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것도 아닌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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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은 필터만 남은 담배를 땅바닥에 떨군 뒤 신발로 밟고는 비볐다. 아직 입 안에는 담배의 맛이 남아있었다. 이 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담배를 피우게 될 줄은 몰랐었다. 썅. 그는 생각했다. 술을 퍼마시게 될 줄도 몰랐지. 잠시 팔짱을 끼고 하늘을 노려보다가, 자동차 운전석 문을 열었다. 뒷자리에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술병 4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개봉되어 비어있는 병은 그의 집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운전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멘 뒤, 라디오를 틀었다. 뉴스, 뉴스, 고속도로 소식, 음악 방송. 그가 찾던 방송이다. 스피커를 통해 나온 첼로 선율이 자동차 안을 감쌌다. 졸탄 코다이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 B단조 Op.8. 곧 자동차가 출발했다.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네, 네. 기억 소거제 투여했습니다. 네, 네, 네.”

마리안은 통화를 끊고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피곤했다. 엿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피곤했다. 애초에 계약서에 서명할 때 휴식 같은 건 잘 챙겨주지 않는 직장이라는 걸 알고 서명한 것이지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싶었다. 그래, 따지고 보면 직장의 탓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해충이 많은 게 해충 박멸 회사의 탓은 아니잖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들어 입에 물었다. 그 뒤에는 한 남성이 정신을 잃고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있었다. 거리에 나와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마리안은 예술가 전담반이었다. 이번에는 좀 나았다. 막 사람을 미치게 만들거나 집단 학살극을 일으키는 그런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다. 화가. 그것도 그냥 쳐다보고 있으면 그림이 동영상처럼 움직이는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예술 테러리스트’ 부류가 아니라. 그 어떤 예술가 세포 조직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다. 상당히 말이 되는 추측이었다. 재단의 주시 목록에도 올라온 적이 없고, 다른 예술가의 전시회에 참석하는 모습도 보인 적이 없다. 그냥 길거리에서 작은 전시회를 한 번 연 적이 있다. 그 때문에 잡힌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번 일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마리안이 이제 할 일은 의식이 없는 이 화가를 집에 되돌려놓는 것이다. 화가 자신과 작품을 봤던 모든 군중의 기억 조정, 인터넷에 드문드문 올라와 있는 '움직이는 그림'에 대한 정보 조작까지 이미 다 끝나있었다. 전시되어있던 작품은 전부 변칙 물품 보관소로 옮겨놓았다. 화가는 자신이 납치되었다는 사실은 깨끗하게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새롭게 등장한 인물인 만큼 한동안은 감시 리스트에 올라가 있으리라.

오늘 하루의 임무는 그게 전부였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임무가 내려오지 않는 한, 이제 그만 퇴근해도 좋을 것 같았다.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문뜩 술집이 눈에 들어왔다. 술. 술이라…. 술은 집에도 많았다. 당장 뒤에도 있으니까. 그래도, 캔이나 병으로 된 맥주가 아니라 큼직한 잔에 담긴 맥주가 마시고도 싶었다. 빨간불이 되어 잠시 차가 멈추어 섰을 때, 마리안은 재빨리 지갑 속을 확인했다. 현금은 그다지 없었다. 카드는 어떨까. 통장 속 잔액이 어땠는지 재빨리 떠올려보았다. 이번 한 번 정도는 괜찮을듯싶었다. 빨간불이 초록 불로 바뀌었을 때, 마리안은 이미 결정을 내린 뒤였다. 그는 방향을 돌려 술집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평일 저녁인지라 사람은 아직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마 30분 정도가 지나면 사람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하지 않을까. 마리안은 매대에 가서 라거 1파인트를 주문했다. 잠시 뒤 종업원이 맥주잔을 건네었다. 마리안은 그 앞에 앉아 한 모금을 넘겼다. 시원했다. 청량감이 목구멍 너머로 사라져갔다. 가끔 시간과 금전적 여유가 있어 가게에 와 술을 마시면 좋았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것과는 또 다른, 그만의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한 모금을 더 넘겼다. 피로가 약간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리안의 눈동자가 술 표면에 비치는 자신을 향했다. 요 며칠간의 밤샘 작업으로 정말 피곤하다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옆자리에 앉았다. 마리안은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건성으로 살짝 눈인사해 보였다. 방금 온 손님도 똑같이 인사했다. 낮은 목소리가 에일 1파인트를 주문했다. 마리안은 또 한 모금을 마셨다.

일 때려치울까. 그 생각이 잠시 머릿속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마리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체 그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번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지곤 하는 생각이다. 과연 재단을 떠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다. 어렸을 때의 꿈은 뭐였지?

그 생각이 들자,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마리안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어렸을 적에는 미래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런, 술과 담배를 너무 많이 했던가. 올해로 겨우 27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기억력의 감퇴가 오는 모양이다. 좋지 않은 현상이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 은퇴해서는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인데- 아니, 이 상태로 계속 가면 더 빨리 은퇴할 수 있으려나. 그러기에는 모아둔 돈이 얼마 안 되는데….

어느새 처음에 했던 생각과는 영 딴판의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었다. 이젠 노후 대책에 대해 걱정을 하며 술잔을 입가로 가져갈 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손님이 말을 걸었다. “혼자 오셨나 보죠?” 이것 참. 마리안은 입안에 든 알코올을 삼키며 생각했다. 나이가 좀 있는 것 같은데 작업이라니.

그는 옆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대답했다. “네, 뭐. 일이 조금 힘들어서요.” 이건 사실이었다. 요즘은 간을 생각해서라도 술을 조금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건강이 최고니까. 현장 업무를 뛰려면 몸이 건강하기도 해야 하고.

“그렇겠죠. 힘들게 현장을 뛰어다니시는데.”

알긴 아는구먼. 그렇게 생각하며 잔을 기울이던 마리안은 문뜩 멈추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한 모금을 머금어 잔을 내려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옅은 미소를 띤 채로 앉아있었다. 눈가에는 약간 잔주름이 나 있었고,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50대 정도이려나. 하지만 마리안은 알 수 있었다. 이 남자에게는 시간의 개념이 불필요하다. 보통의 재단 직원들이 평생 한 번 만나기도 힘들다는 존재가 그의 옆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리안은 헛웃음을 짓고는 다시 술을 들이켰다.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에 대해 아시나 보죠?”

장난하냐. 주시하는 단체들에 대한 교육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뤄지는데. 마리안은 그 말은 꿀꺽 삼켜버리고 입을 열었다. “물론.”

남자는 말을 잇지 않고 술잔을 기울였다. 마리안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술을 목 너머로 넘겼다. 잠깐의 공백을 먼저 깬 것은 마리안이었다.

“왜 나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왜 내게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묻는 건데.”

그러고는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차가운 잔을 되돌려받아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남자의 잔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글쎄요, 왜일까요?”

남자는 마지막 모금을 비웠다. 잔은 완전히 비어있었다.

“딱히, 의미는 없습니다. 당신도 일에 지쳤고, 저는 이 모든 상황에 지쳐있어요. 같은 처지에 앉아서 술 한 잔 정도는 마실 수도 있는 일이겠죠.”

“하….”

그 말에 마리안은 작게 실소를 터트리고 한 모금을 또 머금었다. 웃기는 말이었다. 그와 동시에 맞는 말이었다. 지친 사람들끼리 술 한 잔 마시는 건 흔치 않은 일도 아니다.

“그 말 당신한테 들으니까 되게 웃긴 거 알아?”

“지친 삶에 한 줄기 미소가 될 수 있다니 영광이로군요.”

남자는 빙긋 웃고는 지갑에서 술값을 꺼내어 올려놓고는 옆에 내려놓았던 중절모를 집어 들어 머리에 얹었다.

“오늘 같은 날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술 마시기 참 좋은 날이죠.”

마리안이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아무도 아닌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빈 술잔과 5파운드 지폐 한 장만이 남자가 있었다가 갔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마리안은 옅은 미소를 짓고는 또 한 모금을 넘겼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술 마시기 참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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