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쳐진 전사는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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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멀지 않았다.

여자는 오른손에 든 단검을 그러쥐고는 시야 저편을 노려본다. 저 멀리서 빛나고 있는 태양. 하늘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는 노을의 모습으로, 해는 이지러지고 있다. 그가 바라던 양질의 풍경이다.

그리고 적은 그 노을을 등지고 대오를 맞추어 전진해온다.

여자는 그들이 적당한 사거리에 진입할 때까지 몇 번이고 무기를 바꾸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지금 그의 손에 들린 무기, 광택이 도는 검은 빛으로 채색된 이 단검이다. 곧, 속도전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다. 죽을 정도로 피격당하기 전에 상당량을 미리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 지원도 남은 탄환도 얼마 없는 상황이므로,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한 번의 실책은 곧 게임 오버다.

오점이 남게 되겠지.

여자는 단검 손잡이의 끄트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대고, 자세를 낮추어 자신을 엄폐하고 있는 불타는 트럭 차체에서 머리를 슬쩍 내밀어 본다. 적들은 재빠르게 자신들의 위치로 나아가고 있다. 한 사람도 우왕좌왕하지 않는 모습은 조금 섬뜩하기까지 하다. 마치 수십 회는 연습한 듯한 질서정연한 대열. 훈련받은 대원들이다.

그러나 여자는 그 훈련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열두 시 방향의 적이 저격총을 들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왼쪽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놓치기 전에 자세를 낮추어 그 뒤를 따라들어간다. 적은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발소리가 들려도 지금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동료 한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고 생각하리라.

저격수는 3층 정도를 올라가고 나서, 탁 트인 창이 있는 난간에 자리를 잡았다. 여자는 소리죽여 저격수의 뒤에 잠시간 서 있다가,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이고는 뒷걸음질로 물러 나와 4층으로 올라간다. 4층에도 역시 창이 있다. 조금 전 층의 창보다는 살짝 작다. 아무렴 상관은 없다. 뛰어내릴 수만 있다면 괜찮으니까.

그는 창틀에 발을 딛고, 몸을 웅크려 창밖으로 살짝 몸을 빼낸다. 적들 사이에서 오가는 교신까지 들을 수 있는 위치다. 지상의 타격조는 여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건물 사이에서 대기하고 있는 적들 역시 그러하다. 저격수도 같은 답을 말하고 있다. 아무도 찾지 못했다고.

그게 자신의 공격 신호를 알리는 말임을, 여자는 직감할 수 있다.

그는 창밖으로 몸을 내던지고, 내려오는 속도 그대로 저격수의 머리에 단검을 쑤셔 박는다. 저격수는 그대로 엎어지고, 교신은 끊어진다. 저격수의 죽음에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자는 저격총을 주워 어깨에 둘러메곤 아래로 다시 곤두박질친다.

남은 적: 7명.

탁 트인 곳으로 바로 전진하는 것은 위험하다. 여자는 앞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는 건물들의 후편으로 질주한다. 경험으로 갈고닦은 파쿠르 실력이 빛을 발한다. 쓰레기로 얼룩진 쓰레기통 뚜껑이 그의 몸을 퉁겨 담벼락으로 올려준다. 아직 누구도 발견 못 한 새로운 편법이다.

적들 중 몇이 그를 보고 사격한다. 허나 애꿎은 담벼락 돌조각만이 작살나곤, 여자는 어느새 그들 측면에서 돌진해오고 있다.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단검을 휘둘러 적들의 옆구리를 박살한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가슴팍에 깊게 쑤셔 박는다. 살의 진동이 팔에 전달되어 온다. 피가 얼굴에 튀지만 닦을 새도 없다. 적이 어떻게 반응하기 전에 일은 끝나야만 한다.

남은 적: 4명.

그리고 어깨에 타는 듯한 통증이 일어난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몸을 날려 구른다. 정신을 차린 일부 적이 그에게 사격하고 있다.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들마저 가세했다. 그는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올라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난다. 낭패까진 아니지만 신경질이 나기 시작한다. 자주 사용하던 전술 대신 실험을 한 번 해보겠다고 나댄 까닭인 듯싶다.

생명이 절반으로 깎인 감각이 구토감처럼 밀려든다. 시야가 몽롱해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이겠지.

다행히 그에겐 또 한 가지의 공인된 편법이 있다. 여자는 뒤로 달아나며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끌러 적들 쪽으로 던진다. 그리고 그 순간, 공간이 일그러지며 적탄이 반대쪽으로 날아간다. 공간변이폭탄. 정신재해수류탄, 인식재해성 섬광탄, 비격전천뢰와 함께 주어진 보조무기 중 하나다. 본래는 사람에게 직접 쓰라고 만든 무기지만, 이런 식으로 탄도를 휘게 만드는 것 역시 가능하다. 여자는 틈을 타 재빨리 근처 창고로 달아난다.

뒤쫓는 발소리들이 요란하다.

별 수 없이 전체 치료를 하는 대신, 상처에 압박 붕대만을 매는 수밖에 없다. 진통제를 주사하니 조금은 움직임이 수월하다. 그는 창고 2층에서, 몇 개의 엄폐물을 놓고 다시 기다리고 있다.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창고 문을 노려본다. 마음 같아선 수류탄과 함께 다섯 발이 남은 M416으로 돌격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는 짓은 추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렇게 나선다면, 이 싸움을 벌인 의미마저 없지 않은가.

여자는 한숨을 쉬며 아까 저격수에게서 얻은 저격소총을 장전한다. PM-192. 프로메테우스의 숨겨진 역작 중 하나. 프로메테우스가 망한 이후로 한동안 단종되었다가 근래에 M C&D에서 다시 생산하기 시작한 품종이다. 총탄을 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아쉽게도 이번 싸움에서는 이 총으로 누군가의 두개골을 박살 내진 않을 예정이다. 이 날렵한 녀석은 다른 곳에 쓰여야 한다.

이를테면 지금, 저기 적들이 들어오며 수류탄을 날리는 이 순간에.

순식간에 공기는 느려지고 세상은 암흑에 휩싸인다. 숨이 차츰 거둬진다. 그는 조준경에 모든 감각을 집중한다. 조준경 너머의 세상은 고요하고 안온하다. 오직 움직이는 표적 저 하나만이 존재할 뿐.

여자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긴다.

공중에서 폭발이 일며, 파편이 사방으로 날아간다. 그는 엄폐물로 하여금 파편에 대신 희생되게 한다. 적들 역시 문밖에서 기다리던 치들은 살아남는다. 폭탄을 던지며 돌격하던 플레이어의 상반신이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것과는 달리.

여자는 재빠르게 행동을 취한다. 생각만큼 죽지 않은 적은 물량으로 승부를 취할 것이다. 창고의 창문 사이로 어느덧 새까매진 밤하늘이 보인다. 이 시간대라면, 오히려 그에겐 좋은 환경이다. 여자는 마지막으로 남은 섬광탄을 1층 바닥에 내던져 버린다. 그리고는 손을 허공에다 치켜들고 이리저리 흔든다. 적들은 일시적인 정신재해에 당해 당황하고 있다. 혹시나 여자가 단검으로 덤벼들 때를 대비해 사방을 쏘아댄다. 그 바람에 적 하나가 더 죽어버리고 만다. 여자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는, 엄폐물 위로 올라가 손을 하늘 높이 쭉쭉 뻗어댄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덧 회복한 적들은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들은 2층으로 올라오지만, 불빛 하나 없는 창고에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워한다. 발소리는 분명 들려오는데, 찾을 수가 없다. 이제 남은 인원은 둘. 두 명의 인원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있으면 금방 쏘아버릴 듯한 태세로 창고 안을 수색한다. 설마, 그 짧은 시간 내에 달아난 것인가. 그것이 말이 되지 않음은 그 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도 흔적을 감출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그때, 선두에 서서 수색하던 자의 귓전에 동료의 비명이 들려온다.

재빨리 뒤를 돌아 사격하지만 총탄이 씹어대는 것은 이미 절명한 동료의 시신뿐이다. 그는 방금 전 사격으로 총알 대부분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재장전을 시도하며 시신을 확인한다. 목에 그어진 붉은 실선— 단검의 흔적이다. 그 여자가 아직 이 창고에 있다. 그 생각이 들자 마지막 생존자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아직 여기 있다는 것은, 그러니까,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말—

생각이 끊어진다. 단말마와 함께 생존자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그의 등은 끔찍한 자상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의 뒤에, 여자가 서 있다. 피 묻은 단검을 든 채로.

여자가 천천히 단검을 허리춤에 꽂고는, 입을 연다.

"야, 씨바 클립 땄냐?"


?????
플러그소프트 제3서버

"아 땄냐고!"

"아이고, 가만히 좀 있어, 거 일단 기기에서 나오고 말을 하라고…"

플러그소프트 제3서버 제작자 회의실 한쪽은 북적이고 있었다. 검은색 모래가 유동적으로 흐르면서 바닥을 이루고 있는 정사각형의 공간, 그리고 그 위에 엎어져 있는 다수의 사람들. 이들은 미동도 없이 그대로 누워 일어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 위에서 유일하게 서 있는 사람은 여자 한 사람뿐이었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등 뒤에 길게 늘어뜨리고,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 이 여자가 누워 있는 다수를 쓰러뜨린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는 날뛰고 있었다.

"야 씨 봤냐? 야 봤냐고! 탄도 휘는 거 봤냐? 봤어? 어? 창고 천장 올라가는 거 봤냐?"

"네, 네… 봤어, 봤어. 알겠다구. 오랜만에 했더니 되게 흉포해졌네."

여자, 은민재는 팔을 뒤로 쭉 펴면서 킬킬댔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쾌감이 가득했다. 게임을 끝마치고 나면 으레 찾아오는 감정. 전신의 피를 돌게 하고 새로운 힘을 가져오는 그러한 감정이었다.

그런 그를 곤란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는 바로 제3서버의 개발부 제1팀 소속 개발자, 황유신이었다. 그는 셔츠 위에 감색 스웨터를 입고, 한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커다란 안경알이 이따금 흔들리면서 초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그래서, 수정할 게 또 있을 것 같아?"

유신이 넌지시 물었다. 제발 없으라는 염원이 말투에 가득 묻어나오고 있었다.

"음, 없는 것 같은데. 단검 너프 먹인 거 꽤 괜찮은 것 같아. 전엔 한 방 컷이었는데, 지금은 두 방은 때려야 그게 있네. 난 좋아. 솔직히 말하면 단검 더 너프 먹여도 될 것 같긴 함." 민재가 골몰히 생각하며 대꾸했다.

"그런 수준으로 너프하면 그냥 무용지물이야." 유신이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그건 그렇고 쟤네, 10분 있다가 일어나는 거 맞지?"

민재가 등 뒤를 가리켰다. 그곳엔 여전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이들이 병상에 누워 사내 의무실로 이송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플러그소프트 내에서 훈련받은 수준급의 플레이어들이었고, 새로이 개발되는 게임의 베타 테스터 역할을 맡았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모습은 처음이라고, 유신은 생각했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상대인지 실감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래. 지금이야 혼수 상태지만, 그때면 일어날 거야. 아니, 댁이 다 쓰러뜨렸으면서 그게 걱정이 돼?"

"이거 시중에 풀렸을 때 혹시나 누가 했다가 정말 뒈지는 게 걱정이 되는 거지." 민재가 허공에서 환경설정을 불러내며 말을 이었다. "그랬다간 우리 부서 펑, 알잖아?"

"걱정 붙들어 매. 개발2팀이 제일 신경 쓴 게 그거야… 애초에 시작 전에 노약자, 심약자, 임산부 등은 접속도 못 하게 막아놨잖아. 별일 없을 거야."

"그럼 다행이고."

이윽고 민재는 환경설정 하단에서 '접속 종료' 버튼을 누르고, 공간에서 걸어나왔다. 이와 동시에 허공에서 갈라지는 질감이 나타나 그의 주변을 감쌌다. 십 초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언제나와 같이 피부 표면을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그의 외양은 곧 변화하기 시작했다. 보랏빛 머리가 검은색으로 물들어 갔다. 머리카락 역시 짧아져, 단발 정도의 길이로 줄어들었다. 마치 자라난 머리가 다시 두피 안으로 파고드는 것마냥.

그리고 키. 민재는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그의 신장은 그가 한 발자국씩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줄어들어, 어느새 유신에게로 다가왔을 때엔 이전보다 상당히 작아진 상태였다.

유신이 피식 웃었다.

"왜 웃냐 새끼야."

"어, 아니… 백오십칠 은민재."

"씹새끼가—"

"선배한테 그럴래?"

"선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진짜. 너 이 새끼야 내가 프로게이머 안 하고 여기 바로 취직했으면 팀장은 달았다 새끼야, 응?"

민재가 험악한 표정으로 유신의 멱살을 부여잡자, 유신의 목에서 웃음과 컥컥대는 소리가 섞여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리고 생각해보니 더 빡치네. 야 157이 작아? 작냐?"

"작은데."

민재가 유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오늘 계속 조인트 까이면서도 그 이야기 하나 보자."

"아, 아! 알았어, 알았다고! 아악! 미안해!"

발차기가 연달아 날아오자 유신은 펄쩍 뛰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단련된 발차기는 쉽게 목표를 놓치지 않는다. 결국 유신은 열세 대나 얻어맞고 나서야 민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와…씨, 엄청 아파. 너 철권을 몸으로 하기라도 했어?"

"엉."

"엉?"

"뭘 물음표야."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유신의 얼굴을 뒤로 한 채, 민재는 근처에 놓인 에너지음료 캔을 따서 입에 가져다 대었다. 흥분으로 인해 아드레날린이 온몸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귀가 둥둥 울렸다.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어쩌면 이런 느낌 탓에 지금도 이 짓거리를 하는지도 몰랐다. 다시 그때처럼 온 세상의 열기를 심장으로 받아내며,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미친 듯이 헤쳐나가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더라도.

갑자기 음료수의 단맛이 쓰게 느껴졌다.

아니, 아니다. 민재는 얼굴을 찌푸렸다. 괜한 생각이었다. 돌아가지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시간을 떠올려 좋을 게 뭔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신이 해맑게 덧붙였다. "그래도 네 덕에 막바지 단계에 들어섰네. 홍보부에서도 고생해줘야겠어."

"아 제발, 그딴 소리 하지 마."

민재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3서버 홍보부 고문이자 개발 제1팀 QA 은민재, 그것이 플러그소프트 내에서의 그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다. 귀찮기 짝이 없는 직함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일종의 요식 행위였다. 이름은 힘이 없었다. 단지 벗기기 어려운 플라스틱 포장과 같은 것일 뿐. 게임은 닉네임이 얼마나 멋진가를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제아무리 괴상한 닉네임을 달고 있다 하더라도 플레이 실력에 따라 사람이 받는 취급은 달라진다.

그러나 모든 현실이 게임처럼 흘러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이제부턴 우리 소관이 아니겠나. 개발팀이 제때 끝낸다는 가정 하에."

민재와 유신이 고개를 돌리자 어떤 존재가 책상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낡고 빛바랜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입을 옷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특이한 점은 그의 얼굴이 녹슨 회중시계라는 것이었다.

"와, 면상 꼬라지 봐라."

"이 지옥의 아가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니?"

"너 니 얼굴 닦고는 다니냐?"

"홍보부는 제3서버의 얼굴이야."

"아, 안 사요."

시계 머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카락이 있었을 부분을 쓸어넘겼다. 머리가 대체되지 않았을 적의 버릇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수년 전 사고로 시계 머리, 마유즈미는 머리가 시계로 바뀌어버렸다. 그럼에도 언어 능력이나 감각 능력은 없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듣고 보고 말하는지 변한 자기 자신부터 알지 못했다. 어이가 없는 변화였지만 의외로 본인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전에 다니던 직장에서는 훨씬 더 끔찍한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언급과 함께.

"개발 완료되고 론칭 준비하기 시작하면 바빠지시겠네요, 팀장님." 유신이 유들유들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게요. 사업 PM하고도 이야기해봐야 하고, 벌써부터 복잡할 것 같군요." 마유즈미가 웃음을 흘렸다. "자세한 건 회의가 들어가 봐야겠지만."

"그래봤자 어차피 스트리머한테나 뿌리겠지." 민재가 부루퉁하게 끼어들었다. 말 하나하나가 도리어 자기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겪으면서.

"우리 홍보부 고문께서 매우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시네. 고문하고 싶게."

"홍보부에서 이리 가라 저리 가라 하면서, 동시에 QA짓 하게 만드는 게 고문 아니고 뭐냐?"

"스트리머 홍보가 그렇게 싫어? 신기하네. 그게 자네 분야일 텐데. 아는 사람들 많잖아."

민재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뭐 이 새끼야?"

"…두 분 싸우는 거 아니죠?"

마유즈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민재는 조금 더 마유즈미의 시침을 노려봤지만, 결국 고개를 내렸다.

"아냐 임마. 새가슴 어디 안 가네."

"…그래."

"아무튼, 난 가봐야겠네. 개발 막바지니까 더 힘내줘요, 유신 씨. 민재 자네도 안 좀 궁리해보고."

"네, 들어가십시오."

마유즈미는 민재와 유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른 쪽으로 거닐어 갔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유신 옆에서 민재는 한쪽 입꼬리를 쭉 내민 채 손을 흔들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가올 회의 때문에 민재 나름대로도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사실인즉 그게 그의 가장 큰 업무이기도 했고.

그 업무가 적어도 민재의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게 문제였다.

"괜찮아?"

민재는 어리둥절하게 유신을 올려다보았다가 자신이 지금까지 이맛살을 찌푸리며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 괜찮을 건 뭐야."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알면 내둬, 이 새끼야."

"하여간 말버릇하곤." 유신은 익숙해졌다는 듯이 걱정이 조금 담긴 웃음을 지어 보이며 민재의 어깨를 툭 쳤다. "좀 쉬어. 론칭 이후에 다시 굴려 먹을 테니까. 그때까지는 쉬어."

"뭘 쉬어, 이제 홍보팀이 날 굴릴 건데."

유신은 피식 웃고는 다시 한 번 민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간다. 나중에 보자."

"그러던지."

마침내 민재 홀로 남고 말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사람들이 모인 곳을 응시했다. 개발2팀은 자기네들끼리 모여 무어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유신은 막 그곳으로 걸어가며 큰 소리로 뭔가를 외치고 있었다.

즐거워보였다. 그러나 민재는 그들과 섞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섞이지 못한다는 게 더 옳은 진술일 것이다. 민재는 개발팀과 섞일 수 없었다. 개발팀 내에서 그의 위치는 딱히 고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팀원들 사이에서 붕 뜬 존재였다. 왜인지 그 이유를 딱 잡아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면 홍보부는? 부는 팀보다 더 큰 개념이다. 그러나 그래서인지 홍보부에서도 딱히 굳건히 자리 잡은 것 같지는 않았다. 홍보1팀 팀장인 마유즈미와 지속적으로 부딪히긴 했지만, 그것이 순전한 호의에서 온 것이 아님을 민재도 알았고, 마유즈미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래서 민재는 마유즈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위선이 악보다 낫지만 선보다 나은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민재는 서성이며 손에 들린 음료 캔을 계속 홀짝였다. 혀를 때리며 목구멍으로 흘러가는 자극의 흐름이 위 속으로 폭발하며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컴퓨터 앞에서는 이런 감각도 알지 못했다. 매일 로그인하며 수많은 그래픽과 스킬과 궁과 힐의 향연 가운데 그는 자아 없는 열정으로 전장을 휩쓸었다. 뇌가 마비되는 감각. 그것은 일종의 예배였다. 이성을 잃은 가운데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냉철하게 돌아갔으며, 감정으로 풍만한 가운데 감정은 끊임없는 힘으로 화하여 적을 내리쳤다. 그는 신을 알지 못했지만 모니터 속에 신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힘으로 하여금 놀라운 것들을 행할 수 있음을 배웠다. 카페인이 심장을 때리면서 순환계의 작동이 빨라졌다. 민재는 다시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키보드 소리가 귓전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그 끝없던 몰두의 시간, 모두가 모니터 속의 화면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던 그 광경.

그는 멍하니 걷다가 자신이 발코니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코니 너머 광활한 우주에서는 개발2팀이 준비하고 있는 "푸룬바룬 I"의 요소들이 차례로 축조되고 있었다. 민재는 저 멀리에서 보이는 적회색 피라미드를 잠시간 말없이 쳐다보았다. 피라미드 너머의 부지에는 개발3팀이 준비하는 다른 게임의 요소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민재는 플러그소프트에 처음 영입되었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우리는 개미와 같이 일한다. 우리는 신의 개미들이다. 아니, 우리는 신인 개미들이다. 우리는 협동하며, 토의하고, 총의를 모아, 세상을 건설한다. 우리는 우주의 단 하나의 재미를 위해 신의 능력을 사용한다. 우리는 플레이어들을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는 자들이다. 세계는 여기서 모이고 즐거움만이 오른다. 당신의 피가 끓는다. 모든 우주의 기어드는 즐거움이 여기서 용솟음쳐 비명 지른다. 신이 즐거움에 차 비명 지른다. 신의 비명이 여기서 회오리쳐 구물거린다. 당신은 신이다. 우리 모두가 신이다. 바로 이곳에서.

민재는 이 일련의 창조에서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끔찍함을 느꼈다. 끔찍함인지 경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여기에서 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한 의문은 양각에 잡힌 플레이어의 총구처럼 돌파할 방향을 가늠하지 못했다. 목을 타고 그 액체가 넘어갔다. 자극, 자극, 자극, 자극의 연속. 뚜렷한 길 위에서 뛰어갈 때 자신을 끌어올렸던 그 자극은 이제 무용하디 무용했다.

민재는 갈 곳을 알 수 없었다. 갑자기, 그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왜 여기에 들어오겠다고 했는지. 왜 프로게이머를 은퇴했는지. 왜 그렇게도 오랜 슬럼프를 보냈는지. 왜 그 슬럼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는지. 왜 그 경기에서 지고 말았는지. 왜 내가 짠 전술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는지. 왜. 왜. 왜. 왜 그는 그렇게 떠나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왜 다들 그렇게 떠나가는 건지. 왜 아무도 남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통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이게 인생이라는 걸까. 다들 인생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가 가진 제일 큰 종양에 인생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닐까. 웃기는 일이었다.

민재는 발코니에 기대면서 말없이 음료수를 들이켰다. 목이 따가우면서 캔에 담긴 음료가 목으로 흘러들어가 영영 없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캔은 비었다. 민재는 캔을 발코니 바깥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민재는 깨달았다. 지금 이렇게 힐 달라고 징징대는 딜러처럼 구는 이유가, 머릿속에서 불을 켠 듯이나 환하게 보이고 말았다. 먼 옛날 처음으로 게임에서 이긴 그 순간에 인생의 법칙을 안 그 순간처럼.

갈망이구나.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영광의 시절, 모두가 훤히 보이던 그 전지(全知)의 세월을.

다시 한 번 그렇게 플레이할 수 있다면.

외투 주머니에서 메신저 알림음이 들려왔다.

DamChae
오늘 오후 08:27

일거리 없냐
슬슬 컨텐츠 만들거 궁해지는데

민재는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의 전원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나 연달아 올라온 몇 개의 메시지에, 그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DamChae
오늘 오후 08:28
아맞다
요새 펜듈럼 쪽에서 뭐 프로팀 같은 걸 하나 기획하고 있다던데
우리 매니저가 그러거든
은퇴 프로게이머가 좀 참여해줬음 좋겠다고

펜듈럼Pendulum, 플러그소프트가 벌이는 짓거리처럼 비현실적인 게임과 영상들이 올라오는 영상 플랫폼. 거기서 게임 관련 기획을 한다…고.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흥미는 알지 못하는 새에 접근한 암살자처럼 순식간에 민재의 마음에 일격을 가했다.

DamChae
오늘 오후 08:28
컨텐츠 거리 좀 주면 내가 주선해 줌

민재는 잠시 주저하다가,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민재
오늘 오후 08:28
미친년
이거 부정청탁이야
DamChae
오늘 오후 08:29
알 거 다 아시는 분이 왜그러실까ㅋㅋ
애초에 너 뭐 있으면 나한테 먼저 연락하잖아
이런 거 없어도
그간의 답례라고 생각하셈

손이 떨려왔다.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폭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행로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어디로 귀결될지 뻔히 보이는 폭풍이었다.

그렇다면 그 길을 걸어가야지.

민재
오늘 오후 08:29
약속
꼭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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