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질주 - 잠들지 않은 이들

평가: +5+x
1

오후부터 날이 흐리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우새 쌓인 눈은 무겁게 내리는 비에 다 녹아버렸다. 그런 비가 있다. 계절과 계절, 분기와 분기를 나누는 그런 비. 이번 비는 그 중에서도 내리고 나서부터 기온이 오르고 풀들이 피어나는, 그런 봄의 비였다. 몇달 간 사박 사박 내리는 눈만 보다가 시원하게 내리는 눈을 보니 또 새로운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겨울 티를 벗지 못한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기에 나는 우산을 쓴 채 옷소매를 여미며 오후에 비해 인적이 적어진 거리로 나와 핸드폰을 켜보았다.

오전 2:00

남들이라면 집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편안하게 수면을 취할 시간에 밖에 나와있는 것은, 바로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세상의 눈을 피해 옮겨질 물건들은, 이른바 '상식'에 기반해 작동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갑부의 미술품에 대한 열망은 더 귀중하고 새로운 작품을 원했고, 그 욕구는 이런 작품에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 작품들은 모두 이건희 회장의 비밀스러운 지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지만, 그가 사망함에 따라 삼성 측은 거래의 대가로 변칙적 예술품들을 대한민국 정부에 넘기기로 합의했다. 오늘의 임무는 바로 그 이송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변칙예술품들은 총 세 대의 트럭에 나뉘어 실릴 예정이었다. 각 트럭에 들어가는 작품의 목록은 보안을 위해 나를 포함한 재단과 방재원의 극히 일부 요원들만이 알고 있었다. 트럭 앞뒤로는 각각 3대씩, 총 6대의 재단과 방재원의 무장 인력이 탑승한 차량이 경호를 맡을 예정이었다. 재단 측에서는 공중 엄호를 위해 헬리콥터 1대를 지원한다고 하였다. 고작 물품 수송에 견문발검인 감이 없지는 않지만, 조심하는 건 과해도 부족하지 않은 법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비교적 마음이 가벼웠다. 오늘 수송 작전에는 전투도, 첩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명천구까지의 거리를 고려하면 30분도 채 걸리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우리 방재원에서 에이스 축에 속하는 김신욱 사수님과 함께 진행하기로 했기에 안심이 되는 면도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어수선한 차들 사이로 비를 뚫고 달리는 검은색 대형 트럭 3대가 눈에 들어왔다. 트럭은 나를 지나치더니, 내가 서 있었던 건물 앞으로 돌아 멈춰 섰다. 트럭들은 후진하여 건물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 창고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건물은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물류창고에 지나지 않지만, 내부에는 오늘을 위한 방재원의 임시 기지가 차려져 있었다. 건물 내부는 어두운 밖과는 다르게 밝은 조명이 쬐어 눈을 찌푸려야 했다. 눈이 어느 정도 적응되자, 한쪽에서 바쁘게 금속 상자를 옮기고 있는 인원들이 보였다. 상자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지만 저마다 모서리에서 푸른 빛을 내고 있었다. 상자들은 직사각형 형태의 경계선 바깥쪽에 모여있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작품들이 들어있을 터였다. 트럭들은 테이프로 임시 지정된 자리에 각각 멈춰 섰고, 탑승했던 요원들이 작전 정리를 위해 임시 천막으로 모여들었다. 천막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창고 안에 울렸다.

"재헌이, 탁재헌!"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신욱 사수님이었다. 사수님은 안면에 미소를 띤 채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얼마 전부터 사수님이 작전 준비를 맡느라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터라 나도 반갑게 맞았다.

"오랜만이다야. 오늘 컨디션은 좀 어때."

"뭐, 그냥. 평소랑 비슷하죠. 사수님은요?"

"작전 있는 날은 늘, 상쾌하지."

유독 '쾌'에 강세가 들어갔다. 나는 천막 쪽으로 걸어가자고 손짓하면서 면서 말을 이었다.

"아우, 그래도 결혼하신다고, 얼굴이 아주 피셨네요. 다음 주죠?"

"흐흐흐. 그래 보이냐? 숨기고 다녔는데, 들켰네."

"좀 더 노력하셔야겠어요."

"그래서 어떻게, 잘 지냈어? 부모님도 잘 계시고?"

"예. 얼마 전에 무릎 수술하신다고 그래서 돈 좀 보내드리고. 그랬죠."

"허어… 이젠 괜찮으시고?"

"뭐 의사 말로는 그렇다는데, 봐야죠."

천막 아래에는 무장한 요원부터 일상복을 입은 인원까지 여러 사람들이 탁자를 중심으로 모여있었다. 그중 중심에 있던 지휘관이 입을 열었다.

"오늘 작전, '새로운 별'의 목표는 이건희 삼성회장이 남긴 변칙적 예술작품 총 125점을 명천구에 위치한 목표 지점까지 운송하는 것입니다."

길고 얇은 막대가 탁자 위에 놓인 지도 위를 향했다. 가리킨 곳에는 붉은색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부근에는 볼펜으로 휘갈겨 쓰인 '상명소방서'가 보였다. 오늘 이 이송 작전의 최종 목적지였다. 소방서라니 목적지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 건물은 하나의 출입구였다. 다른 차원에 위치한 명천구로 이어지는 6개의 통로 중 우리 트럭이 들어가기에 가장 적합했다.

"방재원 요원 3명, 재단 측 요원 3명 총 6명의 요원 및 20명의 무장 인원이 동승하게 됩니다. 무장 차량 6대가 앞, 뒤로 엄호를 맡습니다. 수송 차량은 총 3대입니다."

직육면체 모양으로 깎인 나무 조각이 지도 위로 움직였다.

"이렇게 9대의 수송 차량은 한남대로를 타고 한남대교를 지나 목표지점으로 향합니다. 예상 소요 시간은 30분입니다."

"주의 사항은 목표 지점이 명천구라는 점, 그리고 운송 물품의 특성상 주시단체의 습격에 주의하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주시단체의 개입을 언급하는 것은 거의 일상이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지내는 노릇이니 충돌이 없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지. 즉, 이번 임무에는 큰 리스크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었다. 교통사고만 조심하면 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브리핑은 이상입니다. 성공을 바라겠습니다. 작전 개시 시간은 오전 3시입니다."

지휘관의 설명이 끝나자, 모여 있던 인원들이 흩어져 각자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계는 어느덧 2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수송 차량에 물품들을 싣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까 마주했던 상자들은 수송 차량의 컨테이너에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 중에서 유독 커다란 상자가 보였다. 작업자 두 명이 겨우 낑낑거리며 들고 차량 위로 올라갈 정도였다. 그 납작한 형태를 보니 그림인 듯하였다.

"저건 뭐길래 저렇게 크기가 큰 걸까요?"

옆에 서서 준비 작업을 지켜보던 사수님께 물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무슨 호랑이 그림 그건가…"

"호랑이 그림이요? 그게 왜…?"

"뭐, 나중에 보고서 읽어봐. 거기 다 나와 있으니까."

하긴, 125가지나 되는 작품들 목록을 모두 아는 건 베테랑 요원인 사수님으로서도 힘들 것이었다. 가까이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니, 어둠 속에서 머리를 단발로 자른 한 여성이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재단의 인장이 각인된 표지가 덮인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 여자는 사수님에게 고개를 내려 인사하더니 말을 이었다.

"김신욱 요원님 님, SCP재단 한국지역사령부에서 파견된 요원 백송윤이라고 합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하게 되어 인사드립니다."

재단측 요원이 참여한다더니, 이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내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재단 요원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건 사수님과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 그 하나 뿐이었다. 사수님이 먼저 어색하게 자기소개와 인삿말을 건네면서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도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이쪽으로는 고개만 까딱할 뿐이었다.

"이건 차량의 배치도입니다. 앞뒤로 기동특무부대 및 방재원측 무장 인력이 탑승한 경호차량이 3대씩 배치되고, 가운데 3대의 트럭의 조수석에는 저희들이 타게 됩니다. 방재원이 2호차, 3호차에 재단이 1호차에 탑승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재헌이, 넌 어디 할래? 2호? 3호?"

"음, 3호? 그러죠, 뭐."

"그럼 제가 1호차, 김신욱 요원님이 2호차, 그리고…"

백송윤 요원이 내쪽을 흘깃 바라봤다. 이름을 적던 볼펜이 멈춰섰다.

"탁재헌입니다."

"…탁재헌 요원님은 3호차에 동승하시는 것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럼."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더니 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갔다. 나는 재단측 요원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답니까?"

"그냥 잊어버려. 원래 저런 사람이야."

나는 찝찝함을 삭히려 다시 작업 현장으로 눈을 돌렸다. 트럭에는 꽤 많은 작품들이 이미 실렸음에도 여전히 작업자들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브리핑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오늘 운송되는 물품은 총 125개. 그렇게 많은 작품이 '이상하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예전에 언뜻 재단에서는 저런 개체를 몇천개 이상 보유 중이라고 들은 것이 기억났다. 발견된 것이 이정도라면, 어딘가엔 더 있을 수도… 아니면 애초에 '이상하다'는 기준이 잘못된 건 아닐까?

"사수님, 그런데 말입니다."

"응?"

"저는 이 변칙이라는 게 아직 잘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아직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뭔가 설명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요? 그냥 이상하다고 해서 막 갖다 붙이는 건… 뭐랄까 납득이 잘 되지 않습니다."

사수님은 팔짱을 풀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처음인 다 그래. 별거 아닌 것 같지. 근데, 이런저런 일 한두 번 겪다 보니까, 무섭더라고."

그가 한숨을 쉬었다.

"나도 한때는 너랑 같은 생각이었거든. 이렇게 많은 게 '변칙적인' 것들이라면, 말이 안되지 않냐는 거지. 그런데, 어느 순간이 오면, 몸으로 느끼게 돼, 정말로. 일하다 떠나보낸 동료도 몇 있고. 위험한 순간까지 겪다 보면, 진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니까. 이것들이 정말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것들일까. 다른 세계에서 잘못 떨어진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내가 무력하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지는, 그런 순간이 온다."

사수님은 내가 얼어붙은 것을 눈치챘는지 이쪽을 힐끔 보고는 잡고 있던 어깨를 냅다 흔들기 시작했다.

"근데 오늘은 아니니까 걱정 마. 으이구, 이자식 쫄았구먼. 야, 야, 긴장 풀어. 30분이라고는 했지만 20분도 안돼서 끝날 거야."

그 사이 작업자들은 운송품들을 모두 실은 모양이었다. 마지막 상자를 올린 작업자가 트럭을 두 번 치자, 컨테이너의 윙이 서서히 내려와 잠겼다. 잠금 장치는 안에 내장되어있기에 보이지 않았지만, 무겁게 철컹, 하는 소리가 들려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어느새 도착한 검은 경호 차량들에도 무장 인원들이 탑승했다. 육중한 소리가 나며 창고의 셔터가 열리자, 빗소리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밀어닥쳤다. 세 대의 트럭의 헤드 라이트가 어두워져 가로등만이 빛나는 도시를 밝혔다.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후딱 끝내고 집에 가자고."

세 대의 트럭에 동시에 시동이 걸리며,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이 내린 어두운 도시의 고가도로 위에서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침침하게 빛나는 가로등 아래에서 한 남자 전화를 받자 그의 손은 불빛 아래에서 금속질로 빛났고, 철컥이는 소리가 전화 소리를 묻어버릴만큼 시끄럽게 울렸다.

"강성철 오빠! 미쳤어? 뭐 재단 차량을 강도한다고!?"

"성연! 보안 통화도 아니고 일반으로 뭐하는 거야, 일단 끊어!"

강성철은 거칠게 외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손을 움켜쥐었고, 스마트폰은 그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우그러져 하나의 검은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다른 기계를 꺼냈다. 척 보기에 일반적인 스마트폰은 아니었다. 화면도 버튼도 없이 그저 구리빛으로 빛나는 작은 판처럼 생겼지만, 판 사이에 있는 틈새에서는 조금씩 빛이 세어나오며 존재감을 들어내고 있었다. 강성철이 엄지 손가락을 판의 한가운데에 올리자 작은 스파크가 생기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정말 뭐하자는 거야?! 몇년 전부터 집을 나가서 가족한테 얼굴도 안 비추고, 이상한 똑딱이나 윙윙이들 하고 어울리더니 이제는 아예 범죄자가 되겠다는 거야?"

"다 이유가 있어."

"무슨 이유? 도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재단 차량을 털겠다는 건데? 그런 걸 해서 어디에 쓰려고? 그런 장물은 어디 가서 팔 수도 없고, 앞으로 평생 쫓기게 된다고, 오빠 뿐 아니라 우리 가족 전부다!"

"그 분의 외침을 들었어."

"뭐?"

"부서신 신, 그 분이 나에게 이 과업을 내리셨다고,"

"하, 오빠, 평생 우리에게 주어진 가르침은 귀등으로도 안 듣고, 그저 멋진 기계나 쫓아다니더니, 이제서야 독실자가 된 척이야?"

"넌 모르겠지. 그 분이 나를 부르셨어. 부서진 그 분의 파편이 이 땅에 있다고, 그 파편이 우리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하셨다고."

"정말… 어이가 없네."

"끊어. 앞으로 좀 숨어 지내게 될 수도 있으니까 준비해."

"아니, 그래서 정말로-"

강성철은 전화기를 들어 던지더니, 공중에서 주먹을 쥐고 휘둘러 박살냈다. 파편들이 바닥에 쏟아졌고, 황동과 회로기판 무더기가 빛을 반사했다.

"그럼 이제 슬슬 가자고."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 그저 잠잠히 통화를 듣던 두 남자는 그 말을 듣고 눈빛을 빛냈다.

평가: +5+x

« SCP-495-KO | 야간질주 - 잠들지 않은 이들 | 야간질주 - 새벽을 지나서 »


🈲: SCP 재단의 모든 컨텐츠는 15세 미만의 어린이 혹은 청소년이 시청하기에 부적절합니다.
따로 명시하지 않는 한 이 사이트의 모든 콘텐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 라이선스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