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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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요?”

아쿠아마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주내에 처음으로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 눈이었다.

“직원 복지 차원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야. 오랫동안, 적어도 휴가를 3번 이상 미룬 인원들을 한 달 동안 한꺼번에 휴가를 보내는 계획이지. 그동안 휴가를 안낸 보상으로 휴가 기간 동안 급여는 지급해 줄 예정이고.” 책상 건너편에 앉은 여자는 무심하게 손톱을 손질하며 말했다.

“전 가고 싶지 않은데요?”

“물론 그 기간에 나와서 일하는 것도 가능하긴 해. 하지만 공식적으론 넌 휴가 나갔다고 기록이 될 거야. 그렇게 헛되이 보내는 건 내가 별로 추천하지 않아.”

“갈 데도 없어요. 휴가 기간 동안 숙소에 처박혀 있으라고요?”

여자는 손톱에서 눈을 떼고 아쿠아마린의 눈을 바라봤다.

“부모님은?”

“둘 다 안 계세요.”

“고향은?”

“아는 사람이 없어요.”

여자는 한숨을 쉬고 팔짱을 꼈다. 마음 같아선 휴양지라도 추천하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그럴 수 없다는 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비하지 못하면 재단 행정직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여자의 사무실 문에 노크하는 소리가 났다.

“그럴 줄 알고 부른 사람이 있어.” 여자가 말했다. “들어와.”

“실례합니다아아.” 문을 열고 또다른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의 머리와 눈은 짙은 남색이었다. 머리 위로 튀어나온 머리카락 몇 가닥이 눈에 띄었다. 복장은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연구원의 복장이었지만, 꾸민다면 충분히 예뻐보일 외모였다. 그녀의 눈은 휴가를 앞두고 즐거워하는 회사원의 눈이었다.

“27기지에서 온 즈소 연구원이라고 해.” 여자가 어안이 벙벙해진 아쿠아마린에게 말했다. 사실 여자도 이게 득이 될지 독이 될지 알 수 없었다. “갈 곳 없는 너를 위해 가이드 비슷한 사람이 되어줄 사람이야.”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쿠아마린은 응급실에 있는 동기를 찾아갔다.

응급실과 의료실, 둘 다 한가한 경우는 거의 없었기에 내일 있을 휴가에 대한 수다를 실컷 떨 수 있었다.

이윽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직전, 기지 전체에 경보가 울렸다. 대규모 격리실패, 위협적 개체 다수 탈주, 모든 의료부 인원들은 응급실로 집합 후 응급 수술에 대비할 것. 아쿠아마린은 미리 도착해 있었기에 수술에 보다 빨리 들어갈 수 있었고, 그렇게 첫 번째 수술부터 집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밀고 들어온 이동식 침대 위 환자를 보았을 때, 아쿠아마린은 그 순간 생각을 멈추었다.

그녀의 오빠가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왔다.


흐아아악!!!!

아쿠아마린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벌써 몇 번째 같은 꿈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날로부터 수개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많은 ‘만약’을 생각해보았다. 만약 그날에 응급실로 놀러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날 오빠를 만나러 갔다면, 만약 그날에…

…..휴…..휴…..휴…..

나지막한 숨소리에 아쿠아마린은 아래를 보았다. 즈소가 침대 옆 바닥에 누워 나지막한 숨을 쉬며 자고 있었다. 짐을 싸야 하니 내일 출발하자고 했더니, 다른 기지에서 와서 잘 데가 없다고 해 그녀를 숙소로 데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깨어나지 않은 걸 보니 역시 비명은 속으로 질렀었나 보다.

아쿠아마린은 몸을 웅크려 즈소를 내려다보았다. 첫인상도 그랬지만 참 속 편하게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린씨? 아쿠아마린씨?”

아쿠아마린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눈앞에 생글거리는 미소가 보였다.

“그렇게 자는 게 취미예요?”

이렇게? 미소에 눈을 돌리자 세워진 무릎이 보였다. 아, 나도 모르게 웅크려 잤나 보구나.

“전 먼저 씻었어요. 마린씨도 빨리 씻어요. 빨리 놀러가야죠.”

아쿠아마린은 즈소를 옆으로 밀어내며 샤워실로 비척대며 걸어갔다. 즈소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의 뒤를 지켜봤다.


두 여자가 주차장을 걸어갔다. 둘 다 평범한 연구원 복장 대신 사복을 입은 상태였다.

즈소는 상아색 터틀넥에 청바지, 그 위에 갈색 롱코트를 입었다. 아쿠아마린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후드티, 거기에 패딩 조끼만을 겉옷으로 입었다.

둘은 즈소의 차에 짐가방을 실었다. 즈소의 고향 근처에 있는 스키장으로 간다고 했다. 즈소가 싸라는 데로 쌌더니 생각보다 짐이 많이 나왔지만, 이제 아쿠아마린은 그걸 신경쓰지 않았다.

“숙소 가기 전에 잠시 들릴 데 있는데, 괜찮나요?” 운전석에 앉은 즈소가 조수석에 들어오는 아쿠아마린에게 물었다.

“네에…” 아쿠아마린이 두 눈을 감고 힘없이 말했다.

“헤에, 어디 가는지 안 물어보는 거에요?”

“어디로 가는데요?” 아쿠아마린이 눈도 뜨지 않고 무심히 말했다.

“저희 부모님 계신 곳에요. 한번 인사드리러 가야 하거든요.” 즈소는 신이 나서 말했다.

아쿠아마린은 짜증스레 눈을 치켜 떠 즈소를 보았다. 장난스러운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걸려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대책 없는 웃음에 아쿠아마린은 괜스레 반감이 들었다.

“그럼 그동안 전 차 안에 있을게요.”

아쿠아마린의 왼쪽 귀에 후훗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요, 그럼. 출발합니다앗!”

갑자기 피곤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눈 좀 붙일게요.”

“그런 자세로 잤으니 피곤할 만도 하죠. 도착하면 깨울게요.”

조용히 잠에 몸을 누인다. 이번엔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


한 번 생각을 놓으면 황홀경이 찾아온다.

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친구의 말로는 잘못 보면 황홀경에 걸린 사람처럼 수술에 임했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랬던 것 같다. 한 번 오빠의 수술을 집도하는 순간, 멍해진 머리에는 이 사람이 오빠임을 잊고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꽉 차있었다.

그토록 집중해서 수술한 일이 있었을까. 함께 수술에 들어간 친구는 여기에 질려 수술 중에 손을 떼었다고 한다. 그토록 신 들린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수술진이 중간에 손을 뗐다는 건 가망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친구가 팔을 잡았을 때 나는 멈추었다. 심장박동기가 직선을 그리고 있었고, 얼굴의 눈물은 마르고 있는지 흐르고 있는지 몰랐다.

나는 무너졌다. 몇몇 장비를 오빠의 몸에서 떼고 오빠의 머리 위로 천을 덮은 친구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어쩔 줄 몰라했다.

난 다음 환자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친구는 잘못 들은 것처럼 반문했다. 나는 힘을 주어 다음 환자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친구는 머뭇거렸고, 나는 재촉했다. 결국 친구는 수술실 밖으로 나가 또 다른 침대를 끌고왔다.

사태가 끝나고, 나는 친구 혼자 휴가 보낼 수밖에 없었다.


아쿠아마린은 조용히 눈을 떴다.

차는 국도의 갓길에 주차되어 있었다. 눈발이 흩날렸다. 아쿠아마린은 조수석 창문으로 흩날리는 눈꽃을 보았다. 아쿠아마린은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진 걸 느꼈다. 눈은 신기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그녀는 누그러진 마음으로 운전석을 쳐다봤다. 즈소도 정신없이 눈을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즈소는 거기 없었다.

아쿠아마린은 다시 멍해진 기분을 느꼈다. 그러자 운전석 너머로 산을 타고 있는 푸른 머리가 보였다.

아쿠아마린은 당황해서 밖으로 나왔다.

“즈소!”

즈소가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차에 계신다면서요?”

“네?”

“기왕 일어난 김에 같이 인사드리러 가요. 한 번도 직장 동료를 소개시켜 준 적이 없거든요.”

아쿠아마린은 여전히 당황한 채 즈소를 따라갔다. 그녀가 한 말이 다가가는 동안 생각났다.

‘저희 부모님 계신 곳에요.’

‘댁’이 아니구나.


“엄마~ 아빠~”

즈소는 두 무덤 사이에 쌓인 눈에 몸을 던져 안겼다.

“나 왔어. 직장 동료도 데려왔고. 벌초도 했네? 아재가 해준 거야?”

아쿠아마린은 조용히 즈소를 지켜봤다. 차마 말을 붙일 수 없었다. 하지만 아쿠아마린이 망설이는 것에 비해 즈소는 너무 밝았다.

즈소는 코트 주머니에서 견과류 몇 개와 술 한 병을 꺼냈다. 견과류는 묘비 위에, 술은 묘지 주변에 고루고루 뿌렸다. 술을 다 뿌린 즈소는 무덤 앞으로 나와 절을 두 번 했다. 아쿠아마린도 따라 간단하게 두 번 절했다.


“매년 휴가 때마다 여기 와요.”

즈소가 두 무덤 사이에 몸을 끼워 넣은 채로 말했다. 마치 부모님 사이에 안긴 아이 같았다. 아쿠아마린은 즈소 건너편에서 어제 잠든 모습대로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연락할 짬이 안 나니, 휴가 때 말고는 들릴 시간이 없더라고요.”

“연락을 못했다, 라는 건 입사할 때만 해도 살아 계셨다는 말이군요.”

“네. 제가 근무하는 동안 돌아가셨어요. 전 장례식도 못 갔지만.”

“장례식을요?”

“너무 바빴어요. 예의를 못 지킨 건 아쉽지만, 이 일도 너무 쉽게 버리고 갈 순 없었어요.”

아쿠아마린은 언짢게 쳐다봤다. 즈소는 그저 키득거리며 웃었다.

“여기 무덤은…”

“마을에 아는 아재가 장례식부터 해서 무덤까지 해주셨어요. 마을로 다시 오지 않는 게 낫다고 해주신 것도 그분이시고요.”

“다시 오지 마요?”

“오면 몰매 맞을 거라고 해서… 헤헤…”

즈소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이젠 상관없어요. 이제 부모님은 여기 계신 걸요? 어디 사라지지도 않았잖아요. 언제나 여기 계실 테니까.”

뭔가 슬픈 얘기를 하면서도 즈소의 눈과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아쿠아마린은 이 여자의 괴상한 발랄함에 흥미인지 전염인지 모를 꿈틀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얄궂게도 묘한 마음은 사람을 설레게 한다.

즈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고 기지개를 폈다.

“이만 갈게, 엄마, 아빠. 아재한테 연락했으니 땅콩은 아재가 치워주실 거야. 그때까지 마음껏 드세요!”

아쿠아마린도 따라 일어섰다.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복잡해졌는지는 모르겠다, 그녀를 따라다니며 깊은 상처가 닫힐지, 더 후벼파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 튈지 모를 저 여자를 따라가는 건 왠지 흥미가 동했다.

근본적인 해결은 못되겠지만, 적어도 기분 전환은 되지 않을까 싶다.

둘은 차를 타고 서로 눈을 마주보았다. 아쿠아마린은 한 번 활짝 웃어보았다. 차가 눈발을 뚫고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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