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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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버지니아에게,

당신이 더 이상 없다는 걸 받아들인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을 보내고 술이 늘었습니다. 당신 없이 사는 법을 술이 가르쳐줬기 때문입니다. 이제 배울 건 다 배웠으니 줄여나갈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늘 하던 약속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몇 주 전의 일로 다시 술에 손을 대고 말았습니다. 어떤 악마가 내가 술을 내려놓지 못하게 사건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이제까지 공포가 저를 짓눌렀기에 별 수 없이 술을 곁에 두었습니다. 공포가 어느 정도 가신 지금이 돼서야 겨우 편지지와 깃펜을 듭니다.

언제나처럼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서던 새벽이었습니다. 슬픔을 담아 더운 숨을 내뱉던 중에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하나의 점을 봤습니다. 고양이의 눈이었습니다. 빛이 두 개가 아니고 한 개인 까닭은 외눈박이 고양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빛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는 검은 고양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평범한 고양이라 하겠지만 저는 그 고양이를 보고 얼어붙었습니다. 누군가는 제 소설을 보고 공포에 질렸겠지만, 그 때의 전 그들보다 배로 된 공포를 느꼈습니다. 당신이 뱉은 마지막 숨결을 마신 나의 절망감, 그만큼의 공포가 목을 타고 흘러와 발끝까지 퍼졌습니다.

‘그’ 검은 고양이와 완전히 똑같아 보였습니다. 제가 쓰면서 생각하던 ‘그’ 검은 고양이와 완전히 똑같았습니다. 앙상한 팔다리, 심연에서 건져올린듯한 울음소리. 무엇보다 그 살기가 어려 있는 에메랄드 눈. 인간의 깊은 추악함을 꿰뚫어보는 그런 눈.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고양이의 배가 불렀던 점이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존재가 현실에 나타나면 기뻐해야 할까요. 아마도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든 고양이는 공포를 주려던 존재였습니다. 그 역할에 충실하듯이 제 앞에 선 고양이는 저에게 압도적인 공포를 주었습니다. 발걸음은 더 이상 휘청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공포로 깨인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검은 고양이가 제 발자국을 함께 밟아 왔다는 걸 알아챈 건 그때였습니다.

생전에 당신은 고양이를 좋아했었습니다. 저와 함께 당신의 마지막을 지킨 존재가 당신의 고양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또 홀몸도 아닌 고양이를 거기에 내버려 둘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녀석을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인생 최악의 실수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녀석을 들이고 난 뒤의 몇 주간은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벽난로 앞에서 가만히 누워 가만히 뚫어져라 보는 단 하나의 눈. 보기만 하면 내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끄집어 올라왔습니다. 녀석의 눈을 보다가 순간 술잔을 꽉 쥐어 깨뜨릴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녀석의 뱃속에 있는 아이들이 공포를 부각시켰습니다. 녀석이 진정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존재라면, ‘그’ 검은 고양이는 인간의 악함을 온 몸으로 받아낸 고양이였습니다. 그 고양이의 씨를 받아 태어난 새끼들은 제 어미의 경험으로부터 어떤 통찰력을 얻고 태어날까요. 녀석의 배는 마치 제가 묘사했던 사람들의 추악한 속내를 꼬질꼬질한 그 발톱으로 긁어내어 뱃속에 집어넣은 모양새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어미는 새끼를 낳은 이후, 부풀었던 살이 전부 빠져 제가 생각했던 ‘그’ 고양이의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어미는 저에게 끝도 없는 공포를 주었지만, 어찌됐든 새끼는 사랑스러운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어미 없는 새끼들이 오래 살 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저 같은 주정뱅이가 다 큰 고양이도 아니고, 새끼 고양이 여러 마리를 어떻게 기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단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새끼들은 불구인 채로 태어났습니다. 어떤 새끼는 귀가 없었고, 어떤 새끼는 눈 한 쪽이 없었습니다. 누구는 혀가, 누구는 다리가, 누구는 꼬리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온전히 태어난 아이도 한 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악함이란 것이, 이 어린 것들에게 너무 치명적인 것이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다시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삶이란 것을 기억하기엔 너무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오직 온전히 태어났던 한 마리만이 살아남아 나머지 새끼들을 묻는 제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녀석은 형제의 죽음 앞에 너무 의연했습니다. 성장도 빠릅니다. 제가 생물학에는 조예가 없으나, 그래도 벌써 털이 복슬복슬하고 제대로 걷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이 인간이 가진 악함의 파괴성을 보여준다면, 이 녀석은 악함을 통한 성장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순간에도 녀석은 책상 위에 앉아 편지지 위를 놀리는 이 깃펜을 보고 있습니다. 마치 글을 알아보는 듯, 제 손을 따라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이젠 생각하는 듯이 앞발을 턱에 가져다 댑니다. 이젠 갑자기 사람 말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녀석이 입을 엽니다. 하품하려는 걸까요. 그리고 말ㅇ…


쿵.

쓰러졌다. 고양이가 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지, 한 쪽 눈을 감은 고양이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알았다.

편지는 끊겼지만, 고양이 입장에서 이 인간은 이 일에 대해 모르는 편이 좋았다. 고양이는 편지를 조심스레 접었다. 반듯하게 접힌 종이 위에, 고양이는 잉크병에 발톱을 넣고 편지지 위에 남자의 이름을 적었다.

고양이는 편지를 입에 물고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때 느꼈던 노곤함이 고양이의 몸속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거에 취할 여유가 없었다.

고양이는 벽난로 안에 편지를 던져 넣었다. 조금씩 타오르던 편지는 곧 벽난로 안의 새로운 불꽃이 되어 강하게 타올랐다.

어머니를 거둬준 인간을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호의였다.

밖으로 나가자 바람이 맞이해줬다. 선선하다면 선선하고, 춥다면 추운 날씨였다. 나오기 전부터 받아왔던 생각들을 시험해보기 좋은 날씨였다.

이런, 생각보다 차가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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