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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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 한 발. 그 발걸음은 언제부터 내디뎠던 것일까. 머리 위로 천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의 소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무작정 발걸음을 옮기는 일 밖에는 하지 않았다. 검은 구두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었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상황을 보아하니 이 근처에는 없을 것 같았다.

검은 옷자락이 한 줄기 바람에 휘날렸다. 파멸이 담긴 흐름이었다. 소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엇 하나 움직이는 것이 없었다. 소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모두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오고 간다. 그것이 인생이다. 소녀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돌멩이가 발에 챘다.

굴러간 돌멩이는 누군가의 깨진 두개골 안에 들어갔다. 소녀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피가 흥건하게 웅덩이를 만들었고, 뇌수와 신경세포가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 가운데 굴러간 돌멩이 하나가 고고히 서 있었다. 과거의 소녀였다면 그 광경에 엄청난 구역질을 느끼며 그동안 위장에 넣어놓았던 모든 것을 일말의 지체도 없이 전부 세상에 선보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나 성장해버렸다. 파리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는 시체를 지나쳐 소녀는 계속 걸었다.

소녀는 작은 사진을 하나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아주 낡은 사진이었다. 가장자리가 전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소녀는 신경 쓰지 않고 되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지금 소녀에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그 사진뿐이었다. 유일한 삶의 원동력이라 한다면, 그 또한 맞는 말이리라. 소녀는 다리를 쉬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별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몇백 광년은 떨어진 곳의 일이었다. 지금 소녀가 하는 일과, 앞으로 할 일과는 일말의 관계도 없는 사건이었다. 별이 무너지고, 붕괴하고, 압축되어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작은 천체가 된다 해도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소녀는 눈 앞의 상황에 집중하였다.

마침내 소녀는 목표로 하던 것을 찾았다. 소녀는 손에 쥐고 있던 사진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점차 빛이 희미해지고 있었기에 집중해서 보아야 했다.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 밖으로 나와 있는 얼굴은, 분명 사진 속에 있는 인물과 같은 얼굴이었다. 얼굴 절반을 뒤덮은 핏자국만 빼면 그러했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에 마른 핏가루가 묻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여태껏 꿈꿔오던 재회는, 이렇게 다시 한번 망쳐졌다. 소녀는 잠시 눈을 감고 묵념한 뒤 일어섰다.

현실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곧 모든 것이 무로 되돌아가리라. 하지만 소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이곳은 소녀의 집이 아니었다. 소녀가 쓰다듬고, 묵념했던 얼굴의 인물도 엄밀하게는 소녀가 찾던 인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소녀가 진정으로 찾는 인물은 앞으로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소녀가 갈 수 있는 세계는 많았다. 모든 세계에는 소녀가 찾는 인물이 있다. 어쩌면 그중 하나는 소녀를 받아들여 줄 지도 몰랐다.

한 발, 한 발. 소녀는 그리움에 사무친 재회를 위해 다른 세계로 향하였다.


눈을 감는다.

머릿속에 저장해놓고 있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장엄하게 떨어지는 막대한 양의 물줄기.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나무가 자라있는 열대우림. 세상의 벽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높게 솟아오른 산맥. 빛이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깊이 나 있는 해구. 그 외에도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절경들이 차례차례 재생되었다. 별다른 촬영기기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 막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눈을 떴다.

별로 볼 것은 없는 광경이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장소가 좋지 않았다. 사실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어딜 가도 그다지 볼 게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눈앞에 있는 잔을 들어, 입가로 다가가 남아있는 물을 전부 털어 마셨다. 살짝 미지근하다는 것을 빼고는 나름 물맛이 좋았다. 그래 봤자 생수겠지만, 목이 마를 때에는 그런 건 상관이 없었다. 땀이 나서 잠시 옆에 놓인 의자에 걸쳐놨던 옷가지를 집어 들고 자리를 뜨려다가, 문뜩 팁을 두고 가는 것을 잊었다. 옷을 다시 의자에 걸쳐놓고, 안주머니를 뒤적이다가 지갑을 찾았다. 얼마 정도면 충분할까. 잠시 고민을 하다, 이내 전혀 쓸데가 없는 고민이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쓴웃음을 지은 채 동전 한 닢을 꺼내어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옷가지를 챙겨 들고 부서진 벽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갈라진 콘크리트를 한발 한발 밟아나가며 계속 걸었다. 누가 보면 정처 없이 걷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분명한 목적지가 있고,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가고 있었다. 자동차라도 있다면 편하겠지만, 딱히 운전하는 법을 배운 적은 없었다. 게다가, 더는 시간이란 게 의미가 없다면 뭐하러 빠르게 이동하겠는가? 매 순간을 즐기며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미풍이라도 불어 한 줄기 땀을 식혀준다면 좋으련만, 그렇게 형편 좋게 바람이 불어주지는 않았다. 속으로 한탄하며 한 손을 들어 작게 부채질하였다. 전혀 땀이 식는 느낌이 들지 않아 괜히 힘만 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느낌이 드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느낌은 곧 사라졌다. 한순간이었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이미 이해하였다. 방문객이 다녀갔다. 전에도 만나본 적이 있었다. 같은 인물이라고는 단정 지을 수 없었지만, 같은 분류의 인물은 만났었다. 아마 작은 실망을 떠안고 다시금 여행길에 올랐을 것이었다. 속으로 앞으로의 여정에 행운을 빌며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계속해서 향했다.

*

목적지에 다다랐다. 얼마나 걸렸는가-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다리가 아팠지만 장기간 걸었기에 당연한 현상이었다. 지난 몇 시간 동안은 다리를 쉬지 못했기에, 안에 들어가 볼일을 보기 전에는 조금 쉬어도 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에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작은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향해 걸어가 손을 올렸다. 최첨단 전자식 자물쇠. 최신 암호학을 기반으로 한 뒤 직접 변칙 개체를 연구한 결과물을 이용한 것으로 보였다. 상당히 미학적으로 짜인 암호 체계에 나도 모르게 감탄을 했다. 곧 문이 열렸고, 안으로 들어갔다.

곳곳에 비극과 희극이 뒤섞인 최후가 널려있었다. 재단이란 이런 인간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었다. 문제가 있는 집단이어도, 그 기저에는 인류를 위한다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잠시, 그 희생을 바라보며 묵념을 하였다. 홀의 한쪽 벽면으로 가니 건물 지도가 나왔다. 휴게실은 3층에 있었다. 재단의 건물은 이런 상황에서도 비상 발전이나 수도 공급이 되니, 뭔가 시원한 것을 마시며 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한 줄기 희망이 있었다. 아주 약간 발걸음이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휴게실에 가까이 가니 인기척이 있었다.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휴게실로 갔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는 나를 올려다보는 눈이 보였다. 이런, 중상을 입은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시기를 놓쳤다. 나도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그저, 잠시만이지만 숨을 멈출 때까지 고통을 덜어줄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아까보다는 숨이 안정되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아직 작동하는 정수기에서 시원한 물을 두 잔 뽑아다가, 한 잔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다른 한 잔은 손으로 들어 그의 입에다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다행히도 사레가 들리지는 않았다.

짧다면 짧다고도, 길다면 길다고도 볼 수 있는 시간 동안 우리 둘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나를 보게 되어 놀랐다고 한다.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재단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 존재란 문서에서 짤막하게 볼 수 있는 글자의 행렬 정도에 불과했을 테니까. 생명의 불꽃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숨이 옅어졌다.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계는 원이라고. 그는 이해한 것 같았다. 마지막 숨을 내뱉은 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옅은 미소 한 줄기가 떠 있었다.

건물 앞의 화단에 몸을 묻어준 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충분히 쉬었다. 이제 하려던 일을 끝마쳐야 한다. 이곳이 마지막이다. 안타깝게도 전원은 공급되지만 엘리베이터는 장치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별수 없이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걸어온 것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다. 천천히, 한 걸음씩. 느닷없이 예전에 들었던 노래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곡을 흥얼거렸다.

There's a lady who's sure all that glitters is gold

And she's buying the stairway to heaven

When she gets there she knows, if the stores are all closed

With a word she can get what she came for

Ooh ooh, and she's buying the stairway to heaven

안타깝게도 이 계단의 끝은 천국이 아니었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가 철문을 열자, 건물의 옥상이 나왔다. 품에서 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계산이 옳다면, 몇 발자국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계산대로 간 뒤 품에서 기계 장치 하나를 꺼내 들었다. 처음에는 32개가 있었다. 이제는 이 하나가 남았다.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뒤, 몇 가지 버튼을 눌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났다. 남은 것은 때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 기다림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정확하게 계산을 했다면, 앞으로 5초 후가 될 것이었다.

5.

현실의 벽이 무너져내린다. 장치에 불이 들어왔다. 별일이 없다면 32개가 전부 들어왔을 것이다.

4.

물질이 소실된다. 남은 물질이라고는 나와 내 옷가지, 아직 작동하는 32개의 장치뿐이다.

3.

현실의 장막이 찢어발겨 진다. 무한계가 그 옷자락을 내보인다. 유한계가 소실되면서 균형이 깨져버린다.

2.

시간이 풀어지기 시작한다. 곧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소용없게 되어버리리라.

1.

32개의 장치가 일제히 터져나간다. 비현실의 에너지가 퍼져나간다. 아인이 후퇴한다. 아인 소프가 후퇴한다. 아인 소프 오르가 후퇴한다.

0.

곧 모든 것이 박살 난다.

공허의 속에 떠 있는 상태로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파괴. 그리고 재창조. 창조 후에는 필연적으로 파괴가 따르고, 그 뒤를 재창조가 따른다. 영원한 루프. 마치 뱀이 제 꼬리를 문 형상. 가루가 되어버렸던 현실의 장막이 수복된다. 무한계는 다시 그 모습을 감춘다. 균형이 수복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되감긴다. 나와 이야기하던 이가 땅에서 파내져, 휴게실에 눕혀지더니, 곧 몸을 뒤로 질질 밀면서 상처를 입었던 곳으로 되돌아간다. 곧 모든 건물이 사라지고, 평지가 되었다가,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변했다가, 용암의 바다로 변했다가, 사라진다. 공간이 서서히 줄어들고 압축된다. 이윽고 하나의 점이 되어, 다시 한 번 공허로 변한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잘 알고 있다. 과연 얼마나 이 일을 반복했던가. 내가 나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자각한 직후부터 끊임없이 해왔다. 언제나 세상의 끝을 봐 왔으며, 세상의 처음을 시작하였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Nobody would know. 나만이 알 것이다Nobody would know. 그렇다고 질리는 법은 없었다. 매번 달랐으니까. 머리에 쓰고 있는 중절모를 고쳐 쓴 뒤, 허공에 떠 있는 막대한 점에 다가가, 손가락을 가져다 댄다. 점을 건드리기 전에, 이 세계에 잠시 들렀던 여행자를 떠올린다. 과연 소녀는 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톡, 하고 점을 건드렸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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