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투구와 싸웠다 (안경은 이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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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대응반장실은 지성소(至聖所) 와도 같았다. 또는, 로버트 "오메가" 박은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을 둘러싼 이 새하얀 방 주위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었다. 물론 여름중에는 어딘가에서 자연발생한 파리 몇 마리가 날아오기도 했는데, 이런 일 또한 정말 드물다고 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이 자리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과 서류, 그리고 기지 청소부 빼고는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몇 시간을 서류작업만 한 몸을 다시 움직이려 하자, 근육이 기름칠되지 않은 크랭크를 돌리는 것 마냥 빠드득거렸다. 아무래도 또 다시 시간감각을 잊은 채로 일만 한 모양이다. 그 말대로 방 한구석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니 시계는 두 팔을 쫙 빼들고는 숫자 12를 가리켰다. 아무래도 12시인 모양이었다. 내일 있는 훈련 일정을 소화하려면 슬슬 몸을 숙면에 놓아야 할 터였다. 오메가는 터벅터벅 걸어서 집무실 옆 문을 열고 개인 침실에 들어섰다. 아늑하게 켜진 무드등— 몇 주 전 임찬미 박사가 충동구매를 한 탓에, 기지 내 모든 부서장들에게 증정되었다. —이 방과 자신을 밝혀준다. 이러한 무드등의 빛 사이로는 검정색 중세 기사 투구가 붉은 안광을 내며 자신을 반겨준다.

"살덩어리답게 쓸모없는 숙면을 취하는 것인가."

"그래. 불 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점은 대략 2년 전으로 돌아간다.


안경이 닥쳤다. 오메가 요원은 생각했다. 안경이 닥쳤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수행한 재단 최대규모 퇴역 작전 이후로 안경, 또는 윌슨은 오메가 자신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구미호는 어지간히 끈질긴 놈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 후로 안경은 자신의 정신을 부분부분 뜯어부수려 노력했다. 오메가 요원이 버틸 수 있던 것은 오직 자신이 계속해왔던 정신적 스파링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늘, 안경이 닥쳤다. 아침 7시부터 현재 오후 2시까지 안경을 곁에 두고 지켜본 것의 결론이었다. 보통이면 한 마디라도 더 말하려 애쓰던 안경이 아침부터 침묵하고 자음 하나도 말하지 못 하고, 아니, 않고 있다. 이건 보통 사안이 아니었다. 오메가 요원은 자신의 재단 표준 숙소 주변을 부단히 둘러봤지만, 온통 새하얀 벽에 책상 한 개, 그리고 기동특무부대 요원으로서의 결의 한 장이 벽에 걸린 점 빼고는 어떤 물건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정신자— 번역부가 개정하기 전의 "밈" 의 지칭이다. 모든 고참들은 알고 있다. —가 자신의 머리를 기어코 뜯어먹은게 틀림없었다.

이제 곧, 밈적 재해가 발현하여 오메가의 머리를 뒤덮을 것이다. 오메가는 생각했다. 자신이 미쳐서 동료를 죽이기 전에 빨리 죽어야 한다. 오메가는 능숙하게 자신의 책상 뒤쪽에 숨긴 비밀 수납함을 열었다. 제27K기지 정신과 의사가 재단 상부에 자신의 자결 시도를 보고하기 전에 미리 몇 알 빼돌린 알약들이었다. 그 돌팔이는 항상 자신이 퇴역 후 PTSD로 인하여 심한 자기희생적 면모를 보인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퍽이나 그렇겠지, 오메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알약과 함께 마실 물을 냉장고에서 꺼내던 순간- 개인실 문이 열렸다.

"박 병장님, 긴급히 드릴 소식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자살시도 발각되셨던거 기억나십니까?"

하얀색으로 범벅된 머리를 보니 아무래도 자우 요원인 듯 했다. 카이-17이라는 대규모 특무부대에서 근무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오메가 요원은 주먹을 빠르게 뒤집어 알약을 숨기고, 물컵을 다시 책상에 올려놨다. 그러자, 자우 요원의 친절하지 못 한 환영이 팔목으로 날아왔다. 몇 번의 관절기를 건 끝에 오메가 요원은 높은 비명을 내질렀고, 자우 요원의 손에 알약을 내주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십쇼. 그리고, 이거. 긴급히 드릴 보고서입니다."

"보고서는 뭔 보고서?" 오메가가 욱신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말했다.

"음. 지난 년도에 퇴역하셨던 그 개체 기억나십니까?"

오메가는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그 망할 사탄의 갑옷과의 연은 끝나야 했다.

"다시 살아났더랍니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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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퇴역 물품 보관실은 꽤나 한산했다. 오직 지독하디 지독한 퇴역 절차의 흔적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굳게 잠긴 문이 열리자, 퇴역 후 변칙개체들의 흔적만이 가득 쌓여있었다. 참기름 발린 나무토막이라던가, 원더테인먼트의 로고가 그려진 검정색 리모컨 조각, 피가 뭍은 수술도구 따위들이 겹겹이 놓여 일종의 성채를 이루고 있었다. 굳건하게 서있는 수납함의 산 아래에서 오메가는 공성하고 있었다. 오래된 환기구가 돌아가는 창고에서는 남겨진 먼지만이 그에 맞서 수성할 뿐이었다.

"예. 그리고 여기입니다."

자우 요원이 오메가의 팔을 잡고 돌아다닌지 몇 분째, 두 명의 장정들은 강화유리 케이스 안쪽에 보관된 SCP-666-KO-D의 시체를 마주했다. 가슴 부분에는 14년 언저리에 박아넣은 수류탄의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오메가 요원은 당시 자신이 마주했던 지옥을 떠올렸다. 당시의 재단은 일종의 과도기에 가까운 상태였다. 자신만만했으며, 상부 몇 명은 계몽주의로 가득 차있었고, 변칙을 통제해 변칙을 죽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SCP-666-KO-D 퇴역작전에 SCP-953을 투입했다. 기지 내부는 말 그대로 지옥도였다. 구미호와 악마의 군세에서 온 갑옷이 섞여 서로 배를 찌르다, 폭발 몇 번에 모든 일이 끝났다. 그리고 지금 오메가 앞에 놓인 갑옷 조각들은 그 참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왔군." 검은 투구가 붉은 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요원님, 보시다시피, 이렇게 살아있습니다. 어제부터 갑자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오늘은 좀 조용하네요."

"시끄럽다 살덩어리. 위대하신 분께 날 데려가라."

오메가는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에서 돌렸다. 가설 하나, 저 악마의 갑옷이 주장하는 "위대하신 분" 이 실제로 진노해, 저 갑옷에게 두 번째 생명을 주었다. 가설 둘, 몇 가지 변칙 개체의 상호작용과 우연에 우연이 겹쳐 일어난 기적으로 저 갑옷이 되살아났다. 가설 셋, 자신이 드디어 돌아버려 환각을 보고 있다. 오메가는 가설 셋을 가장 지지했다. 그러나, 가엾게도 세상을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요원님. 저희도 솔직히, 무슨 경위로 이런 일이 일어난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 개체와 가장 마지막으로 상호작용한 인원이 요원님이라는 판단 하에, 음. 교차실험이 허가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교차실험?"

교차실험. 교차실험. 단어를 듣는 것 만으로 몸 여러 군데가 욱신거렸다. 교차실험은 구시대의 상 중 하나였다. 재단이 더욱 왕성하고, 도전적이었으며, 자신을 믿었던 시절에는 모든 것이 가능할것만 같았다. 그 중에서는 변칙에 변칙을 맞물리게 만드는 작업도 포함되었다. 사람 죽이는 괴물 몇 마리를 우리에 넣어놓고 그 결과를 "교차실험" 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는, 그런 쓸모없는 낭비가 대부분이었지만. 이 일종의 시대의 흐름은 한국지역사령부에서도 마찬가지로 불어왔다. 제48K기지에서 SCP-113-KO와 SCP-111-KO를 같이 넣어 일종의 상호 격리 절차를 개발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알약이나 빨리 삼킬걸, 오메가는 생각했다.

_인트라넷 회선 연결 중 …

jjau: 요원님

parkom:

jjau: 나오십쇼 제발 저도 이러기 싫습니다

parkom: 싫어

jjau: 상부에서 공문 내린걸 어떡합니까 어차피 임무 일정도 이번주는 없지 않으십니까?

parkom: 어떤 미친놈이 나보고 퇴역시킨 개체랑 같이 살라는데 문 열겠냐

jjau: 교차실험입니다. 지금 유일하게 -D랑 엮일만한건 요원님밖에 없는거 아시잖아요.

parkom: 그러다가 666이 팔까지 재생해서 날 죽이면 어쩔건데? 또 953이라도 풀거냐?

jjau: 상황 확인만 하는겁니다. 요원들이 항상 대기해서 안전할겁니다. 그러니 제발 문 좀 여십쇼.

jjau: 마스터키로 들어가겠습니다.

_연결 해제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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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밀쳐진 의자는 응력을 내보내며 빙그르르 돌았다. 오메가는 그 의자가 참 좋았다. 오메가가 요원 시험에서 합격하고 나서 숙소를 옮길 때 가져온 의자인데, 용케도 오랜 요원 생활동안 멀쩡하게 남겨져 있던 놈이었다. 격리 파기와 기지 이전이 몇 번이나 일어나면서도 자신과 함께 자리를 지켜온 의자를 오메가는 존경했다. 그 반면에, 오메가는 자신 책상에 놓여져있는 투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육면체 케이스 내부에 들어있는 SCP-666-KO-D는, 붉은 눈을 불태우며 자신에 대한 살의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너 임마, 너. 왜 살아난거야." 오메가가 말했다.

"그야 위대하신 분이 나에게 새 생명을 부여하셨기 때문이겠지, 바보같은 놈. 어서 나를 풀어라. 그러면 사지를 잘라버리는 것으로 봐주겠다."

오메가는 잠시 유리 케이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다시 책상을 바라보고, 다시 케이스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저 놈과는 같이 있을 수 없다. 자우 요원이 전달한 이번 "교차 실험" 의 목적은 바로 SCP-666-KO-D와 오메가 요원과의 연관성을 확인하기 위함으로, 요원이 방에 666-KO-D를 집어넣고 나서, 1주일동안 같이 격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말 그대로 단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오메가에게는 일분일초가 유황불 속에서 불타는 죄인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어째서 트라우마 유발자의 곁을 이렇게 지켜야 하는가는 하늘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였다.

"위대하신 분 위대하신 분 타령은 그만하고. 진짜로, 왜 살아난건데."

"그게 왜 중요한 것인가 미천한 것."

"그걸 알아야 내가 나가는 날이 빨라지니깐."

오메가 요원의 입술이 바짝 말라갔다.

"솔직히 알려주지, 미천한 것이여."

"너가 왜 살아났는지?"

"나도 모른다."

오메가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벽에 붙은 시계를 봤다. 벌써 12시 반이었다. 평소였다면 밀린 문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겠지만 교차실험 허가가 난 현재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없다. 이 공간에서 말 그대로 이 사탄의 투구와 둘만의 오붓한 데이트를 즐기면 되는, 그런 연옥이었다. 오메가는 절망하고 침대에 누웠다.

"엣시피-육육육-케이오-디. 그러면 너는-"

"그런 멸칭으로 부르지 말도록, 살덩어리."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는데?"

"네메시스라고 불러라. 그것이 위대한 분이 부여한 나의 진명일지니. 머저리같은 네놈의 머리에는 잘 들어가겠지."

미친놈. 오메가는 생각했다.

"그래. '네메시스', 불 끈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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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덩어리, 일어나라. 굵직한 에코가 들어간 목소리에 오메가 요원은 눈을 떴다. 여전히 자신이 감금된 숙소 안이었다. 정확히는, 이제는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서 사실상 격리실과도 같은 모습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더벅머리로 일어나서 이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안경을 고쳐끼자, 여전히 불타오르는 안광을 내뿜는 SCP-666-KO-D의 머리가 보였다. 아, 그렇구나, 나는 저 지옥의 사자와 함께 1주일을 보내야 하지, 인생 엿같기도 해라, 하는 현실을 자각하는 동안, 네메시스는 인간이 얼마나 느릿느릿하게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경멸하는 것에 몇 분을 보냈다. 오메가는 그냥 듣기로 했다. 그는 이전에는 안경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을 자주 듣곤 했다. SCP-953의 목소리로 말하는 안경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에게 동료들을 죽이고 그 간을 빼앗을 것을 권했다. 그의 정신적 능력 덕분에 안경의 목소리는 무시 가능한 옹알이 정도까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어디서든 들리는 목소리는 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덕분에 현장 요원에서 전술고문으로 직책이 바뀐 것이기도 했다.

"흐음,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악마의 투구가 붉은 빛으로 점멸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SCP- 아니지. '네메시스'. 안경이랑 얘기하던걸 생각하고 있었어."

"안경이랑 대화를 나눈다고? 인간들은 전부 그렇게 멍청한가보군. 네놈의 안경은 뭐라고 하던가. 평생 연인으로서 서약과 맹세를 나누던가?"

오메가는 네메시스가 농담도 할 줄 안다는 사실에 잠시 동요했으나, 이내 다시 그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저런 투구 따위에 시선을 빼앗길 일은 없었다. 그는 어제 가져왔던 자신의 인트라넷 연결 패드를 꺼냈다. 재단 인트라넷에는 의외로 인간적인 매체가 많이 올라온다. 불법 공유된 영화(재단은 초법적 단체라는 사실을 아는가? 어쩌면 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 몇몇 인원들이 그린 만화. 농담삼아 창작된 "농담-SCP" 등. 그리고 그가 패드를 켜자— 오직 검은 화면만이 그를 반겨줄 뿐이었다. 왜지? 오메가는 생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명목상 "교차 실험" 에서 유입될 수 있는 외부 변수는 모두 차단할 수 있는게 맞았다. 하지만 그 중에서 인트라넷 패드도 포함될 줄은 오메가 또한 모르고 있었다. 몇 번이고 어두운 화면을 클릭하다 포기하고 옆을 보니 다시 어두운 투구가 자신을 반긴다. 뭐가 잘 안되는 모양이군, 살덩어리. 조소가 들려온다. 지옥이다. 이건 지옥이다. 나가야 한다.

"너가 뭘 안다고 웃는건데."

"나는 인간들의 심리를 잘 알지, 로버트 오메가. 너가 내 갑옷 사이에 수류탄을 박을 때부터, 샌님들이 날 잡겠답시고 텔레킬에 사지를 구속할 때부터. 난 너희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표정은, 무언가 되던 것이 망쳐졌을 때 보이는 표정이군."

염병할. 오메가는 생각했다. 저놈은 날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너가 뭘 할 수 있는데? 넌 그 상자에 박힌 머리로 말하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살덩어리 주제에 입만 살았군."

잠시 정적.

"…만약 너가 그렇게 똑똑하다면—"

"그러면? 어쩌라는거지? 미천한 생물 주제에 말이다."

"할만한 걸 알려줘. 너도 나도 이렇게 싸우다가는 심심해서 맛이 갈 판이니깐."

네메시스는 흥미롭다는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놈의 "미천한 생물" 로서 자신에게 요구를 해왔다는 점이 꽤나 기특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메가는 네메시스가 까딱거릴 동안 천천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주일동안 격리되었지만, 위생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샤워기를 돌리고 온수가 나오자, 따뜻한 파도가 그의 몸을 덥쳤다. 모든 소리는 물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에 뭍혀 들리지 않았다. 악마의 투구는 더 이상 없다. 오메가는 잠시동안 행복을 만끽했다.

옷을 갈아입고 욕실을 나오자, 검은 투구는 무언가 의기양양한 듯 고개를 올리고 있었다. 영겁의 시간 끝에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침대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던 오메가였다.

"그래서, 할 일은 생각했어?"

"물론."

"그럼 말해봐."

"나에게 인간의 유희를 가르쳐라."

오메가는 살면서 여러 개소리들을 들어봤다. 이것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무슨 소리냐 '네메시스'."

"너는 인간이고, 유희에 대해 잘 알지. 나는 인간이 아니지만, 너희들의 놀이 정도는 배울만큼 지능이 월등하다. 그러니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준다면, 잠시 놀아줄 상대 정도로는 취급해줄 수 있지, 살덩어리."

오메가는 잠시 사고했다. 이 미친 투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인간의 유희를 가르치라고? 사람들끼리 하는 놀이를? 이 자식이 이렇게 유순할 리가 없다. 그것이 오메가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만 생각해보기로 했다.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한다고 해보자. 나는 뭘 할 수 있지? 답은 없었다. 방에는 일주일치 책도, 게임도, 잡지도 쌓여있지 않았다. 그가 미니멀한 생활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서랍 뒤에 숨긴 자살 알약은 벌써 다 압수됐다. 어쩌면 이번에는 저놈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선택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네메시스는 다시 한 번 재촉해왔다.

"머리만 그렇게 잡고 있으면 어쩌자는건가."

"좋아, 알려주지. 단, 조건이 있어."

"무엇인가?"

"개기지 마라."

오메가 요원은 가끔 끝말잇기 한방단어를 외워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곤 했다. 그는 그 후회를 오늘 다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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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리된 지 대략 5일째 되는 날이었다. 네메시스와 할 놀이도 다 떨어져가던 참이었다. 사지가 없는 말하는 투구와 수다나 떨고 있으라는 상부의 명령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오메가는 자신이 며칠 뒤에 나갈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2일, 지나온 5일을 보자면 참으로 짧은 시간이 아니던가. 오메가는 주변을 둘어봤다. 다 읽고 쌓아놓은 책과, 방 구석에서 그나마 찾아낸 체스보드(물론 지난번 게임 도중에 수면에 들었기 때문에, 보드의 상태는 엉망이었다.)가 책상 주변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며칠동안 자신의 나약함을 깔보고 비웃던 네메시스는 마침내 기력이 다 떨어졌는지 눈을 감고 숙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오메가는 이 참에 네메시스라는 녀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이전에는 자신의 트라우마의 원흉이자, 다시는 만나기 싫은 무언가였으나, 단 둘이 격리됨으로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고 고찰했다. 이제는 녀석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그리 기분나쁘지는 않네, 오메가는 속으로 말했다. 사실이었다. 같이 박혀있던 5일동안 적개심은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사라졌고, 이제 남은 것은 어색한 친밀감 하나 뿐이었다. 방에 박혀있던 모든 보드게임과 책을 같이 둘러본 결과였을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런 상황이 계속 이어질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추측했다. 매우 불확실한 추측일 뿐이었다.

"그럼 잠시 눈 좀 붙여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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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기록 녹음본

스완 요원: 네, 격리 해제 축하드립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교차 실험이 끝났습니다, 요원님.

오메가 요원: 다행이군요. 재단도 참 좋습니다? 강제로 사람 변칙개체랑 감금시켜놓고요.

스완 요원: 으음.

스완 요원: 죄송하지만, 음, 이건 제가 뭐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정적.

오메가 요원: 하하, 그러게요. 이제 뭐, 인터뷰나 하고 끝날 것 아닌가요?

스완 요원: 네, 그렇죠. 형식적인 것들이니 너무 긴장하지는 마시고요.

스완 요원: 우선, SCP-666-KO-D와 함께 있으면서 느낀 변칙적 현상이나 증상이 있습니까?

오메가 요원: 깔보는 말들을 너무 들은 나머지 머리가 어지러운 것도 증상이라면 증상이겠죠. 없다고 적으시면 되겠습니다.

스완 요원: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입니다. 대상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이 SCP-666-KO-D와 연관되었다는 어떤 점이라도 느낀 적이 있습니까?

오메가 요원: 아뇨. 도대체 뭐 때문에 그게 살아난건지도 모르겠는데요.

스완 요원: 그럼 혹시 심증이나 뭐 이런 것들이라도-

오메가 요원: 아뇨. 없다니깐. 의심스러우면 면담 기록 돌려보세요, 걔도 모른다고 하니까.

스완 요원: 그러면 마지막으로,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습니까?

오메가 요원: 거 만약 사령부에서 나 처벌하려고 여기 넣은거면, 엿이나 먹으십쇼. 뭐 얻은 정보는 아무것도 없고, 투구랑 온종일 말싸움만 했으니. 아니라면,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다. 말하는 투구 빼고는.

스완 요원: 정신과 분석 보고서를 보니, 심한 망상장애와 상부에 대한 신뢰 부족을 앓고 계셨더군요. 그렇다면 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겠습니다.

오메가 요원: 웃음 지역사령부란.

스완 요원: 여기서 면담 종료하겠습니다. 교차실험 분석 보고서가 곧 나올 예정이니, 그 때까지 심층 신체 검사만 거치시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_인트라넷 회선 연결 중 …

parkom: 격리 풀렸다

jjau: 아, 패드 압수 풀리셨군요? 축하드립니다.

parkom: 사람을 퇴역 개체랑 격리실에 박을 생각이나 하고 있고 말이야

jjau: 뭐 과학부 나름대로 연관된 것들끼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한 것 아니겠습니까. 요원님에게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최선의 방법 아니었을까요?

parkom: 밈적 재해에 당한 사람하고 퇴역 개체를 같이 가둬두는게?

jjau: 이미 이전에 위험성 테스트나 변칙성 테스트는 전부 했다고 했습니다. 대놓고 갑옷 부품을 붙여놔도 재생 하나 못 하더라고요. 검증되니까 한거죠 뭐…

parkom: 어휴

parkom: 이따 온다며

jjau: 네. 실험 이후 SCP-666-KO-D의 처우랑 추가적 검사 전부 한 번에 하라고 해서요.

parkom: 또 따고 들어올거냐

jjau: 아뇨. 요원님이 열 때까지 기다릴게요.

parkom: 안 열거야

jjau: 마스터키는 가져갈거예요. 잠구지 마세요.

parkom:

jjau: 7시에 가겠습니다.

_연결 해제 중 …


어쩌면:

그는 그냥 엿같은 인생을 살 운명일지도 모른다.

안경이 진짜로 기지 내부 모두를 지배해 자신을 죽인 네메시스의 몸체로 들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냥 정신병원에 박혀있는 미친 아저씨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 모든 것이 내부보안부의 연기일지도 모른다.

드디어 타입-그린 몇 명이 탈출해 오메가의 인생을 바꾼 것일지도 모른다.

윤도하가 아닌 다른 자를 만나 끌려가는 도중일지도 모른다.

제145K기지에 채용 제의를 받은 대신 사르킥 교단으로 납치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던 신이 질려서 안경 대신 투구라는 새로운 히로인을 등장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메가는, 이 모든 것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교차 실험은 좀 어떠셨습니까, 요원님? 별 이상은 없던 것 같았습니다만."

"으음, 있잖아 자우야."

"네?"

"나 얘 계속 데리고 있을래."

"네?!"

수화기 소리.

오메가 요원, 뒤를 돌아보고 잠시 멈짓하다 수화기를 집어든다. 주변에는 정리되지 않은 전술 서류와 허가 인감이 흐트러져 있다. 차갑게 식은 커피가 잠시 찰랑거린다. 오메가 요원이 수화기를 잡자, 모든 소리가 멈춘다. 오메가 요원은 무언의 압박감을 받는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매우 중요한 선택이 될 것임을 어째서인지 알아챈다.

달칵거림.

"으음, 박 전술고문 맞으십니까? 제대로 연결했는지요?"

"네, 27K기지 박 전술고문입니다. 누구십니까?"

"제145K기지 이사관 되는 사람입니다."

"네?!"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저희는 긴급대응반의 리더가 될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슨… 소리세요?"

"유연성 있는 계획을 짤 수 있으면서, 격리 파기와 변칙개체 출현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고, 실전 및 변칙개체 퇴역에 대한 경험을 가진 사람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박 전술고문 서류 잘 봤습니다. 꽤나… 사연이 있는 분이시더라고요. 경험자시기도 하고."

"저희 기지 한 번만 들러보시지 않겠습니까? 대접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오메가, 잠시 수화기를 귀에서 멀리 두고 생각한다. 코를 문지르고 나서 옆을 보자, 검정 투구가 보인다. 투구의 붉은 안광이 빛나며 기계음이 섞인 성인 남성의 음성으로 말한다. 오메가, 무표정으로 투구의 말을 듣는다.

"결정은 빠르게 하는게 전투의 비결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답답하군, 살덩어리란."

오메가, 한숨을 푹 쉬고 이내 수화기를 다시 가까이한다.

"이사관님? 계십니까?"

"그럼요. 잘 듣고 있죠."

"날짜는 언제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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