌이었다.

바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때 막 볼셰비키는 독립적인 당임을 안팎에 선언하고 난 다음이었다. 혁명은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바로 귀향할 수 없었다. 과업이 눈앞에 있었다.

2년 뒤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5년 뒤에 2월 혁명이 일어났다. 11월에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정랑은 적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겨울 궁전에 들어섰을 때 서야, 그는 고향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 이제 갈 수 있겠구나. 아, 이제 끝났구나. 혁명은 이어질 테지만 이제 그가 그곳에서 차지할 어떤 지위는 혁명의 성공과 함께 멀리 떠나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누구에게 빼앗기지도 않고 뺏지도 않을 방법은, 무대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것 말고는 없음을 알았다.

조선으로 돌아왔을 때서야 그곳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부정했다. 그가 그럴 리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했고, 잘못 봤으리라고 외쳤고, 다음에는 듣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생존해서 도망 나온 사람들의 아픔이 너무나 절실하게 보여서, 결국 받아들였다. 김철현은 배신자였다. 일제에 영합했고, 자기를 받아 준 소을촌의 사람들을 죽고 다치게 만들었다.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개새끼!」 정랑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 질렀다. 「배알도 없이 대세에만 편승하는 병신 머저리 새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의아하게 쳐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정랑은 멈춘 그 자리에서 씩씩대며 허리를 숙였다. 평소라면 취하지도 않을 음주에 왜 이렇게 화딱지가 나는지. 오랜만에 소을촌 생각이 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옛 소을촌은 그날 이후로 고향이 아니라 안 좋은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것도 김철현 탓일 것이다. 김철현 개새끼. 짜증나게, 사람 마음도 모르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일본 장교가 되어 나타난 새끼. 그것도 미국에서 낳아 온 두 딸까지 데리고.

「김철현 씹새끼야!」 정랑은 다시 소리쳤다.

한참을 소리 지르고 난 뒤 정랑은 다시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마 그래서 이도를 찾는 데 더 열중했을 수도 있겠다. 놈에게 유린당한 그의 추억을 되찾기 위해서, 아마 상징이 필요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을촌을 되찾기 위해, 망가진 고향을 되찾기 위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감성에 치우친 나약한 심성은 한참 전에 고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정랑은 비틀거리면서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품속에서 낡은 삐삐와 폴라로이드 사진이 덜그럭댔다. 그는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냈다. 사진에는 그와 유정이 찍혀 있었다. 사귀기 시작한 지 반 년이 되었을 때 찍은 것이었다. 그때 유정은 왜 찍느냐고, 휴대폰에다 저장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정랑에게 휴대폰이 없음을 이미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유정은 한결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그가 알면 안 되었다. 유정이 이 사실을 알면 안 되었다. 유정은 몰라야 했다. 도혜는 세라믹파가 정랑의 행위를 안다고 했다. 유정만큼은 그 사실을 알면 안 된다. 그러나… 상황은 너무나 불리해보였다.

당장 무진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정랑은 머리를 흔들며 그런 생각을 흩뜨리고, 다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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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동지들과.


□ □ □ □ □


ー 언니, 자?

ー 안 자.

ー 왜 안 자구.

— 너야말로 왜 안 자는데. 내일 일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 그깟 일, 사업장에 나 하나 안 나간다고 안 돌아갈까 봐.

— 새벽 다섯 시다. 어쩐지 술도 잘 안 마시더라니.

— 언니야말로 맥주를 다섯 캔이나 마시고 취하지도 않았잖아.

정랑은 몸을 돌려 유정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등에서 일렁이는 기계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노이즈처럼 잘게 깔린 소음이 귀를 간지럽혔다. 유정은 반응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웃으면서 팔을 끌어당기거나, 돌아누워서 정랑을 바라보았을 텐데.

어딘가 이상했다.

정랑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유정의 목에 입을 맞췄다. 유정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ー 언니.

ー 그래.

ー 언니.

ー 왜 자꾸 불러.

ー …그냥.

깊은 고요함. 분명 방음도 제대로 되지 않을 방은 바람 소리만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랑은 어딘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눈을 떴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을 부를 때는 무릇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이유가 없는 부름은 없다. 이유를 모르는 부름 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유정은 그런 이유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정랑이 아는 유정은 그랬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ー …언니.

ー 어. 이야기해.

정랑은 여전히 암흑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유정의 체취만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유정에게서는 두려움, 고뇌, 고통의 내음이 났다. 언제부터 그런 향을 풍겼는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정사를 할 때부터? 아니, 아니다. 모텔 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조차 아니었다. 더 오래된 내음이다. 왜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대화가 소거된 공간의 간극을 공허가 메웠다.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절벽 위에서 그 공허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언제 자신이 떠밀릴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최후의 비행을 대비할 뿐. 정랑은 눈을 질끈 감고, 입술에 와 닿는 유정의 체온만을 느끼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기다리는 시간, 그 몇 초는 무겁고 진득한 성질의 것이었다.

ー 그 사람 왜 죽였어?

추락.

유정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단지 그를 바라보고 돌아누웠을 뿐. 유정의 기계 부속지들은 암울하게 빛나며, 무표정한 제 주인의 얼굴을 비추었다. 정랑은 굳은 얼굴로 연인을 바라보았다. 지옥 같은 침묵이 한없이 길게 이어졌다.

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누굴 죽여.

유정은 입을 열지 않았다.

ー 유정아, 내가 누굴 죽였다는 거냐.

— 그 사람, 이름이… 야로라고 했던가.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정랑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 대화는 멀리 있지 않았다. 너무나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부딪힐 정도로. 순간적으로 끓어오른 감정이 편도체를 잠식하는 것을 애써 진정시킨 후, 그는 유정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유정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ー 2018년 4월 2일.

공기가 얼어붙었다. 정랑은 움직임을 멈춘 채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유정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절대 알지 말아야 할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유정이 알고 있다.

ー 한울산에서… 언니가 그 남자를 죽였지?

저 아래서 바람이 울부짖었다.

ー 뿐만 아니라 철륜이라는, 그 남자의 동료도. 무진버스터미널에서.

정랑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ー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유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울거리는 불길 같은 붉음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었다. 어두컴컴한 암흑 속에서 말없이 일렁이는 유정의 형상은 무섭도록 무덤덤했다. 정랑은 숨을 고르며 유정을 노려보았다. 충격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차오르고 있었다.

유정은 시간이 한참 흐르고서야 입을 열었다.

ー …이 부장이. 어제 이 부장이 나한테 말했어. 최 이사님이 존경하던 남자, 수신도의 본당에서 온 남자를 누군가가 죽였다고.

유정은 눈을 감더니 몸을 떨었다.

ー 빙빙 돌려 말했지만 이 부장, 그자는 알고 있었어. 그 누군가가 세을가교도고, 대전에서부터 남자를 추적해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 놈이 바로 그자였으니까.

정랑은 묵묵히 유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유정의 어조는 차가웠다. 차라리 욕설을 퍼부었으면, 하고 정랑은 바랐다. 그게 더 나을 것 같았으니까.

ー 이 부장은 최 이사가 한 말을 내게 전했어. '살인자를 잡아내서, 왜 그랬는지 알아내라. 무언가 얻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 알아내라', 라고 했다고.

유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러나 눈가만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는 그 얼굴로 다음 말을 내뱉기가 두렵다는 듯이 주저하며 작게 읊조렸다.

ー 그리고 죽이라고 했어.

거대한 둔기로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것과 같은 충격이 천천히 전신으로 퍼졌다. 정랑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사람은 갑작스럽게 공격을 받으면 그 직전의 감정을 유지하기 때문에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야기ー죽음. 단순히 그냥 죽음도 아니고, 살해. 유정이 정랑을 죽이기 위해 왔다는 그런 식상한 멜로 드라마 같은 이야기. 그러한 얼토당토않고 충격적이기만 한 이야기가 현실로 나타날 줄은, 정랑도 전혀 예상치 못하던 일이었다. 그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ー 너, 그러려고 날 만나자고 한 게냐? 오늘 보자고 한 이유가 정녕 그것이냐?

유정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듯 입을 움츠렸다. 그러나 말은 입안에서 걸린 듯 나오지 않았다. 정랑은 망연자실한 눈길로 유정의 입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토록 달콤하던 그 입술. 그 입술이 이렇게 불안하게 어른거리는 흉기가 되다니.

ー 강유정, 너…

ー …왜 그랬어?

정랑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ー …

ー 왜, 왜 그랬냐구, 응?

유정은 흔들리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정랑처럼 앉았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목이 조여왔다. 정랑은 거대한 돌이 목을 와락 막고 있는 감각을 느꼈다.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멍한 얼굴로 유정의 얼굴을, 조금씩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는 그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

유정의 악문 이 사이로 말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부러 해석하지 않아도 말에 실린 감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분노, 좌절, 그리고 슬픔.

ー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런 짓을 왜 해서.

ー …유정아.

ー 언니 누구한테도 명령 안 받고 잘만 사는 거 알아. 누가 돈 주고 죽이라고 시켜도 언니가 안 꼴리면 안 하는 거, 나 안다고.

ー …

ー 그런데 지금은… 왜? 왜 굳이?

정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ー 왜 내가… 왜 내가 언니한테 이런 짓을 하게 하냐고… 왜?!

유정은 그렇게 소리치고, 정랑에게서 몸을 돌렸다. 정랑은 유정이 고개를 숙이고 뚝뚝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가슴을 한데 얻어맞은 것처럼 온몸의 숨이 훅하니 꺼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정랑의 입이 조금 벌려지면서 팔이 축 쳐졌다. 유정은 대답하지 않음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정랑은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흔들었다. 발밑이 천 리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러나 그때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소을촌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처럼. 그때 정랑은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개념을 처음으로 접했다.

그리고 지금 그 기분이 다시 느껴졌다.

유정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기계 부위를 적셨다. 정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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