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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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했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세계를 쥐었다 착각하던 부자들도, 다리 밑에서 겨울을 나던 빈민들도, 무릎 꿇고 기도하던 신자도,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던 현자도.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렸고,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지상에 남겨진 것들은 그들의 유산이 전부였다. 빌딩들이 바람에 깎여나가는 소리가 사각사각, 하고 들렸다.

그것은 내게도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태생적으로 죽음이 싫었다. 포커를 치는 재주도, 목걸이를 얻을 행운도 없었기에 낡은 기술을 사용해야만 했다. 낡고 비밀스러운 기술이라,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기술이었다. 그 전까지 나는 정녕 그것을 통해 얻은 영생이 진정한 영생인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다.

종말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고, 누구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설령 그랬었다 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재단과 그의 사생아, 물건을 파는 자공생하는 자, 톱니바퀴살덩어리 - 혹은 차마 열거할 수도 없는 수많은 비밀들이 모조리 뭉쳐 힘을 합쳤다 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아주 잘 알았다. 종말은 절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의탁했다. 나 역시 나의 힘을 있는대로 쏟아부었다. 수많은 자들의 갈 곳 없는 열정을 먹어치웠다. 현자들의 지식들을 탐닉했다. 희망의 빛이 희미해질수록 사람들은 내게 의지했다. 실상 나라는 존재는, 그저 오랜 세월 살았을 그들일 뿐임에도 그러하였다. 그들은 마치, 나라면 반드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것 같았다. 틀리지 않았다. 인류의 모든 지혜가 네팔 지하에 구축한 - 전 우주에서 가장 안전했을 장소가 철저히 파괴되던 순간에도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폐허에서 나는 인류의 마지막을 만났다.


그는 한국인이었다.

미국에 살고 있었다. 대학교 유학생이었고,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생존주의자나 비밀 요원 따위는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학점 3.5짜리 유학생이었다. 많이 울었고, 밥을 제 때에 챙겨먹지 않았다. 도시의 폐허에 나가 슈퍼마켓을 뒤지는 일이 그의 소일거리였다. 이따금씩 버려진 잡지나 신문 따위가 나오면 그는 그것을 자신의 은신처에 가져다 놓고는 했다.

그의 은신처는 크지 않았다. 종말 이전에 그가 쓰던 기숙사가 그의 은신처였다. 용케도 강도들에게 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방의 소도시라서 다행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 특유의 성격이 그렇게 만든 것인지.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생존자'들과는 동떨어진 성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생존자였다.

절대로 낙천적이지 않았다. 항상 비관적이었으며, 다른 사람을 찾으려는 노력도 별로 하지 않았다. 아주 우울해지는 날에는 벽에 붙여놓은 사진을 보곤 했다.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프린트해놓은 것이었는데, 대체로 풍경이나 하늘 사진이었다. 사람이 들어간 사진은 단 하나였다. 네 명의 동양인 - 남자 셋과 여자 하나가, 오로라가 뜨는 배경을 뒤로 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나는 금세 그를 찾았다. 왼 쪽에서 두 번째. 그는 앳되어보였고, 추위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구야?"

"아는 사람."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가 말했다. 그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노트에 가끔씩 적는 일기도 그랬다. 한번은 지붕에서 물이 새어 일기가 전부 못 쓰게 되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는 한숨을 쉬더니 그걸 쓰레기통에 던질 뿐이었다. 내가 그에게 나의 정체를 밝혔을 때에도 그랬다. 그는 내 이름을 듣더니, "별종도 다 있군." 하고 그냥 무시해버렸다.

나는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전기가 끊긴지 오래되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필요한 것들은 이미 다 아날로그로 빼두었다고 했다. 정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한숨을 깊게 쉬고, 차를 몰아 시카고로 갔다. 그는 운전에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고속도로에는 이리저리 들이박은 차량이 많았지만, 그는 능숙하게 그 잔해들을 피해 갔다.

시카고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조차가 한 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 차에서 기름을 넣었다. 내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먹을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안하고 통조림을 꺼냈고, 나는 내 재주를 써서 통조림을 '만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놀란 순간이었다. 그는 내게 그걸 가르쳐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거절했다. 그는 포기했다.

그는 포기가 상당히 빠른 사람이었다.

다른 생존자를 찾는 일도 그랬다. 내가 채근하자, 그는 '오래 전에 포기했다'고만 말하며 나를 대학교 방송실로 데려갔다. 제반 지식이 없는 누군가의 조악한 손길이 파괴해놓은 흔적이 돋보였다. 전파를 몇주간 보내다, 생각해보니 옛 영화를 따라하는 기분이 들어서 때려쳤다고 했다. 어째서인가 물어보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표절은 싫어."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다.

"소설가였거든. 아마추어."

그에게 소설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가 방 저편에 나뒹구는 데스크탑을 가리켰다.

"저거 복원할 수 있으면 보시고."

가능은 했지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일이 없으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생존 전략이 아니라 그냥 그의 성격이었다. 학교 다닐때에도 그랬다고 한다. 그가 건물 밖으로 나가는 일은 대체로 몇 안 되었는데, 식료품을 구하러 가거나, 운동을 하러 가거나, 혹은 묘지에 가거나였다. 그는 운동을 자주 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했다. 덤벨은 썩지 않았고, 녹슨 철들은 여전히 무거웠다. 일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샤워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깨끗한 물을 아예 트럭째로 쟁여놓고 있었다. 물어보니 슈퍼에서 주워 왔다고 했다.

"예전에… 무슨 위키더라. 거기서 물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길래. 원래는 아예 기숙사 방들을 다 물로 채워뒀었어. 그동안 많이 써서 사라진 거고."

과연, 펑펑 쓸 만 했다.

묘지는 매주 일요일에 갔다. 거창한 것은 아니었는데,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린 건물의 잔해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한 사람은 그 밖에 없었다.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내가 아는 그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혹시 살아있을 생존자를 너가 죽였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그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그 때 나는 그가 증오에 찬 눈빛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눈빛은 그에게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지만, 꽤 인상적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자 그는 그만의 추모를 계속했다. 기숙사 잔해 아래에 누가 깔려있을 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그 사진의 동양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적어도 그들이 죽었다는 걸 확인하고 일을 진행했겠지. 예상과 달리 나는 쫓겨나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거는 횟수가 줄어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는 수염이 늘어나면 잘랐고, 익숙하게 손세탁을 했고, 스스로 이발도 했다. 종말 이전과 이후의 그는, 최소한 겉모습만큼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달리 생존자를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 누군가와 만날 일을 준비하는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로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 조금 꺼려졌기에, 나는 조금 애 같은 짓을 했다.

그는, 그가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어디선가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파헤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겨울에 그가 병에 걸렸다. 병명은 나만 알고 있었고, 약이 없다는 것도 나만 알고 있었다. 그는 이부프로펜을 챙겨먹고 씩 웃었다.

"원래 이맘때쯤 감기 걸려."

나는 그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그저 가만히 있었다.

아침이 지나자 그가 비척거리면서도 주방에 내려갔다. 예전에는 이럴 때에 부탁하면 되었는데, 하는 작은 투덜거림이 기숙사에 울렸다. 통조림을 두 통 비운 그가 남은 식량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조만간 슈퍼에 들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몸 상태로는 무리인 일이었다. 나는, 그를 닮아가는 건지, 한숨을 쉬고 식량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매우 감사해했다.

병은 악화되었다. 2월 초에 그는 움푹 패인 뺨을 가지게 되었다. 운동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아 할 수 없었고, 식량은 전적으로 내게 의존했다. 하지만 그는 묘지만은 빼먹지 않았다. 기적에 가까웠다. 목요일이 되면 그는 오전의 절반을 건물을 나가는 데에 사용했고, 내게 기대어 힘겹게 걸으면서도 그 기숙사에 갔다. 그곳에서 몇 분 서 있다 다시 돌아와, 잤다.

그 일에 얽힌 감정을 알고 있는 나는 그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연은 흔한 사연이었어도 감정은 달랐다. 그는 상당히 섬세한 사람이었다. 필경 내가 막는다면 건물 밖으로 나가려 하다 탈진해 쓰러질 것이다. 나는 그런 건 바라지 않으면서도 - 한편으로는 그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라 생각했다.

이제 그가 하던 일 대부분은 내가 하게 되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많이 하던 것들이었다. 세탁, 청소, 면도, 이발. 사실 이런 쪽이 더 익숙했다. 그동안 부리던 재주들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쪽이었으니까. 그는 내가 가사 전반에 유능하다는 걸 깨닫고 약간은 놀라워 했다. 늙은 서양인 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 때에는 석양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3월의 초입에 그는 기운을 차렸다. 단 하루만 차릴 수 있는 기운이었고, 그도 그것을 알았다. 그는 야윈 몸으로 벽장에서 투명한 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 있는 건 홍차였다. 그것도 꽤 좋은.

"원래는 졸업하면 자축하려고 쌓아둔 건데."

그가 아쉽게 중얼거렸다. 그는 어디선가 다구茶具도 꺼내어, 차를 타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면서 순서를 헷갈리기에 내가 옆에서 도와주었다. 기문의 메마른 냄새가 코에 와서 닿았다. 우리는 함께 차를 마셨다. 그도, 나도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내가 아닌 - 텅 빈 벽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상상했다. 아마도 오래 기다리지 못해 미안하다 하는 것일 터다.

나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그의 오로라 사진을 아주 많이 복사해두어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차를 타 마셨고, 무엇도 먹지 않았다. 나는 가끔 그가 말벗을 원할 때마다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 열한시에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피곤하다 말했고, 내일까지 찾지 말라고 했다.

이튿날에 내가 그를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싸늘해져 있었다.

나는 그의 시체를 가져다 그의 기숙사 묘지 안으로 묻었다. 그가 기다리던 사람 바로 옆에 놓아두었다. 복사해둔 사진들과 함께. 멋대로 그의 마음을 읽어서 미안했다고 중얼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제법 오래 있었다. 중얼거리며 일기를 쓰거나, 멍하니 사진을 보고 있어야 할 청년이 없는 게 몹시 쓰렸다. 어제 미처 치우지 못한 다구가 보였다. 나는 물을 끓였다.

이제 나 혼자 차를 탄다. 나는 죽지 않았다. 영생이 아니었던 나의 저주는, 그의 죽음으로 진정한 영생이 되었다. 앞으로는 영원히 혼자일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내가 나에게 걸었던 저주는 그런 것이니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고,Nobody survived.

나만이 살아남게 만드는 그런 저주.Nobody survived.

차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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